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대 헌종실록]
1. 헌종의 즉위와 조선 사회의 총체적 위기
(1827-1849, 재위 기간 1834년 11월-1849년 6월, 14년 7개월)
헌종 시대는 내우외환으로 후기 조선 사회의 붕괴 조짐이 드러나던 시기였다. 안으로는 순조
대부터 시작된 세도 정치의 여파로 관리 임명의 근간이 되는 과거 제도 및 국가 재정의 기본인
삼정(전정·군정·환곡)의 문란 등으로 정국이 혼란해졌으며, 재위 15년 기간 동안 9년에 걸쳐
수재가 발생하는 등 민생의 어려움이 그치지 않았다. 또한 순조 대부터 시작된 천주교 탄압은
'기해박해'로 이어져 훗날 외교 분쟁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연안에 빈번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이양선의 출몰로 민심이 소란해지는 등 내우외환이 그치지 않아 어린 나이에
즉위한 헌종으로서는 치세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헌종은 순조의 손자이자 후에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 신정왕후다. 1827년 7월 18일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으며, 1830년 순조
30년에 왕세손에 책봉되고 1834년 순조가 죽자 8세의 어린 나이로 경희궁 수정문에서
즉위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어린 관계로 순조의 비인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헌종이 15세가
되던 해인 1841년에야 비로소 친정을 하게 된다.
헌종 대에는 17, 18세기부터 시작된 사회 전반에 걸친 급격한 변화로 농민층의 분해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도시나 광산으로 흘러들어가 임금 노동자가 되거나 도시 빈민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부농층과 부상인들이 생겨나면서 천민에서 양민으로, 양민에서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는 일이 빈번해졌는데, 이는 조선 사회를 지탱해왔던 신분 질서와 봉건 제도의
붕괴 조짐으로 나타났다. 또한 빈번하게 일어나는 수재와 전염병의 창궐로 민생이 악화되었으며,
삼정의 문란이 가중되어 살던 곳을 버리고 유랑하는 유민들이 급격히 불어났다.
헌종 1년, 수렴청정을 시작한 순원왕후 김씨는 홍경래 난의 사후 수습 겸 민심 안정책으로
서북인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관리로 등용할 것을 교시한다. 헌종이 열 살이 되던 1837년 3월
영흥부원군 김조근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고 4년 뒤에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왕비가 병에 걸려
돌연히 죽자 1844년 10월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딸을 계비로 맞이한다.
한편 순조 대부터 시작된 천주교 탄압은 헌종 대에서도 계속 이어져 1838년 헌종 4년 봄부터
다시 천주교 탄압을 강화한다. 기해년에 일어난 박해라 하여 '기해박해'라 부르는 이 박해에서는
조선에 들어와 있던 앙베르, 샤스탕, 모방 등 프랑스 신부와 유진길, 정하상 등 천주교 신자가
다수 처형된다. 헌종은 이 해 11월에 천주교를 금한다는 척사윤음을 반포하여 백성들에게
공식적으로 천주교를 금하는 교서를 내린다.
1840년 헌종 6년 12월에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자 안동 김씨의 세력이 다소 위축되면서
풍양 조씨의 세력이 우세해진다. 풍양 조씨는 헌종의 모후 조대비의 일문으로서 조대비의 부친인
조만영이 그 거두이다. 조만영은 어영대장, 훈련대장 등을 역임하면서 헌종을 보호하는 한편,
그의 동생 조인영과 조카 조병헌, 아들 조병구 등을 요직에 앉혀 세도를 확립한다. 그 후 5, 6년
동안 풍양 조씨 일문이 현달하더니 일문의 내부 알력과 1846년 조만영의 죽음을 계기로 정권은
다시 안동 김씨 일문으로 넘어간다. 헌종 대에 정권을 잡아 안동 김씨를 견제한 풍양 조씨
일문은 정치 혁신 대신에 안동 김씨와의 정권 경쟁에만 급급하여 민생 문제와 사회 문제를
도외시함으로써 사회적인 모순을 격화시겼다. 그 결과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물론이요, 그로 인한
삼정의 문란을 초래했다.
