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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이 에이돈 앙겔론 카타바이논타 에크 투 우라누, 에콘타 텐 클레인 테스 아뷔수, 카이 알뤼신 메갈렌 에피 텐- 케이라-아우투.
나는 또 한 천사가 그 무저갱의 열쇠와 큰 사슬을 그의 손에 들고 그 하늘로부터 내려오 는 것을 보았다.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요한 계시록에는 무저갱에 갇혔다가 거기서 나오는 세 부류가 계시되었다. 첫째는 메뚜기의 무리요, 두번째는 짐승이요, 나중은 옛 뱀이다. 무저갱에 대한 오해가 심각하므로 여기서 다시 말해보자. 무저갱이란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깊음(바도스) 속에서 욕심과 선악지식을 좇는 자들이 스스로 빠져든 깊은 구렁이다. 하나님은 그의 계시로 말미암아 그 깊음 속에서 사람들을 건져내신다. 그러나 그의 계시를 버리고 자신의 욕심과 선악지식으로 그 깊음에서 나오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무저갱에 빠져든다. 무저갱에 빠져든 자마다 흑암을 빛으로 삼고 빛을 흑암으로 삼아서 그 자신의 거처인 음부(셰올, 헤디스)를 짓고 거기에 거한다. 불 못에 던저지는 심판을 받기 전까지는 무저갱도 음부도 그들의 눈에 감취어 있다.
19장에서 짐승과 거짓 예언자는 산 채로 유황 불 못에 던지우고 그를 따르던 모든 무리는 시체가 되어 새들의 먹거리가 되었다. 그러자 용 또한 피하거나 의지할 데가 없었다. 그 때에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사슬을 들고 하늘로부터 내려 왔다.
2 카이 에크라테센 톤 드라콘타, 호 오피스 호 아르카이오스, 호스 에스틴 디아볼로스 카이 호 사타니스, 카이 에데센 아우톤 킬리아 에테,
그는 그 옛 뱀이며 마귀이며 사탄인 그 용을 단단히 잡아 천년 동안 결박하여
(용을 잡으니 곧 옛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기록된 바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하였다. 어떻게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새 창조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그 카이로스의 하루는 하나님의 새 창조 밖에 있는 시간으로는 천년과 같기도 하며 그 천년을 훨씬 넘어서기도 한다. 하나님의 새 창조 밖에서 인생들이 몇 천년, 또는 몇 십만 년 또는 몇 백만 년을 살았다 할지라도 그 날들은 새 창조가 이루어지며 생겨나는 카이로스의 한 날도 이루지 못한 밤일 뿐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카이로스의 낮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 속으로 진입한다.
카이로스의 낮은 새 창조 안에서만 오는 것이므로 수많은 크로노스의 날들은 다만 밤일 뿐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크로노스의 날들을 좇아서 수양을 하거나 주님을 기다리거나 종말을 고대하는 자는 하나님의 새 창조의 카이로스의 한 날도 이루지 못했다. 그가 만일 부활의 실존을 이루는 카이로스 안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면 밤 속에 있다가 밤 속에서 멸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과 하나 되어 카이로스의 하루를 이룬 자에게 있어서의 그 하루는 크로노스의 천년이나 만년이나 그 이상의 날들을 밤에 속한 지내온 인생들의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영의 때다. 밤과 낮이 하루를 이루듯이 밤에 속한 크로노스에 생명의 빛이 비취어 오면 비로소 카이로스의 한 날을 이룬다. 하나님은 크로노스도 카이로스도 자기의 권세 하에 두셨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세 하에 두어진 두 때(밤과 낮)에 대하여 점을 치며 종말에 이익을 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점치며 기다리는 그 카이로스의 종말은 있지도 않거니와 어린 양은 그들에게 도둑 같이 와서 그들의 세상을 사라지게 하신다.
주님의 날이 도둑 같이 와서 짐승과 거짓 예언자와 그 무리들에게서 그들의 하늘과 땅과 그들이 가졌던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할 때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일이 각 사람의 실존으로 알게 된다. 이 때에 용은 천사에게 붙잡혀서 결박당한다.
천사와 용
천사와 용은 우리의 카이로스의 실존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오늘날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천사와 용의 이야기를 읽고 듣고 말하고 있어서 요한 계시록을 읽을수록 그들은 더욱 혼란에 빠져들고 구원의 징조를 실상으로 움켜쥔다. 천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가져오는 관계성 속에서 드러나고 용은 욕심과 선악지식을 가져오는 관계성 속에서 드러난다. 천사는 흑암 속에 빛을 가져오는 존재이며, 용은 빛을 흑암으로 삼게 하고 흑암을 빛으로 삼게 하는 존재이며, 세력이며, 능력이며, 일이며, 논리이며, 소식이다.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용이 천사이다.
