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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장
백산이 언제나 주장하고 있는 것, 마음보다 몸이 우선하게 행하라. 생각하고 행동하면 이미 늦다. 생각이 행동을 따르게 하라.
어찌 보면 여타 무림인들과는 전혀 상반된 무론(武論)이다. 깨달음이 있으면 몸이 저절로 반응한다는 통념과 전혀 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머리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몸이 먼저 깨닫게 하는 것.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몸을 지킬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광견조에게 원하는 경지였다.
"아마도 그들은 사령귀매(邪靈鬼魅) 같았네."
석숭이었다. 상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무인들보다 더 많은 무림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사령귀매대법을 거친 자들로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자들이지."
사령귀매대법을 받기 위해서는 일단은 한 번 죽어야 한다.
혼이 떠나간 시체를 약물 처리하여 일정 기간 보관한 다음 사령귀혼대법(邪靈歸魂大法)을 통해서 혼(魂)을 불러들인다.
이 전 과정을 사령귀매대법이라 하고 이때 탄생하는 결과물을 사령귀매라 부른다.
사령귀매대법으로 탄생한 사령귀매는 한마디로 가장 완벽한 암살자가 될 수 있다. 강시이면서 강시가 아닌 자,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자, 그들이 바로 사령귀매이다.
"미치겠군. 그놈들이 왜 우리를 노리냐고."
"아마 천사맹 인물들이겠지…."
"그 여자는 우리를 해치려 하는 것 같지 않던데?"
백산의 생각이었다. 자신을 해치려 했다면 배에 있을 때 공격했어야 했다.
아무리 광천뢰로 협박을 했다고 하지만 그때는 얌전히 보내주고 이제 와서 암습을 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다.
"맹주보다 그 노인들이겠지? 그들이 하늘같이 모시는 맹주의 치부를 우리가 알았기 때문이고."
모시는 주군의 치부는 자신의 치부보다 우선한다.
아마도 스스로가 완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가 자신보다 못난 자를 주인으로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섬기는 주인의 단점이 될 만한 것을 알아서 제거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보다 완벽한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만 안 건드리면…."
갑자기 백산의 몸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난 곳이 조천영이 앉아있는 바위 뒤쪽, 조천영을 향해서 달려드는 혈의인 한 명의 목을 틀어쥐고 있었다.
"나도 가만히 있을 거다. 그러니 건들지 말라고!"
혈의인의 목을 꺾어버리면서 하는 소리였다. 사령귀매라는 괴물들의 두 번째 기습이었다.
백산이 이미 죽어 버린 혈의인을 내팽개치고 있는 사이에 또 한 명의 혈의인이 조천영을 향해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스악!
"형수님이 아무리 예뻐도 네놈들은 안 돼, 새끼들아!"
소살우가 뛰어들면서 혈의인의 몸을 이등분해 버렸다. 소살우와 석두 그리고 섯다, 모사가 각각 한 방위씩을 맡으며 조천영을 호위하고는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혈의인들의 파상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모든 공격이 거의 조천영 쪽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한 사람은 조천영을 공격함과 동시에 옆에 있던 다른 이는 조천영을 막는 광견조원들을 공격하는 그런 방식이었다.
처음보다 더 강한 자들이었다. 네 사람의 혈의인이 광견조원 한 명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몽운령 바닥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목이 떨어진 자, 허리가 절단된 자,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안개와 섞여서 적운(赤雲)을 만들며 천도봉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혈의인을 가장 무섭게 몰아치는 자(者)가 있으니 바로 소살우였다.
어느새 뱁새와 임무교대를 했는지 조천영을 호위하던 자리를 이탈한 채 달려드는 혈의인 사이로 뛰어들었다.
자신의 이름 석자를 찢어버린 놈들이다.
초식이고 뭐고 없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혈의인을 찌르고, 베고, 자르고, 모든 방향을 향해서 자신의 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몸을 앞으로 굴리며 그대로 혈의인의 목을 찌르고, 바로 오른쪽으로 움직이며 머리를 이용하여 또 한 명의 턱을 받아버린다.
뒤로 넘어가는 놈을 쫓아서 또 한 바퀴 구르더니 복면인의 입이라 생각되는 부분에다 도의 손잡이를 그대로 찔러버리고 있었다.
광기였다. 살인이 즐겁다는 듯이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먹이를 찾아 움직이는 맹수처럼 사방을 향해 몰아치고 있었다.
"형님, 나랑 교대 좀 합시다."
"싫어, 임마! 이 새끼들 전부 내 꺼야. 내 밥 건들면 죽어!"
뱁새가 자신이 할 테니 좀 쉬라는 식으로 말을 하자 살기 찬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피가 흐르는 자신의 도를 핥고 있었다.
