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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발췌: 장달수
해제(解題)
남만성(南晩星)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은 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의 저서(著書)이다. 하담은 그의 호이고, 파적록은 심심풀이로 쓴 글이란 뜻이니, 스스로 겸손해 하는 말이다.
저자 김시양(1581~1643)은 인조(仁祖) 때 강직하고 직언하며 청렴결백한 사람으로 이름이 난 명신(名臣)이다. 자는 자중(子中), 초명(初名)은 시언(時言),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문장이 뛰어나고 박학(博學)하였다. 인조 때에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로 선정되었다.
《하담파적록》은 그의 세 가지 수필집인 《자해필담(紫海筆談)》ㆍ《부계기문(涪溪記聞)》과 이 《하담파적록》중에서 그 분량이나 내용에 있어서 가장 으뜸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해필담》은 특히 이례적(異例的)인 일, 충격적인 일이나 기담 이사(奇譚異事)를 기록한 것이 주안이었으며, 《부계기문》에는 주로 인물의 평론에 중점을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담파적록》은 이 두 가지를 다 겸하였을 뿐 아니라, 국가의 다사다난하던 때의 복잡하고 반복무쌍한 이면사(裏面史)를 엄정하고 강직하고 정밀한 필치로 기록하고 있다.
《하담파적록》에는 임진왜란 때의 이야기와 병자호란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이괄(李适)의 반란에 대한 것도 있고, 당쟁의 이면사도 있다. 광해의 황음(荒淫)과 폐모 사건(廢母事件) 등이 기록되었으며,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이야기도 있다. 많은 현사ㆍ악인ㆍ권간과 충신들의 숱한 사연과 사적이 적혀 있어, 우리가 정사에서 볼 수 없는 많은 심각하고도 놀라운 일들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그의 붓은 예리하고 엄정하여 누구의 잘못이라도 너그럽게 보아 넘기거나 덮어 두지 않아 자기 당(黨)이거나 반대당이거나 가리지 않고 바로 지적하고 비판하였다. 또 누구의 잘못도 묵살하거나 모른 체하지도 않았다. 친소(親疎)나 당(黨)의 어느 편이냐를 구별하지 않고 그대로 적고 논평하였다. 이 점이 우리로 하여금 《하담파적록》을 신사(信史)로 믿게 한다. 어쨌든 《하담파적록》은 광해ㆍ인조 시대의 다사다난한 역사의 이면을 바로 증언한 귀중한 문헌(文獻)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하담 김시양(金時讓) 찬
우리나라의 동해에는 조수(潮水)가 없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선유(先儒)들 중에 이것을 논한 이가 없다.
우리 나라 문인 중에 성허백(成虛白 성현 成俔)과 같은 무리가 이것을 논했는데, 모두 두찬(杜撰 틀린 곳이 많은 저작)을 면치 못하고, 오직 근일에 참의 한백겸(韓百謙)의 의론만이 그 이치를 바르게 깨달은 것 같다. 그의 의론에 이르기를,
“양극(兩極)을 왕래하는 기운이 남쪽에서부터 북쪽을 향하여 곧장 올라가고 곧장 내려가므로 기(氣)의 여파가 좌우로 멀리 미치지 못하는 것은 그 형세가 그러한 것이다.”
고 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동해만이 밀물과 썰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서해(西海)에도 밀물과 썰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서해는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를 지나서 조지(條支 옛날 나라 이름으로 서해에 임(臨)하였다고 함)의 바다에 이르기까지는 그것이 몇만 리인지 알 수가 없으니, 중국사람들이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들어 보지도 못하였을 것이므로 의논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매양 선비 친구들과 동해에 조수가 없음을 논하여 말하기를,
“큰비에 물이 넘쳐 산과 언덕에 가득할 적에도 주먹만한 언덕이라도 그보다 조금 높은 곳이 있으면 물이 올라가지 못하니, 그 이치가 그러한 것이다. 지세(地勢)가 서북은 높고, 동남은 낮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땅과 바다는 북쪽의 지세가 높은 곳에 접하고 있기 때문에 조수가 올라오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추리한다면, 서해에도 반드시 조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역도원(酈道元 북위(北魏) 사람으로 《수경주(水經注)》를 지음) 등의 발자취가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선유들 중에 이것을 논한 이가 없는 것이다.”
고 하니, 유계화(柳季華 이름은 진(袗)으로, 유성룡의 아들)의 무리가 처음으로 나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이제 한공(韓公 백겸 百謙)이 논한 것을 보니, 나의 견해와 대의가 서로 가깝다. 내가 젊었을 때에 한공을 뵈었는데, 나이가 많아서 장인(丈人) 뻘이었으므로 친밀하게 교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 일에 대해 논하지 못하였는데, 생각하면 한스러운 일이다.
임진왜란 때에 판서 성영(成泳)이 전 승지로서 부모의 초상을 당하여 경기 지방에 있었다. 여주(驪州)에 목사가 결원되니, 그때의 감사가 성영에게 임시로 여주 목사의 일을 보게 하였다. 성령은 조정의 명령은 아니었지만 난리가 극심하였기 때문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조정에서는 그 말을 듣고 강원순찰사(江原巡察使)도 겸하게 하였다. 이는 적이 원주(原州)에 있어서기 때문에 감사가 영동(嶺東)으로 피난가는 바람에 영동 서쪽 지방은 다스릴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목사 홍사효(洪思斅)가 어머니 상복을 입고 가까운 곳에 피난하고 있었는데 길에서 성영을 만나니, 성영이 그가 즉시 말에서 내리지 않는 것을 성내어 하인들을 시켜서 잡아다가 심문하였다. 그가 홍사효 임을 알고 꾸짖기를,
“너는 조관(朝官)으로서 이와 같은 국가의 큰 변란에, 어찌 감히 참여하지 않고 사사로이 피난하고 있는가?”
하니, 홍사효가 말하기를,
“부모의 상(喪)은 중한 것이온데, 어찌 감히 기복(起服 부모의 상중에 벼슬에 나아가는 것)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왜적에게 항복하여 자신의 몸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에 차마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왜병을 피하여 다니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성영이 얼굴에 부끄러워하는 빛을 띠고 말을 달려 가버렸다.
성영의 숙부인 전 승지 세영(世寧)이 왜적에게 항복하고 자기 딸을 왜장(倭將) 평수가(平秀家)에게 시집을 보내기까지 하였고, 성영이 상중에 벼슬한 것도 조정의 명령이 없었기 때문에 홍사효가 이것을 가지고 그를 욕한 것이다. 사람들이 듣고서 통쾌하게 여겼다.
광해(光海) 신유년(1621, 광해군 6) 봄에 오랑캐가 요동(遼東)을 함락시켰다. 그해 여름에 도사(都司)인 산동(山東) 사람 모문룡(毛文龍)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한인(漢人)으로 우리 나라에 피난하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진강(鎭江)의 오랑캐를 습격하여 이긴 뒤에, 한인으로 오랑캐의 수령이 된 자를 죽이고 용천(龍川)에 와서 주둔하였다. 조정에서는 정랑 이형원(李馨遠)을 보내어 접반(接伴)하게 하였다. 그해 겨울에 오랑캐가 강을 건너와서 모문룡을 습격하니, 문룡이 형원과 함께 도망하였다. 오랑캐 군사가 곽산(郭山)에까지 이르렀는데, 한인을 만나면 노약자를 막론하고 닥치는 대로 죽이고 돌아갔다. 문룡이 곧 한인을 불러 모으고 사포(蛇浦)에 방책(防柵)을 설치한 뒤에 산동의 물화(物貨)와 양곡(糧穀)을 수송해 왔는데, 주민의 집이 만도 넘게 되었다. 또 가도(椵島)에 방책을 설치하고 서로 왕래하니, 중국 장사치들이 가도로 몰려들어 가구 수가 매우 많아졌다.
문룡이 군사를 보내어 강을 건너가 오랑캐를 쳤으나 조금의 공도 없고, 그 장수 시가달(時可達) 등이 싸우다 죽은 자가 많았다. 그러나 그 패배를 숨기고 번번이 승리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군수 물자를 축내서 권력 있는 환관들과 결탁하여 그 공으로 도독(都督)에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정묘년(1627, 인조 5)에 오랑캐 군사가 의주(義州)를 함락시키고 사포의 방책을 불살라 하나도 남기지 않았는데, 문룡은 마침 가도에 있었으므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오랑캐 군사가 평산(平山)에 이르러 강화하고 물러가니, 문룡은 우리 나라가 오랑캐와 강화하는 것을 보고 마음으로 두려워하여 번번이 차관(差官)을 보내어 예물을 갖고 오랑캐에게 가도록 했다. 이것은 그 자신이 오랑캐와 내통한다는 것을 보여서 우리 나라로 하여금 이간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일 뿐, 모두 실상이 아니었다. 그 차관이란 자가 창성(昌城)의 길을 경유하는데, 그때 남궁연(南宮戭)이 창성 부사(昌城府使)로 있으면서 그 차관과 서로 친하게 지냈다. 차관은 반드시 그 문서(文書)를 비밀히 보여주었는데, 바로 오랑캐와 강화하고 친밀하게 지낸다는 말이었다. 남궁연이 그것을 등서(謄書)하여 비밀히 조정에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크게 장려하고 포상하여 그가 모문룡의 요령(要領)을 잡았다고 표리(表裡 옷의 겉감과 안감)를 상으로 내리기까지 하였다.
기사년 2월에 내가 평안 감사가 되어 비국(備局)의 여러 재상들에게 하직하려고 들렀더니, 여러 재상들이 남궁연을 크게 칭찬하기를,
“병사(兵使)가 만일 갈리게 되면 반드시 이 사람으로 삼으라.”
하였으나, 나는 마음속으로 남궁연이 문룡에게 속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관서(關西)에 이르렀을 때 조정에서는, 모문룡의 차관이 삭주(朔州)를 경유하여 창성(昌城)에 이르렀는데, 삭주 부사 정명진(鄭名振)이 그 직책을 다하지 못하여 그 실을 알아내지 못했다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이때 모문룡의 차관이 마침 이르니, 명진은 그러한 사유를 말하고 그 문서를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모문룡의 차관이 매우 성내어 더러운 욕설을 퍼붓고 가더니, 창성에 도착하여 남궁연을 꾸짖기를,
“내가 너와 친밀함이 형제와 다름이 없기 때문에 문서를 내 보인 것인데, 네가 어찌 감히 남에게 누설하였느냐? 이 말이 만약 가도로 들어가면 나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하고, 내보이려 하지 않았다. 남궁연이 밤새도록 좋은 얼굴 빛으로 술을 대접하고 진심을 드러내 보이니, 그제서야 비로소 문서를 내 보였다. 남궁연이 등서하여 나에게 보고하므로, 내가 장계(狀啓)를 올려 조정에 보고하기를,
“차관이 비록 남궁연과 친밀하다 하지만 일이 이처럼 드러났으니, 반드시 다시는 문서를 보여줄 리가 없은즉, 이는 필시 농락하는 술수(術數)가 있을 것입니다. 어찌 예여청(倪余聽 《왕조실록》에는 예여청(倪汝聽)으로 되어 있음)의 일이 없으리라고 장담하겠습니까?”
하니, 비국에서 회답하기를,
“이 일은 사람마다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전적으로 남궁연에게 맡겨 두시오.”
라고 하였다. 이는 내가 그 일을 맡을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조롱하여 사람마다 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병인년에 조사(詔使 중국의 사신) 강왈광(姜曰廣)과 왕몽윤(王夢尹)이 우리 나라에 오니, 문룡은 우리 나라에서 그가 중국 조정을 농락한 실상을 말할 것을 두려워하여 여청을 비밀히 귀성 부사(龜城俯使) 조시준(趙時俊)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문룡이 장차 조사를 잡아가지고 오랑캐에게 항복할 것이다.”
하였다. 시준이 여청을 감금하고, 원접사 김유(金瑬)와 감사 윤훤(尹暄)에게 말하였다. 이때는 중국 사신이 철산(鐵山)에 있다가 가도(椵島)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김유 등이 여청을 데리고 조사에게 들어가 말하자, 조사가 여청을 불러서 자세히 묻더니, 두 조사는 좌우 사람들을 물리치고 해가 지도록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였다. 그리고 곧장 바다를 건너 가도에 이르니, 문룡이 나와서 영접하였다. 두 조사는 말이나 얼굴빛에 드러내지 않고 이튿날 돌아가면서 여청으로 하여금 문룡의 관하에 있게 했는데, 친밀함이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 뒤에야 우리 나라가 비로소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무진년에 문룡이 군사를 거느리고 등주(登州)에 이르러 불의에 습격해 수비하는 장수를 협박하고 그 물화(物貨)를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서 크게 다행한 일이라고 여겼다.
이해 4월에 문룡이 또 군사를 거느리고 등주로 가는데, 조정에서는 나에게 전송하라고 하였다. 내가 가도로 가니, 접반사 홍보(洪靌)도 거기에 있었다. 여러 번 문룡을 만났는데, 경솔하고 교활한 태도가 얼굴에 드러났으며 언어는 교묘하게 하기를 힘쓰고 과장하기를 좋아했다. 내가 홍보에게 말하기를,
“도독이 이번 걸음에 반드시 죽을 것이다.”
고 하니, 홍보는,
“어떻게 그럴 것을 압니까?”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내 말 또한 어찌 반드시 그러리라고 할 수야 있겠습니까? 시험삼아 두고 보십시오.”
라고 하였다.
문룡이 홍보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서 근일에 또 조시준(趙時俊)의 일이 있었으나 이것은 사소한 일이므로 내가 우선은 용서하니, 이후로는 다시 이런 일이 없게 하라.”
고 하였는데, 홍보는 창성의 사건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장계로 조정에 보고하기를,
“남궁연의 일은 신이 진실로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조정에 진달한 것인데,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문룡의 조롱과 모멸(侮蔑)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니, 조정에서도 비로소 깨닫고, 남궁연에게 장형을 가하고 내쫓았다.
문룡이 가도를 떠난 뒤에 홍보가 나왔는데, 6월에 그와 평양의 동포루(東砲樓) 위에서 만났다. 경략(經略) 원숭환(袁崇煥)이 문룡을 참형하였다는 보고가 마침 오니, 홍보는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영공(令公)께서 모문룡이 이번 걸음에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하고, 또 유해(劉海)도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모문룡이 이미 죽었으니, 유해도 반드시 죽겠군요.”
하므로,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내 말이 우연히 맞았을 뿐이오. 어찌 말마다 반드시 맞을 수야 있겠소.”
하였다.
유해라는 사람은 요동 사람인데, 오랑캐에게 항복하여 총애를 받아 권세를 잡은 자로서, 정묘년 강화 때에 오랑캐의 사신이 되어 우리 나라에 왕래한 자이다. 무진년 여름에 유해는 이름은 흥조(興祚)라고 고치고, 그의 아우 흥기(興起)ㆍ흥치(興治)ㆍ흥량(興良) 등과 함께 제 집을 불태워 불에 타 죽은 것처럼 꾸미고 와서 문룡에게 항복하였는데, 그 사람됨이 교활하고 글을 잘하며 이익을 좋아하고 재화(財貨)를 탐했지만, 문룡이 신임한 자였다. 문룡이 죽은 뒤에 원경략이 부총(副摠) 서부주(徐敷奏)와 장빈량(張贇良)을 보내 와서 가도의 군사를 점검(點檢)하고 그 장정들을 뽑아 갔는데, 유흥조(劉興祚)와 경중명(耿仲明) 등이 따라갔다. 그 후 부총 진계성(陳繼盛)으로 하여금 심세괴(沈世魁)와 유흥치 등을 거느리고서 가도를 지키게 하였다. 경오년 3월에 흥치가 배반하여 진계성 등을 죽였는데, 세괴는 그의 딸을 흥치에게 바쳐서 죽음을 면하였다.
조정에서는, 총융사 이서(李曙)는 육로로, 부원수 정충신(鄭忠信), 충청 수사(忠淸水使) 송영망(宋英望), 경기 수사 유응형(柳應泂) 등은 수로로 가서 흥치를 토벌하게 하니, 흥치는 군사를 거느리고 여순구(旅順口 여순을 여순구(旅順口)라고도 칭함)로 갔다. 조정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서 김유(金瑬)만이 싸움을 주장하고, 나머지 재상들은 모두 강화(講和)를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수군(水軍)이 신중을 기하느라 진격(進擊)하지 않았는데, 8월에 흥치가 가도로 돌아와서 스스로 흠차(欽差 황제가 일을 처리하라고 보낸 사람)라고 하면서 차관(差官) 이매(李梅)를 보내오므로 조정에서는 군사를 거두라고 명하였다.
흥치는 내가 싸움을 주장하였다고 나를 가장 꺼리면서 번번이 말하기를,
“김 관찰사가 나를 죽이고자 한다.”
하면서, 꼭 나를 죽이려고 하므로 내가 흥치와 서로 용납할 수 없다는 뜻으로 사직하기를 청하니, 조정에서 허락하고 민성휘(閔聖徽)로 나를 대신하게 하였다.
신미년 3월 19일에 내가 비국의 재신(宰臣)으로서 경연에 입시하니, 상이 흥치의 일을 물었다. 내가 대답하기를,
“흥치는 광패(狂悖)한 어린아이로, 당초 배반할 때에 우리 경내(境內)에 있던 물화(物貨)를 가지고 섬에 들어가서 그 형세가 오랑캐에게 투항(投降)할 것 같더니, 여순구로 들어갔다가 돌아온 뒤에는 다시 쥐가 머리를 내놓고 망설이듯 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무슨 까닭이오?”
하였다. 대답하기를,
“그가 오랑캐에게 투항하면 이영방(李永芳)과 같이 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으므로, 가도에 있는 것이 나으며, 사세가 궁하게 된 뒤에 오랑캐에게 투항하더라도 이영방처럼 되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민성휘는 흥치를 보고 말하기를, ‘그 권모 술수가 대단한 자로, 진계성의 아들을 죽이지 않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고 하였는데, 경은 그를 광패한 어린아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하였다. 대답하기를,
“흥치는 여순구로 가서 장도(張燾)를 얻어 왔습니다. 장도는 매우 계려(計慮)가 있는데, 그의 말을 채용하기 때문에 권모 술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흥치는 광패하고 교만하여 반드시 오래도록 그를 신임하고 쓸 리가 없습니다.”
하니, 이정귀(李廷龜)가 말하기를,
“그가 지혜롭냐 망령되냐를 막론하고 이미 황제의 사신이 되었으니, 성의껏 대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황제의 사신이라고 하는 것은 흥치의 거짓말입니다. 중국 조정에 아무리 인재가 없다 하더라고 흥치가 군사를 거느리고 여순구에 머무르면서 광패한 말로 위협하였는데, 어찌 곧장 총병(摠兵)으로 임명하였겠습니까? 가도에 돌아온 뒤에 조정의 호령을 봉행(奉行)하였으면 중국 조정에서 잠깐 참고서 사신으로 임명한 일이 혹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21일 밤에 장도 등이 흥치를 죽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튿날 비국의 여러 재신(宰臣)들이 입시하였는데, 이정귀가 말하기를,
“중국 조정에서 반드시 군사를 보내어 죽였을 것입니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중국 조정에서 비록 군사를 보내어 죽이고자 하였더라도 수군(水軍)을 발동할 때가 아닙니다. 흥치가 필시 오랑캐에게 투항하려고 하기 때문에 죽였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아오?”
하였다. 대답하기를,
“호어(胡語)의 통역관 김희언(金希彦)이 심양(瀋陽)에 갔더니, 심양에서 말하기를, ‘2월 그믐에 마땅히 출병(出兵)하여 가도를 칠 것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그가 또 섬에서 심부름꾼이 온 것을 보았는데, 며칠 뒤에 심양에서 다시 말하기를, ‘마땅히 3월 보름 이후에 출병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합니다.
지금 흥치의 죽음이 17일에 있었으니 그 말과 합치됩니다. 그러므로 신은 그가 오랑캐에게 투항하려고 하다가 죽임을 당한 것임을 아옵니다.”
하니, 김유가 말하기를,
“김모(金某)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입시를 마치고 나온 뒤에, 서쪽 변경에서 장계가 또 왔는데,
“ 중국 조정에서 군사를 보내어 죽인 것이었다.”
하였다. 또 장도의 통첩(通牒)이 왔는데, 그 뜻은 우리 나라에서 흥치를 죽인 일을 중국 조정에 주문(奏聞)하기를 청하는 것이었다. 이 정승〔李相 이정귀 李廷龜〕이 매우 기뻐하며 나를 불러서 말하기를,
“과연 나의 말과 합치하오. 영공이 중국 조정에서 알지 못한다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이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중국 조정에서 만약 군사를 보내어 죽였다면 장도가 어찌해서 우리 나라에게 꼭 조정에 주문하기를 청하겠습니까?”
하니, 좌우에 있던 여러 재상들이 모두 웃었다.
임진왜란에 대가(大駕)가 서도로 떠나게 되니, 조정의 신하들은 세자(世子)를 세워 인심이 의지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선조가 그 의견에 따라 드디어 둘째 아들 광해군 이혼(李琿)을 세자를 삼았다.
맏아들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은 광패(狂悖)하여서 인심이 그를 따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그를 제쳐두고 이혼을 세웠으니, 인심을 따른 것이다.
계사년에 환도(還都)한 뒤에 여러 번 사신을 보내 중국 조정에 이혼을 세자로 책봉하기를 주청(奏請)하였다. 그러나 만력 황제(萬曆皇帝 명 신종 明神宗)가 둘째 아들인 복왕 상순(濮王商洵)을 사랑하여 진정한 마음은 태창제(泰昌帝)에게 있지 않았으므로 예부(禮部)에서는 번번이 형제의 차례를 뛰어넘었다고 예(禮)에 의거하여 들어주지 않았으니, 이는 태창제의 처지를 위함이었다.
신축년 겨울에 예조에서 다시 사신을 보내어 세자 책봉을 주청하고자 하니, 선조는,
“왕후(王后)의 자리가 오래 비어 있는데, 왕비의 책봉은 주청하지 않고 이것을 먼저 주청하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이때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승하(昇遐)한 지 이미 1년이 지났기 때문이었지만, 조정에서는 비로소 상의 뜻이 광해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병오년 봄에 영창대군(永昌大君) 이의(李㼁)가 출생하였는데, 계비(繼妃) 김씨의 소생이었다. 영상 유영경(柳永慶)이 세종 때의 광평대군(廣平大君)과 임영대군(臨瀛大君)의 전례를 인용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陳賀)하니, 항간에서는 영경이 상의 뜻에 영합하여 자기의 지위를 굳게 만들 계책을 한다고 비난하였다.
정미년 겨울에 상의 병환이 위급하자,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여 모두 임해군이 불측한 뜻이 있다고 의심하므로, 병조 판서 박승종(朴承宗)이 주청하여 도감군(都監軍)으로 행궁(行宮)을 호위하게 하였다. 상이 밀갑(密匣 밀부(密符)를 넣어 두는 상자)을 내려 대신들을 불렀는데, 그때 시임(時任)ㆍ원임(原任) 대신 등이 상의 병환이 위급한 까닭으로 대궐 안에 들어와 있었다. 영경이 여러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밀부(密符 비밀 명령)를 내린 것은 시임 대신만 부른 것이오.”
하니, 여러 대신들이 다 일어나 나갔다. 상이 동궁(東宮)에게 전위(傳位)하고 싶다고 하교하니, 영경이 좌상 허욱(許頊), 우상 한응인(韓應寅)과 함께 회계(回啓)하였는데,
“지금 이 전교는 뭇 사람들의 생각 밖에서 나왔습니다.”
하는 등의 말이 있었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영경이 두 마음이 있다고 말하여, 원근에 그 말이 전파되었다.
앞서 계사년 가을에 상이 해주(海州)에 계시면서 동궁에게 전위하겠다는 전교를 내렸을 때에 대신 윤두수(尹斗壽) 등이 방계(防啓 상의 전교를 수행할 수 없다고 아뢰는 계사)한 사연에도,
“ 실로 뭇 사람들의 생각 밖에서 나왔습니다.”
하였다. 그때는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았는데, 지금 영경의 말을 죄로 삼는 것은 사세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광해가 오래도록 동궁(東宮)에 있었는데 상은 그가 어둡고 용렬하여 후계자가 될 수 없음을 살피고 새로 세울 뜻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광해군이 어질다고 여겼기 때문에 모두들 영경을 미워하였다.
무신년 1월 18일에 정인홍(鄭仁弘)이 상소하여 영경이 동궁을 해치려고 꾀한 죄를 말하고, 아울러 대신이 쫓겨날 적에 대간이 논핵하지 않은 죄를 지적한 것으로 여러 백 마디의 말이었는데, 계(啓)자(계(啓)자를 새긴 도장으로 왕의 결재를 거친 문서에 찍음)를 찍지 않고 내렸다.
19일에 영경이 차자를 올려 스스로 변명하니, 비답(批答)에,
“인홍의 상소는 실성한 사람과 같은 데가 있소, 신하가 어찌 차마 옛 임금을 물러가게 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겠소?”
하는 등의 말이 있었다. 이정원(李挺元)이 상소하여 영경이 동궁을 해치려고 꾀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누가 너희들에게 이런 상소를 올리라고 시켰느냐? 하늘의 해가 위에 있으니 바른 대로 가리키고 숨기지 말라.”
하였다.
대간이 상의 뜻의 소재를 알고, 이튿날 비로소 인홍에게 배척된 것으로 인피(引避 인혐(引嫌)하고 그 자리를 물러남)하고 나갔다. 대사간 이효원(李效元) 등이 이경전(李慶全)과 이이첨(李爾瞻) 등이 이처럼 터무니 없는 말을 만들어서 정인홍과 내통하여 상소하게 하였다는 것을 논핵하고, 모두 멀리 귀양보내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즉시 윤허하여 인홍은 영해(寧海)로, 이첨은 갑산(甲山)으로, 경전은 강계(江界)로 귀양보냈다.
정조(鄭造)가 상소하여 인홍을 구원하고 영경의 죄를 극언(極言)하였으며, 이성(李惺)도 상소하여 인홍의 사면을 청하고 영경이 동궁을 해치려고 꾀한 죄상을 극언하는 한편, 그의 뇌물을 받은 죄까지 논핵하였다.
2월 2일에 이효원이 이정원ㆍ이성ㆍ정도 등을 귀양보낼 것을 주청하였다. 이는 이성과 정원이 서로 절친하여 정조의 아우 정준(鄭遵)과 사위 최호(崔濩)가 정원의 상소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계사(啓辭)를 입계(入啓)하였으나 계하(啓下)되지 않았다.
이튿날은 바로 별시(別試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병년(丙年)마다 행하던 문무의 과거)를 개장(開場)하는 날이었으므로 시관 등이 막 패초(牌招)되어 대궐에 나아갔는데, 갑자기 대내(大內)로부터 상의 병환이 위급하다는 말을 전하였다. 승지 등이 바삐 차비문(差備門) 밖에 들어가니, 어의(御醫) 허준(許浚)이 나와서 말하기를,
“상의 병환이 위급하여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대신들이 다 들어왔는데, 유영경은 영남 유생들이 계속 상소하여 그에게 죄주기를 청하여 성 밖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가장 늦게 도착하여 해가 이미 저물었다. 대내에서 대신들에게 들어와 유교(遺敎)를 들으라는 명령이 내려 이원익(李元翼)ㆍ이덕형(李德馨)ㆍ이항복(李恒福)ㆍ윤승훈(尹承勳)ㆍ유영경ㆍ기자헌(奇自獻)ㆍ심희수(沈喜壽)ㆍ허욱(許頊)ㆍ한응인(韓應寅)과 도승지 유몽인(柳夢寅) 등이 들어가고, 나도 주서(注書)로 따라 들어갔다. 상이 문 앞에 누워 곤룡포를 덮고 위에 옥대(玉帶)를 걸쳤는데, 기절한 지가 이미 오래였다. 덕형이 말하기를,
“옛날 예에, ‘남자는 부인의 손에서 숨을 거두지 않는다.’ 고 하였으니, 부인들을 물리치소서.”
하고 덕형이 또 말하기를,
“마땅히 조용하게 기다려야 한다.”
하였다. 대신 이하가 차례로 나와서 통곡하고 물러가 빈청(賓廳)에 드니, 날이 이미 어두웠다. 촛불을 켜고 앉았는데 승전(承傳) 김봉(金鳳)이 대비(大妃)의 명을 전하기를,
“계(啓) 자와 어보(御寶)를 동궁에 보냈는데 받지 않습니다.”
하였다. 대신이 아뢰기를,
“지금은 바야흐로 통곡하여 몸부림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저절로 받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김봉이 또 대비의 명으로 와서 봉서(封書) 한 통을 전하며 말하기를,
“지난 겨울 병이 위급하셨을 때에 받은 글이오.”
하였다. 그 겉봉에,
“세자에게 내린다.”
라고 씌어져 있었으며, 그 안에는,
“동기간 대하기를 내가 있을 때처럼 하고, 남이 참소하더라고 부디 듣지 말라, 감히 이것으로 부탁한다.”
하였다. 그 봉서를 드린 뒤에 또 봉서를 가져왔다. 겉봉에는,
“유(柳)ㆍ한(韓)ㆍ신(申)ㆍ허(許)ㆍ박(朴)ㆍ서(徐)ㆍ한(韓)”
이라고 씌어져 있었으며, 안에는,
“어질지 못한 내가 임금 자리에 오른 후 신민(臣民)에게 죄를 지어 마치 연못과 골짜기에 떨어지는 것 같았는데, 이제 갑자기 큰 병을 얻었구려! 사람의 목숨이 길고 짧은 것은 운명이 정해져서 밤과 낮이 있는 것처럼 필연인 것이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소. 다만 대군(大君)이 어린데 그 성장(成長)을 미처 보지 못하니, 이것이 마음에 사무칠 뿐이오. 내가 죽은 뒤에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만일 간사한 말이 있거든 공들은 대군을 보호하여 주시오, 감히 이것을 부탁하오.”
하였다. 이어서,
“유씨는 영상, 한씨는 우상, 신씨는 신흠(申欽), 허씨는 허성(許筬), 박씨는 박동량(朴東亮), 서씨는 서성(徐渻), 한씨는 한준겸(韓逡謙)을 가리킨다.”
고 하였는데, 이것도 지난 겨울 상의 병환이 위급하였을 때에 받은 글이라고 하였다.
전한(典翰) 최유원(崔有源)이 즉일에 즉위해야 한다는 의논을 주창하였으니, 이는 왕비의 오빠 유희분(柳希奮)이 암시(暗示)를 받은 것으로, 동료들을 거느리고 와서 대신에게 청하였다. 유영경이 옳지 않다고 고집하니, 두세 번 청하고 송(宋) 나라의 이종(理宗)이 즉일 즉위한 설을 인용하기까지 하므로, 대신이 《실록(實錄)》을 상고하라고 명했다. 조종조의 전례에 오직 성종(成宗)만이 즉일에 즉위하였는데, 예종(睿宗)의 아들 제안대군(薺安大君)이 어렸으므로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어진 이를 골라서 성종(成宗)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성종에게도 형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있었으므로 즉일에 즉위한 것이니, 지금과는 사세가 같지 않았지만, 대신도 감히 어기지를 못하였다.
이튿날 옥당(玉堂)이, 예조 판서 권협(權悏)을 탄핵하여 정창연(鄭昌衍)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신시(申時)에 광해가 옷을 갖추어 입고 서청(西廳)에서 즉위하니, 백관들이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고 천세(千歲)를 부르면서 춤추고 나왔다.
겨우 성복(成服)이 끝나자, 완산군(完山君) 이축(李軸)이 소를 올려 영경에게 죄주기를 청하고, 영남 사람 김응성(金應成)ㆍ강인(姜遴) 등도 뒤를 이었으며, 대간(臺諫)이 유영경을 파면하기를 논하고 정인홍ㆍ이이첨ㆍ이경전(李慶全) 등의 석방을 청하였다. 11일에 그대로 따랐다.
갑오년(1594, 선조 27)에 이정암(李廷馣)이 전라 감사로 있는데, 왜적이 심유경(沈惟敬)을 통하여 강화를 청하였다. 정암이 그 말에 따르기를 청하면서 구천(句踐)과 범여(范蠡)의 고사를 인용하여 고증하였다. 상이 비국(備局)의 재신들에게 물으니,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말하기를,
“이정암이 절개를 지켜 의(義)에 죽을 마음이 없다면 감히 이런 논의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는 적과는 한 하늘 밑에 살 수 없는 원수이므로 강화를 말한다면 반드시 중죄(重罪)를 입을 것이기에, 반드시 죽으려는 마음이 있은 뒤에야 국가를 위하여 이 말을 할 수 있어서이다. 상이 매우 성내어 우계가 그 말을 다하지 못하고 물러 나갔는데, 유서애는 그 의논을 옳다고 하고, 유영경은 극구 배척하였다. 서애가 영경에게 말하기를,
“영공의 묘비(墓碑)에는 ‘강화를 주장하지 않았다.’ 〔不主和〕는 세 글자를 써야겠소.”
하였으니, 이는 기롱하는 말이었다.
유영경이 정승이 되어 나라의 정권을 잡고 있을 때에 왜(倭)가 또 와서 강화하기를 청하니, 영경이 답하기를,
“만약 능(陵)을 도굴한 적을 묶어 보낸다면 강화를 할 수 있다.”
하였는데,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도굴한 적을 말한 것이다. 병오년 겨울에 왜가 두 사람을 묶어 보내면서 능을 도굴한 적이라고 하므로, 여러 대신들에게 명하여 같이 국문하게 하였다. 왜가 진술하기를,
“나의 얼굴을 보십시오. 나는 나이가 아직 젊습니다. 임진년에는 어린아이였는데, 어떻게 능을 팔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대신들에게 의논하라고 명하니, 윤승훈(尹承勳)이 말하기를,
“이 왜놈이 능을 도굴한 적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신명(神明)을 속이고 업신여기는 것이옵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성내어 그를 꾸짖고, 그 왜놈을 저자에서 베어 죽인 뒤에 드디어 여우길(呂祐吉)ㆍ경섬(慶暹)ㆍ정호관(丁好寬) 등을 보내어 회보하매, 강화가 드디어 이루어졌다. 영경이 상의 뜻에 맞추느라고 그 앞뒤의 논의가 같지 않음이 마치 두 사람과 같았다.
갑진년(1604, 선조 33)에 호종(扈從), 선무(宣武)의 여러 공신들의 공훈의 사정(査定)을 마감하고, 존호(尊號)를 올렸다. 호종 공신(扈從功臣)의 칭호를 처음에는 익운(翊運)이라고 한 것을, 영경의 주장에 따라서 호성(扈聖)으로 고쳤다. 그때 윤승훈이 영상으로서 백관들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였는데, 여러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공들이 몸을 받들어 먼저 물러가고 나로 하여금 이 일을 담당하게 하니, 공들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하였다. 영경의 무리인 장령 이덕온(李德溫)이 승훈을 탄핵하여 파면하게 하고, 영경이 대신 영상이 되었다. 영경은 상의 뜻을 영합하는데 극도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어서 병오년에는 선조 재위(在位) 40년이라고 하여, 백관들을 거느리고 진하(陳賀 나라의 경사를 하례함)하였으며, 중광과(增廣科)를 보였다. 선조가 정묘년에 즉위하였지만, 정묘년은 명종 22년이고 무진년이 선조 원년인 것이다. 그러므로 병오년에는 39년이 되는데, 영경이 재위 40년이라고 하여 칭하(稱賀)하고, 중광과까지 보이는 등 즉위와 더불어 같이 경축했다. 그리하여 임금의 총애를 견고하게 다지니, 식자들은 모두 제집에서는 비난을 하였으나, 그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는 이가 없었다.
광해가 즉위하니, 삼사(三司)에서 그가 동궁을 해치려고 꾀한 죄를 논핵하여 경흥(慶興)에 귀양갔다가 마침내 사사(賜死)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엾게 여기는 이가 없었는데, 임자년에 이이첨과 정인홍 등이 자신의 공이 녹훈되기 위하여 영경을 대역(大逆)으로 몰아서 형벌을 추시(追施)함으로써 그의 아들 유열(柳悅)ㆍ유제(柳悌)ㆍ유선(柳愃) 등이 모두 연좌되어 사형을 당하니, 사람들이 다 가엾게 여겨 이첨 등의 흉악하고 패려한 행동을 매우 미워하였다. 계해년 정사(靖社 인조 반정을 이름) 때에 이첨 등을 죽이고 그 반역(反逆)의 이름을 신원해주고 그 관직을 회복하였다.
호성 공신의 공훈을 사정할 때에 반드시 서울에서 의주까지 수가(隨駕)한 자만을 녹훈하기로 하였다. 임진년에 왜병이 영남에 이르러 왜학 통사(倭學通事 왜말 통역) 경응순(景應舜)을 사로잡아 가지고 서계(書契)를 주어 보내면서
“이한음(李漢陰)과 만나 강화를 의논하겠다.”
고 청하였다. 이는 한음이 일찍이 평의지(平義智)와 현소(玄蘇) 등을 선위(宣慰)하였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는 그 말에 따라 한음을 보냈다. 한음이 충주(忠州)에 이르러서 먼저 응순을 왜진(倭陣)에 보냈더니, 적장 청정(淸正)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래서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와 평양에서 복명(復命)하고, 이어 수가하여 의주에 이르렀다.
선조가 서도로 피난하다가 평산(平山)에 이르러, 새로 황해 병사(黃海兵使)를 설치하고, 감사 조인득(趙仁得)을 병사로 삼는 한편 유영경을 감사로 삼았다. 그래서 영경은 대가를 따라 서쪽으로 가지 못하였다.
그런데 한음과 영경이 모두 녹훈(錄勳)에 들어 있었다. 허성(許筬)이 대사간이 되어, 대신 중에 녹훈될 수 없는 자가 기록되어 있으니, 개정하기를 청한다고 논핵하였다. 허성이 청한 것은 영경 때문에 말한 것인데, 한음은 여러 번 차자를 올려 마침내 그 훈호를 사양하니, 상이 그 의견에 따랐다. 영경은 그때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었으니, 그가 이익을 좋아하여 염치가 없음이 이와 같았다. 광해 때에 이이첨 등이 주청하여 그 훈호를 삭제하였는데, 계해년에 도로 그 훈명(勳名)을 회복시켰다.
선조 신묘년에, 대간이 정철(鄭澈) 등의 죄를 논핵하였다. 이산해(李山海)가 그 의론을 주장하였으며, 옥당에서도 차자를 올리기 위하여 부제학 김수(金睟)가 대사성 우성전(禹性傳)의 집에 가서 의논하니, 우성전은,
“이렇게 파급시키는 것은 옳지 않소.”
하고, 김수를 붙잡고 보내지 않았다. 대사간 홍여순(洪汝諄)이 우공(禹公)을 탄핵하여 관직을 삭탈하였다. 여기에서 남인(南人)ㆍ북인(北人)의 당론이 비로소 나뉘어지게 되었는데, 급격한 자를 북인이라 하고, 느슨한 자를 남인이라고 하였다.
임진년에, 이산해ㆍ홍여순이 귀양가고, 서애(西厓)도 파면되었다. 그리고 윤두수(尹斗壽)가 정승이 되어 국정을 담당하였는데, 계사년에 환도(還都)되면서 서애가 도로 영상에 임명되었다.
갑오년에 대사간 이기(李墍), 대사헌 김우옹(金宇顒), 장령 기자헌(奇自獻) 등이 정철이 최영경을 죽인 죄를 논핵하니, 사간 정엽(鄭曄), 집의 신흠(申欽), 정언 이시발(李時發) 등이 의논이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여 인피(引避)하였다. 옥당에서 정엽ㆍ신흠ㆍ이시발 등을 체직할 것을 청하니, 시론(時論)이 크게 변하였다. 김응남(金應南)과 정탁(鄭琢)이 서로 이어 정승이 되었다.
을미년 봄에, 정탁이 이산해를 내칠 것을 청하니, 상이 그 의견을 따랐다. 오래지 않아서 대간이, 정탁이 정승 자리에 합당하지 않다고 논핵하여 체직되게 하니, 사람들은 그가 이산해를 내칠 것을 청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의견은 서애에게서 나왔다고 하여 남인과 북인과의 원한은 더욱 심해졌다.
