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의 〈부석사〉의 배경은 부석사이다. 그러나 부석사는 소설에 등장하지는 않는다. 소설 속 두 주인공이 부석사에 다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석사는 우리말로 ‘뜬 돌 절’이다. 이 절에 얽힌 이야기를 여기에 풀 필요는 없겠다. 다만 현세에서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어쩌지 못해 자신의 몸을 죽이고 용이 되어서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일을 도운 여인의 지극한 사랑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이것은 허구이거나 꿈에서 일어난 일이겠으나, 설화에 담긴 의미는 더없이 깨끗하고 아름답다.
〈부석사〉는 인물들 사이의 긴장감이나 갈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갈등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그’와 ‘그녀’의 내면에서만 일어난다. 같은 처지인 ‘그녀’와 ‘그’는 같은 오피스텔에 산다. ‘그녀’와 ‘그’는 처음에는 모르는 사이였다. 소설은 두 사람이 불편한 불청객의 방문을 피해 1월 1일에 그녀의 자동차로 부석사에 가다가 날이 저물어 길을 잃고 산 속의 절벽 바로 앞에서 자동차가 진창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는 사이 눈이 내린다는, 매우 간단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와 ‘그녀’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과거의 기억과 상처는 매우 깊다. 이 점이 이 소설을 가치 있게 한다.
그의 첫사랑 K는 그가 버리고 떠나온 옛 집터를 본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군대에 간 사이 K는 변심한다. 오직 K의 것이라고 여겼던 것, K의 냄새, K였기에 할 수 있었던 맹세, K가 아니라는 이유로 늘 뒷전으로 밀어놓았던 일들을 그로부터 떠난 K는 이미 다른 남자와 똑같이 하고 있었다. 직장인 차림의 낯선 남자와 계단을 오르고, 호프집에 들어가 맥주 한 잔 앞에 놓고 헤어지기 싫어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모둠발을 디뎌 키를 돋우고, 창문 너머로 긴 입맞춤을 하는 등 “자신에게 했던 사랑의 행동과 똑같은 행동을 다른 남자에게 조금도 다름없이 반복하는 K를 보는 순간, 그는 K와의 모든 끈이 툭,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영상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회사에 다녔다. 직장에 들어가서 그는 자신과 꿈꾸고 생각하는 것이 같다고 생각했던 박 PD에게서 상처 받는다. 회사의 경영난 때문에 인력을 줄이는 상황에서, 박 PD는 그의 등에 칼을 꽂는다. 왜 자신인지 납득하지 못한 채, 그는 매사에 시들해진다. 회사도 나가지 않고 사람을 피하는 야생조류들처럼 사람들을 피하기 시작한다. 자연 다큐멘터리 종류를 제작하다 보니 오랫동안 사회와 떨어져 작품을 만든다.
그녀는 당연히 결혼할 거라고 믿었던 P로부터 배신당한다. 우산과 손수건 같은 것들을 늘 챙겨주면서 길고 변함없는 연애를 했던 둘이었기에, 그녀는 P가 다가올 미래 어디에나 동행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집안 배경이 든든한 다른 여자와 약혼하고, 그러면서도 여자가 자신을 잡지 않았다며 원망의 말들을 남들에게 하고 다녔다. 여자는 P를 극심하게 증오했다. 우리의 사랑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허영의 믿음을 벗자 일어나는 일들. 그로부터 받는 깊은 모멸감의 상처. 그때부터 그녀는 질서정연하게 맞추어져 있는 것을 어그러뜨리려는 충동에 휩싸인다. 아파트 앞에 가지런히 세워놓은 화분들의 줄을 엉클어뜨려 놓고, 주차를 할 때는 바퀴를 삐뚜름하게 세운다. 식당의 젓가락을 흐트러뜨려 놓고, 운전을 배워 분노를 참을 수 없는 밤에는 큰 소리로 욕을 하면서 어디론가 운전해 달린다. 미친 듯이 일을 하고, 졸리면 얼음물에 손을 담그면서 일을 한다.
