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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교員嶠와 신재信齋의 〈동국악부東國樂府〉
-원교의 〈동국진체東國眞體〉-《수북첩壽北帖》
번역 이 기 운
《한강문학》은 성기조 박사의 〈권두문학강좌〉(문예사조)를 분재(29호까지, 가을호, 2022)하여 문학도의 높은 호응을 받으며 대장정을 마쳤다. 이어서 30호(2023, 신년호) 부터는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의 〈동국악부〉를 게재하기로 편집회의에서 결정하였다. 원교 이광사는 《서결書訣》을 남기고 〈동국진체東國晉體〉를 확립한 서법가書法家이며 강화학의 정신을 문학과 논문으로 표출한 문학가이자 사상가이다. 그러나 미술사학의 분야에서 크게 주목을 받아온 명성에 못지않은 문학, 학술사상에 관해서는 연구나 평가가 까닭 모르게 부족하여 왔다. 그리하여 강화학파 학맥을 세운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에서부터, 해방 이후 담원 정인보로 이어지는 한국 철학사상의 진정한 큰 맥脈을 이어가기에, 오늘날 숨 가쁜 지경에 이르렀다는 판단에 따라, 원교의 문학, 학술사상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동국악부〉를 분재하기로 결정하게 됐다. 〈동국악부〉에 담긴 사상은 한민족의 시원과 미래를 밝히면서, 시가詩歌에 담긴 철학은 심오할 뿐만 아니라 분량에 있어서도 방대하여, 문학도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으로 부득이 분재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음을 밝힌다. 아울러 〈동국악부〉에 담긴 선현의 뜻을 재해석하여 옮기는 것만 하여도 벅차올라, 낯빛을 가다듬고 심지를 한층 끌어올려 선각, 선현의 철학과 사상을 옮김에 있어서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되지 않도록 정진할 것임을 밝힌다. 〈권두문학강좌〉를 통해 원교를 지상紙上에 드러내기로 결정하기까지에는 한강문학 편집고문님들의 격려와 도움 그리고 담원 정인보님의 자제분 정양완 박사의 걸작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2)》(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에 전적으로 의존하였음을 밝힌다.〈편집자〉 |
〈동국악부東國樂府〉-전체 목차
1. 태백단太伯檀-30호 게재 2. 황하가黃河歌-30호 게재 3. 성모사聖母祠-30호 게재 4. 임중계林中鷄-30호 게재 5. 우식곡憂息曲-30호 게재 6. 치술령鵄述嶺-30호 게재 7. 황창무黃昌舞 8. 참마항斬馬衖 9. 왕모법王母去 10. 양산가陽山歌 11. 파경합破鏡合 12. 조촉사朝蜀使 13. 현학금玄鶴琴 14. 만파식적萬波息笛 15. 월명항月明衖 | 16. 상서장上書莊 17. 포석정鮑石亭 18. 조룡대釣龍臺 19. 낙화암落花巖 20. 조촌석朝天石 21. 융수첩薩水捷 22. 성상배城上拜 23. 영서기迎茜旗 24. 절영마絶影馬 25. 창근경昌瑾鏡 26. 성제대聖帝帶 27. 문곡성文曲星 28. 백사가百死歌 29. 여재립女戴笠 30. 두문동杜門洞 |
* 본고는 《江華學派의 文學과 思想(2)》(鄭良婉,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초판본) 중 〈圓嶠와 信齋의 東國樂府〉를 모본母本으로 삼아 윤문하였음을 밝힙니다) * 《한강문학》에 게재한 〈동국악부〉의 내용 중 ‘원교와 신재의 시’ 번역은 桑谷이기운(시조시인, 문학평론가) 선생께서 맡아주셨음을 밝힙니다. |
〈동국악부東國樂府〉-해설
〈동국악부〉는 원교의 《두남집斗南集》(권4)에 30수가 실려 있다. 악부에 실린 30수의 제목에서부터 국조國祖 단군檀君을 비롯하여, 고려高麗가 망亡하였을 때 두문수절杜門守節한 역사적 사실과 그로 인한 변곡점에서 민족의 얼을 가늠할 수 있는 본보기를 가려 읊은, 역사의식歷史意識이 두드러지게 드러난 作品들이다.
〈동국악부〉에 실린 각각의 수首는 모두 자주自註가 달려 있으며, 원교圓嶠 한 사람만 읊고 만 것이 아니라, 아들 신재信齋에게도 같은 주제主題로 역시 30首의 〈東國樂府〉를 새로이 짓게 하였다. 따라서 《신재집信齋集》 첫머리에 간략한 자주自註와 함께 실려 있음에서도, 원교가 민족의 얼을 아들에게 심어주려 하였고, 그 뜻을 아들이 품고 그에 대한 감동을 녹여 읊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원교員嶠의 〈동국악부〉에 아들 신재信齋가 함께 한 〈동국악부東國樂府〉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의 질곡을 장엄하고, 숭고하게 그려내며, 때로는 처절悽絶하게 겨레의 발자취를 가려 적어 놓았기에 원교의 철학과 사상을 새삼 확인確認하게 된다.