원평부원군 이원익(李元翼)이 정탁을 대신하여 우상이 되었다. 남이공(南以恭)과 김신국(金藎國) 등이 이경전(李慶全)에게 청환(淸宦)의 길을 열어 주고자 하는데,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이조 낭관으로 고집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무술년에 주사(主司) 정응태(丁應泰)가 사실을 조작하여 본국(本國)을 무함하니, 상이 서애를 중국 조정에 보내어 변명하게 하려고 했는데, 서애가,
“늙고 병들어서 여행할 수가 없습니다.”
고 말하므로, 상의 마음이 매우 편치 못하였다. 이이첨이 지평으로 서애를 탄핵하고자 하니, 대사헌 이헌국(李憲國), 집의 이상신(李尙信), 정언 정홍익(鄭弘翼) 등이 그 의견에 따르지 않고 각각 인피하였다. 상이 이이첨을 옳게 여기고 헌국 등을 체직시키니, 대간이 서애를 논핵하여 관직을 삭탈하였다.
기해년 가을에, 남이공과 김신국이 의론을 주장하여 홍여순(洪汝諄)을 탄핵하니, 북인이 또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나뉘어졌는데, 이산해를 주축으로 하는 편을 대북이라고 하고, 김신국과 남이공을 주축으로 하는 이를 소북이라고 하였다. 임몽정(任蒙正)과 임취정(任就正) 등이 채겸길(蔡謙吉)을 사주하여 소를 올려 김신국ㆍ남이공이 전권(專權)한 죄를 논하게 하고, 대사헌 민몽룡(閔夢龍)등이 뒤를 이어 논하므로, 김신국ㆍ남이공ㆍ박이서(朴彛覮)ㆍ 이필형(李必亨)ㆍ송일(宋馹)ㆍ박승업(朴承業)등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경자년 봄에, 영상 이원익이 경연에서 서애의 일을 논하고, 또 아뢰기를,
“임국로(任國老)는 신의 재종친(再從親)입니다만, 만약 그 사람을 쓴다면 해가 곤충과 초목에까지 미칠 것입니다.”
하였다. 국로는 산해의 당으로서 바야흐로 정승이 될 물망(物望)이 있었다. 대사간 최철견(崔鐵堅)이 완평(完平 이원익)을 논핵하니, 상이 이르기를,
“완평의 은미한 뜻을 살펴보니 유당(柳黨)을 등용하고자 하는 데 불과할 뿐이다.”
하였다.
완평이 체직되자, 산해가 다시 들어가 영의정이 되고 홍여순이 병조 판서가 되었는데, 권세를 다투어 서로 공격하였다. 홍여순을 주축으로 한 파를 골북(骨北)이라고 하고, 이산해를 주축으로 한 파를 육북(肉北)이라고 하였다, 이이첨 등이 홍여순을 논핵하기를, ‘모든 관료들을 협박하여 조정의 의론이 그치지 않는다.’ 고 하였다, 여름에 상이 양쪽을 다 내쫓으니, 산해ㆍ이첨ㆍ여순ㆍ경전 등이 관직을 삭탈당하고, 서인(西人)들이 조정에 가득하게 되었다.
신축년에 한음이 체찰사로 있을 때에, 연평부원군 이귀(李貴)를 영남에 보내어 군무(軍務)를 감독하게 하였다. 연평은 정인홍(鄭仁弘)이 시골에 있으면서 세력을 부린다고 하여 매우 비난하니, 인홍이 노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문도(門徒) 문경호(文景虎) 등이 소를 올려 최영경을 무함하여 죽인 것을 논하기를,
‘성혼(成渾)이 그 의론을 주장하여 성상으로 하여금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을 얻게 하고, 그 도당(徒黨)이 조정에 가득하다.’ 고 하였다. 상이 그 말을 옳게 여기니, 대사헌 황신(黃愼)이 인피하면서 다투어 변명했는데, 상은 황신 그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한다고 하여 체직시키고, 이조의 관원을 다 체직시켰다.
임인년 정월에 유영경(柳永慶)이 이조 판서가 되니, 바로 소북의 영수였다. 대간이 성혼을 논핵하여 관작을 추삭(追削 추후에 삭탈함)하고, 유영경에게 죄주기를 청한 대간들을 논핵하여 마침내 구성(具宬)ㆍ이상길(李尙吉)ㆍ이흡(李洽) 등이 귀양가게 되었다. 그리고 또 이의를 제기한 대간 이성록(李成祿)과 민유경(閔有慶) 등도 논핵하여 나누어 귀양보냈다.
김휘(金翬)가 상소하기를,
“저의 아버지가 성혼에게 글을 배웠는데, 성혼은 최영경의 논에 참여함이 없고 다 정인홍의 무함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너의 아비가 동서남북을 다닐 때에 너는 반드시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 따라다녔느냐. 인홍의 사람됨은 초목이나 금수들도 다 그 이름을 안다. 네가 다시 성혼이 최영경을 죽인 옛 수법을 본받고자 하느냐.”
하고, 인홍을 발탁하여 대사헌으로 삼고서 특명으로 불렀다. 이귀가 소를 올려 인홍이 시골에 있으면서 불법 행위를 한 20여 가지의 죄를 들어 극론하였으나, 상은 살피지 않았다. 유영경은 이윽고 우상이 되어 드디어 조정의 권세를 잡았다가 그 몸이 죽게 되었다.
대마도(對馬島)는 토지가 메마르고 백성들이 빈궁하여 오로지 우리 나라에 배를 조공으로 바치고, 그에 따른 상과 장사하는 것으로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임진년 후로 강화가 끊어지면서 이러한 이익이 없게 되니, 대마도 왜인이 강화를 예전처럼 통하려고 해서 일본에 말할 때에는,
“조선이 다시 강화하기를 청한다.”
하고, 우리 나라에 말할 때에는,
“만약 강화를 허락하지 않으면 반드시 다시 병화(兵禍)가 일어날 것이다.”
하였다, 갑진년 봄에 사로잡혀간 우리 나라 사람 김광(金光)을 몰래 보내어 마치 도망해 온 사람처럼 가장하고, 말하기를,
“왜가 다시 침략하려고 합니다.”
하고, 또 경인년에 황윤길(黃允吉) 등이 가지고 갔던 서계(書契)를 가지고 신표로 삼았다. 이것은 대마도 왜인이 경인년의 서계를 일본의 고사(古事)를 맡은 자에게서 훔쳐 내다가 몰래 김광에게 주어서 일본에 신임을 받는 자인 것처럼 꾸며서 공갈치는 자료로 삼은 것이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과연 매우 두려워하여 중유정(惟政)을 보내 바다를 건너가서 형세를 탐지하고 돌아오게 하였다. 이것이 화의(和議)가 일어난 유래이다. 뒤에 김광은 일이 발각되어 고문을 받다 죽고, 그 가족들은 북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병오년에 왜가 다시 와서 강화를 청하였는데, 이때는 원가강(源家康)이 수길(秀吉)의 아들을 내쫓고 스스로 관백(關白)이 되어 그의 아들 수충(秀忠)에게 전위하였다. 영경이 말하기를,
“가강이 평씨(平氏)를 폐하였으니, 우리 나라와는 원수가 아니므로 강화를 허락하는 것이 옳다.”
고 하고, 여우길(呂祐吉) 등을 보내어 서계를 갖고 가게 하였다. 수충의 답서를 요약하면,
“여우길 등 세 사신이 천리의 바다와 육지를 멀다 하지 않고 와서 옛날의 우호(友好)를 다지려고 하니, 내 어찌 소원히 할 뜻을 가지겠소?”
하였다, 이것은 마지못해 강화를 허락한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여우길 등이 두려워서 감히 한 마디 말도 변명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런데도 경인년의 전례를 끌어다 우길을 가선대부로, 부사(副使) 경섬을 통정대부로 승진시키는 등의 상을 주니, 세상의 여론이 떠들썩하였지만, 영경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최유원(崔有源)이 장령이 되어 소를 올려 여우길 등의 죄를 극언하니, 대간도 부득이하여 여우길ㆍ경섬 등에게 내린 자급을 삭탈할 것을 논하였다. 영경이 크게 미워하여 뒤에 공회(公會)에서 예수(禮數)로 인하여 서로 다투다가 유원을 끌어내어 욕보이니, 유원이 병을 핑계대고 벼슬을 그만두고 출사하지 않았다.
조종조의 증광과(增廣科)는 다만 즉위 원년에만 시행하였다. 그런 까닭에 성종이 덕종(德宗)을 추숭(追崇)할 때에도 시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선조 기축년에 종계(宗系)를 바르게 고친 것을 종묘에 고유하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린 뒤에, 조정에서 개국(開國)과 같은 경사라고 하여 시행하였으며, 경인년에 평난(平難 정여립의 난을 평정한 공훈)의 공을 책훈(策勳)하고 존호를 올릴 때에, 재상들이 즉위한 것과 경사가 같다고 하여 또 시행하였는데, 조종조의 옛 규례는 아니었다. 갑진년에 호종(扈從)ㆍ선무(宣武)의 공을 책훈하고 또한 존호를 올릴 때에 경인년의 전례를 끌어다가 또 시행하고, 병오년에는 등극한 지 40년이라고 하여 그때 재신 유영경이 즉위와 경사가 같다고 또 시행하였다. 광해 때에는 경사가 있을 적마다 여러 번 시행하였으며, 금상(今上 당시 임금, 즉 인조) 을축년에는 책봉 조사(冊封詔使) 호양보(胡良輔) 등이 나오니, 이정귀(李廷龜)가 그때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큰 경사라고 하여 시행하기를 청했는데, 식자들이 이미 즉위를 축하하여 증광과를 보였으니, 거듭 시행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는 이가 많았다. 그러자 정귀는 별시(別試)로 고쳐 시행하기를 청하였다. 계유년(1633, 인조 11)에 원종(元宗)을 추숭할 때에 시행하였는데, 덕종을 추숭할 때의 전례는 아니었고, 을해년에 원종을 종묘에 부사(祔祀)하면서 또 증광과를 시행하였다.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대략 이런 이야기가 있다.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우고, 재신(宰臣) 조증광과반(趙胖)이 중원(中原)에서 생장하였다고 하여 주문사(奏聞使)를 삼아 보냈다. 조반이 한인(漢人)의 말을 쓰니, 황제가 말하기를,
“네가 어떻게 중국말을 아느냐?”
고 하였다, 조반이 말하기를,
“신은 중원에서 생장하였으며, 일찍이 폐하를 탈탈(脫脫)의 군중에서 뵈었습니다.”
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경은 실로 짐의 벗이로다.”
하고, 이어 빈객을 대하는 예절로 대우하고, ‘조선(朝鮮)’ 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보냈다는 것이다.
하곡(荷谷) 허봉(許篈)이 그 사실을 《해동야언(海東野言)》 우리 태조기(太祖紀)에 썼다는데, 대명 태조(大明太祖)가 탈탈의 군중에 있지도 않았으며, 조반이 명 나라 태조를 볼 수도 없었음을 내가 이미 《자해필담(紫海筆談)》에 썼다,
홍무(洪武) 경오년(1390)에 고려 공양왕(恭讓王)이 조반을 보내어 중국에 가서 윤이(尹彛)ㆍ이초(李初)와 예부에서 변쟁(辨爭)하여 밝히고 돌아와서 청주(淸州)의 옥사가 있었다.
우리 태조가 임신년 7월에 개국하고 밀직사사(密直司事) 한상질(韓尙質)을 중국 서울에 보내어 주문하기를,
“배신(陪臣제후의 신하가 천자에게 대하여 자기를 일컫는 말) 조임(趙琳)이 예부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왔길래 성지(聖旨)를 공경히 받드니, ‘국호(國號)를 무엇으로 고쳤느냐? 급히 달려와 아뢰라.’ 하옵기에, 조선(朝鮮)ㆍ화령(和寧) 등의 국호를 써서 성지를 받드니, ‘동이(東夷)의 호는 조선이란 칭호가 아름답고 또 그 유래도 오래이니, 그 이름에 근본하여 본받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였으니, 조반을 보내 주문한 일은 없는데, 용재(慵齋)는 어디에서 듣고 이처럼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을 지어서 국가의 전고(典故)를 삼았는가. 그리고 하곡이 또한 이것을 취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두 공(公)은 모두 문장이 박아(博雅)하다고 일컫는데 이런 실수가 있었으니, 이는 우리 나라 풍속이 비록 널리 여러 가지 서적을 보는 이라도 본국의 문자는 즐겨 보지 않기 때문에 본국의 사례에 대해서는 대부분 어둡기가 이와 같은 것이다. 속담에,
“본국의 《통감(通鑑)》을 누가 읽겠느냐?”
하였으니, 한 번 개탄할 만한 일이다.
임자년(1612, 광해군 4)봄에 봉산 군수(鳳山郡守) 신율(申慄)이 도적을 잡아서 몹시 혹독하게 국문하니, 도적이 죽음을 늦추고자 하여 김직재(金直哉)가 모반(謀反)했다고 하였다. 병사(兵使) 유공량(柳公亮)과 감사 윤훤(尹暄) 등이 조정에 보고하고 직재를 잡아 보내어 국문하니, 직재가 거짓으로 말하기를,
“황혁(黃赫)과 공모하여 진릉군 태경(晋陵君泰慶)을 추대하려 했다.”
고 하였다. 이는 황혁의 딸이 순화군(順和君)의 부인이 되고 진릉군이 그의 후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역옥(逆獄)이 성립되어 유공량(柳公亮)ㆍ신율(申慄) 등 추관(推官) 모두 녹훈(錄勳)되었다.
이이첨(李爾瞻)의 당이 이 옥사를 기화로 하여 유영경(柳永慶)ㆍ이홍로(李弘老) 등이 동궁을 해치려 하였다는 죄를 논핵하여 대역으로 형벌을 추시하게 하고, 그 공으로 녹훈되었다.
계축년 봄에 고 정승 박순(朴淳)의 서자 응서(應犀)ㆍ서익(徐益)의 서자 양갑(羊甲)ㆍ심전(沈銓)의 서자 우영(友英)ㆍ이제신(李濟臣)의 서자 경준(耕俊) 등이 도당을 맺어 도적이 되어 서울의 장사꾼을 조령(鳥嶺)에서 죽이니, 상인의 집에서 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에게 고발하여 응서를 체포하고, 장물(臟物)도 아울러 압수하였다. 응서가 죽음을 모면하고자 하여 김제남(金悌男)과 공모하여 영창대군 이의(李㼁)를 임금으로 추대할 음모를 하였다고 고변하였다. 광해가 친히 양갑 등을 국문하니 양갑이 복죄하는 것이 한결같이 응서의 말과 같으므로, 지평 정호관(丁好寬)이 이의를 귀양보내 화근(禍根)을 끊어 버리기를 청하였다. 옥사가 날로 준엄하게 되어서 무신년에 선조의 유교(遺敎를 받은 일곱 명의 신하가 모두 붙잡히어 국문을 당하였고, 김제남은 사사(賜死)되었다.
이이첨 등이 광해에게 영합(迎合)하여 이의를 죽여서 자기들의 공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도당인 유생 이위경(李偉卿) 등이 이의를 죽일 것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모후(母后)가 안으로는 무고(巫蠱 남을 혹독하게 저주(咀呪)함)를 하고 밖으로는 역모(逆謀)와 응하니, 어머니의 도리가 끊어졌습니다.”
하고, 장령 정조(鄭造)ㆍ윤인(尹訒) 등도 말하기를,
“무고한다는 이야기가 전파됨이 이미 오래이고, 밖으로 역모와 호응한 자취가 적의 입에서 나왔으므로 종묘사직에 죄를 지어 모자간의 의리를 끊어야 함이 뚜렷한데, 그를 국모로 대우한단 말입니까?”
하였다. 대사헌 최유원(崔有源)이 그 주장에 따르지 않고 이의를 제기하다가 인피하였으며, 유생 조경기(趙慶起)ㆍ이안진(李安眞)ㆍ권심(權淰)ㆍ정복형(鄭復亨) 등이 상소하여 이위경과 정조ㆍ윤인에게 죄주기를 청하다가 모두 죄를 입었다.
드디어 이익를 강화(江華)에 유폐하니, 이익의 나이 겨우 여덟 살이었다. 갑인년 봄에 강화 부사 정항(鄭沆)이 암시를 받고 박해하여 죽였다. 정은(鄭藴)이 상소하여 정항을 참형에 처하기를 청하고, 또 윤인ㆍ정조ㆍ정호관의 죄를 논하기를,
“전하가 정항을 죽이지 않으면 선왕의 종묘에 들어갈 면목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까지 하였다. 광해가 크게 성내어 대간이 국문하기를 청하여 그 죄가 장차 헤아릴 수도 없었는데, 이원익(李元翼)ㆍ정창연(鄭昌衍)이 차자를 올려 구원함으로써 사형을 면하고 제주(濟州)로 귀양보냈다.
을묘년(1615, 광해군 7) 봄에, 광해가 대비(大妃)를 창덕궁(昌德宮)에 옮기게 하고, 제남과 역모한 상황이며 궁중에서 내응한 일들을 중외에 교서로 반포하였다.
정조와 윤인이 다시 대각에 들어가니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이원익이 차자를 올리기를,
“길가에 떠도는 근거 없는 말로 대비에게까지 파급시키려 하오니, 어머니가 비록 사랑하지 않더라도 아들은 효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 하니, 광해가 힐난하기를,
“경이 어디에서 이런 근거 없는 말을 듣고 글로 써서 여러 사람들 귀를 놀라게 하느냐? 마땅히 바른 대로 진술하여 대답해야 하오.”
하였다. 원익이 대답하기를,
“계축년에 그런 논의를 한 사람들이 다시 대각(臺閣)에 퍼져 있으므로, 신이 마음으로 크게 의심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대간이 원익을 귀양보내라고 청하고, 남이공(南以恭)이 원익에게 말하여 차자를 올리게 하였다 하여 그까지 아울러 죄주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원익을 홍주(洪州)로, 이공을 송화(松禾)로 귀양보냈다. 유생 홍무적(洪茂績)ㆍ정택뢰(鄭澤雷)ㆍ김효성(金孝誠) 등이 상소하여 원익의 충성을 하소연하고 정조ㆍ윤인 등을 책망하니, 대간이 무적 등의 죄를 논하여 모두 섬으로 귀양보냈다.
정사년에 이이첨이 대비를 폐하여 임금의 총애를 견고히 만들고자 하니, 그의 도당으로서 선비의 갓을 쓴 자들의 상소하기를,
“대각(臺閣)과 조정의 공론이 있으니, 청컨대, 급히 종묘사직을 편안하게 할 큰 계책을 정하소서.”
하였다. 광해가 조정의 신하들에게 의논을 아뢰기를 명하여, 이의를 제기한 이항복(李恒福)ㆍ기자헌(奇自獻)ㆍ정홍익(鄭弘翼)ㆍ김덕함(金德諴)을 북쪽의 변방으로 귀양보내고, 드디어 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니, 인심이 분해하고 원망하였다.
그리하여 신경진(申景禛)이 이서(李曙) 등과 새 임금을 추대하여 종묘사직을 편안히 할 것을 비밀리에 모의하고, 그 음모를 김유(金瑬)와 최명길(崔鳴吉)에게 알린 뒤에 김유를 우두머리로 함께 추대하였다.
이귀(李貴)도 분개하고 흥분하여 김자점(金自點)ㆍ심기원(沈器遠) 등과 어지러운 정치를 제거할 것을 공모하고 무사(武士)들과 결속하여 온 지가 1년이 넘더니, 김유ㆍ신경진 등과 합세하였다.
이귀는 사람됨이 비밀을 지키지 못하여 모사(謀事)가 누설되어 유천기(柳天機)가 이 음모를 알고 최곤(崔滾)에게 말하였다. 최곤은 유원(宥源)의 아들로 유희분(柳希奮)과 친밀하였기 때문이다. 희분이 절친한 대간을 시켜서 이귀가 딴 뜻이 있다고 국문을 청하게 하였다. 김자점이 뇌물로 광해가 사랑하는 김상궁(金尙宮)과 몰래 결탁하고 있었으므로, 상궁이 그들의 원통함을 호소하기에 매우 힘을 썼다. 그런 까닭에 광해는 대간의 논의를 좇지 않았다. 그 논의가 정지되자, 이귀는 상소하여 대간과 조정에서 변론하여 무고(誣告)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광해도 그냥 내버려 두고 문제로 삼지 않았다.
계해년 3월 12일, 김유ㆍ이귀 등이 거사(擧事)하려고 하는데, 이후원(李厚源)이 이이반(李以攽)과 같이 가기를 요청하였다. 이는 이반이 유홍(惟弘)의 아들로, 유홍이 강계에 귀양갔을 때에 김유가 강계 부사로 있어서 서로 친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반이 그의 숙부 유성(惟聖)에게 말하고, 유성은 김신국(金藎國)에게 말하고, 신국은 박승종(朴承宗)에게 말하니, 박승종이 크게 놀라서 이반으로 하여금 대궐에 나아가 고변(告變)하게 하였다. 대신과 금부 당상(禁府堂上)도 대궐에 모였다. 그러나 이날은 김자점이 성대한 주찬을 마련하여 김상궁에게 바쳤기 때문에 광해가 한창 궁녀들과 연회를 열어 즐기고 있었다. 그 무렵에 고변하는 글이 올라갔으므로 일부러 그대로 두고 내려보내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대궐 문이 닫히게 되니, 박승종 등은 부득이 의금부의 관원들과 함께 대궐 문밖 비변사로 물러나와 기다리게 되었다.
밤이 되자, 김유 등이 홍제원(弘濟院)에 모였다. 이서(李曙)가 이때 장단 부사(長湍府使)로 있었는데, 장단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이괄(李适)의 지휘를 따라 삼경(三更)에 주상을 받들고 대오를 정돈하여 창의문(彰義門)을 부수고 들어왔다. 광해는 도망해 나가고 입직 중인 승지와 장관들도 모두 도망쳤으며, 박승종ㆍ박자흥(朴自興)ㆍ이이첨도 모두 성을 넘어 달아났다.
이튿날 광해를 인가에서 찾고서 서궁(西宮)에 나아가 대비에게 아뢰어 그를 폐위하였다. 김상궁ㆍ박정길(朴鼎吉)ㆍ이위경(以偉卿)ㆍ한찬남(韓纘男)ㆍ백대형(白大珩) 등을 참형에 처하였다. 승종은 송산(松山)에 이르러 상이 이미 즉위하였다는 말을 듣고, 자흥과 함께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그리고 이첨은 도망쳐 이천(利川)에 이르니, 사람들이 잡아 바치자 이첨과 정조(鄭造)와 윤인(尹訒) 등을 저자에서 참형하고, 사자를 나누어 보내서 평안 감사 박엽(朴燁), 의주 부윤 정준(鄭遵), 충청 병사 한희길(韓希吉)도 참형에 처하였다. 한편 대사령(大赦令)을 내려 광해 때에 죄를 받은 사람들을 다 석방하였으며, 정인홍을 체포하여 저자에서 참형하고, 흉당(兇黨)은 죄의 경중을 구분하여 귀양보내거나 죽였다.
정인홍이 상소하여 유영경이 동궁을 해치려고 한 죄를 논하였을 때에 박당(朴黨)이 이경전(李慶全)ㆍ이이첨 등이 사주하였다고 하여 모두 먼 변방으로 귀양을 가게 하니, 사람들이 다 원통하다 하였으며, 이첨이 울며 그의 가묘(家廟)에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광해가 즉위하여 인홍 등이 모두 발탁되자, 인홍은 말하기를,
“거창 현감 김정립(金挺立)이 우연히 저보(邸報 지금의 관보(官報)와 비슷함)를 보여주어서 영경이 전위(傳位)하려는 하교를 가로막은 것을 알고 소를 올려 논핵하였을 뿐이고, 이경전ㆍ이이첨 두 사람은 아무런 관계도 없었는데 모두 그 죄를 입었으니, 소인이 남을 무함함이 이와 같다.”
고 하니, 사람들이 다 그렇게 믿었다.
그 후 인홍 등의 공을 녹훈하게 되니, 드디어 말하기를,
“이산해(李山海)ㆍ이이첨ㆍ박건(朴楗)ㆍ이성(李惺) 등과 서로 의논하여 상소하였다.”
하여 모두 녹훈되었는데, 훈명(勳名)은 정운(定運)이라고 하였다.
처음에 이첨과 이성이, 이성의 아우 이담(李憺)을 시켜서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를 보고 동궁을 해치려고 한 영경의 죄상을 극언한 다음, 소를 올려 그 죄를 논핵하기를 청하였으나, 우복이 듣지 않으므로 이담이 여러 날 동안 가지 않고 조르다가 다시 편지를 보내어 권하니, 우복이 그 편지에 답하기를,
“도가 같지 않으면 서로 꾀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담이 드디어 가서 인홍을 설득해서 하게 하였던 것이다. 인홍이 처음에 이첨도 그 소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그것을 가지고 자신을 높여서 자기 명망을 중하게 하고자 함이었고, 뒤에 이이첨ㆍ박건과 같이 의논하였다고 한 것은 그 진실을 실토하여 그들의 공을 녹훈하고자 해서이니, 소인이 공명을 탐내는 마음은 그 극도의 방법을 쓰지 않음이 없음이 이와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산해와 박건은 모두 그 일에 참여하지도 않았는데, 산해는 그 당의 영수이며 무신년에 그의 아들 경전이 인홍과 함께 귀양간 일이 있었고, 박건의 아내는 광해의 외고(外姑)이므로 그 인연으로 서로 통하여 유력하였기 때문에 녹훈(錄勳)한 것이다.”
하였다.
이괄(李适)은 참판 이육(李陸)의 후손인데, 무과(武科)로 뽑혔으나 글에 능숙하고 글씨를 잘 써서 이름이 났다. 계해년 봄에 북병사(北兵使)에 미처 부임도 하기 전에 김유(金瑬)ㆍ이귀(李貴) 등이 반정(反正)을 하려 하면서, 이괄이 재주와 지혜가 많다고 하여 자기들의 비밀스러운 계획을 알리므로 이괄은 강개하여 그들의 계획을 따랐다.
반정하던 날의 군대의 편성과 모든 계획은 모두 이괄이 하였는데도 공의 등급을 논할 때에는 이괄은 새로 참여하였다고 하여 눌러서 2등 공으로 하였다. 이괄이 크게 불평을 품었으며, 공론도 박원종(朴元宗)이 정국(靖國 중종반정)할 때에 유자광(柳子光)도 모의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거사할 때 그의 계책을 채용하였기 때문에 발탁하여 1등 공으로 삼았는데, 이괄의 일이 자광의 경우와 같은데도 공을 도리어 깎았다하여 매우 원통하게 여겼다.
이해 여름에 조정에서는 관서(關西)의 오랑캐를 염려하여 이괄을 내보내 평안병사 겸부원수로 삼으니, 이괄이 매우 성내어 드디어 딴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때 원훈 공신 등이 처음 뛰어난 공훈을 세우고는 인심이 복종하지 않을까 지나치게 염려하며 널리 감시를 하고 밀고의 길을 크게 열어 놓았다. 그리하여 문회(文晦)ㆍ이우(李祐) 등이, 기자헌(奇自獻)ㆍ현집(玄諿)ㆍ이괄ㆍ이괄의 아들 이전(李栴)ㆍ한명련(韓明璉) 등이 모반(謀反)한다고 고변하였다. 상이 대신과 원훈 공신을 불러서 의논하게 하니, 김유는 이괄이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고, 이귀와 최명길 등은 이괄이 반드시 배반할 것이라고 하였다. 상은 그의 아들 이전과 기자헌 등만을 잡아 오라고 명령하였는데, 이때는 갑자년 정월 17일이었다. 금오랑(金吾郞 의금부 도사)과 선전관이 이괄의 영문(營門)에 이르니, 이괄이 그들을 베어 죽이고 군사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23일에 보고가 이르자, 조정은 깜짝 놀라 드디어 기자헌 등을 다 참형에 처하고, 이수일(李守一)을 평안 병사로, 변흡(邊潝)을 황해 병사로, 이시발(李時發)을 부체찰사(副體察使)로 임명해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이괄이 한명련 등 도내의 장관들을 협박하여 순천(順川)의 길을 따라 길게 몰고 왔다. 이는 장만(張晩)이 도원수로서 평양에 있었으므로 이괄이 그와 싸우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순천에 이르자, 이윤서(李胤緖)ㆍ이탁(李托) 등 5~6 명의 장수가 각각 소속 군사 3천여 명을 거느리고 달려서 장만에게로 가니, 이괄이 크게 두려워하여 이로부터는 감히 관청에 들어가 자지 못하고 하룻밤에도 여러 번 장소를 바꾸곤 하였으니, 군중에서 죽일 것을 두려워해서였다. 황주(黃州) 서쪽에 이르러 장만의 군사와 싸워서 장만의 군사가 패배하였으나, 장관(將官) 안늑(安玏)ㆍ허전(許銓) 등이 또 소속 군사들을 거느리고 장만에게로 투항했다. 이괄이 수안(遂安)에 이르러서 관군이 새원(塞垣)을 지키는 것을 알고 길을 돌려 기린로(麒麟路)로 향하였다. 장만이 패군을 정돈해서 그 뒤를 따라 평산(平山)에 이르니, 이수일ㆍ이시발이 소속 군사들을 인솔하고 같이 왔으며, 남병사(南兵使) 신경원(申景瑗)도 도착했다.
이괄이 저탄(猪灘)에 이르니, 방어사 이중로(李重老)ㆍ이덕부(李德符)가 풍천 부사(豊川府使) 박영신(朴榮臣) 등을 거느리고 저탄을 지키고 있었다. 이괄이 진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중로 등을 베어 죽였다. 이귀(李貴)가 호군(護軍)을 거느리고 임진(臨津)을 지키고 있다가 소문을 듣고 달아나 경성으로 돌아와서 상께 피난갈 것을 힘껏 청하므로 2월 9일에 상이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거둥하였다. 장만 등이 파주(坡州)에 이르러 상이 남쪽으로 거둥하고 적병이 서울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정충신(鄭忠信)의 전략을 썼다.
정충신ㆍ남이흥(南以興)ㆍ변흡ㆍ신경원 등이 11일 밤에 군사를 이끌고 안현(鞍峴)으로 올라가는데, 이수일(李守一)이 뒤를 따랐다. 이튿날 이괄은 관군이 성에 임박해 있는 것을 보고 군사를 이끌고 위로 쳐다보면서 공격하므로, 충신 등이 정예병을 다 동원하여 공격하였다. 이괄의 군사가 크게 패하자 성안으로 들어가서 군사를 이끌고 흥인문(興仁門)으로 나가 달아났다. 여러 장수들이 추격하니 적병이 다 무너져 흩어졌다. 이괄이 수백 기병을 이끌고 도망하여 이천(利川)에 이르렀을 때에 그의 무리 기익헌(奇益獻)ㆍ이수백(李守白) 등이 이괄과 한명련의 머리를 베어 공주(公州)의 행재소(行在所)에 바쳤다.
대가(大駕)가 남쪽으로 거둥할 때에 왕자(王子) 흥안군(興安君) 이제(李瑅)가 호종하지 않고 도망하였다가 이괄이 입성하기를 기다려 투항하였고, 이흥립(李興立)은 경기 방어사로서 반기는 뜻을 표시하고 항복하였다. 이괄이 겉으로 이제를 높여 왕을 삼았으므로, 이괄이 패하자 이제는 강을 건너 달아났다. 한무(韓繆)ㆍ안사함(安士諴) 등이 이제를 잡아서 장만에게 바치니, 장만이 그를 가두어두고 조정의 명령을 기다렸는데, 남도 도원수(南道都元帥) 심기원(沈器遠)과 도감대장(都監大將) 신경진(申景禛) 등이 조정에 알리지도 않고 군중에서 죽였다.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기원과 경진을 금부(禁府)에 하옥하였는데 수일 후에 석방되고, 이흥립은 하옥 중에 자살하였다.
이괄이 처음 반역할 때에,
“경성에 변란이 있어서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가 후원하려 한다.”
하고, 수하의 정예병을 나누어 보내서 여러 장수들을 불렀다. 정주 목사(定州牧使) 정호서(丁好恕)는 그가 딴 뜻이 있음을 알고, 그 사자를 베어 죽이고 군사를 거느리고 장만에게로 갔다. 그리고 안주목사(安州牧使) 겸방어사 정충신은 숙천 부사(肅川府使) 정문익(鄭文翼)으로 하여금 안주(安州)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장만에게 가서 따라가기를 청했다. 장만은 그가 성을 버리고 온 것을 책망하여 죄를 주려다가 용서하였는데, 마침내 이괄을 베고 큰 공훈을 세웠다.
내가 일찍이 조용히 그에게 묻기를,
“공이 이괄의 반역을 듣고서 성을 버리고 달아난 것은 무슨 까닭이오?”
하였더니, 충신이 대답하기를,
“나와 이괄의 교분이 형제와 같다는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알므로 나도 문회(文晦) 등에게 고발되었는데, 다행히도 상의 은혜를 입어 체포됨을 면하였소. 이괄이 반역하였을 적에 내가 영변(寧邊) 가까이에 있으면, 남의 의심을 사게 되니, 나의 본심을 청천백일하(靑天白日下)에 스스로 밝힐 수가 없기 때문에 성을 버리고 달아난 것은 나의 본심을 밝혀서 사람들이 저절로 믿게 하기 위함이었소”
하였다. 이괄이 죽은 뒤에 장만이 서도에서 온 여러 장수에게 대가(大駕)가 서울로 돌아갈 때를 기다려서 강상(江上)에서 맞이하도록 하라고 일렀다. 그런데 충신은 홀로 내려가겠다고 와서 이시발(李時發)에게 하직했다. 시발이 말하기를,
“여러 장수들이 다 머무르고 있으니, 공이 홀로 돌아갈 수는 없소.”
하니, 충신이 말하기를,
“서도에서 군사를 거느린 신하로 반역한 역적을 즉시 베어 죽이지 못하여 대가로 하여금 피난을 가고 적병이 도성 안에 들어가게 하였으니, 그 죄가 큽니다. 어찌 감히 스스로 공이 있는 자처럼 하고서 대가를 강상에서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물러가 본진(本鎭)으로 돌아가서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환조(還朝)하여 충신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성지(聖旨)를 내려 불렀다. 그의 현명함이 이와 같았다.
이괄이 배반하였을 때에 김효신(金孝信)이 강작(康綽)을 거느리고 또한 이괄의 명령에 따라 군사를 거느리고 숙천(肅川)에 이르렀다. 강작이 칼을 빼어 효신을 베려 하다가 효신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장만은 강작이 이괄을 위하여 효신을 죽이려고 하다가 효신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하여 그의 공을 찬양하고, 효신을 발탁하여 충청 수사(忠淸水使)에 임명하였다.
내가 그 일을 정충신에게 물었더니, 충신이 말하기를,
“강작이 자주 효신에게 이괄을 버리고 나라에 충성하라고 말하였으나 효신이 듣지 않으므로, 강작이 효신의 밑에 있을 때에 부르짖기를, ‘내가 이 역적으로 인해서 장차 의롭지 못한 죽음이 있겠다.’고 했습니다. 효신이 강작을 죽이매 이괄의 군사가 이미 멀리 가 버려서 따라갈 수가 없으므로 부득이 와서 원수(元帥)를 뵈옵고 그 말을 번복하였는데, 충절을 해치고 그 공을 누리게 되었으니, 몹시 통분하고 놀랄 일입니다.”
하였다.
내가 장공(張公)과 조용히 말하다가 효신의 일에 미치자, 말하기를
“충신의 말이 이러 하더이다.”
하였더니, 장공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정(鄭 정충신)은 이러한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고 하였다.
광해 때에, 무오년의 대비과(大比科 식년시(式年試)로,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년에 보임)를 물려서 기미년의 강경회시(講經會試)로 시행하였다. 그런데 요망한 말에 구애되어 즉시 전시(殿試)를 시행하지 못하였다. 신유년에도 상이 적전(籍田 임금이 몸소가는 밭)의 친경(親耕)을 행하고 별시(別試)를 보여 사람을 뽑았는데, 역시 요망한 말에 구애되어 창방(唱榜)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계해년의 반정이 있은 뒤에 상은 하교하기를,
“무신년 이후의 급제 중에 어떤 것은 삭과(削科)하고 어떤 것은 파방(罷榜)하라”
고 하였다. 상이 민가에 살고 있을 때에 이이첨(李爾瞻) 등이 사사로운 당파를 수립하기 위하여 기일보다 먼저 몰래 시험 문제를 내어 대신 짓게 하여 글자도 모르는 자가 다 급제하였으며, 식년시에서는 미리 무슨 편(篇)을 지정해 주어서 외우게 한 뒤에 강석(講席)에 나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칠서(七書)의 경문(經文)을 통함은 자원에 따른다.’[七大文通從自願]이란 말이 있었다. 때문에 이러한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이 두 과방(科榜)과 병진년의 알성시(謁聖試 임금이 문묘(文廟)에 참배하고 보이던 과거), 을묘년의 식년시가 가장 심하였다. 그러므로 마땅히 파방(罷榜)해야 했으며, 그밖의 다른 과방에도 이름을 삭제해야 할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예조 판서 이정귀(李廷龜)가 일이 중대하다고 칭탁하고 삼사(三司)가 함께 회의하기를 청하면서 여러 번 기일을 물렸다. 이것은 김유(金瑬)의 아들 경징(慶徵)이 본래 글을 알지 못하였는데 참람하게 친경방(親耕榜 친경(親耕)의 행사를 마치고 보이던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그의 처지를 위해서였다.
이완평(李完平 완평은 완평부원군)이 조강(朝講)에 입시하여 말하기를,
“이미 시취(試取)한 급제를 어느 것은 삭과하고 어느 것은 파방한다는 것은 전에는 없었던 일이오니, 경솔하게 시행할 수 없습니다. 그 중에서 분명히 사사로이 절취한 자만을 버리고 벼슬에 등용하지 않으면 될것이옵니다.”
하니, 상이 그 의견을 따랐다. 이는 완평이 조야(朝野)에 명망이 높아 상이 의지하고 믿었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경징을 위하여 공론이라 하면서 완평을 설득한 것이다. 그리고 여러 번 기일을 물려 완평이 경연에 입시하기를 기다렸으니, 완평이 속았던 것이다. 대간들이 논쟁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괄의 난이 지난 뒤에 큰일은 막 진정되었으나 인심이 견고하지 못하여 비밀 사찰이 매우 성하였다. 장만(張晩)이 정사공신(靖社功臣)과 의논하고, 남이흥(南以興)으로 하여금 스스로 딴 음모를 하는 사람인 것처럼 꾸미게 하여 의심스러운 사람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박홍구(朴弘耈)의 형의 아들 윤장(允章)이 그를 믿고서 자기의 음모를 이흥에게 말하였다. 그리하여 김인(金仁)ㆍ심일민(沈逸民)을 시켜서 고변하게 하고, 드디어 홍구와 윤장과 그 형 성장(成章) 등을 체포하여 국문하니, 윤장ㆍ성장이 자복하므로 드디어 그들을 죽이고 홍구도 사사하였다.
기익헌(奇益獻)이 이괄과 명련(明璉)을 죽이니, 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이 도망하여 귀성(歸城)으로 가서 1년이 넘도록 숨어 있었다. 부사 조시준(趙時俊)이 비로소 듣고서 체포하려고 하자, 한윤이 눈치채고 달아나 오랑캐 땅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가 어지럽다고 말하니, 오랑캐에게 사로잡혀 간 장수 강홍립(姜弘立)ㆍ박난영(朴蘭英) 등이 그 말을 믿고 오랑캐의 군사를 유인하여 드디어 우리 나라를 침략해 올 음모가 있었다.
