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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가온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인류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실전에서의 핵무기사용
태평양 전쟁 당시 승기를 잡은 미국이 일제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해, 1945년에 일본의 도시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사건이다. 인류 역사상 살상 목적으로 원자폭탄이 사용된 최초이자 마지막 사례들이다. 이로 인해 조선인을 포함한 민간인과, 미군 등 연합군 포로 등을 포함한 수십만의 인명이 무차별적으로 희생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일제 항복을 이끌어내었다. 만약 이 때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고, 후속 작전인 몰락 작전이 시행되었을 경우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을 것이란 견해가 있다.
또한 이 당시에 원폭은 단순히 우라늄을 매개로 쓰는 엄청나게 강한 폭탄 정도로 인식되었으며 방사능의 위험성이 명확하게 해명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자국 군대에게조차 핵무기로 상륙지를 쓸어버리고 미군을 상륙시키자는 식의 작전이 실제로 입안되는 상황이었다. 방사능 차폐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다. 때문에 이를 투하하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한 고려가 되지 않은 감이 있다.
2. 상세
아시아, 태평양 일대에서 침략전쟁을 일으켜 수천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일본 제국 수뇌부는 소련을 중재자로 하는 화평공작을 펴고 있었는데 특히 불법적으로 침략해서 점령한 조선, 중국 동부, 만주, 사할린 전부에 대해서 포기하고 당장 항복하자는 고노에 후미마로 등의 강경파는 이미 1944년부터 항복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처음부터 홋카이도 등을 정복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사할린이나 만주 정도로 항복을 중개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미국을 위시로 하는 연합군은 정치적 상징성으로든 군사적 실리성으로든 일본 본토를 반드시 점령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화평공작은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다.
1945년 7월 말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었지만 일본은 국체 보존(=덴노제 유지)이 불투명한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여전히 소련의 중재를 통해 조약을 체결한다는 덧없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포츠담 선언을 묵살한다는 발표를 해버렸다. 이렇게 되자 최대한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원자폭탄 투하 외에는 다른 심판에 관한 선택의 여지가 사라지고 말았다.
원래 맨해튼 계획은 미국 단독계획이 아닌 미영 공동계획이었다. 다만 영국 국력이 한계에 달하면서 주도권이 완전히 미국에 넘어가고 미국의 지분이 매우 높아진 것이다. 미국, 영국 공동계획이 말해주듯 본래 핵공격 대상은 일본이 아니라 나치 독일 본토였다. 그러나 핵무기가 채 완성되기도 전에 나치 독일이 항복하고 유럽전이 종결되면서 독일에 대한 핵공격은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당시에는 핵무기를 매우 강한 폭탄정도로만 인식했지 방사능등의 위험성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진위여부는 의심스럽다.
당시 일본은 1억 총옥쇄를 외치며 결사적으로 저항하였고, 이 저항의 정점이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였다. 이 두 싸움에서 예상 밖의 피해를 입은 미국은 곧 있을 일본 본토 침공계획 몰락 작전에 앞서 일본을 압박할 새로운 수단으로써 핵공격을 선택한다. 여기에는 미국의 정치적 요인도 있었는데, 20억달러나 되는 거금이 들어간 맨하탄 프로젝트가 아무런 성과도 보여주지 못한다면, 군사비밀로서 그 사용처가 알려지지 않았던 그 20억을 둘러싼 정치적 후폭풍은 상당할 것이 명백했다. 이에 관련된 정치인들은 국민의 귀중한 혈세로 헛짓거리 안 했다는 것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즉, 선거는 다가오고 있는 마당에 앞선 상륙작전에서 유권자들의 아들들은 죽어나갔고, 그 와중에 전쟁을 한방에 끝낼 수 있는 무기를 20억달러나 들여서 완성했지만 비인도적이라서 쓰지 않았다는 건 유권자들에게 납득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이러한 미국 내의 상황에 대해, 존 키건은 다음과 같이 다소 섬뜩한 표현으로 묘사하였다.
"한여름에 미국 정부는 일본의 비타협성에 참을성을 잃고는, 굉장하고 장엄하고 뭐라고 항의할 수 없을 만큼 결정적인 방식으로 전쟁을 끝내고 싶은 유혹에 굴복하기 시작했다."- 존 키건, <2차 세계대전사>. p.856
2.1. 소련의 동태
독소전쟁이 끝나가면서 미국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 얄타 회담에서 소련에게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하도록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 그만큼 소련 몫도 늘어나니, 태평양에서 소련 영향을 줄이려면 전쟁을 빨리 끝내야 했다.
미국이 소련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독일이 항복하여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 소련은 한숨 돌린 상태에서 일본군은 이미 전쟁수행 능력 태반을 잃어서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미국이 두려워한 시나리오는 태평양을 건너야 하는 자신들과 달리 육로로 연결된 소련이 동북아를 자신들의 영향권 하에 놓는 일이었다. 일제의 항복 이후 소련과 미국이 경쟁하듯 점령지로 진주하여 한반도에서 마주쳐서 이를 갈라먹고 냉전 상태에 돌입한 것도 '소련보다 빨리 극동에 입성하기 위해 핵을 사용했다'고 하는 견해를 뒷받침한다.
2.2. 인명 피해
일본을 공격하면 상륙 시 너무 많은 피해가 날 것으로 예상했다.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일본을 점령하려면 미국인 100만 명과 영국인 50만 명이 전사할 것이라고 예상할 정도였고,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된 몰락 작전은 핵탄두 20여 발과 화학탄 사용까지 상정된 작전이라 너무나 잔혹하기도 했다.
2.3. 일본의 종전 묵살
사실은 이게 가장 큰 이유다. 당시 일본 상황은 항복하지 않으면 다 사망할 판이었다. 일본 해군은 궤멸 수준을 넘어 구레 군항 공습으로 사실상 소멸되었고 국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렸으며 자원도 없어서 군부에서 준비시키던 본토결전용 병기라는 것도 죽창, 활, 일본도 같은 냉병기 뿐이었다. (결호작전 문서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일본군은 투석기를 포병으로 편제하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었고 그나마 투석기와 죽창을 만들 나무마저도 바닥난 상태였다. 게다가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말이 본토결전이지 당시 일본은 나치 독일과는 다르게 본토에서조차 전쟁 속행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 독일도 본토 방어전 후반부에는 전력이 후달려서 소년병을 징집하는 등 별 짓 다 하긴 했다.
하지만 일본 지휘부와 기득권층은 자국상황이야 어떻든 오로지 항복할 때 덴노제 유지라는 조건을 얻어 내겠다며 자국민들을 반자이 어택과 카미카제와 옥쇄 등으로 갈아넣으며 허세를 부려서 조건부 항복을 얻어 내겠다는 포부를 내비친다. 이것이 1억 총옥쇄라고도 불리는 결호작전, 이런 일본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미국은 도대체 일본인은 '어떻게 된 미친 놈들인가?'라는 식의 연구도 했고 이런 연구의 대표적인 결과물이 바로 루스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이다.
핵무기의 경우 이미 대전 전부터 이론적으로 가능했고 전쟁 내내 개발한 신형무기를 사용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독일에게 사용할 생각이었지만 나치 독일은 이미 항복했다. 독일이 이미 항복한 것도 있지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비롯하여 나치 독일을 피해서 미국으로 도망친 유태인의 숫자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독일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유태인들의 반발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미국은 1945년 7월 30일에 작성한 '일본의 비밀무기: 자살'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일본군이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에 간다'며 자살공격을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고 일본인의 완전 소멸 또는 국가 존속이 위협받아야 일본이 항복한다고 결론내렸다. 이에 따라 맨해튼 프로젝트의 결과물, 핵 투하가 결정되었다.
2.3.1. 일본의 포츠담 선언 묵살
한편 미국은 이미 핵 투하를 결정했음에도 마지막으로 일본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일본 정부는 7월 28일 오후 4시에 이에 대한 입장을 밝혔는데, 스즈키 간타로 총리는 여기서 "포츠담 선언은 카이로 선언을 표현만 바꾸어 말한 것으로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묵살할 뿐이다. 우리는 전쟁을 지속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뿐이다."라고 발언했다.
일본말에서 묵살(黙殺)이라는 말은 2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무시한다(ignore)'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유보한다(no comment)'는 의미가 있다. 후대 일부 사람들은 이 묵살이라는 용어가 잘못 전해졌다고 일본 측을 옹호하지만 진실은 문맥상 전자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고, 일본에선 일본의 총리가 포츠담 선언을 무시했다고 보도되었다. 서방 언론 역시 Ignore를 보다 직접적인 거부(reject)라는 표현으로 약간 바꿔 보도했다. 당장 영국 BBC가 "일본이 연합군의 최후통첩을 거부했다(Japan formally rejected the Allied ultimatum)"고 보도했고, 7월 30일 뉴욕타임즈가 "일본이 연합국의 항복 촉구를 공식적으로 거부했다(Japan Officially Turns down Allied Surrender Ultimatum)"는 제목으로 보도했으며, 다른 언론들도 다 그랬다.
오역/일반사회 문서에서도 알 수 있는 이 중의적인 의미로 인해 '일본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악독한 귀축영미가 싸우자는 뜻으로 받아들여 무시무시한 폭탄을 평화로운 일본에 떨어뜨린...' 운운하는 일본의 피해자 행세에 해당하는 날조에 자주 이용된다. 일본 측에서는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 "전쟁을 지속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뿐이다"라고 하며 전쟁을 계속할 것임을 분명히 했고, 이를 본 연합국 측의 언론과 수뇌부 역시 "이거 일본 놈들은 항복할 생각이 없구나"라는 반응이었으니 오역이라고 볼 여지가 없다.
