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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꽃 지는 소리
이희규
등장인물
대힘(大笒) 30대 후반. 피리 부는 사나이
채현(蔡絃) 30대 후반. 첼리스트
영희(英姬) 60대. 민박집 주인
수일(守逸) 60대 후반. 채현의 운전기사,
때 현대. 11월 만추의 어느 날
곳 산골의 한적한 민박집
민박집의 거실, 식탁과 의자 서너 개가 왼편에 보인다. 소파와 티테이블은 오른편에 배치되어 있다. 흔들의자는 가운데쯤에서 무대를 양분하고 있다. 무대 뒷면은 카운터를 겸한 주방이, 그 왼쪽에는 영희가 거처하는 주인 방, 오른쪽엔 손님 방이 있다. 손님 방쪽으로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계단 앞에 첼로가 배치되어 있어 인상적이다. 주방과 영희의 방 사이에 정수기가 세워져 있다.
관객이 입장하기 전부터 첼로가 울고 있다. 관객이 차츰 자리를 채울수록 조명이 조금씩 좁혀지다가, 막이 오르는 순간에는 스포트라이트가 첼로에 집중한다. 암전되면서 대함이가 앉아 있는 흔들의자가 아련하게 드러난다. 환청처럼 들려오는 노랫소리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뜰에는 반짝이는 금 모래빛/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서서히 무대가 밝아지면서 흔들의자에 기대어 천천히 대금을 입술에 대는 대함. ‘인연’의 음률이 처량하다. 나즉하게 읊조리는 구음 같은 가사가 대금 가락과 맞춰 낭송된다.
약속해요 이 순간이 다 지나고 /다시 보게 되는 그날/모든 걸 버리고 그대 곁에 서서/
남은 길을 가리란 걸
인연이라고 하죠 거부할 수가 없죠/내 생애 이 처럼 아름다운 날/또 다시 올 수 있을까요/
고달픈 삶의 길에 당신은 선물인 걸./이 사랑이 녹슬지 않도록 /늘 닦아 비출게요.
취한 듯 만남은 짧았지만/빗장 열어/맺지 못한데도 후회하진 않죠/영원한 건 없으니까
운명이라고 하죠. 거부할 수가 없죠/내 생애 이처럼 아름다운 날/또다시 올 수 있을까요/
하고픈 말 많지만, 당신은 아실 테죠./먼 길 돌아 만나게 되는 날 /다신 놓지 말아요.
이 생애 못한 사랑, 이 생애 못한 인연/먼 길 돌아 다시 만나는 날 /나를 놓지 말아요.
1
무대가 밝아지면 영희가 머리를 추스르며 방에서 나온다.
영희 (대함을 보며) 덕분에 일찍 깨었지 뭐예요. 잘 주무셨어요, 손님? 근데 웬 소리가 그렇게 고와요? 피리 소리가 이렇게 고운 줄은 몰랐어요.
대함 대금입니다.
영희 아, 대금! 생각보단 크군요. 대금이 이렇게 길 줄은…….
대함 미안합니다. 나가서 불기에는 밖이 너무 추워서…….
영희 아니, 아니에요. 일어날 시간이 넘어 버렸어요. 덕분에 늦잠을 푸욱 잔 기분입니다. 꿈결인 줄 알았어요. 아니 계속 꿈을 꾼 듯한 느낌이었죠. 혹, 손님께선 대금의 명인 아니세요?
대함 아닙니다. 조금 불 줄 압니다.
영희 분명히 명인이세요. 국악은 잘 모르지만 듣는 귀는 아직 살아 있지요. 우유, 아니면 주스 한잔? 아니면 커피?
대함 (망설이다가) 저, 혹시 오미자 차……?
영희 어머? 알고 오셨어요? 이곳이 오미자가 생산지라는 걸? (대함을 한번 살펴보면서)……. 일부러 오미자를 찾는 사람은 없거든요. 잠깐 기다리세요. 곧 준비해 올게요. (주방으로 들어간다.)
대함 (밖을 내다보며 혼잣말로) 별로 변한 게 없네.
영희 네? 손님은 여길 아세요?
대함 (당황한 듯 머리를 흔들며) 아닙니다. 시골은 도시에 비하면 변하는 속도가 비교할 수 없이 더디죠.
영희 그렇긴 하지만, 이곳도 많이 변했답니다. 제가 이곳의 오미자 농장을 사서 애 아빠와 같이 이사 올 때만 해도 깡촌이었지요.
대함 오미자 농장이라고요? 그걸 사장님께서 사셨다고요?
영희 네. 애 아빠가 많이 아팠어요. 공기 좋고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에서 안정을 해야 한다기에, 산골과 해변을 물색했었지요. 오미자를 사러 이곳에 왔었는데 오미자 밭을 판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즉시에…….
