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서 본 ‘상윳따 니까야 (Saṃyutta Nikāya)’ 15강
제 2장 기쁨 품(Nandana-vagga)
오늘부터 천신 상윳따의 난다나 품 10개의 경을 공부하겠습니다.
난다나 숫따
Nandana-sutta
기쁨 경(S1:11)
2. 에왕메 수땅 에깡 사마양 바가와 사왓티양 위하라띠 제따와네 아나타삔디깟사 아라메
Evaṃme sutaṃ ekaṃ samayaṃ bhagavā sāvatthiyaṃ viharati jetavane anāthapiṇḍikassa ārāme.
따뜨라 코 바가와 빅쿠 아만떼시 빅카오띠.
Tatra kho bhagavā bhikkhū āmantesi bhikkhavoti.
바단떼띠 떼 빅쿠 바가와또 빳짯소숭. 바가와 에따다오짜.
Bhadanteti te bhikkhū bhagavato paccassosuṃ. Bhagavā etadavoca.
2.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사왓티의 제따와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3. 부따뿝방 빅카에 아나따라 따와띵 사 까이까 데와따 난다네 와네
Bhūtapubbaṃ bhikkhave, aññatarā tāvatiṃsakāyikā devatā nandane vane
앗차라 상가 빠리우따 딥베히 빤짜히 까마구네히 사맙삐따 사망기부따
accharāsaṅghaparivutā dibbehi pañcahi kāmaguṇehi samappitā samaṅgībhūtā
빠리짜라야마나 따양 웨라양 이망 가탕 아바시
paricārayamānā tāyaṃ velāyaṃ imaṃ gāthaṃ abhāsi:
3. 비구들이여, 옛날에 어떤 삼십삼천의 천신이 기쁨의 정원에서 요정의 무리에 둘러싸여 천상의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을 빠짐없이 소유하고 즐기면서 그 시간에 이와 같은 게송을 읊었다.
4. 나떼 수캉 빠자난띠 예 나 빳산띠 난다낭,
Na te sukhaṃ pajānanti ye na passanti nandanaṃ,
아와상 나라데와낭 띠다사낭 야삿시난띠
Āvāsaṃ naradevānaṃ tidasānaṃ yasassinanti.
4. 유명한 삼십삼천에 있는 천신들의 거처인
기쁨의 정원을 보지 못한 자들은 행복을 알지 못한다.
5. 에왕 웃떼 빅카예 안냔따라 데와따 땅 데와땅 가타야 빳짜바시
Evaṃ vutte bhikkhave aññatarā devatā taṃ devataṃ gāthāya paccabhāsi,
나 뜨왕 바레 빠자나시 야타 아라하땅 와쪼
Na tvaṃ bāle pajānāsi yathā arahataṃ vaco,
아닛짜 삽바상카라 웁빠다 와야 담미노
Aniccā sabbasaṅkhārā uppāda vayadhammino,
웁빳지뜨와 니룻잔띠 떼상 우빠사모 수코띠
Uppajjitvā nirujjhanti tesaṃ vūpasamo sukhoti.
5.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자 어떤 천신이 그 천신에게 게송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어리석은 자여, 아라한들의 이런 말씀을 그대는 분명히 알지 못하는가?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여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법이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그 현상의 적멸이 진정한 행복이다.
스리랑카에는 삼장을 독송하는 불교의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원들이 독송행사를 가집니다. 매일 쉬지 않고 독송하면 6개월 걸립니다. 앞으로 한국에서도 스리랑카 스님들을 모시고 독송하는 기회를 가져보려고 합니다. 하루에 3-4시간 정도 주무시면서 12분의 스님들이 독송을 합니다. 경전을 오랫동안 독송해야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장애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경전을 독송하셨던 스님들이 하셔야 합니다.