병인년(1626, 인조 4) 봄에 조정에서는 그 소문을 듣고 홍립의 서자 강숙(姜璹)과 난영(蘭英)의 아들 박입(朴雴) 등을 오랑캐 속에 보냈으나 강숙 등도 겁이 나서 조정의 말을 전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정묘년 정월에 오랑캐 군사 3만여 기가 밤에 의주(義州)를 습격하여 함락시키니, 부윤 이원(李菀)과 판관 최몽량(崔夢亮) 등이 다 죽어, 오랑캐가 드디어 길게 몰아 진격해 왔다. 조정에서는 장만(張晩)을 보내어 김기종(金起宗)ㆍ정충신 등을 거느리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오랑캐 군사는 능한산성(凌漢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정주(定州) 목사 김진(金搢), 곽산 군수(郭山郡守) 박유건(박유건), 선천 부사(宣川府使) 기협(奇協) 등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홍립 등은 우리 나라의 반정에 대한 일을 자세히 듣고 비로소 그에게 속은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 오랑캐 군사가 안주(安州)에 진격하여 함락시키니, 병사 남이흥(南以興)과 목사 김준(金俊)이 스스로 불에 타 죽고, 우후(虞候) 박명룡(朴命龍), 개천 군수(价川郡守) 김상의(金尙毅), 영유 현령(永柔懸令) 송도남(宋圖南), 증산 현령(甑山縣令) 장돈(張暾) 등이 다 전사하였다. 감사 윤훤(尹暄)이 평양을 버리고 달아나니, 황해 병사 정호서(丁好恕)도 윤훤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는 말을 듣고 황주(黃州)를 버리고 달아났다.
보고가 들어오자, 조정에서는 놀라고 두려워하여 김기종(金起宗)으로 윤훤을 대신하게 하고, 신경원(申景瑗)으로 남이흥을 대신하고, 이익(李榏)으로 정호서를 대신하게 하였다. 그리고 대가(大駕)는 강화(江華)로 피난하고, 이원익(李元翼)ㆍ신흠(申欽)ㆍ한준겸(韓浚謙) 등은 동궁을 모시고 호남으로 내려가서 인심을 진정시키고 어루만지게 하였다.
오랑캐 군사가 평산(平山)에 진격하였을 때에 마침 큰비가 내려 강물이 크게 불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오랑캐 군사가 비록 승세(勝勢)를 타고 전진해 왔으나 깊이 들어오는 것은 또한 본의가 아니었으므로, 유해(劉海) 등을 보내어 강화를 제의하고, 계속하여 강홍립 등을 보내 왔다. 조정에서는 허락하고 이홍망(李弘望)을 보내어 종실(宗室) 원창군(原昌君)을 모시고 가서 왕제(王弟)라 하면서 인질(人質)로 내보내게 하니, 오랑캐 군사가 이끌고 돌아갔으나, 살인과 약탈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윤훤을 현장에서 베어 죽이고, 정호서를 온성(穩城)으로 귀양보냈다. 대간이 호서도 함께 죽일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특별히 용서하였으니, 이는 지난날 이괄의 사자를 죽인 충성을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4월에 대가가 서울로 돌아와서 강화를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켰다. 동궁도 호남에서 돌아왔다. 오랑캐가 강홍립ㆍ박난영(朴蘭英)ㆍ오신남(吳信男) 등을 돌려보내왔는데, 오래지 않아 홍립이 병으로 죽으니, 사람들은 그가 자살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정묘년에 북병사 윤숙(尹璹)과 남병사 변흡(邊潝)이 근왕병(勤王兵)을 거느리고 해서(海西)에 이르렀으나 조정에서 오랑캐와 화의(和議)를 진행하고 있었으므로, 윤숙 등이 감히 싸우지 못하고 부원수 정충신, 황해 병사 이익(李榏) 등과 함께 수안(遂安)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오랑캐가 강화를 맺고 그 길로 돌아가게 되었다. 충신 등은 갑옷을 벗고 군사를 휴식시키고 있다가 오랑캐의 많은 무리가 갑자기 이르니, 화의가 이미 성립된 것은 알지 못하고 이리저리 숨고 달아나곤 하였다. 윤숙은 일이 급하여 미처 달아나지 못하고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누각에 올라가 결사적으로 싸울 것을 계획하였다. 그런데 오랑캐 장수가 화의가 이미 정해진 것을 말하고 서로 만나보고 가기를 청하였다. 그때 장만(張晩)이 평산(平山) 가까운 지경에 있었는데, 우봉현령(牛峯縣令) 이상절(李尙節)이 달아나서 장만에게 여러 장수들이 다 오랑캐에게 사로잡혔다고 보고하였다. 장만이 급히 행재소(行在所)에 알리니 사람들이 몹시 놀랐다. 나는 호소사(號召使) 정경세(鄭經世)와 함창(咸昌)에 모여서 병사(兵事)를 의논하고 있었는데, 행재소에서 장만이 보고한 것을 등사해서 가지고 온 사람이 있었다. 좌석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이 보고는 헛소문일 것입니다.”
하니 정경세가 말하기를,
“장만이 가까운 곳에서 실지를 보고한 것인데, 공이 천리 밖에 있으면서 미리 그것이 헛소문인 것을 아는 것은 어째서이오?”
하였다. 그러자 홍호(洪鎬)가 그 설을 더욱 강력히 주장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들이 비록 잘 싸우지는 못하지만 달아나기는 잘합니다. 만약 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된 경우라면 혹 이런 근심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들에 있다가 오랑캐를 만났는데 어찌 모두 사로잡힐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정경세와 홍호가 웃으며 말하기를,
“공도 몹시 고집이 세군요”
하였다. 나는 상주(尙州)로 돌아왔다. 이튿날 서쪽에서 통보가 왔는데 과연 헛소문이었다. 홍호가 나에게 편지를 급히 보내어 말하기를,
“고견(高見)이 보통 사람들보다 천백 배나 뛰어납니다. 비록 옛날의 명장인들 어찌 이보다 나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니, 우스운 일이다.
말에는 실지를 가지고 헛말처럼 하는 것도 있고 헛말을 가지고 실지인 것처럼 하는 것도 있으니, 허(虛)와 실(實)이 서로 뒤섞이면 명백하게 분간하기는 매우 어렵다. 문회(文晦)가 이괄의 반역을 고할 적에, 정용영(鄭龍榮)과 그의 아들 정찬(鄭澯)도 피의자로 신정(訊庭 죄인을 심문하는 곳)에 있었다. 용영이 고문을 당하게 되니, 정찬이 나아가 말하기를,
“만약 아버지의 고문만 면할 수 있다면 내가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
하였다. 추관(推官)이 불러다가 물었다. 그때 나는 문사랑(問事郞)으로서 그의 진술을 받았는데, 정찬이 말하기를,
“이괄이 모반한 실상을 사실대로 말한 사람이 있습니까?”
하였다.
“없다.”
하니, 정찬이 말하기를,
“이괄이 약속하기를, 이달 그믐께 군사를 일으켜 배반하여 개천(价川)ㆍ순천(順川)ㆍ곡산(谷山)ㆍ수안(遂安)의 길을 따라 올라올 것이라고 하였는데, 문회가 먼저 고발하였으니, 그들은 반드시 의금부 도사와 선전관을 베어 죽이고 이미 반란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나의 형은 한명련(韓明璉)의 사위입니다. 그들의 음모를 정탐하여 고변하고자 하여 명련의 처소에 가 있으니, 오늘이나 내일은 반드시 올라올 것입니다.”
하였다.
“명련도 공모하였느냐?”
“아닙니다. 그러나 그를 위협해서 붙잡아 가지고 같이 배반하였는지는 나는 모릅니다.”
“기자헌(奇自獻)도 음모에 참여하였느냐?”
“들으니, 그도 딴 음모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괄과는 서로 통하지는 않았습니다.”
“너의 아비도 이 일을 알고 있느냐?”
“자식이 아는 것을 아비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추관 중에 김유(金瑬) 등처럼 이괄이 배반하지 않으리라고 보장하던 자들이 다 몹시 놀랐다. 그래서 용영을 불러 물으니, 용영이 말하기를,
“윤인발(尹仁發)이 거짓으로 죽은 것처럼 꾸미고 몰래 이괄에게 가서 그의 책사(策士)가 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추관들이 다 말하기를,
“윤인발이 살아 있다고 하니, 이 사람의 말은 다 믿을 수가 없다”
고 하고, 끌어내려 매질을 하였다.
이는 지난해 10월에 인발이 이부현(利夫峴)에서 도적을 만나 죽었는데, 그의 낯가죽을 벗기고 낭신을 베어 갔으며, 그 집에서 그를 장사한 것이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와서 나는 명령을 받고 서쪽으로 가서 평산산성(平山山城)에 주둔하였다.
괄이 곡산에 이르렀을 때에 이괄의 막하에 있던 최덕문(崔德雯)이 귀순하여 장만(張晩)에게 와서 말하기를,
“윤경립(尹敬立)의 아들로 중이 된 자가 이괄의 모사(謀士)가 되어 침식과 거처를 함께 하면서 가장 친밀합니다.”
하였다. 장만이 평산에 이르는데, 정호서(丁好恕)ㆍ김기종(金起宗) 등도 따라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덕문이 이괄의 일을 매우 자세하게 이야기하였다.”
하니, 호서가 말하기를,
“윤인발이 살았다고 하니, 그의 말도 다 믿을 수가 없다”
고 하였다. 인발은 호서의 형인 호관(好寬)의 사위이므로, 호서가 그의 죽음이 사실이라고 믿어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내가 말하기를,
“경솔하게 말하지 마오. 용영도 인발이 죽었다고 거짓 말하였는데, 추관이 또한 믿지 않고 매질을 하였소. 지금 덕문의 말을 들으니, 죽었다는 것은 과연 거짓이오.”
하니, 좌중이 다 몹시 놀랐다.
그 뒤 안현(鞍峴) 싸움에서 인발은 이수일(李守一)의 군사에게 목이 베였다. 지난해 겨울에 이부현에서 죽었다는 자는 바로 인발이 죽인 종실 연성도정(連城都正)의 종이었는데, 그것을 자기 시체라고 거짓으로 일컬은 것이다. 그리고 그 낯가죽을 벗기고 낭신을 베어 버린 것은 그의 아내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적의 음모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괄의 난 때에 판서 이시발(李時發)은 부찰사(副察使)로서 명령을 받고 방어하러 나가 평산(平山)에 주둔하고, 완풍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는 경기 감사로 군사를 거느리고 뒤를 이어 나갔다. 이 판서가 적보(賊報)를 들을 때마다 번번이 이서에게 전령하여 대응하게 하는데, 하루에 3~4 번에 이르는 통보가 말이 같지 않았으며, 전령 또한 수시로 변경되었다. 이서는 정사원훈(靖社元勳)으로 권세와 총애가 한창 성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오늘의 사세를 보니, 종이 한 장의 전령으로 완풍부원군을 통제하여 임기응변(臨機應變)하게 할 수는 없사오니, 문득 전령을 내는 일을 잠깐 중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으나, 이 판서는 듣지 않았다.
이괄의 반란이 평정된 뒤에 완풍부원군과 이연평(李延平)은 모두 방어를 잘못한 것으로 죄를 입게 되었다. 완풍이 그때의 전령을 모두 간직해 두었다가 사람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호령이 이처럼 자주 변하여 동서로 뛰어다니기에도 겨를이 없었는데, 어찌 적과 만나서 결전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과연 나의 죄인가?”
하였다.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장만(張晩)이 이괄을 평정한 공의 등급과 차례를 사정하여 올리니, 공호(功號)는 진무(振武)였다. 상이 문관은 녹훈(錄勳)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므로 이판서ㆍ김기종(金起宗)ㆍ남이웅(南以雄)ㆍ최현(崔晛)과 나는 모두 제외되었다.
해가 저물어서 장옥성(張玉城)이 나에게 말하기를,
“들으니, 진무공신에 문신의 녹훈을 윤허하지 않은 것은 이 판서가 정사원훈에게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오. 만약 우리 문신들만의 녹훈을 청한다면 반드시 윤허를 얻을 것이오. 미움을 받게 된 것은 부득이한 사세에서 생긴 일이니, 공신의 회맹(會盟)이 거행되지 않은 이때에 다시 주청하고자 하오.”
하였다. 그 뒤 수일이 되어서 기종ㆍ이웅만이 녹훈을 청하니, 과연 허락하였다.
이인거(李仁居)라는 자는 이추(李樞)의 손자이다. 광해 때에 서울에서 가족을 이끌고 횡성(橫城)에 가서 살면서 농사에 힘써서 자급자족하고 있었는데, 사람됨이 어리석어서 남들과는 왕래를 하지 않았다. 금상이 반정한 뒤에 선비들이 인거가 세상이 어지러운 것을 알고 은거하였다고 하여 그의 어짊을 칭찬하여 6품직에 기용하니 인거도 은자(隱者)로 자처했으며, 남들이 자기를 인정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자기의 재능을 높게 평가하여 세상에 어려운 일이 없다고 했는데, 정사훈신(靖社勳臣)들이 국정을 맡아서 하는 것이 인심에 맞지 않는 것을 보고 드디어 불측한 뜻을 품게 되었다.
유효립(柳孝立)은 희분(希奮)의 형의 아들인데, 제천(堤川)에 귀양가서 대북파(大北泒)의 여얼(餘蘖 멸망한 자들의 자손) 로서 법망에서 빠진 자들과 비밀히 광해의 복위(復位)를 모의하였다. 인거가 그들과 서로 왕래하고 있었다.
정묘년 겨울, 인거가 감사 최현(崔晛)을 보고 국정을 맡은 중신들의 죄를 극도로 헐뜯어 말하는데 언사가 매우 패려하였다. 최현은 미치고 어리석은 자가 시정(時政)에 분격해 하는 말이라고 여기고 위에 알리지 않았다. 수일 뒤에 인거는 10여 인의 무리를 거느리고 횡성현(橫城縣)에 나아가 군사를 일으킨다는 것을 외쳐 말했다. 그의 뜻은 자신이 만약 말만 하면 사람들이 반드시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 좇아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현감 이탁남(李擢男)이 고을을 버리고 도망하여 원주(原州)로 갔다. 원주 목사 홍보(洪靌)가 즉시 수십 인을 거느리고 달려가니, 인거가 홀로 현관(縣館)에 앉아 있고 그의 무리들은 다 이미 가고 없었다. 홍보가 그를 포박하여 서울로 보내어 저자에서 참형하였다.
상이 상신(相臣) 신흠(申欽) 등과 의논하여 홍보의 공을 녹훈하려고 하니, 대간이 말하기를,“인거는 패란(悖亂)하였을 뿐이고, 군사를 일으킨 일은 없으므로 홍보의 공은 기록할 것도 없습니다.”
하고, 말이 대신에까지 침범하니, 신흠이 매우 성내어 소를 올려 사직하고, 홍보의 충성과 용맹이 비할 데가 없다고 하였다. 상이 신흠의 말에 따라 홍보 등에게 소무(昭武)라는 훈명(勳名)을 하사하였다.
유효립이 그의 아들과 무리를 보내 서울로 들어와서 환관(宦官)ㆍ궁녀(宮女)들과 결탁하고 무진년 정월 4일 밤에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하기로 약속하였다. 허유(許逌)가 그 음모에 참여하였는데, 허유는 허적(許樀)의 조카였다. 허적이 그를 알고 급히 글을 보내어 홍서봉(洪瑞鳳)에게 말하였다. 최현은 인거의 패려한 언사를 적발하지 않은 죄로 금부에 갇혀 있었는데, 금부의 나졸이 비밀히 최현의 아들 산휘(山輝)에게 말하기를,
“오늘 감사께서는 마땅히 스스로 옥사를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고 하였다. 산휘가 그 이유를 물으니, 나졸은 효립의 음모를 말하였다. 산휘가 몹시 놀라서 급히 가서 심명세(沈命世)에게 말하였다.
서봉ㆍ명세 등이 그것을 상께 알렸다. 그날은 바로 4일 저녁이었다. 조정에서는 크게 놀라 금부도사를 사방으로 보내어 체포하게 하고, 도감(都監)의 군대를 동원하여 삼문(三門) 밖에 매복시킨 다음 기다렸다. 그리하여 허유 등이 무기를 싣고 밤을 타서 들어오다가 다 붙잡혔다. 효립과 그의 종제 두립(斗立)은 자복하여 참형되었고, 허적 등의 공을 녹훈하여 영사공신(寧社功臣)의 훈권(勳券)을 하사했는데, 서봉ㆍ산휘도 모두 그 녹훈에 참여되었다.
광해가 처음 즉위하고 정권이 외척에게 돌아가서 유씨(柳氏)의 권세는 대단하였다. 그리하여 희량(希亮)ㆍ희발(希發)ㆍ효립 등이 1년 안에 서로 이어 급제하였다. 그런데 인홍(仁弘)의 무리도 영경(永慶)을 소론(疏論)하여 총애하여 쓰임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권세가 나뉘어져서 어느 쪽도 제마음대로 권력을 부리지는 못하였다. 또 새로 즉위하여 자못 사류(士類)들을 등용해 씀으로써 조정의 정사가 크게 문란한 데 이르지는 않았는데, 김직재(金直哉)의 옥사 때에 진술에 관련되어 체포된 자들이 후궁들에게 연줄을 놓아 뇌물을 주고 죄를 모면한 자가 많았다. 계축년 옥사 때에는 더욱 심하여 감옥에 들어간 자가 뇌물을 쓰지 않고는 벗어난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벼슬을 임명하는 일에 이르러서도 다 은량(銀兩)의 많고 적은 것에 좌우되었으니, 곤수(閫帥 병사와 수사)가 되려면 뇌물 천여 냥을 써야 했다. 조정(趙挺)ㆍ이충(李冲)은 후궁들과 서로 통하는 것으로 차례를 뛰어넘어 경상(卿相)이 되었다. 또 토목 공사를 일으켜서 수천의 민가를 철거시키고는 인경(仁慶)ㆍ경덕(慶德) 두 궁궐을 지었는데, 지극히 굉장하고 화려하게 지었다. 공사를 감독하는 크고 작은 관원들은 공사를 핑계대고 사사 이익을 꾀하여 재목과 기와를 훔쳐다가 모두 집들을 매우 사치스럽게 짓곤 하였다. 그래서 재용(財用)이 부족하게 되니, 지응곤(池應鯤)ㆍ왕명회(王命會)ㆍ김순(金純) 등이 서캐처럼 달라붙어서 조도사(調度使)라 일컫고 지방으로 흩어져 나가 관작을 팔았는데, 그 값을 강제로 탈취하여 은으로 바꾸어 태반은 궁중에 들여보냈다.
곤수ㆍ수령(守令)으로서 돈을 바치고 벼슬을 한 자는 부임하게 되면 바친 돈의 배를 거두어들인다. 그리하여 살을 벗기고 뼈를 방망이질하니, 백성들이 편안히 생활할 수가 없었다.
김상궁(金尙宮) 어미의 후부(後夫)인 유몽옥(劉夢玉)과 그의 조카 사위 정몽필(鄭夢弼)이 더욱 탐욕스럽고 방종했으며 권력을 부리니, 조신(朝臣)으로서 이익을 탐하고 부끄러움 없는 자들이 이들에게 연줄을 대서 높은 벼슬을 얻었다. 이조 참의 이정원(李挺元)이 몽필을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추천하려고 하니, 정리(政吏) 애남(愛男)이 나아가 말하기를,
“몽필은 나의 아우 정남(正南)의 아들이오. 그는 백정인데 어찌 이 벼슬에 추천하여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키려 하오.”
하였다. 정원이 매우 부끄러워하여 중지하니, 사론이 통쾌하게 여겼다. 몽필이 조경(趙絅)의 노비를 탈취하고자 하여 조경을 결박하여 자기 집에 가두어 장차 무슨 짓을 할지 헤아릴 수 없었다. 윤지경(尹知敬)이 그때 사인(舍人)으로 있었는데 곧장 몽필의 집으로 가서 서로 만나보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조경은 이름이 난 선비인데 네가 감히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후일에 너에게 반드시 좋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몽필이 얼굴빛이 변하면서 사과하였다. 그리하여 조경이 무사하게 되니, 사람들이 다 지경의 의기를 칭찬하였다.
반정 후 몽옥ㆍ몽필ㆍ정원ㆍ응곤ㆍ명회ㆍ김순이 다 죽임을 당하였으니, 명회는 바로 이안눌(李安訥)의 종이었다.
선조가 승하한 지 10여 일 만에 헌납 윤효선(尹孝先)ㆍ전적 최유원(崔有源) 등이 희분(希奮)의 뜻을 받아서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의 역모죄를 논하였다.
광해가 여러 대신들에게 문의하니, 대신이 대답하기를,
“외딴 섬에 귀양보내 끝까지 보전하게 하옵소서. 그것이 바로 성상의 지극한 덕이 되옵니다.”
하였는데, 이한음(李漢陰)의 글이라고 한다. 이진을 교동(喬桐)에 귀양보내고, 그 진술에 관련된 무장 고언백(高彦伯)ㆍ양학서(楊鶴瑞)ㆍ양집(梁諿)과 종실 운원도정(雲源都正) 이요(李橈) 등은 다 장형을 당하여 죽었다. 그런데 무사 하대겸(河大謙)이 승복하여 역옥이 성립되었다. 대간이 이진의 모반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이완평(李完平)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이미 전은(全恩 은총을 완전하게 함)의 설을 올렸으니, 다시 법을 집행하라는 의론을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이첨이 드디어 전은이라는 말을 가지고 공격하여 소위 남인들이 역적을 두호한다고 죄를 입은 자가 많았다. 이듬해 이진이 교동에서 죽으니, 사람들이 다 현감 이직(李稷)이 독살하였다고 의심하였다. 그러나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계축년에 이이첨 등이 조정을 위협하여 이의(李王義)를 죽이기에 주청하니, 완평이 병을 핑계대고 문을 닫고 들어 앉았다. 한음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이의는 어리고 아는 것이 없으니, 그의 성장을 기다려서 그의 지기(志氣)를 보고서 처치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옥당 이성(李惺)ㆍ한찬남(韓纘男) 등이 역적을 두호하는 한음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는데, 말이 지극히 음흉하고 참혹하였다. 광해가 명하여 한음의 관직을 삭탈하자, 이성 등도 인심이 승복하지 않으므로 더 이상의 공격은 정지하였다. 얼마 뒤에 한음이 죽으니, 사람들은 근심과 울분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광해가 처음 즉위하고 이호민(李好閔)ㆍ오억령(吳億齡) 등을 중국에 보내어 계승을 주청하니, 중국 조정에서는 차례를 뛰어넘었다고 하여 요동 도사(遶東都司) 엄일괴(嚴一魁)와 자재주지부(自在州知府) 만애민(萬愛民)을 보내와서 이진의 병이 사실인지를 시험해 밝히게 하였다.
광해가 은과 삼(蔘)으로 그들에게 뇌물을 매우 많이 주었다. 우리 나라는 임진ㆍ정유 난리에 중국에 구원병을 청했는데, 일이 매우 중대하고 어려웠지만 그때도 뇌물을 쓴 일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뇌물을 주는 길이 열리게 되어 아주 사소한 일일지라도 우리 나라 역관(譯官)도 그 사이에서 권유하여 뇌물이 아니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 사신으로서 우리 나라에 오는 자들 또한 우리 나라를 재화(財貨)가 나오는 굴로 여기고 은을 요구하기를 그들의 욕심 끝까지 하였다. 그리고 환행(宦行 환관이 오는 중국의 사신 행차)에는 은을 사용하는 것이 10여 만 냥이나 되어 백성들이 편안히 살아갈 수가 없었다.
선조 때에 종계가 잘못 기록된 것을 고칠 것을 중국에 청하였으나 여러 번의 주청에도 중국이 우리의 청을 들어 주지 않았다. 우리 조정에서는 의논하기를, 중국의 일은 재화가 아니면 이루기 어렵다고 하니, 한 번 시험삼아 써 보자고 하였다. 역관 홍언순(洪彦純)이 말하기를,
“외국의 사세는 중국 사람들끼리 하는 일과는 같지 않습니다. 만약 한 번 이것을 열어 놓으면 그 폐단은 국가가 피폐해지고야 말 것입니다. 종계의 기록을 바로잡는 일이 두어 해 조금 늦어진들 어떻겠습니까?”
하여, 드디어 뇌물을 쓰지 않았다. 언순의 말이 지금 증험되었으니, 그 또한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는 군자라고 이를 만하다.
변충길(邊忠吉)이란 자는 사복시(司僕寺) 양마(養馬)였다. 참판 유대정(兪大禎)이 중국 서울에 갈 때에 군관(軍官)으로 데리고 갔는데, 천한 종으로 중국에 가는 군관이 된 것은 아직 전례가 없는 일이다. 광해의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충길은 딸을 궁중에 바쳐 그 총애로써 천한 종이 횡성 현감(橫城縣監)이 되었다. 유진증(兪晋曾)이 두 번이나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된 것이나 진증이 승지가 된 것은 다 충길의 힘이었으니, 선비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반정 후에 그의 딸은 사사(賜死)되고 충길은 폐하여 백성이 되었다.
계해년 반정 후에, 무신년 이후 벼슬이 깎기거나 귀양간 사람들이 모두 석방되고 서임되었다. 그때 나는 영해(寧海)에 귀양가 있었고, 참판 이명준(李命俊)과 참판 심액(沈詻)도 영덕(盈德)에 귀양가 있었다. 소식을 듣고 즉시 경상(境上)에 모이기를 약속하였는데, 작별을 고하고 돌아가면서 이명준이 말하기를,
“천명이 거듭 새로워 만물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 오늘날 해야 할 큰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겠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정원군(定遠君 인조의 생부)을 추숭(追崇)하는 것이오.”
하니, 이명준이 말하기를,
“주상이 방계(傍系)의 지손으로 대통을 이었는데, 어떻게 사친(私親)을 추숭할 수 있겠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것은 크게 그렇지 않소. 옛날 한(韓) 나라의 선제(宣帝)가 소제(昭帝)를 이었으나, 사황손(史皇孫)을 추존하지 않은 것은 소제가 일찍이 사황손을 아들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오. 선제가 어찌 자기가 존귀하다 하여 자기 아버지(사황손)를 남(소제)의 아버지로 하게 할 수 있었겠소? 그러나 지금은 이와는 다르오. 정원군은 바로 선조의 아들이오. 태묘에는 이위(禰位 아버지의 신주)가 없을 수 없으니, 정원군을 추존하면 부자가 서로 잇게 되고 태묘의 신위(神位)도 갖추어져서 진실로 예에 맞을 것이오.”
하니, 이명준이 말하기를,
“공의 말이 옳소”
하였다.
이명준은 장령이 되어 먼저 서울에 오고, 나는 예조 정랑이 되어 뒤따라 서울에 왔다. 이명준이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조정의 의론이 추숭은 상의 뜻에 영합하려는 바르지 않은 논의라고 하여 매우 엄중히 배척하므로 감히 입밖에 내지 못하오. 나의 소견이 실로 예에 합치하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내가 장유(張維)를 방문하니, 김원량(金元亮)도 좌석에 있었다. 장유가 말하기를,
“박지계(朴知誡)가 추숭하는 것이 예에 맞는다고 말하였소.”
하고, 그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힘써 변론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이 논의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인데, 이제 이미 말이 나왔으니 조만간에 반드시 실행되고야 말 것이오.”
하니, 장유가 말하기를,
“어째서 그러하오?”
했다. 내가 말하기를,
“두고 보시오”
하였다. 하루는 영상 최명길(崔鳴吉)이 나에게 말하기를,
“장유의 말을 들으니, 공이 추숭의 논의는 반드시 실행될 것이라고 말하였다는데, 정말이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소”
하였더니, 최명길은 자못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은 예를 안다는 것으로 이름이 났었다. 소를 올려 주상께서 선조로 아버지를 삼을 것을 청하니,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그때 부제학이었는데,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만약 선조로 아버지를 삼는다면 정원군을 형으로 하는 것이니, 매우 예에 맞지 않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선조 때의 덕흥군(德興君)의 전례에 따라 정원군을 높여 대원군(大院君)으로 하고, 왕제(王弟) 능원군(綾元君)이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을축년 겨울에 최상이 나에게 말하기를,
“널리 옛날의 예경(禮經)을 상고해 보니, 지금 정원군을 추숭하지 않을 수 없소. 공의 말이 옳소.”
하였다.
병인년 봄에 최생과 이상구(李相求)가 함께 나를 찾아왔다. 최상은 추숭하는 것이 예에 맞다고 하고, 이상은 예에 어그러진다고 말하여 각기 자기 견해를 고집하며 매우 힘껏 다투었다. 얼마 안 되어 계운궁(啓運宮 정원군 부인)이 승하하니, 상은 염빈(殮殯 시체를 염하고 빈소를 차림)하는 모든 예를 한결같이 국상(國喪)의 예에 따라 하게 하였다. 대신이 재상과 삼사(三司)를 거느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간하였으나, 상은 듣지 않았다. 최상이 부제학으로 있었는데, 뜻이 같지 않다고 하여 그들의 논의에 참여하지 않고 사퇴하였다. 조정의 논의는 최상의 견해를 사론(邪論)이라고 하여 이로부터 청선(淸選 청환(淸宦)의 선임(選任))에 의망하지 않기로 하였는데, 김상유(金相瑬)가 그 논의를 극구 주장하였다.
신미년 여름에 최상은 차자를 올려 추숭하고 별묘(別廟)에서 향사하기를 청하였다. 이는 오히려 시의(時議)를 두려워하여 감히 자기 설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상이 그 의논을 내려서 의논하게 하니, 영상 오윤겸(吳允謙)과 좌상 김유가 재상과 삼사를 거느리고 여러 날을 간하였다. 내가 공사(公事)로 오상(吳相)의 집에 갔더니 오상이 반대 논의를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추숭하는 일이 반드시 예에 맞는지 내가 감히 알 수는 없지만, 한ㆍ당 이래 제왕 중에 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설령 상이 그렇게 할지라도 그것은 ‘허물을 보면 어짊을 안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상이 반드시 하고자 하는 것을 조정에서 굳이 간한다면 반드시 귀양보내거나 내쫓는 위엄을 보이실 것이니, 그것은 상으로 하여금 어짊을 아는 허물을 없게 하려다가 도리어 상을 큰 허물 속에 빠지게 하는 것이니, 그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고 하니, 오상이 말하기를,
“공의 말을 들으니 매우 환하게 깨닫겠소.”
하였다.
조금 뒤에 상은 김상을 체임하고 윤방(尹昉)으로 정승을 삼으려고 하였다.
임신년 여름에 최상이 또 차자를 올려 전일의 주청을 다시 거듭하니, 대신과 삼사가 기어코 반대하였다. 상이 성내어 사간 권도(權濤) 등을 변방에 귀양보내니, 대신들이 감히 다시는 말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대원군을 높여 원종(元宗)이라 하고, 별묘에 향사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홍보(洪靌)ㆍ이안눌(李安訥) 등을 보내 중국 조정에 재가를 청하였다. 그러자 중국 예부 관리가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서 오늘에서야 이 청을 하는 것이 괴이하다.”
하고, 즉시 들어 주었다.
갑술년 가을에 최상이 또 차자를 올려 태묘에 원종의 신위를 모시기를 청하였다. 그때는 김상이 다시 정승이 되었으므로 또 윤방ㆍ삼사와 조정에서 반대를 하였다. 상이 성내어 또 김상을 해임하고, 대간 김광현(金光炫)ㆍ이상질(李尙質)ㆍ윤명은(尹鳴殷)을 북쪽 변방으로 귀양 보내고, 대사헌 강석기(姜碩期)와 대사간 조정호(趙廷虎) 등을 문밖으로 내쫓았다. 새 대사간이 유백증은(兪伯曾)은 평소에 추숭의 논의를 주장하였는데, 이성구(李聖求)가 대사헌이 되어서 상의 뜻이 매우 확고함을 엿보고 마침내 그의 견해를 변경하여 동료들의 논의를 배격하고, 대사간과 함께 태묘에 모실 것을 청하였다. 드디어 그의 주장을 따랐다.
신미년 장유가 차자를 올려 예경(禮經)의 말을 인용하여 추숭하는 것이 예가 아니라는 것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정우복(鄭愚伏)도 차자를 올려 추숭하자는 논의를 공격하고, 장유의 차자가 예에 바르다고 말하였다.
하루는 나와 최상ㆍ장유가 함께 비국(備局)에 모였다. 장유가 최명길의 추숭하자는 논의가 사론(邪論)이라고 공격하니, 최명길이 발끈 성내어 얼굴빛을 변하며 말하기를,
“나의 추숭하자는 논의가 누구에게서 나왔습니까? 공이 추숭하는 것이 예에 맞다고 하며 나에게 차자를 올리라고 하기에 나는 공의 말을 따랐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공은 나를 이용하여 조정의 논의를 탐색하고자 하였던 것이구려. 그리하여 공은 그 설을 뒤집어 스스로 정의 의론에 붙었소.”
하였다. 내가 웃으면서 장유에게 말하기를,
“이 말은 어찌된 것입니까?”
하니, 장유가 낯빛이 붉어지며 말하기를,
“내가 예를 상고함이 상세하지 못하여 이러한 뜻이 있었는데, 지금에서야 그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하였으니, 장유의 앞뒤 논의가 다른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신미년에 김유가 해임되고 윤방이 다시 정승이 되니, 사람들이
“윤공은 반드시 모나게 상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 뒤에 추숭의 논의가 다시 일어나니, 윤방이 겉으로는 조정의 논의를 따라 논쟁을 하였으나, 속으로는 추숭을 주장하였다. 하루는 재상들과 함께 빈청(賓廳)에 있다가 나에게 말하기를,
“조정에서 만약 극구 간한다면 상도 반드시 윤허할 것이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대감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마땅히 입이 닳도록 정성을 다하여 기어코 상의 마음을 돌려야 할 것이니, 누가 금지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윤방이 묵묵히 있으니, 여러 재상들은 다 미소하였다.
이귀(李貴)가 재상이 조정에서 간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헐뜯고, 장유에게 욕설을 퍼붓는데 말이 매우 패려하였다. 그것은 장유가 조정의 논쟁을 주도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정귀(李廷龜)가 성내어 말하기를,
“이것은 한 집안의 일이 아니고 조정의 공적인 모임인데, 어찌 이렇게 오만 무례할 수 있단 말이오”
하니, 윤방은 태연하였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 오늘에서야 윤상의 도량이 큼을 알았다.”
하였더니, 나만갑(羅萬甲)이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아량이라고 할 수 있겠소. 염치가 없어서 그러할 뿐이오.”
하였다.
내가 최완성(崔完城 최명길(崔鳴吉))을 방문하니, 윤상의 손자 윤구(尹坵)가 그때 헌납이었는데, 최명길과 의논하여 조정에서 논쟁할 계사(啓辭)를 만들고 있었다. 내가 웃으며 최명길에게 말하기를,
“공이 이미 추숭을 주장하였으니, 조정에서 논쟁하는 글은 지휘할 수 없습니다.”
고 하였더니, 윤구가 얼굴빛이 변하면서 일어나 가버렸다. 김광현(金光炫)ㆍ강석기(姜碩期) 등이 죄를 입게 되니, 장유가 나에게 말하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조정의 논쟁을 정지하여 상이 지나친 처사를 하는 과오에 빠지지 않게 해야겠소”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오늘에 이르러서는 비록 마음으로 추숭을 주장하는 자일지라도 감히 입밖에 내어서 상의 뜻에 영합한다는 비난을 사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장유가 나의 말이 옳다고 하였는데, 이성구가 갑자기 자기의 말을 변경하여 상의 뜻에 순종하였으니, 아, ‘사람의 마음이 서로 같지 않은 것이 그 얼굴이 서로 같지 않음과 같다.’고 하더니, 진실로 격언(格言)이었다
계운궁(啓運宮)의 초상에, 대간이 궁궐 안에 빈소를 마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인경궁(仁慶宮) 별전(別殿)에 빈소를 마련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장사를 마치고 별전으로 반혼(返魂 장사를 지내고 신주(神主)를 집으로 모셔 오던 일)하려고 하자, 대간이 또 그것이 옳지 않으니 옛 집으로 반혼해야 한다고 논하였다. 내가 사간 이윤우(李潤雨)와 헌납 권도(權濤)에게 말하기를,
“대간의 아뢰는 말은 마땅히 성실해야 하고 이리저리 흔들려서 구차하게 시의(時議)에 영합해서는 안 되오, 당초에 대간의 아뢰는 말을 채용하여 빈소를 별전에 설치하고 이어 별전으로 반혼하였다면 공 등은 무슨 말로 간쟁하겠소? 어찌 거기에 빈소를 마련하는 것은 옳고 거기에 반혼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사리가 있겠소? 그러기에 상이 대간의 논의를 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오.”
하니, 권도ㆍ이윤우가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이민성(李民宬)이 나에게 말하기를,
“예를 아는 참 선비가 없어서 조정의 논의가 분분함이 이와 같소. 만약 율곡(栗谷)이나 서애(西厓)가 오늘날에 살아있다면, 반드시 이렇지는 않을 것이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공의 의견이 그렇다면 승정원 동료들의 논의에 따라서 대간의 논의를 따르기를 청한 것은 무슨 까닭이오?”
하니, 이민성이 말하기를,
“사람도 미미하고 명망도 가벼운데 어찌 감히 따로 기치(旗幟)를 세워서 그 심기를 건드릴 수 있겠소?”
하였다.
광해가 생모(生母)를 추숭하자, 대간이 여러 날을 조정에서 논쟁하니,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이 대사간 송순(宋諄)에게 말하기를,
“송(宋) 나라 인종(仁宗)이 이신비(李宸妃)를 추숭할 적에 범중엄(范仲淹) 등이 간관으로서 간쟁하지 않았는데, 오늘의 대간들이 중엄보다는 훨씬 현명하다.”
하였다. 아마 오성의 뜻은 아들이 존귀하게 되어 부모를 높이고자 하는 것은 인정상 반드시 있을 수 있는 일이며, 국가의 안위(安危)나 치란(治亂)과는 관계되는 것이 아니므로, 굳이 다투어서 서로 고집하여 상하의 화기를 잃게 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말일 것이다. 광해 초년에 내가 호서(湖西)의 장시관(掌試官)으로 있었는데, 그때에 ‘신하가 임금 대하는 것을 원수처럼 한다.’[臣視 君如仇讐]는 것을 논제(論題)로 하였다. 그 뒤에 호남의 장시관이 되었을 때에는 참시관 윤효선(尹孝先)과 함께 ‘사호(四皓 한 고조(漢高祖)때 상산(商山)에 숨은 네 노인)가 유씨를 멸망시켰다.’〔四皓滅劉〕는 것으로 의제(義題)를 내니, 선비들이 고치기를 청하므로 참시관 김정목(金廷睦)이, ‘당 태종(唐太宗)이 사관에게 바로 쓰라고 명하였다.’〔唐太宗命史直書〕는 것으로 제를 내었다. 정홍원(鄭弘遠)ㆍ유광(柳洸)이 모두 그 도(道)에서 벼슬하고 있었는데, 시론(時論)에 부회(附會)함이 전일보다 더 심하여 고관(考官)이 두려워하였으므로 취해(取解 향시(鄕試)에서 합격함을 이름)하기가 턱 밑의 터럭을 뽑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이에 이르러 모두 낙방을 하니, 매우 분하게 여기고 원망하여, 이첨에게 말하기를,
“‘사호가 유씨를 멸망시켰다.’고 한 것은 내암(來庵)의 무신년의 상소를 기롱한 것이고, ‘사관에게 바로 쓰라고 명하였다.’고 한 것은 임해군(臨海君)의 옥사를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첨은 그때 대사헌이었는데, 사간 이성(李惺)과 의논하여 합계(合啓)하여 나의 죄를 논하고, 또 말하기를,
“역적 이진(李珒)의 변고가 생겼던 처음에 삼사고변(三司告變)의 설(說)이 있었으니, 잡아다가 국문하옵소서.”
하였다.
나는 옥에 갇혀 4개월이 지난 뒤에 종성(鐘城)으로 귀양가고, 정목은 회령(會寧)으로 귀양갔다. 그런데 효선만은 이진의 반역을 고한 원훈(元勳)이라고 하여 죄를 면하였다.