이제는 아예 도를 이용해서 베는 것이 아니라 날이 없는 부분을 이용하여 혈의인을 깨부수고 있었다. 달려드는 놈을 피하며 머리를 향해서 도를 휘둘렀다.
퍽!
잘리는 소리가 아닌 몽둥이로 치는 소리였다. 혈의인의 두개골이 함몰되며 그대로 부서져 나가고 있었다.
"죽이지 마! 전부 막고만 있어."
소살우의 살기 어린 외침소리에 모든 광견조원들이 살수를 자제하고 혈의인들의 공격에 방어만 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혈의인들은 이십 명 정도. 순식간에 삼십 명의 복면인들이 고혼이 되어 사라져갔다.
처음보다 강했으나 그들도 백산 일행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광견조에게 명령을 한 소살우가 자신의 웃옷을 벗어 한쪽으로 놓고는 그 위에 조심스럽게 도를 내려놓았다.
도(刀)를 분신으로 여기라 하셨던 백산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행동이었다.
흉터들, 살아온 인생을 이야기해 주듯이 온몸 가득히 채우고 있는 흉터들이 몸을 움직이자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이리저리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채찍으로 맞은 모양인 양 길게 뻗은 흉터들이 뱀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툭!
소살우가 벗어놓은 옷 위로 주머니 하나가 떨어졌다.
"열 냥이오, 나도 끼워주시오."
이제는 추기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송곳이었다.
"툭! 툭! 툭!"
칼날, 도치, 쌍칼, 세 사람이 자신의 주머니를 던졌다. 자신들도 끼워달라는 소리였다.
"저 새끼들 필요할 때 쓰라고 주니까 살우에게 전부 상납을 해?"
광견조원들이 들고 있는 주머니, 독령곡 가던 길에 쓰러져(?) 있던 무림인들로부터 수거했던 주머니들이었다.
"저것도 훔친 거잖아, 이놈아."
"무슨 소리요, 영감. 쓰러져 있는 놈들의 품속에서 주운 건데."
"그 사람들을 백 공자가 쓰러뜨렸으니 문제지."
석숭이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언제나 석숭과 조금 떨어져서 은신해 있던 금령과 은령들이 죽어가는 한 무더기의 무림인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들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십여 명의 무림인들이 백산의 독문신공에 의해서 전부 당했음을. 바로 공포의 불알까기 신공이었다.
툭!
이번에는 금 한 냥이라는 거금, 석두였다. 네 사람만으로는 아무래도 불안했는지 끼워달라며 던진 것이다.
"마음만 끼워주겠소. 저기 저 낭자나 잘 보살피시오."
거절이었다. 그리고 한쪽에 있는 남궁미령을 가리키며 그쪽이나 잘 지키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백산이나 광견조원 전원이 아직도 건달시절의 개폼 잡던 버릇이 없어지지 않았는지 살기등등한 적을 앞에 두고도 하는 짓은 완전한 건달들이 하는 폼새였다.
그냥 가서 죽이면 간단할 것을 소살우가 제 밥이라 했다고 아무도 손을 대지 않고 그들을 쳐다보고만 있다.
"석두, 살우 저 녀석이 왜 도를 놓는 거지?"
소살우가 자신의 옷 위에 도를 놓는 것을 보고 백산이 궁금해서 물었다.
"아 모르고 있었소? 일휘와 살우 두 놈은 도보다 주먹과 발을 더 잘 씁니다. 저도 저런 모습은 처음 봅니다. 너무 화가 나서 그런가…."
석두의 말이 맞았다. 일휘, 소살우 두 사람은 도(刀)보다 박투술에 더 강하다.
모든 대원들과 같이 도를 가지고는 있지만 진정으로 화가 났을 때는 맨손으로 적을 상대한다.
그들을 보고 더욱 놀라고 있는 사람들은 남궁 부녀였다.
이제 만난 지 이틀, 남궁지우와 남궁미령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항상 웃고 떠들고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화가 났을 때 보여주는 것은 무모함과 공포였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상대방도 일류 고수다. 이미 싸워보았으니 자신들도 알고 저들도 알고 있다. 더구나 독까지 발라져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광견조의 대장이라는 저 친구는 이십 명이나 되는 혈의인을 혼자서 해치우겠다고 한다. 더 가관인 것은 도와주겠다는 자들이 돈을 내며 부탁하는 것이다.
그것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하는 저 사람들. 두 부녀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장면이었다.
맨주먹에 불그스레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소살우, 그리고 도를 들고 나서는 송곳, 도치, 쌍칼, 네 명이 각자 한 방위를 맡으며 혈의인을 향해서 돌진하고 있었다.
혈의인들도 빨랐지만 광견조 사 인에 비하면 거북이의 걸음걸이 같았다.