제 2장 ‘기쁨 경’은 지금까지 공부한 내용과 조금 다릅니다. 제 1장의 ‘갈대 품’은 천신이 와서 부처님께 여쭈어본 내용입니다. 그러나 ‘기쁨 품’은 부처님께서 천신과의 대화내용을 비구들에게 전달하거나, 또 두 분 이상의 대화형태가 나오는 등 형식이 다양합니다.
처음 제목으로 나오는 난다나 왁가(Nandana-vagga)나 난다나 숫따(Nandana-sutta)는 기쁨 품과 기쁨 경입니다. 난다나(Nandana)는 ‘환희원(歡喜園)’, ‘기쁨 원’이라는 뜻으로 욕계 천상인 삼십삼천의 정원을 말합니다. 삼십삼천을 한역(漢譯)으로 도리천(忉利天)이라고 합니다. 난디(Nandi)는 ‘기쁨’, ‘즐거움’, ‘환희’, ‘환락’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환락은 긍정적인 기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탐욕이나 갈애 등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의 감각적 욕망을 말합니다. 이곳 천상을 감각적 욕망이 있는 욕계천상이기 때문입니다.
경전 본문 처음에 나오는 따뜨라(tatra)는 ‘그 사원’이라는 뜻인데 제따와나(Jetavana) 사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제따와나(Jetavana) 사원이라 하지 않고 따뜨라(tatra)를 ‘거기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는 부처님이 계시는 제따와나(Jetavana) 사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빅쿠들이여(bhikkhavo)’라고 부르셨습니다. 여기서는 단지 비구들을 부르는 게 아닙니다. 그 자리에 비구, 비구니, 사미, 사미니, 남녀 재가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비구들이여’는 이곳에 있는 어른 스님들을 말한다고 봅니다.
인도에서는 딸한테도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자녀들을 모두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아들인 뿟따(putta)는 남성입니다. 마눗사(manussa)는 ‘인간’, ‘사람’인데 이렇게 부를 때는 남녀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남자나 남편이나 아내를 말할 때도 마눗사(manussa)을 씁니다. 남성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남성 이름을 써서 여자들까지 포함합니다. 부처님도 사부대중을 부를 때 ‘비구들이여’라고 불렀습니다.
불교의 승가(僧伽)를 빨리어로는 상가(saṇgha)라고 합니다. 부처님 당시의 상가는 부처님 성도 후 5비구가 깨달으면서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비구 계목인 빠띠목카(pātimokkha)는 성도하신지 20년 후에 생겼습니다. 그리고 멀리 계신 스님들이 비구계를 받을 수 있는 상가법도 생겼습니다. 부처님이 안 계셔도 장로 비구들이 비구계를 줄 수 있는 절차가 생긴 것입니다. 이처럼 불교의 계율은 오랜 기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계율이 목적이 아니고 단지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바가와또(bhagavato)는 ‘세존께서는’이고 빳짯소숭(paccassosuṃ)은 ‘응답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가까이에서 응답했다는 뜻입니다. 에따다(etada)는 ‘이렇게’이고 보짜(voca)는 ‘말씀하셨다’입니다.
부따뿝방(Bhūtapubbaṃ)은 ‘옛날에’, ‘이전에’라는 뜻입니다. 안냐따라(aññatarā)는 ‘어떤’이라는 뜻입니다. 이름을 정확하게 모를 때 이름을 알릴필요가 없을 때 ‘어떤’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따와띵 사 까이까(tāvatiṃsakāyikā devatā)는 ‘삼십삼천의 천신들’입니다.
따와띵사(tāvatiṃsa)는 여섯 개의 욕계천상 중에서 두 번째 천상으로 삼십삼천(三十三天)입니다. 주석서에 의하면 삼십삼천은 마가(Magha)라는 청년을 상수(上首)로 한 33명의 청년들이 그들 공덕의 과보로 여기에 태어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들의 제왕은 삭끼(Sakki)라는 이름인데 제석천왕으로 부릅니다.
