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의 영웅
일본은 초강대국이 되었다. 그것은 공업생산력과 경제력의 높은 수준과 규모의 측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일본 디자인의 독
창성, 자질, 그리고 영향력에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일본이 서구와 무역을 시작한지 이제 겨우 150년 정도가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응용미술과 건축이 국제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게 됨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건축과 그래픽 디자인 분야의
기술적이고 예술적 수준에서 버금가거나 능가할 나라는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건축적, 문화적, 경
제적, 그리고 사회적 문제에서도 그들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것이 현대 일본의 가장 두드러지고 도전적인 측면이다.
하지만 그들도 우리가 현재 극심한 갈등으로 해결의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는 혼란 - 근대화, 현대화로 이어지는 물질문명의 이
질과, 전통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정신적 문화와의 갈등 -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혼돈의 시대
80년대 일본의 현대 건축
서구 현대건축이 80년대에 겪은 급격한 변화의 과정과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80년대에 다양하고 복합적인 변모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으며 그 특징 중의 하나는 다원적 절충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일본 현대건축은 서양과 동양, 과거와 현재, 포스트 모던과 레이
트 모던이라는 건축의 인과요소를 절충시켜 독자적인 미적 가치관의 확립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현대건축에 있어 그 과
정을 살펴보면, 1960년대 신진대사라는 의미의 메타볼리즘(Metabolism)이라는 건축운동을 제안한 이래, 기술지향적적 낙관론으로
70년대를 맞이하였던 일본 현대건축계는 1976년을 경계로 하여 절충적이었지만 독자적 방법을 모색한 메타볼리즘이 종말을 맞이
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구인들에게는 일본 '현대건축 = 메타볼리즘'이라는 등식으로 비춰졌던 것이 사실이며 메타볼리즘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구로가와 기쇼오, 마끼 후미히꼬, 기꾸다께 기요노리, 오오다까 마사또와 간접적으로 관련되었던 이소자끼 아라따,
후원자 단게 겐조 등이 현 일본 건축계의 거장으로 부상한 것은 암시하는 바가 많다고 할 수 있다. 1974-75년에 걸친 오일 쇼크
이후, 직관적 기술론에 기반을 두었던 메타볼리즘은 그빛이 바랬고 메타볼리즘에 반기를 든 포스트 메타볼리즘 세대의 대두를 맞
이하게 되었으며 그 세대들이 안도 다다오, 하세가와 이쯔꼬, 기지마 야스후미, 록가꾸 기죠, 아이다 다께후미 등이라고 할 수 있
다. 그들의 성향은 과학기술의 획일적 진행에 대한 반감과 기술에 대한 모순적 태도, 유토피아적 도시상에 대한 실망과 현실사회
에의 접근, 일본문화에 대한 중요성 인식이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면 메타볼리즘의 세대들은 과연 80년대 어떻게 변모
하였을까? 1983년 쯔꾸바센터 빌딩으로 포스트 모던의 열풍을 일본 건축계에 점화시켰던 이소자끼는 1990년 기따꾸슈의 서일본
전시관 국제교류센터의 완공으로 또 다시 해체주의를 점화시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메타볼리즘 세대의 변화의 폭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일본 주택건축의 공간과 전통을 추상화시켜 추구하던 시노하라 가즈오는 도쿄 공업대학 백주년기념관(1988)으로 해체성
이 강한 하이테크로 전환하였고, 비교적 근대건축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었던 마끼 역시 스파이럴(1986)로 해체적 하이테크에 입
문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포스트 모던 논쟁을 와따나베 도요가쯔와 벌였던 일본 건축계의 대두 단게는 포스트 모던의 냄새를 물씬 퐁기는 도쿄도 신
청사의 현상설계(1986)에 당선해 그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 80년대 일본 건축계의 현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메타볼리즘
과 포스트 메타볼리즘 이후 세대들의 성장 역시 괄목할 만한 것으로 근대의 거장시대 이후 군웅할거의 시대라는 것을 피부로 느
끼게 하였던 것이 또 하나의 80년대 일본건축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 메타볼리즘 이후 세대들로는 기린플라자 오사카와 신택스(1990) 등에서 건축에 관능적 기계의 이미지를 포현했던 다까마
쯔 신, 일본적 해체주의의 선봉이며 라이즈 등을 선보였던 기따가와라 아쯔시, 함렛(1988)이나 로툰다(1987) 같은 가설성이 짙은
주택을 계속 발표하고 있는 야먀모또 리껜, 아오야마 제도전문학교 1호관(1990)으로 기존 건축어휘에서의 탈피와 변용을 시도하
는 와따나베 마고또 등이 다원적 양상을 표출하고 있는 일본 현대건축의 방향성에 새로운 자극제 역할을 하면서 독자적 세계를
전개하고 있다.
