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第五十三回 楚莊王納諫復陳 晉景公出師救鄭
제53회: 초장왕이 간언을 듣고 진나라를 다시 세우고, 진경공이 군사를 내어 정나라를 구하다.
卻說,陳靈公與孔寧儀行父二大夫,俱穿了夏姬所贈褻衣,在朝堂上戲謔。大夫泄冶聞之,乃整襟端笏,復身趨入朝門。孔儀二人,素憚泄冶正直,今日不宣自至,必有規諫,遂先辭靈公而出。靈公抽身欲起御座,泄冶騰步上前,牽住其衣,跪而奏曰:「臣聞『君臣主敬,男女主別。』今主公無《周南》之化,使國中有失節之婦;而又君臣宣淫,互相標榜,朝堂之上,穢語難聞,廉恥盡喪,體統俱失。君臣之敬,男女之別,淪滅已極!夫不敬則慢,不別則亂,慢而且亂,亡國之道也。君必改之!」
한편, 진영공과 공녕, 의행보 등 두 대부가 함께 하희가 준 속옷을 껴입고 조당에 올라 서로 희롱했다. 대부 설야(泄冶)가 그 소리를 듣고 즉시 옷깃을 여미고 홀(笏)을 잡고 다시 조당으로 들어갔다. 공녕과 의행보 두 사람은 평소에 올곧은 설야를 싫어했다. 오늘 부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오니 반드시 직간을 올리러 온 것이라고 짐작했다. 두 사람은 즉시 진영공에게 인사를 드리고 물러 나왔다. 진영공도 역시 옥좌에서 일어나 몸을 피하려고 했으나 설야가 진영공 앞으로 뛰어 올라가 옷깃을 붙잡으며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신이 듣기로, ‘군신 간에는 서로 공경해야 하며 남녀 간에는 서로 구별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금일 주공께서는 <시경> 주남(周南)에서 이르는 교화를 전혀 깨닫지 못하시고 나라 안의 부녀자에게 정조를 잃게 하시며, 또 군신 간에 음란한 쾌락을 자행하면서 서로 표방하여 조당에서 듣기 거북한 더러운 말을 하며 염치를 모두 잃어버리고 체통이 땅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군신 간의 공경과 남녀 간의 구별이 이미 없어져 버렸습니다. 무릇 군신이 공경하지 않으면 태만해지고, 남녀가 구별이 없어지면 기강이 문란해집니다.태만하고 문란한 것은 나라가 망하는 길입니다. 주군께서는 반드시 그것을 고쳐야 합니다.” 했다.
靈公自覺汗顏,以袖掩面曰:「卿勿多言,寡人行且悔之矣!」泄冶辭出朝門,孔儀二人尚在門外打探,見泄冶怒氣沖沖出來,閃入人叢中避之。泄冶早已看見,將二人喚出,責之曰:「君有善,臣宜宣之,君有不善,臣宜掩之。今子自為不善,以誘其君,而復宣揚其事,使士民公然見聞,何以為訓?寧不羞耶?」二人不能措對,唯唯謝教。泄冶去了,孔儀二人,求見靈公,述泄冶責備其君之語:「主公自今更勿為株林之遊矣!」靈公曰:「卿二人還往否?」孔儀二人對曰:「彼以臣諫君,與臣等無與。臣等可往,君不可往。」靈公奮然曰:「寡人寧得罪於泄冶,安肯捨此樂地乎?」
진영공은 얼굴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고 소매로 얼굴을 가리면서 말하기를, “경은 더 말을 마시오. 과인이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고 있소!” 했다. 설야가 인사를 하고 조문 밖으로 나갔다. 공녕과 의행보 두 사람이 아직 조문 밖에서 엿듣다가, 설야가 노기등등하여 나오는 것을 보고, 얼른 사람들 속으로 피했다. 설야가 이미 두 사람을 보고 불러내어서 꾸짖기를, “군주가 선한 일을 하면, 신하는 마땅히 널리 알려야 하고, 군주가 나쁜 짓을 하면 신하는 마땅히 그것을 숨겨야 하오. 지금 그대들은 스스로 나쁜 짓을 행하고 그로써 군주를 꾀어내어 다시 그 일을 퍼뜨려서 백성들이 공공연히 보고 듣게 하였으니 무엇으로 백성을 가르칠 것이오? 어찌 부끄럽지도 않소?” 했다. 두 사람이 대꾸하지 못하고, ‘예, 예’하며 가르침에 감사했다. 설야가 가버리자 공녕과 의행보 두 사람이 진영공에게 뵙기를 청하여, 설야가 군주를 책망한 말을 늘어놓고 말하기를, “주공께서는 이제부터 다시는 주림에 놀러 가지 마십시오.” 하니, 진영공이 말하기를, “경들 두 사람도 주림에 다시는 안 갈 것이오?” 하니, 공녕과 의행보 두 사람이 대답하기를, “그는 신하로서 주군에게 간한 것이지 저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저희는 갈 수 있지만, 주군께서는 갈 수가 없죠.” 했다. 진영공이 힘주어 말하기를, “과인이 차라리 설야에게 죄를 지을망정 어찌 그 즐거운 곳을 버릴 수 있겠소?” 했다.
孔儀二人復奏曰:「主公若再往,恐難當泄冶絮聒,如何?」靈公曰:「二卿有何策,能止泄冶勿言?」孔寧曰:「若要泄冶勿言,除非使他開口不得。」靈公笑曰:「彼自有口,寡人安能禁之使不開乎?」儀行父曰:「寧之言,臣能知之。夫人死則口閉,主公何不傳旨,殺了泄冶,則終身之樂無窮矣!」靈公曰:「寡人不能也。」孔寧曰:「臣使人刺之何如?」靈公點首曰:「由卿自為。」二人辭出朝門,做一處商議。將重賄買出刺客,伏於要路,候泄冶入朝,突起殺之。國人皆認為陳侯所使,不知為孔儀二人之謀也。史臣有讚云:「陳喪明德,君臣宣淫;纓紳衵服,大廷株林。壯哉泄冶,獨矢直音!身死名高,龍血比心。」
공녕과 의행보 두 사람이 다시 아뢰기를, “주공께서 만약 다시 간다고 하면 아마 설야가 성가시게 하여 감당하기 어려울 텐데 어쩌시겠습니까?” 하니, 진영공이 말하기를, “경들 두 사람에게 설야가 말을 못하게 할 좋은 계책이 있소?” 하니, 공녕이 말하기를, “설야가 말을 못하게 하려면, 그의 입을 열지 못하게 하면 됩니다.” 했다. 영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에게 입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입을 열지 못하게 금할 수 있겠소?” 하니, 의행보가 말하기를, “공녕의 말은 신이 능히 알아듣겠습니다. 대저 사람이란 죽으면 입을 닫습니다. 주공께서는 왜 설야를 죽이라고 전지를 내려서 평생의 즐거움이 무궁하도록 하지 않으십니까?” 했다. 진영공이 말하기를, “과인은 그렇게 할 수 없소!” 하니, 공녕이 말하기를, “신이 사람을 시켜 찌르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진영공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하기를, “경이 알아서 처리하시오!” 했다. 두 사람이 진영공에게 인사를 올리고 조문을 나가 한 곳에서 상의했다. 많은 재물로 자객을 사서 지나다니는 길목에 매복하여 설야가 입조하기를 기다렸다가 갑자기 일어나 죽이게 했다. 나라 사람들은 모두 진영공이 시킨 것으로 알았지, 공녕과 의행보 두 사람이 모의하여 죽인 줄은 몰랐다. 사관이 설야를 찬양하여 이르기를, “진나라가 밝은 덕을 잃어, 군주와 신하가 음란했네. 벼슬아치가 부녀 속곳을 가지고 희롱하니, 주림 땅이 조정이 되었구나. 장하도다, 설야여! 혼자서 군주에게 직간을 하다가, 몸은 비록 죽었으나 그 이름은 높아져, 관용방(關龍逄)과 비간(比干)과 비슷하다.” 했다.