이 보도를 보고 완전히 빡친 트루먼 대통령은 8월 3일 원폭 투하를 지시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2.4. 미국 여론
그 당시 미국의 여론은 속 된 말로 눈이 뒤집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 독립 전쟁이후로는 한번도 공격당한 적 없는 미 본토가 공격당한 것만으로 매우 빡쳐있는 상태기도 했고, 나치 독일이 항복하고 세계적으로 종전 분위기가 강해진 상태에서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의 전투로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하자 미국 국내에선 일본 본토 상륙으로 큰 희생을 치르느니 해상봉쇄를 실시해 '그냥 다 굶겨 죽여버리자'는 여론도 해군을 중심으로 매우 강하게 대두될 지경이었다. 심지어 마침 추수철이 다가오고 있던 시점이라 일본의 모든 곡창지대에 제초제를 뿌려버리는 전략까지 있었을 정도였고. 이 가운데 해상 봉쇄는 항구에 기뢰 깔아두는 것으로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더구나 선전포고도 없이 이뤄졌던 진주만 공습 때문에 미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증오는 매우 심각해, 히로시마에 대한 핵폭격 당시에도 더 치명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투하 전에 사이렌을 울려서 시민들이 하늘을 보게 하고서 터뜨려서 폭발 섬광으로 인한 실명을 최대한 유도해 인명피해를 조금이라도 더 늘려보겠다고 하거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급 도시를 그대로 완파하지 못한다고 여겨 핵폭탄으로 소방 등의 도시 기능이 마비된 히로시마에 한 번 더 소이탄 폭격을 감행해 다 태워 흔적도 남기지 말자는 과격한 의견도 올라왔다. 그리고 이 과격한 의견이 취소된 건 원자폭탄 피해가 소이탄에 묻히면 원자폭탄의 정치적 상징성이 줄어든다는 다소 기묘한 이유였다. 반대로 정치적 상징성만 빼면 안 할 이유가 없다고 한 것이다
3.1. 에놀라 게이
우드바 헤이지 센터에 전시중인 에놀라 게이
에놀라 게이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B-29로 유명하다. 미 육군 항공대 509 혼성그룹 393 폭격비행대대 소속으로 기체번호 44-86292. 기체의 심볼은 노즈아트(Nose Art)로 새겨진 기수의 ENOLA GAY와 수직 미익(꼬리날개)의 R. 맨하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원자폭탄 Mk-1 코드네임 Little Boy의 모기(母機)이다.
1945년 8월 6일 아침 히로시마 상공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투하한 사실 덕분에 그 이름이 알려졌다. 그 작전을 위해 폭격기 방어용 회전기관총탑도 제거했다고 한다. 2013년에 복원되어 지금은 우드바 헤이지 센터에 전시되어있다.
나가사키에 팻 맨을 날린 비행기의 이름은 '복스카(Bockscar)'. 해당 B-29 기체의 기장인 프레드릭 복의 이름을 따왔다.
3.2. 가로챈 이름
이름의 유래는 본기의 기장 폴 티베츠 대령의 어머니 이름으로, 어린 시절 비행사가 되려 했던 그의 꿈을 북돋아줬던 자기 어머니 이름을 따 'ENOLA GAY'로 명명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여기에는 뒷이야기가 있다.
폴 티베츠는 부대장이었고 원래 이 기체 담당도 아니었다. 그러나 임무 직전에 지휘관으로서 꼬장 독단을 부려 원래 기장이었던 로버트 루이스를 빼버리고 히로시마 작전만 자신이 맡는 것으로 바꾸었다. 전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 로버트 루이스는 불쾌해했지만 계급이 깡패니까 참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아침에 루이스는 계류장에서 자신의 애기에 커다랗게 '에놀라 게이'라는 페인팅이 되어있는 모습을 발견하는데, 티베츠 스스로도 뒤가 켕겼던지 야음을 틈타 하룻밤 사이에 칠해놓은 것이었다. 이 일만큼은 루이스도 격분하여 티베츠에게 달려가 극력 항의했으나 묵살당했다. 티베츠가 이런 무리한 일을 저지른 이유는 물론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기체로써 자신과 어머니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폴 티베츠 본인은 에놀라 게이의 다른 승무원들과 마찬가지로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2005년 원폭 60주년을 맞아 '원폭은 필요했고 우리는 죄책감이 없다' 는 성명을 발표했고, 다음 해 티베츠 자신은 요미우리와의 인터뷰에서 "똑같은 상황이 된다면 똑같이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트라우마를 이겨내기 위한 방어기제로 그런 생각을 가진 것 아닐까 싶을 수 있지만 티베츠는 전역 후에 원폭 투하를 흉내내 버섯구름을 재현하는 에어쇼를 벌인 적도 있으며 이 때문에 미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게 공식 사과까지 했다. 애초에 선빵을 누가 먼저 쳤는데 죄책감 가질 이유가 있나?
3.3. 위험한 명령불복종
원래 작전상으로 리틀 보이는 기폭이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기체에 싣고 이륙하도록 되어있었다. 일단 리틀보이는 우라늄 기반의 원자폭탄이며, 우라늄이 물에 들어가면 물의 감속재, 반사재로서의 작용으로 인해 임계질량보다 작은 질량으로도 연쇄반응이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으로 가는 도중 추락하게 된다면 임계사고를 막기 위해 폭탄을 분해해 뿔뿔이 흩어놓도록 지침이 내려져 있었지만 지시한 사람도 그게 가능한 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리틀 보이 자체도 4.5톤으로 B-29의 적재 한계인 9톤의 반이나 달할 정도로 매우 무거웠던 데다가 주둔지의 지질 때문에 활주로 노면 상태도 엉망이었기 때문에 이륙이 지극히 불안정했다. 자칫 이륙하다 추락하면 끝장이었다. 게다가 원자폭탄이 유폭할 경우 해당 비행장과 부대원 전원, 좀 넓게 잡으면 섬 전체가 원자폭탄의 첫 희생자로 기록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Captain_parsons.jpg
이런 이유로 인해 폭탄 담당 승무원이었던 윌리엄 파슨스 해군 대령(위 사진의 인물)은 명령을 어기기로 결심했다. 작전 며칠 전부터 그는 무단으로 원자폭탄 분해·조립을 반복했다분해는 조립의 역순. 이륙한 다음에 공중에서 기폭 가능 상태로 조립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공중에서 조립하겠다는 것도, 지상에서 연습하겠다는 것도 위험천만한 명령불복종이었지만, 대놓고 연습에 매진하는 상황에도 문제삼는 사람은 기지에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타임-라이프 월드워2에 따르자면, 파슨스가 이륙 직전까지 분해 조립 연습에 열중하다가 손을 다치자 한 장성이 파슨스에게 "장갑이 필요하겠군! 내 장갑을 가져가게. 얇고 좋은 장갑이라네." 라고 하면서 자신의 가죽장갑을 내주었다고 한다. 그만큼 무기에 관한 파슨스의 뛰어난 재능은 인정을 받고 있었기에 원래의 폭탄 담당 승무원을 대신해 히로시마 임무에 발탁된 것이기도 했다.
3.4. 경고 사격만 한다면?
그래도 원자폭탄을 실전에 민간인을 대상으로 쓰는 건 너무한다는 의견도 있었던 게 사실이고 그래서 일본 정부에 사전 경고와 더불어 성층권 정도의 고공에서 원자폭탄을 터뜨려서 위력을 시연해 보이거나 인구밀도가 희박한 마을에 투하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줄리어스 오펜하이머의 "성층권에서 거대한 핵불꽃이 터지고 실제 피해는 미미하다면 과연 일본 지도부에서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는 의견처럼 효과 자체가 미지수여서 묻혀버렸다.
그리고 실제로 고공 폭파시켜서 그 위력을 눈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공포심을 유발한다는 것은 제정신 박힌 사람에게나 효과가 있는 것이지, 눈이 뒤집혀 반자이 돌격이나 해댈 정도로 나라 전체가 미쳐 돌아갔던 일본에게 효과가 있을 지는 미지수였다. 거기에 당시 그 동네의 사고방식으론 그 어마어마한 폭탄이 공중에서 번쩍 하는 폭죽으로 끝나다면 십중팔구는 덴노의 은총따위로 절묘하게 선동하면서 더더욱 자폭 공격에 열을 올렸을지도 모른다.
그 외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곳을 미리 예고해서 민간인이 대피하게 함으로써 실제 피해는 줄이면서 심리적 효과를 더 높이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혹시 원자폭탄이 불발되면 차후 미국이 하는 모든 제안이 일본 대본영에게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고, 일본인들이 연합군 포로를 히로시마에 끌어다놓고 인간 방패로 삼으면 어쩔 거냐는 의견도 나와서 기각되었다. 원래 미 육군 항공대와 영국 공군은 독일을 폭격하던 당시 목표가 된 도시에 아군 포로가 있음이 확인됐더라도 거리낌 없이 폭격했는데, 아군 포로 희생을 막으려고 폭격을 중단하면 앞서 말했듯이 중요 지점마다 연합국 포로를 묶어놓아서 인간 방패로 쓸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이런 조치는 일단 폭격을 당하는 연합국 포로에게는 가혹하기 그지없었고 유명한 소설가인 커트 보네거트는 악명 높은 드레스덴에서 아군의 폭격을 당한 경험으로 <제5도살장>이라는 소설을 썼다. 게다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히로시마에는 미군 포로가 20여 명 정도 있었다. 전후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그 중 시체가 남아있는 사람은 단 3명. 나머지는 말 그대로 원자폭탄에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 여명의 눈동자 원작에서는 이런 것을 감안해서 OSS에서 윤여옥을 보내서 포로수용소 위치를 밝히는 작전을 수행한다.
B-29에 의해 나가사키에 떨어진 폭탄은 '팻 맨'(첫 번째 사진),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은 '리틀 보이',(두 번째 사진) 라는 이명이 붙어있었다. 리틀보이의 경우는 우라늄 235를 이용해서 만들어졌고 팻맨의 경우는 플루토늄을 이용해서 만들어졌다.
양자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외형 역시 그에 따라 달라졌다. 리틀 보이는 2개의 우라늄 덩어리를 충돌시키는 포신형 구조를 갖고 있었지만 팻 맨은 중심부를 비우고 그 속에 중성자원을 넣은 플루토늄 구체를 폭발 렌즈를 이용, 모든 방향에서 압축시켜 폭발을 일으키도록 되어 있었다. 금속을 누른다고 압축이 될까 싶겠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물리적으로 직접 쥐어짜는게 아니라 내부 폭약의 충격파를 이용해 알루미늄에 투사하고 투사한 충격파를 받은 우라늄-플루토늄 복합 코어와 중성자 점화기가 일련의 과정을 거쳐 폭발하는 것이다. 별다른 가공 없이 바로 주조해낸 플루토늄239라면 구멍이 송송 난 현무암같은 조직을 보인다.
