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이충무공 노량해전 승첩제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 재현5, 6일 이틀간 남해대교 일원에서 열렸다.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1598년 11월 19일,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탄을 맞아 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나라를 지키려는 이충무공의 마지막 음성이 노량 앞바다에 울려 퍼진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죽음을 앞두고도 나라를 걱정했던 이충무공의 호국정신이 남해군 노량해협에서 되살아난다.
남해군은 ´제9회 이충무공 노량해전 승첩제´가 5일부터 6일까지 양일간 남해군 설천면 노량광장 일원에서 개최된다. 이번 승첩제에는 그 당시 치열했던 전투현장을 재현하는 노량해전과 조·명·일 수군 만인위령제, 총통발사 시연, 강강수월래 등의 특별행사를 비롯해 공연행사, 참여행사, 체험·전시, 판매행사 등으로 다채롭게 진행된다.
5일 오후 1시 노량해전 조·명 군선퍼레이드를 시작으로 조·명·일 수군 만인위령제와 조선수군 병영무예 시연, 이충무공과 함께 골든벨을 울려라, 총통발사 시연, 승전기념 불꽃놀이가 화려하게 펼쳐진다. 특히 이날 오후 5시 노량해전 승첩제의 하이라이트인 노량해전 재현행사가 남해대교 밑 노량해협 해상에서 화려하게 펼쳐진다.
이어 6시부터 남해대교 ´불멸의 빛´ 점등식이 동양 최대의 해전으로 기억되는 임진왜란 411년 전 수많은 호국 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불멸의 빛을 연출한다. 또 거북선과 조선수군, 왜선 등으로 꾸민 선박 100여척이 남해대교를 배경으로 갖가지 전술을 펼치며 실감나는 전투장면을 연출한다.
예년에는 호화롭게 개최되었으나 금년에는 추운 날씨와 강한 바람으로 참관자가 적어 계획대로 진행하지 못하고 일부 약식으로 진행되었다. 내년에는 좀더 바람직한 승첩제가 되도록 빕니다.
~~이순신의 마지막 해전 노량 해전~~
날짜 1598년 음력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장소: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바다
<지휘관 >
조선: 이순신, 고득장,방덕룡, 이영남
명나라: 진린, 등자룡
일본: 고니시 유키나가(순천), 소 요시토시(사천), 다치바나 무네시게(고성), 데라자와 마사시게(부산), 시마즈 요시히로(남해)
<병력 >
조선: 전선 83척
명나라: 전선 63척
일본: 전선 500여 척
<피해 상황 >
이순신 및 조선군 270명 사상, 명군 500여 명 사상 전선 200여 척 격침, 100여 척 나포
노량해전(露梁海戰)은 임진왜란 당시 1598년(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이순신이 이끈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 함대가 노량해협에서 일본의 함대와 싸워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서, 왜란의 마지막 해전이며, 이순신이 전사한 해전이기도 하다.
<배경 >
행주산성에서의 패배와 수군의 잇다른 패배 그리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군은 휴전을 제의하고 자국으로 철군했다가 휴전 협상이 결렬되자 1597년에 15만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다시 침공했다. 이것이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그러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하여 전세를 가다듬은 조선 수군이 명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 도독 유정과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의 참전으로 남부 해상권이 조선-명나라 연합군에게 다시 넘어가게 되자, 해상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당한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다 이듬해인 1598년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까지 급사하고,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조선 주둔 일본군의 수뇌부는 난관에 빠지게 된다.
계속되는 패전으로 병사들의 사기는 계속 저하되어 가고 있었고, 조선 수군에게 해상 보급로를 차단당한 채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으며, 고니시 유키나가 등 조선에 출병했던 일본군 장수들 대부분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었으므로 히데요시가 죽은 후 정권을 잡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신경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일본군은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자국으로의 철군을 결정하고 순천 등지로 집결하며 철수를 서둘렀다.
<경과 >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명나라의 병력과 함께 순천왜성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카의 부대를 공격한다. 이것이 순천왜교 전투이다. 6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큰 전과를 세운 조선 수군은 일단 고금도로 귀환한 후, 고니시 유키나가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고니시의 병력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사천의 선진리성에 주둔 중이던 시마즈 요시히로와 고성에 주둔 중이던 다치바나, 남해의 소씨 등은 고니시 유키나카의 부대를 구출하고 본국으로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그해 음력 11월 18일 수군 6만여 명과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노량으로 향했다.
그러나 시마즈 요시히로의 함대가 노량을 통과할 것을 예측한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으로 하여금 남해도 서북쪽 죽도 뒷편에서 일본 수군의 퇴로를 차단해줄 것을 요청하고, 자신의 조선 수군은 일단 봉쇄망을 푼 후, 음력 11월 18일 오후 10시경 남해도 서북단인 관음포(觀音浦)에 매복시켰다.
이튿날인 음력 11월 19일 새벽 4시경, 시마즈 등이 이끄는 일본 함선 500여 척이 노량에 진입하자 매복해 있던 이순신의 조선 함선들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순신의 함대가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을 죽이니 적은 이순신을 포위하려 했고, 이후 순천왜성 포구를 나선 고니시의 일본 수군과 진린의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여 4시간여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같은 날 오전 8시경,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고 이미 200여 척 이상이 분파되고 150여 척이 파손되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 수군은 잔선 100여 척을 이끌고 퇴각하기 시작했으며, 조선-명나라 연합함대는 오후 12시경까지 잔적을 소탕하며 추격을 계속하였다. 도주하는 일본 함대를 추격하던 이순신은 관음포에서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으며, 가리포첨사 이영남 · 낙안군수 방덕룡·흥양현감 고득장 등과 명나라 수군 부총병 등자룡 역시 추격 도중 적탄에 맞아서 전사하였다. 이 때 도주하던 100여 척의 일본 함선 중 50여 척을 분파하니 겨우 50여 척의 패전선만이 도주했다고 한다.
결국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의 군사들은 노량해전의 혼란을 틈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하여 시마즈의 왜군과 함께 부산에 집결, 퇴각하였으며 이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이 막을 내리고, 7년간의 긴 전쟁도 끝이 났다.
<평가 >
조명 연합군은 이순신(李舜臣)과 진린(陳璘)이 이끌었고, 일본군은 순천왜성에서 탈출하려는 고니시군과 진린의 어처구니 없는 뇌물매수로 인해 발생하게 된 사천의 일본 구원병과 함께 서로 전투에 임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순천의 일본군이 일본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전투 초기 진린은 여전히 멀찍이서 관망만 하다 조선수군의 분투를 보고 마침내 참전하였으나 오히려 일본군에 포위되어 이순신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을 정도로 조명연합군의 공조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결국 조선수군은 200여 척의 일본 전선을 격침시켰지만, 고니시는 조선군이 주변에서 달려온 일본군 구원 병력과 싸우는 틈을 타서 도망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에, 전투의 가장 큰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여 “절반의 성공”이라 할 것이며, 일본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피해를 입긴 했으나 어쨌든 애초 목표인 주요 장수의 철수에는 성공했기 때문에 또한 “절반의 성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노량해전 재현
명나라 장수 진린, 이순신, 고니시 유키나카
조선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