특히 소살우의 빠르기는 여타 삼 인을 압도하고 있었다.
건달들의 싸움에서나 볼 수 있는, 퉁퉁 뛰면서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약간의 어색함마저 갖추고 있었으나 그에게 걸리는 상대는 그렇지 못했다.
휘두르는 검을 피하며 가슴까지 파고든 소살우의 오른손 주먹이 그대로 얼굴을 부숴버리고 있는 것이었다. 함몰되는 수준을 넘어 통째로 뜯겨져 나가버렸다.
얼굴 없는 시체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뒤따르던 송곳이 혈의인 한 명의 허리를 베면서 그 도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얼굴 없는 시체의 허리를 같이 절단해 버린다.
회전을 하고 있었다.
광견조 사 인이 왼쪽으로 돌면서 옆 사람이 죽여버린 시체가 넘어지기 전에 다시 한번 잘라버리는, 마치 짜 맞춘 듯한 그들의 잔인한 행위는 보고 있는 사람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그중 단연 압권은 소살우였다. 왜 도를 가지고 싸웠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그의 박투술은 경지에 달해 있었다.
찔러 오는 검을 피하기 위해 몸을 옆으로 숙임과 동시에 그의 발이 앞으로 뻗어나가고 그대로 혈의인의 목을 감아버린다.
그 상태로 끌어당기면서 목을 부러뜨리고 자신 앞으로 끌려온 적의 가슴을 향해서 왼손을 이용해 구멍을 내버린다.
다리를 풀면서 이미 죽은 놈의 시체를 퉁기면 어김없이 송곳이 허리를 잘라내고 있다.
웃고 있었다. 온몸에서, 얼굴에서 죽은 자들의 피와 뇌수가 흐르고 있는데도 광견조원들은 웃고 있었다.
새하얀 살소(殺笑)였다. 그러나 웃고 있는 것은 입뿐이었다. 그들의 눈에서 흘러나온 것은 무섭도록 차가운 살기였다.
뒤에서 날아오는 검 같은 것은 처음부터 신경도 쓰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의 등을 맡고 있다.
오로지 앞에서 오는 놈만 처치하여 옆으로 넘기고 있었다. 그들을 쳐다보고 있는 나머지 광견조원들의 얼굴도 웃고 있었다.
심지어는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찍새마저도 웃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잔인하게 보였다. 환하게 웃는 소살우, 온몸에서 꿈틀거리는 피에 젖은 뱀들이 일제히 살기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수강(手剛), 붉은 주먹은 상대의 얼굴을 날려버리고, 각강(脚剛), 피를 먹은 듯한 발은 상대의 어깨와 가슴을 박살내고 있었다.
도강(刀剛)을 익히면서 터득했던 강기(剛氣)가 백보신권을 익히면서 강(强)해졌고,
용왕유권을 익히면서 유(柔)해졌으며, 광천뢰를 다루면서 완숙해져 온몸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백산이 그동안 바랐던 경지였고 백보신권과 용왕유권을 가르친 이유이기도 했다.
마지막 남은 한 명을 향해서 네 명의 광견조가 동시에 빛살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가장 먼저 소살우의 정권이 안면을 날리고 송곳과 도치가 양어깨를, 마지막으로 쌍칼이 허리를 양단하며 이십 명의 혈의인에 대한 살육이 끝났다.
"빨리 가자! 이곳은 더러워서 더 이상 있기가 싫어."
자신이 가장 지저분하게 했으면서도 더럽다며 서둘러 물건을 챙기는 소살우였다.
세 번에 걸쳐 받은 습격에 이제는 살인이라는 것에도 익숙해졌는지 수없이 많은 죽음을 보고 있으면서도 담담한 표정들이었다.
* * *
"임신이다, 두 달 정도 된 것 같고."
몽운령을 떠난 일행은 어느 이름 모를 계곡에 도착하여 피에 절었던 옷과 몸을 씻고, 간단한 요기를 위해서 쉬는 사이에 갈태독이 백산과 조천영을 따로 불렀다.
"하! …영감 지금 뭐라고 했소? 그러니까, 누님이 애를 가졌다는 거요? 우리들의 애를?"
백산의 표정이 멍해졌다. 재차 확인하듯 갈태독에게 묻고있지만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버지란 말,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로만 알았지 그 말을 들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훗! 헷헷헷! 쿡! 하하하!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라… 누님 잠깐만 이리 와 봐요. 아니, 그대로 있어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는지 함박만큼 벌어진 입은 닫힐 줄을 몰랐다.
옆에 있는 갈태독은 신경도 쓰지 않고 조천영의 배를 만져보고 아이의 숨소리를 듣는다며 귀를 가져다 대는 등 온갖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내 말 계속 듣거라."