히로시마는 일본에서 (인구 기준으로) 8번째로 큰 도시(인구 35만-1944년 2월 당시)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제2차 세계 대전의 막바지까지 폭격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 <맨발의 겐>에 표현된 것처럼 호위기들이 옆동네 폭격을 지원하러 기총소사를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와 옆동네 구레도 초토화가 되는 와중에 구레 군항의 보급창이라 할 수 있는 히로시마는 너무나도 조용했다.
히로시마 외에도 나가사키, 코쿠라(지금의 기타큐슈), 니가타, 교토가 이런 상태였다. 이 중 교토를 제외하고는 바로 원자폭탄의 표적으로 결정되었다.
여기서 교토가 빠진 것은 육군 장관이었던 스팀슨이 교토에는 원폭을 투하하지 말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스팀슨이 신혼여행을 갔던 도시가 교토였는데, 여기서 일본 문화에 감명을 받은 스팀슨은 교토를 잿더미로 만든다는 것이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신혼여행의 추억이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 꺼림칙하기도 해서 교토를 원폭 투하명단에서 빼자고 했다. 물론 공식석상에서는 '일본 문화의 중심지인 교토에 원폭을 투하하면 일본 민심이 걷잡을 수 없이 동요해 전후 처리 과정이 힘들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아무튼 교토가 원폭리스트에서 빠지자 관련 인사들이 "여러분 장관님이 교토는 공격하지 말자는데요?" "그럼 명단에서 교토가 빠졌으니 땜빵으로 다른 도시 하나 채워넣어" "그럼 어느 도시를 리스트에 올리는 게 좋을까요?" "나가사키가 괜찮은 거 같은데?" 이와 같은 장관 말씀 하나로 교토와 나가사키의 운명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그뿐 아니라 원폭투하 이전에 일본 본토 공습을 담당하던 육군항공대 제21폭격기사령부 커티스 르메이 소장은 교토야말로 최고의 목표인데 도대체 왜 못 때리게 하냐며 격렬한 반응을 보였을 정도다. 버드 미사일을 쏘게 해 줘
1945년 8월 6일 아침에 정찰기 3대가 히로시마 상공을 훑어보았고 히로시마에 사는 사람들은 폭격인 줄 알고 급히 대피했다. 물론 피해는 없었고 사람들은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몇 시간 뒤 B-29 폭격기 하나가 단독으로 날아왔는데 그것을 본 사람들은 '늘 오던 기상 정찰용 비행기겠거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처음에는 방공호로 대피했지만 정찰기로 생각하여 많은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오는 바람에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리틀 보이는 바람 탓에 원래 조준점이었던 T 모양의 아이오이 다리에서 약 240m 정도 빗나가 시마 외과병원의 600m 상공에서 폭발했다. 거기다 TNT가 제대로 안 터져 원래보다 1/10의 위력으로 터진 것임에도 어마어마한 피해가 발생되었다. 만약 TNT가 정상폭발을 했으면 히로시마라는 지역자체가 증발하였을 것이다.
폭탄이 터지는 순간 히로시마 시민들은 엄청나게 밝은 빛을 목격했다. 이 빛이 얼마나 강한지 생존자들은 '순수한 흰색'이라고 묘사하고 있으며 손으로 눈을 가리니 '자신의 뼈'가 보였다고 한다. 인간의 살은 어느정도 빛을 투과시키는데, 가시광선만 해도 자기 뼈가 보일 정도로 강력했다는 얘기. 직접 쳐다본 사람들은 눈이 멀어버리거나 심지어 안구가 융해되었다. 수억 도에 달하는 엄청나게 뜨거운 화구가 공중에 생기고, 폭심지 근처의 온도는 열복사로 약 3,000~4,000도가 넘었다.(태양의 표면온도가 약 6,000도이다.) 폭심지 근처는 모든 것이 문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계단에 앉아있던 사람이 증발하기 직전에 열선으로 인해 계단에 찍힌 검은 흔적(원폭 그림자)은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뒤이어 잇따라 충격파로 인하여 최대 340m/s = 1,224km/h = 음속에 달하는 엄청난 후폭풍이 주변 1.5km 내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인류가 기록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한 역사상 최악의 토네이도의 중심풍속은 불과 134.4m/s였다.(이 정도만 해도 어지간한 대도시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들이 거대한 돌무더기로 변해버린다. 이것은 토네이도의 경우이며 핵폭발의 경우 토네이도보다 에너지가 훨씬 빠르게 소멸되기 때문에 완전히 동일한건 아니다.) 이 범위 안에 있던 건물들은 매우 튼튼하게 지은 건물을 제외하고 전부 완전히 붕괴되었다.
단 1발의 폭탄이 히로시마를 완벽에 가깝게 파괴하였다. 그 때가 하필 출근 시간이었기에 피해는 더 컸다. 일례로 폭심지에서 불과 몇 백m 떨어진 은행에서는 일찍 출근해 두꺼운 석조건물의 가장 안쪽에 들어가 있었던 말단 여직원 2명만 살아남았고 출근 중이던 다른 직원들은 모두 절명했다. 당시 폭심지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다고 알려진 생존자는 노무라 에이조라는 남성인데, 폭심지에서 불과 17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고 한다. 콘크리트 빌딩 지하에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히로시마 시 전체는 열로 가득 찼고, 잿빛 대기가 태양마저 가려 사방이 밤처럼 어두운 가운데 사방팔방이 불지옥으로 변한 상태였다. 불교의 지옥도나 단테의 지옥에서나 나올 법한, 현실에 나타난 문자 그대로의 생지옥이었다. 높은 열로 인해 기온이 치솟은 히로시마의 대기는 지극히 건조해져, 도시 전체가 초고온의 건식 사우나 같은 상태가 되었고, 사방에 널린 죽지 않은 부상자들의 신음소리, 비명소리와 함께 물을 달라는 절규가 끊이지 않았다. 피부가 녹아내린 채 물을 찾으며 방황하는 사람들, 온몸이 불타며 다리 밑으로 떨어져 물에 떨어진 불덩이처럼 산산조각나는 사람 모습 등, 끔찍한 참상을 전하는 목격담은 셀 수 없다.
몇 시간 뒤 증발한 수분이 모였던 상공으로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검은 비였다. 원자폭탄으로 모든 것이 타버리고 남은 재가 방사성 분진으로 올라갔다가 비에 섞여 내려온 것이었다. 이 시커먼 빗물은 고농도의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있었지만 타는 듯한 갈증에 사람들은 입을 벌리고 빗물을 받아 마셨다. 예외도 많았지만 이 희생자들은 검은 비에 노출된 만큼 더 일찍 죽었다.
이 폭격으로 인해 의사와 간호사들도 무려 90% 이상이 죽거나 다쳤다. 도시 주변부에서 살아남은 의사들은 고군분투했으나 피해상황은 초월적이었다. 끝없이 넘쳐나는 중환자들로 트리아지 같은 분류는 무의미했다. 피부가 녹아내린 환자의 화상치료만 하더라도 약품은 턱없이 부족했다. 방사선 화상은 DNA 자체의 파괴를 일으켜 조직 재생이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방사능은 다른 조직도 파괴하여 신체 내외에서 출혈을 일으키고(혈관세포 파괴) 구토, 설사(위장관세포 파괴)를 끊임없이 하게 된다. 영양 흡수가 안 되어 아무리 먹어도 영양실조에 걸려 죽게 된다. 다량의 방사선에 피폭된 부상자들은 갖가지 끔찍한 증상에 고통을 호소하며 며칠만에 죽어갔다. 히로시마의 의사들은 뼈저린 무력감으로 고통 속에 죽어가는 환자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일부 의사들은 비타민 A을 주사하기도 하였는데 "결과는 끔찍했다. 주삿바늘이 꽂힌 곳부터 살이 썩어 나가더니 그런 다음에는 예외 없이 죽는 것이었다."
14만명의 희생자 중 군인이 2만 명이었다. 2총군 대부분이 죽었다. 이 중 상당수가 원폭에서 800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히로시마 성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10명 이상의 미군 포로들도 대부분 죽었다. 증언에 따르면 몇몇 포로는 살아남았는데 분노한 일본인 생존자들에 의해서 맞아죽었다는 증언도 있고 일본인 의사로부터 치료를 거부받아 죽었다는 증언도 있다.
폭탄이 터진 직후 에놀라 게이의 승무원들은 방사선의 맛을 느꼈다고 한다. 납 맛이었다고 한다. 체르노빌 사고 당시 주위를 시찰하던 조종사들과 방사성 폐기물을 치우던 인부들도 이러한 금속 맛을 경험했다.
5.1. 일본의 반응
유례가 없는 참혹한 공격이 가해진 이후 일본 군부가 보인 반응은 현실부정이었다. 일본 이화학연구소의 니시나 요시오 박사가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이 원자폭탄임을 확인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군부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히로시마가 괴멸하면서 히로시마 안의 보고체계는 아예 증발해버렸고 피해보고는 외곽 주변의 관찰부터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의 피해보고는 원거리에서의 열풍·열복사 등에 관한 것으로 "두껍게 입은 면옷으로 폭발 당시의 열기는 막을 수 있었다" 라든가 하는, 아직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못한 것들이었다. 그동안 혹독했던 미군의 대공습을 뛰어넘는 엄청난 물건이라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부족한 정보를 모아도 해당 폭탄이 평범한 재래식 폭탄은 아니라는 점은 아무리 맛이 간 일본군이라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 정보부에서는 그것이 원폭이라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상층부가 현실도피&인지부조화를 일으키는 바람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지도부는 항복과 관련된 적극적인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다.
