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일. 안개 속 풍경
오늘은 청명. 하지만 지난 밤 비가 내렸고 하루 종일 흐렸다.
역시 물이 나오지 않는다. 4일째다. 어제 저녁과 오늘 아침은 어제 홍룡사길로 내려오며 패트병 두 개에 떠온 4리터의 물로 썼다. 2리터는 차를 끓여 마셨다. 1리터로 머리를 감고 세수를 했다. 그리고 1리터로 밥을 하고 설거지를 했다. 차로 저녁에 1리터 아침에 1리터 마신 셈이다. 호사의 극치다. 단 곤란한 것은 화장실이다. 이곳은 계곡물을 끌어 쓰고 있지만 기본 시스템은 수도시설과 똑같다. 특히 물을 필요로 하는 양변기는 도무지 방도가 없다. 그래 산을 오르내리며 사찰 화장실을 이용했다.
며칠 째 산은 안개 속이다. 흡사 하얗고 거대한 동공 속 같다. 안개의 방울들은 너무나 작고 미세해서 피부에 닿아야 느낄 정도다. 그 미세한 입자가 소르르 돌면서 공중을 떠다닌다. 모든 것의 가능성을 가진 씨앗같이. 처음에 안개는 상쾌한 정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고도가 높아갈수록 두터워진 안개는 는개가 되어 뚝뚝 떨어진다. 결국 초소에 도착할 즈음이면 머리와 옷이 촉촉하게 젖는다. 이슬을 털고 신발을 털고 안경을 닦았다.
안개 낀 봄 숲은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 같다. 싸리나무 가지에 접시거미집들은 안개들이 내려앉아 인드라망의 구슬 같은 물방울들이 맺혀 서로를 반사한다. 물방울의 크기가 제각각이어서 더 매력적이다. 영롱하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가늘게 마른 싸리나무 가지에도 며칠 째 이어지는 봄비에 싹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봄눈은 어린잎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미줄과 가지 끝에 매달린 이슬들도 눈이다. 가만히 보면 눈을 말똥말똥 뜨고 숲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 이슬이야말로 눈의 원형이 아닐까? 원시 바다로부터 이어져온 물방울들이다. 한 방울의 물방울 안에 40억년의 기억이 담겨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40억 년 전의 물과 지금 물은 분명 다르다. 수많은 시간을 통해 유전하며 물의 생명성은 엄청나게 강화되었다고 생각한다.
길에서는 모처럼 산민달팽이가 나왔다. 손가락 굵기의 7~8센티미터 정도 되었다. 검고 윤기 있는 뿔눈으로 주변을 탐색하며 느리게 미끄러져 간다. 달팽이를 보면 평화롭게 느껴진다. 아마도 느리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사물을 감싸고 덮으며 이동하는 모습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날카로움이 없다. 달팽이의 점액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장애물을 해치지 않고 부드럽게 타넘으며 남기는 달팽이길은 그야말로 명주길이다. 이제 숲이 식구들도 많이 나오기 시작한다.
안개 낀 숲 건너에는 호랑지빠귀 한 마리가 한참을 구슬프게 운다. 밤에 호랑지빠귀 울음을 들으면 어떤 땐 소름이 돋는다. 구슬피 흐느끼는 소리가 귀신이 흐느끼는 것 같다고 해서 귀신새라고도 한다. 여름밤 산을 옮겨 다니며 우는 호랑지빠귀 소리를 들으며 군생활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니 며칠 새 흰눈썹지빠귀 무리가 산을 돌아다니는 걸 보고 있다. 여름 지빠귀들이 이미 산에서 살림을 시작한 것이다.
상수리 나무 높은 가지에는 노랑턱멧새가 앉아 노래를 한창 부르고 있다. 봄의 가수다. 조금씩 조금씩 이뤄지는 변주도 참 재미있다. 잠시 숨이 찬 듯 낮아지거나 자지러지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은 중간에 박새 한 마리가 끼어들었다. 한창 노래에 몰두해 있는데 시끄러운 박새가 울어대니 노랑턱멧새는 자신의 곡조를 잊고 잠시 박새소리에 동화되어 울다가 제 소리를 다시 찾는다. 그러다니 박새 한 번 멧새 한 번 번갈아가며 울기 시작한다. 하지만 박새는 진득하지 못한다. 인내력이 별로 없다. 이중창을 좀 하다가 이내 다른 숲으로 옮아간다. 남겨진 노랑턱멧새는 아랑곳없다. 혼자서 한참을 더 노래한다. 자신의 노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일까? 슬플 때는 슬픈 노래가 위안이 되고, 기쁠 때는 기쁜 노래가 기쁨을 배가시켜 준다. 새들도 분명 노래에 대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안개들은 아침 새소리를 들으며 더 차고 맑고 생기 넘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안개 낀 숲은 인큐베이터인 셈이다. 새근새근 잠든 아기 숨소리가 들릴 것 같다.
한편 오늘은 비탈진 등산로에 유난히도 많이 먼지버섯들이 보였다. 며칠 비를 맞으며 한껏 부풀었다. 2,3센티미터의 고욤 같은 게 바나나를 벗긴 듯 막 꽃 핀 듯하다. 단지모양의 동그란 포자방을 하얀 그물 무늬를 한 외피가 갈라져 받치고 있었다. 손으로 만져보니 꼭지에 난 구멍에서 먼지 같은 포자가 폭 나오면서 날아갔다. 물론 주위가 온통 젖은 탓에 포자들은 금새 땅에 내려앉았다. 참으로 신기하다. 먼지버섯은 이렇게 비올 때 개화를 한다. 그런데 풍선처럼 부푼 내부는 건조해서 조금만 자극을 받아도 먼지 같은 포자를 풍 뿜는 것이다. 대개 빗방울이 톡 떨어지면 포자가 뿡 쏘아지는 것이다. 맑은 날 바람에 의해 포자를 날리는 것고 비교하면 참으로 절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비오는 날의 습도와 빗방울을 이용할 줄 아는 먼지버섯의 전략에 경의를 표한다.
8부 능선쯤에서는 하얀 둥굴레 뿌리들이 흩어져 있었다. 멧돼지가 파먹다가 인기척에 놔두고 간 듯하다. 제법 먹음직스러워 비에 씻긴 하얀 뿌리를 먹어봤다. 생땅콩 먹는 것 같으면서도 마처럼 미끌 한 게 먹으면 꽤 요기가 될 것 같다. 이러니 멧돼지들이 겨울산을 누비며 땅을 그렇게 후벼 파고 다녔던 것이다. 몇 뿌리는 주변 땅에 돌려주고 몇 뿌리는 가져와 초소 뒤 화단 자리에 심었다. 이것으로 겨우내 쌓였던 궁금증의 일부가 풀렸다. 도대체 멧돼지들이 낙옆밑 땅에서 무엇을 찾기에 온산을 그렇게 뒤집으며 다닐까 궁금했는데, 일단 둥굴레 같이 통통한 먹거리가 유력한 1위 후보일 것이다. 물론 그 외의 구근과 지렁이, 겨울잠 자는 개구리 등도 대상이 되긴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