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것
- 이가영의 시 읽기
황 정 산
(문학평론가·대전대학교 교수)
가족이라는 말만 들어도 우리는 따뜻해진다. 서로의 고통과 기쁨을 나누
고 함께 체온을 나누며 힘든 세상을 견디게 해주는 것이 바로 가족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그래서 가족을 이루어야 완성된 삶이라고 생각해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기른다. 그리고 그 안에서 행복이라는 것을 애써 느끼며
삶을 영위하고 있다.
소시집에 실린 이가영 시인의 시들은 모두 이 가족과 가족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한이불 덮는 소리라 했다. ...(중략)... 한이불을 덮다보면 오래 덮다보면
물속 깊이를 알듯, 천년을 산 것처럼 서로 마음이 깊어진다는 것, 내가 좋
아하는 겨울, 물고기들도 가슴 콩닥거리며 부끄러워하다가 신혼 첫날밤, 비
늘무늬 속옷을 입고 한이불을 덮는다는 거, 새우잠 들었을 때, 살그머니 목
까지 이불 덮어주는 당신,
- <냇물이 얼 때> 부분
냇물이 어는 소리를 시인은 한이불을 덮는 소리로 듣고 있다. 그것은 서
로 다른 존재가 하나가 되어 서로 체온을 나누는 행위이다. 가족이 되어 한
사람이 한 사람을 가까이 하며 하나가 되어 산다는 것은“가슴 콩닥거리며
부끄러워”하는 신혼 첫날밤처럼 설레는 일이고 그것을 통해“이불을 덮어주
는 당신”의 모습처럼 서로를 안쓰럽게 돌봐주는 사랑의 초석을 일구는 것이
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가족의 따뜻함을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시인은 왜 그 따뜻한 가족을 냇물이 얼고 있는 얼음
장 밑의 풍경으로 그려내고 있을까? 한이불을 덮는다는 것은 차가운 寒이불
을 덮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의 이중성을 위해 시인은 일부러 띄어
쓰기를 하지 않고 있다. 서로를 이해하고 그래서 온전히 하나가 되고“서로
마음이 깊어”지는 것이 가족이지만 그것이 또한 냉랭한 얼음 밑이 될 수 있
음도 시인은 동시에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살고 있는 가족
구성원은“비늘무늬 속옷”을 입고 있는 잡힌 물고기, 갇힌 물고기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코 시인은“이불 덮어주는 당신”다음에 마침표를 찍
지 못한다. 그런 가족이 확신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가족에 대한 이중적인 시인의 의식은 다음 시에서 좀 더 분명히 드
러난다.
지는 해가 내 목에 감긴 스카프를 보고
말뚝에 묶인 목줄 아닌가
착각하고 보는 것 같아 솔직히 충격이었다
오랜만에 바람 쐬러 강변에 나왔다가
생시에 없는 자식을 만난 것 같아 화들짝 놀랐다
내가 염소 모피를 입고 있어 지 어미인줄 알았는지
졸지에 책임질 일이 하나 더 늘어난 것 같아
인생이 막 심각해지려 하는데
다행스럽게도 미처 돌아보지 못한 곳에
염소 일가 풀을 뜯고 있었다
- <염소> 부분
강가에 산책을 나갔다가 아기 염소를 만난 경험을 시로 쓴 것이다. 시인
은 염소가 엄마라고 부르며 자기에게 오고 있다고 생각해서 화들짝 놀란다.
새로운 한 생명이 자신에게 오는 것 같은 기쁨 때문에 놀라기도 했겠지만
또 한편에서는“책임질 일이 하나 더 늘어날 것 같아”서 놀란 것이다. 그러
다 자기 뒤에서 풀을 뜯고 있는 염소 일가를 보고 안심한다.
이렇듯 시인에게 있어서 가족이라는 것은 책임져야 할 짐의 무게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목에 감긴 스카프를 밧줄에 묶인 목줄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지는 해에 들키는 것 같아 충격을 받는다. 염소가 목줄을
매고 염소 일가를 이루듯이 자신도 누군가의 목줄의 표시로 스카프를 두르
고 매여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매여 정작 자신의 본모습이 사라져가고 있음
을 <쉰밥나이>라는 작품에서 잘 그려내고 있다.