"그게 무슨 소리요. 둘 다 위험할 수 있다니?"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던 백산의 얼굴색이 파리하게 변했다. 임신을 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아기가 생겼다고 한다.
잘못되면 태아와 산모가 모두 위험할 수도 있다고 한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된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있었다. 청천벽력(靑天霹靂)이었다. 최고의 의원인 갈태독의 말이 아닌가. 결코 오진이 될 리가 없는 것이다.
"천영, 천영입니다.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아이 없이는 살 수 있지만 천영 없이는 못 살아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조천영이란 여인은 자신의 모든 것이고 삶이다.
천영이 없는 삶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도 없다. 아무리 자식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녀가 존재했을 때의 이야기다.
"백랑, 저는 낳고 싶어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백랑의 아이를 낳고 싶다고요."
울음이 터져나왔다. 이제야 간신히 잡은 행복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분신을 가졌는데, 남들은 둘도 셋도 잘만 낳고 사는데 자신은 단지 하나다. 그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한다.
평범한 여자가 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일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아기 이야기는 안 들은 것으로 하겠소.
분명히 말하는데… 천영이요. 만일… 만일 말이요, 천영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 한을 전부 세상에다 풀어버리겠소. 명심하시오, 천영도 영감도."
무서운 말이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조천영을 희생시키는 짓을 절대로 못 한다는 소리였다.
"휴우! 아직은 이상이 없는 것 같으니 일단은 기다려 보자, 최대한 조심하고."
괜히 말했다 싶었다. 차라리 모르고 있는 것이 더 나을 뻔했다.
그러나 갈태독의 의원으로서의 소견은 그 사람에게 다가오는 일은 먼저 본인이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주의이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해주어야 하며 이것이 환자에 대한 배려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러한 자신의 신념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이럴 땐 의원이 해줄 말은 한 가지밖에 없다.
"나를 믿어라. 내가 누구냐 최고의 의원인 갈태독이다. 생길 수 없는 상태에서 아이가 생겼다는 것은 하늘의 축복이다."
"그렇죠?"
백산의 표정이 다시 밝아지고 있었다.
갈태독의 말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천영을 안정시켜야 한다. 자신이 불안해하면 그녀가 자신에게 미안해할 것 같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 언제나 편안하고 행복하게만 살아야 한다. 불행한 것은 과거에 겪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갑시다, 영감. 별일도 아니구먼. 부부가 잠자리를 같이 했는데 아이가 안 생기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애써 의미를 희석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조천영이 왜 모르겠는가.
"그래요, 빨리 가요. 나도 배가 고프네."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백산의 팔짱을 끼었다. 다정하게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을 갈태독의 나직한 한숨소리가 배웅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조용하죠?"
"글쎄다, 아직도 절반 정도 남아 있을 것 같은데 너무 조용한 것 같구나."
휴식을 취한 일행이 그 계곡을 출발하여 하룻밤을 노숙하고 도착해 있는 곳은 황산의 끝자락,
조천영을 마차 위에 태운 채 모든 광견조원들이 마차를 집중적으로 호위하고 황산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광명정이 올려다 보이는 곳을 지나가는 중이다.
이제 이곳만 지나면 황산을 빠져나가게 된다. 더 이상 암습의 걱정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총력전을 펼치려 하는 모양이군요."
널따란 분지의 이곳저곳에 죽어가는 나무들만 남아서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들게 하는 황량한 고목대.
그곳에 지금껏 백산 일행을 공격했던 자들과 일행으로 보이는 혈의인들 백여 명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암습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낸 채 일행의 앞을 막고 있었다.
"왜 우리를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지? 우리가 먼저 너희들에게 피해 준 것이 있었나, 아니면 너희들 물건을 훔쳤나."
"우리는 그런 것 모른다. 너희들을 죽이라 했기에 명령을 따를 뿐이다. 그 이상을 알아야 하나?"
사사대의 대주인 사인귀(邪人鬼) 반소구였다.
그의 놀라움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강하다는 것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귀령사매의 암습을 피해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또한 그 잔인함이란, 시체의 조각조차 맞추기 힘들 정도로 잘려진 부하들,
사령귀매대법에 의해서 인간의 감정이 거의 없다고 하지만 자신의 부하들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벌써 백여 명이 죽었다. 이제는 맹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복수를 해주어야 한다.
"너희들은 강하다. 우리가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지… 허나 최선을 다할 것이다."
사인귀 반소구의 말이 끝났다. 이제 공격명령만 남은 것이다.
옷을 벗고 있었다. 광견조 십일 명이 자신의 웃옷을 벗어서 한쪽으로 쌓아놓고 있었다.
"살우, 뭐 하는 짓이냐?"