自泄冶死後,君臣益無忌憚,三人不時同往株林,一二次還是私偷,以後習以為常,公然不避。國人作《株林》之詩以譏之。詩曰:「胡為乎株林?從夏南!匪適株林;從夏南!駕我乘馬 說于株野, 乘我乘駒 朝食于株.」徵舒字子南,詩人忠厚,故不曰夏姬,而曰夏南,言從南而來也。陳侯本是個沒傝的人,孔儀二人,一味奉承幫襯,不顧廉恥,更兼夏姬善於調停,打成和局,弄做了一婦三夫,同歡同樂,不以為怪。徵舒漸漸長大知事,見其母之所為,心如刀刺,只是干礙陳侯,無可奈何。每聞陳侯欲到株林,往往託故避出,落得眼中清淨。那一班淫樂的男女,亦以徵舒不在為方便。
설야가 죽고 나서부터 군주와 신하가 거리낄 것이 없게 되어 세 사람은 수시로 주림에 같이 다니면서 한두 번 차례로 정을 통하더니, 이후로는 그것이 습관이 되어 공공연히 사람들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라 사람들이 ‘주림(株林)’이라는 노래를 지어 풍자했다. 그 시에 이르기를, “주림에는 왜 가는가? 하남을 만나러 간다네. 주림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남을 만나러 간다네.
나는 말과 수레를 타고 가서 주림의 뜰에서 쉬리라. 나는 망아지와 수레를 타고 가서, 주림에서 아침을 먹으리라.” 했다. 하징서(夏徵舒)의 자(字)가 자남(子南)이므로, 시인이 충직하고 순후하여 하희(夏姬)라고 하지 않고 하남(夏南)이라고 했으며, 자남(子南)을 만나러 갔다고 말했다. 진영공이 본래 보잘것없는 사람이어서 공녕과 의행보 두 사람이 영공의 뜻을 받들어 염치를 돌아보지 않고 하희와의 일을 거들어 주는 동시에 화기롭게 한 여자와 세 남자가 함께 즐기며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징서가 점점 장성하여 모친이 하는 일을 알게 되었다. 하징서는 심장이 칼로 에는 듯했으나 진영공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매번 진영공이 주림에 오겠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하징서는 핑계를 대고 피하여 눈으로 보지 않으려 했다. 이 음란한 즐거움에 빠진 남녀들은 하징서가 자리를 피하는 것을 편하게 생각했다.
光陰似箭,徵舒年一十八歲,生得長軀偉幹,多力善射。靈公欲悅夏姬之意,使嗣父職為司馬,執掌兵權。徵舒謝恩畢,回株林拜見其母夏姬。夏姬曰:「此陳侯恩典,汝當恪供乃職,為國分憂,不必以家事分念。」徵舒辭了母親,入朝理事。忽一日,陳靈公與孔儀二人,復遊株林,宿於夏氏。徵舒因感嗣爵之恩,特地回家設享,款待靈公。夏姬因其子在坐,不敢出陪。酒酣之後,君臣復相嘲謔,手舞足蹈。徵舒厭惡其狀,退入屏後,潛聽其言。靈公謂儀行父曰:「徵舒軀幹魁偉,有些像你,莫不是你生的?」儀行父笑曰:「徵舒兩目炯炯,極像主公,還是主公所生。」
세월은 화살같이 흘러서 하징서의 나이가 18세가 되었다. 그 생김새가 크고 건장하여 힘이 무척 세었을 뿐 아니라 활을 잘 쏘았다. 진영공이 하희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자, 하징서에게 아버지의 직책을 이어받게 하여 사마(司馬)로 삼고 병권을 장악하게 했다. 하징서가 진영공에게 감사하고, 주림으로 돌아와 어머니 하희를 뵈었다. 하희가 말하기를, “이것은 진영공의 은전이니, 너는 마땅히 그 직분에 충실하여 나라를 위해 근심하고, 집안일에 대해서는 절대 신경을 쓰지 말아라.” 했다. 하징서가 모친에게 인사를 올린 후에 다시 조정에 들어가 나랏일을 처리했다. 어느 날 갑자기 진영공이 공녕과 의행보 두 대부와 더불어 다시 주림에 놀러 가서 하희와 함께 잠을 자게 되었다. 하징서가 부친의 작위를 잇게 해 준 은혜에 감사하려고 특별히 집에 돌아와 잔치를 열어 진영공을 접대했다. 하희는 아들이 연회석에 앉아 있어 감히 나와서 배석하지 못했다. 술이 거나해진 후에 주군과 신하들은 다시 서로 희롱하면서 손발로 춤을 추었다. 하징서가 그 꼴이 보기 싫어 물러나 병풍 뒤에 들어가 그들이 하는 말을 엿듣게 되었다. 진영공이 의행보에게 말하기를, “하징서의 체구가 크고 늠름하니 그대를 닮았는데 혹시 그대의 자식이 아니요?” 하니, 의행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하징서의 두 눈이 밝고 빛나니 아주 주공을 닮았습니다. 혹시 주공의 소생이 아닌지요?” 했다.
孔寧從旁插嘴曰:「主公與儀大夫年紀小,生他不出,他的爹極多,是個雜種,便是夏夫人自家也記不起了!」三人拍掌大笑。徵舒不聽猶可,聽見之時,不覺羞惡之心,勃然難遏。正是:「怒從心上起,惡向膽邊生。」暗將夏姬鎖於內室,卻從便門溜出,吩咐隨行軍眾:「把府第團團圍住,不許走了陳侯及孔儀二人。」軍眾得令,發一聲喊,圍了夏府。徵舒戎妝披掛,手執利刃,引著得力家丁數人,從大門殺進。口中大叫:「快拿淫賊!」陳靈公口中還在那里不三不四,耍笑弄酒。卻是孔寧聽見了,說道:「主公不好了!徵舒此席,不是好意。如今引兵殺來,要拿淫賊。快跑罷!」
공녕이 곁에서 거들며 말하기를, “주공과 의대부는 나이가 적으니 그런 아들을 두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아비가 극히 많아서 그는 잡종이고, 하부인 스스로도 기억을 못할 것입니다.” 하니, 세 사람이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다. 하징서가 못 들었으면 모를까 듣고 보았으니 자기도 모르게 수치심과 분노가 울컥 일어나 참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분노가 마음속에서 일어나면 담대한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라는 경우였다. 하징서가 아무도 모르게 하희가 있는 내실의 문을 잠그고, 곁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서 자기가 데려온 군사들에게 분부하기를, “집 주위를 단단히 포위하고 진영공과 공녕 및 의행보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막아라!” 하니, 군사들이 명령을 듣고 함성을 한번 지르며 하씨의 집을 포위했다. 하징서는 갑옷을 입고 예리한 칼을 손에 쥐고 가병 몇 명을 이끌고 대문으로 달려들어 갔다. 그가 입으로 크게 외치기를, “빨리 음탕한 도적을 잡아라!” 하니, 진영공은 그때 술을 마시며 너절한 농담을 하고 있었고, 공녕이 하징서의 고함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주공, 사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하징서가 마련한 이 자리가 좋은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군사들을 끌고 오면서 ‘음탕한 도적놈들을 잡아라’라고 했습니다. 빨리 달아나야 합니다.” 했다.
