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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확산과 극복의 미학
권대근
수필비평가,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
I.
현대문학은 죽음의 고찰에서 비롯되었으며 현 세기의 문학 세대를 식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가 바로 죽음의 사실에 반응하는 그 방법 여하에 달려 있다고 한 루이스의 지적을 상기하면서 평자는 격월간평을 시작하려 한다. 지올로우스키는 현대문학의 차원에서 죽음이 현저해진 요인은 바로 사회적인 붕괴의 시대에 있어서 가장 격렬해진다고 보고 있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가치가 붕괴되면서 신념의 갈등과 마주치게 되면 죽음의 의식은 개개의 인간 정신에 불안하게 다가오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삶이 끝나면 어찌 되는가에 지대한 관심이 있으나 인생에서의 죽음이 특수한 관계성이므로 어느 누구에게서도 어느 곳에서도 시원한 답변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 그 시간이 눈앞에서 전개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줄 것이다.
어쨌든 인간의 죽음이란 최대의 난제이며,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또한 죽음을 이긴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격월간『수필시대』5,6월호에 실린 수필 중에는 ‘삶과 죽음 그리고 이별과 만남’을 다룬 수필이 많았다. 왜 많은 작가들이 무엇 때문에 죽음의 문제를 다루게 되었을까. 인간사 중에서 가장 절실한 관심사는 사랑과 죽음이다. 대부분의 문학이 추구하는 문학적 주제는 ‘사랑’과 ‘죽음’이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전자는 살아있는 상태에서 삶의 온기를 가늠할 수 있는 확실하고도 유일한 방법이고, 후자는 누구에게나 어떠한 형태든 다가올 수밖에 없는 필수적인 코스다.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면 모든 이들이 기뻐하고 축하해 준다. 그러나 오랫동안 정들었던 이가 세상을 떠나면 슬퍼하며 통곡한다. 탄생과 소멸은 이렇게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인간사에 공존하는 것이다.
II.
강경애의 <꺼꾸로 가는 시계>, 박용수의 <아버지의 와이샤츠>, 윤석희의 <미라의 눈물>, 이은희 <로꾸꺼 로꾸꺼>, 한경화의 <끈> 등의 죽음과 관련된 글들은 우리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가, 또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는 게 바람직한가 하는 절실한 문제를 천착하고 있다. 반면에 강여울의 <뿌리>, 김경희의 <찔레꽃 정서>, 임지윤의 <달콤한 시간> 등은 이별과 만남을 화소로 한 서정성이 짙은 수필이다. 위에서 언급한 수필 작품들은 우리 삶의 양면을 그리고 있어 작은 감동을 준다. 지면 관계상 죽음과 관련된 작품만 점검해 보겠다.
강경애의 <거꾸로 가는 시계>는 피츠제럴드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죽음에 관한 단상을 수필로 쓴 것으로, 거꾸로 가는 인생보다는 앞을 향해가는 삶이 바람직하다는 작가의 인생 순응적 생사관이 녹아있는 작품이다. 삽화로 나오는 영화는 아이러니한 소재로 만들어진 것인데, 시간이 제대로 흘러가든 거꾸로 흘러가든 삶과 죽음은 같다는 것과, 거꾸로 가는 시간이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준다는 측면에서 작가의 인생 순응적 세계관이 잘 표현되었다. 80세 노인의 외형으로 태어난 한 청년이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게 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는 더욱 젊어지고, 그녀는 갈수록 늙어가서 할머니가 되는 영화 속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무모하게 운명을 거슬러 젊어지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경종을 울려준다. 수필은 적절한 예화나 삽화의 도입으로 구체화되는 수가 많다. 과거로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실례로 보여준 영화 속 이야기의 차용은 매우 적절했다. 이러한 적절한 삽화의 도입으로 운명론적인 주제의식을 의미화하는 작가의 문학적 역량이 빛난다.