힌두교에서도 기도할 때 33천 천신들께 기도합니다. 본생경에 부처님이 과거의 보살이었던 시절에 삭까천왕이 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짤라는 마을에 마가(Magha)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친구들 32명과 같이 봉사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위해 다리도 놓고, 우물도 파고, 길도 닦는 등의 선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마가(Magha) 청년은 부처가 되기를 서원을 세운 보살이기 때문에 오직 봉사하는 마음으로 마을 일을 많이 하니 자연스럽게 인기가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그 동내의 이장이 질투가 나서 거짓으로 왕에게 고했습니다.
마가(Magha)는 도둑질도 하고, 술 먹고 놀고, 거짓말도 하는 등 젊은이들이 모여서 이상한 짓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마가(Magha)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인도에는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 3가지 있는데 사약을 줘서 죽이는 것, 목을 잘라서 죽이는 것, 코끼리가 밟아서 죽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코끼리가 밟아서 죽이는 사형이 제일 고통스러운 벌입니다. 왕이 마가와(Magha) 그의 친구들 모두 33명을 죽이라고 코끼리에게 지시했는데 코끼리가 이들을 죽이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코끼리가 그들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왕은 이런 사실을 알고 겁이 나서 무슨 이유인가 알아보게 했습니다.
마가(Magha)가 말하기를 우리는 7가지 우르따(두땅가)를 가지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첫째, 부모를 잘 보살피고, 둘째, 친척들에게 잘하고, 셋째, 거짓말 하지 않고, 넷째 욕하지 않고, 다섯째, 이간질 하지 않고 여섯째, 인색하지 않고 일곱째, 자신의 감정을 잘 절제하며 자애명상을 하면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왕은 마가의 말을 듣고 칭찬하고 풀어주었고 나중에 마가는 죽어서 도리천의 삭까천왕이 되었고 친구들도 죽어서 전부 도리천에 태어난 것입니다. 도리천이 이렇게 해서 생겼다고 합니다. 스리랑카에서는 마가는 청년들의 롤 모델입니다.
삼십삼천을 한역(漢譯)으로 도리천(忉利天)이라고 합니다. 도리천은 남섬부주 위에 8만 유순 되는 수미산 꼭대기에 있습니다. 중앙에 4면이 8만 유순씩 되는 선견성이라는 큰 성이 있으며 바로 이 성안에 제석천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그에 딸린 천신들이 살고 있습니다. 제석천은 키가 1유순이고 수명은 10만세가 됩니다. 부처님의 생모이신 마야부인이 죽은 뒤에 삼십삼천(三十三天)인 도리천에 천신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성도 후에 도리천에 가셔서 3개월 동안 어머니를 위해 설법을 하셨습니다.
난다나(nandana)는 ‘기쁨의 정원’입니다. 난다나(nandana)는 기쁨의 정원으로 제석천왕의 정원입니다. 이곳이 기쁨의 정원인 것은 이곳을 찾는 모든 천신을 기쁨을 얻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앗차 라 상가 빠리 우따(accharāsaṅghaparivutā)는 ‘요정의 무리에 둘러싸여’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비구들이여, 옛날에 어떤 삼십삼천의 천신이 기쁨의 정원에서 요정의 무리에 둘러싸여 천상의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을 갖추고 완전하게 즐기면서 이 게송을 읊었다.’입니다.
앗차라(accharā)는 산스크리트인 압사라(apsarā)를 그대로 옮겨서 소리 나는 대로 음역한 단어입니다. 앗차라(accharā)는 ‘선녀’, ‘천녀’, ‘요정’이라는 뜻입니다. 서양의 신화에서 자주 나오는 요정이나 님프(Nymph)와 유사한 존재입니다. 주석서에서는 신의 딸이라는 뜻으로 데와 디따(deva dhīta)라고 합니다. 이들은 무리지어서 다니기 때문에 앗차라 상가(accharāsaṅgha)는 ‘요정의 무리들’이라고 합니다.