儀行父曰:「前門圍斷,須走後門。」三人常在夏家穿房入戶,路道都是識熟的。陳侯還指望跑入內室,求救於夏姬,見中門鎖斷,慌上加慌,急向後園奔走。徵舒隨後趕來。陳侯記得東邊馬廄,有短牆可越,遂望馬廄而奔。徵舒叫道:「昏君休走!」攀起弓來,颼的一箭,卻射不中。陳侯奔入馬廄,意欲藏躲,卻被群馬驚嘶起來,即忙退身而出。徵舒剛剛趕近,又復一箭,正中當心。可憐陳侯平國,做了一十五年諸侯,今日死於馬廄之下!孔寧儀行父先見陳侯向東走,知徵舒必然追趕,遂望西邊奔入射圃。徵舒果然只趕陳侯。孔儀二人遂從狗竇中鑽出,不到家中,赤身奔入楚國去了。
의행보가 말하기를, “앞문은 포위되었으니 뒷문으로 달아나야 합니다.” 했다. 세 사람이 항상 하씨 집에 드나들었으므로 집안의 구조를 모두 익숙하게 알고 있었다. 진영공이 내실로 가서 하희에게 구원을 청하려고 했으나 중문이 잠겨있음을 보고, 황망한 중에 더욱 황망하게 되어 급히 후원으로 달아났다. 하징서가 뒤를 추격했다. 진영공이 동쪽 마구간의 낮은 담장이 넘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마굿간을 향해 달아났다. 하징서가 외치기를, “혼군은 달아나지 마라!” 하고, 활을 잡아 쉿 하고 한 발을 쏘았으나 맞지 않았다. 진영공이 마굿간으로 달려 들어가 몸을 숨기려 했으나 말들이 놀라서 우니, 바삐 마구간에서 나왔다. 하징서가 바짝 따라와 또 화살 한 발을 쏘아 진영공의 심장을 정확히 맞혔다. 가련하게도 진나라 군주 평국(平國)은 제후의 자리에 있은 지 15년 만에 오늘 마구간에서 죽었다. 공녕과 의행보는 진영공이 동쪽으로 도망가는 것을 보고, 하징서가 틀림없이 쫓아간 줄 알고, 그들은 서쪽을 향하여 도망쳐서 활터로 나갔다. 하징서는 과연 진영공의 뒤를 쫓아갔다. 공녕과 의행보 두 사람은 마침내 개구멍을 빠져나와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맨몸으로 초나라를 향해 달아났다.
徵舒既射殺了陳侯,擁兵入城,只說陳侯酒後暴疾身亡,遺命立世子午為君,是為成公。成公心恨徵舒,力不能制,隱忍不言。徵舒亦懼諸侯之討,乃強逼陳侯往朝於晉,以結其好。再說,楚國使臣,奉命約陳侯赴盟辰陵,未到陳國,聞亂而返。恰好孔寧儀行父二人逃到,見了莊王,瞞過君臣淫亂之情,只說:「夏徵舒造反,弒了陳侯平國。」與使臣之言相合。莊王遂集群臣商議。卻說,楚國一位公族大夫,屈氏名巫,字子靈,乃屈蕩之子。此人儀容秀美,文武全材,只有一件毛病,貪淫好色,專講彭祖房中之術。
하징서는 이미 진영공을 쏘아 죽이고, 군사들을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가서, 다만 진영공이 술을 마시고 갑자기 병이 나서 죽으면서 세자 오(午)를 군주를 세우라는 유명을 남겼다고 말했다. 세자 오(午)가 진성공(陳成公)이 되었다. 진성공이 마음속으로 하징서를 원망하였으나 힘으로 제압할 수가 없어서 참으면서 말하지 않았다. 하징서도 역시 제후들의 토벌을 두려워하여 진성공을 강박하여 진(晉)나라에 조현하고 수호를 맺도록 했다. 한편, 초나라의 사신이 초장왕의 명을 받들어 진(陳)나라 군주에게 진릉(辰陵)에서 회맹을 맺자고 전갈하러 가다가, 진(陳)나라에 도착하기 전에 변란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갔다. 그때 마침 공녕과 의행보 두 사람이 도망하여 와서 초장왕을 뵙고, 진(陳)나라 군주와 신하들의 음란한 사정은 숨기고, 단지 말하기를, “하징서가 반란을 일으켜서 진후 평국(平國)을 시해했다.”라고 했다. 그들의 말은 초나라의 사신의 말과 서로 일치했다. 초장왕은 즉시 여러 신하를 소집하여 대책을 상의했다. 그때 초나라에는 한 공족 대부가 있었는데, 굴씨(屈氏)에 이름은 무(巫)이고 자는 자령(子靈)이며 굴탕(屈蕩)의 아들이었다, 이 사람은 용모가 수려하고 문무를 겸전한 인재이나, 다만 한 가지 흠이 있었으니 음행을 즐기고 색을 밝혔으며 팽조(彭祖) 방중술을 오로지 익혔다.
數年前,曾出使陳國,遇夏姬出遊,窺見其貌,且聞其善於採煉,卻老還少,心甚慕之。乃聞徵舒弒逆,欲借此端,擄取夏姬,力勸莊王興師伐陳。令尹孫叔敖亦言:「陳罪宜討。」莊王之意遂決。時周定王九年,陳成公午之元年也。楚莊王先傳一檄,至於陳國,檄上寫道:「楚王示爾:少西氏弒其君,神人共憤。爾國不能討,寡人將為爾討之。罪有專歸,其餘臣民,靜聽無擾!」陳國見了檄文,人人歸咎徵舒,巴不能勾假手於楚,遂不為禦敵之計。楚莊王親引三軍,帶領公子嬰齊、公子側、屈巫一班大將,雲卷風馳,直造陳都,如入無人之境,所至安慰居民,秋毫無犯。夏徵舒知人心怨己,潛奔株林。
굴무가 몇 년 전에 진(陳)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우연히 밖으로 놀러 나온 하희의 용모를 엿보고, 또 그녀가 방중술에 능하여 나이 들수록 더욱 젊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속으로 매우 사모하게 되었다. 이에 하징서가 진영공을 시해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 기회를 빌려서 하희를 사로잡으려고 초장왕에게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정벌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했다. 영윤 손숙오도 역시 말하기를, “진(陳)나라의 죄는 마땅히 토벌해야 합니다.” 했다. 초장왕이 마침내 마음을 결정하였다. 그때가 주정왕 9년(기원전 598년)으로 진성공 오(午) 원년이었다. 초장왕이 먼저 격문을 진(陳)나라에 전달하니, 격문에 쓰기를, “초왕이 그대에게 보이노라! 소서씨(少西氏 ; 하징서)가 그 군주를 시해하여 귀신과 사람이 함께 분노하였다. 그대 나라가 치죄하지 못하니 과인이 그대들을 위해 죄를 물으려 하노라. 벌은 오로지 죄 지은 자만이 받을 것이니, 나머지 신하와 백성들은 조용히 듣고 소동하지 말라!” 했다. 진나라 사람들이 격문을 보고 모두가 그 죄를 하징서에게 돌렸다. 그들은 간절히 초나라의 손을 빌려 하징서를 제거하려고 했기 때문에 적을 막아낼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초장왕이 친히 3군을 이끌고, 공자 영제(公子嬰齊), 공자 측(公子側) 및 굴무 등의 일반 장군들과 함께 구름과 바람처럼 무인지경을 달리듯 진(陳)나라 도성에 이르렀다. 진나라 백성을 위로하여 안심시키고 군사들에게 터럭 하나도 범하지 못하게 했다. 하징서는 백성들이 자기를 원망하는 것을 알고, 몰래 주림으로 달아났다.