헌종 대에는 사회가 불안하고 민심이 이반되는 틈을 타서 두 번의 모반 사건이 일어난다. 헌종
2년에 있었던 남응중의 모반과 헌종 10년에 있었던 민진용의 옥이 그것이다.
1836년 헌종 2년에 충청도로 내려가 있던 남응중은 남경중, 남공언 등과 모의하여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의 손자를 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도총집, 남경중을 좌총집으로 하여 청주성을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지방 이속의 고변으로 사전에 발각되어 남응중
등은 체포되어 능지처참을 당하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1844년 헌종 10년에 있었던 민진용의 역모는 안동 김씨의 세도가 풍양 조씨 일문으로 넘어가는
권력의 공백기에 일어난 사건으로, 당시 왕조의 위엄과 권위가 어느 정도 실추되었나를 보여
주는 예라 하겠다. 의원 출신인 민진용은 그의 뛰어난 의술로 이원덕, 박순수, 박시응 등을
포섭해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한다. 그들은 특히 하급 무관들을
동지로 규합한 뒤 자신들의 계획을 관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사전에 발각되어 관련
주모자는 모두 능지처참을 당하고 은언군의 손자 원경은 사사된다.
별다른 정치적 세력도 없는 중인이나 몰락 양반이 일으킨 이 두 모반 사건은 당시의 상황이
누구나 왕권을 넘볼 만큼왕권이나 정치권이 우습게 여겨지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헌종 11년에는 영국 군함 사마랑 호가 제주도와 서해안을 불법 측량하고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하자, 조정은 청나라를 통해 광동에 있는 영국 당국에 항의하기에 이른다. 또한 헌종 12년
6월에는 프랑스 제독 세실이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군함 3척을 이끌고 충청도 외연도에 들어와
왕에게 국서를 전하고 가는 사건이 발생해서 한때 조정을 긴장 상태에 몰아넣기도 했다. 이에
앞서 5월에는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 체포되어, 사교를 퍼뜨리고 국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7월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에 처해진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이듬해 청나라를 통해
프랑스에 답신을 보내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가 서양에 보낸 최초의 외교 문서가 되었다. 헌종
14년에는 이양선들이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함경도 등지에 빈번하게 출몰하여 백성들의 민심이
크게 동요되는 둥 국내외적인 위기가 조성된다. 이때부터 조선은 이양선을 앞세운 서구
열강들의 통상 위협과 문호 개방 요구를 맞게 되는 등 본격적인 외세 대응기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 정세나 주변 정세에 어두웠던 조정에서는 이양선의 출몰이나 위협에 별다른
방책도 세우지 않은 채 각각 권력의 장악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한편 학문을 좋아하고 글씨를 잘 썼던 헌종은 재위 기간에 '열성지장', '동국사략',
'문원보불', '삼조보감' 등을 찬수하게 하는 등 학문적 치적을 쌓기도 했다.
14년의 재위 기간 중 6년의 수렴청정 기간을 제하면 9년여의 짧은 친정기간을 갖게 되는
헌종은 그나마 이 기간중에도 세도 정권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권을 잡기 위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일문의 권력 투쟁에 휘말리다가 적절한 민생 안정책도 세우지 못한 채
스물셋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또한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읽지 못하는 정치력의
부족으로 거기에 적절하게 대응하거나 대비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헌종은 효현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두 명의 아내를 두었으나, 1849년 6월 6일 창덕궁에서 후사
없이 죽었다. 능호는 경릉으로 경기도 구리시에 있다.
2. 헌종의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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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은 효현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계비 효정왕후 홍씨, 그리고 후궁 1명을 두었으나 후사가
없었다. 헌종 대에는 헌종의 어머니인 조대비의 위상이 커지면서 풍양 조씨 일문이 득세를 하게
되므로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 조씨를 여기서 다루기로 하겠다.
