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화의 향기
국보문학 작가회장 김학규
아파트 베란다의 창문을 열면, 내 눈을 사로잡는 꽃들이 있다. 엊그제부터 꽃봉오리들이 흰색 꽃잎들을 사방으로 벌리며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흰색 비단을 펼쳐놓은 듯 화사한 목련화는 언제봐도 청초하고 우아한 여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 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어도 은은한 꽃향기가 머릿속까지 배어드는 것만 같다.
그런데 갑자기 작은 새들이 날아와서 아직 피어나지도 않은 꽃봉오리들을 콕콕 쪼아먹는 걸 보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그 새들을 멀리 쫓아버리려고 창문 밖으로 머리를 불쑥 내밀고는 내가 손바닥을 시끄럽게 ‘탁- 탁-’ 쳤다. 제발 다른 곳으로 날아가서 놀라고 새들에게 야단을 쳤다. 그 작은 새들은 순간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듯, 푸드덕거리는 날갯짓 소리를 내곤 숲속으로 모두 날아가 버렸다. 그걸 확인한 후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적잖은 꽃봉오리들이 작은 새들의 밥이 되어 아마도 깊은 상처를 입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나는 수시로 창문 앞을 내다보면서 목련화가 만개하기만을 기다렸다. 내가 본 그 작은 새들은 벌레들만 잡아먹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작은 새들이 꽃봉오리들을 쪼아먹는 것을 직접보고, 나는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장면은 정말 생전 처음 봤다. ‘새들도 꽃봉오리들을 먹는구나.’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나는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더듬어봤다.
사실 내가 아주 특별하게 좋아하는 꽃은 딱히 없었지만, 그래도 꽃의 여왕인 붉은 장미는 언제봐도 늘 아름답게만 보였다. 하지만 타계하신 모친은 생전에 목련화를 좋아하셨던 것 같다. ‘아들! 넌 무슨 꽃을 좋아하니? 난 목련화가 마음에 드는데. 네가 어른이 되면 목련화를 볼 때마다 예쁜 엄마를 기억해줘. 알았지?’ 하고 모친이 나를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때 나는 고개를 끄떡이다가 어쩐지 슬픈 생각이 들어 ‘난 장미꽃이 좋아.’라고 얼른 큰 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그 정원에 이미 있었던 목련화도 잘 몰랐던 나였다. 하지만 그 후로 그 꽃에 적잖은 관심이 생겼다. 목련화는 장미꽃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그 꽃은 결코 초라하지 않다. 세련된 빛깔과 향과 멋스러운 모습을 은은하게 드러내고 있는 매혹적인 꽃이 목련화이다.
모친은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유학생이었는데, 시체를 해부하는 것이 너무 무섭고 싫어서 간호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모친은 국민학교에서 보건 선생님이 되어 어린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모친은 고전무용에 심취해서 가야금을 배우고 전통무용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후에 가을 운동회가 열리면, 여자아이들에게 한복을 입히고 운동장에서 덩실덩실 부채춤을 추게 했다. 그런 부채춤공연들은 내 마음속에 너무도 화려하고 근사한 장면들로 깊이 자리매김이 되었다. 그런 일들을 혼자 기획하고 용기 있게 해내는 모친을 바라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동네에서 만삭이 된 여인이 아기를 낳으려고 진통이 오게 되면, 집으로 와달라고 모친께 급하게 전화 연락을 하곤 했다. 그럴 적마다 모친은 그걸 한 번도 거부하지 않고, 친히 왕진 가방을 들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모친은 그 임산부가 아기를 잘 낳을 수 있도록 돕고, 뒤처리까지 위생적으로 잘해주었다. 모친은 보건교사였지만, 그 동네에서는 가끔 의사 역할을 감당하곤 했었다.
벌써 수십 년 전 이야기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래도 그 당시의 모친이 사셨던 삶을 떠올려보면, 가슴 뭉클한 감동이 밀물처럼 몰려오곤 한다.
학교에서 돌아온 내가 대문을 열고 정원을 지나 현관문 안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나를 반겨주는 것은 소독약 크레졸이 섞인 물을 담아놓은 대야였다. 그 크레졸 물로 손을 씻고 나서야, 나는 거실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철저한 위생관리로 가족들을 지키려는 모친의 사랑이 담긴 지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그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물에 손을 씻는 걸 무척 싫어했다. 그래서 그 정원에서 진돗개 ‘베스’랑 저녁때까지 정신없이 놀곤 했었던 아이가 나였다. 그러다가 모친에게 들켜서 강제로 소독약 물에 양손이 씻겨지곤 했는데, 내가 왜 그렇게 그걸 싫어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어쩌면 모친이 내 손을 만지작거리며 손수 씻어주는 걸 마음속으로 은근히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은 코로나 19로 인해 전염병 예방 차원에서 사람들이 소독약품으로 손을 씻고 마스크를 착용한 채 길거리를 다니고 있는 걸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소독약품으로 내 손을 씻게 되면, 가끔 창문 앞에 활짝 피어난 목련화가 아련하게 떠오르곤 한다.
어린시절의 기억들이지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 더러 있다. 저녁에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모친이 어린 나를 끌어안고 정성스럽게 내 손과 팔목을 씻어주곤 했었다. 그럴 적마다 고운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분 냄새가 너무 신기하고 황홀하기만 했다. 그 분 냄새는 이상하게도 목련화의 향기와 흡사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 냄새를 좋아하게 되었다.
"언제봐도 엄마는 목련화처럼 향기가 나고, 얼굴도 진짜 예쁘다. 엄마가 자랑스럽다." 부드러운 엄마의 손을 바라보며 내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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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University of Dubuque 박사원(D.Min)
한국문인협회 문학정보화위원, 국제 펜 한국본부 정회원, 한국소설가협회 정회원
국보문학 작가회장, 한국서정문인협회 부회장, 아마존 드림 출판사 대표작가
국보문학 소설부문 신인상, 한국문학신문 소설부문 대상, 등대문학상 수상, 한맥문학 시부문 신인상,
한맥문학 동화부문 신인상
장편소설 : 홍매화, 돌아온 의순공주
단편 소설 : 국보문학및 동인지에 20여편 발표
장편 동화 : 스몰 윙과 라나, 코이왕국의 왕자 한스, 신델렐라와 황금빛 새
영어 동화 : The Best Leader in the Amazon Forest 외 10권 출간
첫댓글 모련화를 보면서 어머니를 연상하는 내용이 무척이나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서해안 제 시골 텃밭에는 백목련, 자목련이 있지요.
목련꽃을 검색하니 자주목련, 별목련, 함박꽃나무(산목력)도 있더군요.
북한은 함박꽃나무를 국화로 삼았다고 하는군요. 이것도 제 텃밭 속에 있고...
모란.... 크고 하얗게 피는 꽃... 시골에 내려가거든 더 포기나누기를 해서 증식해야겠습니다.
글맛 좋아서 엄지 척!
늘 댓글 달아주시는 최윤환 선생님 감사합니다. 목련화를 보면 지금도 가슴이 찡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