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목나무
황 옥 주
저 산마루 깊은 밤/ 산새들은 잠들고/ 우뚝 선 고목이 달빛아래 외롭네.
언제 부터였는지는 몰라도 내 18번 노래는 장욱조가 부른 ‘고목나무’다. 곡도 가사도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어 정을 떼어낼 수가 없다.
나는 노래를 듣는 것도 부르는 것도 즐기는 편이다. 듣는 것이야 남이 부른 거니까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노래는 무엇보다 우선 가사 말이 좋아야 한다.
서툰 노래일지라도 내용을 음미하면서 부를 때 맛이 난다. 그 속에는 사랑과 눈물을 자극하는 사연이 있고 한 마디 한 구절마다 은근함을 풍기는 향이 있어야한다. 시처럼 부드러운 그림이 있고 상상의 샘을 건드리는 감미로움이 살아 있는 노래, 그 게 내게는 ‘고목나무’다.
고목은 말 그대로 오래된 나무, 나이 든 나무다. 그냥 오래된 나무가 아니라 자랄 대로자라 더 이상 성장할 것 같지 않은 나무라면 진짜 좋은 고목나무다. 가지 끝에는 삭정이가 많고 몸통 곳곳에는 옹이가 있다. 밑 둥의 한 쪽에선 속살이 썩어 비바람을 피할 만큼의 공간을 갖고 있으면 더욱 좋다. 우리네 조상들은 이런 나무엔 어떤 정령이 있으리라 믿어왔다.
정령은 ‘만물의 근원이 된다고 하는 불가사의한 기운’이다. 천년 되고 만년 된 나무라면 위용부터가 범상치 않을 것인즉 그런 나무의 정령은 조화도 무궁할 터이다. ‘천년 늙은 나무는 그 정(精)이 청양(靑羊)으로 화하고, 만년이 된 나무는 청우(靑牛)로 화한다.’는 설화도 이 때문일 게다. 오늘날 청양이나 청우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없어도 절간의 심우발상도 정령 설화와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싫다는 아내를 꼬드겨 주남마을 뒤 집게 봉으로 향한 솔밭 오솔길을 산책하고 올 때다. 아내가 지친 듯 보여 잠시 쉴 자리를 살펴도 마땅히 앉을만한 곳이 없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5·18 위령비 앞을 지나니 바로 길옆에 거목이 잘린 그루터기들이 보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가가서 하나씩 차지하고 앉았다.
송알송알 맺힌 이마의 땀을 씻으며 심호흡을 해본다. 창자까지 시원한 느낌이다. 세 그루 중 내가 앉은 그루터기가 가장 굵다. 둘레가 3미터 가까이 될까? 어림잡아 백 년은 됐음직하다.
주변으로 눈을 돌리니 길 옆 밭에는 목련들이 한창이다. 만개한 나무와 아직은 때 이른 꽃송이들, 그들 사이에서 매화들도 얼굴을 내미는데 백매의 화판이 유별나게 곱다.
언어를 잃어버린 골짜기, 서쪽 산 위로 빗긴 태양, 가느다란 봄바람, 하늘 강을 건너는 구름 몇 조각, 걸 터 앉은 고목 그루터기, 달밤은 아니어도 분위기가 그만이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가벼운 흥이 저절로 인다. 폼을 잡고 ‘고목나무’를 불러본다. 좋은 노래도 세 번이요, 듣기 좋은 육자배기도 두 번이라는데 아내야 내 노래가 싫증도 나겠지만 내가 좋아서다.
단 한 사람뿐인 청중관객, 때 맞춰 나타난 다람쥐 두 마리가 참나무 가지 끝에서 재주를 부린다. 거리의 악사 곁에 꼬마들이 몰려들듯 호기심이 발동하여 찾아온 건지 모르겠다.
저수지 쪽에선 하루 종일 까투리를 유혹했을 장끼가 이번이 마지막 기회란 듯 목소리를 높인다. 내 노래에 화음이라도 맞춰주려는 수작 같다.
가요무대가 된 고목 그루터기, 지금에야 오랜 연륜밖에 말해 줄 것이 없지만 이 골짜기에서 벌어진 사연들을 빼지 않고 보아왔고 마을의 역사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으리라. 수많은 새들이 찾아와 사랑을 나누고 새끼 기를 집을 지었을 것이다. 더위에 지친 농부들은 땅위로 솟아 불거진 뿌리에 허리를 기대보았을 것이고, 개들은 오가며 저마다 제 영역이라는 문패대신 오줌방울을 남겼을 것이다. 어느 용기 있는 총각은 처녀의 손목을 잡고 쏟아지는 달빛을 피해 그늘 밑을 찾아 떨고 있는 아가씨의 입술을 훔쳤을지도 모른다.
고목의 생성과 소멸은 작은 우주의 궤적이다. 베어진 밑동은 세 그루 모두 껍질이 썩어 없어지고 허연 맨살만 남았다. 절단면은 비바람에 씻기어 나이테 흔적마저 희미하다.
나무가 자라는 빠르기를 속도라고는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세월이 지난 사이에 몸통이 불어나고 나이테가 늘어난다. 그래서 나이테는 나무의 역사다. 우람하고 청청했을 그 시절에 같이 놀던 옛사람은 간곳없고 이제는 없어질 날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지난 인고의 세월이 허무하다는 느낌이다.
입 다물고 서 있던 조금 전의 초라한 위령비 때문인가? 비감이 스친다. 와석종신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당한 죽음은 더욱 서러울 터다. 베어진 고목, 차가운 돌비석, 질곡의 세월 5·18이 지났다고 한마저 사라지랴.
고목 무대에 앉아 불러 본 노래 ‘고목나무’, 내가 내 노래에 취하여 아내의 재촉에도 선뜻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옛사람 간곳없고 올 리도 없지만/ 만날 날 기다리며 오늘이 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