사람들은 왜 용을 좋아하며 따르며 그의 종들이 되는 것인가. 기록된 바 “그 불법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역사이며 그는 온갖 능력과 징조와 거짓 기사를 행할 것이다. 그리고 온갖 불의한 것으로 멸망하는 자들을 속일 것이다. 그들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되지 못한다”(딤후 2:9-10) 하였다.
진리(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진리로 말미암아 그의 사랑을 받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욕심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선악지식이 되게 한다. 선악지식은 빛을 흑암으로 삼고 흑암을 빛으로 삼는 인간의 논리이다. 사람은 그 선악지식으로 온갖 꿈과 유혹과 가설과 거짓을 낳고 그것을 정당화하며 그 안에 거한다.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선악지식을 좇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우상(천사)이다.
하늘의 군대가 짐승의 군대를 이긴 것은 욕심과 선악지식에 대한 사랑과 진리의 승리이다. 승리는 승리를 전한다. 승리는 기쁨의 천사가 되어 모든 사람에게 좋은 소식을 전한다. 천사에게 포박된 용은 사랑과 진리에 포박된 사람들의 욕심과 선악지식이다.
3 카이 에발렌 아우톤 에이스 텐 아뷔손, 카이 에클레이센 카이 에스파기센 에파노 아우투, 히나 메 플라네세 에티 타 에드네 아르키 텔레스데 타 킬리아 에테˙메타 타우타 데이-뤼 데나이 아우톤 미크론 크로논.
그를 그 무저갱에 던져 가두고 그 위에 봉인하여 그 천년이 끝나기까지는 그 나라들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일들을 좇아서 그는 반드시 잠시 동안 풀려날 것이다.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19장에서 짐승과 거짓 예언자가 불 못에 던지웠다. 이 때에 비로소 사람들은 배의 우상(생존의 우상)과 가슴의 우상(욕심의 우상)으로부터 미혹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천년이 지나면 그 옛 뱀이 무저갱으로부터 잠시 풀려나서 사람들을 미혹하게 될 것이다. 이 일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창세기 3장에서 뱀은 하와를 선악지식으로 미혹했고 하와는 아담을 미혹했다. 아담과 하와가 뱀에게 미혹당한 것은 진리로 말미암아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순결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였다면 그들은 육신의 욕심을 좇아서 선악지식을 추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레네페쉬 하야’에서 살려주는 영이 되지 못한 두 사람은 뱀의 미혹에 빠져 거짓을 믿고 심판 되었다. 그러나 셀 수 없이 많은 무리가 하나님의 진리로 말미암아 계시된 사랑을 받고 그 사랑 안에 거하게 되는 때에는 뱀의 선악지식은 아무런 미혹이 될 수 없다.
육신의 첫 사람은 그 욕심으로 선악지식을 좇는 크로노스의 때에 거하고 영의 둘째 사람은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좇는 카이로스의 때에 거한다. 크로노스의 때에 거하는 첫 사람은 자기 믿음으로 선악지식을 좇고 카이로소의 때에 거하는 둘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하나 된 믿음으로 생명의 지식(진리)을 좇는다. 첫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진리를 받지 아니하고 그 진리를 욕심으로 받으면 그 진리는 그 자신을 멸망시키는 선악지식이 되어버린다. 창세기 3장과 요한 계시록 20장은 이 일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은 자는 누구든지 새로운 존재로 지어질 수 없다. 창세기 3장에서 일어난 아담의 일은 진리로 베풀어진(계명)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의 모형이다.
욕심과 선악지식은 사탄과 무법자와 적그리스도와 짐승과 거짓 예언자와 음녀와 그 무리들을 낳고 키운다.
용이 천년 동안 무저갱에 갇혀 있는 때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사랑 밖에 거하는 세상의 백성이 함께 섞여 있다. 그러나 용이 잠시 동안 풀려나서 선악지식으로 세상을 미혹하면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의 백성은 확연히 구별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적대하는 뱀으로 하여금 빛의 자녀와 어두움의 자녀를 나누신다. 그것은 뱀이 스스로 택하였고, 그가 즐기는 일이다.