사실 일본에게 항복의지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이미 소련을 통한 대미 강화협상은 진행중이었고 국체의 온존 및 약간은 온건한 방식으로의 강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당연하지만 대일 참전을 생각하던 소련으로서는 그걸 들어줄 리가 없었다. 히로시마 이후 군부와 정부가 모두 항복에 동의하고 있는 상황에서 덴노제를 유지한다는 조건만 붙이고 싹싹 빌어보자는 화평파와, 연합군의 일본 점령을 최소한도로 단기간에 끝마쳐야 하며 무장 해제와 전범 재판을 일본이 직접 할 것이라는 조건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강경파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항복은 지체되었고, 결국 미국은 일정에 따라 한 발을 더 투하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 화평파와 강경파의 갈등 자체가 이미 늦었던 것이 화평파가 입장을 확고히 정리한 것이 8월 7일 저녁이었는데, 군부가 꾸물거리는 바람에 항복을 결정할 최고전쟁지도회의가 8월 8일 열리지 못하고 8월 9일, 즉 나가사키 원폭 투하일에서야 열렸다. 즉 이들이 무슨 결정을 내리건 일본은 히로시마에 대한 대응 자체가 이미 너무 늦었던 것이다. 더구나 8월 9일 회의 중에 두 번째 핵이 떨어질 때까지도 일본 지도부는 미국에게 더 이상 핵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 군부는 미국이 7월에 뉴멕시코에서 핵실험에 성공한 뒤 v600번대 콜 사인을 가진 소규모의 B-29부대가 티니안 섬에 배속되었다는 정보를 감청으로 알고 있었다. 단지 콜 사인만을 알 수 있었고 그 부대가 특수한 임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아냈지만, 원자폭탄 투하 임무를 띠고 있는지는 몰랐다. 원폭 투하 당일 에놀라 게이가 출격한 사실도 알고 있었고, 에놀라 게이가 히로시마 상공에 접근하기 1시간 전에 기상정찰을 위한 또 다른 B-29가 히로시마 상공을 정찰한 것도 알고 있었으나, 대피경보를 내리지 않았다. 원자폭탄의 역사를 다룬 그래픽 노블 트리니티(서해문집 출판)에서는 일본의 대공 부대는 대규모 폭격에 너무 익숙해져서 비행기 몇 대에 걱정할 여유가 없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팻 맨을 싣고 이륙한 B-29인 '박스카(Bockscar)(기체번호 44-27297)'는 에놀라 게이와 동일한 509 혼성그룹 393 폭격비행대대 소속으로 추가적인 원자폭탄 투하를 위해 후쿠오카현 코쿠라(小倉)로 날아갔지만 구름이 잔뜩 껴서 복스카의 승무원들은 폭격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다.
원자폭탄은 제조하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며 이 팻 맨은 당시 미국이 가진 유일한 핵폭탄이라 가급적이면 정확히 조준해서 가장 피해가 크도록 폭격을 해야 했는데, 설상가상으로 초계기와 정보 수집기의 삽질로 투하 지점, 그러니까 코쿠라 시의 사진을 찍는데 실패해 버리면서 폭격기는 어쩔 수 없이 육안으로 확인하고 투하하는 방식으로 합의를 보고 작전 시간에 맞추어 코쿠라 시 상공으로 진입했다. 문제는 그러나 아무리 일본군이 개막장 바보집단이라지만 이미 원폭을 한 차례 맞은 상황이라 대공방어에 필사적이었던 것. 물론 일본군의 구식 전투기나 고사포 등으로 미군 폭격기를 떨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방해 없이도 육안이라 힘든 판에, 계속해서 일본군이 추격해 오는 통에 투하 위치를 잡지 못하고 회피 비행만을 약 1시간 동안 반복하게 되었다.
결국 복스카는 돌아가는 길목에 있는 나가사키에 떨구기로 하고 기수를 돌렸지만 나가사키 역시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연료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기에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고 이대로라면 원자폭탄의 무게 때문에 다시 들고 갈 수는 없었다. 결국, 레이더 조준으로 폭탄을 투하하거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폭탄을 대충 버려야 할 상황이었지만, 30초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구름 사이로 나가사키 시가지가 보일 정도로 큰 맑은 구역이 나타났다.
이 때 당시 야하타(야와타) 제철소에서 직원이 콜타르를 태워 연기를 내서 시계를 어둡게 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래서 고쿠라가 가려졌고 결과적으로 나가사키가 희생됐다는 것이다. 영어 기사
일본 제국 군부는 원자폭탄을 탑재한 복스카가 규슈를 향해 접근 중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히로시마와 같은 V600번대 콜 사인을 사용하는 B-29가 출격했으며 정보부에서는 그것이 원폭이라 판단하여 보고했지만 당시 상층부가 소련 참전으로 인한 긴급회의 중이어서 무시되었다. 때문에 이번에도 공습경보를 내리지 않았다.
1945년 8월 9일 11시 2분 나가사키에도 버섯구름이 피어올랐고, 4만에서 7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그날 사망했다. 플루토늄 폭탄 팻 맨의 위력은 21kt로 히로시마에 터진 우라늄 재질의 16kt짜리 리틀 보이보다도 컸는데 피해는 히로시마에 비해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고 완전 평야지대인 히로시마에 비해 산지투성이라, 폭심지에서 발생하는 열선과 폭풍이 산과 계곡에 막혀 인명 피해가 히로시마의 1/4 정도로 더 낮았다. 게다가 조준이 어려웠기에 원래 노렸던 투하지점에서 4km 이상 빗나간 것도 겹쳐서 위력이 그만큼 줄어든 것이다.
이 폭격 이후 미국은 소련 참전으로 인한 성과 파악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천명한 포츠담 선언 이행을 다시 한번 촉구하기 위해서 당분간 원폭 투하를 중지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폭격하고 싶어도 폭탄이 없었다. 당시 플루토늄 폭탄용 폭축렌즈는 폭약설계담당자인 키샤코프스키가 수작업으로 만들고 있었고 새 폭탄을 위한 플루토늄 추출은 진행 중이었으며, 플루토늄 폭탄의 필수품인 핵기폭기(베릴륨과 폴로늄)도 예비가 없었다. 우라늄 폭탄은 아예 3~4개월 이상 추가 농축 작업을 해야 폭탄을 만들 수 있는데 생산시설에 기계적 문제가 생겨 생산중지 상태였다. 이 때문에 3번째 폭탄은 플루토늄으로, 그나마도 빨라야 8월 20일에야 준비가 가능했다. 첫 핵폭격 후 10개월 뒤까지도 미국의 가용 원자폭탄은 7발에 머물렀으며 플루토늄은 9발분 있었다. 22개월 뒤 시점에도 가용 폭탄은 13발에 불과했다.
6.1. 일본의 두 번째 반응
소식을 접한 소련은 자기 몫을 챙기기 위해 잽싸게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격하게 된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소련의 일본 공격 준비가 양과 질에서 대단히 우수했고 그 준비기간이 결코 하루 이틀로 끝날 수준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미국이 소련에게 일본으로의 참전을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었고, 참전시점까지 못을 박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소련은 약속에 따라 유럽전선에서 수십만의 병력과 수만대의 장비를 지구 반대편의 동아시아 전선까지 가져왔고, 참전 약속일의 마지막 날에 전격침공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소련군이 준비한 노력만큼 이미 잡병이 된 수십만 일본 관동군은 단 며칠만에 박살나 한반도까지 밀려났고 일단 학자들에 따라서 원폭과 소련 참전 중 과연 어느 것이 항복에 더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일단 다이쇼 이래로 제국의 절대 방위선인 북방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상황에 내지에서도 그러한 공격을 당하면 일단 국체보전만이라도 한 상태에서 항복을 고려하는 건 당연한 일. 그러나 당시 일본의 전선은 이미 10개에 육박했고 관동군은 더 이상 예전의 관동군이 아니었다. 모든 정예관동군 사단들은 본토방위와 남방작전으로 빠진 상태였다. 반면에 소련은 오직 일본을 겨냥해서 내려왔고 사실상 1주일 남기고 다급하게 내려왔다
항복 내용은 1945년 8월 15일 정오, 이른바 옥음방송이라 하는 쇼와 덴노의 녹음된 목소리를 직접 방송하였다. 일본국민들은 덴노를 신적 존재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옥음방송은 중계기를 통해 방송되는 방식이라 라디오 음성은 깔끔하지 않았다. 또 그 내용이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면 알아듣기가 매우 힘든 일본어 고문어체로 작성되어있었다. 옥음방송 문서를 참조. 때문에 이게 처음 방송될 때엔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를 몰랐다고 한다. 그 후 방송요원이 일상언어(일본어 구어체)로 해석해 재차 방송하여, 마침내 항복 사실이 대중에 알려질 수 있었다.
그나마 결정된 항복조차도 청년 장교들의 반발로 쿠데타가 발생해 사단장이 총격을 당해 사망하고 일왕이 거주하는 궁성이 반란군에 의해 점령, 쑥대밭이 되는 등, 히로히토고 나발이고 화평파를 싸그리 잡아 죽이려고 시도한 궁성사건이 발생했다.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은 자들도 자결하거나 카미카제 공격에 참가하는 식으로 반항했고, 그 와중에서 항복 선언이 발표되게 된다. 때문에 항복을 결정한 날이 일본의 가장 길었던 날로도 불린다.
당시 필리핀에서 미군 포로 생활을 하던 작가 오오카 쇼헤이는 소련의 관동군 공격과 스웨덴을 통한 일본의 항복 요구 타전을 발표한 8월 10일을 '포로들에게 사실상의 전쟁이 끝난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사카이 사부로의 자서전에 의하면 비슷한 시기에 항복이 장교들에게 알려졌다. 즉 10일부터 15일까지 죽은 사람들은 무의미하게 죽은 것이고, 왜 항복 요구 타전 후 대국민 발표를 늦게 했는지 한탄하고 있다.
7. 일본 외의 반응
지금과 달리 당시엔 핵무기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으므로, 사람들은 피해보다 전쟁이 끝난다는 사실에 좋아했다.
7.1. 미국
"핵폭탄은 위대한 결정이 아니었다. 그건 그저 정의의 무기고에 있는 강력한 무기 중 하나였다."