구체성과 보편성은 문학 고유의 특성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문학의 독자성을 옹호한 이래로, 문학 작품들이 영속적으로 자신의 생명력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바로 감각적 구체성과 보편성 때문이었다. 수필가에게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가는가이다. 위의 측면에서 보면, 주제의식의 구체화를 돕는 데 사용된 <회귀사상>, <기억의 뇌파>, 츠즈키 타쿠치의 <시간의 패러독스>, <타임머신>,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 등의 영화 이야기들은 전부 시간의식의 현상학에 관련된 것들이다. 모든 재료들이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과거의 시간에서 다시 필름을 감는 것이다. 이런 영화에 나타난 ‘과거로 돌아 가보기’는 현실 속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인간이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 이 작품을 감상함에 있어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비록 인간이 과거로 돌아갈 수 없지만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꿈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과거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새김함으로써만 진정으로 과거를 넘어설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과거로 가는 시간 여행의 다양한 이야기를 일관된 관점으로 투시하여 내적 통일을 이룸으로써 보편성을 확보하는 작가의 저력에 박수를 보낸다. 주어진 삶을 진실하게 살아가는 든든한 생활인의 체취를 실감하게 해서 심미성과 교훈성이라는 두 가지 문학의 목적을 성취해내고 있어 다행스럽다.
박용수의 <아버지의 와이샤츠>는 아버지를 그리는 사부곡이다. 인정을 흘리는 일로만 문학이 될 수는 없다. 주어진 소재들을 어떻게 문학적으로 풀어내는가가 중요하다. 이 작품이 평범한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의 표상이자 이미지로 드러나고 있는 와이셔츠를 제재로 해서 아버지의 죽음을 안타깝게 애도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은 누구에게나 같다. 죽음을 말한다고 주제의식이 빛나는 건 아니다. 죽음을 그 자체로 보느냐 아니면 죽음을 다른 무엇을 가지고 보느냐에 따라 수필의 품격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이 수필은 끈적한 부정에 대한 그리움을 표방하고 있다. 첩첩산중의 산골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아버지가 농사일을 하다 고랑에 쓰러진 후, 그길로 고향산천과 이별하였기에 작가에게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이 수필은 그 안타까움의 정서를 물화적 기법으로 소화해 낸 까닭으로 문학성을 확보하고 있다. 아버지의 존재를 의미하는 상징물인 와이셔츠에 주제의식을 담아내었던 것이다. 죽기 전에 아버지가 입었던 그 눈부신 와이샤츠를 빨랫줄에서 본 작가는, “어머니는 아버지의 부재를 인정하지 않고 살았던 모양이다”라고 상상한다. 남편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어머니의 사랑을, 작가는 빨랫줄을 응시하며, ‘존재의 회귀를 꿈꾸는 욕망의 허물이 되어 흔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적고 있다. 결말부 마지막 문장의 묘사는 과히 압권이라 할만하다.
어머니가 능주장에 다녀와 평생에 한 번도 입어보지 못했을 아버지의 와이셔츠를 사왔는데, 제대로 입어보지도 못하고 유명을 달리한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그리움은 “예전 같으면 사립문 여는 소리만 듣고도 마당을 뛰어 나왔을 어머니가 그 밝은 웃음을 잃고 오늘 따라 아무 반응이 없다”는 진술에 잘 드러내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이별로 파생될 수 있는 게 혈연과의 연대다. 그것은 얽매인 일상의 생활에서 새로운 창조의 기쁨을 누리는 희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필시 인간애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사부곡은 인간적인 향기를 구성하는 요체다.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아버지의 헌신적인 삶은 항상 남은 자에게 눈물 나게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이 작가에게 눈물이며, 영원한 안식처다. 젊은이들마저 기피한 높고 험한 곳에 땅을 아버지는 품삯도 마다않고 해마다 쟁기질을 하셨던 인정 많은 분이라 더욱 그 애도가 처절하다. 작가는 헌신적으로 살아온 아버지의 공덕을 칭송함으로써, 이 글에서 죽을 때까지 못다한 효를 실천하려 한다. 효심이 뜨겁게 솟구치는 글이다.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 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을 만끽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 정신을 압축된 정서로 형상화하기에 더욱 감동을 주는 것이다. 작품 속에 ‘하얀 와이셔츠’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원래 ‘와이셔츠’란 말은 ‘화이트 셔츠’가 변형되어 만들어진 단어다. 따라서 ‘와이셔츠’ 앞에 ‘하얀’이란 수식어는 불필요한 것이다.