4 카이 에이돈 드로누스, 카이 에카디산 에프 아우투스, 카이 크리마 에도데 아우토이스˙ 카이 타스 프쉬카스 톤 페펠레키스메논 디아 텐 마르튀리안 예수, 카이 디아 톤 로곤 투 데우, 카이 오이티네스 우-프로스퀴네산 토 데리온 우데 텐-에이코나-아우투, 카이 우크 -엘라본 토 카라그마 에피 토-메토톤 카이 에피 텐-케이라-아우톤˙ 카이 에제산, 카이 에바실레우산 메타 투 크리스투 킬리아 에테˙
나는 또 보좌들과 그 위에 앉은 이들과 그들에게 주어진 심판하는 권세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예수의 그 증거와 하나님의 그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나 그 손에 그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왕이 되어 다스리는 것을 보았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 또 짐승과 그의 우상 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 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
성경에 붙여진 소제목들
번역 성경들에는 원문에 없는 소제목들이 많이 달려 있다. 이 소제목들은 번역 성경을 편집·발간하는 이들이 성경을 읽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소제목들은 독자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어떤 것들은 성경을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방해가 되기도 하며 나아가 성경을 거꾸로 읽게 하고 심지어 선악지식의 길잡이가 되고 있다.
그 소제목들에 관하여 몇 가지 예를 들어 살펴보자.
누가 호음(유앙겔리온) 10장에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고 그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반쯤 죽은 것을 버려두고 가버렸다. 어떤 사마리아인이 여행하는 중에 그 길로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를 도와서 살게 하였다는 예수의 비유의 말씀이 나온다. 사실 이 말씀은 너무나 평이하여 소제목을 달 필요가 없는 비유이다. 소제목을 단 것이 도리어 군더더기인 선악지식이다.
그런데 거기에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든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란 소제목이 붙어 있다. 이 비유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께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답하신 것이다. 율법에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하였는데 사마리아인은 강도 맞은 자를 이웃으로 알고 그를 자신처럼 사랑했다는 말씀이다. 그런즉 소제목을 붙이려면 적어도 ‘이웃을 사랑한 사마리아인’이라든가 ‘강도 맞은 사람을 사랑한 사마리아인’이라든가 ‘이웃 사랑’이라든가 ‘생명의 사마리아인’이라든가 해야 할 것인데 그 제목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고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 된 것은 사랑을 선악지식으로 바꾸었다는 확실한 반증이다.
성경을 번역하고 발간하는 사람들이 생명을 버리고 선악지식에 갇혀 있으니 그들이 성경을 잘 번역하려고 개정에 개정을 거듭한다고 할지라도 진리와 사랑을 받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지 않으니 생명의 말씀은 선악지식이 되고 만다. 용과 거룩한 자들의 싸움이 무엇인가. 사랑의 말씀과 선악지식의 싸움이다. 어느 ‘오픈성경’은 이사야서 58장을 ‘참된 예배에 대한 서술’이란 소제목을 달고 있다. 6절과 7절에 대한 해석은 이와 같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곧 올바른 금식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그런데 금식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고, 압박을 당하는 자들과 불쌍하고 가난한 자들(7절), 곧 종된 자와 가난한 자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에 대해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발휘되지 못한 금식이란 무용하다고 규정하고, 종된 자를 풀어 주며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의의 외적 증거로 제시된다. 성경은 이런 사실을 누누이 이야기한다(욥31:17-20;겔18:7,16;마25:35-36).”
위 해설에는 해설자의 엄청난 선악지식이 들어있다. 이는 이사야서를 영과 생명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한 때문이다. 이 해설은 종된 자를 풀어주며 가난한 자를 이웃으로 삼는 그 일이 금식임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금식을 곡기를 끊고 기도하는 육신의 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말하는 금식이란 곡기를 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사야는 사람들에게 악을 음식처럼 먹는 것을 끊는 것을 금식이라 하고 있다.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는 것이 흉악을 먹지 않는 금식이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는 것이 멍에를 메우는 식사를 금식하는 것이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는 것이 압제의 식사를 금식하는 것이며 모든 멍에를 꺽는 것이 멍에를 메우는 악의 식사를 끊는 것이라 함이다. 이사야가 말하는 것은 너희가 곡기를 끊고 기도하는 것은 흉악을 행하고, 멍에의 줄을 단단히 매고, 압제 당하는 자를 더욱 압제하고자 하는 식사가 아니냐 함이다. 이사야는 육신의 금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사야의 영과 생명의 눈에 드러난 이스라엘의 금식은 금식이 아니라 탐식이다. 이 해설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 발휘되지 못한 금식이란 무용하다고 규정하고”라 하였다. 바로 이런 것이 선악지식이다. 이 말은 다름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발휘된 금식은 유용하고’가 되기 때문이다. 여전히 곡기 끊고 기도하는 것을 금식으로 알고 있으니 이사야의 마음과는 상관없는 해설이다. 욕심과 선악지식을 할례한 자는 금식이 무엇인지 알고 참 금식을 행한다. 그가 누구인가. 이웃을 사랑한 사마리아인이다. 그는 욕심을 먹지 않고 이사야가 말한 바의 참 금식을 하였다.