대함 그 농장을 사셨다고요?
영희 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그냥 싸게 내놓으셨기에.
대함 네…….
영희 (영희의 휴대폰이 울린다.) 아, 네.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물론이죠. 네. 네에. (대함에게) 오늘 오실 손님의 전화예요. (오미자 차와 빵을 쟁반에 담아 내오며) 덕분에 애 아빠와 여기서 17년을 살았어요, 바로 이곳에서. (티테이블을 가리키며) 여기서 드시지요.
대함 (받아들며) 네. (차를 마시며) 역시 오미자의 진맛이 나는군요. 인생의 온갖 맛이 스며든 이 맛, 참 오랜만이네. 바로 이 맛이지요. 잘 달여진 진향의 맛.
영희 손님께선 오미자 참맛을 아시나 보네요? (찬찬히 대함을 살펴본다.)
대함 오미자는 어떻게 우려내느냐가 맛을 결정하지요. 끓인 물이 미지근해졌을 때 오미자를 하룻밤 정도 넣어두었다가 적당히 우러났을 때 마셔야 제맛인데, 이 차가 그렇군요.
영희 어머나! 그걸 아세요?
대함 그럼요. 바깥 사장님은 어디에?
영희 작년에 가셨어요. 참 좋은 사람이었지요. 일 년밖에 못 산다고 했는데 16 년을 더 살았으니, 오래 산 셈이지요. 이 오미자 덕일까요?
대함 그럴지도 모르지요. 오미자의 효능이……. 음, 정말 맛있군요.
영희 오미자 차를 즐기는 사람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맛보다는 아직도 한약재로 많이 쓰이지요.
대함 맛도 맛이지만, 색깔이……, (눈이 첼로에 가며) 마치 저 첼로빛과 같아요. 첼로가 소리를 낸다면 진한 오미자 색깔이 되겠지요.
영희 오미자 차 맛과 첼로 소리라니……. 혹 시인이세요?
대함 ……. 어젯밤 첫눈에 띄던데, 첼로가 왜 저기에?
영희 아. 오늘 저 첼로의 주인이 오시는 날이에요.
대함 네? 첼리스트가 무슨, 여기서 연주회라도?
영희 아니, 아니에요. 오래전부터 저희를 도와주는 사장님이 첼로를 잘 켜셔요. 손님처럼 우연히 오셨다는데, 처음 온 사람 같지 않게 아주 자연스럽더라고요. 버거운 첼로를 차에 싣고 와서, 이 아래 암자터에서 한참을 연주하더니…….
대함 (약간 놀라며) 암자터에서요?
영희 네. 무슨 사연이 있나 봐요. 우리가 민박집을 차린 그해에 처음 찾아와, 이틀 밤을, 아니 사흘을 묵었던가. (그날을 기억하듯) 처음부터 인상적이었어요. 하여튼 그 후로는 항상 이맘때에 우리 집에 들러요. 우리 민박집의 최고급 손님이시지요.
대함 최고급 손님이라?
영희 그렇고 말고요. 하룻밤을 묵든 이틀을 묵든, 무조건 봉투에 두둑히 넣어주고 가세요. 숙박일지에 다 기록되어 있어요. 그러지 말라고 해도.
대함 잘 사나 보군요.
영희 고마우신 분이지요. 그래서 저희가 이 첼로를 신주 모시듯 이렇게 잘 관리하고 있답니다.
대함 첼로를 맡겨 놓았나요?
영희 맞아요. 다음 해에 이 첼로를 두고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대함 첼로를 두고 갈 정도…….
영희 말해 뭘 해요. 세계 최고가 뭔 줄 모르지만, 제 귀에는 최고예요. 어찌나 그 곡이 슬픈지. 아, 손님의 대금 소리만큼이나 슬퍼요. 차라리 우는 것 같아요. 그 가냘픈 몸에 어찌나 슬피 떠시는지,
대함 여자이신 모양이지요? (창밖의 단풍나무를 본다.)
영희 우아하시지요. 여사님이 오시는 그날은 아예 손님을 안 받아요.
대함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며 약간 머뭇거리다가) 그럼 저는 왜?
영희 오늘 가시잖아요?
대함 아, 그러기로 했지요. 이틀은 안 된다고 하셔서.
영희 맞아요. 여사님이 오시는 날에는 온전히 그분에게.
대함 (한참을 생각하다가) 제가 잘못 온 것 같군요.
영희 아니예요, 오늘 오후에만 가신다면.
대함 물론이지요. 그렇게 약속했으니까요.
영희 덕분에 저는 오늘 대금도 듣고 첼로도 듣게 되겠네요. 이 산골에 살면서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손님은 무슨 일로 여길 오셨어요? 그것도 늦은 밤에.
대함 아, 예. 제 아버지의……유골함을 이 산에 모시려고요.