時陳成公尚在晉國未歸。大夫轅頗,與諸臣商議:「楚王為我討罪,誅止徵舒。不如執徵舒獻於楚軍,遣使求和,保全社稷,此為上策。」群臣皆以為然。轅頗乃命其子僑如,統兵往株林,擒拿徵舒。僑如未行,楚兵已至城下。陳國久無政令,況陳侯不在國,百姓做主,開門迎楚。楚莊王整隊而入。諸將將轅頗等擁至莊王而前,莊王問:「徵舒何在?」轅頗對曰:「在株林。」莊王問曰:「誰非臣子,如何容此逆賊,不加誅討?」轅頗對曰:「非不欲討,力不加也。」莊王即命轅頗為嚮導,自引大軍,往株林進發,卻留公子嬰齊一軍,屯紮城中。
그때 진성공은 아직 진(晉)나라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대부 원파(轅頗)가 여러 신하와 상의하기를, “초장왕이 우리를 위하여 역신을 토벌하러 왔는데 하징서만 죽이려 합니다. 차라리 하징서를 잡아서 초나라 군대에 바치고 사자를 보내 강화를 청한다면 사직은 보전할 수 있으니 그것이 상책입니다.” 했다. 여러 신하가 모두 그렇다고 생각했다. 원파가 즉시 그 아들 교여(僑如)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주림에 가서 하징서를 잡아오게 했다. 교여가 미처 가기도 전에 초나라 군사가 이미 도성 밑에 이르렀다. 진(陳)나라에는 오랫동안 정령이 없었고, 더욱이 진성공마저 나라 안에 없으니, 백성들이 주인이 되어 성문을 열어 초나라 군사들을 맞아들였다. 초장왕이 군대를 질서정연하게 이끌고 도성 안으로 들어왔다. 초나라의 여러 장군이 원파 등을 초장왕 앞에 데려오자 초장왕이 묻기를, “하징서는 어디에 있는가?” 했다. 원파가 대답하기를, “주림에 있습니다.” 하니, 초장왕이 묻기를, “누가 진후(陳侯)의 신하가 아닌가? 어찌하여 그런 역적을 용납하여 죽이지 않는가?” 했다. 원파가 대답하기를, “우리가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힘이 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했다. 초장왕이 즉시 원파에게 길을 인도하라고 명하고,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주림을 향해 출발하고, 공자 영제에게 일군을 거느리고 진(陳)나라 도성 안에 주둔하게 했다.
再說,徵舒正欲收拾家財,奉了母親夏姬,逃奔鄭國。只爭一刻,楚兵圍住株林,將徵舒拿住。莊王命囚於後車,問:「何以不見夏姬?」使將士搜其家,於園中得之。荷華逃去,不知所適。夏姬向莊王再拜言曰:「不幸國亂家亡,賤妾婦人,命懸大王之手。倘賜矜宥,願充婢役!」夏姬顏色妍麗,語復詳雅,莊王一見,心志迷惑,謂諸將曰:「楚國後宮雖多,如夏姬者絕少,寡人意欲納之,以備妃嬪,諸卿以為何如?」屈巫諫曰:「不可,不可!吾主用兵於陳,討其罪也。若納夏姬,是貪其色也。討罪為義,貪色為淫。以義始而以淫終,伯主舉動,不當如此。」
한편, 하징서는 집안 재물을 수습하여 모친 하희를 모시고 정나라로 도망치려고 했다. 시각을 다투고 있는 참에 초나라 군사들은 주림을 에워싸서 하징서를 붙잡았다. 초장왕이 뒷수레에 가두도록 명하고, 좌우에 묻기를, “어찌하여 하희는 보이지 않는가?” 했다. 장수와 군사들을 시켜 집을 수색하여 정원 속에서 하희를 찾았다. 하화는 도망가서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하희가 초장왕에게 재배하고 말하기를, “불행히도 나라에 변란이 일어나고 집안이 망하여, 아녀자인 천첩의 목숨은 대왕의 손에 달리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불쌍히 여겨 용서하시면 노비에라도 채워 주십시오.” 했다. 하희의 얼굴은 아름다웠고 말은 조용하고 온아하여 초장왕이 한번 보자 마음에 미혹하여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초나라에 후궁이 비록 많지만, 하희만한 여자는 아주 드물다. 과인이 후궁으로 데려가 비빈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여러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굴무가 간하기를,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주군께서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에 온 것은 군주를 죽인 죄를 토벌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하희를 맞아들이신다면 그것은 여색을 탐하는 것입니다. 죄를 토벌함은 의(義)를 세우기 위함이며 여색을 탐하게 되는 일은 음란함을 즐기기 위해서입니다. 의(義)로 시작했다가 음란으로 결말을 내시는 것은 천하 제후의 우두머리가 되려는 대왕께서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했다.
莊王曰:「子靈之言甚正,寡人不敢納矣。只是此婦世間尤物,若再經寡人之眼,必然不能自制。」叫軍士鑿開後垣,縱其所之。時將軍公子側在旁,亦貪夏姬美貌,見莊王已不收用,跪而請曰:「臣中年無妻,乞我王賜臣為室。」屈巫又奏曰:「吾王不可許也。」公子側怒曰:「子靈不容我娶夏姬,是何緣故?」屈巫曰:「此婦乃天地間不祥之物,據吾所知者言之:殀子蠻,殺御叔,弒陳侯,戳夏南,出孔儀,喪陳國,不祥莫大焉!天下多美婦人,何必取此淫物,以貽後悔?」莊王曰:「如子靈所言,寡人亦畏之矣!」
초장왕이 말하기를, “자령(子靈 ; 굴무)의 말이 매우 옳다! 과인은 감히 하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 다만 이 여자는 세상에서 빼어난 미인이니 만약에 다시 과인의 눈에 다시 뜨인다면 필연코 내가 자제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군사들에게 명하여 후원의 담을 헐어서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게 하였다. 그때 공자 측이 옆에 있다가 역시 하희의 미모를 탐내었다. 초장왕이 하희를 취하지 않는 것을 보고, 무릎을 꿇고 청하기를, “신이 중년에 아내가 없으니, 저에게 아내로 주십시오.” 했다. 굴무가 또 아뢰기를, “대왕께서 허락하시면 안 됩니다.” 하니, 공자 측이 노하여 말하기를, “자령은 내가 하희를 아내로 삼겠다는 것을 무엇 때문에 용납하지 못하는가?” 했다. 굴무가 말하기를, “이 여인은 천지간에 상서롭지 못한 요물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근거로 말해 보면, 정나라의 자만(子蠻)을 요절하게 하고, 다시 하어숙(夏御叔)을 젊은 나이에 죽게 만들으며, 진영공이 시해되게 하였고, 하징서는 장차 죽음을 당할 것이며, 공녕과 의행보가 도망치게 하고, 진(陳)나라가 장차 망하게 될 것이니, 불길하기가 막대합니다. 천하에 아름다운 여인이 많은데, 하필 이 음란한 여인을 취하여 후회를 남기려 하십니까?”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자령의 말과 같으니 과인도 또한 두렵구나!” 했다.