아까도 그랬고 지금도 또 맨몸을 드러내고 있는 살우와 광견조를 쳐다보며 석두가 물었다.
"옷에 피 묻잖소."
그것도 모르고 있었냐는 듯이 석두를 쳐다본다. 그리고 또다시 자신들의 옷 위에 돈주머니를 던지고 있다.
"가장 많이 죽이는 놈이 다 먹는 거다. 찍새, 네가 세어라."
백 명이라는 적이 앞에 있는데도 그들은 죽음의 내기를 하고 있었다.
모든 광견조원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세상에 버림받은 이들, 남의 것을 원한 적도, 욕심을 부려 본 적도 없었다. 주어진 것이 삶인 양 그렇게 살아가고 있던 그들이었다.
그랬던 그들에게 지켜야 할 것이 생겼다. 자신이 죽게 되면 슬퍼할 형제가 생겨버린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져본 형제들이다. 한 놈이라도 더 죽이는 것이 다른 형제의 수고를 덜어주는 것이기에 내기를 핑계 삼아서 더욱더 마음을 다져잡는 것이다.
"죽여라! 한 칼에 한 놈씩, 기억해라. 한 놈씩이다."
소살우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너는 아가만 지키거라."
갈태독이 손을 쓰기로 했는지 나서려는 백산을 막아섰다. 또다시 분노에 자신을 맡기게 될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영감, 광천뢰로 날려버립시다."
"저들과 거리가 너무 가깝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이렇게 지척에 나타난 것이 아니겠느냐?"
갈태독의 말이 맞았다. 사사대와 백산 일행과의 거리는 오 장. 광천뢰의 영향권에 같이 들어있는 것이다.
또한 어느 한 사람이 죽기를 각오하고 전 내공과 함께 날아오는 광천뢰를 감싼다면 광천뢰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은 싸우는 방법밖에 없다.
'이것이 나의 업보라면 따라야 하겠지….'
되도록 손에 피를 묻히기 싫었기에 새롭게 의원으로만 살고자 했다.
그러나 무인으로 타고난 숙명인 것을 어찌하랴, 힘을 가지고 있고 그 힘을 써야 할 때가 다가왔으니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직한 한숨과 함께 갈태독이 전면으로 나섰고, 그 뒤를 이어 웃옷을 전부 벗어젖힌 광견조 열한 명,
석두와 남궁지우 그리고 석숭과 금령, 은령 포함해서 전부 열아홉 명이 사사대의 앞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바야흐로 백산 일행 열아홉 명과 사사대 잔여 인원 백 명과의 혈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대들에게 감정은 없소이다. 이것이 우리의 길이기에 가고자 하는 것일 뿐… 쳐라!"
사인귀 반소구의 말과 함께 사사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열아홉 명의 인물들이 방사형으로 달려나갔다.
바람이 분다.
새빨간 피를 머금은 혈광풍(血狂風)이 불어온다.
우리는 왜 이 자리에 서 있으며, 왜 서로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가.
전생의 업보도 현세의 원수도 아닌데, 그저 그렇게 스쳐가는 인연일 뿐. 한세상 왔다가 아무런 흔적도 없이 떠나면 그것으로 족할 인생인 것을.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알지 못하는 우리가 왜 서로를 죽이려 하는가.
축복 속에서 태어났던 생명 아니던가, 어느 누가 우리를 심판할 수 있단 말인가.
바람이 흐느낀다. 죽은 이의 혼을 머금은 혈광풍이 울부짖는다.
깨끗했다.
백년의 세월 속에 묻혀있던 갈태독의 손속은 너무나 정교하고 깨끗했다. 자신을 베어오는 검을 피하며 그대로 상대의 사혈(死穴)을 짚는다. 그리고 고개가 숙여진다.
숙여진 머리 위로 스치듯 살기를 머금고 지나가는 검 하나. 또 한번의 손짓에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고 있는 혈의인.
죽어버린 몸뚱이지만, 상처 없이 떠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인가. 이미 풀려버린 눈동자에 안도감이 서려있었다.
어쩔 수 없는 죽음에 약간은 괴로운 듯, 조금은 미안한 듯한 갈태독의 얼굴에는 적을 죽이고자 하는 살기가 보이지 않는다.
치료될 수 없는 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를 안락사시키듯, 그렇게 고통 없이 보내주는 것이 그의 숙명인 양 혈의인들의 사혈만 찍어버린다.
검이 몸에 부딪치고 튕겨나간다. 피할 수도 있지만 편한 자세로 사혈을 찍기 위함인지 그대로 방치하고 앞에서 다가오는 혈의인을 저승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그가 지나가는 곳에는 마치 통나무들이 바람에 쓰러지듯 그렇게 혈의인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단 한 방울의 피도 보이지 않는 갈태독의 손속은 칭얼대는 아이를 잠재우듯 깨끗하고 조용했다.