영희 네에? 돌아가셨나요?
대함 네, 나흘 전에 운명하셨지요.
영희 이걸 어쩌나. 연세가?
대함 삼 년 전에 일흔이셨으니까.
영희 이걸 어쩌나. 아직은 젊으신 편이신데.
대함 오랜 시간을 투병하셨습니다.
영희 아픈 사람만 서럽지요. 애 아빠도(약간 슬픈 얼굴로) 고생만 하다가 떠났는데……. 여기가 선산이라도?
대함 아버지의 유언이……. 누구나가 가을이 지나면 이 세상을 떠나지요.
영희 그래요. 한 세상은 금방이에요. 그러니 후회 없이 살아야 해요.
대함 맞아요. 사랑도 열심히 하다가.
영희 그럼요. 참, 내 정신을 봐. 아침을 드셔야지요.
대함 됐습니다, 저는 아침을 들지 않은 지가 오래됩니다. 차 한잔, 빵 두 조각이면.
영희 우리집은 아침이 성찬이에요. 반찬이 모두 산나물이고 정말 깨끗…….
대함 감사합니다만, 저는 이제 아버님을 모시고 나가야 합니다.
영희 아니, 점심이나 드시고 가시지요?
대함 첼리스트가 오신다면서요.
영희 오시면 또 어때요? 오늘 가실 거라면서요?
대함 그렇긴 하지만, 아무래도 제가 좀 불편할 것 같습니다.
영희 아니, 왜요?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오른 듯) 두 분이 함께 연주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어때요, 좋은 생각, 아니예요?
대함 저는 별로…….
영희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건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대함 저는 그냥 가겠습니다. 아버님 유골을 모셔놓고 내일 연주를…….
영희 대금의 명인! 내 짐작이 맞았네.
대함 그것과는 상관없이 저는…….
영희 알았어요. 근데 이상한 것이, 세상사는 알 수 없는 선으로 연결되어 있단 사실이에요. 제 예감에 대금과 첼로, 아니지, 첼로와 대금. 무슨 인연이 있을 것 같은? 맞아요. 이런 예감이 들 때는 몸이 아르르 저려 오거든요. 지금처럼요.
대함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
영희 맞아요. 분명히 알 수 없는 힘이 여기에 작용하고 있어요.
순간 울리는 모바일 벨소리. 두 사람 긴장한다. 눈이 마주친다. 외면하는 대함. 영희가 얼른 휴대폰을 귀에 댄다. 대함이 피하려는 듯 얼른 대금을 들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영희 네, 여사님. 네. 벌써요? 아니 왜 이렇게 빨리?
채현의 소리 그렇게 되었어요. 사실 어제 가려고 했었잖아요. 오늘 일찍 출발하길 잘했어요. 오늘이 암자터 중창 착공식 날이라네요. 신도와 스님들의 차가 길을 다 막고 있어요. 길이 좁아서 내려가는 길이 막혀 버렸다니까요. 오후에야 통행이 가능할 것 같다는데…….
영희 예, 잘 알겠어요. 준비는 다 되어 있어요. 첼로요? 물론 잘 닦아서 내놓았지요. 네. (통화를 마치고 대함을 찾으려다가, 혼잣말로) 예감이 이상했어. 그렇다면 그 소문이 사실일까? 여자를 죽이려 했던 남자가 불을 질렀다지? 그래서 암자가 다 타 버리는 바람에 그 여자가 죽었다는. 소리 없이 사라진 그 남자 가족들의 소식도 종무소식이라던데……. 궁금해, 이상하게 마음이 저려 오네.
대함이 짐을 꾸려 나온다. 캐리어 가방을 끌고 바삐 서두는 모습이다.
영희 손님, 내려갈 수가 없대요. 저 아래 암자터에 오늘 중창 법회가 열리는데, 이미 올라오는 길이 다 막혀 있대요.
대함 그게 무슨 말씀?
영희 어젯밤에 오시느라 못 보셨을 거지만, 오늘이 산내암 중창 착공식일이라네요.
대함 산내암이라면 20년 전 불타 버렸던?
영희 (눈을 크게 뜨며) 그것도 아셔요?
대함 (당황하며) 소문으로 들어서…….
영희 (혼잣말로) 뭔가 있다니까.
대함 산내암 소실은…….
영희 이 고을 사람 말고는 다 잊혀진 옛이야기인데.
대함 신문에까지 난 큰 사건이었지요.
영희 저는 이곳에 들어와서야 들은 소식인데…….
이때 밖에서 차가 멈추는 소리. 영희 얼른 나간다. 멍하니 서 있는 대함. 초조한 표정으로 서성거린다.
대함 아닐 거야. 걔는 지금 외국에 나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영희 (밖의 소리) 어서 오세요, 여사님. 꼭 일 년만이네요.
