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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학통 3대를 이어간 영남학파의 든든한 모태(母胎) 역할...애민(愛民)정신과 부덕(婦德)을 두루 갖춘 ‘안방 선비’
1609년(광해 1) 가을 안동 금계리 경광서당(鏡光書堂). 영해 유생 이시명(李時明)이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 후학을 양성하던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를 찾아온다. 이시명은 안동 예안 처가에 왔다가 명성을 듣고는 경당을 꼭 뵙고 싶었다. 인사를 드리고
가르침을 청한다. 이시명은 그때부터 경당에게 묻고 배웠다. 3년 뒤 이시명은 성균관으로 유학을 떠난다.
2년이 지나 이시명이 또 경당을 찾는다. 그의 아내 광산 김씨가 죽어 장사를 치른 뒤 처가에 들렀다가 방문했다. 다시 가르침을
받는다. 경당에겐 마침 성년이 된 무남독녀가 있었다. 그는 심지가 굳은 이시명을 유독 사위로 삼고 싶었다. 1616년 19세 장계향
(張桂香, 1598∼1680)은 1남1녀 자식을 둔 홀아비 이시명과 혼인한다.
연보에 기록된 퇴계학파에서 주목할 만한 두 집안의 만남이다. 최초의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쓴 ‘정부인 안동장씨’ 장계향
은 선비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자신이 일찍이 [소학(小學)] [예기(禮記)] 등을 읽으며 수신(修身)한 것은 물론
일곱 아들이 모두 학문을 이루도록 이끌고 굶주린 백성까지 구휼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퇴계 학통은 경당 이후 큰 맥을 이룬 인물
이 대부분 정부인의 피를 받았을 정도로 영남학파의 든든한 모태가 되었다.
7월 20일 정부인 안동 장씨의 발자취가 남은 경북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을 찾았다. 폭염은 이날도 37도 맹위를 떨쳤다. 오랜
시간 야외 답사를 허용하지 않았다. 새로 조성돼 운영 중인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으로 들어섰다. 석계(石溪) 이시명 선생의
13대 이돈(81) 종손이 일행을 맞았다. “석계 선조와 장씨 할머니 두 분이 두들마을 입향조입니다.”
이야기는 입향조의 영해 인량리(현재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시명은 문과에 두 차례나 급제한 운악 이함의 셋째 아들이었다. 만석꾼 집이다. 손위의 두 형이 장계향이 시집오기 전 세상을
떠나면서 이시명은 사실상 장남 역할을 했다. 운악은 임진왜란 시기 군량미를 조달하고 유랑민을 구휼한 사람이었다. 전쟁은
일단락됐지만 배고픈 사람이 넘치는 등 세상은 여전히 흉흉했다.
빈민 위해 겨울엔 노비들과 함께 길쌈하기도
시집살이 3년째. 장계향은 노비들을 데리고 길쌈으로 옷감을 만들기 시작했다. 빈민들이 겨울 추위에 얼어 죽는 것이 가장 무서운
고통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 간단한 의약 처방을 배워 걸인을 돕기도 했다. 시집온 지 11년째 정묘호란이 일어난다. 그해 봄
부터 여름까지 장계향은 시아버지와 함께 밀려드는 피난민을 직접 구휼했다.
좋은 일도 있었다. 신혼 8년째 남편 이시명은 향시 별과에서 1등을 차지한다. 운악은 아들에게 상을 내렸다. 영해와 영양 경계지역
좋은 논 여섯 마지기를 아들에게 사 주었다. 5년 뒤 다시 향시에 합격한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영양에 논을 사 준다.
1631년 장계향 부부는 영양 석보촌에 작은 집을 지어 분가한다. 주변에는 도토리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시아버지가 위독해 다시
인량리로 돌아온다. 이듬해 시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상속도 하지 않은 채였다. 운악은 생전에 “너희들이 식견이 있으니 나눠
가지라”고만 했다. 3년상을 마친 뒤 시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똑같이 재산을 나누는 ‘분재기(分財記)’를 썼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종손이 당시 이야기를 전한다. “그때는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라 장씨 할머니는 주도적으로
구휼에 나섭니다. 곡식이 떨어지자 집에 일하던 사람 700여 명을 산으로 보내 도토리를 주워 집 밖에 솥을 걸고 죽을 쑤지요.
적선할 때는 유랑민이 마음 상하지 않도록 미리 만들어 둔 똑같은 주머니에 일일이 담아 건넵니다. 자신이 대접받는 존재임을
깨닫게 한 것이죠. 그렇게 하루 300명을 구휼했답니다.”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상류층의 의무)의 실천이다.