조화로웠다.
석숭과 금령, 은령의 손과 검은 화합이었다. 다섯 명이 오행의 방위를 점유한 채 달려드는 적을 향해서 권과 검을 날려 격살하고 있었다.
석숭의 손에서 구룡신공(九龍神功)이 펼쳐지고, 아홉 마리의 용이 똬리를 틀며 앞에 있는 혈의인의 가슴에 격중된다.
이어서 흩날리는 피 무지개, 옆에 있는 금령의 검은 피 무지개를 따라서 들어오는 상대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린다.
상인일 뿐이다. 물건을 사고 파는 상인일 뿐 목숨을 가지고 흥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팔아야 될 것이 자신의 목이다.
중원 최대 부호인 석숭의 목은 비싸다. 혈의인 정도가 살 수 없는 엄청 비싼 목이었다.
단순했다.
그 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다가오는 검을 모로 피함과 동시에 상대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는다.
세상을 비상할 수 없는 검이었기에 지룡검(地龍劍)이란 이름을 얻었던 검, 그 지룡검이 혈룡검으로 변했다.
오로지 찌르기 일변도인 석두의 검, 이미 초식 자체가 필요 없는 경지에 다다랐기에 상대와 가장 가까운 거리를 향해서 죽음을 뿌려댄다.
전방의 혈의인의 심장을 찌르고, 그 자리에 주저앉듯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이미 뒤로 돌려진 검을 상대의 목을 향해 밀어 넣는다.
목에서 검을 뽑아냄과 동시에 왼쪽에 있는 적을 향해 백보신권을 날리고, 가슴이 뻥 뚫린 채 뒤쪽으로 날아가는 상대가 있던 곳으로 몸을 굴린다.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상대의 가슴에 또다시 찔러 넣는 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나를 죽이려는 적이 있으니 찌르고, 살기 위해서 죽일 뿐이다.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킬 것이다. 그 외 싸움의 목적이나 의미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죽여야 할 적이 있을 뿐이다.
섬뜩했다.
일장이나 솟아 있는 제왕무적검강(帝王無敵劒쾝), 혈의인이 그의 근처에 오기도 전에 일자로 잘려나간다.
평범한 청강검을 뽑아든 남궁지우는 산악 같은 거인이었다. 가문에서 가장 뒤쳐졌다 하는 그의 무위는 알려진 것과는 또 달랐다. 거칠 것 없는 파도였고, 해일이었다.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을 찾겠다고 가문을 나와서 이렇게 검을 휘두르는가, 명예 때문인가? 무인의 자존심 때문인가?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동안 주지 못했던 사랑을 주고 싶다는 작은 소망 하나밖에 없었다. 그 딸을 지키기 위해서 청강검을 휘두른다.
또다시 좌우로 살기가 느껴진다. 막기에는 이미 늦었다. 몸을 그대로 누이며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돈다.
혈의인 두 명이 허리가 양단되어 쓰러지고 있다. 하얀 백의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비록 늙어서 볼품은 없겠지만 자신도 광견조를 따라서 옷을 벗을 걸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백산의 팔목에서 튀어나온 비수 하나, 뇌룡사라는 꼬리를 달고 이장 앞에서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날아오는 상대의 심장에 박힌다.
광혈단의 독기가, 독령곡의 절대독이 독천비를 통해서 쏟아져 나가고, 비도가 박힌 혈의인이 그대로 녹아들고 있다.
심장을 통해서 각 혈관으로 전달된 독혈이 순식간에 옷을 녹이고 몸을 녹이고 있다.
무상신법이 펼쳐진다. 마차 주변을 빛살처럼 움직이며 달려드는 혈의인을 녹여버린다.
독천비에 찔려도 녹고, 뇌룡사에 잘려도 녹는다. 욕심 없이 살고 싶었다. 명예도 권력도 탐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복수도 포기했다. 그런 우리를 왜 그냥 두질 않는가….
웃고 있었다.
소살우와 광견조 십 명.
혈인이었다. 등에서 핏빛 뱀이 꿈틀거리고 복부에 붙어있는 전갈이 피를 머금고 있었다.
몸에 달라 붙어있는 것이 피인지 흙인지 살점인지 알 수가 없다. 보이는 것은 무조건 죽인다.
머리를 쳐오는 검을 향해서 그대로 뛰어들었다. 등 쪽이 따끔한 것이 한칼 먹은 것 같다.
어차피 피로 목욕을 하고 있는데 목욕물에 내 피가 좀 들어가면 어떤가.
놈의 머리통을 움켜쥐고 자신 앞으로 당긴다. 목에서 불끈불끈 뛰고 있는 동맥을 향해서 도를 대고는 옆으로 죽 그어버린다.