‘변심’과 ‘배신’의 용어에 눈이 간다. 그의 연인이었던 K는 ‘변심’했다. 그녀는 연인이었던 P로부터 ‘배신’당했다. 그는 연인과의 헤어짐에 대해 여자의 변심이라고 적었다. 그녀는 남자의 배신이라고 적었다. 그런데 변심은 K가 한 것이고, 배신은 그녀가 P로부터 당한 것이다. 독특한 심리 상태가 엿보인다. 실연의 상처에 의한 아픔은 누구나 비슷하고, 이별의 책임은 통상적으로 상대에게 돌리지만 이 소설에서 남자는 여자가 변심했다고 말하고 여자는 남자로부터 배신을 당했다고 말한다. 세살 때 만나지 못한 게 한 맺힐 정도인 연인들도 뜻하지 않은 사태로 이별한 뒤에는 변심이나 배신이라는 말을 내뱉을 수 있겠다. 변심이든 배신이든 책임을 남에게 돌린 데서 오는 정신적 폐해는 크다. 그는 매사에 시들해졌고 야생조류들처럼 사람을 피한다. 그녀는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등장하는 미뇽까지는 아니더라도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오히려 정도를 따지면 미뇽은 유괴에다가 학대까지, 그리고 연정을 품었던 빌헬름이 다른 여인과 약혼하는 것에 대한 충격까지 겪으면서 트라우마가 쌓였는데 그녀는 단지 P로부터 배신당한 한 사건만 있는데도 폐인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녀가 그렇게 된 데에는 그녀의 기억에 P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장갑이 없는 자신의 맨손바닥을 비비는 그녀의 뇌리에 P가 스쳐 지나간다. 언제나 P에 대한 추억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인지.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면 머플러와 새 장갑을 챙겨주곤 했던 P.” 그녀의 마음에 남아있는 기억을 지우지 못해 그녀는 고통 받는다.
나흘 전 P는 그녀에게 꽃바구니와 생일카드를 보냈다. 생일카드 말미에는 1월 1일 오후 세시에 그녀의 오피스텔을 방문하겠다고 적혀 있었다. “그녀는 P에게서 받은 생일카드를 30분쯤 들여다본 후에 감정을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다시 시작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그녀는 경비실을 통해 남자에게 인터폰을 넣었다. 1월 1일에 저랑 부석사에 가시겠어요?”
그와 그녀가 1월 1일 부석사에 함께 갈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녀가 그를 만난 곳은 그녀가 실연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아침에 눈을 뜨면 금산사에 가곤 했는데 하루는 그곳에 갔다 오다가 어느 단층짜리 붉은 벽돌집 밭에서 상추를 뜯고 있는 그를 보았고 시선이 딱 마주친 그녀를 주인으로 오해했는지 “상추가 너무 싱싱해서.”라고 말하자 “그 반만 절 주세요…… 그러면 비밀로 해드릴게요.”라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그녀를 그를 처음 보았지만 그는 그녀가 같은 오피스텔에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종종 그 산길에서 만나 그 집의 밭에 자라는 채소들을 서리하곤 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딱 거기까지였다. 따로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만난 것은 아니었다. 일탈의 동지이거나 동료일 뿐이었다. 그저 가끔 우연히 서로의 삶을 엿본 것이 전부였다. 그녀가 실연했음을 그가 알지 못했고, 그가 실연했음을 그녀가 알지 못했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치고 귀대하려는 그 순간, 뒤늦게 솟아오른 깊은 슬픔 속에서 그는 오로지 K를 만나고 싶었다. 군화 끈을 꽉 조여 맨 후 귀대하는 기차에 오르는 대신 하왕십리 언덕에 있는 K의 옛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K의 마음은 달라졌어도 K네 집 앞의 광경은 변한 것이 없었다. 자정이 되도록 함께 앉아 있던 호프집도 그대로였고, 골목 쪽으로 나 있는 K의 방 창문도 여전했다. 밤늦은 시간 그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 간 K는 그 창문을 열고 그때까지도 골목에 서 있는 그를 내려다보곤 했다. 창문에 매달려 그들은 첫 입맞춤을 했다. 그는 모듬발을 세우고 K는 창문 밖으로 몸을 내만채로. K와 민간인 남자가 예전에 K와 그가 헤어지기 싫어 500cc 맥주 한 잔과 치킨 한 쪽을 앞에 두고 자정을 넘기고 하던 치킨집으로 들어갈 때, 그는 순간적으로 K 옆에 있는 남자가 예전의 자기 자신인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K가 안으로 들어간 뒤 곧 골목 쪽으로 난 창문이 열렸다. 남자는 예전의 그처럼 모둠발을 딛어 키를 돋우고 K는 상반신의 반을 창문 바깥으로 내밀어 긴 입맞춤을 나누었다.