내가 귀양길에서 이경탁(李敬倬)을 만나니, 이경탁이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현무문의 일을 곧게 써라.’〔直書玄武門事〕는 과제(科題)로 해원(解元 향시(鄕試)의 장원)을 하였고, 김상용(金尙容)도 ‘신하가 임금 대하기를 원수같이 한다.’는 과제로써 영남에서 선비를 시취(試取)하였는데, 어찌 이것을 가지고 중죄(重罪)를 입을 줄 헤아렸겠습니까? 세상길을 헤쳐가기 어려움이 이에 이른단 말입니까?”
하였다. 옛날 소동파(蘇東坡)는 시안(詩案)으로 죄를 얻었으나 그는 오히려 고의로 풍자한 것이지만, 나는 추호도 딴 의사가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만 번 죽을 뻔하고 다행히 목숨을 보전하게 되었다. 아, 소인이 남을 얽어 무함함이 이와 같으니 말세에 처신하기가 또한 어렵다.내암(來菴)은 정인홍(鄭仁弘)의 호.
만력(萬曆) 무술년(1598, 선조 31)에 내가 제천(堤川)에 있었는데, 집앞 보리밭에 보리이삭이 세 개로 갈라진 것이 6 포기, 네 개로 갈라진 것이 4 포기, 다섯 개로 갈라진 것이 3 포기, 2개로 갈라진 것은 매우 많았다. 이해 가을에 평수길(平秀吉)이 죽고 왜적이 다 돌아갔다. 그리하여 성중(城中)이 다시 안정되었으니 비록 서맥송(瑞麥頌)을 지을지라도 마땅할 것이다.
천계(天啓) 임술년(1622, 광해군 14)에 내가 귀양가서 영해(寧海)에 있었는데, 참새가 부엉이〔 미상함. 전국책(戰國策)에 부엉이[鸇] 글자로 되었음〕를 낳았다. 고을 사람이 말하기를
“수년 전 영양현(英陽縣)에서도 일찍이 이와 같은 이변(異變)이 있었는데, 지금 또 있습니다.”
하였다. 다음해에 광해가 폐위되었으니, 송언(宋偃)이 망한 것도 진실로 징험이 있었다.
만력 무오년(1618, 광해군 10) 가을에, 서북쪽에 흰 기운이 모두성(旄頭星 별 이름. 오랑캐를 상징하는 별)을 범하고 하늘을 가로질렀는데, 다음해에 명 나라의 제독(提督) 유정(劉綎)ㆍ두송(杜松) 등이 오랑캐와 싸우다가 모두 패하여 죽었으며, 우리 나라 장수 강홍립(姜弘立)ㆍ김경서(金景瑞) 등도 패전하여 또한 오랑캐에게 포로가 되었다.
천계 갑자년(1624, 인조 2) 가을에, 장단(長湍) 서쪽에서 평산(平山)에 이르기까지 크게 우박이 내렸는데, 작은 것도 크기가 거위알만하고 큰 것은 주발만하였으며 혹은 얼음 조각이 있어서 맞아 죽은 소ㆍ말도 많았다. 그리고 병인년에는 창성(昌城)에 우박이 내렸는데, 그 모양이 사람의 얼굴처럼 눈ㆍ코가 다 갖추어져 있었다. 그후 정묘년에 오랑캐 군사가 의주(義州)를 함락시키고 계속 쳐들어와 평산에 이르니, 대가(大駕)가 강화(江華)로 피난하였다가 성하지맹(城下之盟)을 하여 나라 형세가 드디어 위축되게 되었다.
숭정(崇禎) 을해년~병자년(1635~1636, 인조 13~14) 사이에 이변이 가장 많았다. 모두성이 관서(關西)에 떨어져서 돌로 되었는데 크기가 개 머리만하였으며, 금화(金化)에는 사람의 얼굴 모양 같은 우박이 내려 새들이 죽거나 다친 것이 많았으며, 인정전(仁政殿) 인경궁(仁慶宮) 별전(別殿)과 충훈부(忠勳府)에 벼락이 쳐서 죽은 사람이 많았으며, 냇물이 범람하여 인가가 많이 떠내려 갔으며, 개구리들이 많이 서로 싸우다가 죽어서 죽은 개구리가 언덕을 이루었으며, 영남에서는 겨울에 우뢰가 나무에 쳐서 불이 며칠 동안 꺼지지 않았다. 이해 섣달에 노주(虜主)가 우리 나라를 범해서 마침내 주상이 무릎을 꿇었으며, 동궁이 인질(人質)로 나가는 등, 날로 위급해졌다. 저 한없이 높고 푸른 하늘이여! 마음의 근심을 누가 알리오.
정축년에 평안 감사 홍명구(洪命耈)와 병사 유임(柳琳)이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勤王) 길에 올랐는데, 금화에 이르러 오랑캐를 만나 명구는 전사하고 유임의 군사는 사력을 다해 싸워 오랑캐 군사를 매우 많이 죽였다. 저녁 때에 오랑캐 군사가 패하여 물러갔다. 그런데 그 싸움터가 바로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한 우박이 내렸던 곳이었으니, 역시 이상한 일이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명(命)에 달렸으므로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있다. 참판 이민구(李敏求)가 도원수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관서에 있을 때에, 정주(定州)의 기녀를 좋아하여 매우 가까이 지냈다. 이민구는 여러 고을을 순시하고, 장차 병영에서 열병식을 하게 되어 기녀와 어느 날 병영에서 만나자고 약속하였다. 그런데 귀성(龜城)에 이르니 기녀가 앞질러서 가산(嘉山)에 와 있다는 통지가 왔다. 이민구는 정에 못 이겨 다시 가산으로 향하여 길을 떠났다. 미처 5리도 못 갔을 때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기병 돌격대를 보내어 귀성을 협박하니, 부사 한명련(韓明璉)은 배반하여 명련을 잡으러 온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살해하였다.
만약 이민구가 곧은 길을 택하였거나, 혹은 잠시라도 머물러 있었다면 반드시 이괄에게 살해되었을 것이다.
문회(文晦)가 변란을 고발하였을 때에 감사 정호선(丁好善)이 안변 부사(安邊府使)로 있었는데, 이름이 고변서(告變書) 속에서 나와 체포되어 금화에 이르니, 금부도사가 갑자기 병을 앓게 되어 한나절을 머물러 있었다. 그리하여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이괄이 배반하였다는 글이 서울에 올라오매, 체포되어 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모두 참형을 당하고 한 사람도 면한 사람이 없었다. 이튿날 정호선이 서울에 도착하여 하옥되었는데, 이괄의 군사가 서울에 다가오니, 상은 공산(公山)으로 거둥하고 옥에 갇혔던 사람은 다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정호선의 아우 호서(好恕)가 정주 목사(定州牧使)로서 이괄의 사자를 베어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근왕(勤王)을 하였다. 그래서 정호선만이 석방되었다. 이것이 어찌 지혜나 꾀로 구제할 수 있는 일이었겠는가. 진실로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는 것이다.
허균(許筠)은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아들인데, 문장이 당시에 독보적이었다. 그러나 경박하고 조행이 없어 선비들에게 버림을 받아 하급 관직에 침체되어 있었다. 광해의 정치가 문란할 때에 이첨에게 아부하고 궁금(宮禁)에 서캐처럼 매달려서 갑자기 차례를 뛰어넘어 참찬의 지위에 오르자 드디어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이 생겼다. 무오년간에 오랑캐의 경보(警報)가 처음 일어나니 천하의 군사가 동원되었는데, 우리 나라는 건주(建州)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인심이 어수선하였다. 허균이 거짓으로 고급서(告急書)를 조작하고, 또 익명서(匿名書)를 지어서,
“어느 곳에 역적이 있으니 어느 날이면 마땅히 일어날 것이다.”
하여 성중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시키고, 한편으론 밤마다 사람을 시켜 산에 올라가 부르짖기를,
“성안 사람이 나가서 피난하면 못 속의 물고기와 같은 재앙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게 하였다. 그러자 인심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잠시도 안정하지 못하니, 서울 안의 민가가 10에서 8~9 채는 비게 되었다.
그의 무리인 하인준(河仁俊)을 시켜서 새벽에 지평 한명욱(韓明勗)을 찾아보고 말하기를,
“익명서가 숭례문(崇禮門)에 붙여져 있으니 필시 흉적이 있어서 틈을 엿보고 있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게 하였는데, 그때는 하늘이 아직 밝지 않아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운 때였다. 명욱이 마음으로 매우 의심하여 하늘이 밝기를 기다려 숭례문에 가서 벽서(壁書)를 보니, 과연 인준이 말한 것과 같으므로 마침내 인준을 국문하기를 주청하였다. 인준과 그의 일당 현응민(玄應旻)이 일일이 죄를 자복하여 허균과 그의 일당이 모두 옥에 갇혔다. 이이첨은 허균을 국문하면 진술이 자기에게 관련될 것을 두려워하여,
“인준 등이 이미 다 죄를 자복하였으니, 허균은 다시 문초할 것도 없습니다.”
하고는, 곧장 저자에서 참형하기를 청하였다. 김개(金闓)는 장형을 맞다 죽고, 원종(元悰)ㆍ이강(李茳) 등은 멀리 귀양갔는데, 계해년 반정 후에 원종과 이강 등은 다 저자에서 참형되었다.
이이첨이 박승종(朴承宗)ㆍ유희분(柳希奮)과 권세를 다투어 서로 알력이 있었다. 남이공(南以恭)이 죄를 입고 해서(海西)로 귀양가니, 이첨이 이것으로써 유희분ㆍ박승종의 권세를 빼앗으려고 무뢰배를 시켜 해주 목사(海州牧使) 최기(崔沂)에게 투서하기를,
“남이공이 박승종ㆍ유희분ㆍ이이첨과 함께 딴 음모를 하고 있다.”
고 말하게 하였다. 이첨이 거기에 자기 이름을 쓴 것은 자기와 이공이 일을 같이 했다는 것을 광해가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투서가 자기한테서 나온 것이 아닌 것처럼 남을 속이고자 한 것이었다. 최기가 그 사람을 무고죄로 장살(杖殺)하니, 이첨이 매우 성내어 선전관 유세증(兪世曾)을 보내어 봉수(烽燧)를 적간(摘奸)한다고 칭탁하고, 그 옥사의 사정을 비밀히 정탐하게 하였다.
감사 윤조원(尹調元)이 세증에게 뇌물을 후하게 주고 세증의 참된 목적을 알아내었다. 그리고는 매우 두려워하여 최기에게 고변한 사람을 지레 죽였다는 혐의를 씌워 내쫓아 버렸다. 이첨이 대간을 시켜서 최기를 국문하도록 청하게 하여 최기가 매를 맞다가 죽으니, 이첨이 그를 역적으로 논죄하여 처자까지 추형(追刑)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통분해 하고 원망하였다. 조원도 변방으로 귀양갔다. 계해년 반정 후에 최기를 신원하여 그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광해는 조사(詔使 중국 사신)가 장차 오게 되었는데, 국가의 재용이 아주 고갈되었다고 하여 귀양간 사람들에게 은을 바치고 스스로 풀려날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해사(該司)로 하여금 풀려날 사람들의 이름을 열기하여 상의 명을 받게 하였으니, 장차 그 중에서 취사(取捨)할 뜻을 보인 것이다. 그래서 귀양간 사람들이 궁금에 연줄을 대서 풀려나기를 도모하였으니, 영상 신흠(申欽), 판서 서성(徐渻), 좌참찬 박동량(朴東亮),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은 모두 왕실과 인척 관계가 있었으므로, 각각 몇백 금의 은을 바치고 석방되었다.
내 생각에, 만약 태평한 세상을 만났다면 사공(四工)이 아무리 높은 명망이 있었을지라도 반드시 선비들이 천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도 반정 후에 신흠은 권세를 잡은 사람의 영수였으므로 감히 자황(雌黃)하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맨 먼저 이조 판서가 되고 멀지 않아 정승이 되었으니, 또한 세상이 변한 것을 볼 수가 있다.
속금(贖金)의 영이 내렸을 때에 이공 명준(李公命俊)이 은을 사고자 하면서 말하기를,
“만약 속을 바치라는 명령이 내리게 되면 갑자기 마련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오.”
하므로 내가,
“해조(該曹)에서 이름을 열기하여 상의 명을 받기로 되었으므로 도모하지 않는 이는 반드시 참여하지 못할 것이니, 공은 너무 근심하지 마오.”
하였더니, 이명준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왕명이 내린 뒤에야 나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광해 때에 심상열(沈相悅)이 함경 감사가 되었는데, 은그릇을 만들어 거기에 자기 이름을 새겨서 궁중에 바쳤다. 이는 광해가 항상 눈으로 보고 잊지 않게 하고자 한 것이리라. 광해가 폐위된 뒤에, 뇌물로 받은 은으로 궁중에 있는 것은 상이 명하여 호조에 내려주어 국가의 재용에 보충하도록 하였는데, 심열이 바친 은그릇도 그 속에 끼어 있어서 크게 선비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본래 권세를 잡은 사람이었으므로 여전히 버림을 받지 않았다. 정축년 변란 후에 최명길(崔鳴吉)이 국정을 맡게 되면서 자기 의견에 부회하는 것을 좋아하여 여러 사람들의 의논을 물리치고 심열을 정승으로 뽑아 드디어 우의정에 올랐다. 이처럼 국가가 위급한 때에는 비록 이윤(伊尹)과 여상(呂尙) 같은 보좌를 얻을지라도 오히려 구제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사람 쓰는 것이 이와 같으니, 어찌 감히 중흥(中興)의 희망이 있겠는가. 나는 최상(崔相)을 위하여 한스럽게 여긴다. 그때 내가 마침 소명(召命)을 받고 서울에 올라와 최명길에게 말하기를,
“듣건대, 공이 심공(沈公)을 정승으로 세우려는 의사가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하니, 최명길이 말하기를,
“영상이 그런 뜻이 있는데 어떨지 알 수 없소”
하였다. 영상은 곧 이홍주(李弘冑)였다. 내가 말하기를,
“공은 은그릇에 이름 새긴 일을 듣지 못하였습니까? 고금에 어찌 이러한 사람이 정승이 되어 당시의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최명길이 말하기를,
“그렇소”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영상이 병으로 죽었다. 내가 고향에 내려가서 들으니, 심열이 마침내 정승이 되었다고 하였다.
유흥치(劉興治)가 죽은 뒤에 나머지 무리가 오랑캐에게 투항하니, 오랑캐가 강을 건너와서 곽산 서쪽에 가득하였다.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검산산성(劒山山城)에 있었는데, 보고가 이르자 조정이 깜짝 놀라 정충신(鄭忠信)을 보내 방어하게 하고, 비국의 여러 재상들을 불러 의논하니, 여러 재상들은 발서(撥書 파발꾼을 시켜 보내는 급한 문서)를 보내 성휘에게 나가 피하도록 유시하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충신이 말하기를,
“불가하옵니다. 성휘가 만약 성을 버리고 나온다면 성안에 있는 군사들이 반드시 울부짖으며 만류할 것이므로 소문이 좋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오랑캐 군사는 반드시 섬의 무리들을 위협하러 왔을 것이므로 우리를 침해하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휘는 필시 이미 성을 나왔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검산이 적병 속에 있을 것이니, 발서가 어떻게 들어갈 수 있으며 성휘도 어떻게 나올 수 있겠습니까? 발서를 보내는 것은 일에 무익하고 다만 군사들로 하여금 조정을 원망하게 만들 뿐입니다.”
하니, 상이 내 의견에 따랐다. 이튿날 서쪽에서 보고가 왔는데, ‘성휘가 이미 나와서 귀성(龜城)의 길로 해서 돌아왔고, 충신은 아직 도착도 하지 않았는데, 오랑캐 군사가 이미 철수하고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이듬해 오랑캐가 대장(大將) 소도리(所道里)를 보내 세폐(歲幣 매년 정기적으로 바치는 공물)를 요구하자, 비국의 여러 재상들을 불러 의논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옛날부터 오랑캐와 화친할 때에는 세폐를 요구하지 않는 때가 없었음을 신이 일찍이 최명길(崔鳴吉) 등과 말하였는데, 지금 과연 이 요청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와 같은 말을 경솔히 하지 마오.”
라고 하였다. 이는 아마 상은 마음속으로 오랑캐가 세폐가 있음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 그들이 들을 것을 두려워해서인 것 같다. 그리하여 소도리가 10여 일을 머물러 있었으나 마침내 윤허하지 않으므로 신득연(申得淵)을 보내어 그것을 통보하니, 소도리는 언어에 몹시 불만스러운 태도를 보이며 돌아갔다.
나는 비국의 여러 재상들과 의견이 같지 않아서 매번 차자를 올려 허락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는데,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만이 나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하루는 이서가 나에게 말하기를,
“구인후(具仁垕)가 한가한 때에 상을 뵈니, 총융사와 병조 판서가 모두 겁을 낸다고 말씀하셨다 합니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나도 실은 겁을 내고 있습니다. 상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였다. 내가 서쪽을 순행하여 황주(黃州)에 이르니, 신득연이 심양(潯陽)에 갔다가 오랑캐에게 내쫓겨서 돌아왔다. 내가 안주(安州)에 이르니, 조정에서는 또 김대건(金大乾)을 만상(灣上)에 보냈다고 하므로 상소를 하였는데, 그 대의는 이러하였다.
“국가의 강약이 같지 않을 경우에 세폐를 허락함은 한당(漢唐) 이후로 다 면하지 못하였던 것이니, 그것으로써 그들과의 친선을 잃어서는 안 되옵니다. 천하의 일을 다 후회할지라도 오직 이 일만은 후회해서는 안 됩니다.”
정충신(鄭忠信)이 함께 상소하기를 청하므로 내가 허락하니, 종사(從事) 구봉서(具鳳瑞)가 말하기를,
“조정의 논의가 이미 결정되었으니, 다시 생각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므로,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점장이의 말이, 내게 금년에 귀양갈 화가 있다고 하더니, 이 소가 올라가면 삼사에서 반드시 죄주기를 청할 것이므로, 점장이의 말이 반드시 맞게 될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나의 집념이 이와 같으니 다른 사람은 참견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내가 평양에 돌아오니, 민성휘가 말하기를,
“오랑캐의 욕심이 만족할 줄 모르므로 만약 결전을 하지 않는다면 응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도내의 인심이 다 죽기를 맹세하고 싸우고자 하는데, 어째서 이런 소를 올렸습니까?”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도내의 인심은 내가 미처 알지 못하지만, 오랑캐가 만약 군대를 출동한다면 반드시 3~4만 명 이하는 되지 않을 것인데, 우리 나라가 어찌 갑자기 3만 명을 마련하여 응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설령 군대의 수가 서로 대등하다 할지라도 우리 나라 군대는 모두 걸어야 하고 식량과 무기를 짊어지고 다녀야 하며 앉고 서는 동작도 알지 못하니, 오랑캐가 싸움에 익숙한 건장한 기병으로 유린해 온다면 비록 한신(韓信)이나 백기(白起)를 장수로 삼는다 하여도 대적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소가 올라가니, 상이 비국에 하교하기를,
“김시양(金時讓)과 정충신 등이 그 목숨을 잃을까봐 함부로 사신을 머무르게 하여 인심이 위축되게 하니, 그들의 머리를 베어 여러 사람을 경계하고자 한다.”
하였는데, 비국에서 잡아다 국문하기를 청하여 나와 정충신이 모두 옥에 갇혔다. 심리하여 결정한 문서가 올라가자, 상은 사형을 감하여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나는 영월(寧越)로 정배되고 정충신은 당진(唐津)으로 정배되었는데, 대간이 논핵하여 정충신은 다시 장연(長淵)으로 정배되었다.
상이 친히 정벌하여 송경(松京)에 주필(駐驆)하고자 하였는데, 김대건이 강을 건넜으나 오랑캐의 국경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오자, 상이 비로소 두려워하여 세폐를 허락하였다. 아마 상의 뜻은 겉으로 분기(奮起)하는 태도를 보여서 조종(操縱)하는 권리가 우리 손에 있게 하고자 한 것으로, 바로 상의 생각이 천려 일실(千慮一失 지혜로운 사람도 많은 생각 중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일이 있음을 이름)이었으며, 조신(朝臣)들이 모두 오랑캐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리라.
다음해 나는 석방되어 조정에 돌아왔으나 이때부터 나는 입을 다물고 군대에 관한 일을 말하지 않았다.
병자년 봄에, 오랑캐가 장차 황제라고 칭하겠다는 뜻을 그의 장수 용골대(龍骨大)를 보내 통보하였다. 그러자 위로는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태학(太學)의 유생에 이르기까지 그를 베어 죽이라고 청하고, 이명(李溟)은 이서에게 권하여 군대의 위엄을 보이게 하니, 용골대가 매우 놀라서 도망해 가는데, 감히 성부(城府)나 인가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런데 평안 감사 홍명구(洪鳴耈)가 용골대를 베기를 청하였다. 비록 조정에서 그것을 허락하더라도 용골대는 필시 이미 강을 건너가서 형세가 서로 미치지 못할 것인데, 이런 빈말을 해서 시의(時議)에 추중을 받으려고 하였으니, 당시의 인심이 대개 이와 같았다.
오랑캐가 황제로 칭하면서 우리 사신 나덕헌(羅德憲)ㆍ이확(李廓) 등을 협박하여 그들의 축하하는 반열에 참가하게 하였다. 덕헌 등이 듣지 않으니, 온갖 곤욕을 보이고 구박하여 내쫓았다. 그러자 조정의 논의가 높고 험악하여 김덕함(金德諴)은 심지어 평양에 주필하기를 청하기까지 하였다.
10월에 오랑캐가 마부대(馬夫大)를 보내 만상(灣上)에 이르므로, 의주 부윤(義州府尹) 임경업(林慶業)이 가서 만나보니, 마부대가 말하기를,
“우리가 12월 26일에 군대를 동원하여 동쪽으로 쳐들어 오는데, 그대 나라가 만약 사자를 보내 다시 화친을 도모한다면 비록 구대가 출동되어 길에 있을지라도 마땅히 중지하고 돌아갈 것이오. 또 우리 나라가 황제로 일컫는 것을 중국에서도 금지하지 못하는데, 그대 나라가 금지하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하였다. 상이 박노(朴虜)를 보내 회보(回報)하고자 하니, 삼사에서 불가하다고 논쟁하였다. 12월에 박노가 떠나 황주(黃州)에 이르니, 오랑캐 군대가 이미 강물을 건너서 길게 몰아 들어오므로 박노는 놀라 정방산성(正方山城)으로 들어갔으니,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이 정방산성에 있기 때문이었다. 13일에 보고가 올라오니, 중외에서 크게 놀라 진동하였다.
14일, 상은 서울을 떠나 강도(江都)로 향하였는데, 미처 성을 나가기도 전에 오랑캐 군대가 이미 사현(沙峴)에 이르렀으므로 창황히 길을 바꾸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달려 들어갔다. 15일에 오랑캐 군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공격함이 매우 다급하였다. 21일에 노주(虜主)가 용만(龍彎)을 건너 28일에는 남한산성 아래에 이르렀다.
충청 감사 정세규(鄭世規)가 군대를 거느리고 근왕(勤王)을 하다가 험천(險川)에 이르러 오랑캐와 싸웠는데, 크게 패하여 창에 맞고 쌓여 있는 시체 속에 떨여져 있었다. 그런데 오랑캐가 물러간 뒤에 부하가 업고 나와서 죽지는 않았다.
정축년 정월 13일에 경상 좌병사 허완(許完)ㆍ우병사 민영(閔泳)과 충청 병사 이의배(李義培) 등이 3만여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쌍령(雙嶺)에서 싸우다가 모두 패하여 죽었다. 그 중 의배는 달아나다가 죽었다.
전라 감사 김준룡(金俊龍)이 군사 만 명을 거느리고 오랑캐와 온종일 광교산(光敎山)에서 싸워 오랑캐를 죽인 것이 매우 많았다. 오랑캐의 대장 백양회(白羊會)가 또한 탄환을 맞고 죽었으므로 오랑캐 군사가 물러갔는데, 준룡의 군대도 무너져 버렸다.
김자점은 정방산성에서 수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싸우며 용진(龍津)에 이르렀으며, 심기원(沈器遠)은 하사도(下四道)의 도원수가 되어 강원 감사 조정호(趙廷虎)를 거느리고 또한 용진에 있었으며, 함경 감사 민성휘(閔聖徽), 북병사 이항(李沆), 남병사 서우신(徐祐申) 등도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나, 모두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감히 싸우지 못하였다.
28일에 오랑캐는 강화도가 무너졌다는 글을 보내 왔는데, 그 글에 백관의 식솔들이 모두 강화도에서 오랑캐에게 사로잡혔다는 뜻을 알려 왔다. 그러자 낙담하여 산성을 고수할 의사가 없어졌다. 상은 드디어 그달 그믐날 성을 나가서 오랑캐 군진(軍陣)에 무릎을 꿇었다. 오랑캐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는데 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심양(瀋陽)에 인질로 갔고, 재상으로는 남이공(南以恭)ㆍ박노ㆍ박황(朴潢), 궁료(宮僚)로는 이명웅(李命雄)ㆍ이시해(李時楷)ㆍ민응협(閔應恊)ㆍ이괴(李襘)ㆍ정□(鄭□) 등이 수행하였다.
오랑캐 경보(警報)가 처음 왔을 때 상은 대신들과 의논하여 강화로 거둥하기로 정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빈궁(嬪宮)과 봉림ㆍ인평(麟坪) 두 왕자를 보내고, 대신 윤방(尹昉)과 예조 판서 조익(趙翼)은 종묘 사직의 신주를 모시고 갔으며, 늙고 병든 재상 김상용(金尙容) 등도 모두 먼저 가게 하였다. 그때 위아래 사람 모두가 강화도는 아주 안전한 견고한 곳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영상 김유(金瑬)의 아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檢察使)로 삼고, 병조 판서 이성구(李聖求)의 아우 이민구(李敏求)를 부사(副使)로 삼고, 좌상 홍서봉(洪瑞鳳)의 아들 홍명일(洪命一)을 종사(從事)로 삼아 군사들을 독려하여 지키게 하였다.
이튿날 상의 행차가 숭례문(崇禮門)을 나가는데, 오랑캐 장수 용골대ㆍ마부대 등이 이미 사현에 이르렀으므로, 대가(大駕)가 창황히 도로 성안으로 들어와서 수구문(水口門)으로 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강화도로 향하면 오랑캐 군사가 반드시 길에서 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윤방ㆍ김경징 등이 강화로 가는 길에 들으니, 인심이 두려워하고 겁내고 있었다. 조익은 자기 아버지를 찾아본다고 핑계대고 도망해 갔다. 빈궁을 모신 일행이 강화의 바닷가에 이르니, 오랑캐 군사가 곧 도착할 것이라는 헛소문이 돌았다. 김경징이 그 가속과 짐바리를 거느리고 먼저 건너가고, 두 대군도 창황히 배를 얻어 건너가니, 빈궁은 크게 통곡을 하였다. 모시고 간 승지 한흥일(韓興一)과 부사 이민구가 함께 간신히 배 한 척을 얻어 건너가려고 하였으나, 밤이 이미 깊고 또 오랑캐가 곧 온다는 것이 헛소문임을 알았기 때문에 다음날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윤방이 종묘 사직의 신주를 모시고 통진(通津)에서 숙박하였기 때문에 현감 채충원(蔡忠元)이 오지 않아 빈궁이 저녁을 굶게 되었다. 그리하여 흥일이 남에게서 쌀을 얻어다가 죽을 끓여서 올렸다.
경징이 자기 가족들이 강화성 내에 편안히 자리를 잡게 한 뒤에, 빈궁이 아직도 건너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저녁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배를 타고 왔다. 흥일이 빈궁을 모시고 나루를 건너 강화에 이르렀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장신(張紳)은 평소부터 구차하게 민심을 기쁘게 하여 명예를 얻고자 하는 자였다. 그는 강화는 하늘이 낸 요새이므로 근심할 것이 없다고 하여 백성과 군사들을 모두 집에서 명령을 기다리게 하고, 무기도 나누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 겁쟁이라고 하면서 듣지 않아 오랑캐 군사가 장차 이르는데도 군사를 보내어 길에서 맞아 싸우게 하지 않더니, 오랑캐 군사가 나루터에 도착하였다는 것을 듣고서야 경징ㆍ장신 등이 비로소 갑관(甲串)에 이르니 군사들이 미처 도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급히 포수(砲手)들을 불러서 탄환과 화약을 나눠주는데 미처 분배도 마치기 전에 오랑캐 군사가 아무런 방비가 없음을 보고 두어 척의 배로 먼저 건너왔다. 경징ㆍ장신은 배를 타고 달아났으며, 충청 수사 강흔(姜昕) 등 여러 장수들도 소문만 듣고 달아나 버렸다.
오랑캐 군사가 드디어 강화로 들어왔다. 김상용과 홍명형(洪命亨)ㆍ이시직(李時稷) 등은 문루(門樓)에 올라가서 스스로 불타 죽었다. 오랑캐 장수가 두 대군(大君)과 윤방ㆍ한흥일, 예조 참판 여이징(呂爾徵) 등을 위협하여 장계(狀啓)를 짓게 하고, 중관(中官) 나업(羅業)을 보내 남한산성에 가서 보고하게 하였다. 성중의 사대부의 식솔들이 다 강화도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몹시 놀라서 산성을 지킬 의사가 없어졌다. 그리하여 드디어 대가가 성을 나가서 오랑캐의 진중으로 가게 되었다.
병자년에 오랑캐의 사자 용골대가 도망해 간 뒤로 오랑캐 군사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하여 원수 김자점을 보내 방어하게 하였다. 김자점이 상께 하직하고 가는 길에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상께서 오랑캐 방어책을 물으시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오랑캐가 4~5월에 오면 신이 마땅히 대결하여 승리할 것이고 오랑캐가 7~8월 뒤에 온다면 승부를 미리 예정하여 말할 수는 없습니다.’고 하였소.”
하였다. 아마 김자점의 생각은, 4~5월에는 우리 군대가 처음 출동하여 사기가 날카롭고 7~8월에는 군대가 오래 머물러 있어서 사기가 쇠퇴하기 때문에 말한 것이리라.
김자점이 간 뒤에 나는 친한 벗에게 말하기를,
“저와 우리의 군대 형세를 관찰해 보건대, 적이 더디게 오건 빨리 오건 상관없이 반드시 패할 형상이 있는데, 김자점의 말은 옛날 조괄(趙括)과 다름이 없으니, 매우 근심스럽다.”
하였다. 4월에 내가 병으로 폐인이 되어 충주(忠州)로 물러가 있었다.
정축년 봄에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리고, 나는 상소하여 장수들의 실책(失策)에 대한 죄를 말하였더니, 상은 답하기를,
“전번 산성에 있을 때에 경 생각을 매우 자주하였소.”
하였으니, 아마 나의 계유년 소(疏 오랑캐의 세폐(歲幣)를 들어주어야 한다고 한 상소)를 생각한 것일 것이다. 민공성휘(閔公聖徽)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계유년 공이 상소했을 때에 나는 싸우기를 주장하였는데, 그 후 변경의 일이 점점 난처하게 된 뒤에야 비로소 공의 말이 옳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공의 고견이 우리들과 같은 범상한 사람으로는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였으니, 한때의 여론이 대개 이와 같았다.
내가 병조 판서로 있을 때에 관서(關西)에 진씨(陳氏) 성(姓)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 자기는 진이(陳理)의 자손이니 군역(軍役)을 면제해 달라고 하였다. 이 일을 병조에서 처리하게 되어 내가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진이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이것은 반드시 거짓일 것이다.”
하니, 동료들이 모두 말하기를,
“진이에게 아들이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므로, 나 혼자 감히 들은 바를 고집할 수가 없어서 드디어 명나라 고황제(高皇帝)가 진이와 명승(明昇) 등을 우리 나라에 보내 왔을 때에, ‘군사로도 만들지 말고 백성으로도 만들지 말라.’고 한 조서(詔書)를 인용하여 글을 써서 아뢰었는데, 그의 군역을 면제하게 하였다. 내가 병으로 강촌(江村)에 물러나 있을 때에 우연히《용재총화(慵齋叢話)》를 열람해 보니,
“진이에게는 아들이 없다. 내가 그의 외손 조공(曹公)과 교류하였다.”
라고 한 말이 있었다. 내가 곧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성현(成俔)이 조정에 있을 때는 진이의 일이 있은 지 겨우 50~60년 밖에 안 되었으며, 또 그의 외손과 교류했다고 하였으니, 그에게 아들이 없었다는 것은 자세하게 알았을 것입니다. 청컨대, 관서의 진씨 성을 가진 사람을 조사해서 조정을 기만한 죄를 바로잡으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병조 판서 심기원(沈器遠)이 말하기를,
“이수광(李睡光)이 홍주 목사(紅州牧使)로 있을 때에 진이의 자손으로 고황제의 조칙(詔勅)을 가진 자가 있어서 그의 군역을 면제했다는 것이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실려 있으니, 조사하지 마옵소서.”
하였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이여고(李汝固 이식(李植)의 자임)가 나와 함께 이야기하다가 이 일에 언급되었다. 여고가 말하기를,
“지봉이 본 황제의 칙서에는, 용봉(龍鳳 한임아(韓林兒)가 세운 송(宋)의 연호) 모년(某年)에 오왕(吳王 명태조가 처음 오왕이었음)의 영지(令志 명령과 비슷한 말)에, ‘자손을 백성으로 삼지도 말고 관원으로 삼지도 말라.’고 한 조목이 있고, 또 어보(御寶)와 어압(御押 임금의 수결을 새긴 도장)이 있었다 하니, 믿을 수 있습니다.”
고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진유량을 죽일 때에는 원나라 순제(順帝)가 아직 연도(燕都)에 있었으며, 고려가 원 나라에 복종한 것이 예전과 같았으므로, 비록 진이를 고려에 보내고자 하였더라도 될 수 없었을 것이며, 홍무(洪武) 5년에 중서성(中書省)에서 자문(咨文)과 함께 진우량ㆍ명승의 가족을 보내면서 ‘군사로도 만들지 말며, 백성으로도 만들지 말고 한가하게 정착하여 살아 가게 하라.’고 한 때는 천하를 통일한 지 이미 5년이 지났으니, 어찌 한임아(韓林兒)가 참람되게 기원(紀元 용봉 원년이라는 연호를 이름)을 쓰고 오왕의 영지를 조칙에 썼겠으며, 또한 어찌 수결을 할 리가 있었겠습니까?”
하였더니, 여고가 비로소 의심이 풀렸다.
지봉과 여고는 모두 문장과 박아(博雅)로서 세상에 이름이 났다. 그런데도 사실에 어두움이 이와 같으니, 심 판서가《지봉유설》을 가지고 증명하려고 한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도 못 된다.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가〈농암선생전(籠岩先生傳)〉을 지었는데, 대략 이러하다.
“농암선생은 성은 김씨(金氏), 휘는 주(澍)이다.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에 예의판서(禮儀判書)로 중국 조정에 하성절사(賀聖節使)로 갔다가 돌아와 압록강 가에 이르러, 우리 나라가 개국(開國)한 소식을 듣고 부인에게 편지를 쓰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므로 내가 강을 건너가더라도 몸을 용납할 곳이 없으니, 내가 강가에 이르렀다가 도로 중국으로 향한 날로 나의 기일(忌日 기제사날)을 삼고, 장사한 뒤에는 묘갈(墓碣) 등 여러 가지 글은 쓰지 말라. 하였다. 그리하여 그 자손이 서로 전해내려 오면서 12월 22일로 선생의 휘일(諱日 기일과 같음)을 삼았으니, 바로 강가에서 편지를 발송한 날이었다.
만력 정유년 가을에, 일본을 책봉(冊封 풍신수길을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는 것)하는 중국 사신 중에 막하관(幕下官) 허유성(許惟誠)이란 자가 있었다. 동래(東萊)에 이르러 스스로 선생의 후예라 하고, 이어 말하기를, 선생이 형초(荊楚)에 집을 짓고, 딸 셋을 낳았는데 자기는 바로 그 사위 중의 하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곡(新谷)의 김씨(金氏)를 만나보고 싶다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다만 선산(善山)이 김씨의 관향(貫鄕)인 것만 알 뿐, 신곡이 선생의 마을 이름인 것을 깨닫지 못하여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의 후손이 마침내 허유성과 서로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 집에 전한 명령은 갑자기 나온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짐이 없게 하라고 간절히 말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는 이가 없어 지금까지도 공허하니, 개탄할 일이다.
응기(應箕)는 명예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조금도 조상을 위해서 드러낼 생각을 하지 않았고, 또한 추앙도 적었다. 그리하여 지금 선생의 7세손 유엽(宥曄)의 말을 채용하여 그의 유사(遺事)를 차례로 찬술(撰述)한다.”
부윤 오운(吳澐)의《동사찬요(東史撰要)》에도〈김주전(金澍傳)〉을 찬술하였는데, 대략 서로 같다.
나는 적이 의심한다. 우리 태조(太祖)가 임신년 7월 16일에 개국하고 한상질(韓尙質)을 보내 명 나라 서울에 가게 하였는데, 그 주문(奏文)에,
“배신(陪臣) 조임(趙琳)이 예부의 자문을 가지고 왔는데, 그 성지(聖旨)를 공경히 바치니, ‘국호를 무엇으로 고쳤느냐? 급히 달려와 아뢰라’…….”
고 하였으니, 한상질이 중국 서울에 도착하기 전에 중국에서 이미 우리 나라의 개국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상질이 돌아온 것도 이해인데, 김주가 이미 중국에서 돌아왔으니, 어찌 세모(歲暮)에 압록강에 이르러서 우리 나라의 개국을 비로소 들었을 리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일은 우주(宇宙)에 뻗칠 만한 큰 절개인데, 또한 어찌 수백 년 동안 파묻힌 채 아무도 아는 이가 없겠는가. 우리 나라 문헌(文獻)이 아무리 증거가 부족하다 할지라도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또 문대(文戴 김응기(金應箕)의 시호임) 제공들이 비록 유명(遺命)을 준수하여 묘지(墓誌)ㆍ묘갈(墓碣)은 쓰지 않았을지라도 이것은 비밀히 하고 나에게 알려서는 안 될 일은 아니니, 반드시 서로 아는 이와 언급하였을 것이다. 어찌 유엽을 기다린 뒤에야 남들이 비로소 알게 된단 말인가.
일본을 책봉하려고 한 일은 을미년 겨울에 있었다. 정사(正使) 이종성(李宗城)이 동래 왜진(倭陣)에 이르렀다가 병신년 봄에 도망하여 돌아가고, 부사(副使) 양방형(楊邦亨)이 정사로 승격하였으나 수길(秀吉)이 책봉을 받지 않으므로 방형이 병신년 겨울에 도로 돌아갔다. 그런데 유엽이 정유년 가을이라고 하였으니, 십여 년 동안의 일도 혼란하여 실지와 틀림이 이와 같은데 수백 년 전의 일이 어찌 꼭 사실이라고 하겠는가. 유엽이란 어떠한 자인지 알 수 없지만, 아마 월정 등 제공이 그에게 속은 것일 것이다.
심광세(沈光世)가 막료(幕僚)로서 이괄(李适)을 따랐는데, 이괄에게 속아서 매우 서로 친근하게 지냈다. 그가 돌아오자, 이연평(李延平)이 관서의 일을 물으니, 심광세가 말하기를,
“이괄이 말하는데, ‘명련(明璉)이 딴 마음이 있다.’고 하더이다”
고 하였다. 이연평이 말하기를,
“내가 듣기에는 이괄이 딴 마음이 있다고 하던데…….”
하니, 심광세가 급히 이괄에게 알렸다.
이괄은 병으로 이미 사임하고 있었는데, 그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를 훈련한 것을 거창하게 자랑하며 오랑캐가 와도 막을 수 있다는 상황을 말하고, 끝에,
“신병(身病)이 이와 같으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힘을 다하여 성은(聖恩)에 보답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이미 신하로서의 도리를 지키지 않는 마음이 드러났는데도 조정에서는 깨닫지 못하였으니, 개탄스러운 노릇이다.
이괄이 반역하였을 적에 광세가 영남에서 그 소식을 듣고, 조정에서 그 급히 알린 죄를 논할까 두려워하여 등창이 나서 길에서 죽었다.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의 경계로 삼을 만하다.