1640년 석계는 영양 석보촌으로 다시 나온다. 아이들과 시어머니, 노비 등 30여 명의 대식구였다. 장계향 부부는 분가하면서
상속 지분을 전혀 챙기지 않는다. 종손은 “노력해서 일군 재산이 아닌 것은 가져가지 않는다는 게 두 어른의 소신이었답니다”라
고 말했다. 향시 합격으로 상 받은 토지만 챙겼다. 재산 상속을 둘러싸고 자식들이 지분 때문에 의를 끊기까지 하는 요즘 세태에
던지는 화두다. 가난한 생활이 시작됐다. 다행히 9년 전에 심은 도토리가 제법 많이 달려 위안을 삼았다.
이사 이듬해에 지독한 흉년이 들었다. 모두가 굶주렸다. 다시 구휼이 필요했다. 두들마을에 흔적이 남아 있다. ‘장계향교육원’을
나와 땡볕 속에 두들마을 ‘석계고택’과 ‘정부인 안동장씨유적비’를 거쳐 마을 앞으로 난 인지천(仁志川)으로 내려왔다. 주변에
수령이 수백 년 된 고목이 숲을 이뤄 무성했다. 대부분 참나무다. 장씨 부인이 석보에 처음 집을 짓고 참나무를 심은 때로 치면
400년 가까운 나이다. 하천을 병풍처럼 두른 벼랑 바위에 음각된 ‘樂飢臺(낙기대)’ 흰 글씨가 선명하다. 넷째 아들 이숭일이
부모의 나눔 철학을 새긴 것이다.
홀로된 친정아버지에게 나이 어린 계모 주선
종손은 장씨 할머니의 ‘낙기’ 정신을 강조했다. ‘배고픔에서 즐거움을 찾아라.’ 무슨 뜻일까? 흉년 들면 집 밖에 솥을 걸어 주인도
없고 객도 없이 똑같이 도토리 죽을 즐긴다는 것이다. 안빈낙도(安貧樂道)에 가깝다. 그래서 장계향 추모 공간 출입문에는 사람을
사랑하고 간절히 돌본다는 뜻의 ‘仁愛懇惻(인애간측)’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장계향은 어떻게 배웠을까? 그의 셋째 아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은 어머니의 [행실기(行實記)]를 남겼다. 갈암은 퇴계
학통을 이은 유학자로 이조판서를 지냈다.
행장에는 아버지 경당이 딸에게 [소학]과 [십구사략]을 가르쳐 본 것으로 나온다. 열한 살 무렵이다. 소녀 장계향은 [소학]을
통째로 외운 뒤 의심 나는 부분을 아버지에게 물었다. 시도 지었다. 전하는 대표적인 시가 ‘비 내리는 소리(蕭蕭吟)’다.
‘창 밖엔 보슬보슬 비 내리고(窓外雨蕭蕭)/ 보슬보슬 빗소리 절로 들려오네(蕭蕭聲自然)/ 저절로 나는 빗소리 듣고 있으면
(我聞自然聲)/ 내 마음 어느새 빗소리 되네(我心亦自然)’. 이 시는 장계향이 [시경(詩經)] 대아편 구절을 원용한 것이다.
딸의 비범함을 눈치챈 경당은 이때부터 공부가 오히려 걱정이 됐다. 경당은 그래서 [예기]를 많이 읽도록 권한다.
장계향은 [예기]를 넘기다가 “여자는 재능 가진 것이 허물이 된다”는 구절을 발견한다. 계절 음식을 만드는 방법도 만난다.
장계향은 차츰 나이가 들자 “시를 짓고 글씨 쓰는 것이 모두 여자가 할 일은 아니다”며 단호히 끊고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재능을 감추고 오직 부덕(婦德)을 닦는 데 열중한 것이다. 그의 시와 문장, 글씨가 많이 전하지 않는 까닭이다.
갈암은 또 어머니가 우리 형제들에게 늘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행실기에 적었다.
“너희들이 비록 글을 잘 짓는다는 명성이 있지만 나는 그 일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너희들이 선행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나도 기뻐하며 잊지 않을 것이다.” 그가 자녀를 가르친 방법이다. 김춘희(71) 박사는 “정부인은 가정이 제 역할을 다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남겼다”며 “부모는 자식에게 최초의 스승이며 가정은 첫 학교임을 실증했다”고 평가했다.