이제 요한 계시록의 20장의 소제목을 살펴보자.
현대인의 성경은 요한 계시록 20장의 제목을 ‘천년 왕국’이라 하였고, 새 번역은 ‘천 년마다 있을 일’이라 하였고, 예루살렘 바이블은 ‘The reign of a thousand years’(한 천년의 통치)라 하였고, 뉴 인터내셔날 버전은 ‘The thousand years’(그 천년)이라 하였다.
오늘날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종말에 있을 천년 왕국에서 왕노릇 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패거리 안에 있어야 왕노릇할 수 있다는 투철한 자기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아무리 투철한 자기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 믿음은 하나님의 나라와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나라와 상관이 있으려면 자기 믿음에서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부활한 부활의 실존이 되어야 한다.
요한 계시록에는 다만 20장 4절에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을 다스렸다’란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20장에 제목을 붙인 이들은 어떻게 ‘천년 왕국’을 알았으며, ‘천년마다 있는 일’임을 안 것인가. 세상의 왕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reign over)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서 다스리시는(reign in) 분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그 자녀들이 하나 되는 영과 생명의 나라인데 ‘천 년 왕국’이란 제목을 붙인 이들은 그들의 욕심으로 ‘천년 왕국’이란 선악지식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천년 왕국’이란 말을 들었고 그것이 뇌리에 박혀서 오랜 세월 떠나지 않았다. 도대체 천 년 왕국이란 무엇인가. 왜 일부 사람들은 자기들만 천년 왕국에서 왕들이 된다면서 저렇게 난리들이며, 왕이 되는 사람은 정작 누구인가 하였다. 필자는 666이 솔로몬을 가리키는 징조임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천년 왕국’이란 솔로몬을 꿈꾸는 이들이 탐심으로 지어낸 거짓 왕국임도 알게 되었다.
‘천년의 다스림’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을 다스리는 왕들은 예수의 부활의 증거를 가진 부활의 실존들이며 하나님이 그의 진리로 드러내신 사랑 안에 거하는 실존들이다. 이들은 죽은 자들 안에 부활과 사랑으로 들어가 그들을 살려서 그들 또한 부활과 사랑 안에 거하게 하는 생명의 실존들이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육신의 첫 사람을 영의 둘째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왕들이다. 이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자들을 구원하시려고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시공의 근원) 속에 거하는 카이로스의 왕들이다. 그들의 하루는 천년과 같다.
‘디아 텐 마르튀리안 예수’(예수의 그 증거를 인하여)와 ‘디아 톤 로곤 투 데우’(하나님의 그 말씀을 인하여)
번역성경들에서 ‘디아 텐 마르튀리안 예수’와 ‘디아 톤 로곤 투 데우’가 선악지식의 관점에서 번역되어 있어서 요한 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을 선악지식의 감옥에 가두고 있다.
현대인의 성경은 ‘디아 텐 마르튀리안 예수’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로, ‘디아 톤 로곤 투 데우’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로, 공동 번역은 두 문장을 합쳐서 ‘예수께서 계시하신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다고’로 되어 있다. 또 예루살렘 바이블은 ‘for having witnessed for Jesus and for having preached God's words’로, 뉴 인터내셔날 버전은 ‘because of testimony for Jesus and because of the word of God’으로 되어 있다. 이 번역들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보자.
‘예수의 그 증거를 인하여’는 무엇이며 ‘하나님의 그 말씀을 인하여’는 무엇인가. 예수의 그 증거는 그의 믿음의 증거 곧 그의 부활이다. 우리는 예수의 믿음과 하나 된 믿음으로 그의 부활에 동참한다. 오늘 여기서 예수의 부활에 동참한 부활의 실존이 아니면 예수의 그 증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종교인일 뿐이며, 그 종교인은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를 죽이는 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삼는다.