일본 현대건축에서 도시설계
건축과 도시와의 상관관계는 알도 반 아이크(Aldo Van Eyck)가 말한 '건축 = 축소된 도시'라는 정의처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건축과 도시의 개념자체도 시대의 조류나 제환경요인 등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 즉, 에베네저 하워드(Ebenezer Howard)
의 전원도시의 개념(1886)이나 카밀로 지테(Camilo Sitte)의 광장의 도시개념(1889)은 초기 공업화사회의 제환경문제에 대한 대안
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하워드는 과밀한 공업도시에서의 이탈을 주장하였고 지테는 중세도시의 광장.가로 등의 형태와
공간에서 근대적 도시의 모범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또한 토니 가르니에(Tony Garnier)의 공업도시계획안(1901)이나 르 꼬르뷔제
(Le Corbusier)의 빛나는 도시계획안(1935)은 낙관주의적 공업화사회에 입각한 능동적 제안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시
대의 조류나 환경 및 관습, 전통이 복합적으로 작용.생성되었던 것이 도시, 작게는 건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즉, 여기에서 말하고
자 하는 것은 현대일본건축에서의 도시와 건축의 개념이 과거 근대의 국제주의 양식이라는 비교적 커다란 틀에 의해 제어되었던
상황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음을 인식해야 하며, 심하게 말해서는 어떤 단편적인 흐름들은 발견할 수 있지만, 도시와 건축에 대한
인식이 건축가 각 개인마다 그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근대의 대량생산형 사회에서 다종 소량 생산형 사회로
변모한 현대의 특징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일본 역시 메타볼리즘이 활성화되었던 60.70년대에는 도시설계에 대한 주류를 이루는 틀이 형성되었었다. 물론 실무적 측면에서
이루어 지는 틀은 현재에도 확립되었겠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그 시대의 건축가들의 공유했던 도시와 건축간의 관계개념을
말하는 것이다.
메타볼리즘 시대의 대표적 도시설계로는 비록 제안에 머물렀지만, 단게 겐조가 주도한 도쿄계획-1960이 있다. 도쿄에 인구 1,000
만을 수용하는 도시의 출현을 예상한 이 도시설계는 기본적으로 도시를 정보시스템의 효율적이고 유기적 수행을 목표로 한 체계
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과거 구심형.방사형 도시체계의 한계를 탈피하기 위해 제안된 이 계획안은 구심형이나 방사형이 도심이라
는 개념에 근거하여 출발하여 현대라는 사회의 고도성장과 신속한 정보전달 체계를 수행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도시축이라
는 개념을 도입, 구심적 패텬의 폐쇄구조에서 선형발전을 가능케 하는 개방구조로 도시구조를 변모시키려는 제안이었던 것이다.