《信齋集》 첫머리의 〈東國樂府〉에 대한 자서自序는 다음과 같다.
“우리 아버지께서 〈東國樂府〉 30편을 지어, 영익令翊으로 하여금 이어 화답和答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영익令翊은 시詩에 능能치 못하고, 억지로 본 딸 수도 없어서, 지을 수는 없건 만도,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어서, 여기 질박質朴하고 촌스러운 말로 엮게 된 터이다. 사적事蹟이 황당괴이荒唐怪異 한데서 나와, 정도正道에서 어긋나 의심疑心스럽고 기롱譏弄 당할 만한 것은 반드시 편제篇題에 기록記錄하고 詩에 드러내어 굴원屈原의 천문天問의 뜻을 스스로 붙이는 터이다” 하였다.
〈해동악부海東樂府〉
조선 후기에 오광운(吳光運)이 지었다. 연작의 영사악부(詠史樂府)이며 28편으로 되어 있다. 그의 문집인 목판본 《약산만고藥山漫稿》(권5)에 수록되어 전한다.
각 편은 〈태백단太伯檀〉, 〈황하가黃河歌〉, 〈성모사聖母祠〉, 〈임중계林中鷄〉, 〈우식곡(憂息曲〉, 〈치술령鵄述嶺〉, 〈황창무黃昌舞〉, 〈참마항斬馬巷〉, 〈왕무거王毋去〉, 〈양산가陽山歌〉, 〈파경합破鏡合〉, 〈조촉사朝蜀使〉, 〈현학금玄鶴琴〉, 〈만파식적萬波息笛〉, 〈월명항月明巷〉, 〈상서장上書莊〉, 〈포석정鮑石亭〉, 〈조룡대釣龍臺〉, 〈낙화암落花巖〉, 〈조천석朝天石〉, 〈살수첩薩水捷〉, 〈절영마絶影馬〉, 〈창근경昌瑾鏡〉, 〈성제대聖帝帶〉, 〈문곡성文曲星〉, 〈백사가百死歌〉, 〈여대립女戴笠〉, 〈두문동杜門洞〉 등 28편이다.
원교 이광사가 〈동국악부〉를 지을 때 모본으로 삼았을 것으로 보인다. 〈동국악부東國樂府〉에는 〈성상배城上拜〉, 〈영천기迎茜旗〉 2편을 더하여 30편으로 되어있다.
〈동국악부東國樂府〉-본문
1. 태백단太伯檀
우리나라에 처음에는 군장君長이 없었는데 신인神人이 그 아래 벼슬아치 삼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오매, 그곳을 신시神市라 일렀다.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을 삼고, 나라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니, 해가 갓돋음을 말한다. 고기古記에 이르되 요堯 임금과 같은 무진년戊辰年에 임금이 되었다 하며, 수壽는 1400년 이라 하는데, 더러 이르기를 대대代代로 전傳해온 햇수라고도 한다.
東國始無君長 神人率其屬三千 降太伯山檀木下 謂之神市 國人立爲君
國號朝鮮 以日始出也. 古記云 與帝堯立于戊辰 壽千四百年 或曰 其傳世
歷年數也.
天燾何歲 천도하세
地摭何際 지척하제
日月何時 일월하시
舒其閡山 서기애산
何世奮木 하세분목
何時託根 하시탁근
天地日月稽其精氣 천지일월계기정기
乃降聖人于彼山木之下 내강성인우피산목지하
日月侔明 일월모명
天地侔大 천지모대
生已祥靈 생이상령
不事而化 불사이화
建國朝鮮 건국조선
化被千四百年 화피천사백년
하늘이 보호한 것은 어느 해며
땅이 취한 것은 끝이 어디인가?
일월은 언제
그 감추어진 산을 드러냈던가?
어떤 세상에 명성을 날렸던 나무였고?
어느 때 그 뿌리에 의지했던가?
천지의 일월은 그 정기를 헤아렸으니
이에 성인이 저 산 나무 아래로 내려왔네.
일월은 밝음을 따르며
천지는 위대함을 따르니
태어남이 상서롭고 존엄하니
부리지 않음으로 교화되고
조선을 건국하니
그 교화가 된지 천 사백년.
-번역:桑谷 이 기 운
기본은 四言詩이지만 八言섞, 十言도 섞인 不定型의 詩型을 가려 檀君始祖의 建國 이야기를 장엄하게 그려 내고 있다. ‘天壽何歲 地摭何際日月何時 舒其閡山 何世奮木 何時託根’ 까지의 다섯 句에 반복되는 ‘何’자는, 아득하여 알 길조차 없음에 대한, 그의 끝없는 疑問에다가, ‘天地日月稽其精氣 乃降聖人于彼山木之’라는 肯定으로 접어든다.
그리하여 ‘日月牟明이며 天地侔大’로 거듭 肯定하고, 나아가 ‘生已祥靈不事而化’에 이르며, ‘不事而化’는 바로 老子의 無爲而無不爲의 治政의 極致로, 員嶠는 마침내 조국의 개국을 이렇게 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끝에서는 ‘建國朝鮮 化被千四百歲’라 맺고 있다. 허나 古記의 인용이라 千四百歲는 壽가 아니라 “代로 물려간 햇수라고도 더러 하더라”고 自序에 기록했다.