또 그에겐 사람의 도리가 먼저였다. 형식적인 규범을 뛰어넘었다. 장계향은 출가외인이었지만 부모 두 분만 남은 친정에 소홀하지
않았다. 친정어머니는 시집온 지 7년 뒤 불행히 세상을 떠난다. 아버지는 예순에 대를 이을 아들 없이 혼자였다. 그냥 둘 수 없었
다. 장계향은 어머니 3년상 내내 친정에서 아버지를 봉양한다. 그는 친정에 머무는 동안 아버지의 재혼을 성사시켰다. 자신보다
나이 어린 계모가 남동생 하나를 낳을 때까지 돕고 3년상을 마친 뒤 시댁으로 돌아왔다. 친정아버지는 새로 아들 셋에 딸 하나를
얻는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이복 맏아들은 겨우 여덟 살이었다. 장씨 부인은 남편의 허락을 받아 큰 동생을 시댁으로 데려와
길렀다. 이후엔 계모와 다른 아우도 모두 데려와 집을 지어 친정 식구를 보살폈다.
갈암은 행실기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받들어 섬기면서 60년 가까이 사는 동안 손님을 대접하듯 공경했으며 무슨 일이든지 남편
에게 아뢰어 승낙을 받은 다음 실천하셨다”고 적었다. 사람들은 석계의 의리와 장씨 부인의 효성을 칭찬했다.
3대 4불천위(不遷位)와 7산림의 가문
1707년(숙종 33) 권두인은 갈암 행장(行狀)에 “(갈암의) 어머니는 유학의 수신과 애민을 실천하는 집안에서 가르침을 받아 엄숙
하고 단정하고 공경하며 굳센 학식을 갖춰 여중군자(女中君子)라 일컬어졌다”고 적었다. 여성으로 당대에 이미 존경받는 ‘선비’가
된 것이다.
두들마을 교육원 안쪽에는 여중군자의 영정이 모셔진 존안각(尊安閣)이 있다. 이 집안에는 3대 4불천위(不遷位)가 있다. 시아버지
운악과 남편, 두 아들(존재 이휘일과 갈암)이 3대를 이어 불천위에 오른 것이다. 또 남편과 네 아들(정목재 이상일, 존재, 갈암,
항재 이숭일) 두 손자(밀암 이재, 고재 이만)는 ‘7산림(山林, 선비로서 나라의 부름을 받은 자)’으로 유림의 추앙을 받는다.
존안각 앞에는 의현당(宜賢堂)이라는 추모 공간이 있다. 종손은 “‘의(宜)’는 시집가서 그 집안을 화목하게 하라는 뜻을 담은 당호”
라며 전실이 낳은 1남1녀와 자신이 낳은 6남2녀를 하나같이 현자로 키울 수 있었던 바탕이라고 설명했다. 장씨 부인에게 요즘
새로 붙인 당호이기도 하다.
그는 실제로 전실 소생의 자녀를 장가보내고 시집보낼 때 자신이 낳은 자녀들보다 더 많은 혼수를 장만했다. 또 후일 맏아들
(이상일) 양자를 들일 때는 6남(이융일)의 맏아들(이은)을 입적한다. 이융일의 부인이 광산 김씨로 석계의 전실과 같은 광산
김씨인 점에 착안한 것이다. 광산 김씨의 혈맥이 장자의 가계로 흐르게 배려한 것이다.
지극함은 가문으로 끝나지 않았다. 의현당(宜賢堂) 장계향은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 한강 정구 등 퇴계의 수제자에게서 모두
배운 아버지 경당의 심학에 근본을 두었다. 아들 존재와 갈암은 외할아버지를 이어 예론적 퇴계학을 정립한 뒤 유학사에 우뚝한
[홍범연의(洪範演義)]를 완성한다. 이때부터 퇴계 학통은 의현당이란 연결고리를 빼고 내려가기 어렵게 됐다. 퇴계 학맥의 큰
줄기는 김성일-장흥효-이현일-이재-이상정-유치명-김흥락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장흥효는 의현당의 아버지며 이현일은
의현당의 아들, 이재는 손자, 이상정은 외현손이 된다. 이른바 ‘3대 퇴계학통’이다. 또 유치명은 이상정의 외현손이니 역시
남이 아니다. 17세기 정치권에서 소외된 퇴계학을 중흥시킨 ‘퇴계학파의 위대한 대모(代母)’라는 표현이 결코 지나치지 않다.
의현당을 역사 인물로 먼저 자리매김한 [음식디미방]은 과학자 장씨 부인을 말하는 저작이다. 두들마을 교육원에는 유물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10대에 일가를 이룬 그의 글씨와 행실기를 새긴 목판, 교지 등이 진열돼 있다. 전시관 입구에는 [음식디미방]에 등장
하는 각종 음식과 술이 재현돼 있다. 유물전시관 옆은 실제 이들 음식을 만들어보는 조리 체험실 공간이다.