도쿄계획-1960은 메타볼리즘의 건축디자인 방법론이 유기적 생명체인 식물의 구성체계 등-예를 들면, 코어와 실의 관계를 나무
줄기와 나뭇잎의 관계에서 유추하였듯이-에서 유추하였던 것처럼 인체에 있어 정보체계를 수행하는 핵심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척추의 체계를 모델로하여 유추적으로 디자인하였던 것이다. 즉, 메타볼리즘이 신진대사라는 의미처럼 건축이나 도시를 건축적
요소의 성장.변화.융통성.상호변화 가능성.집단적 형태라는 개념에 의거한 '성장과 진행하는 과정'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 움직이는 도시축으로 제안되었던 계획안은 도시.교통.건축의 유기적 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코어시스템이나 필로티, 인공지반
같은 건축어휘로 구성되어 있었다. 비록 단게의 이 계획안이 도상계획으로 끝났지만, 이 개념을 근거로 오사카 만국박람회 회장
계획(1970)이나 이탈리아 볼로냐피에라 지구 센터(1975-) 등이 실현되었던 것이다. 이 개념은 주지하다시피 건축에도 적용되어 단
게의 시주오까신문.방송 도쿄지사(1967)나 도인학원(1982-), 구로가와의 나가긴 캡슐 타워 빌딩(1972), 국립민족학 박물관(1977)을
현실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메타볼리즘의 건축과 도시에 대한 개념자체가 독창적이라기 보다는 그 당시 아키그
램(Archigram)의 플러그 인 시티(Plug In City)나 요냐 프리드맨(Yona Friedman)의 계획 개념을 차용, 동양적인 윤회사상과 접목시
켰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현실화시켰다는 점과 현대 일본건축의 발판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크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건축과 도시가 유기적 관계를 이루면서 성장.발전한다는 메타볼리즘의 개념은 전술하다시피 오일 쇼크 이후 거대도시의 환상에서
탈피한, 이후 세대들에게 수용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메타볼리즘 이후의 전개
로버트 벤츄리(Robert Venturi)의 '건축에 있어서 복합과 대립'(1966)이나 알도 로시(Aldo Rossi)의 '도시의 건축'(1966)의 출판은 70
년대 후반 이후 현대건축계에 다대한 영향을 부여하면서 기존의 건축 도시의 개념을 변모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콜린
로우(Colin Rowe)와 프레드 코에터(Fred Koetter)에 의한 '꼴라쥬 시티(Collage City:1979)' 역시 도시설계의 기본입장을 변화시키는
열쇠가 되었다. 또한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의 말대로 '도시는 나무가 아니다.'라는 정의처럼 현대사회에 있어
도시의 체계는 단순한 나무형 구조로 해석하기에는 너무나 복합적 요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60년대 알도로시와 로버트 벤츄리의 이론의 등장은 신합리주의 건축의 유형학적 입장에서 도시공간이나 건축요소의 재발견에 의
한 형태학적 입장, 대중주의 건축의 상징과 랜드마크로서의 건축과 도시라는 입장을 강화시켰으며, 이 방법론은 카밀로 지테의
광장의 도시처럼 인간을 위한 건축과 도시를 표방하는 퇴행적인 측면도 있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건축과 도시공간의 비인간화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최근 렘 쿨하스(Rem Koolhaas)나 버나드 츄미(Bernard Tschumi) 같은 해체주의 건축가들은 건축과 도시에 관한 입장을 로시
나 벤츄리와 다르게 해석하여 근대의 건축과 도시이론을 새롭게 해석, 적용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즉, 80년대 세계의 건축은 그
판도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제의 진리는 오늘에는 진리가 아닌 것처럼 느끼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그러면 일본의 80년대 상황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일본에서 메타볼리즘 이후 선명하게 부각되었던 대표적 건축가는 아라따 이소자끼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최근에는 그 명성이 일
본국내에서는 과거에 못미치고 있지만, 아직까지 일본의 국제적 간판스타임은 부인할 수 없다. 메타볼리즘과 간접적으로 관련하
여 공중도시 게획안(1960-62)이나 오사카 만국 박람회 축제광장(1970)을 계획하였으나, 독자적인 작업에서는 메타볼리즘을 비일상
적인 전시장만을 실현한 운동이었다고 비판하면서 근대건축의 어휘와 역사적인 건축어휘를 접목시키려고 시도하였던 그는 포스
트 모던의 열풍을 재빨리 감지하고 쯔꾸바 센터 빌딩을 완성하였다. 일본인이기보다는 세계인을 자처하는 그는 이 건축물에서 미
켈란젤로, 줄리오 로마노, 클로드 니콜라스 루두 등 서양건축의 요소와 일본적 요소를 인용하여 디자인하면서 동서양의 접점으로
서 일본건축을 풍자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분열증적 절충주의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는 이 건축물은 건축의 기호론적 입장
과 순수기하학적 형태의 집적이라는 방법을 통해 일본건축과 서구건축의 장점을 취한다는 자기만족적 논리 위에서 작업을 계속
하였다. 그것은 코카콜라를 마시고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으면서, 또한 서구의 대중음악을 들으면서 전통론에 대해 감론을 박하는
일본인, 더나아가 한국인에 대한 냉소적인 건축적 메시지라는 생각이 든다. 전술한 건축물과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1986)은 건
축물의 도시에 있어서의 상징성과 순수기하학 형태를 사용한 유형학적 입장을 혼합시킨 사례라고 할 수 있으며 일본판 벤츄리와
로시의 만남인 것이다.
