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서당에 다시 가다
이영백
초등학교 입학 전에 다녔던 서당을 초교 졸업한 이튿날부터 우리 집 뒷집인 향촌“물봉(勿峯)서당”으로 다시 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알았는지 초교 정도 졸업하고 처음 배우는 학동에게 알 맞는 한문책으로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시장 난전에서 벌써 사다 놓았다. 자식의 공부를 위해 아버지의 역할은 너무나 충실(?)하였다. 신학문보다는 참다운 인간이 되는 서당 공부가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말 그랬을까? 이해가 안 된다.
초라한 시골 서당 방바닥에 굻어 앉아 앞뒤로 고개를 끄덕이며 한문 문장을 낭독하였다. 그것도 우선 낱글자 익히고, 토 다는 것을 배운다. 문장을 소리 내어 고개 흔들며 읽고, 이제는 그 문장을 해석하였다. 그때는 한문 문법도 없이 마냥 훈장이 하는 대로만 따라 하여야만 하였다. 한문 문법 용어도 몰랐다. “주어+동사+목적어”라든가 한정어, 수식어, 접속어 등도 몰랐다. 그냥 스스로 터득하여 알아가야 문리(文理)가 틘다고 하였다. 한문 문장에 문리 틔려면 10년~20년은 배워야 하지 않을까?
1963년도 사회는 어수선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새마을사업, 화폐개혁, 여수정유공장, 충주비료공장, 삼척에 삼화제철소, 울산정유공장, 울산화학공업단지, 울산중공업단지 등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의거 하여 새로운 경공업ㆍ중공업 단지가 착착 시설되던 시기이다. 돈 벌 곳이 많이 생겼다.
그렇게 나는 현대학문에서 구식 한문 공부 배우러 동네 서당에 마냥 다녔다. 초교 동기들은 교복 입고 중학교 다녔다. 나는 홑바지와 베적삼 걸치고 지게에 보자기로 동몽선습, 벼루, 붓, 먹, 연습 종이 등 싸서 얹었다.
서당 공부는 초 간단하였다. 딱 15분 걸리었다. 서당 공부는 그것으로 일일 공부 끝이다. 하루도 즐거운 날이 없다. 서당에서 한문 배운 것을 밤에 암송하였다. 집에서도 먹 갈아 개발새발로 써보는 것이 전부이었다.
도저히 앞날이 보이지 않았다. 초교를 졸업한 학동으로 서당에 다시 간 것이다. 나이 든 아버지는 효자 노릇 하도록 직․간접으로 권위만 부렸다. 낮에 서당 다니도록 허락(?)한 일은 십 남매 막내이기에 큰 배려를 주신 줄 알았다. 그 깊은 뜻은 세대교체에 대한 가문의 책임 부여뿐이다.
그렇게 나는 다시 서당으로 가서 일상이 단조로운 서당 공부하였다.
첫댓글 엽서수필 시대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