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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세기 전 미국 유학 분투기
호명자
두려움 없던 젊은 시절
내 나이 80대 중반. 삶은 축복임을 감사하며 지난 60여 년 전 미국에서 고학으로 버텨낸 유학 분투기를 쓰려니 아련한 회상에 잠기며 만감이 서린다. 1950년대 중반 한국동란으로 황폐된 서울 거리. 포성은 멈췄지만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어 모두가 삭막하였던 전시 체제하에서 그 당시 젊은이들은 전쟁으로 중단되었던 학업에 매진하며 향학열에 불탔었다. 부산 피난시절에는 판자집 같은 간이 건물에서 학생들은 불만 없이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수료했으며 서울 환도 후에는 다행히 폭격을 당하지 않은 빈 학교 건물이 남아있으면 각각 서부 연합 중학교 동부 연합 중학교란 명칭을 부쳐 그 건물에서 수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수복된 서울 학생들의 환경이었다,
그들 나름대로 뜻을 가진 학생들은 대학 진학도 하고 미국 유학도 갔으니 후일 유능한 인재들이 공부하고 돌아와 폐허가 된 이 땅을 재건하였으며 세계 경제 대국 대한민국을 건설한 주춧돌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다행히 미국 정부에서 저개발국가 학생들에게 주는 각종 장학금의 특혜가 있었다. 한미재단이나 풀브라이트 재단 또는 각종 기독교 재단에서 주는 프로그램으로 까다로운 선발 과정을 거쳐 전 장학금 (full scholarship)을 받은 그 시대가 지원해준 크나큰 행운아들이었다.
나도 부모님 몰래 혼자 준비하여 한미재단에서 선발하여 후원하는 미국 기독교 학교로 전액 장학금을 받고 갈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하지만 미국까지 가는 비행기나 배표를 마련해 줄 수 없는 집안 사정을 알면서 무슨 용감한 사고를 저질렀는지? 오로지 젊음의 용기와 의지 하나로 버텼던 20대의 나를 회상하면 지금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사방팔방으로 알아보며 수소문 하여 미8군에서 전시 물품을 운반하는 수송선에 나를 포함한 몇 명의 유학생을 무료로 승선시켜 준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의 하늘을 날 듯한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온 산야가 녹음이 짙어지던 1957년 6월 초여름 청운의 뜻을 품고 유학길에 오를 때 부산항에서 떠나는 미군용 수송선 기적 소리는 나의 장도를 축하해 주는 세레나데로 들렸다. 배는 검푸른 태평양을 힘차게 항해하며 새하얀 거품을 쏟아내며 전진하는 것을 배 위에 올라가 바라보며 집에 계신 부모님 생각에 눈시울이 앞을 가렸다. 난생처음 타보는 이 요란한 배. 모든 것이 신기하고 배에서 제공하는 음식도 나에게는 너무 맛있고 황홀하기만 하였다.
약 2주간의 항해 끝에 저 멀리 샌프란시스코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항구가 보일 때 아!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이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 착각과 감동에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배는 예인선에 의해 항구까지 예인 된 후 미국 세관원들이 배 위로 함께 올라와 우리들에게 몇 가지 심사와 입국 수속을 마친 후 그동안 정들었던 선원들에게 고맙고 감사한 인사를 하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아 왠지 부끄러워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하선하였다.
배에서 하선 하여 배 위를 올려다보니 그때까지 선원들은 우리를 향하여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배에서 동고동락 하며 2주간 함께 지냈던 다른 유학생들과는 후일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 하고 각자 자기가 갈 학교로 가야하기에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헤어져야만 했다. 내가 입학할 대학은 미국 동남부에 위치한 노스캐롤라이나주 Ashville College이며 비행기 값이 버스값의 두배 비싸기에 이제부터 나는 유학생이 아니고 고학생이다 라는 마음가짐으로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그레이 하운드’ 대륙횡단 고속버스를 택했다. 비행기로 가면 약 5시간 걸리고 버스로 가면 밤낮 없이 일주일 걸리는 힘들고 지루한 거리다.