대함 인연이 아니라면 만나지 않는 게 상책이지 않나?
수일 (밖의 소리) 안녕하세요 사장님?
대함 어제 오후에 아버지 유골을 안장하고 그냥 올라갈 수 있었는데, 하필이면 고속도로에 대형 사고가 날 게 뭐람.
채현 (밖의 소리) 반가워요. 생각보다 건강해 보이시네요. 전 걱정했었는데.
대함 헉, 채현이? 잘 피해 왔는데 하필이면 오늘이야. 어떡하지?
영희 (밖의 소리) 그 짐 저를 주세요.
수일 괜찮아요, 이건 내 일이에요.
대함 빌어먹을. 어쩔 수 없지. 피하지 못한다면 부딪칠 수밖에 없지. (흔들의자에 팔을 짚고 기댄다.)
영희 (문밖에서) 손님이 한 분 계세요. 오늘 퇴실하실 분이지만.
수일이가 가방을 들고 들어온다. 대함을 보고 목례를 하더니 짐을 들어 2층 계단으로 올라간다. 이어 들어오는 영희, 뒤따라서 채현이 들어온다.
채현 (소리) 그래요? 손님이 늘었나요?
영희 (들어와 뒤를 보며) 그건 아닌데요.
대함이 흔들의자를 잡고 일어선다. 들어온 채현. 화려한 외모에 썬그라스를 썼다. 우아한 모습에 실내가 밝아진 듯하다.
영희 손님, 아까 오신다고 했던 여사님…….
대함과 채현이 눈을 마주치는 순간 경직되는 두 사람. 정적이 흐른다. 대함이 한걸음 물러선다. 채현이 썬그라스를 벗으며 입을 막는다.
채현 오빠, 오빠 맞지?
대함 (체념하듯) 채현이……. 정말 오, 오랜만이야.
채현 (약간 비틀거리며) 맞네, 대함이 오빠!
영희 (채현을 붙잡으며) 아이고, 이건 무슨 일이래? 소름 돋아!
(컷아웃 되는 조명)
2
무대가 밝아지면 흔들의자에 채현이, 그리고 소파에 대함이 앉아 있다. 첼로는 흔들의자 옆으로 옮겨졌다. 영희는 주방에서 다과를 준비한다. 어색한 침묵이 무대를 휘돌고 있다. 채현이가 보면 대함은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며 대금을 만지작거리고, 대함이가 채현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손질하며 썬그라스를 벗었다 썼다 하는 채현. 영희가 과일과 오미자 차를 들고 식탁으로 온다.
영희 여사님, 좀 드시지요.
채현 ……. 감사합니다.
영희 손님도 오셔서 함께 드셔요.
대함 네, 감사합니다.
영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두 분은 그 말밖에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채현 감사합니다.
대함 네, 저도 감사합니다만, 아까 차를 마셔서…….
영희 (흉내내며) 네 감사합니다. 그럼 커필 드릴까요?
채현 저는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영희 (뒤돌아서며 혼잣말로 흉내를 내며 ) 네 감사합니다. 커피 드릴게요. (준비된 커피를 티 테이블에 가져다 놓는다.)
대함 감사합니다.
영희 네에, 감사합니다.
수일 (2층에서 내려와 채현 앞으로 오며) 내일 밤에 로마로 가는 비행기가 예약되었다는데, 아가씨, 내일 오전에는 출발해야 할 것 같아요.
채현 모레로 미루면 안 될까요, 아저씨?
수일 연주회를 위해 좀 쉬셔야 한다는 사모님의 조언이 있었어요.
채현 연주, 연주, 연주……. 도대체 누굴 위한 연주인지.
영희 그래요. 여사님, 여기서 쉬셔도 좋은 휴식이 될 텐데요.
수일 안 됩니다. 아가씨의 일정은 정밀하게 조율되어 있어요.
대함 자유로워지기 위해 음악을 하는데…….
영희 맞는 말씀이에요. 저,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마음대로 나다니며…….
채현 아니에요. 가야지요. 아저씨, 알았어요. 내일 몇 시쯤에나?
수일 (대함을 눈여겨 보면서) 아침 식사 후 바로 나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영희 한 이틀 쉬실 거라 생각했었는데.
채현 마음대로 되는 인생이 어디 있어요. 다들 얽매여 사는 것이지요.
대함 (혼잣말로) 얽매여 있는 것을 푸는 게 인생 아닌가.
마주치는 채현과 대함의 눈길, 순간의 긴장이 찬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무대
채현 그래서 소식을 끊고 이십 년을 숨어 살았다?
대함 끊을 것은 끊어야 하고 맺을 건 맺어야 푸는 인생이지.
또 한번의 바람 소리. 우수수 지는 낙엽 소리가 들린다. 영희가 민감하게 반응한다.
