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태(安重泰)
1派19世-서파공파
천문학(天文學) 흠천감관(欽天監官) 감상감관(觀象監官) 가의대부(嘉義大夫)
혼천의(渾天儀)제작
갑인년(甲寅年)에 이르러 절기가 역상고성(曆象考成) 과 어긋나는 것이 많아
1735년(영조11년)에 안중태(安重泰)를 연경(燕京)에 보내어 이것을 질문하게 하였다.
그리고 일전표(日纏表)·월리표(月離表)·칠요역법(七曜曆法)등의 책을 사오게 하였다.
1733년(영조9년)에 동지사행(冬至使行)을 따라 청나라에 들어가 흠천감관(欽天監官)으로서
추보(推步)에 능한 하국훈(何國勳)과 더불어 추고(推考)하는 법을 강토(講討)하여 이해하지 못한점을 다 알아냈다.
그리고 사재(私財)를 내어 칠정사여만년력(七政四餘萬年曆) 3책, 시헌신법오경중성기(時憲新法五更中星記) 1책,
이십사기혼효중성기(二十四氣昏曉重星記) 1책, 일월교식고본(日月交食稿本) 각 1책과 서양국(西洋國)에서 만든
일월규(日月圭)1좌를 사가지고 왔다.
1704 7월 안중태(安重泰), 이시화(李時華) 등이 선기옥형의 원형보다 조금 더 큰 복제품(復製品)을 제작
1704년에는 안중태(安重泰)·이시화(李時華) 등이 혼천의를 만들었고, 이것을 1732년(영조 8)에 안중태가 다시 고쳤다.
○ 34년에 안중태(安重泰)ㆍ이시화(李時華) 등에게 명하여 혼천의의 여벌을 만들게 하였다.
1732 3월 숙종대의 부건(副件) 혼천의가 오래 되어 오차가 생겨 안중태(安重泰) 등이 개조, 8월에 완성된 것을 경희궁(慶熙宮)에 규정각(揆政閣)을 세워 설치
1704년에는 안중태(安重泰)·이시화(李時華) 등이 혼천의를 만들었고, 이것을 1732년(영조 8)에 안중태가 다시 고쳤다. 이와 같이 혼천의는 기록상으로도 많은 제작과 중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현대천문학으로 넘어오기 이전까지 가장 표준이 되는 천체관측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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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천의(渾天儀)
연려실기술 별집 제15권-천문전고(天文典故)-의상(儀象)
숙종(肅宗)
○ 34년에 안중태(安重泰)ㆍ이시화(李時華) 등에게 명하여 혼천의(渾天儀)의 여벌을 만들게 하였다.
국조보감 제60권-영조조 4 -8년(임자, 1732)
숙종조에 여벌로 주조한 혼천의(渾天儀)의 형상이 세월이 오래됨에 조금 변하였다고 하여
안중태(安重泰) 등에게 명하여 중수하도록 하고, 규정각(揆政閣)을 경희궁 흥정당(興政堂)의 동쪽에 지어 봉안하였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5권-천문전고(天文典故)-의상(儀象)
○ 영종(英宗) 임자년에, 숙종조 때에 만든 혼천의의 여벌이 오래되어 어긋나므로 임금이 안중태에게 명하여 중수하게 하고,
규정각(揆政閣)을 경희궁(慶熙宮) 옛 경덕궁 흥정당(興政堂) 동쪽에 세워 안치하게 하였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제13권-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의기(儀器)
영종(英宗)은 안중태(安重泰)에게 명하여 숙종 때의 혼의를 개량하도록 하였다.
본문(조선왕조실록) 영조 9년 계축(1733, 옹정 11)7월 20일(기해)
관상감 관(觀象監 官) 안중태(安重泰)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본감 제조(本監提調)가 상전(賞典)을 계청(啓請)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나라 역법(曆法)이 청(淸)나라와 서로 어긋난 곳이 있으므로 안중태로 하여금 동지 사행(冬至使行)을 따라
청나라에 들어가 흠천감관(欽天監官)으로서 추보(推步)에 능한 하국훈(何國勳)과 더불어 추고(推考)하는 법을 강토(講討)하여
그 환히 이해하지 못한 점을 다 알아내게 되었다.
그리고 사재(私財)를 내어 《칠정사여만년력(七政四餘萬年曆)》 3책(冊), 《시헌신법오경중성기(時憲新法五更中星紀)》 1책, 《이십사기혼효중성기(二十四氣昏曉中星紀)》 1책, 《일월교식고본(日月交食稿本)》 각 1책과 서양국(西洋國)에서 만든 일월규(日月圭) 1좌(坐)를 사 가지고 왔다.
모든 서책은 역가(歷家)에 가장 긴요한 것이고 일월규 역시 의기(儀器) 중에서 간요(簡要)한 것으로 밤중에 시간을 재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이었는데, 모두 지금에서야 구해 온 것이었다.
【원전】 42 집 367 면
본문(조선왕조실록) 영조 11년 을묘(1735, 옹정 13)1월 30일(신축)
우리 나라의 역서(曆書)가 《역상고성(曆象考成)》이 나온 이후부터 조금도 어긋나지 아니하였는데, 갑인년에 이르르서 절기가 어긋나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관상감(觀象監) 관원 안중태(安重泰)를 연경(燕京)에 보내어 이것을 질문하게 하였더니, 구법(舊法)은 강희(康熙) 갑자년을 상원(上元)으로 삼았고 신법(新法)은 옹정(雍正) 원을 상원으로 삼았기 때문에, 《일전표(日躔表)》·《월리표(月離表)》·《칠요역법(七曜曆法)》 등의 책을 사오게 하였다.
그리고 다가오는 병진년부터 추보(推步)하여 역서를 만들게 하여 한결같이 이 역법을 쓰도록 하였으며,
관상감 관원 등에게 전례를 고찰하여 상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원전】 42 집 468 면
[자子]
성명 :
안국빈(安國賓)
관직 :
현감(縣監)관직 :
영부사과(永付司果)관직 :
수당(首堂)품계 :
숭정대부(崇政大夫)전공 : 천문학(天文學)
타과 : 무과(武科)
[손자孫子]
성명 : 안성신(安聖臣)
관직 : 삼력관(三曆官)
관직 : 훈도(訓導)
관직 : 교수(敎授)
관직 : 영부사과(永付司果)
관직 : 구임(久任)
관직 : 정(正)
전공 : 천문학(天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