광활한 미국 대륙횡단 (남쪽으로 택사스 테네시 미시시피 아리조나 루이지애나 노스캐롤라이나) 넓고 넓은 미국 대륙을 남쪽으로 7박 8일을 밤낮으로 달리고 버텨냈던 모험과 용기를 생각하면 지금도 내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천신만고 끝에 학교에 도착하여 교수님과 이미 먼저 와서 그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 유학생들의 친절한 환영을 받으며 배정 받은 기숙사에 들어가 짐을 풀으니 맥이 풀리며 쓸어 질것만 같았다.
며칠 후부터 새 학기가 시작되어 약간의 두려움과 설레움을 안고 미국에서의 대학 생활을 시작하였다. 나에게 주어진 과제는 ‘Working Scholarship’ 이라고 일하면서 학비 일부를 보태는 것인데 영어도 익숙지 못한 나에게는 정말로 뼈를 깎는 학업이었다. 밤 10시만 되면 기숙사 전등은 다 끄는데 외국 학생들은 좀 더 공부를 해야만 그들을 따라 갈 수 있기에 화장실에 몰래 들어가 불빛이 새어 나오지 않게 막고 밤새 코피를 흘리며 죽기 아니면 살기로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어느 정도 대학 강의도 알아듣고 논문도 자유롭게 쓰며 공부 할 수 있다고 자신할 때쯤 더 힘든 고통과 외로움이 찾아 왔으니 다름 아닌 향수병이었다. 크리스마스 때나 명절 때가 되면 미국 학생들은 다 집으로 돌아가고 기숙사는 텅 비었는데 갈 곳 없는 외국 학생들은 홀로 외로움에 지쳐 고국에 계신 부모님과 형제들 생각에 얼마나 울었는지? 그럴 때 마다 학교 뒷산에 올라가 저녁노을의 아름다움과 아담한 학교 교회에 들어가 두 손 모아기도 하고 나면 내 자신 충만 된 마음의 위안과 용기를 얻었다. 진정 내 젊은 날의 꿈과 희망을 안겨 주었던 노스캐롤라이나에서 꿈의 한 시절이었다.
지금도 가끔 눈 감으면 무지개빛처럼 아름다웠던 미국의 한 시골 대학교 캠퍼스가 눈에 아른 거린다. 그림 같은 언덕 위에 교회 종소리와 함께 일어나 새벽 공기를 마시며 교회로 향하던 내 젊었던 시절. 하느님과 함께 하였던 믿음이 있었기에 힘들었던 유학 초기에 공부를 견뎌 낼 수 있음에 감사한다.
애쉬빌 대학은 한국의 전문대학 (junior college)이고 어렵게 미국 유학 온 바에야 도시로 나가 4년제 대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것이 나의 희망이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끝까지 노력해 보자는 결심으로 도시에 있는 여러 대학으로 입학허가와 장학금 신청을 해 보았다. 다행이 뉴욕에 있는 모 대학에서 학비만 주는 장학금 (tuition scholarship)을 준다는 연락이 왔다.
마음속은 그 대학으로 가기로 결정 하였지만 비싼 뉴욕 생활비를 (기숙사도 제공해 주지 않는 조건임) 어떻게 충당할까? 앞이 캄캄하였다. 진짜 고생은 이제부터다. 미국에서의 고학은 이제부터라고 생각하니 자신이 없어지며 다시 짐 싸고 부모님이 계시는 한국으로 돌아갈까 수없는 밤을 지새우다 결정을 내렸다. “하다 지쳐 쓰러지면 어떠랴!”
어디 한번 죽을 만큼 도전해 보자는 마음가짐으로 2년 동안 정들었던 애쉬빌 초급 대학을 졸업과 동시에 뉴욕행 버스에 올라탔다.