公子側曰:「既如此,我亦不娶了。只是一件,你說主公娶不得,我亦娶不得,難道你娶了不成?」屈巫連聲曰:「不敢,不敢!」莊王曰:「物無所主,人必爭之。聞連尹襄老,近日喪偶,賜為繼室可也。」時襄老引兵從征,在於後隊。莊王召至,以夏姬賜之,夫婦謝恩而出。公子側倒也罷了。只是屈巫諫止莊王,打斷公子側,本欲留與自家;見莊王賜與襄老,暗暗叫道:「可惜,可惜!」又暗想道:「這個老兒,如何當得起那婦人?少不得一年半載,仍做寡婦,到其間再作區處。」這是屈巫意中之事,口裏卻不曾說出.莊王居株林一宿,仍至陳國;公子嬰齊迎接入城。
공자 측이 말하기를, “이미 그렇다면 나도 역시 그녀를 취하지 않으리다. 다만 이 일에 대해서 그대도 그녀를 취하지 않겠다고 주공께 말하면 나도 역시 취하지 않겠소. 그대는 하희를 취하겠다고 말하지 못하겠지요?” 하니, 굴무가 곧이어 말하기를, “감히 취하지 않겠소. 감히 취하지 않겠소.” 했다. 초장왕이 말하기를, “미인에게 주인이 없으니 사람들이 반드시 다툴 것이다. 내가 들으니 연윤(連尹) 양로(尹襄老)가 얼마 전에 아내를 잃었다 하니, 그에게 후취 부인으로 주어야 하겠다.” 했다. 그때 양로는 군사를 이끌고 초장왕을 따라와서 후대에 있었다. 초장왕이 양로를 불러 하희를 주니, 부부가 감사하고 물러갔다. 공자 측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다만 굴무는 장왕에게 간하여 공자 측을 좌절시키고 원래 자기가 데려가려고 했으나, 장왕이 하희를 양로에게 주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부르짖기를, “아깝다, 아까워!”하고, 또 몰래 생각하기를, “그 사람은 이미 늙었으니 어찌 그 여자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일 년이나 반년이면 과부로 만들 것이고 그때가 되면 다시 변통하여 처리해야지.” 했다. 이것은 굴무의 속마음이고 입으로는 결코 발설하지 않았다. 초장왕이 주림에서 하루를 묵고, 진(陳)나라 도성으로 돌아오니 공자 영제가 영접하여 입성했다.
莊王傳令將徵舒囚出栗門,車裂以殉,如齊襄公處高渠彌之刑。史臣有詩云:「陳主荒淫雖自取,徵舒弒逆亦違條;莊王弔伐如時雨,泗上諸侯望羽旄。」莊王號令徵舒已畢,將陳國版圖查明,滅陳以為楚縣。拜公子嬰齊為陳公,使守其地。陳大夫轅頗等,悉帶回郢都。南方屬國,聞楚王滅陳而歸,俱來朝賀,各處縣公,自不必說。獨有大夫申叔時,使齊未歸。其時齊惠公薨,世子無野即位,是為頃公。齊楚一向交好,故莊王遣申叔時,往行弔舊賀新之禮。(這一差還在未伐陳以前。及莊王歸楚三日之後,申叔方纔回轉,復命而退,並無慶賀之言。)
초장왕이 명령을 내려 하징서를 감옥에서 율문(栗門)으로 끌어내어 거열형에 처하여 죽였다. 이것은 제양공이 고거미를 죽인 형벌과 같았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진영공이 황음하여 비록 스스로 화를 당했지만, 하징서도 군주를 죽여 또한 국법을 어겼다. 초장왕의 토벌은 때맞추어 내린 비와 같았고, 사수 강변의 제후들은 초나라 깃발을 우러러보았다.” 했다. 초장왕이 하징서의 시체를 조리돌리고 나서, 진(陳)나라의 영역을 자세히 파악한 후에 진나라를 멸하여 초나라의 현으로 만들었다. 공자 영제를 진공(陳公)에 봉하여 그 땅을 지키도록 했다. 진(陳)나라 대부 원파 등은 모두 초나라 도성 영성으로 끌려갔다. 남방의 속국들은 초장왕이 진나라를 멸하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와서 조정에서 축하했고, 각처의 현공(縣公)들도 스스로 와서 축하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때 대부 신숙시(申叔時)는 홀로 제나라에 사자로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제나라에서는 혜공(惠公)이 죽고 세자 무야(無野)가 즉위하니 그가 제경공(齊頃公)이다. 제나라와 초나라는 그 후에 죽 수호를 맺었으므로 초장왕이 신숙시를 보내어 제혜공의 문상과 제경공의 즉위 축하를 하게 했다. (그가 사자로 갈 때는 아직 진나라를 치기 전이었고, 초장왕이 초나라로 돌아온 3일 후에 신숙시가 막 돌아와서 복명하고, 물러나면서 축하하는 말이 없었다.)
莊王使內侍傳語責之曰:「夏徵舒無道,弒其君,寡人討其罪而戮之,版圖收於國中,義聲聞於天下。諸侯縣公,無不稱賀,汝獨無一言,豈以寡人討陳之舉為非耶?」申叔時隨使者求見楚王,請面畢其辭;莊王許之。申叔時曰:「王聞『蹊田奪牛』之說乎?」莊王曰:「未聞也。」申叔時曰:「今有人牽牛取徑於他人之田者,踐其禾稼,田主怒奪其牛。此獄若在王前,何以斷之?」莊王曰:「牽牛踐田,所傷未多也。奪其牛,太甚矣!寡人若斷此獄,薄責牽牛者,而還其牛。子以為當否?」
초장왕이 내시를 시켜 신숙시를 책하는 말을 전하기를, “하징서가 무도하여 그 군주를 죽였으니 과인이 그 죄를 물어 죽였다. 그리고 그 영역을 우리나라에 합쳤으니 의로운 소문이 천하에 떨쳤다. 제후들과 현공(縣公)들이 축하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유독 그대만이 한마디도 없으니 어째서 과인이 진나라를 토벌한 일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했다. 신숙시가 사자를 따라와서 초장왕을 뵙기를 청해 면전에서 말하겠다고 하니, 장왕이 허락했다. 신숙시가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혜전탈우(蹊田奪牛 ; 밭을 밟았다고 소를 빼앗음)’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들어보지 못했소.” 했다. 신숙시가 말하기를, “지금 어떤 사람이 소를 끌고 남의 밭을 가로질러 갔는데 곡식을 밟았습니다. 밭 주인이 노하여 그 소를 빼앗았습니다. 이 송사를 대왕 앞으로 가져와 판결을 내리라고 한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소를 끌고 가다 밭을 밟은 것은 손상이 많지 않은데 그 소를 빼앗는 것은 너무 심하오! 과인이 만약 이 송사를 판단한다면 소를 끌고 간 자에게는 가벼운 벌을 내리고 소를 돌려주겠소. 그대는 마땅하다고 생각하시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시오?” 했다.