제24대 헌종 가계도
순조와 순원왕후의 장남인 익종(효명세자)과 그의 부인 신정왕후 조씨 사이에서 난 장남이
제24대 헌종이다. 헌종은 1827년에 태어나서 1849년에 죽었으며, 재위 기간은 1834년 11월부터
1849년 6월까지 14년 7개월이었으며, 부인 3명(효현왕후 김씨, 효정왕후 홍씨, 궁인 김씨)과
효정왕후 홍씨에게서 1녀를 두었는데 일찍 죽었다.
신정왕후 조씨(1808-1890)
익종의 비이며 헌종의 어머니로서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이다. 12세 때 효명세자의 비로
책봉되어 세자빈이 되었고 효부라는 칭찬을 들었다. 1827년 순조 27년에 헌종을 낳았다. 1834년
헌종이 왕위에 오르고 죽은 남편이 익종에 추존되자 왕대비에 봉해졌는데, 이때부터 풍양 조씨
일문이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면서 세도를 이루게 된다. 1857년 순조비인 순원왕후가 죽자
대왕대비가 되었으며, 철종이 재위 13년 만에 후사 없이 죽자 왕실의 권한을 쥐게 되었다.
이때 조대비는 전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을 못마땅해하던 흥선군 이하응, 조카 조성하와
손을 잡고 흥선군의 둘째아들로 왕위를 잇게 한다. 또한 안동 김씨의 세력을 더욱 약화시키기
위하여 고종을 아들로 삼아 철종이 아니라 익종의 뒤를 잇게 하였다. 1866년 2월까지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실제 정권을 모두 흥선대원군이 잡도록 하교하고 있었다. 그 후 조대비가 대거 기용한
친정 세력들이 잇따른 정변에 희생되어 조씨 가문이 쇠락해지자 그것을 슬퍼하였으며 나라가
재난에 시달리자 자신이 죽지 않는 것을 한탄하였다고 한다. 1890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능호는 수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효현왕후 김씨(1828-1843)
안동 김씨 영흥부원군 김조근의 딸로서 1837년 헌종 3년에 왕비에 책봉되고 4년 뒤에 가례를
올렸다. 왕후가 된 지 2년 만에 병에 걸려 죽었다. 1851년 철종 2년에 경혜, 정순의 휘호가
내려지고 다시 단성, 수원의 존호가 더해졌다. 능호는 경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효정왕후 홍씨(1831-1903)
판동녕부사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딸로서 1844년 헌종 10년 왕비에 책봉되었다. 헌종과의
사이에 딸을 하나 두었으나 일찍 죽었다. 1849년 철종이 즉위하자 대비가 되었으며, 1857년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가 죽자 왕대비가 되었다. 능호는 경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3. '헌종실록' 편찬 경위
'헌종실록'은 총 17권(부록 1권)으로 되어 있으며, 1834년 11월부터 1849년 6월까지 재위 14년
7개월간의 역사적 사실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부록에는 대비언교, 시책문, 애책문, 비문,
지문, 시장, 행장 등을 수록하였다.
'헌종실록'은 헌종이 죽은 6개월 뒤인 1849년(철종 즉위년) 11월 15일에 편찬을 시작하여
1851년 8월에 완성되고 9월에 인쇄하여 각 사고에 봉안되었다.
헌종 시대의 세계 약사
헌종 시대의 세계 정세를 살펴보면 청나라는 영국과의 아편 전쟁으로 일대 혼란을 겪게 되고,
이를 계기로 서구 열강들과 속속 통상 조약을 맺는다. 일본은 빈번해지는 이양선의 출몰에
대비하여 해안 수비를 강화하는 등 좋든 싫든 서구 열강들과의 교류를 준비하게 된다.
유럽에서는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혁명이 발발하면서 근대 국가로의
이행에 박차를 가한다. 한편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생겨난 임금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자협회가 결성되고 마르크스, 엥겔스에 의한 공산주의의 이론이 만들어진다.
미국에서는 모스가 유선 전신을 발명하여 통신 부문에 일대 혁명을 가져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