장계향연구회 이영우(61) 회장은 “올 상반기에만 벌써 6000여 명이 이곳을 찾았다”며 “의현당은 퇴계학을 여성적으로 실천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현재 경북대가 소장하고 있는 [음식디미방]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을 추진 중이다. 종손은 책의 소유권을 놓고 문중
안에서 한동안 우여곡절이 있었음을 전했다. 책은 처음에 둘째 아들 존재 종가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아버지인 석계 종가는 당황
스러웠다. 재판이 열렸다. 그걸 정리한 것은 뜻밖에도 의현당이었다. 그가 [음식디미방] 마지막에 적어 둔 당부가 법정에서 받아
들여진 것이다. ‘이 책을 눈이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뜻을 알아 이대로 시행하고, 딸자식들은 각각 베껴 가되 이 책을 가져 갈
생각일랑 절대로 내지 말며….’ 책은 본가가 간수하라는 뜻으로 해석된 것이다.
여성이지만 성인(聖人)을 지향하다
결국 소유권은 석계 종가로 돌아가고 경북대는 영구 보관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개인 소유물을 공적 기관이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다. 이후 경북대와 영양군, 경상북도 등이 [음식디미방]과 의현당을 알리는 사업은 탄력을 받았다.
의현당은 처음에는 ‘정부인 안동 장씨’로만 알려졌다. 본명은 궁금증으로 남았다. 사정을 듣고 안동대 민속학과 배영동(57) 교수가
신위의 덧씌워진 아래 종이에서 이름을 확인했다. 뒤늦게 본명이 밝혀진 과정이다.
서울에서 사업하는 종손은 제법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는 50여 년 간 장씨 할머니를 알리는 일에 사재를 아끼지 않았다. 백방
으로 애썼다. 그러다가 1999년 11월 문화관광부가 ‘이달의 문화인물’로 의현당을 선정하면서 일생이 뒤늦게 알려졌다. 이문열의
소설 [선택]도 주인공으로 의현당을 재조명했다. 이문열도 의현당의 13대손이다.
의현당은 여성이었지만 목표한 공부는 성인(聖人)이었다. 그래서 [논어] 위령공편 “가르침을 배우면 인간은 높고 낮거나 귀하고
천한 구분이 없어진다(有敎無類)”는 공자 말씀을 그대로 실천했다. 또 퇴계 학통을 이은 아버지의 학문 정신을 여성으로 충실히
계승했다. 그는 퇴계학을 여성적으로 앞서 실천한 군자가 아니었을까.
[박스기사] 경북 북부와 동해안 반가 조리법 담은 '음식디미방' - 2015년 세계물포럼에서 대통령 주재 공식 오찬 메뉴로 채택
“시집 온지 3일 만에 부엌에 들어/ 손을 씻고 국을 끓이지만/ 시어머니 식성을 몰라/ 어린 소녀를 보내 먼저 맛보게 하네.”
(三日入廚下 洗水作羹湯 未姑食性 先遣少婦嘗)
의현당이 쓴 [음식디미방]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초서로 반듯하게 써 내린 한시다. 중국 당나라 왕건이 지은 ‘신가낭사
(新嫁娘詞)’ 한 수를 떠올린 것이다. 인용한 시는 막 시집온 새댁이지만 그가 실제로 이 책을 저술한 시점은 음식에 일가를 이루었
을 만년이다.
책의 겉표지에는 ‘閨是議方(규곤시의방)’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1960년 학계에 이 책을 처음 알린 김사엽 박사는 원명은 안동
장씨가 직접 쓴 그대로 ‘음식디미방’이며 표지이름은 남편이나 자손이 격식을 갖추느라 새로 붙인 것으로 추정했다.
[음식디미방 주해]라는 책을 쓴 백두현 경북대 교수는 “[음식디미방]은 17세기 중엽 우리 조상들이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 먹었
는지 식생활의 실상을 알려 주는 책”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의현당이 살았던 경북의 북부지역 안동과 영양, 동해안 영덕 일대의
양반가 음식이 많이 반영됐을 것이다.
여기에는 자그마치 146가지 음식 조리법이 등장한다. 가루음식과 떡 종류가 18종, 어육류 74종, 술 51종, 초류 3종 등이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것이 있고 스스로 개발한 음식도 있다.
머리글 한시를 빼고는 모두 한글로 썼다. 최초의 한글 요리서다. [음식디미방]은 2014년 고등학교 기술가정 통합교과서에
실렸으며, 2015년 세계물포럼 당시에는 대통령이 주재한 공식 오찬의 메뉴로 채택돼 세계에 한국의 전통 맛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조리법 말고도 이 책은 지렁(간장), 청소깝(소나무 땔감), 새배(새벽) 등이 지역 고어와 사투리가 고스란히 남아 17세기 국어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타임캡슐이기도 하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