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 50년 전까지만 해도 간고등어가 우리들의 밥상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복잡한 유통과정이 있었다.
고등어를 잡는 어부에서부터 이것을 각지로 운반하는 우마차꾼과 바지게꾼, 고등어의 배를 따서 다듬는 아지매, 소금간을 하는 사람 등 간고등어를 둘러싼 가공과 유통에는 각 부분의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땀과 정성이 베어 있다.
바다와 꽤 떨어져 있는 안동에서, 생선은 무척 귀한 산물이었다.
이동수단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바다인 강구, 축산, 후포 등으로부터 고등어를 가져오자면 통상 1박 2일이 걸렸다.
강구에서 새벽 5 - 6시쯤 출발하면 날이 어두워져서야 황장재 넘어 신촌마을에서 저녁을 먹고 하루 밤을 쉴 수 있었다. 다음날 새벽에 다시 출발하여 진보나 임동면 챗거리에 가서야 고등어를 넘길 수 있었다고 한다.
이틀이나 걸리는 이동시간으로 인해 고등어가 상하기 쉽게 때문에 고등어의 장기간 보존을 위해서는 소금이 필수적이었다. 소금간을 하는 것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는데, 먼저 고등어를 잡자마자 즉석에서 배를 따고 간을 하는 형태가 있고, 두 번째로는 포구에 도착하여 간하는 방법, 마지막으로 소비지역까지 운반하여 간을 하는 형태 등이다.
이 중 안동간고등어는 세 번째 방법을 택했다.
생선은 본래 상하기 직전에 나오는 효소가 맛을 좋게 하기 때문인데, 영덕에서 임동면 채거리까지 하루가 넘게 걸리며 오다 보면 얼추 상하기 직전이 되며, 이 때 소금간을 하게 되면 가장 맛있는 간고등어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안동간고등어의 맛의 비결은 자연 지리적 조건이 안동주민에게 안겨준 선물일지도 모른다.
간고등어의 육로 유통에서 우마차꾼들과 마을 사람들과는 아주 특별한 인연이 맺어지게 되었으며, 마방이나
비전문 여인숙 같은 형태도 생겨나게 되었다. 어물전으로 유명했던 임동 채거리 장터 인근에는 마방이 대여섯개나 되었다고 한다.
또한 등금쟁이(등금장수)라 해서 보부상과 같이 등짐을 메고 유통이 원활하지 못했던 오지마을들까지 두루 찾아다녔던 상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집도 가족도 없이 이리저리 떠도는 사람들이었으며, 농사를 지으면 정착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이
보기에는 측은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어떻게 산간오지의 주민들이
그 귀한 간고등어의 맛을 볼 수 있었으랴.
그들은 밥단지를 바지게 밑에 매달아 소지하고 다녔다고 한다.
길을 가는 중에도 끼니때가 되면 거랑(개울가)에서 밥단지를 걸고 밥을 해서 반찬은 거의 없이 장 하나로 끼니를
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마을에 오면 사람들은 여유가 되는 한 자기집에 재워주었지만, 때로는 추위에 동사하는
등금쟁이도 많았다고 한다.
세월이 좀 나아지면서 자전거와 목탄차(석탄차)가 등장했다. 목탄차가 검은 연기를 한껏 뒤로 밀어내면서 달리는
그 광경은 이동 경로상에 있는 주민들에게 재미있는 추억의 삽화로 여전히 남아있다.
추억이 남아있는 음식은 일상적인 음식보다 훨씬 정겹고 맛있다. 아랫목 할아버지 밥상이 놓여있던 간고등어가
새삼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