이길(李洁)이 해남(海南)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정여립(鄭汝立)을 방문하니, 여립이 그의 반역 음모를 토로하였다. 이길이 크게 놀라 일어나서 빨리 말을 몰아 서울로 향하였다. 공주(公州)의 거현(車峴)에 이르렀을 때에 무기를 가진 자가 길목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는 여립이 자기를 죽이고자 한다는 것을 알고 매우 두려워하였는데, 마침 무사의 동행(同行)을 얻게 되어 서울에 들어왔다. 그때 그의 형 이발(李潑)도 올라오게 되었으므로, 그가 오기를 기다려서 서로 의논하여 고변(告變)하기로 하고 밤에 잠을 자지 못하였는데, 겨우 이틀 뒤에 조구(趙俅)가 고변하였다. 여립은 듣고 도망하여 스스로 자결하였다. 그러나 옥사(獄辭 옥사(獄事)에 대한 공사(供辭))가 번져서 이발ㆍ이길도 모두 매를 맞다가 죽었다.
광해 정사년에, 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여 이첨의 죄를 논하고, 아울러 박승종(朴承宗)ㆍ유희분(柳希奮)이 국가와 고락을 같이 하는 신하로서, 이첨의 간사함을 알고도 말하지 않은 죄를 논하였다.
선도가 유희분의 집안과 인척 관계가 있어서 그의 지시를 받고 상소한 까닭에 이 말을 하여서 그 행적을 숨기고자 한 것이다.
이첨의 무리가 그것을 망언이라고 논하여 그를 경원(慶源)으로 귀양보냈다. 그때 나는 부계(涪溪)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윤선도와는 친척 관계가 되어서 서로 내왕을 하였다. 윤선도는 자기가 바르게 말한 것으로 죄를 받았다고 하여 스스로 높은 체 하는 뜻이 있었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공이 상소에는 여러 대신은 버려두고 홀로 유희분과 박승종의 말하지 않은 죄만을 논하였으니, 또한 쇠망해 가는 세상의 말입니다.”
하니, 윤선도가 무안해 하였다.
이극건(李克健)도 소를 올려 이첨을 논하다가 종성(鍾城)으로 귀양갔다. 사람됨이 어리석고 간사하여 스스로 유희분과 의논하여 상소하였다는 것을 자랑하였다. 이는 유희분은 권세가 한때에 중하였으므로, 변장(邊將)ㆍ수령(守令) 등으로 하여금 그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자기를 후대하게 하고자 해서일 것이다. 내가 우연히 묻기를,
“공은 윤선도와 서로 아십니까?”
하였더니, 이극건이 말하기를,
“나이가 서로 틀리므로 처음에는 서로 알지 못하였는데, 요사이는 상소 일을 서로 의논하느라고 자주 유희분의 집에 모이게 되어 매우 친숙합니다.”
하였다.
내가 윤선도와 밤에 이야기하다가 이극건의 말을 하였더니, 윤선도는 얼굴빛이 변하고 부끄러워 대답하지 못하였다.
반정 초에, 유생으로서 상소하다가 귀양간 자는 모두 차례를 뛰어넘어 6품직(六品職)에 임명되었는데, 지평 임숙영(任叔英)이 말하기를,
“윤선도의 소는 유희분의 지시를 받은 것이고, 그 안에, ‘제남(悌男)의 반역은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 바이다.’고 한 말이 있었으니, 죄를 면한 것만도 다행한 일이므로 그를 표창하여 발탁할 수는 없다.”
하였다. 청의(淸議)가 그 말을 옳다고 하여 윤선도는 다만 금부도사에 임명되었을 뿐이었다.
만력 경술년(1610, 광해군 2)에 내가 서장관으로 북경에 갔는데, 듣고 본 사건으로써 요동에 입공(入貢)하는 통로에 대해 논하기를,
“서북은 오랑캐 지경과 가까워서 어떤 곳은 겨우 5~6 리가 될 뿐이고, 동으로 해안에 닿기까지도 그와 같습니다. 불행히 발호(跋扈)하는 오랑캐가 있을 경우에는 이 길은 반드시 먼저 막혀서 통행할 수 없게 될 것이므로, 우리 나라가 중국에 입조(入朝)할 때 수로(水路)를 전혀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였다.
신유년에 오랑캐가 요동을 함락하여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북경에 가는 우리 사신들이 모두 바닷길을 택하게 되어 서로 이어서 익사하였다. 그때 나는 영해(寧海)에 귀양가 있었는데, 소암(疎庵) 임숙영이 나에게 시를 보내기를,
어찌하여 바닷길 잊었던고 / 如何忘海路
관외를 오랑캐가 자주 포위한다네 / 關外虜頻圍
이 말이 누구에게서 나왔던가 / 此語從誰出
그대의 조짐 봄이 뛰어남이여 / 多君早見機
하였다. 이는 소암이 신유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괴원(槐阮 승문원(承文院)의 별칭)에서 벼슬하였는데, 괴원에 있던 문서에서 내가 올린 듣고 본 사건을 보고 이렇게 쓴 것이었다. 내가 그의 운자를 따라서 화답하기를,
바다 위의 배는 말과 같아서 / 海上丹如馬
연운에 포위됨을 알리네 / 燕雲報合圍
그대의 맑은 시는 잠을 깨게 하지만 / 淸詩如喚寐
추측으로 맞은 것을 조짐을 안다니 부끄럽다네 / 意中愧如機
하였다.
신유년부터 지금까지는 10여 년인데, 그 동안 중국으로 가는 바닷길마저 끊어졌으니, 소암을 지하에서 불러 일으켜 손을 마주 잡고 한번 길게 슬퍼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구나.
계해년 8월에 내가 수찬으로 의주 부윤에 임명되었을 때, 내가 비국의 여러 재상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래 변방에서 귀양살이를 하였으므로 변방의 사정을 갖추 알고 있습니다. 변방의 성은 문밖이 바로 적의 경계이므로 적이 오는 것을 알릴 만한 척후병이나 봉화(烽火)도 없습니다. 적이 낮에 닥치면 성문을 미처 닫을 겨를도 없고, 밤에 오면 성 위에서 화살 하나 쏠 겨를도 없습니다. 그래서 군사들을 격려하여 성가퀴에 올라가서 밤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적변(賊變)을 알아내는 일을 만약 항상 군사들에게만 책임을 지운다면, 사람이 견디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로 하여금 안주(安州)를 지키게 한다면 적이 의주(義州)에 도착하였다는 보고를 듣고 성을 지키는 준비를 하더라도 충분히 적을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조정에서 나를 의주 부윤에 임명하는 것은 그곳을 지키기 위한 것이온데, 내가 그 지킬 수 없음을 알면서도 억지로 부임하여 국가 패망의 화가 나에게서 나오게 한다면 이것은 조정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니, 정승 오윤겸(吳允謙)이 깊이 나의 말을 옳다고 하였다.
나는 또 말하기를,
“한명련(韓明璉)을 순변사(巡邊使)로 의주를 지키게 했습니다만, 내가 북쪽 변방에 귀양갔을 때에 명련이 우후(虞侯)였는데, 그의 마음 쓰는 것과 일 처리하는 것을 보니, 한낱 패려하고 교활한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적에게 포위라도 당하여 일이 급하게 되면 반드시 지키고 있는 장수를 죽이고서 적에게 투항할 사람이었으니, 결코 같이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정승 김유(金瑬)가 말하기를,
“조정이 바야흐로 명련을 간성(干城)으로 의지하고 있는데, 공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은 무슨 까닭이오?”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조정에서 명련을 아는 것이 반드시 내가 명련을 아는 것만큼 자세하지는 못
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때 마침 최상(催相)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김시양(金時讓)은 광해조 때 죄를 얻어 남쪽과 북쪽으로 귀양살이한 것이 12년이나 되었습니다. 조정에 돌아온 것이 겨우 두어 달이오니 또 변방으로 내보내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또 김시양이 비록 재주와 기량(器量)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어디까지나 백면서생(白面書生)이며, 변방은 시험삼아 역임시키는 곳이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비국의 여러 재상들과 의논하니, 여러 재상들이 나와 한명련은 서로 용납될 수 없다는 뜻으로 아뢰자, 상이 바꾸게 했다.
참판 이민구(李敏求)가 와서 보고 말하기를,
“공이 힘써 의주 부윤을 사양한 것은 무슨 까닭이오?”
하기에, 내가 여러 재상들에게 한 말과 같이 말하니, 이민구가 말하기를,
“허실(許實) 같은 이라면 반드시 능히 지킬 수 있을 것이오.”
하였는데, 그 뜻은 나를 겁쟁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사람의 재주와 기량은 같지 않은데, 나도 어찌 감히 허실이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갑자년에 이괄(李适)이 배반하니, 명련이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죽이고 이괄과 함께 배반하였다.
정묘년에 오랑캐가 밤에 의주에 이르러 수문(水門)으로 들어와서 성가퀴에 올라가 있는 사졸을 죽였다. 그런 뒤에야 성중이 비로소 깨달았는데, 성은 드디어 함락되었다.
평양에 옛날부터 기자전(箕子殿)이 있었다. 감사가 참봉을 임명하여 지키게 하였으니, 이른바 전참봉(殿參奉)이란 것이다. 광해 계축년, 정사호(鄭賜湖)가 감사로 있을 때에 기자전의 이름을 숭인전(崇仁殿)으로 고치고, 관서(關西) 사람 선우(鮮于)란 성을 가진 자를 기자의 후손이라고 하여 숭인감(崇仁監)으로 임명하여 그 제사를 받들게 하니, 품계(品階)가 정6품(正六品)이었다. 이는 마전(麻田) 숭의감(崇義監)의 예를 모방한 것이었다.
선우씨를 기자의 후손이라고 한 것은 소동파(蘇東坡)가 선우신(鮮于侁)에게 지어 준 시와 조맹부(趙孟頫)가 쓴〈선우추서서(鮮于樞書序 선우추는 원(元) 나라 사람)〉에 기자의 후예라고 한 말에서 취한 듯하나 대체로 또한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정묘호란에 숭인감 선우흡(鮮于洽)이 오랑캐에게 항복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그의 죄를 논하여 그의 벼슬을 삭탈하고, 그 도에 명하여 다시 선우란 성을 가진 자를 택해서 감(監)을 삼게 했다.
내가 감사로 있었는데, 태천(泰川) 사람 선우경(鮮于慶)을 조정에 추천하였더니, 조정에서는 그의 적지(嫡支 적파와 지파)를 자세히 조사하라고 하므로, 내가 다시 아뢰기를,
“요요 화주(遙遙華冑)를 누가 그 근원을 자세히 밝힐 수 있겠습니까? 다만 성이 선우씨이기에 조정의 지시에 따랐을 뿐입니다.”
하고, 드디어 그를 감으로 삼았다.
기자전을 숭인전이라 하고 선우란 성을 가진 자를 감으로 삼은 것은 모두 광해의 혼란한 정치가 서로 이끌어 허위를 한 것이므로 반정한 처음에 즉각 폐지하고 이어 조종초의 옛법을 회복해야 하는데, 지금까지도 그대로 따르고 있으니, 진실로 탄식할 만한 일이다.
정승 기자헌(奇自獻)이 기씨(奇氏)를 기자의 후손이라고 일컫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 알 수 없다.《자치통감(資治通鑑)》의 원위씨(元魏氏 후위(後魏)의 별칭) 장풍수주(長風戍主) 기백현(奇伯顯)의 주(註)에 말하기를,
“기백(奇伯)의 후예이고 기자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하였는데, 기상이 가계(家系)가 기백에게서 나온 것으로 만들어 그가 기자의 후손이라고 한 것은 곽숭도(郭崇韜)가 곽자의(郭子儀)의 묘에 절한 것보다도 심하다 하겠다.
나의 조모 기씨(奇氏)는 정무공(貞武公) 기건(奇虔)의 현손(玄孫)이니, 나와 기상은 팔촌의 친척이 된다. 정무공은 바로 기현(奇顯)의 후손이다. 내가 일찍이 기상과 이야기하다가 그의 세계(世系)를 물으니, 머뭇거리면서 말을 잘하지 못하다가,
“기수전(奇壽全) 이상은 그 세계를 잃어버려서 누구의 후예인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의 얼굴빛을 보니, 기현을 그의 선조로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인 것 같았다. 기자가 아무리 성인이긴 하지만, 수천 년 지난 뒤에 아득히 근거할 바도 없는데 선조라고 일컫고, 기현이 비록 추악한 행동이 있었더라도 세대를 상고할 수 있는데 그의 후손인 것을 숨기니, 그의 마음가짐이 이와 같으므로 갑자년의 화(禍 이괄과 내응했다는 혐으로 사사됨)에 빠진 것도 반드시 스스로 취한 바가 있다고 하겠다.
〈요전(堯典 《서경》의 편명)〉에 보면,
“사악(四岳 요(堯)임금 때 사방제후를 통솔한 장관)이 곤(鯀)을 천거하여 홍수를 다스리게 하였으나, 9년이 되어도 공적을 이루지 못하므로 사악이 순(舜)을 천거하였는데, 요 임금이 재위한 지 70년 되는 해의 일이었다.”
하였다.
〈순전(舜典《서경》의 편명)〉에는,
“순의 나이 30세에 벼슬에 등용되었고, 30년 동안 천자의 자리에 있었고, 50년 동안 집정(執政)하다가 승하하였다.”
하였다.
〈익직(益稷《서경》의 편명)〉편에는,
“우(禹)가 말하기를, ‘홍수가 하늘에 닿도록 범람하여 산을 삼키고 언덕에까지 올라가 백성들이 고통에 빠졌으므로 내가 네 가지 탈 것을 타고서 산을 따라 나무를 베어서 길을 열었고, 익(益)과 함께 여러 날고기를 올렸습니다.’”고 하였다.
《맹자》에는,
“순이 익으로 하여금 불을 관장(管掌)하여 산과 못에 불을 놓아 불태우게 하니, 새와 짐승이 달아나 숨었으며, 우가 구하(九河)를 소통시키고 제수(濟水)와 탑수(漯水)를 터서 바다로 흘러가게 했다.”
하였다.
익과 우는 함께 홍수를 다스린 자이다. 순이 등용되었을 때에 우가 처음 태어났는데, 그가 조금 성장하기를 기다려서 홍수를 다스리게 하였으니, 순임금이 붕어(崩御)할 때에는 우의 나이가 80이 될 것이다. 익이 우와 같이 홍수를 다스렸으니, 나이가 비록 우보다 조금은 적다 하더라도 우가 백 세가 되어서 죽었으므로 이때에 익의 나이는 마땅히 90세가 넘었을 것이다.
요임금이 천자의 자리에 있은 것이 백 년이었고 향년이 1백 10세이고 보면, 열 살에 즉위한 것이다. 즉위한 지 70년 만에 싫증이 나서 순으로 하여금 천자의 일을 행하게 하였으니, 이때에 요임금의 나이는 80인 것이다. 요임금의 총명으로도 80이 되어서 싫증이 났으니, 익의 총명이 반드시 요임금보다 낫지는 못했을 것이고, 우가 비록 성인일지라도 어찌 익의 죽음이 반드시 자기 뒤에 있을 것을 알고 그를 하늘에 추천할 수 있었겠는가. 우가 익을 천거한 일이《서전(書傳)》에는 보이지 않고 《맹자》에만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맹자》에 말하기를,
“책에 있는 글을 다 믿는다면 글이 없는 것만 못하다.”
고 한 것이 참으로 격언(格言)인 것이다.
《맹자》에,
“상(象)이 말하기를, ‘도군(都君)을 우물에서 나오지 못하게 덮은 것은 다 나의 공적이니, 소와 양과 창고의 곡식은 부모에게 드리고, 방패와 창 그리고 거문고며 활은 내가 차지하고 두 형수는 나의 침상을 보살피게 하리라.’ 하고, 상이 가서 순의 궁전에 들어갔다.”
하였다.
아, 상이 항상 순을 죽이고자 하였으니, 우물에서 나오지 못하게 덮은 것은 혹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때에는 요가 황제의 자리에 있었으니, 만일 순이 상에게 죽임을 당했다면 요는 반드시 상을 죽였을 것이다. 창고를 어찌 고수(瞽瞍)에게 줄 수 있으며, 두 형수에게 어찌 그의 침상을 보살피게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제(齊) 나라 동쪽 야인들의 말인데, 맹자가 분변하지 않고 마치 실지로 이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말하였으니, 공도자(公都子)가,
“외부 사람들이 다, ‘선생님께서는 언변을 좋아한다.’고 하니, 감히 묻건대, 어째서 그러하옵니까?”
라고 묻게 된 것이다. 아, 외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다.
성왕(成王)이 즉위할 적에 나이가 12세였다. 그가 어리기 때문에 주공(周公)이 섭정(攝政)을 하였다. 한 무제(漢武帝)가 소제(昭帝)를 세우고자 할 때에 주공이 성왕을 업고 제후들에게 조회받는 그림을 그려서 곽광(藿光)에게 주었다. 이는 주공의 일을 가지고 곽광을 권면한 것이고 꼭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예로부터 전설이 있어서 그림으로 그린 것인가 싶다. 어떻게 열두 살 된 임금을 등에 업고 제후들을 볼 수 있겠는가. 비록 등에 업고자 하더라도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글을 다 믿는 것은 글이 없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는데, 나도 여기에서 이렇게 말하겠다.
창려(昌黎 당(唐) 나라 한유(韓愈)의 호)의 〈장중승전후서(張中丞傳後叙 장중승은 곧 장순(張巡)임)〉에
말하기를,
“집안의 옛 서적을 열람하다가, 이한(李翰)이 지은〈장순전(張巡傳)〉을 발견하였다. 이한은 문장으로 이름이 있어 이것을 자못 자세하고 정밀하게 썼으나 오히려 빠진 것이 있음이 한탄스러우니, 그것은 허원(許遠)을 위하여 전기(傳記)를 쓰지 않은 것과 또 남제운(南霽雲)의 일에 대한 전말을 싣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허원ㆍ남제운의 일을 매우 상세하게 서술한다.”
고 하였다. 그러나 한 마디도 뇌만춘(雷萬春)에 대해서는 언급한 것이 없다. 이미 뇌만춘의 일의 전말을 기재하지 않은 것을 빠진 것이라고 하였다면 전후(傳後)의 글에서 응당 다시 이와 같이 소략하게 하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나는 일찍이 남제운이라는 세 글자를 전사(傳寫)하는 이가 잘못 뇌만춘이라고 쓴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여 매양 사우(士友)들과 이야기할 때 언급하였다. 어떤 이는《팔대가문초주(八大家文抄註 팔대가는 당송 팔가문을 이름)》에 또한 이러한 논설이 있다고 말하는데,《팔대가문초주》는 내가 아직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과연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이이첨(李爾瞻)이 정권을 잡았을 때 사당(私黨)을 널리 수립하고자 하여 과거 때마다 미리 문제를 내가지고 자기의 당파 사람에게 제술하게 하고, 시험장에서 그것을 제목으로 내곤 하였다. 미리 제술하는 자가 이미 많으므로 비밀의 누설을 면할 수 없었다. 무오년(1618, 광해군 10)의 증광초시(增廣初試)에 여러 선비들이 말하기를,
“오늘은 반드시 무슨 문제가 나올 것이다.”
하더니, 조금 뒤에 과연 그 문제가 나왔다. 그러자 여러 선비들은 문제를 고쳐 내라고 요구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 거듭한 뒤에 여러 선비들은 크게 성내어 소리지르기를,
“답안을 미리 작성한 자가 아니면 참방(參榜)할 수 없다.”
하고, 드디어 극위(棘圍)를 무너뜨리고 나가니, 시관(試官)이 매우 두려워하여 여러 선비들에게 애걸하기를,
“다시 들어가서 제술하라. 마땅히 지극히 공정하게 시행하겠다.”
하고, 해를 가리키며 맹세하였다. 여러 선비들은 다 따르지 않았는데, 판서 김기종(金起宗)과 참의 유대화(柳大華) 등 수십 인만이 따랐다. 그리하여 유대화가 장원이 되고 김기종도 높은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여론이 분분하였으나 이첨의 권세가 한창 성하였으므로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전시(殿試)에서는 김기종이 장원이 되고 유대화가 차석이 되니, 청의(淸議)가 많이 비난하였다. 계해년 반정 후에 두 사람에게는 청직(淸職)의 길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장만(張晩)이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할 때에 김기종이 종군(從軍)하여 공이 있었으므로 조정의 논의로 그의 하자(瑕疵)를 묵인하고 등용하였다. 그리하여 정언ㆍ지평ㆍ장령을 역임하고 녹공(錄功)되어 당상에 승진되었는데, 청렴하고 부지런하고 재능이 있는 것으로 명예가 매우 드러나서 과거에 급제한 지 12년 만에 차례를 뛰어넘어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유대화는 끝내 청현(淸顯)한 벼슬에 오르지를 못하였다.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이 영상으로 있을 적에 도당홍문록(都堂弘文錄)에 권점(圈點)을 하는데, 붓으로 자기 아들 덕열(德悅)의 이름을 지우면서 말하기를,
“아들이 옥당에 적합하지 않은 것은 내가 자세히 알고 있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가 사심이 없고 대신의 체통이 있다고 탄복하였다.
그 뒤 유영경(柳永慶)이 영의정으로 있을 때에 도당홍문록에 권점하는데 그 또한 그의 아들 유업(柳忄業)의 이름을 지워 버렸다. 그때 유업은 이미 이조에 들어가서 좌랑으로 있었다. 공론(公論)이 말하기를,
“전랑(銓郞)의 청현(淸顯)함이 옥당보다 우위이고 권력도 중한 것인데,
이미 전랑이 된 것은 허락하고 도당록에서만 삭제하였으니, 소인의 위장하는 속셈을 여지없이 드러낸 것이다. 비록 동고의 흉내를 내고자 했지만 누가 허여하겠는가.”
하였다. 요사이는 당록 때에 재상 자손에 대해선 동서벽(東西壁 의정부의 좌우참찬)이 재상에게 눌려서 감히 권점을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모두 점수를 얻어서 뽑히게 된다. 그리하여 사심이 크게 유행하고 조정은 더욱 어지럽다. 지금으로 본다면, 영경이 유업의 이름을 삭제한 것도 조금은 사람의 마음을 든든하게 한다.
광해 즉위 초에 이조 판서 성영(成泳)을 영경의 당이라고 탄핵하여 파면하였다. 영상 이완평(李完平 완평은 이원익의 봉호임)이 그 후임으로 이광정(李光庭)ㆍ김수(金睟)ㆍ이정귀(李廷龜)를 천거하였는데, 광해가 가망(加望 관원을 추천할 적에 삼망(三望) 외에 인원을 추가하는 것임)하라고 명하므로 신흠(申欽)을 천거하였더니, 또 가망하라고 하였다. 광해의 뜻은 정창연(鄭昌衍)에게 있었으니, 이는 창연이 왕비의 외숙이기 때문이었다. 완평이 어찌할 수 없어 김신원(金信元)ㆍ한효순(韓孝純)과 정창연을 추천하여 창연이 드디어 이조 판서가 되니, 여론이 분분하였으나 외척의 권세가 강성하여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그때 정우복(鄭愚伏)이 대구 부사(大邱府使)로 있었는데, 훌륭한 말을 구하는 분부에 응하여 소를 올려 첫 번 정사의 잘못을 극언하였는데, 심지어는,
“그 사람(광해의 시중에 있는 사람)이 들어 있지 않으면 가망을 명하고 그 사람이 또 들어 있지 않으면 또 가망을 명하여 반드시 그 사람의 성명이 있는 것을 본 뒤에야 비로소 낙점을 하시니, 전하께서 전하의 의사를 개입시켜서 마음대로 올리고 낮추고 하는 것이 이토록 심하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아무개는 왕을 옹립한 자로 자처하는데, 지금 그의 아들은 무슨 벼슬에 있고, 어떤 사람은 왕을 보호하는 것으로 자임하는데 지금 그 자신은 무슨 벼슬에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또 수년 이래의 관리 임용이 공정하지 못한 폐단을 논하여,
“변장(邊將)과 수령이 모두 정해진 값이 있어 폐단이 선왕 말년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라고 한 말까지 있었는데, 광해가 성내어 하교하기를,
“경세(經世)가 선왕을 비방하였으니, 내가 그를 죄주자고 하나 언로(言路 바른 말로 진언(進言)하는 길)를 방해할까 두려워서 그대로 둔다.”
하였다.
그 상소 속에 대간에게 저촉되는 말이 있었으므로 대간이 모두 인피(引避)하고 옳다 그르다는 의사 표시도 없이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정언 정홍익(鄭弘翼)만이 더 추천한 것은 재상이 직책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말뜻이 지극히 준엄하였다. 이날 마침 정사(政事 벼슬아치의 임명과 출척에 관한 일)가 있어 그를 수찬에 옮겨 임명하였으니, 그가 논쟁하는 것을 두려워해서였다. 임연(任兗)은 상의 뜻을 엿보고 시론의 좋아하는 바에 영합하고자 하여 그의 인피하는 글에서,
“임금이 사람을 등용하는 데에는 어질면 쓰고 그 유는 묻지 않는 것입니다. 경세가 한갓 제목(題目)이 좋으므로 공격할 계책을 했을 뿐입니다.”
라고 하기까지 하였다. 광해가 이로 인하여 매우 성내어 대신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면서 여러 백 마디를 하였는데,
“경세는 선왕의 경연의 신하로서 선왕의 허물을 함부로 드러냈으니, 내가 그를 먼 변방으로 내쫓아 나라 안에 함께 살지 않고자 한다.”
하였다.
대신들이 다 직언하다 죄를 받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하고, 윤승훈(尹承勳)은,
“전후의 하교가 다르면 ‘크도다. 왕의 말이여!’ 라는 데에 손상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여 우복을 파면시키기만 하였다.
판서 홍가신(洪可臣)이 벼슬에서 물러나 시골에 있었는데, 상소하여 임연이 상의 뜻에 영합하고 어진이를 시기한 죄를 논하니, 광해가 답하기를,
“경이 공이 있는 오래된 중신(重臣)으로 당파에 치우치는 것을 면치 못하니, ‘하북(河北)의 적을 물리치는 것이 당파보다 쉽다.’는 것이 믿어진다.”
하였다.
임연이 더욱 기세가 올라가서 그의 인피하는 글에 심지어,
“경세가 앞장서서 외치고, 홍익(弘翼)이 뒤에서 화답하고, 가신이 칼을 잡고 일어선다.”
는 등의 말까지 있었다. 드디어 전랑(銓郞)에 임명되었으나 사람들이 다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기더니, 이해 겨울에 장령 이유록(李綏祿)이 그를 탄핵하여 파면시켰다.
정우복의 상소 가운데 ‘왕을 보호하는 것으로 자임한다.’고 한 것은 기자헌(奇自獻)을 가리킨 것이고, ‘왕을 옹립한 자로 자처한다.’고 한 것은 이산해(李山海)를 가리킨 것인데, 이이첨의 무리는 보호라고 한 것이 정인홍(鄭仁弘)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여 우복을 공격하기를 더욱 거세게 하였다.
임자년 김직재(金直哉)의 옥사 때에 권총(權聰)이 고변하여 말하기를,
“인빈(仁嬪 원종(元宗)의 어머니)이 선조 말년에 동궁을 해칠 것을 음모하였습니다.”
하여, 정원군(定遠君 원종)ㆍ의창군(義昌君 인빈의 아들) 형제가 궐문 밖에 나가서 상소하고 처분을 기다리니, 권총은 무고죄(誣告罪)로 장사(杖死)되었다. 이는 인빈이 총애 받음이 후궁중에 으뜸이었고, 광해가 동궁에 있을 적에 총애가 감소하여 원통해 함이 없을 수 없으므로 권총이 그런 뜻을 엿보고 이런 일을 만들었던 것이다.
소명국(蘇鳴國)이란 자는 익산(益山) 사람으로 문자를 조금 알았는데, 경박하고 음험하기가 비할 데 없었다. 시배들과 결탁하여 임금의 미워하는 바에 따라 상소하여 그 기세를 고무시키므로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기를 귀역(鬼蜮)처럼 여겼다.
그는 을묘년에 상소하여 말하기를,
“신경희(申景禧)의 말에, 새문궁(塞門宮)에 왕기(王氣)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새문동은 즉 정원군의 집이며, 신경희는 정원군 부인의 외종형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경희와 정원군의 둘째 아들 능창군(綾昌君)이 하옥되었는데, 옥사의 진술이 정우복(鄭愚伏)ㆍ이명(李溟)과 신경희의 일당인 양시진(楊時晋)ㆍ윤길(尹吉) 등에게 관련되어 다 체포되었다.
경희가 죽음 속에서 살 길을 찾고자 하여 옥중에서 고변하여 말하기를,
“윤공(尹珙)ㆍ윤숙(尹璛)이 인성군(仁城君)과 함께 음모를 하였습니다.”
하였다. 인성은 왕자들 중에 명망이 있어서 광해가 매우 꺼렸으며, 인성군의 부인은 바로 윤공ㆍ윤숙의 사촌 누이였다. 윤공과 윤숙은 국문을 받았으나 마침내 사실이 없어서 죽음을 면하고 귀양가게 되었다. 경희ㆍ윤길은 매를 맞다가 죽었으며, 능창은 섬으로 귀양갔다가 마침내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 우복ㆍ이명은 다 석방되었다.
윤공의 자(字)는 원벽(元璧)이니 정승 승훈(承勳)의 아들이다. 부모에게는 효도하고 벗과는 신의가 있었다. 통천(通川)에 귀양가 사는데, 산불이 밤에 나서 집에까지 번졌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병으로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원벽이 그의 누이인 판서 이경여(李敬輿)의 아내와 함께 어머니의 옷자락을 잡은 채 모두 타 죽으니,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그를 알거나 모르거나 다 눈물을 흘렸다. 반정 초에 그 집에 정문(旌門)을 세웠다.
을축년에 선천(宣川)의 기장 줄기에 ‘동왕춘(董王春)’이라는 세 글자가 있었는데, 그 빛이 주홍색 같았다. 장만(張晩)이 순시하여 관서에 이르렀다가 그 기장을 가지고 왔다. 사람들이 보고 다 이상하게 여겼으나 그것이 상서의 징조인지 재앙의 징조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정묘년 정월에 오랑캐 기병이 강을 건너와서 의주(義州)ㆍ안주(安州)를 함락시키고 길게 몰아 평산(平山)에 이르렀으니, 사람이 살육된 것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양서(兩西) 지방은 황폐해져 무성한 풀밭이 되어버렸다. ‘동(董)’이란 글자를 풀이하면 천리초(千里草)가 되고, ‘왕춘(王春)’은 정월(正月 《춘추(春秋)》에 춘왕 정월(春王正月)이란 말이 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정월에 풀밭이 천 리나 된다는 뜻이니, 재앙의 징조임을 비로소 알았다.
정축년 남한산성에서 나와 항복한 것도 정월에 있었던 일이며, 국세(國勢)는 날로 더욱 위급해졌으니, 그 재앙의 징조는 더욱 맞게 되었다.
광해가 새문동 궁(宮)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설을 매우 싫어하여 그 집을 헐어버리고 새 궁궐을 지으니, 매우 크고 화려하였다. 그것을 경덕궁(慶德宮)이라고 이름지어 왕기를 누르게 하였다. 주상(인조를 가리킴)이 정원군의 맏아들로서 반정(反正)을 하고 정원군을 추숭하여 원종(元宗)으로 하였으니, 그곳에 왕기가 있다는 설은 진실로 기이한 예언이었다.
이수백(李守白)ㆍ기익헌(奇益獻)이 이괄(李适)과 명련(明璉)의 목을 베어 가지고 와서 항복하므로 특별히 그들의 사형을 감면하여 귀양보냈다. 수년 뒤에 대사령으로 자유롭게 거주하게 되었는데, 이중로(李重老)의 아들 문웅(文雄)과 박영신(朴榮臣)의 아들 지병(之屛) 등이 자기들의 아버지가 이괄에게 피살되었다 하고, 수백은 이괄의 일당이니 복수한다고 하면서 대낮에 서울 길거리에서 수백을 베어 죽이고 상소하여 살인죄를 받기를 청하였다. 색승지(色承旨) 정백창(鄭百昌)이 그 소를 받아 아뢰었다. 그때 나는 전시(殿試)의 시관으로서 대궐 안에 있다가,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문웅 등이 비록 원수를 갚는다고 하였지만 함부로 사람을 죽였으니, 죄가 마땅히 사형을 받아야 할 것이오. 이러고도 사형을 받지 않는다면 이제부터는 원수를 갚는다고 하면서 함부로 살인하는 자가 계속 나올 것이오”
하였다.
상이 의금부에 명하여 국문하게 하고 죄를 심문한 기록이 올라오니, 상은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대신 김유(金瑬) 등이 극도로 그의 효행을 칭찬하면서 사면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문웅 등이 죽음을 각오하고서 죽였다면 효도라고 할 수 있으나, 이제 조정의 논의가 반드시 이러할 것이라는 것을 헤아리고 죽였다면 죄주지 않을 수 없다.”
고 하였다. 그러나 상도 이중로가 바로 정사공신(靖社功臣)이므로 마침내는 그의 사형을 사면시켰다.
병자호란 때에 도경유(都慶兪)가 심연(沈演)의 종사관으로 쌍령(雙嶺)에서 싸움을 독려하다가 장관(將官) 박충겸(朴忠謙)을 베어 죽였다. 난리가 평정된 뒤에 충겸의 아들이 경유를 용인(龍仁)의 노상에서 기다렸다가 살해하였다. 조정에서는 충겸의 아들을 가두고 국문하라고 명하였으나, 그를 구원하는 사람이 많아 마침내 그의 죄를 다스리지 못하였다.
승지 권도(權濤)는 마음으로 추숭론(追崇論)을 지지하면서 당시 청의(淸議)의 비방을 들을까봐 임신년 조정의 논쟁 때에 일부러 그 계사(啓辭)를 준엄하게 하였다가 귀양가게 되었으며, 정승 이성구(李聖求)는 본래부터 추숭론을 배척하였는데, 상의 뜻에 거스를까 두려워서 갑술년 부묘(祔廟)때에 갑자기 자기 설을 변경하여 마침내는 정승의 지위까지 얻었으니, 누가 잘하고 누가 잘못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우리 나라에서는 비록 학식이 많은 사람이라도 물건의 이름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서도 고(羖)를 고(羔)라고 하는 경우가 가장 심한 예이다.《논어(論語)》에, ‘검은 옷에는 고구(羔裘)를 입는다.’[緇衣羔裘]의 주에,
“고는 검은 양의 가죽이니, 옷을 갖옷 위에 입는 것은 색깔이 서로 맞게 하고자 함이다.”
하였고,《시경(詩經)》에서는, ‘고구가 젖은 듯 윤택하다.’〔羔裘如濡〕하였고, ‘고구를 입고 서성거린다,’〔羔裘逍遙〕하였으니, 고피(羖皮)로 어떻게 갖옷을 만들 수 있겠는가.《시경》〈빈지초연(賓之初筵)〉장에 말하기를, ‘취해서 하는 말은 뿔 없는 양이라도 내라고 하리라.’〔由醉之言 俾出童羖〕라고 하고, 그 주에 말하기를,
“동고(童羖)는 뿔 없는 양이니 반드시 뿔이 없는 동물이다.”
하였으니, 고(羔)는 암놈만 뿔이 없고, 고(羖)는 암컷과 수컷이 다 뿔이 있으니, 고(羔)가 고(羖)가 아님이 이처럼 분명하다. 그런데 고(羔)를 고(羖)라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고(羖)를 고(羔)라고 한다면 고(羔)는 무슨 동물이라고 할 것인가.
김상 응남(金相應南)의 아들 명룡(命龍)과 판서 홍가신(洪可臣)의 아들 홍절(洪楶)은 다 이길(李洁)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기축년 정여립(鄭汝立)의 변란이 일어났을 때 이길이 고문받다 죽으니, 홍 판서가 글을 올려 이혼하기를 청하였으며, 명룡도 글을 올려 이혼하기를 청하였으니, 그 화가 미칠까봐 두려워해서이다. 그때 김상은 중국 서울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명룡의 외숙 이산해(李山海)가 명룡을 시켜서 하게 한 것이기 때문에 사론(士論)이 김상을 허물하지 않고 홍 판서만을 애석하게 여기는 이가 많았다.
판서 김상헌(金尙憲)의 아들 광찬(光燦)이 김내(金琜)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김내는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아들이다. 계축년의 난에 부원군이 사사되고 김내가 고문받다 죽으니, 상헌이 글을 올려 이혼하기를 청하였다. 그때의 예조 판서 이이첨(李爾瞻)이 법으로 보아 이혼은 부당하다고 말했으나, 광해는 원하는 대로 이혼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판서 권반(權昐)의 손자 권제(權躋)가 원종경(元宗慶)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이괄(李适)의 난에 종경이 그의 일당이라고 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권반이 글을 올려 이혼하기를 청하니, 그때 예조 판서 이정귀(李廷龜)는 그의 충성을 칭찬하여 그의 청에 따라주기를 청하였다. 여기에서도 세태가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때에 장홍(張鴻)이 그의 아내가 왜적을 꾸짖고 죽었다 하므로, 조정에서는 정문(旌門)을 세웠다. 병신년에 판서 황신(黃愼)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에 왜가 포로로 되어 갔던 남녀(男女)를 돌려보냈는데, 장홍의 아내가 그 속에 끼어 있었다. 다 놀라고 분하게 여겼는데 조정에서는 기망(欺罔)한 장홍의 죄를 처단하지 않았으니, 형벌이 잘못되었다고 하겠다.
병자년 호란(胡亂) 때 참판 이민구(李敏求)의 아내는 윤휘(尹暉)의 딸이다. 강화도에 있다가 오랑캐에게 사로잡혀 그의 손자와 계집종을 데리고 따라가는데, 길이 서울을 경유하게 되어 민구의 형 성구(聖求)를 길에서 만났다. 그러나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빛이 없었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미워하였다. 그해 여름에 성구가 심양(瀋陽)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왔는데, 민구가 말하기를,
“그의 형이 계집종과 손자를 심양에서 만났는데, 계집종의 말이 ‘그의 주모(主母)가 자산(慈山)에 이르러 적을 꾸짖고 죽기에, 제가 관을 얻어서 염습한 뒤 임시로 어느 곳에 매장하였다.’고 하므로, 계집종의 말에 의하여 그곳 사람들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과연 관에 넣어 묻은 시체가 있었는데, 뒤에 온 적이 그 관을 발굴하여 그 의복을 벗겨 가고 그 시체를 버렸다,’고 하기에, 그 말에 의거하여 시체를 찾아내어서 그의 사위 신승(申昇)이 그 상(喪)을 호송하여 원주(原州)에 장사하였으며, 또 그 손자를 속(贖)하여 데리고 돌아왔다.”
고 말하였다.
듣는 사람들이 다 의심하였다. 설사 이씨의 아내가 적을 꾸짖고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 계집종이 오랑캐의 가는 행렬 속에 있었는데 어떻게 관을 얻어서 염습할 수 있었겠으며, 설사 관에 염습하였더라도 또 관을 부수고 시체를 내버렸다면 여름날의 흙비에 시체가 반드시 부패되었을 것인데, 어떻게 그것이 그의 아내인 것을 분변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 뒤에 이기축(李起築)의 말을 들으니, 그는 말하기를,
“내가 별장(別將)으로서 동궁의 행차를 호위하였는데, 압록강을 건
너서 내 눈으로 이씨의 아내가 적을 따라 심양으로 들어가는 실상을 보았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집에서 그가 자산에서 죽고, 심지어는 시체를 가지고 돌아와 장사하였다고까지 하니,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일만 가지 일이 참인지 거짓인지 다 믿을 수 없다. 이 일은 장홍의 아내와 앞뒤가 서로 동일할 뿐이다.
원숭환(袁崇煥)이 모문룡(毛文龍)을 베어 죽이니, 오랑캐 사자 만월개(滿月介) 등이 의주에 이르러 좌우 사람들을 물리치고, 부윤 이시영(李時英)에게 비밀히 말하기를,
“모문룡을 죽이려고 원숭환에게 비밀히 말하여 마음을 다 쓰게 했는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죽이게 되었으니 다행한 일이오. 내가 공과 친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니, 남에게는 누설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듣는 사람들이 다 비웃었다.