오짜노미 스퀘어 A관(1988) 역시 전술한 건축물들과 입장이 변함이 없으나, 윌리암 볼리즈 설계에 의한 건축물의 증축이라는 점
에서 역사적 요소의 인용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며 잡지사를 위한 공공성이 강한 기능의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반옥외 광장이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완공한 서일본 전시관 국제교류센터의 해체주의풍 디자인에 대해 과연 그가 어떻게 변
명할지 주목된다. 물론 그는 9개의 인용귀라는 그의 디자인 목록에 포스트 모던과 레이트 모던 그리고 해체에 관련된 팔라디오의
건축이나 케이프 케네디의 우주선 발사대, 리씨츠키와 스탐의 공중도시 계획안같은 목록을 마련하여 이미 도피처를 마련하고 있
지만....
메타볼리즘의 대표적 주자의 한사람이었던 구로가와 기쇼오는 메타볼리즘적 디자인에서 탈피 이후, 공생의 원리나 공(공)의 개념,
중간영역의 개념을 주장하면서 서구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의 공생 및 건축적으로는 전통 일본건축에서 추출한 건축과 자연, 건축
과 도시, 기술과 인간, 사유와 공유, 내부와 외부라는 이원론적 입장을 극복하는 양의성.애매성.중간영역성에 의한 디자인을 전개
하고 있다. 그가 설계한 오사카 소재의 국립분라꾸극장(1984)은 입면에 전통 일본건축의 상징적 요소와 재료를 도입하면서, 공간
적으로는 가로에 면한 공간을 외부의 공적공간과 내부의 사적공간을 완충시키는 매개공간을 설치해 문화공간의 공공성을 표현하
고 있다. 즉, 도시와 건축 사이를 매개시키는 완충공간을 만드는 동시에 형태상으로는 상징성을 표출하여 건축물의 공적 성격을
표현하고 있다.
그의 히로시마 현대미술관(1989)은 회랑이 있는 원형광장을 건축물의 중심부에 설치해 미술관의 공적 성격을 표현하는 동시에 이
건축군의 구심점을 만들고 있으며, 이 원형광장은 그가 주장한 바와 같이 내외부를 연계하는 매개공간의 특성을 표현하는 장치이
다. 형태상으로는 에도시대의 토장에서 지붕의 형태를 인용하여 전통적 형태와의 맥락을 표현하고 있으며, 전체적 구성은 몇 개
의 건축물이 모여 군집을 이루는 촌락의 집합체처럼 느껴지도록 의도하고 있다. 건출물의 세부에 있어서는 캐노피나 지하계단을
채광하기 위한 천창을 서구적 냄새가 풍기는 기계적 형태를 은유하여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질적 요소의 공생을 추구하고 있다.
파라볼라 안테나를 설치하면, 도쿄와 뉴욕의 소식을 동시에 접할 수 있는 현 시대에 있어 국수주의적이고 폐쇄적인 사고는 더 이
상 무의미하다는 생각일 것이다.
일본 현대건축을 계승하려는 작업을 일관되게 추구하였던 마끼 후미꼬에게로 눈을 돌려 보자. 마끼는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작
업을 계속하였던 다이깐야마의 힐사이드 테라스 하우스 등에서 근대건축의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꾸준한 작업을 하였으며, 그의
전술한 집합주택의 가로 코너에 개방된 광장, 필로티를 이용한 건물내부의 관통, 페데스트리안 덱크를 이용한 수법은 건축의 도
시에 적극적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인공적으로 조작된 미세한 지형의 처리, 건축과 도시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처
리한 수법은 구로가와가 "길은 시민생활의 장이며, 주거공간의 연장으로서 각각의 생활공간을 도시와 연결시키는 장이었다. 길은
교통의 기능만이 아니라, 서구의 광장이 수행하는 생활공간으로서의 기능도 겸비하고 있었다. 바꿔 말하면, '길공간'이라든지 '길
의 건축'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매개공간이 개인의 생활을 도시로 향햐게 해주었던 것이다." 라는 말을 연상시키고 있다.