시간이 좀 흘렀음에도 P와 K는 그와 그녀의 기억에 세세하게 남아있다. 이 기억의 흔적이 두 사람을 더욱 힘들게 한다. 프로이트가 말하기를 “인간은 불쾌한 기억을 잃어버림으로써 자신을 지킨다.”라고 했는데 그와 그녀는 이 점에서 자기를 방어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8개월에 걸친 자연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고 그 작품이 호평을 받으나, 거짓 루머 때문에 많은 피해를 보았다. 특히 그 루머가 자신과 마음이 잘 맞는다고 생각하던 박 PD가 꾸민 것임을 알았다. 그런 박 PD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1월 1일 오후 다섯 시쯤에 방문할 테니 술이나 한잔 하자고 했다. 박 PD의 전화를 끊자마자 인터폰이 울렸고 받아보니 뜻밖에도 그녀였다. 1월 1일에 부석사에 가자는 제의였다. 그는 박 PD의 방문을 회피할 목적으로 그녀의 청에 선뜻 대답했다.
그와 그녀는 과거의 기억을 떨치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그것이 천체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사람들은 1월 1일에 돋는 해를 나머지 364일 동안 돋는 해와 다르게 생각한다. 실제로 그것은 해가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그런 것인데 여하튼 사람들은 새해에 돋는 해를 다른 마음으로 바라본다. 1월 1일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천체의 운행을 보고 사람의 입장에서 정한 것인데 사람들은 1월 1일을 다르게 생각한다. 그렇게 다른 1월 1일에 잊고 싶은 나쁜 기억의 인물들이 그와 그녀를 방문하겠다고 알려왔다. 그에게 박 PD는, 그리고 그녀에게 P는 잊고 싶은 사람일 뿐 아니라 버거운 사람이다.
그와 그녀가 앓고 있는 불안과 공포, 우울과 긴장, 좌절과 비탄 등 마음의 고통은 그만한 무의식적 연유가 있어서 발생한다. 그가 K와 박 PD에 대해 갖고 있는, 그녀가 P에 대해 갖고 있는 마음의 고통의 연유가 그렇다. 고통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통찰이 일어나야 그 족쇄를 푸는 열쇠를 얻게 되고, 현재와 미래의 생활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어두운 힘이 사라져 건강하고 밝은 마음으로 전환된다고 말한다. 마음의 고통은 다양한 원인과 조건에 의해 발생한다. 고통을 일으키는 화살을 한번은 맞을 수 있다. 그러나 두 번 째 화살까지 맞을 수는 없다. 두 번 째 화살은 상황에 대해 상상과 추측으로 반응한 결과이다. 그것은 자신이 마음으로 만든 고통이다. 그와 그녀에게는 지금 고통의 두 번 째 화살이 꽂혀 있다.
접촉에서 일어난 사례로부터 생긴 느낌이 우리의 마음에 의해 지각되고, 지각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상상하고, 상상한 것을 토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재구성하는 데에서 어지러운 마음이 생긴다. 그도 그녀도 과거를 잊지 못하다 보니 그로부터 사유와 상상과 재구성이 일어난다. 그것들이 첫 번 째 고통과 두 번 째 고통을 만들었다. 거기에 이제는 P와 박 PD의 방문이라는 세 번 째 화살이 날아오고 있다. 그 고통들의 경험을 딛고 세 번 째 화살을 피하기 위해 그녀는 그에게 부석사에 가자고 제안했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는 심각한 영혼의 상처가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준다. 트라우마를 가진 미뇽은 언어능력도 부족하고 마음은 좀처럼 열지 않는다. 미뇽은 반복적으로 심장발작을 일으키는데 이는 과도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심인성 질환에 걸린 것이다. 〈부석사〉 그녀가 미뇽처럼 연속적인 상황에 처한 것은 아니겠으나 배신에 따른 실연의 상처를 측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K나 박 PD 말고도 삶 자체에서 상처와 고통을 겪었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에 걸쳐 나오는 그의 과거 이야기가 이를 방증하는데 그는 꼭 남자 미뇽처럼 보인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는 나탈리에가 미뇽을 치료할 목적으로 문진을 시도하는데 이것이 오히려 미뇽의 트라우마를 재발시킨다. 그녀에 대한 P의 방문도 과거의 기억을 소환한다. 그녀가 그에게 부석사에 가자고 제의하는 것은 기억을 회피함으로써 자아를 보호하려는 태도이다. 그 제의에 그가 응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 대처이다.