영희 맺고 푸는 것은 다 당사자들의 일이지요. (수일에게 나가자는 눈짓하며 자기 방쪽으로 들어간다.)
수일 저는 암자에나 다녀올까 합니다. (채현에게) 사모님과 사장님 걱정 안 하시게, 편히 쉬어요. (휴대폰을 꺼내들고 다시 한번 대함을 스쳐보며.) 네, 사모님. 방금 도착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네에. (밖으로 나간다.)
두 사람 사이에 더 큰 정적. 산골을 지나는 바람 소리.
대함 (두어 번 헛기침 끝에) 비인에서 결혼했다는 소문을 어렴풋이 들었는데.
채현 나는 아무 소식도 못 들었는데.
대함 어차피 알아서 득 될 것도 없지 않아?
채현 그래도 궁금하긴 했는데.
대함 가끔은 첼로 하는 사람에게 물어보긴 했지.
채현 나는 오빠의 소식을 하나도 듣지 못했어.
대함 군대 갔다 와서 아예 두문불출했으니까.
채현 주민등록 주소지에도 그런 사람 없다는데, 나로서는 도저히..
대함 그렇겠지. 대금 장인 집에서 이름도 속이며 살았으니까.
채현 왜?
대함 그냥 그대로 스며들고 싶었어.
채현 대학 가자마자 아버지는 날 비인으로 보냈어. 좋은 교수님에게 사사 받도록 후원해 주셨는데…….
대함 나는 젓대만 깎았어. 스승님이 표시해준 쌍골죽에 취구와 청공, 지공만 열심히 뚫기만 했지. 그리고 책만 읽었어. 대금은 곁눈질로 익히고.
채현 옛날부터 대금은 잘 불었잖아.
한참의 긴 침묵
대함 어릴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4학년 땐가, 네가 처음 이곳에 왔던 때를 기억해?
채현 생각나지. 아래 산내암 시냇물에서 가재 잡았잖아.
대함 (미소 지으며) 여름방학이면 넌 꼭 내려 왔었지.
채현 멋 모르고 좋아하던 시절, 자꾸 생각나곤 했어…….
대함 그때가 좋았는데. 같이 불렀던 노래. (대금을 꺼내 분다. 고요히 흐르는 대금 ‘꽃밭에서’)
채현 ……. (조용히 따라 부른다)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 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좋다.
영희, 방에서 슬그머니 나오더니 엿본다. 흐뭇한 미소. 대함은 ‘과꽃’을 연주한다.
채현 오늘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안 되겠다. 첼로랑 같이? (고개를 끄덕이는 대함이, 채현도 함께 연주한다.)
대함이 ‘섬집 아기’를 연주하자 같이 연주하는데 어린 시절의 아이들 둘이 하는 목소리가 배경음으로 함께 들린다. 중간쯤 부르는데 채현이 울음을 못 참는다.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아련히 들리는데,
채현 (훌쩍이며) 엄마
대함 아, 미안.
채현 지금도 알 수가 없어. 왜, 왜 그 암자에 불을 질렀을까.
대함 …….
채현 엄마는 불공만 드렸어. 해마다 여름이면 산내암이 좋다고 나랑 같이 왔었잖아.
대함 차라리 몰라야 하는 사실도 있지 않을까?
채현 그게 무슨 뜻?
대함 그 일 때문에 나는 그대로 땅으로 스며들고 싶었어.
채현 엄마가 무얼 잘못했기에, 밖에서 문을 잠그고 불을 질렀을까.
영희 (숨어 듣다가 내뱉는 소리, 에코로 처리된다.) 워매야, 이게 무슨 일? (더 몸을 숨겼다가 다시 엿듣는다.)
대함 (머리를 쥐어 뜯으며) 그 일만 없었다면 나도… 내 인생을 잘 살 수….
채현 도저히 이해가 안 가. 오빠 아버지는 신도회장 아니셨어?
대함 그랬지. 내가 중학생 될 무렵부터 산내암의 일을 다 돌보셨지. 아버지는 그 일로 이십 년 가까이 감옥에 사셨어.
채현 당연하지. (대함을 애써 외면하며) 사람을 죽이려고 절에 불을 질렀으니.
영희 (에코) 아니, 저 손님의 아버지가 불을 질렀다고? 정말?
대함 (괴로워하며) 그래, 그 죗값을 치르신 게지.
채현 나는 지금도 오빠의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어.
대함 그래, (무슨 말을 하려다 멈추며) 용서하지 마. 넌 그래도 돼.
채현 정말이지, 난 왜 그랬는지 궁금해. 엄마가 꼭 석 달을 병원에서 의식 없이 숨만 쉬다가 돌아가셨어.
영희 (에코) 이 비극을 어찌해야 할까?
대함 나중에야 그 소식도 들었어.