윤석희의 <미라의 눈물> 역시 작가의 생사관이 녹아 있는 수필이다. 이장의 과정을 통해서, 그리고 육신이 썩지 않고 남아있는 미라의 주검과 육탈이 된 어머니의 주검을 비교하면서 동서양의 서로 다른 죽음의 의미를 찾아내고 있어 관심을 끈다. 이 작품의 특이한 관점은 주검의 존엄성에 대한 동양적인 해석이다. 미라가 된 주검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박물관에 옮겨져 수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 서양의 미라에 대한 작가의 관점은 대단히 부정적이다. 인체의 신비를 제공한다는 긍정적 관점은 윤 작가에게서는 볼 수 없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이 글에서 주검의 존엄성 문제를 제기한다. 육체의 인격은 사후에도 그대로 남는다고 하는 작가의 관점은 분명히 동양적인 사고다. 따라서 파라오의 미라는 작가의 눈에 흐름이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육신을 털어내지 못한 비애가 전신을 타고 흐르는 것으로 비친다. 작가는 미라 앞에서 분명 겉으로는 미라가 당당해보이지만 회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몸을 감싸고 있는 천들이 눈물자국으로 얼룩져 있지 않는가’라는 언술을 통해 주제의식의 의미화를 구축하는 작가의 역량이 빛난다 하겠다. 이는 작가가 문예적 미학을 구축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카이로 이집트 국립 박물관에 전시된 미라와 이장을 통해 보게 된 어머니의 주검에 대한 단상이 논리적인 맥락에서 수필로 승화되었다고 하겠다.
수필은 주제와 제재 양식의 글이다. 주제가 있는 수필은 참신한 인식과 정연한 논리가 만남으로써 독자를 지성과 관조의 세계에 머무르게 하여 감동으로 이끌 수 있는 법이다. 실상을 어떤 것과 비교하지 않고 그대로 널어놓으면 독자에게 실상의 맛을 미학적으로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연상과 상상으로 미의식에 접근하려는 독자의 영역을 침범하게 된다. 독자의 상상력과 연상력을 자극시키는 것은 비유와 대조기법을 통한 구체적인 현상과 사상의 형상화다. 주제의식을 나타내는 데 관련된 재료와 유사 또는 대립적인 재료를 선택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주제를 미루어 헤아리게 하는 것이 좋았다. 이 수필의 제목과 제재 그리고 주제와의 상관성은 과연 어떠한가. 왜 작가는 제목을 '미라의 눈물'이라 하였을까. 이 수필에서 '눈물'은 인간은 죽어서도 산다는 것을 암시한다. '눈물'은 상징과 암시적 기능을 하면서 작품 속에서 제재와 주제의 상관적 관계를 잘 맺고 있다. 작가는 몸을 감싸고 있는 ‘천’을 ‘눈물의 자국'으로 묘사함으로써 제재를 상상화해서 문예화하고, 미라의 비극과 인간의 존엄성을 운명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이런 작가의 사생관은 사람은 죽어서도 인격을 가진다는 데 있다. 우리는 쉽게 잘 잊는다. 사랑했고 친했던 사람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 슬퍼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문제는 누가 얼마나 진심으로 그 죽음을 애통해하고 오래 기억해 주느냐 하는 것이다. 주검의 상태를 보고 안도하는 작가의 속마음에 진한 진실의 사랑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이은희의 <로꾸꺼 로꾸꺼>는 사물의 새롭게 보기를 강조한 수필이다. ‘낯설게 보기’의 한 전형이다. 수필을 쓰는 사람들의 눈, 소재를 찾는 작가적인 눈은 매우 중요하다. 눈은 사물을 보는 감각기관이다. 같은 눈이라고 해도 사람의 생각에 따라 그 눈은 얼마든지 달리 작용한다. 이 대목은 현상을 다양한 각도로 보는 것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작가는 ‘다시 보기’를 통해 자신을 반성적 성찰대 위에 올려놓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은희의 이 수필이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은 참된 인식을 바탕으로 현상을 투시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전개는 작가 자신의 타성에 젖은 눈에 대한 각성으로 시작된다. 이를테면 사물을 거꾸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물이나 현상을 보는 우리의 안목이 얼마나 폐쇄적이며 습관적인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작가는 ‘곰’이란 글자에서 ‘문’을 본다. ‘미련스럽게 보이는 ’곰‘이지만, 이면에 기회의 ’문‘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견을 피력한다. ’운‘을 거꾸로 해서 보면, ’공‘이 되는데, 작가는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운‘도 닿고, 결국 인생은 ’공‘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달려가면 두려울 게 없다는 논리를 편다. 이 모두가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보기를 시도한 결과다. 생각 바꾸기를 통해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보자는 논리적 근거로 작가는 ’거꾸로‘ 보는 방법을 제시한다. ’곰문운공‘이란 사자성어를 참신하게 풀어내어 현대인들이 나아갈 바를 제시하는 참신한 인식은 이미 절반의 성공이라 하겠다.