해리 S. 트루먼
일본에서 나온 작품에는 핵폭탄 투하 소식에 미군 장병들이 죄책감을 갖고 숙연해하는 장면이 가끔 나온다. 그러나 정작 당시 미군 장병들은 핵폭탄으로 전쟁을 끝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기뻐서 전쟁을 끝내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각하께 '너무 감사해서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려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한다.
반자이 어택이나 카미카제 등 일본군의 미친 짓들을 보며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던 미군 장병들은 지긋지긋한 전쟁을 빨리 끝내준 걸 반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국 본토에서도 딱히 동정심이나 죄책감 같은 건 가지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거면 핵무기 자체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은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또한 당시 핵의 정확한 위력과 후폭풍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원폭 피해자 등을 담은 끔찍한 사진들은 검열되었다.
또 프로파간다와 국민적 인식 역시 한몫 했는데, 제2차 세계 대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그래도 동양의 선진국이라는 인식이었지만 일단 진주만 공습으로 본토가 사전 통보 없이 공격당한 분노가 큰 데다가, 반자이 어택처럼 인명 따윈 장식으로 여기는 일본군의 미친 짓거리 등등 이해할 수 없는 문화 역시 적개심의 대상이 되었다. 승리의 영광으로 우쭐거리던 유럽 전선 폭격과는 다른 감정이 들었던 것이다.
티베츠를 포함해 조종사 상당수는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았으며, 전쟁을 끝내기 위해 선택한 정당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199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50주기를 맞이하여 당시 MBC에서 에놀라 게이를 몰던 조종사(티베츠는 아니었다) 중 하나를 찾아가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나는 전쟁에서 일본에 의해서 죽을 뻔한 수백 만의 연합국 국민들을 구했습니다. 조금도 원폭 투하에 대하여 죄책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일본이 원폭을 가졌더라면 그들은 더했을 겁니다."라 언급했다.
• 기장 폴 티베츠: 1975년 인터뷰에서 "나는 맡은 바 임무를 완벽히 수행한 것에 대해 자랑스럽습니다. 매일 밤마다 잠을 잘 잡니다."라고 했으며 2005년에는 "만약 같은 상황이 또다시 내게 주어진다면 똑같이 할 것입니다."라고 발언했다. 또 2005년 BBC다큐멘터리에서는 "나는 맡은 바 임무를 다했으며 그것이 성공적으로 끝나 다행스럽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2007년 사망하기 전의 마지막 인터뷰에서도 "올바른 일을 하기 위해서" 라고 말했다.
• 폭격수 토마스 W. 페러비: 폴 티베츠처럼 폭탄을 투하한 일에 대해 결코 후회한 적이 없다.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것이) 해야 될 일이었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 레이더 담당 장교 제이콥 베서: "내가 한 일에 대해 슬퍼하거나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진주만과 일본이 한 잔학 행위들을 기억합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 항법사 시어도어 J. 밴 커크: 똑같은 상황이 다시 주어질 경우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네, 저는 다시 할 겁니다. 우리는 5년간 전쟁했고 항복하지도 패배를 받아들이지도 않는 적과 싸웠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사람은 나중에 비키니섬 핵실험에도 참가한 바 있다.
• 부조종사 로버트 A. 루이스: 폭탄 투하시 "맙소사,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겁니까?"라고 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도 죽을 때까지 그의 임무를 후회한 적은 없었다. 때문에 저 발언은 '우와, 우리가 방금 떨군 게 저렇게 센 거였어?' 같은 뉘앙스로 폭탄의 엄청난 위력에 놀란 것으로는 볼 수 있을지라도 후회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 부 항공 기관사 로버트 슈머드: "어느 사람의 다리에 괴저가 생겨, 반드시 절단해야만 한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그 다리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그 괴저(일본)는 세계에서 반드시 제거되어야 하는 암 덩어리였습니다."라고 1960년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 유일하게 죄책감을 보였다고 알려진 것은, 기상정찰 임무를 맡고 에놀라 게이보다 1시간 먼저 비행에 나섰던 스트레이트 플러쉬의 클로드 이덜리 소령이었다. 그는 한두 번 자살시도한 적도 있었고 직접 히로시마에 사과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의 사과 편지를 읽자마자 불쾌한 내색을 보이며 가짜라고 여겨 무시하고 사과 편지를 불태워버렸고, 나중에는 위조죄로 감옥에 가기도 하고 정신병원에 수감되기도 했다.
하지만 기자 겸 작가 William Bradford Huie는 그의 사죄의 진위성이 의심스럽다고 밝혔는데, 이유로 전후 이덜리 소령이 몇 년간 핵폭탄 투하 훈련을 계속 수행했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때문에 프로파간다를 위해 반핵주의자들이 날조하고, 이덜리 소령 자신은 명성을 얻거나 주의를 끌고 싶어서 그랬다고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기장인 폴 티베츠는 그에 대해 "폭탄이 떨어질 때는 거기 있지도 않았으면서 무슨 죄책감을 느낀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 한편 SF 소설 <리보위츠를 위한 찬송>의 저자인 SF작가 월터 M. 밀러 주니어는 이탈리아 몬테카시노 성 베네딕토회 수도원 폭격에 폭격기 승무원으로 참전했다가 죄책감에 시달려 결국 1996년에 자살했다. 그는 전쟁 후인 1947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도 했다. 히로시마와 달리 베네딕토회 수도원 폭격을 비롯한 유럽 폭격 당시 연합군 조종사들은 죄책감을 성토하는 게 훨씬 더 많았다. 연합군 측의 미국인 군인들에게 가톨릭 등 미국 문화와 정서적으로 가까운 이들을 공격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이 유럽 전선의 경우 미국 본토가 독일에게 공격받지 않아서 병사들이 참전에 의문감을 가지면서도 명령이란 이유로 나갔기에 유럽의 오랜 역사를 가진 문화 유적과 유산을 재로 만든 걸 비난하거나 죄책감을 드러내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원폭 투하에 대한 반응에는 인종적 차별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는 비판도 있다.
7.2. 한국
당시의 1차 사료나 해방 직후의 반응을 보면, 전시에 정보 얻는 게 어려운 식민지의 한국인들은 '뭔가 엄청 쎈 폭탄이 일본 본토에 떨어졌다' 정도로만 알고 있었고 당연히 기뻐했다. 특히 35년 동안 일본의 식민 지배를 당한 만큼 이는 조국의 '광복이 온다는 신호탄'이기도 하였고, 일각에서는 일본의 개짓거리에 하늘이 대노하여 '천벌(天罰)'을 받은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다만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던 일부 재외 독립운동가들은 원폭 투하에 의한, 작전 계획보다 빨랐던 항복 선언에 대해 통탄했다. 김구의 백범일지에 그 대목이 드러나 있다. 광복 이후 한국의 지식인들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이 한국의 독립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부국강병뿐만 아니라 국가의 독립에 있어서도 과학 기술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 과학 기술에 관한 도구주의적 인식이 강화되었다.
조병옥의 경우는 일제의 탄압으로 시골에 요양을 살았던 1942년에, 이미 미국에서 원폭을 개발해서 떨어뜨릴 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몰래 알려주었다고 회고록에 적을 정도였으나, 회고록에서 자주 나오는 거짓말이다. 원폭 개발은 당시 미국에서도 초극비 프로젝트였으며 심지어 해리 S. 트루먼은 부통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취임시까지 원폭 개발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동남아시아, 특히 싱가포르에선 축복의 불꽃이라고 대단히 기뻐했다. 4년 동안 일본에게 지배당하면서 중국계 사람들이 학살당하던 지옥을 겪었기 때문이다.
1994년 개최된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은 원폭에서 완전히 회생한 히로시마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상징적인 측면도 있었는데, 타국(아시아) 선수들과 스탭들의 공식 일정의 관광차 원폭 희생자 위령 기념물에 가는 일정이 있어서 마찰을 겪었다. 원폭 희생자를 기리는 어쩌구 하는 일본인 가이드의 말에 "지들이 전쟁을 일으켜 놓고 누굴 기리라는 거야!"라면서 타국 선수들과 스탭들이 발끈해서 분위기가 극도로 험악해졌다고.
2005년 아우슈비츠에서 홀로코스트 추모관 야드 바셈 박물관의 개막식에 원폭을 운운하며 피해자 그룹에 참가하려다가 박물관 측에서 나치라는 비난을 들었다라는 이야기가 웹에 퍼져있는데, 사실 이스라엘 현지신문|Ynetnews에서의 외교부 대표의 말에 따르면 일본의 국가원수가 초대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주 이스라엘 일본 대사관의 직원들은 초청되었다) '원폭을 홀로코스트에 비견하려 할까봐' 초대되지 않았다는 것은 루머이며 단지 일본은 홀로코스트 해방에 기여한 국가도 아니고 홀로코스트에 딱히 관심이 있는 나라도 아니기 때문에 초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피해자 드립' 이나 '나치 비난' 등의 사실은 그냥 루머.
최근 도쿄신문과 주니치신문이 미국의 원폭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 관련 공문서 중 당시 기밀 자료였던 ‘글로브스 문서’를 분석한 결과 3번째 원폭 투하 계획을 확인했다고 2018년 8월 10일자로 보도했다. 하지만 이런 3번째 원자폭탄 투하 계획은 곧 중단되었는데, 당시 미국 정부 관계자의 일기 등에 따르면 해리 트루먼 당시 미국 대통령이 원폭 투하 후 히로시마의 참상을 담은 사진을 본 뒤에 더 이상의 원자폭탄 투하를 하지 않기로 결정함에 따라 '3번째 원폭 투하 계획'은 곧바로 중단되었다고 한다. 미국,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이어 3번째 원폭 투하 계획했었다 "美, 히로시마·나가사키 이어 3번째 원폭 日 투하 계획했었다"
9. 종전 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로 리틀 보이는 모든 핵무기의 위력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새로 나온 핵폭탄의 위력을 언급할 때 '히로시마의 몇 배다' 는 식으로 언급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히로시마에 떨어진 놈은 16킬로톤(kt). TNT 16,000톤을 동시에 터뜨려야 발생하는 엄청난 파괴력이다. 자세한 것은 원자폭탄/위력을 참조. 핵폭탄 실험이나 화산 폭발, 지진 등 대규모의 에너지 를 발산하는 인공 또는 자연적 사건에 비공식적이지만 아예 몇 히로시마라를 단위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경우 통상 TNT 15 킬로톤 (kt), 63 테라주울 (TJ) 를 기준으로한다.
