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葆光의 수요 시 산책 52)
통영극
설렐 수밖에 없었다
이 계절이 한꺼번에 다 몰려가 버린다 해도 끝내 눈빛으로
남아 있을 여기 이 거리가, 내 속의 아련함에 풍덩,
빠져서, 거기에 통영이 있어서,
전혁림 미술관 그림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와
청마 유치환 생가 아래 골목길 따라오는 파도 소리는
정오의 햇살 하나하나에 부서지고 있었고
비 지나간 가지에 햇살 줄줄이 달고 있는 가로수,
그리고 안방 같은 흑백 사진관엔 빛바랜 옛날뿐이라고
이곳 바닷물은 빚 갚듯 반짝, 윤슬을 보여주는 것인데
조막손들이 웃고 떠드는 저 파도의 운동회와
중앙시장 활어가 씻는 소란과 호객 소리는 왜 정겨우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 거리가 낯설지 않은지,
또 백석의 흔적을 못내 아쉬워하는 통영은
왜 흑백사진의 간절함에 갇히는 것일까
햇살은 아직 남아 어깨에 겯고 있는 오후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이름, 봄날의 책방에서
이성복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산문집을 사들고
한 달은 좋이 행복할 것 같은 예감에 뭉클거리다 깨닫느니
기적은 햇살이 이곳 지구까지 왔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무 늦지 않게 여기 왔다는 것이고
통영이라는 이름, 그것 때문일 것이다
아무렴, 윤이상 작곡가가 끝내 영혼으로 돌아와
정처 없던 조국이 기어이 자리 잡은 이곳
남쪽 바다 윤슬에 얹힌 서정은 햇살로도 반짝이지만
햇볕 같은 편안함을 여기 해안가 그리고 골목마다
노오~랗게 물들이는 게 궁금하지도 않은 까닭은 왜일까
거참, 내 청춘은 통영과 사귄 적이 없는데
한 홉도 안 되는 마음에 설운 빛깔을 됫박으로
들이붓는 것은, 저녁노을 때문이겠지만
충무의 옛 이름은 하 예뻐서 붉은 벽돌 사이사이
성당 뜰에 핀 수국으로 부풀어 오르는 그런 이별도 있는지
아니면 나보다 더 그리운 것도 있는지
나만 남기고 통영은 간다 출렁거리며 작별과 함께 굴러간다
- 이정모(1949-2023), 『백 년의 내간체』, 천년의시작,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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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하면 대번에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위 시에도 몇 이름이 나옵니다만, 윤이상, 백석, 유치환, 김춘수, 박경리 등이 그런 이름이고, 언제부터인가 ‘윤이상 음악제’와 ‘전혁림 미술관’과 ‘봄날의 책방’도 동시에 떠오르는 이름입니다. 좀 뜬금없을 수도 있지만 제게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도 같이 떠오르는 이름 중 하나입니다. 올봄에는 통영에 가고 싶었습니다. 올봄만은 아니었지요. 저 역시 “청춘”에 “통영과 사귄 적이 없”음에도 몇 년 전부터 봄이 오면 통영에 가야지 하고 무작정 마음을 먹습니다. 전혀 안 가본 곳도 아니고, 한두 번 가본 곳도 아니고, 한산도 등 섬 산행이나 인근 지역을 여행하면서 들르기도 하고, 언젠가는 제주도 다녀오는 길에 김해공항에서 일부러 통영까지 가서 통영에 사는 지인을 만나 며칠 머무르기도 했고, 그것이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닌데, 굳이 통영에 가야지 마음을 먹은 건 지금 생각하니 결국 못 가본, 저보다 먼저 명예퇴직한 직장 동기가 통영에서 몇 년 살면서 한번 다녀가라고 했던 때부터였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 어쩌면 그것이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닌 게 아니라 오래전 일일 수도 있습니다. 팬데믹 기간을 자꾸 빼먹어서 시간의 경과를 자주 헷갈리기도 하니까요. 올봄에는 ‘전혁림 미술관’과 ‘봄날의 책방’ 공동 주관으로 ‘남해의 봄날 10주년 전시’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정까지 챙겨 놓고 결국 또 못 갔습니다. 하필 통영이라, 작년 늦가을에 “생각만 앞서간 시여! 이젠 나를 이 길에서 풀어 다오”(‘시인의 말’ 일부) 하고, 네 번째이자 마지막인 위 시집을 남기고 이미 이 세상을 등진 시인과 뒤늦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몇 주 전부터 시집을 꺼내서 읽는 중에 저는 또 뜬금없이 하고 많은 시 중에 통영에 관한 시인의 시에 꽂혀서, 시인이 들른 곳이 다시 통영 가면 저 역시 꼭 들러보고 싶은 곳들이어서 시인과 상상의 통영 나들이를 합니다. 하필 통영이라고 했지만, 하필 통영이어서 이제 저는 언젠가 통영에 가면 갈 때마다 시인과 또 상상의 통영 나들이를 하게 되지 않을까, 생업 때문에 시인의 꿈을 접어둔 채 살다가 2007년 50대 후반에 뒤늦게 등단한 시인을 알고 지낸 시간은 10여 년 정도이지만, 이 시 「통영극」 때문에 시인은 어쩌면 아주 오래 제 곁에 머물러 통영, 하면 떠오르는 이름 중의 한 이름으로 떠오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20240626)
첫댓글 저의 고향입니다.
운하대교 위에서 보는 저녁놀은
잔잔한 통영바다를 감싸면서 온 바다를 물들 일 때 멋있습니다.
그냥 동해서 보는 느낌과 사뭇 다릅니다.
꼭 보고 오세요~^^
우리의 시인 백석도 마산을 거쳐 통영에 갔고, 통영에 관한 시를 세 편이나 남겼네요. 남대영 신부님도 마산에 영성 피정을 갔습니다만..
오늘 수요 시 산책에서 아련한 이름들을 많이도 만나게 해 주셔 감사합니다.
https://blog.naver.com/21simon/2231035518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