하나님의 그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고 욕심으로 말씀(진리)만을 받은 자는 그 말씀을 선악지식이 되게 한다. 선악지식이 되어버린 말씀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용과 짐승과 거짓 예언자와 음녀와 싸우는 우리의 싸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하나 된 작은 자의 영적 싸움이다. 작은 자의 믿음이 큰 자의 자기 믿음과 싸우는 것이며, 작은 자의 생명의 말씀이 큰 자의 선악지식과 싸우는 것이다. 용은 우리에게 욕심과 선악지식으로 큰 자가 되라고 하는 반면 어린양은 우리에게 사랑과 진리로 작은 자가 되라 하신다. 작은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요, 큰 자는 하나님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 자다. 그들의 하나님은 용이기 때문에 이 싸움을 위하여 용이 잠시 풀려난다.
이제 보좌들과 그 위에 앉은 이들과 그들에게 주어진 심판의 권세에 대하여 살펴보자. 보좌들은 누구를 위하여 예비된 것인가. 그것들은 심판의 권세가 주어진 이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면 그 심판의 권세가 주어진 이들은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곧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그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영혼들과,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나 그 손에 그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다. 그들이 살아서 그 보좌들 위에 앉아서 심판을 행한다. 즉 오늘 여기서 그 첫째 부활의 실존을 이룬 이들에게 심판의 권세가 주어진다. 이 심판은 선악 심판이 아니다. 그 심판은 죽을 것이 죽고 살 것이 살게 하는 부활의 심판이다. 오늘 여기서 육신의 자기 믿음에서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하나 된 영의 믿음으로 살아나게 하는 심판이요, 자기 욕심에서 죽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 된 진리로 살아나게 하는 심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 같이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그 말씀을 인하여 목베임을 당한 자들과,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나 그 손에 그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왕이 되어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자들을 살리는 심판을 행한다.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 계시고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그들은 사랑의 왕들이다. 천년의 다스림은 천년 왕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5 호이 로이포이 톤 네크론 우크 에제산 아르키 텔레스데 타 킬리아 에테. 아우테 헤 아나 스타시스 헤 프로테.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천년이 끝나기까지 살아나지 못했다. 이것은 그 첫째 부활이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아나지 못하더라)
처음 부활과 나중 부활
처음 부활은 무엇이며 나중 부활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은 네페쉬 하야다. 그 ‘네페쉬 하야’가 땅을 향해 살면서 하나님을 향해 살고 있지 아니하면 그 육신은 살았으나 그의 혼은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 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레네페쉬 하야’(산 혼의 실존)가 된다. 그것이 처음 부활이다. 그 처음 부활 속에서 그는 다시 ‘살려주는 영’의 실존으로 나아간다. 그가 ‘살려주는 영’이 되면 그는 죽은 자를 살리려고 그 죽은 자들을 위하여 그들 안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이것이 나중 부활이다. 이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은 부활이다. 처음 부활은 죽었던 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혼이 살아난 것이요, 나중 부활은 살려주는 영의 실존이 된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본받아서 죽은 자들을 위하여 그들 안에서 죽었다가 다시 사는 일이다.
나중 부활은 ‘네페쉬 하야’가 ‘레네페쉬 하야’가 되는 그 처음 부활과니 같지 아니하다. ‘살아난 자’가 자기의 욕심과 선악지식을 떠나 보내고(자기 속량을 이루고) ‘살려주는 자’가 된다.살려주는 영이 된 그는 죽은 자를 살리려고 그들을 위하여 그들 안에서 죽었다가 사는 부활의 권세자가 가진 부활이다. 요한 계시록 20장 5절의 ‘그 첫째 부활’은 ‘네페쉬하야’가 ‘레네페쉬 하야’가 되는 처음 부활과 살려주는 영의 부활의 권세로 부활하는 나중 부활을 온전히 하나 되게 하는 자들 가운데서 이루어진 첫번째 부활이다.
그 첫째 부활을 맞이한 자들은 부활의 알파와 오메가를 이루었다. 기록된 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 있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11:26)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레네페쉬 하야’의 부활이 먼저 온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대하여 주었던 혼이 먼저 살아나서 ‘산 혼의 실존’이 된다.
그러나 이 ‘산 혼의 실존’은 아직 살려주는 영이 아니다. 그 산 혼의 실존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려주는 영이 되어야 한다. 기록된 바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자기의 그 혼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자기의 혼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그것을 보존하리라”(요12:25)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혼을 살리시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그 혼을 사랑하며 잃어버리게 하려 함이 아니라 ‘산 혼의 실존’이 ‘살려주는 영의 새로운 실존’으로 지어지게 하려 함이다. 새 창조는 거듭남이며 부활이다. 처음 부활은 나중 부활을 위하여 있고 나중 부활은 영생을 이룬다.