마끼의 80년대 중반 이전까지의 경향은 온전한 근대주의의 계승이었으나, 1986년의 스파이럴이나 후지사와 체육관(1984)에서는
이질적인 요소의 결합, 즉 도시의 단편의 집적이라는 주제에 강한 호기심을 나타내고 있다. 기존의 불협화음적 사인을 발하는 도
시풍경을 인정하면서 그 단편들을 형태, 공간 혹은 재료로 꼴라쥬시키는 방법은 쇤베르그 같은 근대음악가의 작품이나 프랑크 스
텔라의 회화같은 현대미술에서의 방법론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마끼 역시 더 이상 도시공간과 건축을 정합적으로 해석하기
에는 도시가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 지지 않았음을 자인하고 있다.
마끼보다도 더 강하게 건축과 도시의 관계에 대해 해석하는 건축가로는 시노하라 가즈오가 있다. 일본 건축계의 다크호스였던 시
노하라는 오랫동안 소규모 주택건축만을 다루는 작업을 계속하였지만, 그렇다고 그의 감성 자체가 무디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오
히려 사무라이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의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칼을 갈고 있었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시노하라의 도쿄 공업대학 백주년기념관은 오랜만에 그가 칼을 꺼내어 그의 본령을 발휘한 건축물로, 그 이후 오사카의 K2 빌딩
(1990)이나 구마모또 기따(북) 경찰서(1990)로 그의 대형 프로젝트가 이어지고 있다. 일본의 도시들, 도쿄나 오사카의 도시경관은
영화 '블레이드 런너'나 '블랙 레인'에서는 더 과장되게 표현되었지만, 전통적인 도시조직이 파괴된, 혼돈과 불협화음으로 가득차
있다. 오사카 이나미에 위치한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들이 왜 폐쇄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
서 이다.
시노하라는 도쿄라는 도시의 난잡한 도시풍경과 기묘하게 공존하는 선진기술에 착안하여 이 도시의 불협화음을 탈피하려는 것이
아닌, 동조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시노하라가 F14전투기의 기능성과 성능 추구에 의한 집합형태, 불상이 지니고 있는 정적인
모습을 통합하는 것이 거의 목표였다고 말했지만, 그 기회가 그가 졸업했고 또한 재직하고 있는 도쿄 공업대학에 백주년 기념관
을 계획하면서 자연스럽게 부여됐던 것이다. 바로 인접해 전철이 지나가는 부지에 세워진, 20년대 러시아 구성주의 건축가들이
제안한 공중도시 계획안을 연상시키는 이 기념관은 주위 환경의 불협화음적 현상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금속판넬로 이루어진
외피, 상부의 반원통 구조의 레스토랑의 돌출, 외부로 돌출된 덤웨이터용 샤프트, 펀칭메탈로 마감된 예리하게 돌출된 캐노피 등
은 심장이 마비되어 의식이 없는 사람을 전기쇼크에 의해 되살리겠다는, 즉 충격요법을 사용한 처방처럼 보인다.
1990년에 완공한 K2 빌딩은 그의 모교 건물보다는 온건하지만, 구조의 노출, 설비덕트의 노출, 장식적이라고 생각되는 현수식 전
망대같은 장치를 구사하여 도시의 점진적 무정부상태를 구현하고 있다.
그러면 메타볼리즘 이후 세대의 도시상은 어떤 것인가? 그 선두주자인 안도 다다오에게 초점을 맞추어 보자. 안도의 건축은 오사
카나 고베의 소형 건물에서부터 대형 프로젝트인 준 포트 아일랜드(1985)에 이르기까지 그의 건축물의 질은 수준높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그가 생각하는 건축과 도시와의 관계는 마끼의 말이 잘 대변하고 있다. "혼탁한 도시경관 가운데에서 자신이 세우
는 것을 어떻게 주장하는가는 건축가로서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주위와 잘 조화되게 한다고 해도, 즉 혼란한 상태에서 너무
어울리게 해도 건축의 주체성이 없어져요. 전혀 이질적인 것을 가져왔을 때는 폭력적인 경우도 있어요. 그것에 대해 그가 프레임
과 같은 것으로 경계를 생각한 것은 이상함과 일본의 도시경관 속에서 폭력적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분명히 만들
어 내는 다공성같은 것이 일본감각과 겹치고 있으며, 이런 방법론이 그의 건축 가운데 공통하고 있습니다."