9.1. 여론
태평양 전쟁이 원폭 투하로 끝나긴 했지만 여지껏 보지 못했던 엄청난 위력에 곧 핵전쟁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 그리고 인류 멸망에 대한 위기감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러한 인식은 전후의 냉전과 탈핵 운동, 반전 운동, 히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원자폭탄에 대한 직접적인 결과가 산출된 실질적인 사건인 만큼 원폭에 대한 부작용과 그 공포에 대해 실질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이는 만화 맨발의 겐(전 10권)에 아주 자세하게 나와있다. 뒤에서 훈도시를 늘어뜨린 줄 알고 자세히 봤더니 원폭으로 인한 고열에 등가죽 살이 녹아 늘어난 것이었고 팔의 살도 늘어진 게 땅에 끌리기에 하박을 들고 걷는다거나 입고 있는 옷이 타면서 옷의 무늬가 고열로 살가죽에 아예 녹아 인쇄되어 버린다거나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은 무사했고 폭풍으로 깨진 유리창이 온 몸에 박히고 그 살가죽에 멍이 들어 온몸이 시퍼렇게 되었다.
맨하탄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은 원폭의 사용을 반대했으며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 바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이후 맨하탄 프로젝트를 실시하도록 편지를 보낸 것을 후회했다.
"내가 만약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일을 예견했었다면, 1905년에 쓴 공식을 찢어버렸을 것이다." ("if I had foreseen Hiroshima and Nagasaki, I would have torn up my formula in 1905.")
나중에 독일은 핵 개발에 거의 관심도 없었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는 것이 밝혀지긴 했지만, 일단 핵무기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 대부분은 나치 독일이 핵 개발을 하고 있다는 첩보를 듣고 독일이 핵을 보유할 때 뒤처지지 않으려고 참여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런 무기가 사용되는 것 자체는 반대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런 원폭 투하 이후 핵 개발에 반대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들이 일본에 동정을 하거나 일본을 편든 건 아니다. 이들도 일본의 잔인함과 전쟁 범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이를 막기 위해 핵 개발에 뛰어든 것이다.
이들이 핵 개발을 반대하게 된 것은 정말 나쁜 놈들인 일본 지도층들은 안 죽고 무고한 일반인들만 잔인하게 죽은 것 때문에 반대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일부 저서에서는 이런 과학자들이 일빠가 되었다는 등의 잘못된 정보가 실려 있기도 했다.
일본인들에게는 이런 핵무기의 공포가 가슴 깊이 각인되어 반전의 상징이 되었으나 일부 우익들에게는 과거에 대한 반성이 아닌 자신들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수단으로, 즉 일본이 전쟁과 서구 패권주의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강도질하다 경찰에게 총맞은 놈이 피해자 흉내를 내는 셈인데, 일본에게 침략당한 아시아인들의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 이와 관련해서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항목의 논란 항목을 같이 참조.
다행히 모든 일본인들이 일본 제국의 범죄와 그 책임에 대해서는 하나도 기억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이 일본이 일으킨 침략 전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그것이 잘못이었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고, 당시 일본 국민의 여론도 태평양 전쟁에 우호적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논리는 자신들이 전쟁의 피해자라는 일본 극우파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이용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원폭 투하가 반전(反戰)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일본인들에게 같다. 이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이러한 사건을 받아들이는 관점에 따라서 이러한 역사인식은 양면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그것이 전쟁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전쟁에 대한 미화로도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원폭 희생자를 추모하는 움직임은 그 자체로는 순수하지만 그러한 원동력이 역사적 반성의 방향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일본 내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내세워지고 있다. 히로시마의 경우 일본 내에서도 전쟁의 피해자란 인식이 강해서 강한 좌파적 성격을 띠고 있다. 1999년 기미가요(일본 국가) 제창과 히노마루(일본 국기) 달기를 거부하여 교사와 교장의 충돌 끝에 교장이 자살한 곳도 히로시마이며, 나가사키는 시장이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거론한 이후로 히로히토의 분노를 사서 극우 성향의 야쿠자들이 두 명의 나가사키 시장에 대한 암살 기도가 있었고 그 중 한 명은 끝내 사망했다. 기본적으로 전쟁에 반대하다 보니 전쟁에 대한 반성으로도 이어져 일본의 피해를 입은 외국들에 대한 반성도 어느 정도 있다. 히로시마에서는 원폭 투하를 이유로 국가지원금을 받아내고 있기 때문에 일본인들도 이것을 '원폭산업'이라고 빈정거리기도 한다.
위키리크스의 정보에 따르면 2009년 버락 후세인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방문해 이 원폭 투하에 대해 일본 국민에게 사과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는 모양. 이 원폭 투하를 잘못된 것으로 미국이 인정해버리면 미일동맹을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구실이 된다는 일본측의 정치적 판단 때문이라고. 한마디로 일본 측에서 '미국이 우리에게 사과를 해선 안 된다'며 반대를 하고 있다는 소리다. 이후 2016년에 방문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기사가 나오기도 하였는데, 실제로 2016년 5월 27일, G7 이세시마 서밋을 위해 방일한 오바마 대통령이 원폭 투하 장소를 방문하여 연설을 가졌다. 연설의 내용은 대략적으로 무고하게 희생당한 민간인들을 위로하고 앞으로도 핵 사용을 하지 않아야 하겠다는 다짐 등이다.
2007년 1차 아베 내각 당시 규마 후미오(久間章生) 일본 방위상이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과 관련, "나가사키(長崎)에 떨어져 비참한 꼴을 당했지만 그것으로 전쟁이 끝났다는 것이 나의 정리된 생각으로,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가 일본 내부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고 사임한적이 있었다. 일 규마 방위상, 전격 사임
추가로 2007년 조지 부시 정부 시절 미국 행정부의 핵비확산 담당 특사인 로버트 조지프 전 국무차관이 미 국무부에서 기자들과 만나 원폭 투하에 대해 “결과적으로 많은 일본인의 생명을 구했다”며 “문자 그대로 수백만 명이 더 희생될지 몰랐던 전쟁을 끝낸 것으로 대부분의 역사가가 동의하는 내용”이라고 발언한 적도 있었다. 원자복탄(原子福彈) 이 발언 때문에 당시 미국과 일본 사이에 원폭 논란으로 외교적 마찰조짐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日, 美와 원폭 논란으로 마찰조짐
일본 정부는 태평양 전쟁 패전 후 '원자폭탄 투하'와 관련해 미국에 단 한차례 항의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日, 종전후 美에 원폭투하 항의 한번 안했다>
10. 한국인 원폭 피해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네
할아버지가 히로시마에 살고 계셨다네
내 왼 손가락은 태어날 때부터 한덩어리로 붙어있었죠
언제나 주머니 속에 숨어있는 나의 왼손
김승진의 '새끼손가락'
아무도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원폭 투하로 인해 일본인은 물론 조선인들까지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특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군수 도시였기에 강제로 끌려와 노동에 시달리다가 원폭을 맞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거기다가 부상자들은 일제에서는 자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홀대접을 받았고, 이후에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수두룩했다. 맨발의 겐에서도 나온다.
그리고 하시마 섬에 강제로 끌려가 노역을 했던 조선인들이 원폭이 터진 나가사키에 강제로 다시 끌려가 잔해를 치우는 작업에 동원됐다고 한다. 물론 이들은 아무런 방호복 없이 맨몸으로 사역을 당했는데, 당연하게도 이들은 오래지 않아 피폭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된다. 당시 피해자들에 따르면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생기고 피가 계속 분출했다고 한다. 역시나 일본 당국은 그런 일이 없다며 이들의 존재를 부인하고 모른 척하고 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한국인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가 서있지만 일본의 평화공원 가이드들은 이에 대해 절대로 언급하지 않으며 여행 코스에서도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는 아예 빼버렸다. 이에 대해 해당 공원에 항의하는 한국인도 있으나 공원 측은 항의를 무시했다. 그리고 이 위령비는 구석에 처박혀 있으며 일본인 가이드들은 그 위치에 대해 일절 가르쳐주지 않는다. 자신들이 가해자라는 역사적 증거물에 대해 언급하기 싫은 것이다. 지금은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사이트에도 한국 피폭자와 관련된 내용이 있다. 관련 기사 물론 분량이 상당히 짧다.
물론 일본에도 비양심적인 인물들만 있는 건 아니고, 제대로 된 사람은 있다. 이를테면 2011년 10월 3일 도요나가 게이자부로가 한국인 원폭 피해자를 40년간 지원해준 공로로 외교통상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유명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를 꼽는다면, 대한제국의 황족인 이우도 이 투하로 인한 피폭으로 사망했고, 또한 일본프로야구의 유명인인 장훈의 큰누나 역시 원폭으로 강한 전신 화상을 입었고 제대로 치료도 못해 12살 나이로 사망했다.
(원폭 때) 밤처럼 깜깜하고, 덥고, 냄새가...사람 타는 냄새? 무슨 소리인지 모르지만 큰 소리, 고함을 지르면서 이 강에 들어가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그렇게 이쁜 우리 누나...하루 정도 밖에 못살았어요. 아프다, 덥다...아츠히(暑い)? 덥다(라고 했어요.). 어머니는 하루정도 울면서 약도 없고 의사도 없고. 자기 딸이 죽는 걸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요.
장훈. KBS 휴면다큐 사미인곡 출연 당시 소회.
장영준은 원폭 투하 3일 후 부친을 찾아 나가사키시로 왔다가 폭심지 근처를 지나면서 피폭당했고 2009년 1월에 수첩교부를 신청했지만 나가사키시가 "증인이 없다" 며 거부하자 소송을 냈다. 안타깝게도 장영준은 승소 소식을 듣지 못하고 8월 17일에 사망했다. 2012년 9월 18일, 나가사키 지방재판소가 나가사키시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 장영준 씨에게 원폭 수첩을 교부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후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는데, 나가사키 시에서 증인이 없다는 이유로 또 거부하자 2016년 9월 27일에 한국인 2명이 소송을 제기했다.