세상에 대하여 살고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 있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처음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다. 처음 부활이 없으면 생명의 부활인 나중 부활 또한 없다. 그들에겐 다만 심판의 부활이 있을 뿐이다. 처음 부활을 받았을지라도 ‘살려주는 영’(나의 나 됨)으로 나아가지 아니하고 아담처럼 그 욕심과 선악지식을 좇아서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그는 살아난 혼을 잃어버린다. 그는 용이 잠시 무저갱에서 풀려나서 세상을 미혹할 때 그를 좇아서 함께 망할 것이다. 창세기 3장의 아담이 그 일의 모형이다.
6 마카리오스 카이 하기오스 호 에콘 메로스 엔 테 아나스타세이 테 프로테˙ 에피 투톤 호 듀테로스 다나토스 우크-에케이 엑수시안, 알 에손타이 히에레이스 투 데우 카이 투 크리 스투, 카이 바실레우수신 메트 아우투 타 킬리아 에테.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되고 거룩하다. 그 둘째 사망은 그들 위에 아무런 권 세가 없고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들이 될 것이요 또 그와 함께 천년을 왕이 되어 다스릴 것이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 불어 왕노릇하리라)
요한 계시록에 ‘복되다’(마카리오스)는 말씀이 일곱 번 쓰이고 있다. 여기 20장 6절은 다섯번째요, 19장 9절에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은 자들이 복되다 한 것이 네번째다. 1장 3절도, 14장 13절도, 16장 15절도, 19장 9절도 20장 6절의 복된 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복되고 거룩한 자만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고 천 년 동안 왕으로서 다스릴 것이다. 살려주는 영이 된 사람들이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한다.
5장 10절에서 어린양이 사람들을 그의 피로 사서 하나님을 향한 왕들과 제사장들이 되게 하신 것은 알파요, 20장 6절에서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이들의 영혼들과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나 손에 그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제사장들과 왕들이 된 것은 오메가다. 알파는 자기가 자기를 다스리는 왕이요, 자기가 자기를 제물로 삼는 제사장이다. 오메가는 죽은 자를 살리는 부활의 제사장이요 ‘레네페쉬 하야’를 다스리는 사랑의 왕이다. 이 일은 시공 너머의 창조의 근원 안에서 행해지는 일이므로 그 날들은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 둘째 사망은 복되고 거룩한 자들은 위에 아무런 권세가 없다.
욕심과 선악지식으로 계시록을 읽는 이들은 육신의 첫 사람 위에 군림하는 왕과 남을 희생시키는 인육제사를 행하는 제사장의 자리를 탐내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알파의 왕과 제사장도, 오메가의 제사장과 왕을 알지도 소망하지도 아니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아래에서 낳아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7 카이 호탄 델레스데 타 킬리아 에테, 뤼데세타이 호 사타나스 에크 테스 퓌라케스 아우 투,
천년이 끝나면 사탄은 그의 감옥에서 풀려날 것이며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사탄은 사망의 세력이다. 그가 풀려나서 행하는 일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사망으로 이끌어가는 일이다. 결국 그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사망을 이긴 자들로부터 자기 믿음으로 사망 아래 처한 자들을 분리하는 일이 되고 있다.
8 카이 에크셀류세타이 플라네사이 타 에드네 타 엔 타이스 테사르신 고니아이스 테스 게 스, 톤 곡 카이 마곡, 쉬나고게인 아우투스 에이스 톤 폴레몬, 혼 호 아리스모스 아우톤 호스 헤 암모스 테스 달라세스.
그는 그 땅의 사방에 있는 나라들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그들을 모아 전쟁하려고 나올 것이며 그들의 수효는 바다의 모래와 같을 것이다.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 래 같으리라)
이 전쟁은 아마겟돈 전쟁의 오메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변함없이 징조로 쓰신다. 즉 이스라엘은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에클레시아의 실존을 가리키는 징조다. 이스라엘이 징조이므로 곡과 마곡도 징조이다. 곡과 마곡은 에스겔서 38-39장에 북방의 대군을 인솔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원수로 등장하고 또 망할 것이 예언되어 있다. 이 곡과 마곡의 일이 이미 이루어진 것이든 아니면 앞으로 이루어질 것이든지 상관없이 그 일은 에크레시아를 위한 카이로스의 징조요 그 실상은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이루어진다. 이 때에 양과 염소, 알곡과 가라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과 용의 무리들이 나뉘고 심판된다.
