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이에게 아버지는 정말 위대한 분입니다. 키도 크고 힘도 세고 그 어려운 젓가락질도 잘하시고 오토바이도 잘 타시는 분이시고 그 분이 없는 삶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사춘기가 되고 청년기가 되면 아버지가 시시해 보이기도 하고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사회생활을 하고 애들을 키우다 보면 그 마음대로 안되는 고된 삶속에서 자식들을 키워내신 것에 그저 고맙고 그렇게 똑같이 닮아가는 내 모습에서 삶과 생명이라는 것에 대해 숙연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느덧 내가 그 아버지가 되어 있습니다.
상제님을 대하는 마음도 그런 단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막연히 우러러 범접하지 못할 누군가로 숭배를 하다가 어느덧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안목에서 이게 무슨 이상한 모습인가 싶어 부정을 하는 과정도 있다가 어느덧 삶의 경험들을 통해 상제님의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눈이 떠지는 순간이 오게 되는 것 같습니다.
대두목 신앙을 벗어나야 한다는 각성들을 보게 됩니다만 상제님께 의존하는 마음이 있는 한은 또 다른 모습의 의존적인 신앙이 반복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상제님에 대해 절대자로서의 환상을 가지고 대하기 시작하는 데서 모든 문제가 시작이 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은 상제님이 뭔가 해 주시겠지 하는 의존적인 마음이 나를 나태하게 하고 또 누군가를 기다리게 합니다. 상제님께서는 자신을 매개로 해서 통하려 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내가 성숙한 만큼 상제님의 마음이 보일 것입니다. 절대자에 대한 환상과 신화를 가지고 나와 다른 어떤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시작을 하면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환상을 벗어나 내가 현실속에서 성숙하고 발전하는 길을 가야만 합니다.
누구의 말이라 믿고 말고가 아닌 내가 고민하고 찾아가는 길을 갈 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뭔가 ? 나의 시작의 무엇이고 삶은 무엇인가? 근본적인 의문를 향한 갈증과 고민이 없으면 결국 도식적이고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누구에게 의존해 그저 나태하게 위안을 얻으려 할뿐 스스로 나아가는 성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진정성과 고민이 있어야 명실상부한 도의 길을 갈 수가 있습니다. 진리와 근본에 대한 고민을 가진 사람에게 다가오는 상제님의 말씀과 절대자에 대한 환상으로 접근하는 사람에게 다가오는 상제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진리에 집중하느냐와 자극적이고 피상적인 대두목 찾기와 도수풀이에 눈이 가느냐는 각자의 마음의 차이에서 나옵니다.
믿겠다고 믿기를 시작하는 것만큼 자신에게 무책임한 얘기도 없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고민하고 공부하고 발전해 나갈 여지를 스스로 닫아 버리는 것이기에 아무리 누가 도와주려 해도 도와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생활도 누구에 기대어 쉽게 가려고 하면 갈수록 입지가 좁아지고 난처한 상황으로 흘러갑니다. 힘들어도 내 능력을 키우고 뚝심을 가지고 자신을 키우고 자립하는 방향으로 살면 시간이 갈수록 자유로워지고 여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누구를 따라 가는 길은 몇번을 가도 항상 새롭습니다. 책임져 주고 뒷감당해 줄 상사가 있을 때와 없을 때는 일을 대하는 자세가 이미 다릅니다. 하늘 아래 내가 아니면 책임질 사람도 의지할 사람도 없을 때 비로서 그 일은 내 일이 되고 거기서 나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게 되고 발전이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고민해 나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 비로소 그 앞서간 스승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 분들도 그런 길을 가신 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에 대해 충성을 바치는 순서대로 사람을 쓰는 대통령은 올바른 대통령일 수가 없습니다. 입으로 열심히 믿음을 외치는 순서대로 구원해주고 은혜를 베푸는 상제님은 올바른 상제님일 수 없습니다. 상제님이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당신께서 본을 보이고 일러준 대로 현실 속에서 서로 잘되게 하여주고 잘 어울려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모두가 잘 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사에도 사규가 있어 사람을 선발하고 승진시키는 기준이 됩니다. 대표이사의 의중에 따라 회사가 성장해야 할때는 추진력이 강한 사람을 쓰고 회사가 안정기에 접어 들면 도덕적이고 관리능력이 좋은 사람을 상황에 맞게 뽑아서 쓰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천지공사라는 것도 후천을 열어가는 큰 틀의 인사 원칙을 확정하신 것입니다. 천존신과 지존신이 주장하던 선천에서 인존시대인 후천으로 넘어가면서 조화권능을 비롯한 삼계를 다스리는 권한을 인간에게 다 넘겨주어야 하기에 철저하게 몸과 마음이 천지의 마음을 깨쳐 상생화된 사람에게 신도에서 알게 모르게 힘을 실어주어 후천을 어김없이 열어갈 수 있게끔 신도의 인사의 원칙을 세워 놓으신 것이 천지공사인 것입니다. 결국 입바른 충성이 아니라 그런 인사원칙에 맞는 그런 됨됨이의 사람들이 되어야 쓰임이 되고 그런 세상이 오는 것입니다.