잘린 동맥으로부터 피가 솟는지 입안에 비릿한 향내가 풍긴다. 피가 아니다. 목마름을 식혀주는 감로수일 뿐이다.
오른 쪽에서 들어오는 검을 향해 머리가 떨어진 시체를 던지고, 그 틈을 이용해 왼쪽에 있는 놈을 아래에서 위로 베어버린다.
그 여력을 이용해서 조금 전에 던진 시체로부터 검을 뽑고 있는 놈의 머리통을 으깨버린다. 자르는 것도 지겹다. 굳이 칼날 부분을 사용하지 않는다.
가장 편안한 곳을 사용한다. 베어야 될 상황이면 베면 되고 부숴야 될 상황이면 부숴버린다.
뒤쪽으로 몸을 굴린다. 이번에는 왼쪽 팔이 쓰리다. 휘두르는 검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깊이 파고들고 있다. 너무나 가까워 도를 휘두를 공간이 없다.
강기인지 피인지 알 수 없는 붉은 왼손이 그대로 상대의 단전으로 박혀들어 간다. 왼쪽으로 거칠게 회전을 시키며 손에 잡히는 것을 한꺼번에 뽑아 버린다.
쓰러지는 놈과 눈이 마주쳤다. 붉었다. 붉은 옷에 붉은 눈동자. 죽어가면서도 눈을 감지 않는다. 어쩌면 눈을 감는 방법을 모르는지도 모른다.
분노한 광견조원들에게는 무기가 따로 없었다. 몸을 굴리다 돌이 잡히면 그것으로 상대의 머리를 찍고, 나무 조각이 잡히면 그것으로 상대의 심장을 찌른다.
굳이 필요가 없는 것인데, 강기가 있는 주먹이면 해결되는데, 어렸을 적부터 버릇이라 그런지 상대를 죽일 때는 손보다 돌이, 돌보다 나뭇조각이 더 편하다.
웃고 있다.
소살우, 뱁새, 섯다, 모사, 송곳, 칼날, …광견조원 전원이 웃고 있다.
더욱더 환해진 얼굴에서는 세상을 태울 듯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왜 가만히 있는 우리를 건드리는 것이냐. 너희들이 무엇을 해 주었다고, 준 것이 무에 있다고. 세상을 향한 분노였다. 더러운 인생에 대한 한풀이였다.
악몽이길 바랐다.
맹의 최정예인 사사대가, 사령귀매대법을 거친 사령귀매들이 속절없이 죽어가고 있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자들이 사령귀매라면, 저들은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었다.
한 무리의 미친 살귀들이 인간의 탈을 쓰고 있었을 뿐이다. 애당초 이들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었다.
맹의 명령이기에 따르기는 했지만 저들은 너무 강했다.
검을 찔러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독이 발라져 있는 검을 향해서 달려들 뿐이다. 자신이 죽지 않을 곳에 검을 맞으며 상대를 죽인다.
그리고 남은 것은 죽음, 죽음. 모든 대원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자신의 부하들이 전부 죽는 시간에 적은 두 명이 죽었다. 꿈이기를, 현실이 아니길 바랐다.
정적이 흘렀다.
죽은 자도 죽인 자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사사대의 대주인 사인귀 반소구만 남겨두고 모두 죽었다.
"가서 전해라. 더 이상은 건드리지 말라고. 우리는 우리의 길을, 너희는 너희 길을 가면 될 뿐이다."
은령, 두 사람이 희생당했다. 사사대의 귀령사매도, 황실의 인물인 은령도, 단 한번도 자신을 위해서 살아보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는데 그렇게 죽어갔다.
"나 같으면 같이 죽겠다. 부하들 다 죽이고 혼자 살아서 뭐 하냐?"
일행이 떠나면서 작은 눈을 가진 놈이 미소를 지으며 남긴 말이었다.
사인귀 반소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맹에 소식은 알리고 죽어야 되겠지.'
품속에서 전서구를 꺼낸 반소구가 자신의 오른 손가락을 잘라서 무엇인가를 적더니 하늘로 날려보냈다.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백산 일행을 쳐다본 반소구의 검이 자신의 목을 일자로 갈랐다.
아직도 차가운 봄바람 속에 고개를 내밀었던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붉은 피로 몸을 씻었고, 무심한 까마귀는 먹을 것이 많이 생겼다는 즐거움인지 '까악 까악' 대며 모여들었다.
"내가 나섰어야 됐어…."
백산이 자책하고 있었다.
은령 두 사람, 언제나 어둠 속에 있었지만 광견조보다 더 먼저 알았던 이들이었고 서로 이야기해본 적도 별로 없었지만 언제나 석숭 옆에서 그 존재가 확인되었던 인물들이었다.