용이 땅의 네(4)모퉁이에 있는 나라들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한다 하였으니 이는 하늘의 네 생물들로 징조되는 사랑과 생명과 거룩과 초월의 네 실존들을 대적하는 네 세력이다. 용은 숫자의 세력으로 작고, 약하고, 적고, 가난한 적은 무리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크고, 강하고, 많고, 부유한 무리로 압도하려 할 것이다.
9 카이 아네베산 에피 토 플라토스 테스 게스, 카이 에퀴크류산 텐 파렘볼렌 톤 하기온, 카 이 텐 폴린 텐 에가포메넨, 카이 카테베 퓌르 에크 투 우라누, 카이 카테파겐 아우투스˙
그들은 그 땅의 지면을 넓게 차지하고 올라와서 그 거룩한 자들의 진 곧 하나님이 사랑하 시는 그 성을 둘러쌌다. 그러나 그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그들을 삼켜 버렸다.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모래 같이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지면을 가득 채우고 거룩한 자들의 진을 둘러쌌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심판의 불에 대하여는 대책을 취할 수 없었고 그 불에 삼키웠다. 선악의 세력은 땅에서 많은 숫자의 사람을 동원하여 그들의 승리를 보장받으려 하지만 그들은 불에 삼키우는 티끝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성을 둘러싼 자들은 불에 삼키웠으나 그 성과 그 성을 지킨 거룩한 자들은 불의 시련을 이겼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심판의 불은 불타버릴 것과 불타지 않을 것을 나누었다. 하나님 앞에서는 거룩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불타버린다.
10 카이 호 디아블로스 호 플라논 아우투스 에블레데 에이스 텐 림넨 투 퓌로스 카이 데이 우, 호푸 카이 토 데리온 카이 호 프슈도프로페테스˙ 카이 바사니스데손타이 헤메라스 카이 뉙토스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톤 아이오논.
또 그들을 미혹하는 그 마귀가 불과 유황의 그 못에 던져졌다. 거기는 그 짐승과 그 거 짓 예언자도 있어서 그들은 밤낮 세세토록 괴롭힘을 당하리라.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 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마귀와 짐승과 거짓 예언자를 괴롭히는 것은 무엇인가. 그 불과 그 유황이다. 욕심과 선악지식으로 불과 유황의 못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적대하며 스스로 예비하여 들어간 처소이다. 욕심과 선악지식을 좇는 사람은 스스로 우상을 만들어내고 또 자기가 만들어낸 우상에게 미혹되다가 우상이 먼저 불과 유황의 못에 던지운 후에 그들도 거기에 던지운다. 인간은 자신의 머리의 우상, 가슴의 우상, 배의 우상과 함께 그들이 스스로 예비한 불 못에서 밤낮으로 이를 갈며 슬퍼하지만 거기서 나오지 못하고 세세토록 고통을 당한다.
11 카이 에이돈 드로논 메간 류콘, 카이 톤 카데메논 에프 아우톤, 후 아포 투 프로소푸 에퓨겐 헤 게 카이 호 우라노스, 카이 토포스 우크- 휴레데 아우토이스.
또 나는 한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았다. 그 땅과 그 하늘이 그 얼굴 앞 에서 도망쳤고 그것들을 위한 처소도 발견되지 않았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용과 짐승과 거짓 예언자가 불과 유황의 못에 던지우고 그들을 좇던 땅의 무리들이 다 죽었기 때문에 욕심과 선악지식이 거할 그 땅과 그 하늘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 앞에서 도망쳤고 또 그것들을 위한 처소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감추이지 않고 드러났기 때문이다.
요한이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본 것 같이 마음이 청결한 자는 영과 생명 안에서 언제나 그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호라오’한다. 크고 흰 보좌는 의의 보좌요 그 위에 앉으신 이는 의로 심판하신다. 그 의는 사람이 그의 욕심과 선악지식을 좇아 말하는 공의도 정의도 아니다. 사람들의 의는 흑암일 뿐이다. 하나님의 의는 그의 새 창조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사랑의 의요, 생명의 의요, 거룩의 의요, 초월의 의다. 크고 흰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서 나오는 사랑과 생명과 거룩과 초월 앞에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과 선악지식은 있을 곳이 없다.
12 카이 에이돈 투스 네크루스, 투스 메갈루스 카이 투스 미크로스 에스토타스 에노피온 투 드로누, 카이 비블리아 에노이그데산˙카이 알로 비블리온 에노이크데, 호 에스틴 테 스 조에스˙ 카이 에크리데산 호이 네크로이 에크 톤 게그람메논 엔 토이스 비블리오이 스, 카타 타- 에르가- 아우톤.