그해 겨울에 오랑캐가 대대적으로 침략을 하여 밀운(密雲)을 함락시키고 총병(摠兵) 조솔교(趙率敎) 등을 죽였으며, 진격하여 연경(燕京)을 여러 달 동안 포위하였다.
원숭환이 조대수(祖大壽) 등을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니, 문룡의 무리가 숭환이 오랑캐의 사주를 받고 문룡을 죽였다고 참소하였다. 황제가 숭환을 죽이라고 명하였다. 대수는 조정에서 숭환을 죽인 것을 분하게 여겨 군대를 이끌고 물러나 돌아갔다.
오랑캐 군대가 계주(鯚州)와 영평부(永平府)를 함락시키니, 유흥조(劉興祚) 등은 다 전사하고, 어사(御使) 백양수(白養粹)는 오랑캐에게 항복을 하였다. 노주(虜主)가 그의 장수 아미라고(阿彌羅古)에게 명하여 영평부에 주둔하게 하고, 경오년 봄에 심양에 돌아와서 박중남(朴仲男) 등을 우리 나라에 보내어 승리를 알렸다. 각로(閣老) 손승종(孫承宗)이 바닷길을 따라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러서 다시 격서(檄書)를 보내 조대수 등 여러 도(道)의 군사들을 불러 영평부를 수복하니, 아미 라고가 크게 패하여 백양수를 죽이고 심양으로 도망쳐 갔다.
병자년 여름에 오랑캐 군사가 또 거용관(居庸關)으로부터 침략하고, 나아가 연경(燕京)을 포위하고서 능침(陵寢)을 발굴하곤 하였다. 그때 감군(監軍) 황손무(黃孫茂)가 우리 나라에 왔다가 소문을 듣고 허둥지둥 돌아갔다. 10월에 오랑캐 군대가 물러가 심양으로 돌아갔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에 들어오니, 이시언(李時言)의 아들 이욱(李煜)이 나가서 맞이하였다. 이괄이 안현(鞍峴)에서 패하자, 이욱은 사람들에게 붙잡혀 군사들 앞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욱의 아우 이환(李煥)도 이욱과 함께 하였는데, 이욱이 패하자 도망하였기 때문에 죽음을 면하였다.”
하였다. 이환은 국구(國舅) 한 서평 준겸(韓西平浚謙 서평은 준겸의 봉호임)의 서녀의 사위였다. 내가 원수(元帥) 제공(諸公)들에게 말하기를,
“이환이 권세에 의지하여 형벌을 면한다면 왕법(王法)이 무너져서 나라가 나라꼴이 안될 것입니다.”
하니, 모두가
“그렇다.”
하고, 염탐하여 체포하려 하였는데, 대가(大駕)가 환도하는 날에 내가 여관에 묵었는데, 첫닭이 울 무렵에 서평(西平)의 아들 한회일(韓會一)이 와서 나를 흔들어 깨우고 서평의 말을 전하기를,
“이환은 김확(金矱)의 일가족과 함께 수원에서 피난하고 있었는데, 공은 이환이 적에게 가담하였다는 말을 잘못 듣고서 죄주려 합니까? 공이 만약 나의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김확에게 물어보시오. 내가 어찌 한낱 서녀를 위하여 감히 나라의 역적을 놓아 주려 하겠소?”
하므로, 내가 김확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이환이 우리 일가족과 수원 촌집에서 피난한 것은 마을 사람들도 다 압니다.”
하였다. 나는 더 의심하지 않았고 이환은 형벌을 면하였는데, 그런 지 수년 뒤에 병들어 죽었다.
정축년에 오랑캐가 물러가고, 나는 소명을 받고 서울에 들어왔다. 참한 한형길(韓亨吉)과 이야기하다가 난리 때의 일에 언급되었다. 내가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의 말은 거짓과 진실을 가리기 어렵습니다.”
하니, 한형길이 말하기를,
“그러하오. 이괄의 반란 때 이환이 실지로 이괄을 따랐는데, 공이 한회일ㆍ김확 제공의 말을 쉽사리 믿었기 때문에 이환이 죽음을 면한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깜짝 놀라서 승지 한흥일(韓興一) 서평(西平)의 종자(從子)에게 물으니, 흥일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를,
“한 참판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아, 서평은 젊을 때부터 중한 명망이 있었으며, 또 국구(國舅)가 되었으니, 마땅히 나라와 존망을 같이 해야 할 것인데, 한낱 서녀를 위하여 이와 같은 처사를 하였으니, 나라의 형세가 떨치지 못하는 것은 마땅하다 하겠다.
그때 어떤 사람이,
“무인 전(前) 군수 아무개가 이괄에게 붙었다.”
고 말하였는데, 그 아무개는 바로 귀천군(龜川君) 이수(李晬)의 서매부(庶妹夫)였다. 내가 귀천군에게 묻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무개는 역적을 따랐다.’고 합니다. 역적을 따랐으면서도 행으로 죄를 면한다면 나라의 법이 장차 무너질 것인데, 공은 종재(宗宰)의 중신으로서 어찌 누이 한 사람을 위하여 나라의 역적을 놓아 주려 하옵니까? 공의 말을 듣고서 처리하겠습니다.”
하니, 귀천이 얼굴빛이 변하며 오랫 동안 생각하더니, 천천히 말하기를,
“공이 종묘 사직에 관계되는 일을 가지고 나에게 물으니, 내가 어찌 감히 숨기겠소. 아무개는 실로 이괄을 따랐습니다.”
하여 마침내 참형에 처하였다. 귀천군의 사정을 버린 것은 서평과 비교한다면 차이가 어찌 천리 만리 뿐이겠는가.
이괄이 저탄(猪灘)에 이르니, 이중로(李重老)ㆍ박영신(朴榮臣)ㆍ이덕부(李德符) 등이 싸우다가 패하여 다 죽었으므로, 이괄의 흉악한 기세가 더욱 부풀어 올랐다. 장옥성(張玉城 장만의 봉호)ㆍ이판서(李判書 이시발(李時發))가 여러 장수들을 불러 일을 계획하는데 다 근심스럽다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괄은 턱밑에 고깃덩이가 달려 있으니, 그것은 ‘이리가 그 턱 밑에 고깃덩이를 밟는 상’[狼跋其胡之相]이므로 마침내는 반드시 실패하여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하니, 옥성이 매우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괄의 턱 밑에 늘어진 고깃덩이를 무반(武班) 사람들은 항상 말하기를, ‘제비의 턱이요, 범의 머리이니 제후가 된 상이다.’고 하였습니다만, 이제 공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그것은 이리의 고깃덩이로서 반드시 나가기도 어렵고 물러가기도 어려운 처지가 될 것입니다.”
하고, 나의 말로써 여러 장수들을 격려하여 보내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기뻐하며 갔다.
문회(文晦)ㆍ우(李佑)가 이괄의 난을 알리니, 여러 공신들이 모두 고변(告變)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연평(李延平 이귀의 봉호)ㆍ최완성(崔完城 최명길의 봉호) 등도 다 믿었는데, 홀로 김승평(金昇平 김유의 봉호)만이 원통하다고 하여 여러 번 상 앞에서 논쟁을 벌이니, 연평이 성내어 말하기를,
“김유(金瑬)가 반드시 공모하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를 원통하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그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이르자, 승평은 몹시 두려워하여 급히 체포된 기자헌(奇自憲)ㆍ유공량(柳公亮)ㆍ윤수겸(尹守謙)ㆍ이시언(李時言)ㆍ현집(玄諿) 등을 죽여 서로 호응하여 안에서 일어나는 근심을 없애자고 청하였다. 상이 그 말을 따르려 하니, 연평이 극구 논쟁하기를,
“체포된 사람들은 대부분 지위가 높은 사람이므로 반드시 이괄과 함께 배반하였을 리가 없습니다. 자헌으로 말하면 대론(大論)에 절개를 지켜 귀양을 갔던 사람이온데, 어찌 구분하지 않고 모두 죽인단 말입니까?”
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물으니, 승평이 또 입시하여 다시 청하므로 자헌 등 40여 인이 모두 죽게 되었다. 언평이 아뢰기를,
“자헌은 절개를 지킨 사람으로서 뒤섞여서 죽임을 당하오니, ‘자헌에게 변란이 창졸간에 일어나서 인정이 의심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일이 부득이하게 된 것이고 네가 흉모(凶謀)에 가담하였대서가 아니라.’는 것을 타일러서 조정의 본의를 알고 죽게 하소서.”
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들어주지 않았다.
김원량(金元亮)은 젊을 때부터 명예를 좋아하여 조행(操行)이 있다고 일컬어졌으며, 동료 사이에서도 명성이 있었는데, 정우복(鄭愚伏)이 영남의 유종(儒宗)이라고 하여 책을 끼고 그의 문하에 유학하였다.
반정 때에 비밀 모의에 참여하여 발탁되어 6품직에 승진되었다. 내가 사명(赦命)을 받고 조정에 돌아와 우복을 보고 묻기를,
“원량이 유생으로서 정사공(靖社功)에 책명(策命 공훈이 있는 사람을 공신록에 적음)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우복이 말하기를,
“김자점(金自點)ㆍ이시백(李時白) 등과 서로 친하였으므로, 비록 논의에 참여하기는 하였겠지만 간여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정사훈(靖社勳)을 책록하는데, 원량이 3등 공신이 되니, 원량은 자기가 굽혀진 것을 분하게 여겨 상소하여 사퇴하였다. 내가 우복ㆍ임무숙(任茂叔 임숙영(任叔英)의 자)과 옥당에 모였을 때, 내가 말하기를,
“원량이 스스로 반정의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는데, 3등에 책명되자, 자기가 굽혀졌다고 분개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우복이 말하기를,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고, 무숙은 말하기를,
“내가 원량과 매우 친합니다. 하루는 원량이 와서 정사(靖社)의 모의에 대하여 말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녹을 먹고 나라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야 종묘 사직을 위하여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진실로 옳은 일이지만, 너는 유생으로서 위로 홀로 된 어버이가 계시니, 만약 일이 실패하여 화가 어버이에게 미치게 되면 충(忠)과 효(孝)를 모두 잃을 것이다.’라고 하였더니, 원량이 얼굴빛이 변하여 갔습니다. 원량이 이괄과 육촌친(六寸親)이므로 이괄이 정사공(靖社功)에 끼게 된 것은 원량 때문입니다.”
하였는데, 우복이 웃으며 오히려 믿지 않는 듯하였다. 이해 겨울에 문회 등이 이괄이 모반한다고 밀고하므로, 여러 공신들이 서로 의논하여 고변을 하였는데, 원량은 영변 판관(寧變判官)이 되어서 정찰을 하겠다고 청하였다. 여러 공신들이 크게 의심하여 허락하지 않았더니, 이괄의 반역한 통보가 이르자, 원량을 국문하기를 청하여 마침내 베어 죽였다. 사람들이 혹은 말하기를,
“윤인발(尹仁發)이 죽은 것처럼 속이고 이괄에게 투항한 것도 원량이 시킨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그의 동류인 나만갑(羅萬甲)ㆍ조직(趙溭) 같은 자들은 지금도 다 그가 원통하게 죽었다고 말한다.
우리 태조(太祖)가 홍무(洪武) 임신년(1392, 태종 1)에 개국하여 전해 내려온 지 1백 3년 만인 홍치(弘治) 갑인년(1494, 성종 7)에 연산(燕山)이 즉위했는데, 중종(中宗)이 정덕(正德) 병인년(1506, 연산군 12)에 반정(反正)하였으며, 그 뒤로 나라를 전해 내려온 지 1백 3년인 만력(萬曆) 무신년(1608, 선조 41)에 광해가 즉위하였는데, 연산과 광해가 즉위하였다가 다 폐위되었으니, 우리 나라의 기운은 1백 3년이 되면 흥폐(興廢)의 대수(大數)가 오는 것일까. 앞으로 조정에 벼슬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기억해야 하겠다.
《맹자》에, 진상(陳相)이 말하기를,
“허자(許子)의 도를 따르면 시장의 물가가 다르지 않아서 나라 안에 거짓이 없을 것이므로, 비록 어린아이가 시장에 가더라도 누구도 속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베와 비단의 길이가 같으면 값이 서로 같고, 삼과 실과 솜과 목화의 무게가 같다면 값이 서로 같고, 오곡의 수량이 같으면 값이 서로 같고, 신발의 칫수가 같으면 값이 서로 같습니다. ”
하였다. 진상의 뜻은 베나 비단이 길이가 같으면 값이 같고, 삼과 실의 무게가 같으면 값이 같고, 신은 가죽신이나 실로 만든 신이나 막론하고 그 칫수가 같으면 값이 서로 같다고 한 것인데, 맹자는 말하기를,
“물건이 서로 같지 않는 것은 물건의 실정이므로 어떤 것은 혹 갑절이 되고 5배가 되며, 혹 10배, 백배가 되며, 천배, 만배가 되는 것인데, 그대는 통틀어 값을 같게 하니, 이것은 천하를 어지럽게 만드는 것이다. 큰 신과 작은 신이 값이 같다면, 사람이 어찌 큰 신을 만들려 하겠는가? 허자의 도(道)를 따른다면 그것은 서로 이끌고 거짓을 하게 하는 것이 된다. 어떻게 그것으로 국가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맹자의 답변에 신발의 크기가 각기 다른 것인데, 값을 같게 한다고 말한 것은 진상의 말과 어긋난다. 아마 오자(誤字)가 있어서 그런 것일까. 읽는 사람이 마땅히 자세히 연구해야 될 것이다.
계해년의 반정 뒤에 권진(權縉)은 광해의 총애받던 신하라고 하여 양산(梁山)으로 귀양을 갔다. 이괄의 변란 때에 통제사 구인후(具仁垕)와 좌병사 신경유(申景裕)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반란군을 치러 가는데, 권진이 이괄과 내응할까 염려하여 비밀히 감사 민성휘(閔聖徽)에게 말하여 권진을 죽이게 하였다. 인후 등은 모두 정사공신(靖社功臣)이었으므로 성휘가 감히 그들의 지시를 어기지 못하여 청도 군수(淸道郡守) 정경업(鄭慶業)을 보내어 권진을 베어 죽이게 하였다. 권진이 죽음에 임하여 말하기를,
“필시 조정의 명령은 아닐 것이다. 나는 사형을 받을 만한 일이 없는데, 일이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할 수가 없구나.”
하였다.
이괄이 죽은 뒤에, 조정에서는 성휘를 하옥시켜 왕명을 사칭하고 재상을 죽인 죄를 국문하였다. 이에 공신들이 다 극구 구원하였으니, 이는 성휘가 신경진(申景禛)과 깊이 결탁하여 그의 심복이 되어 경유 등의 사주를 받아 행사하였기 때문이었다. 상도 일은 비록 함부로 하였으나 마음은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하여 관직만을 삭탈하라고 명하였다.
두어 달 뒤에 함경 감사 권반(權盼)이 체임되니, 공신 등이 말하기를
“성휘와 같은 재능이 있는 자가 아니면 북방을 다스릴 수 없다.”
하고, 권반을 대신하게 하고자 칭송하는 말을 조정에서 하였다. 그러자 정승 신흠(申欽)이 말하기를,
“나라의 형세가 견고하지 못하니 앞으로 난이 없다고 장담할 수가 없으며, 북방은 사대부들이 귀양살이하는 곳인데, 불행하게 만일 변란이 있을 경우에 성휘가 감사로 있다가 함부로 사대부 죽이기를 권진을 죽이듯 한다면 나라가 나라꼴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여, 공신들의 논의가 드디어 저지되었다.
권진은 과거에 급제한 뒤에 승진하기에 급급하여 이산해(李山海) 등에게 붙어서 좋은 자리를 얻더니, 홍여순(洪汝諄)의 세력이 산해보다 더 큰 것을 보고 드디어 여순에게 붙었으며, 여순이 패하자 다시 유영경(柳永慶)에게 붙어서 청반(淸班)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 욕심을 다 채우지 못하여 또 목장흠(睦長欽) 등과 서로 결탁하여 사류(士類)라고 자칭하였다. 광해 대 임자년의 옥사(獄事 김직재(金直哉)의 옥사(獄事))가 일어나니, 권진이 형방 승지로서 옥사를 다스리는데, 상의 뜻에 영합하여 드디어 광해의 총애를 받아 수년 만에 차례를 뛰어넘어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반정이 되자, 몸에 화가 미칠 것을 몹시 두려워하여 참판 박정길(朴鼎吉)을 참형에 처하라고 주청하여 공신들에게 아첨해 붙을 계획을 하였으니, 정길은 비록 그 죄가 죽어야 마땅하지만, 사람들은 다 권진의 끊임없이 배반하는 행위를 미워하였다. 그가 성휘에게 죽임을 당한 것도 스스로가 취한 것이었다.
창려(昌黎 한퇴지(韓退之)의 호)가 지은 호향(胡珦) 묘비의 대략에 이르기를,
“그의 아들 아무 아무와 공의 사위 광문 박사(廣文博士) 오군(吳郡)의 장적(張籍)이 공의 가계(家系)ㆍ행적ㆍ관작ㆍ나이 등을 글로 적어 사람을 시켜 서울에서 남으로 8천 리를 달려와 민남(閩南)과 서월(西越)의 경계에 이르러 공을 위해 새길 묘비를 조주 자사(潮州刺史) 나에게 청하였다.”
하고, 그 사실을 서술하기를,
“호이 상서가부낭중(尙書駕部郞中)이 되어서 자주 공사(公事)로 상서(尙書) 이손(李巽)의 뜻을 거스렸다. 이손은 그때 염철(鹽鐵)의 일을 주관하였기 때문에 부유하고 교만하여 세력을 믿고 승상에게 말하였다. 이것으로 연유하여 공은 물러나와 봉상소윤(鳳翔小尹)이 되었다. 이손이 죽은 뒤에 소대리가 되고, 원화(元和) 12년에 내중상(內中相)에 임명되었는데, 다음해에 병으로 죽었다.”
하였다.
내가 일찍이 역사책을 일일이 상고해 보니, 이손이 죽은 것은 원화 4년이고, 장적의 눈이 물체를 보지 못하게 된 것은 원화와 장경(長慶) 사이였으니, 이손이 죽기 전에는 장적도 병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창려(昌黎)가 장적을 대신하여, ‘이석동(李淅東 석동은 지명으로, 석동관찰사를 이름)에게 보낸 편지’[代籍與李淅東書]의 주에는 석동을 손(巽)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한유의 문장의 주에는 잘못된 것이 많아서 믿을 수가 없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은 상촌(象村) 신흠(申欽)의 아들이다. 글씨를 잘 쓰고 글을 잘 지어 문장으로 자부하였다.
신미년간에 그의 아버지를 위해《상촌집(象村集)》을 간행하여 배포하였다. 그 속의〈동정록(東征錄)〉에,
“임진년에 왜적이 조령(鳥嶺)과 죽령(竹嶺)으로 올라왔다.”
고 한 말이 있었다. 그리고 그〈춘성록(春城錄)〉에는 국조(國朝)에서 부자(父子)가 서로 의정(議政)이 된 자를 기록하였는데, 윤두수(尹斗壽)와 그의
아들 윤방(尹昉)이 거기에 들어 있었다.
내가 동양위에게 말하기를,
“임진년의 왜적이 조령과 추풍령으로 올라왔고, 영남의 죽령만은 적의 발자취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른 일이 없는데,〈동정록〉에는 죽령으로 올라왔다고 기록하였으며,〈춘성록〉은 상촌이 광해 때에 귀양가 있으면서 기록한 것이고 윤방이 정승이 된 것은 반정 뒤의 일인데, 또한 그 〈춘성록〉중에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하였더니, 동양위는 얼굴빛을 변하며 갔다.
병자년간에 또《상촌집》을 간행하였는데,〈춘성록〉에는 윤방의 이름을 삭제하고〈동정록〉에는 ‘적이 죽령으로’라는 구절을 삭제하고 다시 ‘적병이 처음 오니, 우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이「적의 배가 4백 척도 안 되니, 한 배에 수십 인을 싣는 데 불과하다면 총 수효가 만 명 미만일 것입니다.」하였다. 성일의 주장이 조정에 보고되니, 조정에서도 그렇다고 생각하였다.’ 라는 등의 말이 실려 있었다.
임자년 봄에 선조(宣祖)는 성일이 ‘적이 쳐들어 오지 않을 것이다.’는 설을 부르짖었다 하여 특별히 영남 우병사에 제수하였는데, 미처 진(鎭)에 도착하기도 전에 적이 이미 이르렀다. 선조가 성일을 잡아다가 국문하라고 명하여 금부 도사 이통(李通)이 명을 받들고 낙동(洛東)에 이르렀는데, 왜적의 선봉이 이미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도망하였다. 성일이 잡아오라는 명이 있다는 것을 듣고 사잇길로 올라오는데, 선조가 서쪽으로 거둥하여 다시 성일을 초유사(招諭使 난리가 났을 때에 백성을 타일러 안정시키는 일을 맡은 임시 벼슬)로 임명하여 영남의 백성들을 타일러 안정시키게 하였다. 성일이 직산(稷山)에 이르러 새 명령이 있음을 듣고서 다시 영남으로 내려갔다. 가을에 감사 김수(金睟)가 죄를 받고 파면되니, 행조(行朝)에서는 영해 부사(寧海府使) 한효순(韓孝純)을 좌도 감사로 삼고, 성일을 우도 감사로 삼았다.
이것으로서 미루어 본다면《상촌집》속의 잡다한 기록은 상촌의 기록이 아닌 것이 많다.
신사년 여름에 동양위가 지나는 길에 나를 하담(荷潭)으로 찾아와서 조용히 이야기하기를,
“병자호란 뒤에 조정에서 열성조의 어용(御容 임금의 얼굴)을 그린 족자(簇子) 한 폭을 발견하였는데, 조정의 논의가 모두 인종(仁宗)의 초상화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들으니, 그 용안에 긴 수염이 있다고 하기에, 나는 홀로 문종(文宗)의 초상화라고 말하였더니, 대신이 내 말을 듣고 낭청(郞廳)을 보내서 그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자 하므로, 나는《수문쇄록(搜問瑣錄)》을 가져다가 그 속에서 ‘문종(文宗)의 수염이 매우 길다.’고 쓴 곳에 표를 붙여서 보냈는데도 대신이 오히려 믿지 않다가, 족자를 표구할 때에 예전에 배접한 것을 떼어 내니 그 종이 뒷면에 ‘문종의 초상’[文宗眞]이라는 글자가 있어서 조정의 논의가 드디어 정해졌다고 합니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동인야록(東人野錄)》속에 ‘문종의 형상이 웅장하고 수염이 매우 길다’는 말이 있는 것은 나도 기억합니다만,《쇄록》에도 그런 기록이 있다는 것은 기억이 없습니다.”
하였다.
동양위가 간 뒤에 내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조신(曺伸)은 바로 매계(梅溪)의 서소제(庶少弟)이오니, 문종을 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고《쇄록》을 가져다가 상고해 보니, 그런 기록이 없었다. 그렇다면 동양위가 표를 붙여 보냈다고 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본 것은 바로《용재총화(慵齋叢話)》인 듯하다.
[荷潭破寂錄]
我國東海無潮。而中國所不知。故先儒無論之者。我國文人如成虛白輩有論之者。而皆未免杜撰。惟近日韓參議百謙之論。似得其理。其論曰兩極往來之氣。從南向北直上直下。則氣頭餘波不能遠及於左右。其勢然也。以此見之。則非獨東海無潮汐。西海無潮汐。而西海則歷西域諸國至條支海。不知其幾萬里。中國之人非但目不得以見之耳。亦不得以聞之。宜乎議論之不及也。余每與士友輩論東海無潮曰。大雨水漲瀰漫襄陵。而有一拳邱垤稍高處。則水不得上。其理然也。地勢西北高東南下。而我國地海接北地勢高。故潮不得上。以此推之。則西海亦必無潮。而酈道元等足跡所不能到。故先儒無議之者。柳季華輩初以余言爲有得。今見韓公之論與余所見大意相近。余少時得見韓公。而年高丈人行。交際不熟。故未能論及此事。思之爲遺恨也。
壬辰之亂。成判書泳。以前承旨守喪在畿甸。驪州闕牧使。其時監司以成權牧呂州。非朝命。以亂極不敢辭。朝廷聞之。令兼江原巡察。蓋爲賊住原州。監司避兵嶺東。嶺以西無摠察者故也。洪牧使思斅居母喪避兵近境。路遇成。成怒其不卽下馬。使卒挐以問之。知其爲洪。責曰汝是朝官。當此國家大亂。何敢不預其憂。而私自避兵乎。洪曰父母喪重。何敢起服。欲降于倭以安身。則人理所不忍。故如是避兵行耳。成面有慚色撥馬而去。成叔父前承旨世寧。降于倭。至以女嫁倭將平秀家。而成之起服亦無朝命。故洪以此辱之。人聞而快之。
光海辛酉春。虜兵陷遼東。其夏都司山東人毛文龍領兵出來。號召漢人之避兵我國者。襲鎭江克之。斬漢人之爲則守者。來住龍川。朝廷遣正郞李馨遠接伴。其冬虜。渡江襲文龍。文龍與馨遠脫身而逃。虜兵至郭山。逢漢人則無論老弱輒殺之而還。文龍乃收召漢人。設柵于蛇浦。通山東物貨粮餉。人戶萬餘。又設柵于椵島。互相往來。漢商輻湊于椵島。人戶甚盛。文龍遣兵渡江無寸功。其將時可達等。多戰敗死。而隱其敗。每以捷聞。剋減軍需。交結權宦。以功至拜都督。丁卯虜兵陷義州。焚掠蛇浦寸木不遺。文龍適在椵島得免。虜兵至平山講和而退。文龍見我國與和心恐。每遣差官持禮段往虜中。蓋示自與虜通。使我國不得爲間。皆非實也。由昌城路。時南宮戭爲昌城府使。與其差官相勸。差官必密示其文書。乃是與虜講和親密之語。謄書密聞于朝。朝廷大加奬賞。以爲能得毛要領。至賜表裡。己巳二月余爲平安監司。過辭備局諸宰。諸宰大奬南宮戭曰兵使若遞。則必此人爲之。余心知戭見賣於文龍。到關西。朝廷以毛差由朔州至昌城。而府使鄭名振尸居不得其情。峻責之。毛差適至。名振言其由求見文書。毛差大怒詬叱而去。到昌城罵戭曰我與爾親密。無異兄弟。故出示文書。汝何敢泄之於人乎。此語若入於椵島。我必坐死。不肯出示。戭達夜緩頰。餽以酒饌。出肺肝相示。然後始肯出文書。戭謄報于余。余狀聞于朝曰。差官雖與戭親密。事露如此。則必無更示文書之理。此必有簸揚之術。安知無倪余聽之事乎。備局回答曰。此事非人人所可辦。請專委南宮戭。譏汝不足以任其事非人人。丙寅詔使姜曰廣王夢尹到我國。文龍恐我國言其詐弄天朝之狀。密遣汝聽。言于龜城府使趙時俊曰。文龍將執詔使降于奴胡。時俊籠莊汝聽。言于遠接使金瑬監司尹暄。時天使在鐵山。將還到椵島。瑬等將汝聽入言于詔使。使召汝聽詳問之。兩使辟左右聚首相議移日。乃渡海至椵島。文龍出迎。兩使不形辭色。翌日入歸。其使汝聽在文龍管下。親密無小異。然後我國始知其詐也。戊辰文龍領兵到登州。出其不意。劫制守將。奪其物貨而歸。大以爲幸。是年四月又將領兵往登州。朝廷命余往餞之。余入椵島。接伴使洪靌亦在島。屢與文龍輕佻佼詐之態形於容貌。言語好務巧誇張。余謂洪靌曰。都督此行必死。洪曰何爲其然也。吾曰吾言亦安可必。試觀之。文龍言于洪靌曰汝國近日又有趙時俊之事。此是細故。吾姑容恕。後勿復如此。洪不知有昌城之事。故余狀聞於朝曰南宮戭之事臣固不信。陳達于朝。而不見採施。以致爲文龍所嘲侮。朝廷始悟。命杖戭而黜之。文龍旣離椵島之後。洪出來。六月與▣會于平壤東砲樓上。袁經畧崇煥。斬文龍之報適至。洪大驚曰令公言毛今行必死。又言劉海必將死。今毛旣死。劉海亦必死。余笑曰吾言偶中。豈得每言而必中。劉海者遼東人。降于虜酋親幸用事。丁卯講和之時。以差胡往來我國者也。戊辰夏。海改名興祚。率其弟興基興治興良等。焚其家舍若燒死狀。來降于文龍。其人狡黠能文嗜利貪貨。文龍信任之者也。文龍旣死。袁經略遣副摠徐敷奏張贇良。來點島兵抄其丁壯而去。劉興祚耿仲明等從行。以副摠陳繼盛。領沈世魁劉興治等守椵島。庚午三月興治叛殺陳繼盛等。世魁以女納興治而免。朝廷遣摠戎使李曙由陸路。副元帥鄭忠信。忠淸水使宋英望。京畿水使柳應泂等。由水路討興治。興治領兵往旅順口。朝議不一。惟金瑬主戰。餘宰皆主和。故舟師持重不進。八月興治還椵島。自言欽差遣差官李梅來。朝廷命罷兵。興治以余主戰最忌之。每言金察使欲殺我必欲殺我。余以不相容之意請解職。朝廷許之。而以閔聖徽代余。辛未三月十九日。余以備局宰臣入侍經筵。上問興治事。余對曰興治狂悖小兒。當初之叛也。盡卷物貨之在我境者入島。勢將投胡。入往旅順口。還歸之後。更爲首鼠。上曰此何故也。對曰渠投虜。則不過爲李永芳。不如在島。勢窮然後投虜。亦不失爲李永芳故也。上曰閔聖徽見興治言其譎智有餘。以不殺陳繼盛之子觀之。亦可知也。卿以爲狂悖小兒何也。對曰興治旅順口之行。得張燾以來。張燾甚有計慮。用其言。故頗似有智譎。興治狂驕。必無久爲倚用之理。李廷龜曰無論其智妄。旣爲欽差。不可不待之以誠。余曰欽差之云。興治之謊說也。天朝雖無人。興治領兵泊旅順口。悖語威脅。豈肯卽差摠兵乎。還椵島之後奉行朝廷號令。則天朝姑隱忍欽差或有之矣。二十一日夜。張燾等誅興治之報至。翌日備局諸宰入侍。李廷龜曰天朝必遣兵誅之。余曰天朝雖欲遣兵誅之。舟師非發動之時。興治必欲投虜。而見殺也。上曰何以知之。對曰胡譯金希彥往瀋陽。瀋陽言二月晦當出兵攻島。渠又見島中差人之來。數日後瀋中更言。當以三月望後出兵云。今興治之死在十七日。與其言合。故臣知其投虜。而見殺也。金瑬曰金某之言是也。旣罷出。西邊狀啓又至。言天朝遣兵誅之。又以張燾移咨來。咨意請我國奏聞誅興治事於天朝也。李相大喜。召余而謂曰果與吾言合。令公以爲天朝不知何也。余曰天朝若遣兵誅之。則張燾何必請於我國奏聞天朝耶。左右諸宰皆笑。