두 사람은 피하듯이 집을 나와 인사동 카페에서 만났다. 그리고 부석사에 가기로 결정했다. 그들의 부석사행은 험난할 것임이 소설의 서두에서 이미 암시되어 있다. 부석사를 향해 떠난 시간은 대략 정오경이다. 인사동에서 부석사까지 가는 길은 고속도로를 이용해 빨리 가면 세 시간 정도 걸린다. 오후에는 눈이 예보돼 있다. 두 사람이 세 시간 안에 부석사에 도착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굳이 부석사로 가기로 결정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와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상대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독백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진행한다. 두 사람은 상대의 처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서로의 사정을 모르는 한에서는 굳이 말하자면 도둑 동지에 불과하고, 서로에게 굉장한 호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눈물이 쏟아질 만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을 기억의 고통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해 각자 부석사로 떠나는 것과 같다.
두 사람의 부석사행에는 개도 동행한다. 그 개는 그가 유기한 것인데 그녀는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오피스텔로 데려왔다. P로부터 버려진 그녀와 누군가로부터 버려진 개이니 그녀와 개 사이에 동질감이 있다. 그녀는 개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고 굳이 불러야 할 때는 그냥 ‘개야’하고 부른다. 개는 홀로 사는 그녀의 분신이며 또 그녀 자신이므로 굳이 다른 이름이 필요 없었다. 하루 여행이면 집에 두고 떠나고 그리 문제는 없지만 그녀는 굳이 개를 데리고 간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는 개가 겪은 유기의 정신적 고통을 치료하려는 의식이 들어 있다.
두 사람은 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는다. 그녀는 개를 데리고 식당에 가기가 마땅치 않다고 했지만 그보다는 하루만이라도 세상으로부터 격리되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다. 그래서 그녀가 결정한 행선지도 절이다. 그녀는 어제 올케에게서 반찬들을 얻었다. 아침에는 직접 밥을 지었다. “많이 먹어요. 이 밥만 제가 했거든요.” 그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 그가 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P를 기억, 아니 P와 비교한다.
“그녀는 생각한다. P를 만나본 어머니는 P가 음식을 맛없게 먹는다며 흠 아닌 흠을 잡곤 했다. 무슨 음식이든 맛있게 먹을 줄 아는 남자가 좋은 남자라고 했다. 음식을 공경할 줄 모르는 남자는 여자를 골탕 먹인다고. 흰 무나물을 집어 맛있게 오물거리는 남자를 보며 뜻밖의 어머니 생각에 그녀가 웃자, 젓가락으로 꼬치를 집다 말고 남자가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에 반으로 으깨진 흰 밥알이 묻어 있다. 그녀는 무심코 손을 뻗어 그의 입가에서 밥알을 떼어내 준다.” P는 음식을 맛있게 먹지 않았고 그녀를 공경하지 않았다. 그는 음식을 맛있게 먹으니 그녀를 공경할 것이다. 그녀의 머리에 스치는 분석이다. 그녀가 그를 발견하고 그녀의 마음이 그에게 쏠린다.
점심을 먹은 뒤 이제 그가 운전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여 안전벨트를 해주고는 시동을 건다.” 출발할 때 그녀가 베풀었던 친절을 이번에는 그가 갚는다. 출발할 때는 이랬다. “그녀가 무심코 몸을 반쯤 접어 문 쪽에 달려 있는 의자조절기가 있는 곳을 일러 주려다 보니 남자의 품속에 얼굴을 묻고 안기는 꼴이 된다. 멋쩍어진 그녀가 얼른 자세를 바로 한다. 귀밑이 붉어진다.” 두 사람이 마음을 주고 또 갚는다. 그녀가 준비한 음식을 그가 맛있게 먹는 것, 서로 의자를 조절해주고 안전벨트를 매주는 것에서 새롭고 건강한 삶을 위한 의미와 목적이 생겨난다. 기억의 씻김이 시작된다. 두 사람에게는 과거의 기억이 사라지고 새로운 인상들이 들어선다. 이 인상들은 다시 기억으로 바뀔 것이다.
그가 운전하는 차가 제천으로 접어들자 그녀는 조금만 졸아도 되냐고 묻고는 옆자리에 앉아 조는 사람이 늘 부러웠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잠이 든다. 그는 박 PD에게 오지 말라는 전화를 해야 했지만 그녀가 자는 바람이 번번이 공중전화가 있는 휴게소를 그냥 지나친다. “그는 여자의 달콤한 잠을 깨우고 싶지 않아 커브를 돌 때도 조심했고 비탈을 오를 때도 내려갈 때도 충격이 덜하도록 엑셀을 단계적으로 밟는다.”