申叔時曰:「王何明於斷獄,而昧於斷陳也?夫徵舒有罪,止於弒君,未至亡國也;王討其罪足矣。又取其國,此與牽牛何異?又何賀乎?」莊王頓足曰:「善哉此言!寡人未之聞也!」申叔時曰:「王既以臣言為善,何不效反牛之事?」莊王立召陳大夫轅頗,問:「陳君何在?」頗答曰:「向往晉國,今不知何在。」言訖,不覺淚下。莊王慘然曰:「吾當復封汝國,汝可迎陳君而立之。世世附楚,勿依違南北,有負寡人之德。」又召孔寧儀行父吩咐:「放汝歸國,共輔陳君!」
신숙시가 말하기를, “대왕께서 송사에는 밝은 판단을 하시면서, 진나라에는 어찌하여 어두운 판단을 하셨습니까? 무릇 하징서가 지은 죄는 진나라 군주를 죽인 것이지 나라를 망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왕께서는 하징서의 죄를 물어 처형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러고도 진나라를 취하셨으니 이것은 소를 빼앗은 일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러니 어찌 축하하겠습니까?” 했다. 초장왕이 발을 구르며 말하기를, “그 말이 옳소! 과인은 아직 그런 말을 듣지 못했소!” 했다. 신숙시가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신의 말이 옳다고 하시고서 어찌하여 빼앗은 소를 되돌려 주는 일을 본받지 않으십니까?” 했다. 초장왕이 즉시 진나라 대부 원파를 불러 묻기를, “진(陳)나라 군주는 어디 있소?” 하니, 원파가 대답하기를, “전날에 진(晉)나라에 갔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했다. 원파가 말을 마치고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렸다. 초장왕이 측은해하며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그대의 나라를 회복시킬 테니 그대는 진(陳)나라 군주를 맞아 옹립하여 대대로 초나라를 받들어 남북으로 우물쭈물하지 말고 과인의 은덕을 저버리지 말라.” 하고, 또 공녕과 의행보를 불러 분부하기를, “그대들도 귀국시킬 테니 함께 진(陳)나라 군주를 보필하시오!” 했다.
轅頗明知孔儀二人是個禍根,不敢在楚王面前說明,只是含糊一同拜謝而行。將出楚境,正遇陳侯午自晉而歸,聞其國已滅,亦欲如楚,面見楚王。轅頗乃述楚王之美意,君臣並駕至陳。守將公子嬰齊,已接得楚王之命,召還本國,遂將版圖交割還陳,自歸楚國去了。此乃楚莊王第一件好處。髯翁有詩云:「縣陳誰料復封陳?跖舜還從一念新;南楚義聲馳四海,須知賢主賴賢臣。」孔寧歸國,未一月,白日見夏徵舒來索命,因得狂疾,自赴池中而死。死之後,儀行父夢見陳靈公孔寧與徵舒三人,來拘他到帝廷對獄,夢中大驚,自此亦得暴疾卒。(此乃淫人之報也!)
원파는 공녕과 의행보 두 사람이 나라를 망친 화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감히 초장왕 앞에서 설명하지 못하고, 다만 우물우물 함께 감사의 말을 올린 후에 귀국했다. 그들이 초나라 국경을 벗어나려고 하는데, 마침 진성공(陳成公) 오(午)를 만났다. 그는 진(晉)나라에서 돌아와 나라가 이미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 초나라에 가서 초장왕을 만나려고 오던 길이었다. 원파가 이에 초장왕의 아름다운 뜻을 상세하게 전하고, 진성공과 신하들이 수레를 나란히 하고 진나라에 도착했다. 진나라를 지키던 장수 공자 영제는 이미 초장왕의 명령으로 본국에 소환되어 마침내 진나라의 영역을 진나라에 돌려주고 자기는 초나라로 돌아갔다. 이것은 초장왕의 가장 훌륭한 일이었다. 염옹(髥翁)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속현이 된 진나라를 회복시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도척도 순임금도 마음을 먹기에 달렸는데, 남방의 초나라가 의기를 사해에 떨쳤으니, 어진 군주가 어진 신하에게 힘입었음을 알아야 한다.” 했다. 공녕이 귀국한지 한 달이 되지 않아서 대낮에 하징서가 찾아와 목숨을 돌려 달라는 허깨비를 보고 그로 인해 미쳐서 스스로 연못에 빠져 죽었다. 그가 죽은 후 의행보도 꿈에 진영공과 공녕과 하징서 세 사람이 와서 상제 앞으로 끌고 가서 심문을 받았다. 꿈속에서 크게 놀라서 이로부터 역시 갑자기 병을 얻어 죽었다. (이것이 음탕한 사람들의 업보였다.)
再說,公子嬰齊既返楚國,入見莊王,猶自稱陳公嬰齊。莊王曰:「寡人已復陳國矣,當別圖所以償卿也。」嬰齊遂請申呂之田,莊王將許之。屈巫奏曰:「此北方之賦,國家所恃以禦晉寇者,不可以充賞。」莊王乃止。及申叔時告老,莊王封屈巫為申公,屈巫並不推辭。嬰齊由是與屈巫有隙,周定王十年,楚莊王之十七年也。莊王以陳雖南附,鄭猶從晉,未肯服楚,乃與諸大夫計議。令尹孫叔敖曰:「我伐鄭,晉救必至,非大軍不可。」莊王曰:「寡人意正如此。」乃悉起三軍兩廣之眾,浩浩蕩蕩,殺奔滎陽而來,連尹襄老為前部。
한편, 공자 영제는 초나라에 돌아와서 초장왕을 뵙고 자기를 진공(陳公)이라고 자칭했다. 장왕이 말하기를, “과인이 이미 진나라를 회복시켰으니 마땅히 별도로 경에게 보상을 하겠다.” 하니, 영제가 즉시 신(申)과 여(呂)의 땅을 청하여 초장왕이 허락하려고 하였다. 굴무가 아뢰기를, “이곳 북방의 세금으로 국가가 믿고 북쪽의 진(晉)나라의 침략을 막고 있습니다. 그곳을 상으로 줄 수는 없습니다.” 하니, 초장왕이 그만두었다. 이에 신숙시가 늙었다며 물러가려 하자, 초장왕은 굴무를 신공으로 삼았다. 굴무는 사양하지 않았다. 영제가 이 일로 인해 굴무와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주정왕 10년(기원전 596년)은 초장왕 17년인데, 초장왕은 진나라가 비록 남쪽 초나라에 붙었다고 하지만, 정나라는 진(晉)나라를 따르고 초나라에 복종하지 않았다. 이에 여러 대부와 대책을 의논했다. 영윤 손숙오가 말하기를, “우리가 정나라를 치면, 진(晉)나라의 구원병이 틀림없이 이를 것입니다. 그러니 대군이 아니면 안 됩니다.”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과인의 뜻도 바로 그와 같소.” 했다. 이에 삼군과 양광의 군사를 모두 일으켜 호호탕탕하게 형양(滎陽)을 향해 달려갔다. 연윤(連尹) 양로(襄老)가 앞 부대를 맡았다.
臨發時,健將唐狡請曰:「鄭小國,不足煩大軍,狡願自率部下百人,前行一日,為三軍開路。」襄老壯其志,許之。唐狡所至力戰,當者輒敗,兵不留行,每夕掃除營地,以待大軍。莊王率諸將直抵鄭郊,未曾有一兵之阻,一日之稽。莊王怪其神速,謂襄老曰:「不意卿老而益壯,勇於前進如此!」襄老對曰:「非臣之力,乃副將唐狡力戰所致也。」莊王即召唐狡,欲厚賞之。唐狡對曰:「臣受君王之賜已厚,今日聊以報效,敢復叨賞乎?」莊王訝曰:「寡人未嘗識卿,何處受寡人之賜?」
앞 부대의 양로가 출발할 때, 늠름한 장수 당교(唐狡)가 청하기를, “정나라는 작은 나라라 대군을 번거롭게 할 것이 없습니다. 제가 부하 백 명을 거느리고 하루를 앞서가서 삼군을 위해 길을 열겠습니다.” 하니, 양로가 그 뜻을 장하게 여겨 허락했다. 당교가 이르는 곳마다 힘을 다해 싸우니 맞선 자들이 모두 패하여 군사를 가로막지 않았다. 매일 저녁때가 되면 영채 자리를 깨끗이 청소해 놓고 대군을 기다리곤 했다. 초장왕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정나라 도성 밖에 당도하였으나 중도에 한 명의 군사들도 막지 않았고 하루도 지체시키지도 않았다. 초장왕이 그 신속함을 괴이하게 생각하여 양로에게 말하기를, “뜻밖에 경이 늙을수록 더욱 씩씩하여 이처럼 용감하게 전진하였소.” 하니, 양로가 대답하기를, “신의 힘이 아닙니다. 부장 당교가 힘써 싸운 덕분입니다.” 했다. 초장왕이 즉시 당교를 불러 후한 상을 내리려고 했다. 당교가 대답하기를, “신은 이미 대왕으로부터 후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오늘 오로지 그 은혜를 갚고자 하는데 감히 다시 상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초장왕이 의아해하며 말하기를, “과인이 전에 경을 본 적이 없는데, 어디서 과인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하는가?” 했다.