채현 알고도 안 온 거야? 장례식에는 못 왔어도 나를 찾아오기는 했어야지?
대함 무슨 낯짝으로? 그때는 갈 수 없었어. 나는 아버지가 구속되고 재판을 받게 되자 그날로 학교를 그만뒀어. 아니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
영희 (입을 막으며) 아이고야.
대함 뭣보다도 수군거리는 학교 친구들의 뒷담화가 무서웠어.
채현 학굘 그만 뒀단 소리는 들었는데.
대함 돈도 없었지.
채현 그랬구나. 그래도 내게 연락은 하지.
대함 스며들고만 싶었다니까.
채현 그래도 오빠는 날 찾았어야 했어.
대함 왜, 그 약속 때문에?
채현 (대함을 마주 보며) 그래.
대함 허헛, 어린 시절의 풋내 나는 약속?
채현 풋내 나는 약속이라고? 고등학생이인데? 그때는 다 컸다고 생각했잖아.
대함 사람들은 다 어려. 어른이 되어서도 어려. 옳다고 믿는 것들의 거짓에 빠져 모두 허우적거리다가 가는 거야.
영희 (에코) 워메, 저 대금쟁이의 말씀 보소?
채현 옳으면 옳은 거고 그르면 그른 것 아닌가?
대함 흑백 논리야. 세상은 형형색색이지. 빛을 합하면 투명한 흰색이지만 색을 섞으면 캄캄한 흑색 아닌가?
채현 그래서, 지금 나에게 내가 어리석었다고 말하는 거야?
대함 어리석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깊은 속을 보면 모두가 카오스라는 것이지.
채현 오빠, 양자역학을 얘기하는 거야?
영희 (에코) 양자역학?
대함 진실에 이르기에는 이 세상은 너무 어지럽다는 것이지. 약속도 그래. 그 약속을 할 때는 우리는 깨끗했지. 하지만 상황이 변했잖아. 아버지가 방화범이고 살인범이라는데, 더구나 희생자가 네 어머니라는데, 그 약속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채현 신성한 약속은 지켜져야 해. 순수한 약속은 더욱 소중해. 지켜져야 할 순수처럼 소중한 가치가 어디 있어?
대함 그래서, 너를 내가 찾아갔다면, 뭐가 어떻게 달라지는데?
영희 (에코) 맞아. 뭐가 달라질까?
채현 용서라도 빌었어야지.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하면 안 돼?
대함 그러면 네가 나를 용서해 주었을까?
채현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중요한 건, 소중한 가치, 순수한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고 믿어, 나는.
대함 네 아버지는?
채현 그건 상관이 없는 얘기지. 아무런 약속도 없는 사이에 무슨?
대현이 채현을 한참 보다가 괴로운 표정을 짓다가 일어선다. 서너발 걸어 창가에 서서 하늘을 본다.
대함 너는 몰라. (숨을 헐떡이며) 누명이 얼마나 무서운 형벌인지.
채현 누명이라니?
대함 (독백처럼) 아버지는 20년을 누명 쓰고 살다가 억울하게 돌아가신 거야.
영희 (에코) 뭐, 뭐라고? 누명?
채현 오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누명이라니?
대함 난 재심을 신청할 거야.
채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재심이라고? 대법원에서까지 가서 확정된 판결을?
대함 그래, 반드시 아버지의 누명을 벗겨 드릴 거야.
채현 방화범이 따로 있다는 말이야? 증거가 있어?
영희 (에코) 그래, 증거가 있어?
대함 (캐리어를 열어 유골함을 꺼낸다. 그 옆의 편지를 든다.) 아버지의 유언장이야.
채현 아니,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대함 (울음을 참으며) 나흘 전에 돌아가셨어. 오늘 이 유골함을 산내암 암자터 한켠에 묻으려 왔던 게야.
영희 (에코) 뭐, 산내암에다?
채현 (혼돈된 상태에 빠져들며) 이게 무슨 말이야. 엄마의 제사가 오늘인데.
대함 아버지는 출소하신 지 3년도 못되어 돌아가셨어. 감방에 계실 때나, 출소 후에도 변함없이 하시는 말씀이 ‘나는 억울하다. 그날 밤에 스님을 만나 산내암의 공양간 개축에 대해 얘기한 죄밖에 없다고 하셨어.
채현 그런데 왜, 왜 방화범이 된 거야?
대함 그날 밤에 산내암을 찾은 사람이 아버지밖에 없었다는 사실 하나, 그리고 아버지가 술 한잔 하고 담배를 피셨다는 사실, 그리고 네 어머니를 좋아했는데, 그게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고 했다던가? 이런 것들이 방화범 추정의 근거가 되었다고 해.
채현 우리 엄마를 오빠 아버지가 사랑했다고?
대함 신도 사이에 친할 수는 있었겠지. 나는 그것도 안 믿어.