2. 알바생의 비애
다행히 한국에서부터 알고 지냈으며 뉴욕에 먼저 와서 자리 잡고 있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원룸을 구해놓고 친구가 버스 터미널에 마중 나와 우선 그 친구 방으로 가서 오랜만에 김치와 밥을 얻어먹으니 살 것만 같았다.
미국대학은 방학이 5월 중순부터 9월 초까지 4개월 가량 긴 여름 방학을 열심히 직업을 찾아 일하면 1년 생활비를 벌어 아껴 쓰면 충당할 수 있다는 친구의 말에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학교는 9월부터 개강이니 학교에 찾아가 등록하고 학과장님께 인사하고 돌아왔다. 그 다음 날부터 직업 찾기에 매진하며 신문에 난 구직난과 직업소개소를 통해 알아봤지만 나 같은 초보자는 만만치 않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속담처럼 이 넓은 뉴욕 바닥에 할 일이 없을가 하는 야무진 마음으로 힘내 보았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베이비시터 소개받고 찾아간 곳은 한국 부부의 2살 된 남자아기. 쉬운 줄만 알았던 아기 보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한참 에너지를 쓰면서 자라나는 아이가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몸을 움직이며 뛰어노니 아이 보다가 내가 먼저 지쳐 쓰러 질 것 같았다. 일주일 만에 아기 보는 일은 그만 두었다.
두 번째 찾아간 직업은 신문 구직난에 병원 aid nurse (간호보조원). 무슨 직업인지도 모르고 찾아간 곳은 요즈음 우리나라 요양병원 같은 곳이었다. 입구에 들어서면서 역겨운 냄새가 나를 자극하여 그냥 돌아갈까 망설이다가 병원 사무실로 들어갔다.
나에게 배당된 임무는 지금도 기억나는 409호 4층 9호실 한방에 4명의 할머니 들을 하루 종일 돌보아 주는 일이다. 할머니 4명을 다 씻겨주고 식사 먹여주고 대소변 받아주는 일. 다른 것은 다 할 수 있는데 대소변 시중만은 못해서 또 일주일 만에 그만두었다.
가진게 눈물뿐이던 서러웠던 유학 시절
낮설은 외국어만큼 그지없이 막막하였다.
꿈 하나 앞세워 나선 불면의 바다 한가운데서
오뚝이처럼 일어서려 발버둥 쳐보았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밤새 눈이 붓도록 울면서 이렇게 살기 힘든 것인가 하는 회의를 느끼며 몇날 며칠 방에 누워만 있었다. 다시 힘을 내어 찾아간 곳은 뉴욕 중심가에 있는 직업소개소. 그 곳에서 소개한 곳은 맨하탄 중심가에 있는 유명한 호텔에 있는 중국 음식점. 화려하고 우아한 품위 있어 보이는 중식당. 인상 좋은 매니저를 만난 나는 학생이며 경험도 없지만 일을 열심히 하겠다고 당돌하게 말하니 그 분이 깜직하고 영리해 보이는 동양 여성에게 믿음이 갔는지 일하게 하여 주었다.
몇 일간의 웨이트레스 훈련을 받은 후 직접 손님을 받으니 그런대로 할 만한 직업이었다. 팁의 나라 미국에서는 음식값의 약 15%를 받으니 그 팁은 온전히 내 몫이어서 수입도 괜찮아 할만하였다. 앞으로 약 3개월 대학강의 시작할 때까지 열심히 벌면 그런대로 생활비는 충당할 것 같아 한숨을 돌렸다. 눈물 젖은 빵을 먹지 않고는 인생을 말하지 말라 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그동안 힘들었던 고생이 한 순간 내 삶의 귀중한 교훈이 된 것에 감사한다.
이제 9월이 되어 학교에 돌아가 공부에 매진하여야겠다. 내가 공부해야 할 전공은 도서관학과 (library science) 이며 대학 3학년으로 편입 할 수 있었다. 물론 나만 열심히 하면 공부는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애쉬빌 대학교에서의 강훈련과 그동안 닦아 놓았던 내 영어 실력에 자신 만만하였다.