唐狡對曰:「絕纓會上,牽美人之袂者,即臣也。蒙君王不殺之恩,故舍命相報。」莊王嘆息曰:「嗟乎!使寡人當時明燭治罪,安得此人之死力哉?」命軍正紀其首功,俟平鄭之後,將重用之。唐狡謂人曰:「吾得死罪於君,君隱而不誅,是以報之。然既已明言,不敢以罪人徼後日之賞。」即夜遁去,不知所往。莊王聞之,嘆曰:「真烈士矣!」大軍攻破郊關,直抵城下。莊王傳令,四面築長圍攻之,凡十有七日,晝夜不息。鄭襄公恃晉之救,不即行成。軍士死傷者甚眾。城東北角崩陷數十丈,楚兵將登,莊王聞城內哭聲震地,心中不忍,麾軍退十里。
당교가 대답하기를, “대왕께서 절영회(絶纓會)를 열었을 때 미인의 소매를 잡아당긴 사람은 신이었습니다. 군왕께서 저를 죽이지 않은 은혜를 입고 목숨을 걸고 보답하려고 했습니다.” 하니, 초장왕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아! 설사 과인이 그때 촛불을 밝혀 죄인을 잡아 다스렸던들 어찌 이와 같이 목숨을 바쳐 힘써 싸운 장수를 얻었겠는가?” 했다. 초장왕이 군정(군 법무관)에게 명하여 당교의 공을 일등으로 기록하게 하고는 정나라를 평정한 후에 돌아가 장차 중용하려고 했다. 당교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군주에게 죽을죄를 지었으나 군주가 이를 감추어서 죽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그 은혜에 보답한 것이다. 그런데 이미 그 일을 밝혔으니 감히 죄인으로서 후일에 상을 받을 수는 없다.” 하고, 그날 밤으로 사라져 버렸는데 아무도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초장왕이 듣고 탄식해 말하기를, “참으로 열사다!” 했다. 초나라의 대군이 정나라 교외의 관문을 깨뜨리고 곧바로 도성 밑에 도착했다. 초장왕이 명령을 내려 사면에서 도성을 포위한 후 공격했다. 초군은 열흘하고도 7일 동안 주야로 쉬지 않고 성을 공격했다. 정양공은 진(晉)나라의 구원군이 올 것이라고 믿고 초나라와 강화하지 않았다. 죽거나 부상당한 정나라 군사들이 아주 많았다. 도성의 동북쪽 모서리의 수십 길이 무너지고, 초나라 군사들이 성 위로 오르려고 했다. 초장왕이 도성 안에서 땅을 흔드는 곡성을 듣고, 마음속으로 차마 듣지 못해 군사들을 10리 뒤로 물러나게 했다.
公子嬰齊進曰:「城陷正可乘勢,何以退師?」莊王曰:「鄭知吾威,未知吾德,姑退以示德。視其從違,以為進退可也。」鄭襄公聞楚師退,疑晉救已至,乃驅百姓修築城垣,男女皆上城巡守。莊王知鄭無乞降之意,復進兵圍之。鄭堅守三月,力不能支。楚將樂伯率眾自皇門先登,劈開城門。莊王下令,不許虜掠,三軍肅然。行至逵路,鄭襄公肉袒牽羊,以迎楚師,辭曰:「孤不德,不能服事大國,使君王懷怒,以降師於敝邑,孤知罪矣!存亡死生,一惟君王命。若惠顧先人之好,不遽剪滅,延其宗祀,使得比於附庸,君王之惠也!」
공자 영제가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성이 무너졌으니 바야흐로 이 형세를 타야지, 어찌하여 군사를 물리십니까?”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정나라가 우리의 위세를 알지만 우리의 덕을 모르고 있소. 그래서 잠시 물러나 우리의 덕을 보여주는 것이오. 그들이 우리를 따를 것인지 거역할 것인지를 살펴보고 나서 군사들의 진퇴를 결정해야 할 것이오.” 했다. 정양공은 초나라 군사가 물러갔다는 말을 듣고 진(晉)나라 구원군이 이미 도착한 줄 알고, 즉시 백성들을 시켜 무너진 성벽을 쌓고 남녀 모두가 성 위에서 지키게 했다. 초장왕은 정나라가 항복할 의사가 없음을 알고 다시 군사를 진격시켜 포위하게 했다. 정나라는 3개월 동안이나 굳게 지켰으나 더 버틸 힘이 없었다. 초나라 장수 낙백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황문(皇門)을 먼저 올라 성문을 깨뜨려 열었다. 초장왕이 명령을 내려 노략질을 금하고 삼군이 질서 정연하게 큰 길로 행진하여 이르니, 정양공은 웃통을 벗고 양을 끌고 나와 초나라 군사를 맞이하여, 사죄하여 말하기를, “과인이 덕이 없어 대국을 받들어 복종하지 않고 군왕을 노하게 하여 우리나라에서 항복하게 되었으니, 제가 그 죄를 압니다. 이 나라의 존망과 생사는 오로지 대왕의 명령에 달려 있으니, 만약 선인들의 우호 관계를 생각하여 은혜를 베풀어 이 나라를 멸하지 않고 종사를 잇게 해주시면, 부용국(附庸國)과 비슷해도 군왕의 은혜입니다.” 했다.
公子嬰齊進曰:「鄭力窮而降,赦之復叛,不如滅之。」莊王曰:「申公若在,又將以蹊田奪牛見誚矣!」即麾軍退三十里。鄭襄公親至楚軍,謝罪請盟,留其弟公子去疾為質。莊王班師北行,次於郔,諜報:「晉國拜荀林父為大將,先穀為副,出車六百乘,前來救鄭,已過黃河。」莊王問於諸將曰:「晉師將至,歸乎?抑戰乎?」令尹孫叔敖對曰:「鄭之未成,戰晉宜也;已得鄭矣,又尋仇於晉,焉用之?不如全師而歸,萬無一失。」嬖人伍參奏曰:「令尹之言非也。鄭謂我力不及,是以從晉;若晉來而避之,真我不及矣。且晉知鄭之從楚,必以兵臨鄭,晉以救來,我亦以救往,不亦可乎?」
공자 영제가 나와 말하기를, “정나라가 힘이 다하여 항복했는데 우리가 용서한다면 다시 배반할 것입니다. 정나라를 멸하는 것이 낫습니다.”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신공(신숙시)이 만약 있다면 또 혜전탈우(蹊田奪牛 ; 밭을 밟았다고 소를 빼앗음)로써 나를 책망하지 않겠느냐?” 하고, 즉시 군사를 이끌고 30리 밖으로 퇴군했다. 정양공이 초나라 군영에 친히 방문하여 사죄하고 회맹을 청하며 그의 동생 공자 거질(去疾)을 인질로 초나라 군영에 머물게 했다. 초장왕이 군사를 돌려 북쪽으로 가서 연(郔) 땅에 머무르니, 첩자가 보고하기를, “진(晉)나라가 순림보를 대장으로 삼고 선곡을 부장으로 삼아, 전차 600대를 동원하여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진격하여 이미 황하를 건넜다고 합니다.” 했다. 초장왕이 여러 장수에게 묻기를, “진(晉)나라 군사들이 장차 도착할 것인데 돌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싸워야 하는가?” 하니, 영윤 손숙오가 대답하기를, “우리가 정나라와 강화하지 않았다면 마땅히 진(晉)나라와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정나라의 항복을 받았으니 또 진(晉)나라와 싸워 원수가 되면 무엇 하겠습니까? 군사를 온전히 하여 돌아가는 것이 만 가지 중에 하나도 잃지 않는 것입니다.” 했다. 초장왕의 총애를 받는 오삼(伍參)이 아뢰기를, “영윤의 말씀은 옳지 않습니다. 정나라는 우리의 힘이 진(晉)나라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진(晉)나라를 따른 것입니다. 만약 진(晉)나라 군사들이 오는데 그들을 피한다면 참으로 우리가 진(晉 )나라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진(晉)나라는 정나라가 초나라를 따르는 것을 알면 진(晉)나라 군사는 정나라로 진군할 것입니다. 진(晉)나라 군사가 정나라를 구하러 왔는데, 우리도 역시 정나라를 구하러 가야만 되지 않겠습니까?” 했다.