앗차라(accharā)를 ‘압사라’라고도 하는데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믿지 못할 정도로 신기한 일을 말합니다. 또 하나는 압사라라는 ‘여성 신’을 말합니다. 여기서 압사라는 ‘여성 신’을 말하는데 이 여성 신이 바로 ‘천녀’입니다. 인도의 베다전통에서도 압사라가 많이 나옵니다. 캄보디아에 가면 압사라 춤이 있습니다. 이 춤은 힌두교에서도 유명한 춤입니다. 여기서 압사라는 모두 신의 딸들로 나옵니다. 이곳은 욕계 천상이기 때문에 여신이 있는데 그러나 색계, 무색계는 남녀가 없어 이런 압사라가 없습니다.
다음 문장은 빤짜히 까마구네히(pañcahi kāmaguṇehi)는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입니다. 욕계천신들도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안, 이, 비, 설, 신, 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는 것. 듣는 것, 향기 있는 것, 맛있는 것, 촉감을 즐기고, 생각을 즐기며 5온을 집착하고 사는 것이 욕계천신들의 세계입니다. 이 천신들도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에 빠지고 이것을 집착합니다. 인간들은 괴로움이 있는데 신들은 즐거움만 있기 때문에 어떤 때는 인간보다 더 즐거움을 찾습니다.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은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다섯 가지 감각대상과 접촉했을 때 일어나는 욕망을 말합니다. 눈이 형상인 루빠(rūpa)와 접촉할 때 욕망이 일어납니다. 귀가 소리인 삿다(sadda)와 접촉할 때 욕망이 일어납니다. 코가 냄새인 간다(gandha)와 접촉했을 때 욕망이 일어납니다. 혀가 맛인 라사(rasa)와 접촉했을 때 욕망이 일어납니다. 신체가 감촉인 뽓탑바(phoṭṭhabba)와 접촉했을 때 욕망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접촉했을 때 나의 느낌이라는 생각이 있어서 욕망이 일어납니다. 이때 일어나는 욕망을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이라는 뜻으로 오욕락(五欲樂)이라고 합니다.
다음에 사맙삐따(samappitā)는 ‘주어진’, ‘소유하고 있는’이고 사망기부따(samaṅgībhūtā)는 ‘구족한’, ‘두루’, ‘빠짐없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빠리짜라야마나(paricārayamānā)는 ‘욕망을 즐기고’이며, 따양 웨라양(tāyaṃ velāyaṃ)은 ‘그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 시간이라는 말은 신들의 세계에서 화생으로 나타난 때를 말합니다. 예들 들면 옷을 만들어서 입는 것이 아니라 옷을 생각하면 옷이 즉각 나타납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이 다 생깁니다. 신들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화생으로 나타나는데 생각하는 대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아무 때나 원하는 것이 다 생깁니다. 그러므로 노력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도리천의 난다나 정원에 가면 기분이 울적한 천신들도 기분이 좋아진다고 합니다. 천신들도 가끔 울적하거나 아쉬운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난다나 정원은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낙원이라고 말합니다.
이상의 글을 정리하면 ‘비구들이여, 옛날에 어떤 삼십삼천의 천신이 기쁨의 정원에서 요정의 무리에 둘러싸여 천상의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을 빠짐없이 소유하고 즐기면서 그 시간에 이와 같은 게송을 읊었다.’는 뜻입니다.
다음 본문 게송은 나 떼 수캉 바자난띠(Na te sukhaṃ pajānanti)는 ‘행복을 알지 못한다’입니다. 수캉(sukhaṃ)은 ‘행복’이고, 빠자난띠(pajānanti)는 ‘안다’인데 앞에 나(na)가 있어서 ‘행복을 알지 못한다’입니다. 다음에 빠산띠 난다낭(ye na passanti nandanaṃ)은 ‘기쁨의 정원을 보지 못한 자’입니다. 빳산띠(passanti)는 ‘보는 자’이고, 난다낭(nandanaṃ)은 ‘삼십삼천에 있는’입니다. 다음에 아와상(Āvāsaṃ)은 ‘거처’고, 나라데와낭(naradevānaṃ)은 ‘천신들의’입니다. 다음에 띠다사낭(tidasānaṃ)은 ‘삼십삼천에 있는’이고, 야삿시난띠(yasassinan)은 ‘유명한’, ‘명성이 있는’입니다.