3. 나에게도 이런 환희의 날이 올 줄이야
어느덧 미국 학창 시절의 마지막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다음 학기 생활비를 조달하기 위해 또 다른 직업을 찾아야 했다. 이번 여름 방학에는 좀더 차원이 다른 직업을 찾아야 했다고 마음먹던 중 뉴욕 롱 아릴랜드에 사는 친척 언니 호기숙 아나운서에게서 나를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호기숙 아나운서는 대한민국 건국 초기 전설의 여자 아나운서 1호이다.
TV도 없고 라디오만 있었던 조선 중앙 방송국에서 유명하고 쟁쟁하였던 전설적인 여자 아나운서 1호.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그 시절 누구나 부러워하였던 여성들의 로망이었다. 그 후 워싱톤 특파원과 결혼 후 미국의소리 방송에서 근무하며 새벽마다 낭낭한 목소리로 고국에 소식 전하던 나의 로망 1호인 호기숙 언니.
언니가 나를 보자고 하여 갔더니 자기는 출산 휴가를 1년 하기에 그 자리에 나를 추천하여 주겠다고 한다. 물론 고마운 마음으로 쾌히 승낙하고 워싱톤에 있는 Voice of America (미국의 소리) 방송국으로 찾아 갔다. 나는 왠지 자신만만하였다. 고등학교때 웅변대회에만 나가면 1등을 하고 주위에서 내 목소리가 꾀꼬리 같다고 칭찬을 많이 받았기에 조금만 훈련받고 연습을 하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물론 언니의 전화와 좋은 추천을 받았는지 나의 상사될 국장님은 아주 친절하게 나를 맞이해 주었다. 그 자리에서 몇 가지 인터뷰와 테스트를 받은 후 약 2주간의 방송 훈련을 받고 현장에 투입되었다.
아---나에게도 이런 환희의 날이 올 줄이야! 꿈만 같았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 하십니까? 여기는 미국의 소리 방송입니다.
V.O.A. -----얼마나 흥분되고 감동하였던 순간이었나! 신은 반드시 존재하며 나를 사랑한다. 소녀 시절부터 동경하였던 아나운서의 꿈. 당당하게 마이크를 잡고 아침마다 고국에 계신 동포들에게 소식 전하였던 60 여년전 미국의 소리 방송 아나운서 호명자!
나에게 이런 기적 같은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수없이 감사기도 드렸다. 그 후로 나의 인생길은 탄탄대로를 걸어 왔으며 나 자신 상류 사회로 진입한 듯한 자신감에 넘쳐 미국 생활의 후반기는 나름대로 만족하고 행복하게 지냈다.
하지만 나는 학업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야만 했다 더 공부를 계속하고 직장 생활도 계속하고 싶었지만 한국에는 오랜 세월 마음속으로 함께 하였던 남자 친구가 있었기에 내가 학업을 마치고 돌아오길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힘들었던 유학 생활을 버티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그분의 정신적 마음속으로 후원해 준 덕분이기에 이제는 그 분의 뜻을 따라 귀국하여 결혼하기로 결정 하였다.
그 분 역시 국방의 의무인 군의관도 마치고 대학 병원에서 수련의를 하고 있으니 내가 귀국 후 결혼하여 미국 유학 가서 공부 ((박사학위)도 더 하고 싶다는 포부도 갖고 있었다.
훗날 내가 전공한 도서관학과가 그의 미국 유학 공부를 하는데 도움이 될 줄이야.. 애들 아버지와 같은 미시간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librarian 으로 일하며 유학비와 생활비에 보탬이 되었다.
아마도 요즈음 젊은 세대들은 내 글을 읽으며 픽 웃을 것이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 한다고. 하지만 지금의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들은 지나온 고난의 역경을 뚫고 열심히 살아온 모두가 인생 선배인 인간 승리자 들이라고 높이 평가해 주고 싶다.
세상은 노력한 만큼
잘 살게 되고
사랑한 만큼
아름다워 지며
인내 한 만큼
성숙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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