죽령휴게소에서 차를 세웠다. “차 바깥으로 나온 그녀의 머리카락이 겨울바람에 휘날렸다. 그 통에 늘 잔머리로 가려져 있던 그녀의 이마가 그의 시야에서 환하게 드러났다. 반듯하고 매끈한 이마였다.” 관찰은 관심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녀의 이마를 두고 ‘반듯하고 매끈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녀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 또는 호감의 진전이다. 그는 예전에 K를 만날 때는 K가 지닌 장점들을 분명 발견했을 것이다. K의 그 장점 대신 그녀에 대한 그의 주관적 미모가 형성된다. “그는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안전벨트를 매 주고, 그녀가 깰까봐 운전을 조심하고 이제는 자신의 목도리를 준다. 그녀를 향한 그의 마음이 아주 조심스럽게 진전된다. 급기야 그는 몇 차례 박 PD에게 하려던 전화를 이제는 포기한다. “에라, 그는 박 PD에게 더 이상 신경쓰지 않기로 하고 손바닥을 펴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풍기를 지나 지방도로로 접어들면서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부석사 표지가 사라진 것이다. 약속시간이 지나면서 박 PD 생각이 떠올라 운전에 집중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특별히 잘못 들어설 구간도 없었다. 급기야는 산자락으로 들어간 오목한 빈 공간에서 차를 돌리려다가 바퀴가 진창에 쑥 빠져버렸다. 앞은 낭떠러지였다. 갑자기 그녀가 웃음을 터뜨린다. “이거 다행 아니에요? 하마터면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졌겠네.” 그녀는 차가 수렁에 빠져 오도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을지 모르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그 순간 그녀는 P를 생각했다. “그에게 부석사에 가자고 인터폰을 넣기 전까지 그녀는 자신이 P라는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낭떠러지에 스스로 떨어지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P가 보낸 꽃바구니와 생일카드를 받고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바로 잡고 그에게 부석사에 가자고 전화했다. 오늘 아침까지도 그에게 인터폰을 넣어 약속을 취소할까 고민도 했다. 그 순간 인터폰이 울렸고 그녀가 수화기를 들자 상대는 침묵했다. 그녀는 그것이 P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순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오늘은 1월 1일이다. 결혼한 사람이 1월 1일에 자유로울까? 그 인터폰은 P가 오지 못한다고 알리려던 것은 혹시 아닐까? “만약 P가 마음이 변하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오지 않는다면. 오지 않는 P를 기다리는 상황이 발생한 다음엔? 이후의 일은 그녀 자신이 잘 알았다.”
P는 그녀와 사귈 때 그녀가 좀 싸늘해진다 싶으면 그녀를 찾아왔다. 집 앞까지 찾아온 P를 보면 그녀의 마음은 그냥 수그러들었다. 그렇게 그들은 새로 시작하곤 했다. 그런데 P는 다른 여자와 약혼한 뒤에 사람들에게 그녀가 자신에게 한번도 연락하지 않았다며 독한 여자라고 소문을 냈다. 그녀로서는 P의 변심을 기정사실화하고 싶지 않아서였는데 P는 모략을 한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는 P라는 낭떠러지 앞에 설 수 없다고 마음을 추스렸다. 그런데 P라는 낭떠러지를 피해 온 이 낯선 지방의 산길에서 마주친 것은 또 다른 낭떠러지였다.
사람은 과거의 느낌을 좋은 느낌과 싫은 느낌으로 분별한다. 좋은 것은 탐애심으로 싫은 것은 혐오심으로 연결된다. 그렇게 해서 좋은 것을 집착하고 싫은 것을 혐오하여 배척한다. P는 한때 그녀에게 좋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배신을 당하고는 혐오심으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아픈 기억 속에서 탐애심도 남아 있어 P를 다시 만날까 망설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결국은 잘 한 일이다. 애착도 혐오도 강하면 새로운 망상과 행동을 낳는다. 애착과 혐오가 중첩되면 손을 쓸 수 없는 망상으로 진전된다. 질서정연한 것들에 어깃장을 놓고, 신발을 섞어 놓고, 식당의 젓가락을 흐트려놓고 등등은 그런 집착과 혐오 속에서 태어난 돌출 행동이었다.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고 그 흔한 휴대전화도 둘 다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불안해졌는데 그녀는 태연하다. “누군가 지나가겠죠. 우선 추우니까 차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려보죠.” 그녀가 손을 뻗어 자동차에 부탁된 CD플레이어를 작동시킨다. 그녀는 그에게 음악을 설명한다. 남자와 여자 가운데 누가 더 클래식 음악을 많이 아는가 통계는 없다. 여자는 자기가 아는 음악에 대해 남자에게 설명하는 습관이 있다. 이것은 인류가 출현한 이래 사냥을 나갔던 남자가 귀가하면 낮에 동네에서 일어난 일을 여자가 남자에게 알려준 데서 시작된 아주 오래된 습관이다. 그러나 아무 남자에게 정보를 주는 것은 아니다. 오직 자기의 남자에게만 정보를 준다. 지금 그녀가 그에게 음악을 틀어놓고 정보를 주는 것도 이런 종류이다.