기억이란 한 주체가 자신의 과거를 자신의 현재와 관련짓는 정신적 행위 및 과정이다. 기억은 과거를 한편으로는 지나가버린 것으로 확정지우면서도 동시에 현재화함으로써 과거의 시간적 지위를 변화시킨다. 따라서 기억의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와 같은 인간정신에 내재된 시간의식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아우구티누스에 따르면, 시간 체험 속에서 우리의 정신은 다가올 것에 대한 기대, 현재하는 것에 대한 주목, 지나간 것에 대한 기억 간에 상호 ‘긴장’을 이루고 있다. 시간의 이러한 세 양상 간의 ‘긴장’은 우리의 정신이 이들을 현재의 세 가지 양상으로 ‘전이’함으로써 비로소 ‘이완’된다. 이에 따라 세 겹의 현재, 확산되고 변증법적으로 파악된 현재가 나타난다. 즉 과거화된 것의 현재, 현재적인 것의 현재, 미래적인 것의 현재가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정신의 이완’을 통해 기다림, 기억, 주의력은 변증법적으로 매개된다. 우리의 시간체험에서 미래는 현재의 기대를 통해서 비로소 미래로 존립하게 되며, 기대는 이미 현재적인 것으로 ‘존재’한다. 또한 과거는 기억 속에서 ‘흔적’으로 우리에게 현존한다. 임지윤의 <달콤한 시간>, 조윤수의 <망각의 여행> 등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하는 작가의 소망이 담겨있어 눈길을 끈다.
한경화의 <끈>은 인간사에 있어서 ‘관계’를 살아야 할 이유로 내세우고 있는 수필이다. 작가는 그것을 ‘끈’이란 제재로 풀어내었다. 내용이 무엇이든지 간에 언술 구조가 어떠하든 간에 수필은 제재에 주제를 담아 화살로 쏘아 올려야 문학이 되는 것이다. 정서니, 사상이니, 상상이니 하는 문학의 구성요소도, 참신성, 함축성, 일관성, 탄력성이니 하는 문학의 네 가지 속성을 갖추어도 주제가 전략화 과정을 거쳐 작품 속에 내재화되지 않으면 수필의 주제가 인간학을 지향하고 있어도 작문이 되고 만다. 좋은 수필은 가치 있는 체험이 아니어도, 위대한 주제를 구현하지 아니 해도 반드시 주제가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나야 한다. 삶이니 진실이니 하는 특성의 실현보다 앞서는 게 수필 본질의 구현이다. 실감의 유리와 보수를 통해 미적 정서로 새롭게 태어난 주제가 마치 사과 속에 녹아 있는 영양분처럼 작품의 전체 구조 속에 은비로운 진리와 함께 숨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 수필 <끈>은 ‘찰라의 순간’에 세상을 자신의 마음으로만 받아들인 한 지인의 자살을 접하고, ‘죽음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자 쓴 수필이다.