좀 있으면 나도 쉰밥 한 덩어리 말아먹고
배가 아파 곤욕을 치를 때가 다 됐다
여자 나이 마흔아홉
식은 밥을 꾹꾹 눌러 비닐 랩으로 곱게 싸놓는 나이
김치 국물 묻은 쪽 살짝 걷어내는 나이
나를 꼬시려는 늑대들이 약간 머뭇거리는 나이
요즘 들어
밥을 해도 아무도 먹을 사람이 없는 꿈을 자주 꾼다
저녁밥 때가 되어도 집은 조용하다
- <쉰밥나이> 전문
‘쉰밥’은 50살의 쉰이기도 하고 쉬어서 쉰밥이기도 하다. 쉰이라는 나이
가 쉰밥처럼 스스로 쉬어간다고 느끼는 나이이기 때문이리라. “식은 밥”,
“김치 국물”처럼 누군가의 욕망을 자극하기 힘든 나이이다. 그런데 자신이
이렇게 변해간 것은 가족이라는 이름을 가진 누군가의 밥을 위해서였다. 하
지만 쉰이 되자 가족조차도 자신에게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이런 삶의 허망함을 <그림자>라는 시가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시에서 그
림자는 사라진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다. 그것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고
그림자로서만 남아 항상 자신의 곁을 지킨다. 그런데 사실은 자신이 그림자
인지도 모른다. 본래의 자기를 잊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내 발목에서 빠져나온 이가 누구인지/ 기억나질 않는다”라
고 말하고 있다. 자기 발목에서 빠져나온 그림자가 이미 자기 것이 아닌 것
이 되어버렸다고 느끼고 있다. 그리하여“따끔한 연애라도 하자”고 자신을
유혹하는 것은 바로 이 그림자, 언젠가 있었을 자신의 욕망의 기억이다.
가족 안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산다는 현실을 시인은 타인의 삶에서
도 마찬가지로 바라보고 있다.
물 빠진 저수지 바닥을 기름솔로 깨끗이 닦기도 하고
너덜너덜한 지느러미를 깔끔하게 다듬기도 하네
밤공기보다 따가운 아내의 눈총을 피해
백수로 놀 때보다 백번 낫다는 듯
깡마른 몸으로 저수지에서 고단한 하루를 보낼 뿐
월척 따위는 기대하지도 않네
- <붕어빵 굽는 사내> 부분
골목길 한켠에서 붕어빵을 굽고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을 재미있게 묘사한
작품이다. 붕어빵 찍어내는 틀을 저수지라고 시인은 과장해서 표현하고 있
다. 하지만 그것은 갇혀 있는 삶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아니면 적어도 돈벌어 오라는 아내의 성화를 피하기
위해서일망정 붕어빵을 굽는 사내는 그 좁은 붕어빵 틀과 마찬가지로 가족
과의 질긴 인연으로 매여 있는 삶을 살고 있을 게 뻔하다. 스스로 위안하는
길은 붕어빵을 찍어내며 저수지에서 유영하는 고기를 생각하며 자유를 꿈
꿀 뿐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붕어빵 장사보다는 훨씬 과감한 탈출을 시도한다.
태전동의 밤은 가끔 의심스럽다
내가 캄캄한 과도로 밤을 까면
적막한 쪽에 툭, 툭,
알밤 떨어지는 소리 들린다
...(중략)...
채워도, 채워도 끝없는 밤
밤늦도록 본 밤이
다음 날 아침, 없어졌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
참 잘한 일인 것 같다
- <태전동의 밤> 부분
여기에서“밤”은 중의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시간상의 밤이기도 하고
먹는 밤이기도 하다. 시인은 밤을 혼자 보내기도 하고 밤을 혼자 먹기도 한
다. 또는 밤에 밤을 까먹기도 한다. 그것은 모든 가족 구성원들로부터 벗어
나 온전히 혼자가 되는 시간을 갖는 것을 말한다. 밤은 욕망의 시간이다. 자
신의 그 내밀한 욕망을 시인은 혼자 경험하고자 한다. 또한 밤을 깐다는 것
은 밤송이에서 알밤을 하나씩 분리하는 행위이다. 가족으로부터 분리된 혼
자의 느낌을 시인은 밤 까는 행위로 대리 경험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
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밤에만 가능하다. 아침이 되면 다시 가족의 한 구
성원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비밀을 간직하고 산다는 것은“참 잘한 일
인 것 같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대견한 일이다. 아직 시인이 자신의 욕망
을 포기하지 않은 주체적 인간임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