다시 문장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떼 수캉 빠자난띠 예 나 빳산띠 난다낭
Na te sukhaṃ pajānanti ye na passanti nandanaṃ
아와상 나라데와낭 띠다사낭 야삿시난띠
Āvāsaṃ naradevānaṃ tidasānaṃ yasassinanti.”
위 문장은 “유명한 삼십삼천에 있는 천신들의 거처인 기쁨의 정원을 보지 못한 자들은 행복을 알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도리천은 기쁨과 행복이란 뜻입니다. 그 도리천의 기쁨이 있는 아름다운 정원은 그야 말로 낙원인데 그 정원을 보지 못한 자들은 불쌍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행복만 있는 욕계천상에도 천신들 간에 경쟁을 합니다. 그러나 선정수행을 해서 가는 색계, 무색계에서는 경쟁이 없습니다.
그런데 도리천과 대립하고 싸우는 존재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아수라(asura)입니다. 아수라(阿修羅)는 사악도에 있는 존재입니다. 이런 아수라는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산이나 강에서 사는 미니 아수라인 압빠야입니다, 또 하나는 신들과 싸우는 아수라입니다. 아수라가 도리천의 천신들과 싸우는 이야기가 인도의 베다 경전 마하바르따(Mahābhārata)에 나옵니다.
불교에서도 신들이 싸우는 것이 나옵니다. 보살이 도리천에 있을 때 신들과의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아수라(asura)의 반대는 수라(sura)입니다. 수라(sura)는 헌신적인 천신입니다. 이 아수라가 상좌불교에서 말하는 에빠찌디 아수라로 육욕천 중간에 있습니다. 자꾸 천상에서 쫓겨나고 끊임없이 싸움을 합니다. 그리고 사천왕과 도리천 사이에 있고 도리천과 항상 경계를 한다고 합니다. 욕계는 욕망이 있는 세계라서 싸움을 할 수 있습니다. 인간도 업의 과보에 따라 다양한 사람이 있듯이 천상도 업의 과보에 따라 다양한 천신이 있습니다.
위 단어 중에 나라데와낭(naradevānaṃ)에서 나라(nara)는 ‘사람’, ‘인간’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남성 신’을 말합니다. 하지만 나라데와낭(naradevānaṃ)을 천신으로 번역했습니다. 도리천에서는 천신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삽니다. 어떤 신들은 혼자서 사는 신들이 있습니다. 혼자서 사는 신은 인기가 없고 공덕을 혼자 쌓아서 홀로 신이 됩니다. 공덕을 여럿이 같이 쌓으면 함께 있는 신이 되고 인간으로 태어나도 인복이 많고 명예, 권력, 돈도 많은 복을 가집니다.
다음 문장은 ‘에왕 웃떼 빅카예 안냔따라 데와따 땅 데와땅 가타야 빳짜바시(Evaṃ vutte bhikkhave aññatarā devatā taṃ devataṃ gāthāya paccabhāsi)’입니다. 이 뜻은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자 어떤 천신이 그 천신에게 게송으로 이렇게 대답했다.’입니다.
에왕(Evaṃ)은 ‘예’, ‘이와 같이’, ‘이렇게’입니다. 웃떼(vutte)는 ‘말하다’입니다. 그래서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자’입니다. 다음에 안나따라 데와따(aññatarā devatā)는 ‘어떤 천신이’입니다. 다음에 땅(taṃ)은 ‘그’, ‘그것을’, ‘그를’입니다. 그리고 데와땅(devataṃ)은 ‘천신에게’입니다. 가타(gāthā)는 ‘시’, ‘게송’이고, 빳짜바시(paccabhāsi)는 ‘대답했다’입니다. 그래서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자 어떤 천신이 그 천신에게 게송으로 이렇게 대답했다.’입니다.