이 수필은 문학의 영원한 테마인 삶과 죽음의 문제를 주제의식으로 내세우고 있는 데서 가치 있는 수필이다. 주제 지향성의 측면에서 보면, 삶과 죽음은 인류 공통의 문제이니까 보편성의 획득이 가장 용이하다 할 것이다. 수필은 개인적 경험의 특수성이 문학의 보편성으로 승화되도록 체험을 변형하고 보수해서 탄생되는 것이다. 이 수필은 ‘관계’를 암시하는 ‘끈'을 이용하여 주제의 함축성을 잘 살렸다. 이 작품의 서두는, “또 하루가 지나간다. 죽음을 향해 한 발자국 내딛은 것이다.”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뒤이어 작가는 삶을 ’태어나는 순간부터 길들이고 길들여지는 관계‘로 규정한다.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특별하지도 구차하지도 않은 삶이 만족되지 않지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작가는 주제화 전략 하에서 문학적인 장치를 활용하는 구성보다는 수미상관의 논리적인 서술을 통해 치밀하게 의미화 작업을 전개했음을 알 수가 있다. 아쉬운 점은 문단원리에 의해 문장이 전개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소통의 불가능성이 삶의 동력이 되는 시간을 살고 있다. 그러나 소통은 중요하기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필요하기에 중요한 것이다. '소통'이라는 말이 도덕이나 선행 같은 수사로 이해되는 요즈음이지만, '소통'과 '관계'는 우리들 삶의 전제이자 우리가 획득해야 할 삶의 중요한 가치이다. 이런 차원에서 작가는 “힘들게 사는 것이 싫다고 그 대안이 죽음일 수 없다”고 말한다. 죽음 뒤의 세상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현실세계의 고달픔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자살을 선택한다. 그 순간은 삶의 시간을 교란하는 상처와 슬픔의 시간이다. ‘관계’에 대한 자각은 이 위태로운 시간을 삶의 시간으로 끌어들이는 행위이고, 이면의 시간으로 삶을 구성하는 일이다. 수필의 언어가 밝음보다는 어둠에, 기쁨보다는 슬픔에, 희열보다는 절망에 한층 가까울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작가는 '고통'을 삶의 동력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며, 어쩌면 고통도 삶의 일부분임을 긍정해야 한다고 본다. "죽음 뒤의 세계가 존재한다거나, 현실세계보다 더 낫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을 그 근거로 댄다. 문제는 잘 알면서도 절망을 극복하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이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이 여기까지 더 나아갔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III.
수필은 현실과 언제나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수필이 체험적 이야기이건 아니건 간에 수필과 현실은 상호 밀착되면서 수필적 화자를 자기 속에 밀어 넣는다. 수필은 언제나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새로운 질서를 창조한다. 인간답게 사는 길을 연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론적 해명이면서 새로운 삶과 역사 진전의 지평을 가시화시켜 인간과 삶과 역사를 상승시킴으로써 새로운 현실을 전개함을 말한다. 그것은 문학이 사회나 역사성의 수용에 의한 전파적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죽음이나 사랑의 문제를 화소로 수필을 풀어내고 있는 작가들은 일차적으로 모두 문학의 사회적 성격을 잘 인식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들 수필에 나타난 것처럼 이렇게 우리도 죽음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죽음을 인생의 한 과정으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누구나 한 번은 죽게 마련이며 대부분의 사람은 노인이 되어 병들고 노쇠하게 되어 죽음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 왔다가 혼자 간다고 한다. 그러나 혼자 가는 죽음의 유형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천수를 누리고 가는 자연사가 있는가 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인 돌연사나 사고사도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도 있다. 이상과 같은 죽음의 현상들이 빈번히 목도되는 이때, 우리 수필가들이 죽음에 대한 강박 관념을 버리고 삶에 대한 비극적인 감각을 반성적 성찰로 극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 하겠다. 아무튼 우리 수필가들의 고령화에 따라 우리 수필들이 죽음의 중력에 많이 이끌리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앞으로 더욱 심화되고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