채현 (유언장을 꺼내 들고) 사랑하는 아들아, (목소리가 떨리며) 나는 죄가 없다. 너에게 부끄러운 애비가 아니다. (대함이의 아버지의 목소리로) 대함아, 반드시 재심을 청구해주렴. 출소해서 그동안 내가 조사한 모든 기록을 남겨 놓았다. 그 증거에는 그날 산내암을 밤늦게 다녀간 차가 한 대 있다는 것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영희 (에코) 이 무슨 해괴한 이야기야? 그 운전사의 차?
대함 (편지를 가져와 읽는다.) 그런데 이 차의 주인을 불러 조사했지만 그 차가 아니라는 거야. 필름이 흐려서 번호판이 잘 보이질 않고, 또 그 차 주인은 알리바이가 성립되어 혐의가 없다고 판단했는데. 나는 아무래도 이 차가 수상하다. 지금은 기술이 발달 되었으니 그 필름을 다시 판독해 보면 이 애비의 원한이 풀리게 될지도 모른다. 아들아, 나는 결백하다. 무죄다.
채현 흐흑, 이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되는 거야.(주저 앉는다.)
대함 불면의 밤을 이 대금으로 달래왔어. 대금 아니면 나도 이미 이 세상을 끝냈을지 몰라. 진실은 항상 현상 속에 가려져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유언을 믿어.
영희 (에코) 그래, 맞아! 진실은 현상 속에 가려져 있다!
채현 만일 이게 사실이라면, 그리고 방화범이 따로 있다면.
대함 아버지의 누명이 벗겨지시겠지.
채현 그럴 수가 있을까?
대함 반드시 그렇게 할 거야. 그래서 네 어머니의 정확한 죽음도, 아버지 때문에 실성하셔 정신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도, 아버지와 함께 모두 억울함에서 벗어나 해원할 수 있도록, 나는 할 거야.
채현 정말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그렇다면, 진실은 밝혀져야지,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게?
영희 (뛰쳐 나오며 큰소리로) 그래요. 그 진실 밝힐 수 있을 거예요.
대함 (놀라며) 아니 사장님,
영희 내 느낌이 예리하다고 했지요. 예감은 직감에서 오는 거예요.
채현 (눈을 둥그렇게 뜨고) 다 들으신 거예요?
영희 제가 여기에 터잡아 이사온 뒤, 많은 사람이 여기를 다녀갔지요.
대함 그래서요?
영희 누구나 다 산내암 전소를 안타까워 했지요.
대함 그런데요?
영희 그러니까, 불난 지 한 오년 지났겠지요. 아까 저 피리부는 사나이가 한 말대로, 산내암을 한밤에 지나간 차가 있었다는 거야!
대함 허, 정말이예요?
채현 누가 봤대요?
영희 아니, 다녀 갔다고 자기가 스스로 다녀갔다고 하는데, 이걸 말해야 하나, 어쩌나?
채현 (다급하게) 말씀해 주세요. 세상이 뒤바뀔 수 있는 진실을 밝혀야지요.
영희 글쎄 여사님. (채현을 보다가) 술 한잔 거나하게 걸치고 찾아온 운전기사. 몸도 안 좋은 애 아빠하고 술을 더 나눴는데, 글쎄, 불난 날 밤에 사모님을 모시고 왔다 갔다고 하고는, 그냥 취해서 코옥 널부러져 코를 골고 자더라는 말을 분명히 내가 들었어요.
대함 그 운전기사를 기억해요?
영희 기억하고 말고요. 자주 오니까. 요즘은 뜸하지만, 그래도 잊지 않고 한번씩은 찾아 오지요.
채현 네에? (대함의 눈과 마주쳐 보다가) 그럼 그 사람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어요?
대함 그럴 수 있어요?
영희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낮게) 물론이지요.
대함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사장님은 저의 은인이십니다.
영희 애 아범의 숙박 일지에 다 써 있지요. 그날 온 손님들과 그리고 중요 사항들을 꼬옥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어요.
채현 정말 다행입니다. 만일 그게 진실과 딱 맞아 떨어진다면,
대함 그렇기만 한다면!
영희 잠깐 기다려 보세요.
안방으로 들어가는 영희. 대함과 채현은 상기된 표정으로 초조하게 기다린다.
채현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나 봐.
대함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아버지는 무죄임에 분명해. 살인 방화 누명을 벗을 수 있을 거야.
영희, 두꺼운 노트 열 댓권을 버겁게 가지고 나온다. 대함이가 달려가 받아온다,
채현 몇 년도 노트를 봐야 할지?
영희 첫해, 아니면 그다음 해 가을, 음 바로 이 무렵이예요, 여사님.
대함 (얼른 노트를 뒤적여 보다가 한권을 고른다.) 여기는 없는데.