다음 본문의 게송은 불교에서 매우 유명한 게송입니다.
나 뜨왕 바레 빠자나시 야타 아라한땅 와쪼,
Na tvaṃ bāle pajānāsi yathā arahataṃ vaco,
아니짜 삽바상카라,
Aniccā sabba saṅkhārā,
웁빠다 와야 담미노,
uppāda vayadhammino,
웁빳지트와 니룻잔띠 떼성 우빠사노 수코띠.
Uppajjitvā nirujjhanti tesaṃ vūpasamo sukhoti.
이 문장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아라한들의 이런 말씀을 그대는 분명히 알지 못하는가?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여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법이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그 현상의 적멸이 진정한 행복이다.’
복이 없는 사람을 알뻿짜(alpecca)라고 합니다. 대신에 복이 없는 사람을 마헤짜(maheca)라고 합니다. 공덕을 지을 때 여러 사람이 함께 지으면 마헤짜(maheca)가 됩니다. 우리는 집중수행해서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듯이 천상에서는 즐기면서 불안을 없앱니다. 여섯 개의 욕계 천상은 명상자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을 즐기면서 불안함을 소멸시킵니다. 이것이 욕계천상의 특징입니다.
복이 없는 사람을 알뻿짜(alpecca)라고 합니다. 대신에 복이 없는 사람을 마헤짜(maheca)라고 합니다. 공덕을 지을 때 여러 사람이 함께 지으면 마헤짜(maheca)가 됩니다. 우리는 집중수행해서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듯이 천상에서는 즐기면서 불안을 없앱니다. 여섯 개의 욕계 천상은 명상자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을 즐기면서 불안함을 소멸시킵니다. 이것이 욕계천상의 특징입니다.
본문 게송에서 나 뜨왕 바레(Na tvaṃ bāle)는 ‘어리석은 자여’입니다. 나(Na)는 부정을 의미하고, 뜨왕(tvaṃ)은 ‘너’, ‘그’, ‘자네’라는 뜻입니다. 바레(bāle)는 ‘무지한’, ‘어리석은’, ‘어린’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여,’라는 뜻입니다. 바레(bāle)는 어리석다는 뜻이지만 바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야! 바보야, 너는 춤추고 다니면서 행복하다고 하고 있구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라한들은 이런 말을 한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욕설이 없고 거친 말을 하지 않는데 대신 ‘바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어쩌면 바보라는 말이 불교에서는 가장 큰 욕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문장에 빠자나시 야타 아라하땅 와쪼(pajānāsi yathā arahataṃ vaco)는 ‘아라한의 이런 말씀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가?’입니다. 빠자나시(pajānāsi)는 ‘분명하게 알다’이고, 야타(yathā)는 ‘~와 같이’이고, 아라한땅(arahataṃ)은 ‘아라한들’이고 와쪼(vaco)는 ‘말하다’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아라한들의 이런 말씀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가?’입니다.
다음 마지막 두 문장은 ‘아닛짜 삽바상카라 웁빠다 와야 담미노(Aniccā sabbasaṅkhārā uppāda vayadhammino)입니다. 아니짜(Aniccā)는 ’무상‘이고, 삽바상카라(sabbasaṅkhārā)에서 삽바(sabba)는 ’모든‘, ’일체‘라는 뜻이고, 상카라(saṅkhārā)는 ‘형성’, ‘행’을 뜻합니다.
그래서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다’입니다. 이 문장이 바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을 뜻하는 말입니다.