孫叔敖曰:「昔歲入陳,今歲入鄭,楚兵已勞敝矣。若戰而不捷,雖食參之肉,豈足贖罪?」伍參曰:「若戰而捷,令尹為無謀矣;如其不捷,參之肉將為晉軍所食,何能及楚人之口?」莊王乃遍問諸將,各授以筆,使書其掌,主戰者寫「戰」字,主退者寫「退」字,諸將寫訖,莊王使開掌驗之。惟中軍元帥虞邱,及連尹襄老、裨將蔡鳩居彭名四人,掌中寫「退」字,其他公子嬰齊、公子側、公子穀臣、屈蕩、潘黨、樂伯、養繇基、許伯、熊負羈、許偃……等二十餘人,俱「戰」字。莊王曰:「虞邱老臣之見,與令尹合,言『退』者是矣。」乃傳令南轅反旆,來日飲馬於河而歸。
손숙오가 말하기를, “작년에 진나라를 쳤고 올해에 또 정나라를 쳤으니 초나라 군사들은 이미 피로에 지쳐 있소. 만약에 진(晉)나라 군사와 싸워서 이기지 못한다면 비록 그대 오삼의 살을 먹은들 어찌 족히 속죄하겠소?” 하니, 오삼이 말하기를, “만약 진(晉)나라 군사와 싸워서 이기면 영윤께서는 앞을 내다보는 식견이 없는 것이며, 만일 우리가 싸워서 이기지 못한다면 이 오삼의 고기는 장차 진(晉)나라 군사에게 먹힐 것이니, 어찌 능히 초나라 사람의 입에 돌아가겠습니까?” 했다. 초장왕이 여러 장수에게 두루 물어 각기 붓을 잡고 손바닥에 쓰게 하여, 싸움을 주장하는 자는 ‘전(戰)’자를 쓰고, 퇴각을 주장하는 자는 ‘퇴(退)’자를 쓰게 하여 살펴보았다. 오직 중군원수 우구(虞邱)와 연윤(連尹) 양로(襄老), 비장(裨將) 채구거(蔡鳩居)와 팽명(彭名) 네 사람만이 손바닥에 ‘퇴’ 자를 쓰고 그 나머지 공자 영제(公子嬰齊), 공자 측(公子側), 공자 곡신(公子穀臣), 굴탕(屈蕩), 반당(潘黨), 낙백(樂伯), 양요기(養繇基), 허백(許伯), 웅부기(熊負羈), 허언(許偃) 등 20여 명은 모두 ‘전’ 자를 썼다. 초장왕이 말하기를, “노신 우구의 견해가 영윤의 견해와 같으니 퇴군하는 것이 옳다.” 하고, 즉시 명령을 내려 수레를 남쪽으로 돌리고 깃발을 돌려서, 다음날 황하에서 말에 물을 먹이고 돌아가기로 했다.
伍參夜求見莊王曰:「君王何畏於晉,而棄鄭以畀之也?」莊王曰:「寡人未嘗棄鄭也。」伍參曰:「楚兵頓鄭城下九十日,而僅得鄭成。今晉來而楚去,使晉得以救鄭為功而收鄭,楚自此不復有鄭矣,非棄鄭而何?」莊王曰:「令尹言戰晉未必捷,是以去之。」伍參曰:「臣已料之審矣。荀林父新將中軍,威信未孚於眾。其佐先穀,先軫之孫,先且居之子,恃其世勳,且剛愎不仁,非用命之將也。欒趙之輩,皆累世名將,各行其意,號令不一。晉師雖多,敗之易耳。且王以一國之主,而避晉之諸臣,將遺笑於天下,況能有鄭乎?」莊王愕然曰:「寡人雖不能軍,何至出晉諸臣之下?寡人從子戰矣!」即夜使人告令尹孫叔敖,將乘轅一齊改為北嚮,進至管城,以待晉師。
오삼이 밤에 초장왕을 찾아와 말하기를, “군왕께서는 어찌하여 진(晉)나라를 두려워하십니까? 정나라를 버려서 그들에게 주려고 하십니까?”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과인은 아직 정나라를 버린다고는 하지 않았다.” 했다. 오삼이 말하기를, “초나라 군사가 정나라 도성 밑에 90일 동안 주둔하다가 간신히 정나라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진(晉)나라 군대가 온다고 하니 초나라 군사가 떠나려고 합니다. 그러면 진(晉)나라 군사가 정나라를 구원하여 정나라를 거둘 것입니다. 초나라는 이로부터 다시 정나라를 지배하지 못할 것입니다. 정나라를 버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하니, 초장왕이 말하기를, “영윤은 진(晉)나라 군사와 싸우면 반드시 이기지 못한다고 하니, 그래서 물러가려는 것이다.” 했다. 오삼이 말하기를, “신은 이미 헤아려 살펴보았습니다. 순림보는 중군 원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위엄과 믿음을 여러 사람으로부터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보좌인 선곡(先穀)은 선진의 손자이며 선차거의 아들인데 자기 조부와 부친의 공적을 믿고 깐깐하고 고집이 세며 인자하지 않아서 명령을 따를 장수가 아닙니다. 난씨(欒氏)와 조씨(趙氏)의 무리는 모두가 여러 대의 명장이라 각기 제 뜻대로 하려고 하여 군령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진(晉)나라 군사가 비록 많다고 하나 패퇴시키기가 쉽습니다. 또한 대왕께서는 한 나라의 주인이신데, 진(晉)나라의 신하들을 피하면, 장차 천하에 웃음거리를 남길 것이니, 하물며 능히 정나라를 지배하겠습니까?” 하니, 초장왕이 깜짝 놀라 말하기를, “과인이 비록 군사를 부리는데 능하지 않아도 어찌 진(晉)나라의 신하들보다 못하겠는가? 과인은 그대의 말을 쫓아 진(晉)나라 군사와 싸우겠다!” 했다. 즉시 밤에 사람을 시켜 영윤 손숙오에게 고하게 하고 수레를 일제히 북쪽으로 향하게 하여 관성(管城)에 진격하여 진(晉)나라 군사를 기다렸다.
不知勝負如何,且看下回分解。
승부가 어찌 될지 알 수 없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