즉, 안도는 도시와의 관계에서는 폐쇄적인 억제된 자세를 취하면서 오히려 건축물 내부에서 강한 의욕을 발견하는 것이다. 건축
물 내부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신체의 움직임에 의한 시각적 공간적 체험을 건축적인 형태나 공간요소를 조작함으로써 더 민
감하게 느끼도록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부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자연적 요소 중의 하나인 빛은 그의 건축의 중요한
주제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또한 거의 대부분의 소규모 건축물의 내부(대부분 내외부가 애매한 매개공간으로 처리된) 공간에서
과도하게 생각될 정도의 계단의 조작과 미로적 구성은 그런 의미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즉, 그는 도시와 건축과의 사이에 프
레임을 설정, 경계를 만들면서 영역을 구획하여 내부에서 도시의 혼란스러움과 담을 싸고 살아가는 현대 도시인들의 삶을 공간으
로 실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즉, 혼란스러운 도시공간 속에서 달팽이처럼 자기자신의 내부로 침잠하는 도시인들의 실상을 그는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안도와 동세대인 하세가와 이쯔꼬는 시노하라스쿨의 멤버답게 그의 스승 시노하라 기즈오처럼 적극적으로 그의 건축을 도시에
대응시키고 있다. 그녀의 후지사와 쇼난다이 문화센터(1989)는 그녀 건축의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녀의 이 시뮬
레이트화된 전자도시풍의 문화센터는 주위환경과는 유리된 월트 디즈니의 테마파크를 연상시키는 것으로 후지사와시가 전자산업
의 본거지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있다. 그녀가 목표로하는 '제2의 자연'으로서의 건축이라는 개념은 20세기 도시환경 중에서 공
업화된 사회의 새로운 도시상과 건축상을 표현하려는 작업으로 도시속의 자연이란 순수한 의미로서의 자연만이 아닌, 실내공간의
아트리움에 서있는 모조된 수목이나 꽃처럼 인공적으로 조성된 자연까지 포함하는 것이며, 현대라는 공업화된 도시사회에서의 랜
드마크는 과거 고전적인 구성의 건축물이 아닌 전자시대를 표상하는 공업제품지향의 건축물이라고 하세가와는 주장하고 있다. 하
세가와는 '르꼬르뷔제의 건축 = 기계'의 등식에서 한발 더 나아가 '건축 = 전자기계'로 그녀의 건축을 격상시키려는 것처럼 보인
다. 전술한 하세가와보다도 더 과격한 경향은 그 이후의 세대인 다까마쯔 신이나 기따가와라 아쯔시, 야마모또 리껜, 와따나베 마
꼬또같은 세대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도시의 혼란과 무질서, 불협화음이 소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현대 일본건축의 이 세대들
에게는 생활화된 것이다. 그들은 안도처럼 소음에서 멀리 떨어져 조용히 침잠하는 것이 아니라 소음 속에서 더욱 존재감을 명확
히 느끼는 세대인 것이다. 겉으로는 온전하고 조용하게 보이는 교또 기따야마의 잠재된 심층구조를 부상시켜 인간의 잠재된 욕망
을 표현하는 다까마쯔 신은 그런 의미에서 건축판 프로이드라고 할 수 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처럼 인간의 양면성, 모순성을
건축을 통하여 표현한다고 주장하는 그는 영화'에어리언'의 한 장면처럼 정상적인 인간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면서 에어리언을
토해내듯이 그로테스크한 관능적 이미지의 그의 건축을 통해 카타르시스의 상태를 느끼는 것이다.
신택스는 바로 그의 관능적 욕망을 의인화 시켜 표현한 관능기계로서 교또라는 도시의 표면적인 보수성에 가리워진 관능성을 표
현하고 있다.
다까마쯔의 세대들이 대부분 공감하는 공통적 현상의 하나는 기계미에 대한 선호라고 할 수 있다. 다까마쯔 신과 공감대를 형성
하는 이 세대의 건축가는 와따나베 마꼬또로서 비록 그가 아오야마 제도전문학교1호관 외에는 주목할 만한 작품이 없지만, 도시
의 역사성.사회성이라는 맥락에서 의도적으로 이탈하여 전개하는 그의 작업은 도시적 측면보다는 건축자체의 자립성을 강조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독자적인 형태질서, 특히 현대의 속도감각이 가미된 형태를 선호하는 그는 전술한 건축물의 상부구조가 오
토바이의 엔진의 형태와 유사한 것은 그의 감각과 무관하지 않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근대 기능주의의 구호는 온건하다
고 할 수 있다.