* 아들 信齋는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始我蒙蒙兮
窮窮樸樸 而無有寧處
乃生神人 檀木之下
千歲萬歲兮 我何知?
我人之有檀君 其有之
태초에 우리가 어리석었고
가난하고 질박하여 편안할 때가 없었는 데
이에 신인이 박달나무 아래 나셨으니
천대인지 만대인지 내 어이 알리?
우리에게 단군이 계셨고 그로부터 시작이 있었네.
-번역:桑谷 이 기 운
2. 황하가黃河歌
樂志에 周武王이 箕子를 朝鮮에 封하니, 백성들이 좋아하여 대동강을 黃河水에 비겨 경사스러움을 기리고 복을 빌었다.
樂志 周武王 封箕子于朝鮮 人民懽說 以大同江比黃河水 頌禱之.
父子狎居 부자압거
而無等崇 이무등송
我以五品 아이오품
男婦野合 남부야합
而不分惎 이불분기
我以巹飮 아이근음
料卉而厞幹 요훼이비간
易之以白衿 역지이백금
刺地食而胥敓 자지식이서탈
助之以阡陌 조지이천맥
始知有禮義廉恥 시지유례의염치
歸爾之極 귀이지극
黃河淸千 황하청천
祀兮樂無極 사혜락무극
父子간에 버릇없이 살기에
무리 간에 존중이 없으니
내가 오품(오상)을 주었고
남녀 야합함에
가림과 꺼리낌이 없었으니
내가 혼인을 가르쳤네
풀을 재료로 주요 부분을 가렸으니
흰 깃으로 사용케 바꾸었네,
땅에서 취해서 먹지만 서로 약탈하기에
두렁과 길을 만들게 도왔더니
비로소 예의와 염치를 알게 되었네
그대의 지극함에 따르니
황하가 천년동안 맑고
제사 지내는 즐거움은 끝이 없구나.
-번역:桑谷 이 기 운
* 員嶠가 이처럼 聖人인 箕子가 나서 黃河도 맑아지고, 조선 사람에게 기쁨 줌을 읊은 데 이어서, 아들 信齋는 다음과 같이 덧 붙였다.
비록 꼭 이런 일이 있었는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요컨대 理致에 어긋나지 않으니 또한 이런저런 말할 필요는 없다.
雖未詳其必有足事 要非培理 亦不必多辯云.고 하였다.
入敎設兮天地安 입교설혜천지안
入敎設兮神人安 입교설혜신인안
黃河出西極 황하출서극
浿江在東國 패강재동국
我后作我國 아후작아국
入敎가 시행되자 천하가 편안하고
入敎가 시행되자 神人도 편안했네
황하는 서쪽 끝에서 나오고
패강은 동국에 있으니
우리 임금 우리나라를 세웠으리라.
-번역:桑谷 이 기 운
끝 句의 ‘我后作我國’을 음미해 보면, 西쪽 끝에서 發源하는 黃河와 우리나라의 大同江을 하나로 볼 수 없듯이,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이고 중국은 中國이라, 中國人이 어찌 이 땅에 와서 왕이 되었겠는가? ‘우리나라는우리 임금이 세웠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민족적 자존심을 여기서 읽을 수 있다.
원교의 〈동국진체東國眞體〉-만파식적萬波息笛
피리소리에 물결이 잦아들었다는 전설에 따라 글씨 자체를 잔잔한 물결치 듯 써서 피리소리를 글씨로 형상화 하였다. |
경인하중회庚寅夏中晦 원교옹서우수북員嶠翁書于壽北 증칠세녀贈七歲女
* 경인庚寅(1770) 5월 그믐 원교員嶠가 수북壽北에서 써서 ‘일곱 살 여아女兒’에게 주다.
만파식적萬波息笛
일몽고一夢稿에는 원교의 서녀庶女 주애珠愛가 부령富寧 시절에 태어나 세살 때 그 어미를 잃어 원교가 신지도薪智島로 데리고 가 길러 섬사람에게 시집보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딸의 글씨 솜씨는 아들 영익令翊보다 뛰어났다고 하였다.
그러나 庚寅(1770)에 ‘七歲女’는 ‘주애’가 아님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또 다른 서녀인가? 족보에는 서녀가 이도인李度寅에게 시집 간 것으로 되어 있다. 이도인의 아버지는 연안延安 사람으로 빈璸이며,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시백時白의 아들이고, 아들은 강畺이다.
친딸이 아닐 수도 있겠으나 글씨 잘 쓰는 내림이라 혹 신지도에 온 뒤에 보게 된 어린 딸인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역시 글씨에 소질이 있다고 보아 자기의 글씨를 주어 익히게 하려는 뜻에서였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수북첩》에 전함)
첫댓글 좋은 자료이군요? 이기운 선생 수고했습니다.
파평호 만파식적 경인하중 회원교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