둘 사이의 관계는 더욱 진전된다. 그녀가 사과를 손으로 쪼개려다 실패하자 그가 쪼갠다. 그녀는 사과를 씹다가 말고 감도 깎아서 그에게 준다. 그는 밥만 맛있게 먹는 게 아니라 “과일도 맛있게 먹는 남자다.”
하늘에는 반달이 떴다. P는 돌아갔을 것이다. 그녀가 손을 내밀어 헤드라이트를 끈다. “낯선 지방의 낯선 골짜기에 유폐되어 과일을 먹고 있자니 피크닉을 온 기분이 든다.” 그녀는 P로부터 배신당한 그 여자를 생각한다.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퍼부으며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무엇인가를 흐트러뜨린 여자. 그녀의 5년 동안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지금 그 여자가 가엾기조차 하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에서는 그렇게 진한 눈물이 마를 새가 없다. 그처럼 시들해지거나 그녀처럼 자신을 들볶는다. 멀쩡하게 사회생활을 해도 늘 피해망상증에 시달려 자기도 모르는 새에 방어벽을 친다. 포개져 있는 돌들이 닿아 있는 게 아니라 사실은, 실 한 자락이 들어갈 만큼 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은 가고 또 온다. 뭔가가 떨어져나간 자리의 말없는 안간힘. 못 알아봐서 그렇고, 애써 모른척해서 그럴 뿐이지 우리는 매일 이별하고 있다. 그 이별로 인해 우리의 크고 작은 만남의 절단면들은 조용히 하얀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곤 새로 온 사랑에 대해 이번엔 다를 거라고 기대를 한다. 그래야 사랑은 끊이지 않고 지속된다. 여하튼 그녀의 차 안은 사랑을 잃은 두 사람을 따뜻하게 품고 있다.
산속에서 오지도가지도 못하게 된 처지에서 달이 뜨고, 자동차 앞 유리에 밖이 안보이도록 눈이 쌓인다. 눈 덕분에 두 사람은 초행길의 자동차 운전에서 서먹한 관계를 부드럽게 할 수 있었고 점차 인간 세상과 잠시나마 단절될 수 있었으며 둘만의 장소에 유폐될 수 있었다. 사랑한 사람에 대한 복수이든, 자신에 대한 자학이든 남남이면서도 두 사람에게는 동질감이 있다. 그런 그들의 관계가 떨어져 있으면서 실은 붙어 있는 두 돌과 같이 새로운 출발의 따뜻함으로 다시 시작된다.
자신의 상처만 들여다보던 두 사람은 서로를 보기 시작한다. 그 상황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것은 마음뿐이다. “그녀는 문득 잠든 그와 자기 자신이 부석처럼 느껴진다. 지도에도 없는 산길 낭떠러지 앞의 흰 자동차 앞 유리에 희끗희끗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뒷자리에 개켜져 있는 담요를 끌어와 그의 무릎을 덮어 준다.” 그의 마음이 움직인다. “그녀의 기척에 가느스름하게 눈을 뜬 그는 이 순간만은 반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혹시, 저 여자와 함께 나무뿌리가 점령해버린 옛 집에 가볼 수 있을는지. 이제 차창은 눈에 덮여 바깥이 내다보이지도 않는다.”
차창은 눈에 덮여 내다보이지도 않는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실패나 상처 위에서 일어난다. 실패와 상처가 없으면 타자에 대한 배려에 인색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녀에게 일어난 5년의 상처와 그에게 일어난 변심의 상처는 새로운 관계에 눈 뜨게 한다. 이제 그와 그녀는 자의든 타의든 공동운명체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상황이 사람을 만드는 법이다. 자동차 앞 유리에 눈이 쌓여 밖이 보이지 않게 되면 그 안의 공간은 이제 그들 두 사람만의 특별한 성스러운 장소가 될 것이다. 부석사까지 갈 필요가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