이또의 건축물인 노마드가 유목민이란 의미를 지닌 것에서 어떤 연관성을 엿볼 수 있으나, 역시 표현에는 차이가 있다. 다까마
쯔 신 이후의 세대인 아몰프등도 역시 감각적이며 자극적이거나 아니면 도시를 향해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이런 자세
들이 전반적인 젊은 일본 건축가들의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ANDO TADAO
일본 현대건축의 80년대는 평론가 미야께 리이찌가 정의했던 것처럼 감성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감각적 건축의 시
대였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논리보다는 감각이 앞서고 기능보다는 형태가 앞서는 건축은 속성상 도시의 질서보다는 감각적인
형태를 우선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특히 이런 시대 분위기에서 선도적인 건축가들은 더욱 더 강한 자극을 표현하기 원하는 것이
다. 매스 메디어의 홍수속에서 단순한 자극은 이미 주의를 끌지 못하게 되며 이런 자극을 요구하는 분위기와 해체주의 건축의 등
장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이런 요소들이 일본 현대건축을 점점 더 혼돈으로 가게한다.
그러나 이런 혼돈속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며 초연하게 작업을 하고 있는 건축가가 있다.- 안도 다다오
안도건축의 배경
모더니즘이 주창된 이후 전성기를 거치면서 합리화된 기능주의는 세계의 모든 건축을 획일화하여 합리성의 명목아래 여유가 없
는 공간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 새로운 건축운동으로 주목받고 있는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단편적인
해석으로 형태의 조작이라는 측면이 강하게 비판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서 안도의 건축은 모더니즘이 가지는 기본이념의 연장
선에서 현재 모더니즘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안도의 건축은 노출콘크리트, 철, 유리를 주재료로 사용하여 모더니즘이 만들어낸 형태와 방법론에 의거하고 있으며 현대 건축의
큰 줄기를 이루어 왔던 Mies와 Corbusier 그리고 Kahn의 정신과 기법이 안도건측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면서 안도는 태어
나서 자라온 일본이라는 테두리를 깊게 생각하고 있으며 모더니즘에서 중요시 여기지 않았던 지역성 내지는 감소성에 대한 질문
을 던지고 있다. 안도건축은 보편성을 향하여 잉태되었던 모더니즘의 어휘와 기법을 지역의 개별성 속에 가둬놓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지역의 개별성을 표현하는데 있어 안도의 건축적 사고는 지역에 내재되어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과 감성을 계승하
고자 하는데 있고 눈에 보이는 구체적 현상이라 할지라도 이를 표현하는 방법은 모더니즘에서 가장 중요시 여겼던 단순화와 추
상화에 있다.
결국 안도의 건축은 순수 기하학의 구성으로 절제된 단순미학을 추구하면서, 지역이 갖는 특성에 따른 장소성,자연에 대한 해석,
일본 전통건축에서 보여준 미의식과 공간적 의미, 역사적 기억 등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즉 보편성을 토대로한 지역성을 추구
하고 있다. 이때 안도의 자세는 매우 절제된 금욕적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철저하게 보편적 건축어휘를 지역성과 자기주관적 자
연관에 내포시키는 경향이 있다.
안도는 가끔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상실되어간 자연, 스끼야와 민간건축 금각사 그리고 석정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 그 논제
는 자연의 회복과 일본 전통적 내.외부 공간의 본질파악과 일본인의 미의식 재발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자연과 인간, 자연
과 건축, 건축과 인간과의 관계성 속에 지역적 특성을 추구하고자 한다.
과거 동양에서는 인간생활과 건축에서 모두 자연과 매우 밀접해 있었으며 건축과 자연 그리고 자연화된 정원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고 자연과 인간도 서로 분리시킬 수 없는 일체화된 생활이었다. 이는 고건축에서 나타난 현상이나 샤머니즘적 태도에서
분명해진다.
이러한 동양적 사고를 바탕으로한 안도건축에서는 자연, 건축, 인간의 관계는 공존.공생하는 관계이고 체험을 통해 서로 대화하는
관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