나는 또 죽은 자들, 곧 큰 자들과 작은 자들이 그 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 고 책들이 펴졌고 또 다른 책이 펴졌는데 그것은 그 생명의 책이다. 그 죽은 자들이 그 책들에 기록된 자기들의 일들을 좇아서 심판을 받았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여기 보좌앞에 서 있는 죽은 자들은 누구인가. 11절에서 그 땅과 그 하늘이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도망갔다 하였다. 그러자 있을 곳이 없어진 죽은 자들이 보좌 앞에 심판받기 위하여 서게 되었다.
각 사람의 심비는 그 자신을 기룩한 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미음을 가진 자는 그 심비에 사랑과 거룩을 기록하고 자기 믿음을 가진 자는 그 심비에 욕심과 선악지식을 기록한다. 그 심비에 기록된 대로 각 사람은 자신의 일을 하며 산다. 각 사람은 그 일을 좇아서 심판을 받는다. 누구든지 심은 대로 거둔다.
13 카이 에도켄 헤 달라사 투스 네크로스 투스 엔 아우테 카이 호 다나토스 카이 호 하데 스 투스 네크로스 투스 엔 아우토이스, 카이 에크리데산 에스카토스 카타 타-에르가 아 우톤.
그 바다가 그 안에 있는 죽은 자들을 내어 주었고 또 그 사망과 음부가 그들안에 있는 죽은 자들을 내어 주었다. 그리고 각 사람이 그들의 일을 좇아서 심판되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바다가 내어 준 자는 육신의 먹거리를 좇아 생존에 매어 있는 자요, 사망이 내어 준 자는 사망을 생명으로 삼고 남의 피 흘리기를 즐겨하던 자요, 음부가 내어준 자는 부자의 믿음으로 음부를 짓고 일락을 즐기던 자다.
14 카이 호 다나토스 카이 호 하데스 에블레데산 에이스 텐 림넨 투 퓌로스˙ 후토스 호 다 나토스 호 듀테로스 에스틴, 헤 림네 투 피로스.
그리고 그 사망과 그 음부가 그 불 못에 던져졌다. 그 불못이 둘째 사망이다.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다)
사망과 음부가 심판받아 불 못에 던져졌다. 이제 영원한 생명과 상관없는 존재들이 심판받아 갈 곳은 불 못 뿐이다. 땅도, 하늘도, 바다도, 음부도, 사망도 그 무엇도 그들이 의지할데란 없다.
15 카이 에이 티스 우크-휴레데 엔 테 비블로 테스 조에스 게그람메노스, 에블레데 에이스 텐 림넨 투 퓌로스.
누구든지 그의 이름이 그 생명의 책에 기록된 것이 찾아지지 아니한 자는 불 못 속으로 던져졌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
사람의 심비가 생명책이다. 누구든지 자기의 심비에 생명이 기록되거나 사망이 기록된다. 자기의 생명책을 가진 자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자기 이름이 기록된 것을 안다. 그러나 그 심비에 사망을 기록한 자는 아무리 그의 이름을 어린양의 생명책에서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 찾아지지 아니한다.
변하지 아니하는 믿음의 법
용의 미혹을 받아 모래 같이 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자들의 진을 둘러쌌다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불에 삼키운다. 이 때 거룩한 자들은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살았다. 그러면 산 자들은 그들 뿐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은 아니지만 용의 미혹에 불구하고 전쟁에 가담하지 않은 자들이 남아 있다. 이들 역시 불 못에 던져우는가. 21장 8절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법으로 사람들이 구원된다. 그렇자면 많은 사람들이 ‘최후의 심판’이라고 알고 있는 이 심판은 무엇인가.
‘최후의 심판’이란 선악지식이 만들어낸 종말론적 교리일 뿐이다. 그들은 선과 악의 싸움에서 선이 최종적으로 승리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악전쟁을 하시는 분이 아니다. 죽은 자들을 살리는 생명전쟁을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생명을 좇는 자에게는 생명으로, 사망을 좇는 자에게는 사망을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각 사람은 오늘 여기의 카이로스의 실존 속에서 심판을 받지 않으면 온전한 부활의 실존을 이루지 못한다. 요한 계시록을 종말서로 읽고 있는 이들은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면서 정작 오늘 여기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자신이 받아야할 심판은 받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떠나가야 할 용과 짐승과 거짓 예언자와 음녀가 그 안에 그대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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