경상남도 합천군에 원폭피해자 복지회관과 평화의 집이 있는데, 원폭 당시 히로시마에서 사망한 한국인 중 피폭된 60%의 사람들이 합천 출신이라고 한다.한국의 '히로시마' 경남 합천
원폭 투하에 대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의 의견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원폭 피해자임에도 "나는 원폭을 투하한 트루먼 대통령의 결단에 지지하는 부분도 있다"라는 견해를 밝힌 사람도 있고, "원폭을 투하하지 않았어도 전쟁은 끝났을 것이다. 미국은 반성해야 한다"라는 견해를 가진 사람도 있다. 물론 원폭으로 죽은 사람들의 의견은 알 수 없는 것이고, 원폭이 없었더라도 몰락 작전 때문에 더 참혹하게 끝났을지도 모른다.
2016년 5월 13일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심진태 합천지부장이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밝힌것에 따르면 총 74만명의 원폭 피해자중 한국인 피해자는 10만여명이라고 한다. 피해자 10만명 중 5만은 즉사하고 5만은 살았는데, 4만 3,000명이 영구 귀국하고 7,000명이 일본에 거주하는 걸로 해서 일본내무성에서 발표됐다고 한다. 그 중 현재까지 살아있는 생존자는 2,600여명이며, 1974년부터 2015년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의 소송 끝에 일본인 피해자에게만 이루어졌던 무료 전액 치료를 일본 외 타국 어디에 있든지 진료비를 지원 받는 걸로 재판이 마무리 되었다.
2016년에야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2017년부터 시행되었는데, 어느 정도 실질적인 피해보상이 이루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원폭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자식들도 '원폭 피해 2세 환우'가 되어 진상규명과 의료지원 투쟁을 벌이고 있다. 활동가 김형률을 중심으로 2000년대 초반 결성된 '한국원폭2세환우회'는 다른 시민단체들과 함께 계속된 투쟁을 해왔다.
11. 논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쪽은 "전쟁은 일본이 시작했다. 전쟁을 끝내라면 이걸 투하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을 펼치며, 정당하지 못하다는 쪽은 "민간인들에게 쏜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고, 그로 인해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원폭 투하가 정당한 일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꽤 뜨거운 논란거리이다.
11.1. "부당한 결단이다."
이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은 본질적으로 착취자의 입장에 있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다툼일 뿐이었다고 본다. 전쟁을 벌이는 건 늘 착취하는 자들이고 전쟁에 희생당하는 것은 늘 민중이라는 것이 참으로 딜레마이다. 전쟁을 통한 국익은 정작 국민들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경우가 절대다수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으로 희생된 사람들은 일본의 전쟁지도층이 아닌 민간인들이었다. 물론 일본 제국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일본 국민들 중에는 조선인을 차별하고 전쟁을 지지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 국민 모두가 전쟁광신자도 아니었고,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등 다양한 성향을 가지고 전쟁과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원폭 투하 지점에는 일본의 전쟁범죄와는 무관한 어린이들도 살았으며, 거기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본토로 끌려오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이민온 조선인들도 상당했다. 심지어는 연합국 포로들도 있었다.
원폭 논란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미국이 원폭을 쓰지 않아도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지 않았느냐" 다. 굳이 도시 한가운데에 떨어뜨릴 것 없이 근처 해상에 투하해 무력시위를 벌여도 일본의 투쟁의지를 꺾기에는 충분할 것이고, 그래도 항복하지 않고 죽기살기로 저항한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투하해도 문제가 없었을 거라는 의견.
원폭 투하 전에도 모든 고위급 인사들이 찬성한 건 아닌데 이때 반대하던 고위 장성들 중에는 훗날 대통령이 되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 체스터 니미츠 원수 등도 끼어있었다.
당시 핵폭탄 투하를 승인한 트루먼 대통령도 깊은 후회를 하였는데, "한 나라 지도자들의 외고집 때문에 인구 전체를 없애야 하는 일이 생긴 데 대해 후회하고 있다"며 "앞으론 원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으면 사용하지 않겠다"고 리처드 러셀 민주당 상원의원에게 쓴 서한이 2015년 8월에 공개됐다. 세계대전 종전 70년 만에 공개된 서한이다. (출처: JTBC 기사)
서구권에서도 원자폭탄을 두 번이나 투하해 민간인들의 엄청난 희생을 자아낸 것이 과연 정당했는가에 대해 심심치 않게 논란이 되고 있다. 아무리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다지만 어떻게 봐줘도 본보기 차원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대전 직후 태어나 교육을 받은 베이비부머 세대와 1970년대 이후에 태어난 청년 세대 간의 시각차도 한 몫을 하는데, 2015년 YouGov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응답자 65%가 원폭투하가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답했으나, 반면 30세 미만에서는 응답자 31%만이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답했다. 학살이란 표현이 과하지 않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는데, 저 정도 수의 희생자면 충분히 학살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전쟁을 끝내겠다고 결정한 것 이전에, 이거 터뜨리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 만큼 원자폭탄 투하가 얼마나 필요했는지는 이미 답 나왔다. 독일 같은 경우엔 이미 항복해서 상대적으로 묻힌 감이 있지만, 얘네들도 결사항전했다. 아이들까지 끌어모았고 건물 하나에서 죽을 때까지 버텼다. 그럼 얘네들도 항복 안하니까 폭탄 던져야 하나?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건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무슨 시대가 열렸는지 보면 피해자만 개죽음이란걸 알 수 있을 것이다.
11.2. "불가피했다."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다른 방법이 없었다.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직전까지 일본이 항복을 거부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며, 아래에서 주장하는 일본의 교섭내용은 휴전 내지는 무승부 수준의 조건이라서 연합군이 받아들일리 만무했다. 그리고 만주작전이 유래가 없을 만큼 빠르게 성공한 것이지, 소련이 참전했다고 100만이 넘는 일본 관동군이 1주일만에 깨지기라고는 일반적으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그리고 만약 원폭 투하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몰락 작전이 실행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일본인들은 그놈의 1억 총옥쇄를 향해 달려갔을 것이며 오키나와에서 이루어졌던 자살같은 저항을 지속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양측에서 수백만 명의 사상자가 더 나왔을 것이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일본을 항복시키려면 미국인 백만 명과 그 반수의 영국인이 죽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물론 150만이나 전사자가 나올 만큼 일본이 반항할 힘이 있을 리는 없지만, 몰락 작전의 내용 중에 핵폭탄을 써서 상륙 지점의 수비 병력을 섬멸한다는 부분과, 주요 도시들에 핵을 사용한다는 항목이 있는 걸 감안하면 피폭으로 인해 이만한 피해가 나왔을 가능성은 높다. 그리고 무엇보다 몰락 작전이 실행되면 일본인들은 사실상 멸족된다.
실제로 트루먼이 핵투하를 결정한건 일본이 항복을 논의한 건 3건에 불과하고, 결사항전을 결의한 정보는 13건에 달한다는 사실을 울트라 특수도청팀이 도청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여기에는 당시 일본 외무재상이 주소일본대사에게 우리는 러시아에게 무조건 항복 같은 중재를 요구하는게 아니라고 말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더군다나 미국이 원폭 투하와 전후처리를 서두른 이유 중에 하나가 소련의 대일 행동을 의식해서란 말도 있다. 일본 본토가 직접적인 전장이 된다면 소련이 일본 열도의 일부를 점령할 가능성이 크고 이것은 4년 가까이 태평양에서 거의 혼자서 일본을 상대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실제로도 스탈린이 트루먼에게 8월 내내 홋카이도의 남북 분할을 요구했지만 트루먼이 무시했던 바가 있다.
현실적인 의미에서 보더라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가 한국에 끼친 영향을 생각해보면, 이 원폭투하가 조금이라도 일본의 항복을 앞당겼으면 앞당겼지 그 반대의 효과는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만약 원폭투하가 일어나지 않고 일본 본토 결전이 일어나는 형식을 취하면서 훨씬 뒤에 일본이 항복했더라면 미국·소련에 의해 분단되는 것은 일본이었을 것이고, 한국은 분단을 피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 경우엔 전쟁 양상에 따라서 한반도가 전쟁의 직접적인 참화를 입을 수도 있었고, 소련 휘하의 공산국가가 되었을 확률이 존재한다. '공산국가가 뭐가 나쁘냐?'라고 할 수도 있지만 공산주의 자체를 순수하게 다 받아들인 국가는 현재 쿠바를 제외하면 대부분 망해버렸으며 쿠바도 딱히 서구 민주주의,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잘 산다고 보긴 매우 어렵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원자폭탄이 떨어지기 전에 일본에 대한 전략 폭격을 담당하던 커티스 르메이 소장이 도쿄에 네이팜탄 폭포를 퍼부어 모조리 태워버린 작전을 쓴 이유에서도 나타난다. 애당초 저 작전을 시행하기 이전에 커티스 르메이가 상관으로부터 받은 명령이 "몰락작전이 시행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본의 산업역량을 무력화시켜라"였다.
11.3. 결론: 일본은 재앙을 피할 기회를 스스로 거부했다
어떤 식으로든 일본 스스로의 책임을 완전히 부정할 근거는 없다. 일본은 핵을 맞지 않을 기회가 표면적으로만 보아도 두 번이나 있었고, 최소한 나가사키 투하는 막을 수 있었다. 당장 구 일본군만 봐도 상황 구분 못하고 반자이 어택이나 하고 앉아있었으니...