구독하는 어느 잡지에 이런 칼럼이 있었습니다.
"17~20세기 일본 바둑이 이뤄낸 업적은 대단했고 가히 신화로 받들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일본 9단은 별격의 존재였고 우칭위안이나 사카타는 신과 같은 이미지로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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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타 에이오 9단이 슬리퍼를 신고 유유히 오락가락하며 바둑판을 가볍게 훑어보고는 바로 돌을 하나 집어 착점하는 오연한 거동과 이에 반해 그와 대국하는 중국 기사들이 머리를 끌어안고 고심하는 정경을 볼 수 있었는데 그때 나는 말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하지만 20세기 말 한국은 신화를 걷어냈다. 62년 도일했던 조치훈9단이 80년 명인 타이틀을 획득하면서 한국은 비로소 알았습니다. 바둑은 신비의 세계가 아니고 지식과 노력의 세계구나. 일본유학 11년만에 돌아온 조훈현은 인식의 지평이 환상으로 물들지 않았다. 89년 조훈현 9단이 제1회 응씨배를 우승하면서 일본을 넘어섰다. 그러자 한국 바둑계는 그 다음날부터 일본에 대한 환상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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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 극복의 핵심은 '신화 같은 일본'이 '우리가 만든 일본'이라는 것을 아는데 있었다. 그것은 투사를 멈추는 것이다. 다행히 두 천재가 길을 밝혀주었다. 천재가 바둑의 세상을 열면 바둑 공동체는 비로소 그렇게 열린 세상을 함께 맞아들인다."
바둑이 그렇듯이 신앙도 신비의 세계가 아니고 지식과 노력의 세계입니다.
인식의 지평이 환상으로 물들지 않은 사람이 나오면 비로소 그 신화를 걷어내고 공동체는 비로소 새로운 세상을 함께 맞아 들이게 됩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예수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석가를 믿으려면 석가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동차 빵빵거린다고 삿대질 하고 폭언을 하고 손해보고 피해본다고 싸움을 불사하는 사람이 어찌 예수를 따른다고 하고 석가를 따른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증산을 잘 믿으려면 증산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끝마다 증산을 앞 세운다고 증산을 잘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내 주위에서 내 생활에서 그 증산이 보이신 언행과 마음을 헤아려 수고롭게 실천해 사랑하고 용서하고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 내 주위부터 세상을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상제님이 39년간 보이신 모습은 자신이 옥황상제이니 숭배하기를 바라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낮아져 세상과 동고동락하는 모습이었고 누구나 자신의 마음을 잘 닦아 자신의 진면목을 찾기만 하면 모두 자신과 같이 전지전능할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상제님은 원래 그런 모습이셨건만 신화로 채색되어 숭배되고 의지하는 대상으로 자리매김되어 내려왔기에 기존의 유불선 종교가 그러했듯이 현실과 괴리되어 환상의 교주를 숭배하고 관념적으로 종속되어 현실속에서 그런 깨우침이 녹아들어 실천되지 못하는 우를 되풀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환상을 벗어나야 하고 신화로 채색된 신앙을 걷어야 합니다.
@ 어느날은 종도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들은 나를 매개로 해서 통하려 하지 말고, 너 스스로 심중(心中)에 직통하는 길이 있음을 깨달으라." (정영규의 천지개벽경 p270)
@ 이제 잘 듣고 명심하라. 너희도 역시 전지전능하니라. (정영규의 천지개벽경 p333)
@ 하루는 종도 한 사람이 벽에 기대고 앉았거늘, 경계하시며 가라사대 "선천은 남에게 의지하는 바람에 기대고 망하나니, 너희들은 하다못해 방벽이라도 기대지 말라."하시니라. (정영규의 천지개벽경 P250)
@ 어느날 공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이 저의 인격을 확실히 찾아 알아야 우주간에 자기가 실지로 있는 것일 진대, 하물며 너의 인생까지 버리고 다른 타물에 있다고 의지하랴." (정영규의 천지개벽경 pp331-332)
@ 어느날은 종도들을 정좌시키고 엄숙히 명하시기를 "네가 스스로 너를 구원해야 나도 역시 너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요, 네 스스로 타력에 의지하면 아무리 너를 구원하려 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하시더라. (정영규의 천지개벽경 p268)
이 말씀에 다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상제님의 뜻이 아닐런지요. 얼마나 느끼고 알아 듣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태을도는 그 상제님의 뜻을 헤아려 묵묵히 하나하나 현실속에서 실천해 가는 모임입니다.
첫댓글 천지부모님의 마음과 함께 하는 태을도입니다. 고맙고 감사한 이심전심의 말씀 잘 읽었습니다.
"철저하게 몸과 마음이 천지의 마음을 깨쳐 상생화된 사람에게 신도에서 알게 모르게 힘을 실어주어 후천을 어김없이 열어갈 수 있게끔 신도의 인사의 원칙을 세워 놓으신 것이 천지공사인 것입니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