다음 문장은 ‘웁빠다 와야 담미노(uppāda vayadhammino)’입니다. 웁빠다(uppāda)는 ‘날아오름’, ‘도약’, ‘발생’, ‘생성’, ‘태어남’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일어남’입니다. 다음에 와야 담미노(vayadhammino)에서 와야(vaya)는 원래 ‘나이’, ‘젊음’을 말하지만 와야(vaya)와 담미노(dhammino)라는 합성어가 되면 ‘소멸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여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법이다.’라는 뜻입니다.
다음 문장은 ‘웁빳지뜨와 니룻잔띠 떼상 우빠사모 수코띠(Uppajjitvā nirujjhanti tesaṃ vūpasamo sukhoti)입니다. 웁빳지뜨와(Uppajjitvā)는 ’발생‘이고 니룻잔띠(nirujjhanti)는 ‘멈추다’, ‘파괴되다’, ‘소멸하다’는 뜻입니다. 떼상(tesaṃ)은 ‘그것’, ‘그’라는 뜻입니다. 우빠사모(
vūpasamo)는 ‘진정’, ‘억제’, ‘적정’, ‘적멸’을 뜻합니다. 마지막 단어인 숙코띠(sukhoti)는 ‘행복’입니다. 그래서 태어나서 사라지는 적멸은 죽음을 뜻하지만 윤회가 끝나는 열반에 이르렀으므로 진정한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을 요약하면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여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법이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그 적멸이 진정한 행복이다.’라는 뜻입니다.
난다나 정원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다른 천신이 그런 행복은 무상하여 언젠가 사라지는 법이라서 진정한 행복이라 할 수 없다. 여기서 진정한 행복은 열반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은 두 천신들이 대화한 내용을 부처님께서 그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삼십삼천에 있는 한 천신은 삼십삼천에 있는 기쁨의 정원을 보지 못한 자들은 행복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천신이 당신은 무엇이 행복인지 모르는 말이다. 아라한께서 말씀하신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여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법이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그 현상의 적멸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바꾸어 말했습니다. 여기 이 게송에서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가를 알게 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행복론’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때 아라한의 말씀을 전한 천신은 인간이었을 때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일정수준의 도과를 성취했던 천신으로 보입니다. 천상에도 업의 과보에 따라 다양한 존재가 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천신들끼리 있었던 이야기를 부처님이 비구들에게 해주고 있습니다. 이 게송은 불교에서 유명한 게송입니다. 테라와다에서 발인할 때 하는 게송입니다. 시신을 앞에 놓고 장례 마무리하면서 독송합니다. 이 게송을 통해 무상도 느끼고 명상도 됩니다.
오늘 공부한 내용을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사왓티의 제따와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옛날에 어떤 삼십삼천의 천신이 기쁨의 정원에서 요정의 무리에 둘러싸여 천상의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을 빠짐없이 소유하고 즐기면서 그 시간에 이와 같은 게송을 읊었다.
유명한 삼십삼천에 있는 천신들의 거처인 기쁨의 정원을 보지 못한 자들은 행복을 알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자 어떤 천신이 그 천신에게 게송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어리석은 자여, 아라한들의 이런 말씀을 그대는 분명히 알지 못하는가?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여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법이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그 현상의 적멸이 진정한 행복이다.
< 묻고 답하기>
(질문 1) 본문에서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은 무엇인가요?
(답변 1) 5온(五蘊)을 가지고 살면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과 부딪칠 때 일어나는 욕망을 감각적 욕망이라고 합니다. 감각기관에 일어나는 것은 느낌입니다. 이때 신체의 감각기관인 안, 이, 비, 설, 신이 감각대상인 색, 성, 향, 미, 촉과 접촉해서 일어나는 욕망이라서 감각적 욕망이라고 합니다.
(질문 2) 부처님은 왜 천신들의 이런 대화를 비구들에게 들려 주셨습니까?
(답변 2) 비구들 중에는 공덕을 쌓아서 천상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항상 영원하기를 바라는 상견에 해당됩니다. 유신견과 상견과 단견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그래서 무상의 법을 알려주고 아라한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뜻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