壬辰之亂大駕將西狩。朝臣請立世子以係人心。宣廟從之。乃立第二子光海君琿爲儲嗣。第一子臨海君珒狂悖。人心所不屬。故捨而立琿從人望也。癸巳還都後。累遣使請封於天朝。而萬曆皇帝愛第二子濮王商。洵意不屬泰昌帝。故禮部每以越次據禮不許。蓋爲泰昌地也。辛丑冬。禮曹復請遣使請封。宣廟以爲壼位久虛。而不請冊妃。先爲此請何也。時懿仁王后上仙已經年故也。朝廷始知上意不屬於光海。丙午春。永昌大君㼁生。繼妃金氏出也。領相柳永慶援世宗朝廣平臨瀛大君舊例。率百官陳賀。閭巷訟言永慶逢迎上意爲固位計。丁未冬。上疾危急。人心洶懼。皆疑臨海有不測意。兵曹判書朴承宗請以都監軍扈衛行宮。上下密匣命招大臣。時原任大臣等。以上疾急。故亦詣在闕中。永慶謂諸大臣曰今下密符只召時任大臣也。諸大臣皆起出。上下敎欲傳位東宮。永慶與左相許頊右相韓應寅回啓。有今玆傳敎出於羣情之外等語。一國共言永慶有二心。遠近傳播。前在癸巳秋。上在海州下傳位東宮之敎。其時大臣尹斗壽等。防啓之辭亦有實出羣情之外之語。而人不以爲訝。今以爲永慶之罪者。勢不同而然也。光海久在東宮。上察其昏庸不堪爲嗣。有易樹之意。而外人不能知。以爲賢。故皆憤疾永慶。戊申正月十八日。鄭仁弘上疏言永慶謀危東宮之罪。幷斥大臣被逐。臺諫不論之罪累百言。不踏啓字而下。十九日永慶上箚自明。批答有仁弘之疏有如失性之人。爲人臣豈以忍退舊君爲能事耶等語。李挺元上疏。請治永慶謀危東宮之罪。答曰誰敎爾等爲此疏。天日在上。其直指無隱。臺諫知上意所在。翌日始以被斥仁弘引避而出。大司諫李效元等。論李慶全李爾瞻等作此搆捏之言。通于鄭仁弘使之上疏。幷請遠竄。卽允之。仁弘竄寧海。爾瞻竄甲山。慶全竄江界。鄭造上疏救仁弘。極言永慶之罪。李惺又上疏請伸仁弘。極言永慶謀危之狀。而幷論其貪贓之罪。二月初二日李效元。請竄李挺元李惺鄭造等。惺與挺元相切。造弟遵婿崔濩。參挺元疏故也。啓辭入啓未下。明日乃是別試開場之日。故試官等方牌招詣闕。忽自內傳言上疾危急。承旨等。蒼皇詣差備門外。御醫許浚出言曰上疾危急不可爲也。大臣皆至。柳永慶以嶺儒繼疏請其罪。出城外。故最後至。日已夕矣。自內命大臣入聽遺敎。李元翼李德馨李恒福尹承勳柳永慶奇自獻沈喜壽許頊韓應寅。而都承旨柳夢寅等入。余以注書亦隨入。上當門而臥。加龍被拖玉帶於其上。氣絶已久。德馨曰古禮不絶於婦人之手。請屛婦人。德馨又曰當靜而俟之。大臣以下以次出擧哀。退就賓廳。日已黑矣。張燭而坐。承傳金鳳傳大妃之命曰啓字御寶送于東宮則不受。大臣啓曰上在哭踊中故也。自當受之。金鳳又以大妃命來傳一封書曰去冬危急時所奉書也。外面書遺世子。內則曰視同氣如予在時。人有譖之愼勿聽之。敢以此托之。旣入。而又以封書。外面柳韓申許朴徐韓。內則曰不穀忝位。負罪臣民。若隕淵谷。今忽得大病。脩短有數。如晝夜之必然矣。夫復何言。大君幼冲不及見成長。以此耿耿耳。予百歲後人心難測。萬一有邪說。願諸公愛護扶持。敢以此托之。因言柳則領相。韓則右相。申則乃申欽。許則許筬。朴則朴東亮。徐則徐渻。韓則韓浚謙。此亦去冬危急時所奉書云。典翰崔有源。唱卽日卽位之論。蓋受王妃兄柳希奮風旨。率同僚來請于大臣。柳永慶執以爲不可。再請三請。至引宋理宗卽日卽位之說。大臣命考出實錄祖宗朝舊例。則惟成宗卽日卽位。而睿宗子齊安大君幼。貞熹王后擇賢而立成宗。成宗亦有兄月山大君。故卽日卽位。與今時勢不同。而大臣莫敢違。翌日玉堂彈禮曹判書權悏。以鄭昌衍代之。申時光海具服卽位于四廳。百官具朝服呼千歲舞蹈而出。旣成服。完山君李軸上疏請罪永慶。嶺南人金應成姜遴等繼之。臺諫論罷柳永慶。請放鄭仁弘李爾瞻李慶全等。十一日從之。
甲午李廷馣爲全羅監司。倭賊因沈惟敬請和。廷馣請從其言。引句踐范蠡爲證。上詢于備局宰臣。成牛溪渾曰李廷馣無伏節死義之心。不敢爲此論。蓋以爲賊有不共戴天之讎。言和則必被重罪。必有了死生之心。然後能爲國家爲此言也。自上盛怒。牛溪不敢畢其說而退。柳西厓是其論。柳永慶力排之。西厓謂永慶曰令公墓碑。當書不主和三字。蓋譏之也。及柳永慶爲相當國。倭又來請和。永慶答以若縛送犯陵賊。則和可諧。謂宣靖兩陵掘發賊也。丙午冬倭縛送二人。稱爲犯陵賊。命諸大臣同鞫。倭供曰觀我容貌。我年尙少。壬辰則兒童。安能掘陵。命大臣議。尹承勳曰以此倭爲犯陵賊。是欺侮神明。上怒責之。斬其倭于市。遂遣呂祐吉慶暹丁好寬等報之。和遂成。永慶之觀上意。論議前後不同。如二人。
甲辰年勘扈從宣武諸功。上尊號。扈從功號初以爲翊運。永慶主論改爲扈聖。時尹承勳以領相率百官庭請。謂諸大臣曰諸公奉身先退。使我擔當此擧。不得不致怨於諸公。永慶黨掌令李德溫劾承勳罷之。永慶代爲領相。趨迎上意無所不用其極。丙午以宣廟在位四十年。率百官陳賀設增廣科。宣廟丁卯卽位。而丁卯則爲明宗二十二年戊辰爲元年。到丙午三十九年。而永慶以爲四十年稱賀。至設增廣。與卽位同慶以固寵。識者皆竊議于家。而畏其勢無敢言者。光海卽位。三司論其謀危之罪。竄慶興竟賜死。人無冤之者。至壬子李爾瞻鄭仁弘。欲錄其功論以大逆。追施典刑。其子悅悌愃等皆坐死。人皆嗟憐。而痛嫉爾瞻等凶恣悖惡。癸亥靖社。誅爾瞻等。雪其反逆之名。復其職。
扈聖勘勳時。必錄自京城隨駕至義州者。壬辰倭兵到嶺南。擄倭學通使景應舜。授書契以送。請見李漢陰議和。蓋漢陰曾宣慰平義智玄蘇等故也。朝廷依其言遣漢陰。漢陰至忠州。先遣應舜于倭陣。爲賊將淸正所殺。不得入而還。復命於平壤。因隨駕到義州。宣廟西狩到平山。新設黃海兵使。移監司趙仁得爲兵使。而以柳永慶爲監司。永慶不得隨駕而西。而幷在錄勳中。許筬爲大司諫。論大臣有不當錄勳而錄者。請改正。筬之請蓋爲永慶而發也。漢陰累上箚竟辭其勳。上從之。永慶時在相位寂無一言。其嗜利無恥如此。光海時李爾瞻等。請削其勳。癸亥命還復其勳名。
宣廟辛卯臺諫論鄭澈等之罪。李山海主其論。玉堂亦將上箚。副提學金睟。往禹大成性傳家議之。禹以爲不可如是波及。挽金不送。大司諫洪汝諄劾禹公。削奪官爵。南北之論始岐。而急者目爲北。緩者目爲南。壬辰李山海洪汝諄竄。西崖亦罷。尹斗壽爲相當國。癸巳還都。西厓還拜領相。甲午大司諫李墍。大司憲金宇顒。掌令奇自獻等。論鄭澈殺崔永慶之罪。司諫鄭曄執義申欽正言李時發等。以議不合引避。玉堂請遞鄭曄申欽李時發等。時論大變。金應南鄭琢相繼入相。乙未春鄭琢請放李山海。上從之。未久臺諫論鄭琢不合相位遞之。人謂請放李山海之故。而意出於西厓。南北之怨尤甚。李完平元翼代鄭琢爲右相。南以恭金藎國等。欲通李慶全淸路。而鄭愚伏經世。爲吏郞執不許。戊戌丁主司應泰。誣捏本國。上欲遣柳西厓于天朝申卞。而西崖有老病不堪行之語。上意甚不平。李爾瞻爲持平。欲劾西崖。大司憲李憲國。執義李尙信。正言鄭弘翼等。不從各引避。上是爾瞻。而遞憲國等。臺諫論西厓削奪官爵。己亥秋。南以恭金藎國主論。劾洪汝諄。又分爲大小北。主李山海者爲大北。主金南者爲小北。任蒙正任就正等。嗾蔡謙吉。疏論金南專權之罪。大司憲閔夢龍等繼之。金藎國南以恭朴彝敍李必亨宋馹朴承業等。削奪官爵。庚子春。領相李元翼筵論西厓之事。且言任國老是臣再從親。若用其人。害及於昆蟲草木。國老以山海之黨方有相望。大司諫崔鐵堅論劾完平。上曰觀完平微意。不過欲引用柳黨而已。完平遞。山海復入爲領相。洪汝諄爲兵判。爭權相攻。主洪者謂之骨北。主李者謂之肉北。李爾瞻等論劾洪汝諄。劫百僚廷論不止。夏上兩黜之。山海爾瞻汝諄慶全等削奪官爵。西人滿朝。辛丑漢陰爲體察使。遣李延平貴。往嶺南董治軍務。延平以鄭仁弘居鄕豪强。頗加侵責。仁弘怒。其門徒文景虎等上疏。論誣殺崔永慶。成渾主其論。使聖上得殺士之名。而其徒黨滿朝。上是之。大司憲黃愼引避爭卞。上以爲黃愼阿其所私遞之。盡遞吏曹。壬寅正月柳永慶爲吏判。乃小北領袖也。臺諫論成渾追削官爵。論請罪柳永慶之臺諫。乃具宬李尙吉李洽等竄配。而又論異議臺諫李成祿閔有慶等。亦分配之。金翬上疏。言其父從學於成渾。渾不預於崔永慶之論。皆出於鄭仁弘之誣構。上批曰汝父之東西南北。汝必隨之如影之於形乎。仁弘之爲人。草木鳥獸皆知其名。汝欲復效成渾殺崔永慶時古手段耶。擢仁弘爲大司憲。特命召之。李貴上疏。極論仁弘居鄕不法二十餘罪。上不省。永慶俄拜右相。遂柄朝權。以至殺其身。
對馬島土薄民窮。專以貢舡賞賜轉販資生。而壬辰和絶失此利。故島倭欲通和復舊。言於日本。則朝鮮請復和。言於我國。則曰若不許和。則必復致兵禍。甲辰春。潛遣被擄人金光。若逃來者。言倭欲復來寇。且持庚寅黃允吉等。所賫去書契爲信。蓋島倭盜得庚寅書契於日本掌故者。潛授金光。似爲被信任於日本者。以爲恐喝之地。朝廷果大懼。遣僧惟政。渡海探形勢而來。此和議所由起也。後金光事覺拷死。其家屬配北塞。丙午倭復來請和。時源家康廢秀吉之子。自立爲關白傳位於其子秀忠。永慶以爲家康廢平氏。於我國非讎。可許和。遣呂祐吉等持書契而往。秀忠答書畧曰呂祐吉等三使。不遠千里海陸。要尋舊好。我何存疎志乎。以示黽勉許和之意。呂祐吉等恐懼。不敢措一辭以辨而來。援庚寅舊例。陞祐吉嘉善。副使慶暹通政以賞之。物議譁然。而畏永慶不敢言。崔有源拜掌令。上疏極言呂祐吉等之罪。臺諫不得已論奪祐吉慶暹等賞資。永慶大惡之。後於公會因禮數相爭。曳出有源以辱之。有源稱病解職不仕。
祖宗朝增廣科。只於卽位元年行之。故成廟追崇德宗不設也。宣廟己丑改宗系。告廟大赦。朝議以爲與開國同慶設之。庚寅策平難功上尊號。時宰以爲與卽位同慶又設之。非祖宗朝舊例也。甲辰策扈從宣武勳亦上尊號。援庚寅例又設之。丙午以臨御四十年。時宰柳永慶稱慶同卽位又設之。光海時稱慶累設之。今上乙丑冊封詔使胡良輔等出來。李廷龜時爲禮判。以爲大慶請設。識者多以爲旣設卽位增廣。不可疊設此科。廷龜請改設別試。癸酉追崇元宗設之。非追崇德宗時舊例也。乙亥元宗祔宗廟。又設之。
慵齋叢話略曰。太祖開國。以趙宰臣胖生長中原。爲奏聞使而遣之。胖語用漢人之語。皇帝曰汝何知中國語。胖曰臣生長中原。曾見陛下於脫脫軍中。皇帝曰卿實朕之交友。仍以客禮待之。書朝鮮二字而送之。許荷谷篈。書之於海東野言我太祖紀。大明太祖不在脫脫軍中。胖無由得見。余已書於紫海筆談矣。洪武庚午。恭讓王遣趙胖朝京。胖與尹彝李初廷卞於禮部。還而有淸州之獄。我太祖以壬申七月開國。卽遣密直司事韓尙質。如京師奏聞曰。陪臣趙琳賫到禮部咨。節該欽奉聖旨。國更何號星馳來報。欽此謹將朝鮮和寧等號。取自上裁奉聖旨。東夷之號朝鮮之稱美。且其來遠矣。可以本其名而祖之。無遣趙胖奏聞之事。慵齋於何聽聞。作此無倫之語。以爲國家典故。而荷谷亦取之何也。二公俱稱文章博雅。而有此失。我國之俗雖博覽羣書者。不喜見本國文字。故於本國之事例多茫眛若此。諺曰本國通鑑有誰讀可發一嘅也。
壬子春。鳳山郡守申慄捕盜鞫之甚酷。盜欲緩死告金直哉謀反。兵使柳公亮。監司尹暄等。聞于朝。繫送直哉鞫之。直哉誣稱與黃赫連謀。欲推戴晉陵君泰慶。蓋赫女爲順和夫人。而晉陵君爲其後故也。獄成。公亮及申慄推官等皆錄勳。爾瞻之黨夤緣此獄。論柳永慶李弘老等謀危東宮之罪。追施典刑論以大逆。錄其勳。癸丑春。故相朴淳之妾子應犀。徐益妾子羊甲。沈銓妾子友英。李濟臣妾子耕俊等。結黨爲盜。殺京商于鳥嶺。商家告于捕盜大將韓希吉。捕得應犀幷贓物。應犀欲免死上變。與金悌男連謀。欲擁立大君㼁。光海親鞫羊甲等。羊甲就服一如應犀言。持平丁好寬請竄㼁。以絶禍根。獄事日峻。戊申遺敎七臣皆拿鞫。金悌男賜死。李爾瞻等逢迎光海欲殺㼁。以爲己功。其黨儒生李偉卿等請誅㼁。且言母后內作巫蠱外應逆謀。母道絶矣。掌令鄭造尹訒亦言。巫蠱之說傳播已久。外應之跡顯出賊口。得罪宗社顯有當絶之義。其將以國母待之耶。大司憲崔有源不從立異引避。儒生趙慶起李安眞權淰鄭復亨等上疏。請罪偉卿及造訒。皆被罪。遂幽㼁于江華。㼁纔八歲。甲寅春。府使鄭沆承風旨迫殺之。鄭蘊上疏請斬鄭沆。且論尹訒鄭造丁好寬之罪。至有殿下不斬鄭沆。無面目入於先王廟庭等語。光海大怒。臺諫請鞫之罪將叵測。李元翼鄭昌衍上箚伸救。故免死竄于濟州。乙卯春。光海棄大妃移御昌德宮。以悌男謀逆之狀。宮中內應之事。頒敎于中外。造訒復入臺閣。人心洶懼。元翼上箚曰。流聞道路將延及於大妃。母雖不慈。子不可以不孝。光海詰以卿從何處。得聞如此謊說。形諸文字。以駭衆聽。宜直陳以對。元翼對曰癸丑發論之人。復布在臺閣。臣心之大疑以此也。臺諫請竄元翼。而以南以恭言於元翼。使之上箚。幷請罪之。竄元翼于洪州。以恭于松禾。儒生洪茂績鄭澤雷金孝誠等上疏。訟元翼之忠誠。誅鄭造尹訒等。臺諫論茂績等之罪。幷竄于海島。
丁巳李爾瞻欲廢大妃以固寵。其黨着儒冠者上疏。在臺閣廷論。請亟定安宗社大計。光海命廷臣獻議。竄異議者李恒福奇自獻鄭弘翼金德諴等于北邊。遂幽閉西宮。人心憤惋。申景禛與李曙等。密謀推戴以安宗社。以謀告于金瑬及崔鳴吉。共推瑬爲長。李貴亦憤奮。與金自點沈器遠等。共謀撥亂。交結武士歲餘。與金瑬申景禛合。李貴爲人不密謀頗泄。柳天機知之。言于崔滾。滾有源之子。與柳希奮親密故也。希奮使所親臺諫。論李貴有異志。請鞫之。金自點以賄賂。潛結光海嬖姬金尙宮者。尙宮訟其冤甚力。故光海不從臺論。論旣停。李貴上疏請與臺諫廷卞。以正誣告之罪。光海亦置之。癸亥三月十二日。金瑬李貴等將擧事。李厚源要與李以攽同往。蓋以攽惟弘之子。惟弘謫江界。金瑬爲府使相親故也。以攽言于其叔惟聖。惟聖言于金藎國。藎國言于朴承宗。承宗大驚。令以攽詣闕告變。大臣及禁府堂上亦會于闕下。而是日金自點盛備酒饌。納于金尙宮。光海方與宮人宴樂。而告變之章上。故置而不下。日旣暮闕門閉。承宗等不得已。與禁府官退于闕門外備邊司以待。旣夜金瑬等會于弘濟院。李曙時爲長湍府使。以長湍兵至。從李适部分。三更奉主上正部伍。斬彰義門而入。光海逃出。入直承旨將官等皆逃散。朴承宗朴自興李爾瞻皆踰城走。翌日尋得光海于人家。詣西宮啓大妃廢之。斬金尙宮朴鼎吉李偉卿韓纘男白大珩等。承宗至松山聞上已卽位。與自興自縊死。爾瞻逃至利川地。爲人捕納。爾瞻及鄭造尹訒等斬于市。分遣使者。斬平安監司朴燁。義州府尹鄭遵。忠淸兵使韓希吉。大赦盡放光海時被罪人。逮鄭仁弘斬于市。分排兇黨或竄或死。
鄭仁弘疏論柳永慶也。朴黨以爲李慶全爾瞻等嗾之。幷竄絶塞。人皆稱冤。爾瞻哭訴冤於其家廟。及光海卽位。仁弘等皆被寵擢。仁弘言居昌縣監金挺立偶以邸報示之。知永慶搪塞傳位之敎。陳疏論之而已。兩李有如風牛馬。而竝被其罪。小人之構陷人如此。人皆信之。及仁弘等錄其功也。乃曰與李山海李爾瞻朴楗李惺等。相議陳疏幷錄之。而勳名曰定運。初爾瞻李惺。使惺弟憺見鄭愚伏經世。極言永慶謀危之狀。請疏論其罪。愚伏不肯。憺累日不去。更貽書勸之。愚伏答其書曰道不同。不相爲謀。憺遂往說仁弘而爲之。仁弘初以爾瞻亦不預其疏者引而自高。欲其名之重也。後以爾瞻朴楗同議爲之者吐其實。而欲其功之錄也。小人貪功名之心無所不用其極如此。人言山海朴楗皆不預知。而山海其黨領袖。而戊申其子慶全。與仁弘同被竄。朴楗之妻光海外姑。夤緣交通而有力。故錄之云。
李适參判陸之後。以武擧選。而能文善書有名稱。癸亥春。以北兵使未及赴任。金瑬李貴等將擧事。以适多才智。以密謀告。适慷慨從之。反正之日部分規畫。皆出於适。及論功等第。以适新預抑之爲二等。适大不平。公論亦以爲朴元宗靖國時。柳子光亦非預謀者。而臨時用其策。故擢爲一等。适事同子光。而第功反詘。頗冤之。是夏朝廷以關西虜患可憂。出适爲平安兵使兼副元帥。适大怒遂畜異謀。時元勳等。初立殊勳。過慮人心不服。廣爲譏察。盛開告密之門。文晦李祐等。告奇自獻。玄諿。李适。及其子栴。韓明璉等謀反。上招大臣及元勳議之。金瑬以爲适不反。李貴崔鳴吉等以爲必反。上命只拿其子栴。及奇自獻等。是甲子正月十七日也。金吾郞及宣傳官至适營。适斬之擧兵反。二十三日報至。朝廷震駭。遂盡斬奇自獻等。以李守一爲平安兵使。邊潝爲黃海兵使。李時發爲副體察使往禦之。适脅韓明璉等道內將官。從順川路長驅而來。蓋爲張晩以都元帥在平壤。适不欲與交兵故也。至順川。李胤緖李等五六將。各率所部兵三千餘人。奔詣張晩。适大懼。自是不敢入宿官府。一夜累易其處。恐軍中殺之也。至黃州西與張晩兵戰。晩兵敗。將官安玏許銓又率所部兵投張晩。适至遂安。知官軍守塞垣。轉向麒麟路。張晩收整敗軍隨其後至平山。李守一李時發以所部兵同行。南兵使申景瑗亦至。李适至猪灘。防禦使李重老李德符率豐川府使朴榮臣等守灘。适進擊大破之。斬重老等。李貴領護軍守臨津。望風而走還京城。力請出避。二月初九日也。上渡漢南幸。晩等到坡州。聞上南幸。而賊兵入京城。用鄭忠信謀。忠信南以興邊潝申景瑗等。十一日夜引兵上鞍峴。李守一殿之。翌日适見官軍臨城。引兵仰攻之。忠信等盡銃擊之。适兵大敗入城。引兵出興仁門而走。諸將追之。賊兵盡潰散。适以數百騎逃至利川地。其黨奇益獻李守白等。斬适明璉獻于公州行在所。
大駕南幸時。王子興安君瑅。不扈從而逃。俟适入城投之。李興立以京畿防禦使送款降。适陽尊瑅爲王。适敗。瑅渡江亡走。韓繆安士誠執瑅獻于張晩。晩囚之以待朝令。南道都元帥沈器遠。都監大將申景禛。不聞于朝。殺之於軍中。事聞。下器遠景禛于禁府。數日赦之。興立下獄自殺。
适之叛也。稱京城有變領兵入援。分遣手下精勇者。召諸將。定州牧使丁好恕覺其有異。斬其使。領兵詣張晩。安州牧使兼防禦使鄭忠信。令肅川府使鄭文翼守安州。而自詣張晩請從行。晩責其棄城。將罪而赦之。竟誅适立大勳。余嘗從容問曰公聞适反。棄城而遁何也。忠信曰吾與李适交若兄弟。國人皆知吾亦爲文晦等所告。幸蒙上恩。得免拿問。适反而我在寧邊近地。爲人所疑。則我之素心無以自白於天日之下。棄城而遁者。明吾本心。而人自信之也。适旣誅。晩勅西來諸將。俟大駕還京。迎拜於江上。而忠信獨下歸來辭於李時發。時發曰諸將皆留。公不可獨歸。忠信曰以西路將兵之臣。不能卽誅反賊。使大駕播越。而賊兵入城。其罪大矣。何敢自若有功者。迎駕於江上。退歸本鎭。以俟朝廷處分耳。上還朝聞忠信還歸。特下聖旨召之。其明敏如此。
适旣反。金孝信率康綽。亦以适令領兵至肅川地。綽拔劍斫孝信。爲孝信管下所殺。張晩以綽爲适欲殺孝信。而爲孝信所殺。揚其功。擢孝信拜忠淸水使。余問其事於鄭忠信。忠信曰康綽屢說孝信。去适效順。孝信不聽。綽在孝信之時呼曰吾緣此賊。將以不義死。孝信旣殺綽。适兵已遠不可及。不得已來詣元帥。反其言害忠節。而享其功。甚痛駭。余與張公。從容語及孝信事曰忠信之言。則如此。張微笑曰事已成。鄭不須作如此言耳。光海時戊午大比。退行於己未講經會試。而拘於妖說。不卽殿試。辛酉親行籍田別試取人。而亦拘妖說。不許唱榜。癸亥反正。上下敎曰戊申以後及第。或削或罷。上在閭閻時。洞知爾瞻等欲樹私黨。前期潛出試題使之借述。不解文者皆登第。式年則拈授某篇使之誦習。而出諸講席。有七大文通。從自願之言。故有此敎。此兩榜及丙辰謁聖乙卯式年。爲最甚。故當罷榜。而其餘他榜亦多削名者。禮曹判書李廷龜託以事重。請同三司會議。累退日期。蓋金瑬子慶徵。素不能文。濫占於親耕榜。爲其地故也。李完平入侍朝講。言旣取之第或削或罷。前所未有。不可輕行。其中分明用私竊取者。則棄而不用可也。上從之。完平望重朝野。爲上所倚信。時人爲慶徵託以公論。遊說完平屢退日期。待完平入侍經筵。而完平爲所欺也。臺諫爭之不能得。
李适亂後。大事初定。人心不固。譏察甚盛。張晩與靖社功臣議。使南以興若自爲異謀者。以探可疑之人。朴弘耇兄子允章信之。以其謀告以興。使金仁沈逸民發之。遂逮捕弘耇及允章兄成章等鞫之。允章成章就服遂誅之。賜弘耇死。
奇益獻之斬李适明璉也。明璉子潤脫身而逃。匿於龜城地經年。府使趙時俊始得聞。而欲捕之。潤知機走亡入虜胡。言我國亂。被擄將姜弘立朴蘭英等信之。虜兵遂有東侵之謀。丙寅春。朝廷聞之遣弘立妾子璹。蘭英子雴等于虜中。璹亦畏㥘不得達而還。丁卯正月。虜兵三萬餘騎夜襲義州陷之。府尹李菀判官崔夢亮等皆死。遂長驅以進。朝廷遣張晩。率金起宗鄭忠信等禦之。虜兵攻陷凌漢山城。擄定州牧使金搢。郭山郡守朴由健。宣川府使奇協。弘立等詳聞我國反正之擧。始大悔其見欺。虜兵進攻安州陷之。兵使南以興。牧使金俊自焚死。虞候朴命龍。价川郡守金尙毅。永柔縣令宋圖南。甑山縣令張暾等皆死。監司尹暄棄平壤而遁。黃海兵使丁好恕聞尹暄棄城。亦棄黃州報至。朝廷震駭。以金起宗代尹暄。申景瑗代南以興。李榏代丁好恕。大駕出避江華。李元翼申欽韓浚謙等。奉東宮下湖南。以鎭撫人心。虜兵進至平山。會大雨江漲不得渡。虜兵雖乘勝而前。深入亦非本意。遣劉海等議和。繼遣弘立等來。朝廷許之。遣李弘望。奉宗室原昌君稱爲王弟出質。虜兵引還。殺掠不可勝記。莅斬尹暄。竄丁好恕于穩城。臺諫幷請誅好恕。而上特原之。蓋念斬适使之忠也。四月大駕還京。陞江華爲留守府。東宮亦自湖南還。虜主遣弘立朴蘭英吳信男等還。未久弘立病死。人疑其自盡。
丁卯北兵使尹璛。南兵使邊潝。領兵勤王至海西。朝廷與虜議和。璛等不敢戰。與副元帥鄭忠信。黃海兵使李榏等。屯遂安地。虜結和退歸取其路。忠信等捨甲休兵。虜大衆猝至。不知和已定。皆鳥竄而走。璛事急不及走。領麾下登樓爲死戰計。虜將言和定之由。請與相見而去。時張晩在平山近境。牛峯縣令李尙節。脫身而走告于張晩曰。諸將皆爲虜兵所獲。晩飛聞于行在。人情震駭。余與號召使鄭經世。會于咸昌議兵事。有自行在謄報來者。座上皆錯愕。余曰此報虛也。鄭曰張在近地得實以聞。公在千里外。逆知其虛何也。洪鎬主其說尤力。余曰我國人雖不能善戰。能善走。若守城而城陷。則或有此患。野處遭虜。寧有盡爲被擒之理。鄭洪笑曰公亦太執。余還尙州。翌日西報至。果虛也。洪馳書於余曰高見出尋常千百等。雖古名將何以加。可笑。
言有以實而以爲虛者。有以虛而以爲實者。虛實相仍。明卞甚爲難也。文晦之上變也。鄭龍榮及其子澯。亦在訊庭。龍榮臨杖。澯進曰若免父杖。則我當告實。推官進而問之。余以問事郞受其辭。澯曰有以李适反狀吐實者乎。曰無矣。澯曰适約以今月晦間擧兵反。從价川順川谷山遂安路上來。而文晦先發必斬金吾郞宣傳官。已擧兵矣。我兄韓明璉之婿。欲譏察上變。往在明璉所今明必上來。曰明璉同謀乎。澯曰否。其㥘執同反。則吾不能知。曰奇自獻預謀乎。澯曰聞其亦有異謀。而與适不相通。曰汝父亦知之乎。澯曰子之所知。父寧不知。推官如金瑬等保适不反者皆大驚。進龍榮而問之。龍榮曰尹仁發詐死。而潛投李适爲策士。推官皆曰以尹仁發爲生。此人之言皆不可信。捽下杖之。蓋去歲十月仁發逢盜於利夫峴而死。剝其面皮割勢而去。其家葬之已久故也。适反報至。余受命西征駐平山山城。适至谷山。适帳下崔德雯效順投張晩。告曰尹敬立之子爲僧者。爲适謀士。同寢處最親密。晩至平山。丁好恕金起宗等亦隨之。余曰德雯言适事甚詳。好恕曰以尹仁發爲生。其言亦不可盡信。仁發好恕兄好寬婿。故好恕信其死而云也。余曰無輕言。龍榮言仁發詐死。而推官亦不信杖之。今聞德雯之言。死果詐也。座上皆大驚。鞍峴之戰。仁發爲李守一兵所斬。前冬之利夫峴死者。乃仁發殺宗室連城都正之奴。詐稱已屍。而其剝面割勢者。欲令其妻不識也。賊謀叵測。
李适之亂。李判書時發。以副察使受命出禦駐平山。李完豐曙。以京畿監司領兵繼出。李判書每得賊報。輒傳令于曙。使應之。一日而至三四報語不同。傳令亦隨以變。曙以靖社元勳。權寵方盛。余曰觀今日事勢。不可以一紙傳令制完豐。使之臨機制變。而姑止輒出傳令如何。李判書不從。适旣平。完豐及李延平。俱以失禦被罪。完豐悉藏其時傳令示人曰號令如此數變。奔走東西且不暇。安得與賊遌而決戰。此果我罪乎。張玉城晩。勘平适功等第以進。功號振武。上命勿錄文官。於是李判書金起宗南以雄崔晛及余。皆見削。歲暮玉城謂余曰聞振武功臣不許錄文臣者。以李判書見忤於靖社元勳故也。若只請我文臣則必蒙。見忤事出不得已。及此會盟未行時。欲更請之。後數日只請錄起宗以雄。果許之。
李仁居者。樞之孫也。光海時。自京挈家寓於橫城。力耕而自給。爲人戇愚不與人往來。今上反正。士論以爲仁居知世亂隱居。奬其賢起拜六品職。仁居亦以隱者自處。見人推許。自高其才。世上無難事。見靖社勳臣當國所爲不厭人心。遂有不測意。柳孝立希奮之兄子也。謫堤川。與大北餘孼之網漏者。密謀復光海。仁居相通往來。丁卯冬。仁居見監司崔晛。極詆當國之罪。言辭甚悖。晛以爲狂戇憤時之言。不以聞。數日仁居率十餘人詣橫城縣。倡言起兵。其意渠若發言。則人必影從也。縣監李擢男棄縣。而逃往原州。原州牧使洪靌。卽領數十人馳往。仁居獨坐縣館。其徒皆已去。靌縛送京師莅斬于市。上議于相臣申欽等。命錄靌功。臺諫言仁居悖亂而已。無發兵之事。洪靌無功可錄。語侵大臣。欽大怒。上疏辭職。以靌爲忠勇無比。上從欽言。賜洪靌等勳名曰昭武。孝立遣其子及黨入京。締結宦官宮女。約以戊辰正月初四日夜擧兵犯闕。許逌預其謀。逌許之從子也。知之。馳書言于洪瑞鳳。崔晛以不發仁居之罪繫禁府。禁府羅卒密言于晛子山輝曰今日監司當自獄。山輝問其由。羅卒以孝立謀言之。山輝大驚。急往言于沈命世。瑞鳳命世等以聞。是四日夕也。朝廷大駭。金吾郞四出逮捕。而發都監兵設伏于三門外以俟。許逌等。載兵器乘夜入來。皆被捉。孝立及其從弟斗立。就服而斬。錄許等功。賜勳券曰寧社。瑞鳳山輝皆預焉。
光海初立。政歸外戚。柳氏權盛。希亮希發孝立等。一年之內相繼登第。而仁弘之黨。以疏論永慶亦被寵用。權有所分。幷未能專擅用事。且以新卽位。頗參用士類。朝政不至大紊。金直哉之獄辭連被逮者。夤緣宮禁多以賄賂得免。癸丑獄而益甚。入獄者不行賄賂。無得脫者。以至官職除拜皆視銀兩多小。閫帥則賄至千餘兩。趙挺李冲。以交通宮禁躐取卿相。又興土木之役。撤民家數千作仁慶慶德兩宮。務極宏麗。監董大小官。憑公營私竊取材瓦。皆構舍第甚侈。財用不足。池應鯤王命會金純等。蟣虱攀附。稱以調度使。散出外方。賣官鬻爵。勒取其價。貿販銀兩太半入於宮中。閫帥守令之債授者。到官倍輸。剝膚椎髓民不聊生。金尙宮之母後夫劉夢玉。其姪婿鄭夢弼尤貪縱用事。朝臣之嗜利無恥者。多夤緣取高官。吏議李挺元欲以夢弼擬襄陽府使。政吏愛男進曰夢弼是我弟正男之子也。渠是白身安可擬此。以傷國體。挺元大慚沮。士論快之。夢弼欲奪趙絅奴婢。劫縛絅囚於其家。且不測。尹知敬時爲舍人。直往夢弼家請與相見。言曰趙絅是有名士子。汝敢作如此事。日後於汝必有不好事。吾愛汝故言之。夢弼色變而謝。絅得免。人皆稱知敬義氣。及反正。夢玉夢弼挺元應鯤命會金純皆被誅。命會乃李安訥之奴也。
宣廟昇遐十餘日。獻納尹孝先典籍崔有源等。受希奮旨。論臨海君珒逆謀之罪。光海議于諸大臣。大臣對曰流之絶島。終始保全。乃是聖上之至德。李漢陰筆也。命竄珒于喬桐。鞫其辭連人武將高彥伯楊鶴瑞梁諿。宗室雲原都正橈等杖死。武士河大謙就服獄成。臺諫請正珒謀反之罪。李完平上箚辭職曰。臣旣獻全恩之說。不可更爲執法之論。李爾瞻遂以全恩攻擊。所謂南人以爲護逆。多有被罪者。明年珒死于喬桐。人皆疑縣監李稷毒殺之。而不敢言。癸丑爾瞻等。脅朝廷請誅㼁。完平稱疾杜門。漢陰上箚以爲㼁幼稚無識。待其成長觀其志氣。處置不晩。玉堂李惺韓纘男等。請正漢陰護逆之罪。辭極陰慘。光海命削奪官爵。惺等以人心不服而停。頃之漢陰卒。人言憂憤所致。
光海初立。遣李好閔吳億齡等。請承襲。中朝以爲越次。遣遼東都司嚴一魁。自在知州萬愛民。驗覈珒病否。光海以銀蔘賂嚴萬甚厚。我國壬丁請兵於中朝。事甚重難。亦未嘗行賂。至是始開賂門。自此事甚些少。我國譯官亦縱臾其間。非賂不成。華使之東來亦以我國爲貨窟。徵索銀兩極其欲。宦行則用銀多至十餘萬。民不聊生。宣廟朝。請改宗系累行不准請。朝議以爲中朝之事非貨難成。欲試用之。譯官洪彥純曰。外國事勢與中國之人不同。若開此路。其流之弊至於國弊而後已。宗系之成。差遲數年何傷。遂不行賂。彥純之言至今而驗。亦可謂有先見之君子也。
邊忠吉者。司僕寺養馬也。兪參判大禎之赴京也。以軍官帶行。賤隷爲赴京軍官。前所未有。光海政亂。忠吉納女宮中寵。以賤隷拜橫城縣監。兪晉曾之再牧羅州。晉曾之爲承宣。皆忠吉力也。士論惜之。及反正其女賜死。忠吉廢爲民。
癸亥反正。戊申以後貶竄之人皆放敍。時余謫在寧海。李參判命俊。沈參判詻。謫在盈德。聞報卽約會于境上。爲敍別而歸也。李曰天命重新萬物改覩。未知何者。爲今日大事也。余曰定遠君追崇也。李曰主上以傍支入承大統。安可追崇私親。余曰是大不然。漢宣入系昭帝。而不追尊史皇孫者。孝昭未嘗以史皇孫爲子。宣帝安敢以己之貴。以其父父他人乎。今則異於是。定遠君乃宣廟之子也。太廟不可闕禰位。追尊定遠。則父子相承。而太廟位備。固合於禮也。李曰公言是也。李以掌令先至京。余以禮曹正郞繼至。李來訪曰朝論以追崇爲逢迎邪議。斥之甚嚴不敢出口。吾之所見實合於禮也。未久余訪張維。金元亮亦在座。曰朴知誡言禮合追崇。力卞其不可。余曰此論不出則固善。今旣出。早晩必行而後已也。張曰何爲其然。余曰第觀之。一日崔領相鳴吉謂余曰。聞張之言。公以爲追崇之議必行。然否。余曰然。崔殊不以爲然。金沙溪長生以知禮名。上疏請主上禰宣廟。鄭愚伏經世時爲副學。上箚曰若禰宣廟。則以定遠爲兄。大不合於禮。於是依宣廟朝德興君例。尊定遠爲大院君。王弟綾原君奉其祀。乙丑冬。崔相謂余曰博考古禮經。今不可不追崇。公言是也。丙寅春。崔相及李相聖求幷來訪余。崔相言追崇合於禮。李相言。於禮則悖。各執所見爭卞甚力。不久啓運宮昇遐。上命殮殯諸禮一依國喪。大臣率卿宰與三司爭之不能得。崔相爲副學。以意不同不預其論。辭遞。朝議以崔爲邪論。自是不擬淸選。金相瑬力主其論。辛未夏。崔相上箚請追崇享以別廟。蓋猶畏憚時議。不敢盡其說也。上下其議。領相吳允謙左相金瑬。率卿宰與三司爭之累日。余以公事往吳相家。吳相言及逆論。余曰追崇之必合於禮。則吾所不能知。漢唐以下帝王無不爲者。設令上爲之。不過爲觀過知仁之擧也。上必欲爲。而朝廷固爭之。則必示竄黜之威。是欲使上無知仁之過。而反陷上於大過失。未知如何。吳相曰聞公之言甚豁然也。頃之上命遞金相。而尹昉將爲相。壬申夏。崔相又上箚復申前請。大臣三司必廷爭之。上怒竄司諫權濤等于邊。大臣不敢復言。遂尊大院君爲元宗。享于別廟。遣洪靌李安訥等。請命于天朝。天朝禮部官曰怪汝國今日始有此請。卽從之。甲戌秋。崔相又上箚請祔太廟。時金相復爲相。又與尹昉及三司廷爭之。上怒。又遞金相。竄臺諫金光炫李尙質尹鳴殷于北塞。黜大司憲姜碩期大司諫趙廷虎等于門外。新大司諫兪伯曾素主追崇之議。李聖求爲大司憲。窺上意甚確。乃變其所見。排僚議。與大司諫同辭請祔太廟。遂從之。
辛未張維上箚。引禮經之言力卞追崇之非禮。鄭愚伏上箚。攻追崇之議。而以張箚爲得禮之正。一日余與崔張會于備局。張攻崔追崇之議爲邪論。崔勃然作色曰我之追崇之議出於誰乎。公言追崇合禮。勸我上箚。我從公言而爲之。以今思之。公欲以我探試朝議。而公乃反其說自付於朝議。余笑謂張曰此言如何。張面發赤曰我考禮未詳有此意。今乃悟其非云云。張之前後異論。亦如此。
辛未金瑬遞。而尹昉復相。人言尹公必不能崖異。以失上意故也。其後追崇之議復作。昉外隨朝論。陽爲廷爭。而內則陰主追崇。一日同卿宰在賓廳。謂余曰朝廷若力爭。則上必允從。余曰相位意如此。則宜苦口竭誠期於回天。誰能禁止。尹默然。諸宰皆微笑。李貴詆相臣不當廷爭。罵辱張維言辭甚悖。以張維主廷論也。李廷龜作色曰此非一家事也。朝廷公會安得慢無禮如此。昉怡然。余謂人曰吾今日始知尹相之量爲大也。羅萬甲曰此安得爲量。不過無廉恥而然也。余訪崔完城。尹之孫坵時爲獻納。與崔議定廷爭啓辭。余笑謂崔曰公旣主追崇。廷爭文字。則不可指揮也。坵色變而起。及金光炫姜碩期等被罪。張維謂余曰事至於此。可停廷論。不陷上於過擧。余曰到于今日。雖心主追崇者。不敢發之於口。以取迎合之譏。張深以余言爲然。而李聖求遽變其說。以順上旨。噫人心不同。如其面焉者。眞格言也。
啓運宮之喪。臺諫以爲不合殯於闕中。請出殯於仁慶宮別殿。上不從。及葬。將返魂於其別殿。臺諫又論其不可。謂返魂於舊宅。余謂司諫李潤雨獻納權濤曰。臺諫啓辭當以誠實。不可搖漾苟合時議。當初用臺諫啓辭。出殯於別殿。而仍爲返魂。公等以何辭爭之。豈有殯於可而不可返魂之理宜乎。上之不重臺論也。權李皆默然。李民宬謂余曰。無眞儒識禮者。朝論紛紛如此。若使栗谷西厓在今日。必不如此。余曰公見如此。而隨政院僚議請從臺論何也。李曰人微望輕。安敢立幟。以嬰其鋒云。光海追尊所生母。臺諫廷爭累日。李鰲城恒福。謂大司諫宋諄曰。宋仁宗追尊李宸妃。范仲淹等爲諫官不爭。今日臺諫賢于仲淹遠矣。蓋鰲城之意。子貴而欲尊父母。人情之所必至。非關於國家安危治亂。則不宜固爭相持。以失上下和氣而云也。
光海初。余掌湖西試。以臣視君如仇讎。爲論題。後掌湖南試。與參試官尹孝先。以四皓滅劉。爲義題。士子請改之。參試官金廷睦。以唐太宗命史直書爲題。鄭弘遠柳洸皆官于其道。而付會時論甚前日。考官畏之。故取解如摘頷下髭。至是皆飮墨大憤怨。言于爾瞻曰四皓滅劉者。譏萊庵戊申疏。命史直書者。指臨海之獄而言也。爾瞻時爲大司憲。與司諫李惺議。合啓論余罪。且曰當逆珒變生之初。有三司告變之說。請拿鞫。余繫獄四閱月。竄鍾城。廷睦竄會寧。孝先以告珒元勳免。余竄路逢李敬倬。李曰吾曾以直書玄武門事。取解元。金尙容亦以臣視君如仇讎。試士于嶺南。豈料以此得重罪乎。世路之難乘。一至於此。昔蘇東坡以詩案得罪。然猶有意譏刺。余則無秋毫別意思。而萬死幸一生。噫小人之羅織陷人如此。末世行身亦難矣。 萊庵鄭仁弘之號也