뇌룡현을 떠난 이후 많은 사건이 있었고 부상자도 있었지만 희생자가 생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심리적인 타격은 컸다. 일행 전체를 죽일 수 있는 광천뢰를 맡기면서도 사고가 날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같이 있던 일행이 죽은 것이다.
"자네는 이 일행의 책임자네. 지금 이 일은 단순한 사고일 뿐이네. 이것보다 더한 일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게."
한 단체를 책임진다는 것 그것은 단순하게 세끼 밥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부하들의 슬픔도 나누어야 되고 기쁨도 함께해야 하는 자리이다.
때로는 큰 것을 위해서 작은 것을 잊기도 해야 하는 그런 위치가 수장의 자리인 것이다.
"때로는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과거를 묻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네.
예를 들어서 희생된 것이 은령 둘이 아니고 저기 있는 저 친구들 중 둘이었다면 자네는 어떻게 하겠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석숭의 말이 길어지고 있었다.
"찾을 거요. 장강이든 뭐든 천하를 뒤질 거요. 그래서 다 죽일 거요. 전부다…."
"허나 자네가 그렇게 했을 때 살아있는 저 친구들마저 희생시킨다면?"
그것은 생각해 보지 못했다. 자신에게 힘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었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에게 힘이 없다면….
"황제가 그렇게 힘이 없는 자리였소?"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백산도 알고 석두도 알고 있었다.
황제나 되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사마세가를 복원시켜 주지 못하고 있는 황제의 심정을 헤아려 달라는 말이었다.
은령의 죽음에 누구보다 가슴 아픈 사람은 석숭일 것이다. 그동안 그의 수족이었던 사람들이었고 목숨을 맡겼던 사람들이었다.
"은령 둘은 형제였네. 저기 있는 저 친구들처럼 이름도 없는 애들이었고. 나는 이 애들에게 이름 한자 지어주지 못했네.
그냥 처음부터 은령이었고 또 은령으로 죽었지. 자네처럼 이름이라도 지어줄 걸 그랬어…."
석숭의 한숨 섞인 목소리였다. 백산이 광견조원들의 이름을 지어왔을 때 감탄했었다.
소살우와 광견조의 행동을 보고 또한 얼마나 놀랐던가.
쓸데없는 데 돈을 썼다며 투덜거리면서도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그 이름자 써진 종이를 집어넣고 있는 것 하며,
이름을 익히라 했다고 밤새도록 땅바닥에 알아먹지도 못하는 이름자를 쓰고 있던 그들의 모습.
그리고 이름자 써진 종이가 찢어졌다며 미친 듯이 살육을 전개하던 소살우,
자신이 보았을 때는 아무것도 아닌 그런 단순한 것을 가지고도 그렇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놀랐고,
왜 자신은 저렇게 해주지 못했나 하고 못내 아쉬워했다.
북경으로 돌아가면 이 애들에게도 이름을 지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해 보기도 전에 은령 둘이 죽었다.
"석 대인, 이제 그만 석 대인의 길로 가시오."
석숭에게 미안했는지 백산이 따로 떠날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백산 일행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이다. 인연이라면 마령호 껍질을 사고 판 사이밖에는 아무것도 아니질 않는가.
그 조그마한 인연으로 해서 벌써 몇 개월을 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이제 위험도 사라졌는데 같이 가지 뭐, 자네의 목적지도 어차피 북경 아닌가."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석숭이 판단했을 때 지금 이들의 집단은 엄청난 사람들이었다.
천마맹의 가장 큰 힘이라고 할 수 있는 철혈전신마 철목승의 제자 냉추렴, 개방의 꽃이라는 소걸영 구소운 두 여자가 가지는 의미는 어느 한 일파에 못지않게 컸다.
그가 파악한 정보에 의하면 천마맹 전력의 오 할 정도까지 보고 있는 천여 명의 무욕인, 그들의 수장이 철목승이다.
냉추렴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 그 사람들이 전부 강호를 향해서 검을 뽑을 것이다.
또한 소걸영 구소운은 어떠한가. 개방의 행복이다.
개방 방주 및 수많은 원로들, 그들의 얼굴에 웃음을 주는 이가 소걸영이었고, 구걸생활에 피곤하고 힘들어하는 개방인들의 활력소가 바로 그녀다.
비록 얼굴은 모를지라도 중원에 있는 모든 거지들이 소걸영 구소운이란 이름을 알고 있다.
그런 소걸영이 나쁜 일이라도 당한다면 중원 전역에 퍼져있는 백만의 거지들이 들고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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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고갑니다
즐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재미있게 잘 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즐감
즐감
감사합니다.
고맙게 잘보고 있어요~~~
감사ㅎ
즐감 고마워요
즐감~~~`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