채현 잠깐, 여기, 여기 아닌가?
대함 어디 어디?
채현 (떨리는 목소리로) 사모님의 기사가 와서 술을 마셨다. 고주망태다. 산내암 불난 날 사모님을 모시고 산내암에 왔다가 갔다.
대함 (다급하게 당겨 읽으며) 방화범은 잡혀서 재판을 받아 복역 중이라는데, 이 운전사는 왜 이런 말을 한 걸까? 이상한 일이다. 죄책감?
영희 예, 거기예요. 하도 이상해서 저도 그걸 읽고 애아빠와 같이 고개를 갸우뚱했던 기억이 분명히 나요.
채현 그럼 그 운전기사를 찾을 수 있나요?
영희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지요.
대함, 채현 네? 그럼?
영희 어디까지나 숙박 일지에 그렇게 기록되었다는 것은 맞지요,
채현 만일 이 일지의 기사님이라면 혹시 김 선생님……이?
대함 아니, 기사님이라면, 왜?
채현이가 발악을 하듯 소리치며 통곡한다. 놀라 안아주는 대함. 영희는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한다.
영희 여사님, 여사님.
채현 김기사는 새어머니가 데리고 온 사람이야. 그 여자가, 그 여자가!
대함 뭐라고? 진정해, 채현아.
영희 예? 예전부터 함께 한 기사가 아니라고요?
채현 미쳤어, 미쳤어. 다 미쳤어. 아버지가 속은 거야. 늘 아버지 곁을 맴도는 여자라고 늘 어머니가 경계했었는데, 아아악!
대함 진정해. 아직 정확한 진실을 모르잖아. 범인은 아직 아니지 않아?
영희 여사님 진정하세요. 아, 물!(얼른 정수기 물을 받아 온다.)
채현 그러고도 남을 여자예요. 나를 유학 보내놓고 아버지와 재혼해서 모든 걸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는 교활한…….
대함 진정해, 채현아, 채현아!
(암전)
3
조명이 들어오기 전에 대금 소리. ‘그 저녁 무렵부터 새벽이 오기까지’가 구슬프다. 바람소리도 스쳐간다. 소리가 깊어질수록 무대는 밝아진다. 소파에 앉아 대금을 부는 대함을 응시하는 채현, 첼로를 안고 슬픔을 삭힌다. 영희는 조용히 주방에서 정리를 하고 있다. 대금 연주가 끝나면 대함이가 일어선다.
대함 이제 갈 거야. 아버지를 모셔야 해.
채현 잘 될까?
대함 최선을 다해야지. 여기에 차량번호도 적혀 있잖아. 기록된 것을 바탕으로 그 때 운용했던 차를 추적해보면 차도 정확하게 알게 될 거고, 그러면…….
채현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지.
영희 가시게요? 이런 기막힌 인연이 있었는데 그냥 가신다고요?
대함 이제 모든 게 풀리면, 다시 원점에서 시작할 수도 있겠지요. 다시 이 산골로 들어올지도 몰라요. 진실은 늘 가려져 있지만은 않다는 걸 증명하며 살고 싶어요. 젓대나 원껏 불면서.
영희 좋은 생각이에요, 그건 그거고, 지금 여기서 한 곡조……. 같이 같이? 여사님 괜찮지요?
채현 마땅한 곡이 있을까요?
영희 무슨 말씀을. 아까 보니 동요도 곧잘 하시던데.
대함 그래, 다하지 못한 섬집 아기, 마저 끝맺어 볼까. (그냥 서서 대금을 입에 댄다.)
첼로와 대금이 함께 하는 섬집아기가 무대를 채운다. 영희는 취한 듯 눈을 감고 감상한다. 애써 울음을 참는 채현이, 연주가 끝났지만 그대로 고개를 묻고 있다. 대함이 서서히 일어나 나간다. 채현이는 그대로 첼로를 연주한다. 오펜바흐의 ‘자클린의 눈물’이 바람 속에서 흐느낀다. 문을 홱 열며 들어오는 수일, 엄숙한 분위기에 잠깐 머뭇거리다가 쭈볏쭈볏 들어온다.
수일 아가씨, 사모님께서 되도록 오늘 오시는 게 좋다고 하시는데요.
채현 ……. (약간 멈칫하다가 계속 연주한다.)
수일 아가씨, 사모님께서 건강을 많이 염려하십니다.
연주를 계속하는 채현이에게 다가가려다, 이를 말리는 영희.
영희 김 기사님, 가만 두세요. 어머니의 기일이잖아요, 오늘은.
수일 그래서 더욱 건강이…… 염려된다고 사모님이…….
영희 쉬잇!
수일 아, 예, 예…….
‘자클린의 눈물’이 더욱 더 슬픔의 격랑을 타면서 조명은 서서히 모습을 감춘다.
(암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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