萬曆戊戌余在堤川。家前田麥穗三岐者六本。四岐者四本。五岐者三本。兩岐者甚多。是年秋。平秀吉死。倭賊皆退歸。城中再安。雖作瑞麥頌可也。天啓壬戌余謫在寧海。有雀生鸇。邑人曰數年前英陽縣曾有此異。今又有之。明年光海見廢。宋偃之亡。信有驗矣。萬曆戊午秋。西北有白氣犯旄頭經天。明年天朝提督劉綎杜松等。與虜戰皆敗沒。我將姜弘立金景瑞等戰敗。亦爲虜所擄。天啓甲子秋。長湍以西至平山大雨雹。小者如鵝卵。大者如鉢。或有氷片。牛馬爲擊觸者多死。丙寅昌城雨雹如人面。鼻眼皆具。丁卯虜兵陷義州。長駈至平山。大駕播越江華。有城下之盟。國勢遂不振。崇禎乙亥丙子年間。變異尤多。旄頭星落于關西。化爲石大如狗頭。金化雨雹如人面。鳥雀多被傷死。雷震仁政殿仁慶宮別殿。及忠勳府。人多震死。川渠水溢人家多漂沒。蛙多相戰殺死。死蛙成邱。嶺南冬雷震木。火經日不滅。是年臘月虜主東侵。竟致主上屈膝東宮出質。日以危急。悠悠蒼天。心之憂矣。其誰知之。
丁丑平安監司洪命耇。兵使柳琳領兵勤王。至金化遇虜兵。命耇戰敗死。柳琳兵殊死戰。殺虜兵甚衆。日夕虜兵敗退。戰場正當人面雹之地。亦異也。
人之死生由於命。有莫之爲而爲者。李參判敏求。以都元帥從事在關西。眄定州妓甚昵。巡列邑將閱武于兵營。與妓約以某日會于兵營。行到龜城。妓徑至嘉山報至。李不勝情。更取嘉山路。行未五里。适反。遣突騎劫龜城。府使韓明璉。以反殺金吾郞宣傳官之拿明璉。使李若取直路。或留食頃。必爲适所殺也。文晦之上變也。丁監司好善爲安邊府使。名出告書。被拿行至金化。金吾郞卒患急病留半日。故未及至。而适反書至。被逮而繫獄者。皆被亂斬。一無免者。翌日丁至下獄。适兵逼京城。上出幸公山。繫獄者。皆見誅。而丁弟好恕以定州牧使。斬适使起兵勤王。以此丁獨蒙赦。此可以智謀救之耶。信乎死生有命也。許筠草堂曄之子也。文章獨步一時。而輕薄無行。見棄於士論。沈滯下僚。光海政亂時。附會爾瞻。蟣虱宮禁。驟躋參贊。遂生不饜之心。戊午年間虜警初作。天下兵動。我國逼近建州。人心洶懼。筠詐作告急邊書。又作匿名書。言某地有逆賊某日當發。恐動城中。每夜使人登山呼曰。城中人能出避。則可免池魚之殃。人心驚懼莫保朝夕。都下人戶十空八九。使其黨河仁俊曉見持平韓明勗曰匿名書粘崇禮門。必有凶賊俟隙者。天尙未明難見文字之時。明勗心甚疑之。俟天明詣闕。到崇禮門見壁書。則果是仁俊所言者。乃請鞫仁俊。仁俊與其黨玄應旻一一引服。筠及黨與皆就獄。李爾瞻恐鞫筠則辭連於渠。以爲仁俊等皆就服。筠更無可問之情。直請斬於市。金闓杖死。元悰李茳等遠竄。癸亥反正。悰茳等皆斬於市。
李爾瞻與朴承宗柳希奮爭權相軋。及南以恭被罪。分配海西。欲因此謀奪柳朴之權。使無賴人投書于海州牧使崔沂。言南以恭。與承宗希奮爾瞻蓄異謀。爾瞻自書其名者。渠與以恭同事。光海之所不信。而欲罔人以書不出於渠也。沂以誣告杖殺其人。爾瞻大怒。遣宣傳官兪世曾。托以烽燧摘奸。密偵其獄事形止。監司尹調元厚賂世曾。而知之大懼。咎沂徑殺告變人黜之。爾瞻使臺諫請鞫沂。沂死于杖下。爾瞻論以逆賊追刑孥戮。人皆憤惋。調元亦竄于邊。癸亥反正。雪沂冤贈其爵。
光海以詔使將至國用蕩竭。許竄謫人納銀自贖。而令該司列名取旨。示將有取舍也。於是竄謫者。攀緣宮禁以圖之。申領相欽。徐判書渻。朴三宰東亮。韓西平浚謙。皆連姻王室。故各行累百金得釋。余意爲若値明時。四公雖有重望。必爲士論見賤。及反正。申乃時人領袖。莫敢雌黃。首秉東銓。不久入相。亦可以觀世變也。贖金令下。李公命俊欲貿銀兩曰若令贖。則倉卒難辦。余曰該曹列名取旨。不圖者必不預。公勿過憂。李殆不以爲然。旨下然後乃服余之先見也。
光海時。沈相悅爲咸鏡監司。作銀器皆刻己名。納于宮中。蓋欲光海常目在之而不忘也。光海見廢。賄賂銀兩之在宮中者。上命籍下于戶曹以補國用。沈之銀器亦在其中。大爲士論唾鄙。而以其本時人。故猶不見棄。丁丑變後崔鳴吉當國。喜其附會己意。排群議卜相。遂躋右揆。當此國家危急。雖得伊呂之佐。猶懼不濟。用人如此。安敢有中興之望。余爲崔相恨之。其時余適承召上京。謂崔曰聞公有爰立沈公之意。然否。崔曰領相有此意未知如何。領相則李弘胄也。余曰公不聞銀器之刻名事否。古今寧有如此人作相。而可濟時艱乎。崔曰然。未幾領相病卒。余下鄕聞之。則沈竟作相爾。
劉興治旣死。餘黨投虜。虜兵渡江充斥於郭山以西。監司閔聖徽在劍山山城。報至。朝廷震駭。遣鄭忠信禦之。召備局諸宰議。諸宰請以撥書喩聖徽出避。忠信曰不可。聖徽若棄城而出。城中軍兵必號哭挽留。聽聞不美。余曰虜兵必劫島衆。而來於我。似無相害。聖徽必已出城。若不然。劍山在賊兵中。撥書何由得入。聖徽亦何由得出。無益于事。而只使軍兵怨朝廷。上從之。翌日西報至。則聖徽已出從龜城路以還。忠信未及至。而虜兵已撤還矣。明年虜遣其大將所道里。要歲幣。召備局諸宰議之。余曰自古與虜和。無無歲幣之時。臣嘗與鳴吉等言之。今果有此請。上曰勿輕爲如此言。蓋上意爲虜不知有歲幣。恐其聞之也。所道里留十餘日竟不許。遣申得淵報之。所道里言語怏怏而去。余與備局諸宰議不同。每上箚言不可不許。獨摠戎使李曙是余言。一日曙謂余曰具仁垕燕見。則上有摠戎兵判皆生㥘之敎。余曰我實生㥘。上敎宜矣。余西巡至黃州。申得淵至潯陽。爲虜所黜而還。余至安州。朝廷又遣金大乾于灣上。上疏大意以爲强弱不同。歲幣漢唐以下所不免。不可失其歡意。天下事皆可悔。獨此事不可悔。鄭忠信請同疏。余許之。從事具鳳瑞曰朝廷議已定。幸更思之。余笑曰卜者言。余今年有竄謫之禍。此疏上。則三司必請罪。卜者之言今必驗矣。且曰執意如此。非他人所可預也。余還平壤。閔聖徽曰虜慾無厭。若不決戰則難以應之。道內人心皆欲死戰。何爲此疏。余曰道內人心。則吾不及知。虜若動兵。則必不下三四萬。我國安得猝辦三萬兵以應之乎。設使兵數相當。皆步而負糗粮兵器。不曉坐作。虜以健騎習戰者蹂之。雖使韓信白起爲將。不可敵也。疏上。上敎備局曰金鄭等。畏其喪元。擅留使臣。以沮人心。欲斬首警衆。備局請拿鞫。余與鄭皆就獄讞上。上命減死定配。余配寧越。鄭配唐津。臺諫論之。鄭改配長淵。上將親征欲駐蹕松京。金大乾渡江不得入虜境而還。上始懼許歲幣。蓋上意外示奮。欲使操縱在我。是聖慮千慮之一失。而朝臣皆以爲虜不足畏。明年余蒙放還朝。自是絶口不言兵事。丙子春。虜將稱帝。遣其將龍骨大來報。上自宰臣下至太學儒生請斬之。李溟勸李曙示之以兵威。龍骨大驚跳去。不敢入城府野家。而平安監司洪命耇請斬龍胡。縱使朝廷許之。龍胡必已渡江。勢不相及。而爲此空言。以取重於時議。一時人心槪如此。虜稱帝。劫我使臣羅德憲李廓等。使參其賀班。德憲等不從。困辱百端。駈迫而黜送之。朝論崢嶸。金德諴至請駐蹕平壤。十月虜遣馬夫大至灣上。義州府尹林慶業往見。馬胡曰我以十二月二十六日擧兵東來。爾國若遣使更謀和好。則雖兵發在道。當罷歸。且我國稱帝。中朝之所不能禁。汝國欲禁之何也。上欲遣朴報之。三司爭論。十二月朴行至黃州。虜兵已渡江長駈。朴蒼黃入正方山城。以都元帥金自點在正方也。十三日報至。中外大震。十四日上發向江都。未及出城。虜兵已至沙峴。蒼黃改路馳入南漢山城。十五日虜兵圍之。攻城甚急。二十一日虜主渡龍灣。二十八日至南漢城下。忠淸監司鄭世規領兵勤王。至險川與虜戰大敗。被創墮在積屍中。虜兵退。麾下人負之而出。得不死。丁丑正月十三日。慶尙左兵使許完。右兵使閔泳。忠淸兵使李義培等。以三萬餘兵戰于雙嶺。皆敗沒。義培走死。全羅監司金俊龍領萬兵。與虜終日大戰于光敎山。殺虜甚多。虜大將白羊會亦中丸死。虜兵退。而俊龍兵亦潰。金自點自正方以數千兵。轉戰至龍津。沈器遠爲下四道都元帥。領江原監司趙廷虎亦在龍津。咸鏡監司閔聖徽。北兵使李沆。南兵使徐祐申等。領兵至。皆以衆寡不敵不敢戰。二十八日。虜以江都不守書來。書示百官家屬皆在江都。爲虜得。喪膽無固守意。上遂以晦日出城。屈膝於虜陣。虜兵捲還。世子鳳林出質於瀋陽。宰臣南以雄朴朴潢。宮僚李命雄李時楷閔應協李襘鄭▣等。從行。
虜報初至。上與大臣議定幸江華。先送嬪宮及鳳林麟坪兩王子。大臣尹昉。禮判趙翼奉廟社而行。老病宰臣金尙容等。皆令先行。時上下皆以江都爲萬安之固。故金慶徵以領相瑬之子。爲檢察使。李敏求以兵判聖求之弟。爲副使。洪命一以左相瑞鳳之子。爲從事。督諸軍守之。翌日大駕發行出崇禮門。虜將龍骨大馬夫大等已至沙峴。大駕蒼黃還入城。從水口門而出。入南漢山城。向江都則虜兵必要路襲擊故也。尹昉金慶徵等。在道聞之人情惶懼。趙翼託稱尋見其父遁去。嬪宮一行至江華海邊。訛言虜兵且至。金慶徵將其家屬卜駄先渡。兩大君亦蒼黃得船以渡。嬪宮大哭。陪行承旨韓興一。與副使李敏求艱得一船。爲行計而夜已深。且審虜之虛驚姑止。以待明日。尹昉奉廟社主宿通津。故縣監蔡忠元不至。嬪宮闕夕供。興一得粮米于人。煮粥以進。慶徵安頓其家屬於江華城內。聞嬪宮尙未渡。日晩始乘船而來。興一奉嬪宮渡津至江華。留守張紳素以苟悅民心要名譽。以天塹爲無憂。民兵皆令在家待令。軍器亦不分給。有以爲言者。則皆以爲恇㥘不聽。虜兵將至。亦不遣兵邀於路。聞虜兵至津邊。慶徵張紳等始至甲串。軍兵未及。則急召砲手。分給丸藥未畢。虜兵見無備。以數船先渡。慶徵張紳乘船而走。忠淸水使姜晉昕等諸將。亦望風而走。虜兵遂入江華。金尙容與洪命亨李時稷等。登門樓自焚死。虜將劫兩大君。及尹昉韓興一。禮曹參判呂爾徵等。令作狀啓。遣中官羅業詣南漢山城告之。城中士大夫家屬皆在江都。人心震駭無守城意。遂致大駕出城詣虜陣。丙子龍胡之跳去也。以虜兵必至。遣金元帥自點禦之。金陛辭路訪余曰自上問禦戎策。余對以虜來以四五月。則臣當決勝。虜來以七八月後。則勝負未可預定。蓋金之意四五月。則師初出氣銳。七八月。則師久氣衰而言也。金旣去。余謂親友曰觀彼我兵勢。則毋論遲速。有必敗之形。而金之言無異趙括。大可憂也。四月余以病廢。退歸忠州。丁丑春南漢圍解。余上疏言將臣失策之罪。上答曰頃在山城。思卿甚頻。蓋思余癸酉之疏也。閔公聖徽貽書於余曰癸酉公之陳疏也。吾則主戰。其後邊事漸至難處。然後始以公言爲是。至于今日。始知公之高見非吾輩庸人所可及。一時議論蓋如此。
余判兵曹時。關西陳姓人自稱陳理子孫。願蠲軍役。事下兵曹。余謂同僚曰陳理無子。此必詐也。同僚皆曰陳理之無子。吾亦所未聞。余不敢獨執所聞。遂以高皇帝送陳理明昇等東來時。不做兵不做民之詔。措辭以啓命蠲其役。余病退江村。偶閱慵齋叢話。有陳理無子。余與其外孫曺公遊之語。余乃上箚曰成俔立朝。去陳理之事僅五六十年。且與其外孫遊。其無子宜得其詳。請査關西陳姓人。以正詐欺朝廷之罪。上從之。兵判沈器遠曰李睟光牧洪州。時有陳理子孫持高帝皇勅。免其軍役載於芝峰類說。請勿査。上不聽。李汝固與余語及是事。汝固曰芝峰所見皇勅。書天鳳某年。吳王令志子孫。不做民不做官等款。且有御寶御押可信。余曰誅陳友諒時。元順帝尙在燕都。高麗臣服猶古。雖欲送陳理于高麗。不可得也。洪武五年。中書省咨送陳友諒明昇家口。令不做軍不做民。閑住過活。天下大一統已五年。安有書林兒僭元吳王令志詔勅。亦安有着押之理。汝固始釋然。芝峰汝固俱以文章博雅名世。而惘昧事實如此。如沈判之取證類說。無足怪也。
尹月汀根壽作籠巖先生傳。略曰籠岩先生姓金氏諱澍。高麗恭讓王朝以禮儀判書。如皇朝賀節。還到鴨綠江聞我朝開國。書于夫人曰忠臣不事二君。吾渡江卽無所容其身。以到江上還向中朝之日。爲我忌日。葬後勿用諸文墓碣。其子孫相傳。十二月二十二日爲先生諱日。卽江上發書之日也。萬曆丁酉秋。冊封日本之行。有幕下官許惟誠者到東萊。自稱先生之裔。因言先生家荊楚生三女。許則其女婿之一也。欲見新谷之金。人只知善山爲金氏鄕貫。而莫曉新谷爲先生里。不能對。後孫竟不得與惟誠相見。其家令之出於倉卒之際者。眷眷以無聞於世爲言。以此人無有知之者。遂寥寥至今。可慨已。抑應箕聞人。而畧不爲祖先爲闡揚計。亦少推矣。今採先生七世孫有曄之言。撰次其遺事。吳府尹澐東史撰要。撰金澍傳大略相同。余竊訝焉。我太祖壬申七月十六日開國。遣韓尙質如京師。其奏文曰陪臣趙琳賫到禮部咨。節該欽奉聖旨國更何號。星馳來報云云。則韓尙質未到京師之前。中國已知我邦開國。而尙質之還亦在是年。澍也旣自中國還。則安有歲暮至江上。始聞我朝開國之理。此是亘宇宙大節。亦安有數百年沒沒無知者。我國雖文獻不足徵。必不如此。且文戴諸公。雖遵遺命不用誌碣。此非秘而不宣之事。必與相知言及。豈待有曄而後人始知之哉。日本冊封在乙未冬。正使李宗城到東萊倭陣。丙申春逃還。副使楊邦亨陞爲正使。秀吉不受冊封。邦亨丙申冬還歸。而有曄以爲丁酉秋。十餘年之事胡亂失實如此。數百年前事焉有獨得其實。未知有曄是何如者。獨月汀諸公爲其所欺爾。
沈光世以幕僚從李适。爲适所欺甚。相得旣歸。李延平問關西事。沈曰适言明璉有異志。李曰吾聞适有異志。沈飛報於适。适以病旣辭。而盛誇其脩整器械訓諫士卒。虜來可禦之狀。而末曰身病如此。恐不能終始盡瘁以報聖恩。已露其不臣之心。朝廷不覺。可歎嘅也。及适反。光世在嶺南聞之。恐朝廷論其馳報之罪。疽發背道死。可爲不知人者之戒。
李洁自海南上來。路訪鄭汝立。汝立露其反謀。洁大驚起。疾驅向京至公州車峴。見持兵者要於路。知汝立欲殺之大懼。適得武士同行入京。時其兄潑亦將上來。故欲待其來相議上變。夜不能寢纔二日。而趙俅上變。汝立聞之而逃。自剄死。獄辭蔓延潑洁皆杖死。
光海丁巳。尹善道上疏論爾瞻之罪。幷論承宗希奮以與國同休戚之臣。知爾瞻之奸而不言之罪。善道連姻柳家受其旨而陳疏。故爲此言以掩其跡。爾瞻之黨論其妄言。竄之慶源。時余謫在涪溪。與尹有族分。相與往來。尹以直言被罪。有自高之意。余曰公疏捨諸大臣。獨論柳朴之不言。亦衰世之言也。尹憮然。李克健亦以疏論爾瞻。竄鍾城。爲人愚猾自誇。與希奮相議陳疏。蓋希奮權重一時。欲令邊將守令畏其勢。而厚待之也。余偶問公與尹相知乎。李曰年歲差池。初不相識。近因相議陳疏。頻會於柳家甚熟。余與尹夜話及李之言。尹色變慙不能答。反正初。儒生之以疏竄謫者。皆超拜六品職。任持平叔英曰尹疏受旨於希奮。有悌男謀逆國人共知之語。免罪幸矣。不可褒擢。淸議是之。尹只拜金吾郞。
萬曆庚戌。余以書狀赴京師。聞見事件論遼東入貢之路曰。西北逼虜境。或僅五六里。東抵海岸亦如之。不幸而有拔扈之虜。此路必先壅而不通。我國朝天不可專忘水路。辛酉虜胡陷遼東據之。赴京使皆取海路相繼渰死。時余謫在寧海。任疎庵叔英寄余詩曰。如何忘海路。關外虜頻圍。此語從誰出。多君早見機。蓋疎庵辛酉登第仕槐院。見余聞見事件於院中文書而記之也。余步其韵答之曰。海上舟如馬。燕雲報合圍。淸詩如喚寐。億中愧知機。自辛酉至今十餘年。而朝京海路亦絶不通。慨不得起疎庵於九原。而握手一長痛也。
癸亥八月。余以修撰拜義州府尹。言於備局諸宰曰。我久竄邊塞。備知邊上事情。邊城門外卽敵境。無斥候烽火可報賊來。敵以晝至。則城門不及閉。夜至則城上一矢不及發也。激勵士卒登埤警夜。乃聞變之事若常責於士卒。則非惟人所不堪。亦不能矣。使我守安州。則聞敵到義州之報。而爲城守之備。足以拒敵。朝廷之命我欲守之也。我知其不可守而强赴。使國家敗亡之禍出於我。則是負朝廷也。吳相允謙深以余言爲然。余又曰韓明璉以巡邊使守義州。余竄北塞也。明璉爲虞候。觀其用心行事一悖猾也。若被圍而事急。則必殺守將以投敵。決難同守。金相瑬曰朝廷方倚明璉爲干城。而公言如此何也。余曰朝廷之知明璉。必不如我之詳也。會崔相上疏曰金某得罪廢朝。北徙南遷過一紀。還朝纔數月。不合又出之邊塞。且金雖有才器。自是白面書生。邊關非歷試之所。上議于備局諸宰。諸宰啓以余與韓明璉。不可相容之意。上命遞之。李參判敏求來見曰公力辭義州何也。余告之如諸宰言者。李曰若許實必能守之。其意以余爲㥘。余笑曰人之才器不同。余亦安敢以許爲不能守也。甲子李适反。明璉斬金吾郞宣傳官。與适同反。丁卯虜兵夜到義州。由水門而入。殺登埤士卒。然後城中始覺。城遂陷。
平壤舊有箕子殿。監司差出參奉以守之。所謂殿參奉也。光海癸丑。鄭賜湖爲監司時。改號箕子殿爲崇仁殿。以關西人鮮于姓者。爲箕子後。拜崇仁監奉其祀。秩正六品。蓋倣麻田崇義監例也。以鮮于爲箕子後者。取蘇東坡贈鮮于侁詩。及趙孟頫題鮮于樞書序。稱其爲箕子後之語。蓋亦微矣。丁卯之亂崇仁監鮮于洽。降于虜。朝廷論其罪削奪其職。命該道更擇鮮于姓者爲監。余爲監司以泰川人鮮于慶。奏聞于朝廷。朝廷命詳査其嫡支。余復奏曰遙遙華胄孰能卞其源委。只以姓鮮于。故膺朝旨耳。遂爲監。以箕子殿爲崇仁殿。以鮮于姓爲監者。皆是光海亂政。相率而爲僞者也。反正之初。卽當革罷。仍復祖宗之舊典。而至今仍循。良可歎也。
奇相自獻。稱奇氏爲箕子之後。未知何據。資治通鑑元魏氏長風戍主奇伯顯註云。奇伯之後不干於箕子。奇相設系出奇伯。其稱爲箕子後。則甚於崇韜之拜子儀墓也。余祖母奇氏。貞武公虔之玄孫。余與奇相爲八寸親。貞武公卽奇顯之後。余嘗與奇相語問其世系。奇囁嚅曰奇壽全以上失其世。未知爲某人後。觀其色。以顯其先祖爲羞故也。箕子雖聖人。數千年之後惘昧無所據。而稱爲先祖。顯雖有醜行。世代可考。而諱其爲後。其處心如此。陷于甲子之禍亦必有以自取之者矣。
堯典四岳擧鯀。治洪水九載。績用不成。四岳擧舜。在堯在位之七十載也。舜典曰三十登庸三十在位。五十載陟方乃死。益稷曰禹曰洪水滔天。浩浩懷山襄陵。下民昏蟄。予乘四載隨山刊木。曁益奏庶鮮食。孟子曰舜使益掌火烈山澤而焚之。禽獸逃匿。禹疏九河。瀹濟漯而注諸海。益與禹同治水者也。舜登庸時使禹始生。而待其稍長使治水。至舜崩時。則禹年將八十也。益同禹治水。則年雖差少於禹。禹百年而崩。是時則益年應過九十矣。堯在位百年。而享年一百十歲。則以十歲卽位也。七十載倦勤。使舜行天子事。是時堯年八十也。以堯之聰明。八十而倦勤。則益之聰明必不過於堯。禹雖聖。亦安知益之死。必在於己後。而薦之於天乎。禹薦益之事不見於書傳。而只見於孟子者何也。孟子曰盡信於書。則不如無書眞格言也。
孟子象曰謨蓋都君咸我績。牛羊父母倉廩父母。干戈朕琴朕弤朕。二嫂使治朕편001 象往入舜宮。噫象常欲殺舜。謨蓋之事。則或有之。是時堯在帝位。使舜見殺於象。則堯必誅象。倉廩安得以與瞽瞍。二嫂安得以治其棲哉。此是齊東野人之語。而孟子不辨。若實有是事者然。公都子曰外人皆稱夫子好辯敢問何也。嗚呼宜乎外人之有此言也。
成王之立也。年十二歲。以其幼。故周公攝其政矣。漢武將立昭帝。畫周公負成王朝諸侯。以賜霍光。蓋勉霍光以周公之事。非必有是事也。抑古語相傳有是說。而爲之耶。十二歲之君安能背負。而見諸侯之理。雖欲背負。亦不可得也。孟子曰盡信書。則不如無書。吾於此亦云。
昌黎張中丞傳後敍云。閱家中舊書。得李翰所爲張巡傳。翰以文章自名。爲此傳頗詳密。尙恨有闕者。不爲許遠立傳。又不載南霽雲事首尾。遂敍許遠南霽雲事甚詳。而無一言及雷萬春者。旣以不載雷萬春事首尾爲有闕。則傳後書不應復沒沒如此也。余嘗疑南霽雲三字傳寫者。誤作雷萬春。每與士友語次及之。或言八大家文抄註。亦有此論。八大家文抄註余未及見。不知果然否。
李爾瞻秉權。欲廣樹私黨。每科擧時預出題。使其黨製之。而出其題於試圍。宿構者旣多。未免漏洩。戊午增廣初試。諸生語曰今日必出某題而已果然。諸生請改之。如是者三。諸生大鬨曰。非宿構者不得參。遂潰圍而出。試官大恐。哀乞於諸生曰。願更入製之。當以至公行之。指日爲誓。諸生皆不肯。而金判書起宗。柳參議大華等數十人從之。柳爲魁。而金亦高中。物議譁然。爾瞻之權方盛。故無敢言者。殿試則金爲壯元柳次之。淸議多訾之。癸亥反正。不許兩人淸路。張晩之平李适也。金從征有功。朝論棄瑕用之。歷正言持平掌令。錄功陛堂上。以廉勤幹才名譽甚著。登第十二年。超拜戶曹判書。柳終不得躋淸顯。
李東皐浚慶爲領相。當都堂弘文錄圈點時。以筆抹其子德悅名曰吾子之不合玉堂。吾知之詳矣。人皆服其無私。得大臣體。其後柳永慶爲領相。當都堂弘文錄圈點時。亦抹去其子之名。時撲已入東銓爲佐郞。公論以爲銓郞淸顯。優於玉堂而權重。旣許其入銓。而獨抹於堂錄。小人厭然情狀。敗露無餘。雖欲效嚬東皐。人誰許之。近來堂錄時相臣子孫。則東西壁壓於相臣不敢不圈。故皆以准點得選。而私意大行。朝廷益殽。以今觀之。永慶之抹去名。亦差强人意也。
光海卽位初。吏曹判書成泳以永慶之黨。彈罷領相李完平。以李光庭金睟李廷龜擬薦。光海命加望。以申欽薦之。又命加望。光海意在鄭昌衍。蓋以昌衍王妃之表叔也。完平不得已以金信元韓孝純及昌衍薦之。昌衍遂爲吏判。物議譁然。而外戚權始盛。無敢言者。時鄭愚伏爲大邱府使。應求言旨上疏。極言初政之失。至曰其人不預焉。則命使加望。其人又不預焉。則又命加望。必得其人之姓名。然後始肯落筆焉。殿下之參入己意。任情低仰至此而甚矣。又言某人以定策自居。而今其子爲某官。某人以調護自任。而今其身爲某官。又論年來除拜不公之弊。自邊將守令皆有定價。至先王末年。而極矣之語。光海怒下敎曰。經世詆訾先王。吾欲罪之。恐妨言路置之。其疏語觸臺諫。故臺諫皆引避依違含糊。而正言鄭弘翼獨以加薦。相臣之失職。辭意極峻。是日適有政。移拜脩撰。恐其論之也。任兗窺見上意。欲迎合時好。其避辭至有人主用人立賢無方。經世徒循題目之好。以爲擊去之計。光海因此大怒。下議于大臣累百言曰經世以先王經幄之臣。暴揚先王之過。吾欲逬諸四裔。不與同中國。大臣皆以以言獲罪爲未安。而尹承勳以爲前後異敎。恐有傷於大哉之王言。故愚伏只坐罷。洪判書可臣退在田野。上疏論兗迎合妬賢之罪。光海答曰卿以勳舊重臣。未免偏黨。信乎去河北賊易也。兗尤揚揚自得。其避辭至有經世倡之於前。弘翼和之於後。可臣按劍而起等語。遂拜銓郞。人皆唾鄙。是冬掌令李綏祿駁罷之。疏中調護自任。指奇自獻。定策自居。指李山海。而李爾瞻輩。以調護爲鄭仁弘。攻愚伏尤力。
壬子金直哉之獄。權聰上變言。仁嬪在宣廟末年謀危東宮。定遠君義昌君兄弟。詣闕門外陳疏待命。聰以誣告杖死。蓋仁嬪寵冠後宮。光海在東宮寵衰不能無冤。故聰窺其意。而作此事也。蘇鳴國者。益山人。粗知文字。輕薄陰險無與爲比。交結時輩。隨其所惡。而上疏鼓其勢。人畏之如鬼蜮。乙卯上疏曰。申景禧言塞門宮有王氣。塞門洞卽定遠君之家。而申景禧定遠夫人表從故也。景禧及定遠君第二子綾昌君下獄。辭連鄭愚伏李溟。及申景禧黨楊時晉尹趌等皆被逮。景禧欲死中求生。獄中上變言尹珙尹璛。與仁城君有陰謀。仁城王子中有令望。光海甚忌。而仁城夫人乃珙璛從妹也。珙璛就鞫卒無事實。免死分配。景禧尹趌死于杖下。時晉杖流道死。綾昌竄海島竟不得其死。愚伏李溟皆見釋。
尹珙字元璧。相國承勳之子也。事父母孝。與朋友信。謫居通川。山火夜延入室。其慈親病不能出。元璧與其妹李判書敬輿妻。共攀母衣皆燒死。聞之者。知與不知間皆流涕。反正初旌其閭。
乙丑宣川地黍莖。有董王春三字。色紅如染朱。張晩巡到關西。採其黍以來。人見者皆異之。莫知其爲祥災也。丁卯正月虜騎渡江。陷義州安州。長驅至平山。殺掠不可勝紀。兩西鞠爲茂草。董字千里草也。王春正月也。其災始驗。丁丑南漢出城亦在正月。而國勢日漸危急。其災益驗。光海甚惡塞門洞宮有王氣之說。撤其家作新闕。甚宏麗。號曰慶德宮以壓之。主上以定遠嫡嗣撥亂反正。追崇定遠爲元宗。其有王氣之說眞奇讖也。
李守白奇益獻斬李适明璉來降。特免其死。而分配之。後數年因大赦任便居住。李重老之子文雄。朴榮臣之子之屛等。其父爲适所殺。以守白适之黨。稱以復讎。白晝斬守白於京師路上。上疏請伏殺人之罪。色承旨鄭百昌捧其疏。而啓之。余時以殿試試官在闕中。謂同列曰。文雄等雖云復讎。擅殺人命。罪當死。此而不死。則自此稱以復讎擅殺人者相繼矣。上命禁府鞫之讞上。上命議于大臣。大臣金瑬等。極稱其孝請赦之。上以爲文雄等。知其必死而殺之則爲孝。今料朝議必如此而殺之。不可不罪。然上亦以重老乃靖社功臣。終原其死。丙子之亂。都慶兪以沈演從事。督戰于雙嶺。斬將官朴忠謙。亂旣定。忠謙之子。要慶兪於龍仁路上殺之。朝廷命囚鞫忠謙之子。多有救之者。終不能正其罪。
權承旨濤。心是追崇之論。而恐爲一時淸議所詆。壬申廷爭。故峻其啓辭。至於竄謫。李相聖求素斥追崇之論。而恐忤上意。甲戌祔廟遽變其說。而竟取大拜。未知孰爲得失。
我國雖號博雅者。於物名多誤。以羖爲羔此最甚者也。論語緇衣羔裘註。羔黑羊皮。衣以裼裘。欲其相稱也。詩傳羔裘如濡。羔裘逍遙。羖皮豈可以爲裘耶。賓之初筵曰由醉之言俾出童羖。註曰童羖無角之羖。羊必無之物。蓋羔雌則無角。羖雌雄皆有角。羔之非羖如此其分明。而以羔爲羖何也。以羖爲羔。則以羔爲何物耶。
金相應南子命龍。洪判書可臣之子粢。皆娶李洁女。己丑難作洁栲死。洪判書上書請離婚。命龍亦上書請離婚。畏其禍及也。時金相赴京未還。命龍之表叔李山海。敎命龍爲之。故士論不咎金相。而多爲洪判書惜之。金判書尙憲子光燦。娶金琜女。延興府院君金悌男之子也。癸丑之亂府院賜死。琜栲死。尙憲上書請離婚。時禮判李爾瞻以爲法不當離婚。光海命從自願離之。權判書昐孫躋。娶元宗慶女。李适之亂宗慶以其黨被誅。昐上書請離婚。時禮判李廷龜褒奬其忠。請從之。亦可以觀世變矣。
壬辰之亂。張鴻稱其妻罵賊而死。朝廷請旌其門。丙申歲。黃判書愼奉使日本而還。倭刷送被虜男婦。鴻妻在其中。皆駭憤。而朝廷不抵鴻欺罔之罪。可謂失刑矣。丙子之亂。李參判敏求妻尹暉女也。在江都爲胡所虜而去。携其孫兒及婢以從。路由京中。逢敏求兄聖求於路中。聊無愧恧之容。聞者惡之。其夏聖求奉使瀋陽而還。敏求稱其兄逢其婢及孫兒於瀋陽。婢言其主母到慈山罵賊而死。渠得棺以殮權厝某處。依婢言尋問於其處居人。則言果有棺殮之屍。賊後到者。發其棺取其衣服。棄其屍而去。依其言尋而得之。其婿申昇。護其喪返葬於原州。又贖其孫以還。聞者皆疑焉。設使李妻罵賊而死。其婢在虜去中。安得棺而殮之。設使棺殮。又爲破棺棄屍。夏日霾雨。則屍必腐朽。安得辨其爲妻也。後聞李起築之言曰。吾以別將護東宮之行。渡鴨綠江。目見李妻隨賊入瀋之狀。而其家言其死於慈山。至於還葬。以此推之。萬事眞僞皆不可信。此與張妻前後一轍耳。
袁崇煥旣誅毛文龍。虜使滿月介等。到義州。辟左右密語府尹李時英曰欲殺毛文龍密語於袁崇煥。費盡心機。今日始得殺之幸也。我親公故言之。願勿泄於人。聞者皆笑之。其冬虜主大擧入寇。陷密雲殺摠兵趙率敎等。進圍燕京累月。袁崇煥領祖大壽等入援。文龍之黨。讒崇煥以受虜旨殺文龍。帝命誅崇煥。大壽憤朝廷殺崇煥。引兵退歸。虜兵陷薊州及永平府。劉興祚皆戰死。御史白養粹降于虜。虜主命其將阿彌羅古。屯永平府。庚午春引還瀋陽。遣朴仲男等告捷于我國。閣老孫承宗由海路至山海關。更撽召祖大壽等諸道兵。復永平府。阿彌羅古大敗。殺白養粹遁還瀋陽。丙子夏。虜兵又從居庸關入寇。進圍燕京。暴辱陵寢。時監軍黃孫茂到我國。聞報狼狽而去。十月虜兵退還瀋陽。
李适之反入京城也。李時言之子煜。往迎之。适敗于鞍峴。煜爲人執納軍前斬之。人言煜弟煥。同煜敗而逃走得免。煥國舅韓西平浚謙之庶女壻也。余言于元帥諸公曰煥倚勢得免。則王法廢。而國不可爲國也。皆曰然。將欲跟捕。大駕還都之日。余宿旅舍。鷄初鳴。韓公會一西平子也。來蹴余起。因致西平之語曰。煥與金矱一家。避兵於水原地。而公誤聞煥投賊。將欲罪之。公若不信吾言。宜問于矱。吾何敢以一庶女縱國賊。余問于矱。則曰煥與吾一家避兵於水原地村舍。村人皆知之。余不復疑。煥得免後數年病死。丁丑虜退。余承召入京。與韓參判亨吉。語及亂離事曰。此時人言虛實難准。韓曰然。适亂李煥實從适。而公輕信韓金諸公之言。煥得免逋誅。余大驚問于韓承旨興一。 西平從子 興一微笑曰韓參判之言是也。噫西平自少負重望。且爲國舅。當與國同存亡。而乃爲一庶女。作如此擧措。國勢之不振宜矣。其時人言武人前郡守某附适。某乃龜川君睟之庶妹夫也。余問于龜川君曰人言某從賊。從賊而幸免。則國法將廢。公以宗宰重臣。豈可爲一妹縱國賊耶。願聞公言處之。龜川色變良久。徐曰公以宗社之事問我。我安敢隱。某實從适。遂莅斬之。龜川君之滅私。其視西平。相去奚只千萬里也。
李适至猪灘。李重老朴榮臣李德符等。戰敗皆被殺。适凶勢尤張。張玉城。李判書召諸將計事。皆以爲憂。余曰适頷下有懸肉。此乃狼跋其胡之相終必狼狽就戮。玉城大喜曰适之頷肉。武班輩常以爲。燕頷虎頭封侯之相。今聞公言。果是狼胡進退必維谷。以余言勉勵諸將送之。諸將皆喜而去。
文晦李佑之告李适也。諸功臣方主告密。李延平崔完城等。皆以爲信。而獨金昇平以爲冤。屢爭於上前。延平怒曰金瑬必與同謀。故稱其冤。及适反報至。昇平大懼。請亟誅被逮人奇自獻柳公亮尹守謙李時言玄諿等。以絶相應內起之患。上從之。延平力爭被逮之人多是位高。必無盡與适同反之理。至於自獻。立節於大論被竄者。何可不爲辨而並戮之。上詢于大臣。昇平又入對更請。自獻等四十餘人皆被殺。延平曰自獻立節被混戮。顧以變生倉卒人情疑懼。故事出於不得已。非以爾預於兇謀。喩自獻。使知朝廷意而死。朝廷不能從。
金元亮自少好名。號有操行。有聲於朋儕間。以鄭愚伏爲嶺南儒宗。負笈遊其門。反正時預密謀。擢陞六品。余被赦還朝。見愚伏問曰元亮以儒生。策靖社功何也。愚伏曰與金自點李時白等相友善。故雖得聞其議。而無干預之事。及策靖社勳。元亮爲三等。憤其屈疏辭之。余與愚伏任茂叔會玉堂。余曰元亮自言不與謀。而策名三等。則憤其屈者何也。愚伏曰豈有此理。茂叔曰余與元亮甚親。一日元亮來言靖社之謀。余言食祿受國恩之人。爲宗社作此擧固是矣。爾是儒生。上有偏親。事若敗則禍及於親。於忠孝俱失也。元亮色變而去。元亮與适爲六寸親。适之預於靖社者。由元亮也。愚伏笑而猶有不信意。是冬文晦等。以适謀反告於諸功臣。相議上變。元亮請爲寧邊判官以譏察之。諸功臣大疑之不許。及适反報至。請鞫元亮竟斬之。人或言尹仁發之詐死投适。亦元亮爲之。其儕類如羅萬甲趙溭輩。至今皆稱其冤死。
我太祖以洪武壬申開國。傳至百三年弘治甲寅。燕山立。中宗以正德丙寅靖國。傳至百三年萬曆戊申光海立。燕山光海立皆被廢。我國氣運至百三年。則有興廢大數而致之歟。後來立朝者。宜記之。
孟子陳相曰從許子之道。則市價不貳國中無僞。雖使五尺之童適巿。莫之或欺。布帛長短同。則價相若。麻縷絲絮輕重同。則價相若。五穀多寡同。則價相若。屨大小同。則價相若。陳相之意。布與帛長短同。則同價。麻與絲輕重同。則同價。屨毋論革與絲。其大小同。則同價云。而孟子曰物之不齊物之情也。或相倍蓰或相十佰或相千萬。子比而同之。是亂天下也。巨屨小屨同價。人豈爲之哉。從許子之道。則相率。而爲僞者也。惡能治國家。孟子之答以屨之大小各異。而同價爲言。與陳相之言相戾。豈有誤字而然耶。讀者宜詳之。
癸亥反正。權縉以光海幸臣竄梁山。李适之變。統制使具仁垕。左兵使申景裕領兵赴亂。慮縉爲适應。密言于監司閔聖徽。使殺之。仁垕等皆靖社功臣。聖徽不敢違。遣淸道郡守鄭慶業斬縉。縉臨死曰必非朝命。我不合死。而事已至此。無可奈何。适旣誅。朝廷下聖徽鞫其矯殺宰臣之罪。功臣等。皆力救之。蓋聖徽深結于申景禛爲腹心。而受旨於景裕等故也。上亦以事雖妄作。心則爲國。只命削奪官爵。居數月咸鏡監司權盼見遞。功臣等。以爲非才如聖徽者。難以鎭北方。欲以代權盼。誦言于朝。申相欽曰國勢不固。將來之無亂不可知。北方是士大夫竄謫之地。不幸有亂。而聖徽爲監司。擅殺士大夫如縉。則國不可爲矣。功臣之議遂沮。縉登第急於進取。附會李山海等。取顯仕。見洪汝諄勢重於山海。遂附於汝諄。汝諄敗又附柳永慶。履歷淸班不盡其欲。則又與睦長欽等相結。自稱士類。光海時壬子獄起。以刑房承旨治獄。迎合主意遂得寵於光海。數歲超拜兵判。反正日大恐及禍。請斬參判朴鼎吉。爲謟[諂]附功臣之計。鼎吉雖罪當誅。人皆疾縉之反覆無狀。其見殺于聖徽。亦自取之也。
昌黎胡珦墓碑略曰其子某某。與公婿廣文博士吳郡張籍。以公之族出行治歷官壽年爲書。使人自京師南走八千里。至閩南西越之界上。請爲公銘刻之墓碑於潮州刺史韓愈。其敍事實曰珦爲尙書駕部郞中。數以事犯尙書李巽。巽時主鹽鐵事富驕恃勢。以語丞相。由是退公爲鳳翔小尹。巽死遷少大悝。元和十二年拜內中相。明年以病卒。余嘗歷考史書。則巽之卒在元和四年。張籍之目不視物。在元和長慶之交。巽未死之前。籍是無病之人。而昌黎代籍。與李淅東書。註以淅東爲巽。以此推之。則韓文註疏多誤。不可信也。
東陽尉申翊聖。象村申相欽之子也。能書善屬文。以文章自許。辛未年間。爲其父印布象村集。其東征錄有壬辰倭賊。從鳥竹兩嶺上來之語。其春城錄記國朝父子相繼爲議政者。而尹斗壽及其子昉預焉。余謂東陽曰壬辰倭賊從鳥嶺秋風嶺上來。嶺南竹嶺一路。則賊蹤終始不到。而錄云然。春城錄。則象村光海時謫居所錄。尹昉入相在反正後。而亦在其錄者何也。東陽色變而去。丙子年間又刊象村集以行。春城錄削尹昉之名。東征錄削賊從竹嶺之語。而更添賊兵初至。右巡察使金誠一以爲賊艘不滿四百。一艘不過載數十人。摠之不滿萬人。誠一之論聞于朝廷。朝廷亦以爲然等語。壬辰春。宣廟以誠一唱爲賊不來之說。特除嶺南右兵使。未及到鎭。而賊已至。宣廟命拿鞫。禁府都事李通承命至洛東。聞賊鋒已迫逃去。誠一聞有拿命。從間道上來。宣廟西幸。更以誠一爲招諭使。令招諭嶺民。誠一至稷山聞有新命。更就嶺南。秋間。監司金睟以罪罷行朝以寧海府使韓孝純。爲左道監司。而誠一爲右道監司。以此推之。則象村集中雜錄非象村所錄者多也。辛巳夏。東陽歷訪我于荷潭。從容作話。言丙子亂後。朝廷收得列聖御容一簇。朝議皆以爲仁宗眞。余聞其御容髥長。獨以爲文宗眞。大臣聞余言。遣郞廳欲聞其詳。余取搜問瑣錄中記文宗龍鬚甚長處。付標以送。大臣猶不信。改粧潢時折去古褙。則其紙背書文宗眞字。議遂定。余曰東人野錄中文宗像表雄偉。龍鬚甚長之語。則吾能記之。而瑣錄亦記此亡之矣。東陽旣去。余謂人曰曺伸乃梅溪之庶少弟。及見文宗似無是理。取瑣錄考之則無之。東陽之付標以送云者何也。余所見乃是慵齋叢話也。
[편-001] : 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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