우선 연합군은 핵무기 자체에 회의적이었다. 핵무기는 극비에 붙여져서 애초에 연합군이라 하더라도 그 실체를 모두가 알았던 것은 아니다. 심지어 맨해튼 계획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와중에도 계획의 주축이었던 영국은 시간과 자원의 부족으로 인해 중도 포기했다. 미국에서도 맨해튼 계획은 굉장히 회의적으로 보였는데, 애초에 맨해튼 계획은 '나치가 핵폭탄을 개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치스에게 핵폭탄 같은 건 없었고 당시 과학자들에게 핵분열을 다루는 건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나 실제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으므로 맨해튼 계획 역시 좌초위기에 이른다. 따라서 이 시기에 일본이 항복했더라면 핵개발은 그대로 중지되었을 것이다. 미국은 승전국이지만 GDP의 40% 정도를 전쟁에 쏟아부으면서 경제상황이 매우 나빠졌고, 옛날 전쟁들과 달리 패전국에게서 자원을 강탈하거나 전쟁 배상금을 받아낼 수도 없었고 자력으로 무너진 경제 복구에 전력을 다해야 했기에 당시로써 보면 핵 같은 공상과학에 매달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냉전이라는 새로운 함정이 찾아오지만 핵무기의 등장은 실제 역사보다 좀 더 늦었을 것이다.
점차 일본의 패전은 명확해지기 시작했고, 1944년쯤 되면 일본 내에서도 "한국이고 필리핀이고 식민지 다 포기하고 GG치자" 는 정상인들이 몇 등장하기 시작했다. 우선 일본은 1945년 3월 9일 도쿄 대공습을 당했다. 일본 정부의 집계에 의하면 4만 명의 민간인 사망자와 100만 명의 이재민이 나왔다! 사실 이것도 의도적으로 통계를 낮게 잡은 것이고, 애초에 도쿄 대공습이 히로시마 핵폭격보다 피해자가 더 많다는 통계도 있다. 이만큼 자국민이 피해를 입었다면 무리한 전쟁을 그만두고 협상책을 찾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광기에 찬 군부는 여전히 전쟁을 지속했다. 만약 여기서 전쟁을 그만두었더라면 핵폭격은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일본이 전쟁 수행 의지를 보이자 연합군은 포츠담 선언을 발표한다. 연합군은 식민지 포기, 무장 해제, 전범 처벌이라는 상식적이고 당연하며, 그동안 일본이 저질렀던 만행들에 비하면 지나치게 너그러운 조건을 제시했다. 이후의 경제제재도 논의에 없었고, 재무장 제한에 대한 이야기도 없었으며 식민지에 대한 배상 따위도 전혀 없었다. 이는 독일에게 제시한 항복 조건에 비하면 엄청나게 너그러운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런 파격적인 조건 제시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여전히 항복하지 않았고, '선언을 묵살한다' 는 애매한 표현만을 남기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연합군은 이 선언에서 일본이 항복하지 않으면 일본의 파멸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다. 만약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였다면 역시 핵폭격은 없었을 것이다.
포츠담 선언과 독일의 항복조건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포츠담 선언은 일본에 상당히 너그러운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정지적 상황등이 원인이다.
• 일본군은 무장해제 후 고향에 복귀할 수 있다. 독일군은 영미에 항복해도 소련군의 포로가 된 것으로 간주한다.
• 일본군은 항복 후 산업 복구를 위한 무역에 참가할 수 있음을 명시했으나, 독일은 이런 수혜조건이 없었다.
• 이후 베를린 패전선언(Berlin Declaration)에서, 독일은 일단 존재하지 않는 것(not exist)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은 여전히 국가지위를 유지한다.
• 독일 군대를 연합군의 평화유지 목적을 위해 사역에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일본군은 단지 무장해제 후 고향에 복귀하는 것뿐이었다.
• 독일 민간인에 대한 처분도 애매하게 표시되었다. 독일의 민간 기구는 연합군 명령에 의하여 얼마든지 소환될 수 있었으며 독일 시민은 연합군의 지시에 불응할 경우 '적절한 조치'가 취해질 수 있었다. 이는 사실상 독일의 민간인이 연합군에 의해 사법처리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 실제로 카를 되니츠 수반 임시정부는 즉각 체포되었으나 히로히토는 덴노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 일본은 영토에 대한 손해 없이 식민지를 포기하는 조건에 불과했으나 독일의 경우 일부 독일 영토가 할양되는 조건이었다. 가령 1차 세계대전 때부터 논란거리였던 Saargebiet 지역은 결과적으로 프랑스 보호령이 되었다. 프랑스는 이 지역을 완전히 자국에 귀속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1957년에서야 서독에 반환된다.
마지막으로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떨어졌을 때도 군부는 1억 옥쇄 같은 망상에 빠져서 전국민 옥쇄 같은 허무맹랑한 소리나 하고 있었다. 역시 이 때 늦게라도 항복했다면 최소한 나가사키 핵투하는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과는 2차 핵폭격. 결국 일본은 핵폭격을 피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 기회를 스스로 거부했음을 알 수 있다.
굳이 변명을 해주자면 핵무기가 기존에 존재했던 무기들을 월등히 뛰어넘는 기술적, 정치적 위력의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 일본 정부가 그에 따른 파급력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 일본이 전세가 기운 전쟁을 무리하게 고집하면서, 자국민들에 대한 더 크고 무의미한 피해를 막을 기회를 스스로 외면했다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
요약하자면 "정신승리하다 매를 더 번 셈이다" 라고 요약 할 수 있겠다. 이 노래의 가사를 보면 그때 당시 일본의 병신력 돋는 멘탈리티를 확인할수 있다.
12. 기타
• 히로시마 원폭 투하 상황에 대해 자세한 책으로 <카운트다운 히로시마>가 있다. 방대한 자료 조사와 중립적인 시각으로 원폭 투하 준비과정(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 침몰사건의 비극도 나온다)부터 생존자들의 이야기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만든 같은 제목의 BBC 다큐멘터리도 있다.
다만 '일본 민간인도 피해자가 맞을지라도 마치 그걸 이용해서 일본 자체가 피해자인 양 묘사했다'고 주장하면서 역시 불쾌하게 보는 사람들도 많으니 이 다큐 역시 판단은 알아서. 무엇보다 일본, 미국 외 제 3자의 입장에서 만들었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는 있다.
• 캐나다의 전설적인 락 밴드 러쉬의 대표곡 <Manhattan Project>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소재로 한 노래다. 러쉬의 드러머 닐 피어트는 이 곡을 작시하기 위해 관련 서적을 10권이나 독파했다고 한다.
• 폴란드의 작곡가인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는 원폭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곡인 '히로시마 희생자들을 위한 비가(悲歌)(Threnody For The Victims Of Hiroshima)'를 작곡하였다. 다만 흔히 생각하는 진혼곡의 잔잔하고 슬픈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곡이다. 심약자 조심. 소리건 앨범 이미지건 무섭다 그러나 음악적으로는 상당히 잘 작곡한 곡이다. 52개의 현악기를 사용했지만 현악기의 잔잔한 사운드와는 달리 히로시마 희생자들의 비명소리처럼 들리는 찢어질듯한 소음 등이 들리는 것 같다. 한마디로 음악적으론 잘 만든 곡이지만 듣기엔 다소 거북한 노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기타리스트 게리 무어는 1984년 이 사건을 노래한 'Hiroshima(히로시마)' 라는 노래를 냈다. 'Dirty Fingers'라는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 일본의 작가 릴리 프랭키의 소설 <도쿄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의 초반부에서 화자인 주인공이 코쿠라가 고향인 어머니가 이때의 일을 이야기 해주는데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주인공 '나'는 항상 어린 마음에 "날씨가 좋다든가 나쁘다든가 그런 정도에 그 엄청난 폭탄을 떨어뜨리고 말고 하다니, 미국이라는 나라는 하는 짓이 참 어설프고 바보 같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 일본 크툴루 신화 관련 소설에서는 이게 일어났을 때 크투가가 강림했다고 쓰는 경우가 간혹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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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공에서 다룬 일본의 트라우마. 설명하자면 중국공이 말하기를 리틀 보이가 왔다는데 미국 출신 꼬마(...)였고, 대만공이 말하기를 팻 맨이 왔다는데 미국 출신 비만인(...)인 것. 그런데도 일본공은 둘 다 기겁부터 하며 피하는 모습이다.
• 원폭 투하 후 종전 이후에도 반성하지 않는 일본 극우 세력들을 비판하기 위해 잔향의 테러라는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졌다.
• 미국 만화 슈퍼맨 언체인드라는 작품에선 미국이 나가사키에 투하한 건 폭탄이 아니라 핵폭발 능력을 지닌 외계인 초능력자라는 설정이 나왔다.
• 유니버설 픽처스와 워킹 타이틀이 히로시마 원폭을 소재로 한 영화 제작한다.
•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을 두 번 맞은 사람도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156명이고, 그 중 일본 정부가 인정한 사람은 야마구치 쓰토무 1명이다. 그는 미쓰비시 소속의 선박 설계 기사로 히로시마에 출장을 갔다가 하숙집 노부부와 수다를 떠는 등 느적거리다가 원폭을 맞았는데, 제시간에 도착했다면 폭심지 근처라서 사망했을 것이라고 한다. 폭발이 일어난 것을 봤을 때 방공 훈련 내용대로 바닥에 바짝 엎드렸지만 후폭풍에 몸이 수십미터 가량 날아가 도로 옆 감자밭에 떨어져 한동안 기절해있었다고 한다. 그는 한쪽 팔과 상반신에 화상을 입고 고막에 손상을 입은 채 지옥도가 된 히로시마에서 하루를 보내고 가까스로 히로시마에서 빠져나가는 열차에 타 고향인 나가사키로 돌아왔다. 심한 화상으로 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상황에 미쓰비시에선 회사로 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고하라며 명령했고, 그는 나가사키 사무소에 출근해 자신의 상태를 보여주며 동료와 상사에게 원폭의 위력을 설명했다. 그리고 상사가 "단 한 발의 폭탄이 도시 전체를 파괴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을 내놓는 와중 원폭을 맞았다. 운좋게도 가족들은 폭격을 피해 방공호로 가서 살아남았지만 쓰토무 본인은 두번의 연달은 피폭으로 몇년 동안 죽을 고생을 했었다. 쓰토무는 다행히도 건강을 회복하는 데 성공 했고 이후 교사로 생활하다가 2010년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인터넷 상에서 한일관계가 안 좋을 경우 나가사키, 히로시마 파티, 대축제 같은 말이 나왔다. 중국도 마찬가지. 물론 옆동네도 비슷한 게 나왔지만. 아무튼 이 용어로 쓰는 사람들이 가끔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