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암 선생님과 나
청청한 소나무처럼
박 지 연
나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切)라는 말을 새기며 자랐다. 임금과 아버지와 같이 스승은 절대적 위치에 있었다. 서양에서도 ‘아버지로부터는 생명을 받았고 그 생명을 보람차게 하기는 스승으로부터’라고 『풀루타르크 영웅전』에 기록 되어 있듯 스승은 동서를 막론하고 존경의 대상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러한 교육을 받은 덕에 다 성장해서도 언제나 선생님을 존경하며 선생님으로부터는 많은 사랑을 받은 학생이었다. 몇 년 전 학국문인 편집실에 있으면서 정기 시리스 ‘작가의 이야기’ 코너에서 많은 작가의 이야기를 써 왔지만 나의 이야기는 써 주는 사람이 없어 교수님의 이야기를 쓸 기회가 없었다. 이제 내 스스로 쓰려니 어쩌면 마지막일 것 같아 쏟아 놓을 추억이 많다.
나는 이철호 교수님을 늦은 나이, 내 인생의 몇 번의 터닝 포인트 마지막 전환점에 뵈었다. 우리가족은 잠실에서 목동단지로 옮겨와 딸들은 유럽과 미국으로 유학 보내고 아들은 대입 1년 후 군에 입대했다. 평생에 처음 얻은 오전 시간을 내어 그간 습작한 글을 레슨 받으러 광화문 먼데까지 다녔다. 어느 날 영등포역 옆에 신축한 경방필백화점의 문화센타 광고 속에서 경력이 화려한 프로필이 눈에 띠었다. 호기심 많은 나는 오리엔테이션을 기다렸다. 강의실은 대만원이었다. 겨우 뒷좌석 하나를 얻었지만 아기를 동반한 젊은 엄마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나처럼 벽에 기대어 첫 강의를 들었다.
50대 전후로 보이는 이철호 교수님은 청청한 소나무처럼 곧은 자세에 위엄이 넘치며 유창한 강의를 이어갔다. 보통 첫 강의는 서두가 길어 지루하기 일쑤지만 교수님은 첫 강의부터 군더더기 없는 강의에 지적 호감을 가졌다. 네이비(Navy) 자킷에 황금빛 보턴이 유난히 빛나 연예인 스타를 보듯 젊은 주부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나는 확신을 갖고 당장 등록을 마쳤다.
매주 금요일 10시 강의실은 활기가 넘쳤다. 선배처럼 보이는 나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문인 지망생들은 나름대로 개성이 강했지만 교수님은 작품마다 냉철한 평을 가했다. 교수님은 부지런 하시어 먼 곳에서도 제일 먼저 오셨다. 1년 가까이 되자 공통 제목을 제시하셨다. ‘여성 상위 시대라지만 아직도 반대인 남성들의 특권에 대하여’ 라는 주제였다. 나는 좀 부끄럽지만 수필의 솔직성을 위해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남편으로부터 받는 불평등과 갈등에 고뇌하던 차 「여인의 족쇄」 라는 작품을 썼다.
이 작품으로 1994년 한국예총 주간지 월간 예술세계에 추천 등단 신인상을 탔다. 이 작품을 평한 김병권 선생님은 나를 ‘이조 여인’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더욱 고마운 것은 교수님은 대학 강단에서 이 작품으로 수업도 하시고 평론집에도 넣어주시어 나보다 더욱 사랑해 주셨다. 지난 몇 년 동안 미국에 있다 귀국해서도 교수님은 나를 보시자마자 반가움의 표시로 그 작품을 먼저 기억해 내시고 한국문인 2019년 12·1에 명수필 코너에 넣어주셨다. 천 명이 넘는 그 많은 제자들의 작품이 얼마나 많을까. 더구나 27년이 된 등단 작품을 잊지도 않고 기억해 주시다니 내가 어떻게 교수님의 은혜를 잊을 수 있겠는가. 나는 너무 고맙고 또 고마웠다.
우리 반은 시를 쓰고 수필을 쓰면서 신인 문인들이 줄줄이 탄생했다. 그 때도 지금도 변함없는 생각은 언제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생산해 내시는 교수님의 비범함에 놀란다. ‘경방필 여성 백일장’을 열 때에도 백화점 사장님은 교수님의 새로운 착상에 늘 전폭적으로 도와 주셨다. 백화점을 찾는 주부 고객을 불러 모와 앞 광장에서 화려한 식순을 마치고 백일장에 들어갔다. 이를 해마다 개최해 타 백화점과의 차별화가 되었고 백화점 매출에도 기여했다. 가을에는 회원들의 작품을 프레임에 잘 꾸며 해마다 백화점 갤러리에서 시화전을 가졌다. 서부 서울의 중심지에서 문학에 목말라 있는 주부들에게 아름다운 문학의 선물이 되었다. 교수님은 경방필 출신 작가들의 모임을 ‘필문학회’라 작명하여 주셨다. 연말에는 회원들의 작품을 모아 동인지를 만들어 문단의 어르신을 모시고 다른 문인 선후배도 초대해 시낭송과 수필 낭송을 하며 화려한 출판 기념회를 해마다 가지며 1년을 마무리 했다. 그러는 사이 우리들은 형제 같았고 교수님과도 가족처럼 정이 들었다.
이처럼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나는 언제나 어린 학생처럼 교수님이 어렵고 조심스러웠다. 4반세기도 넘는 긴 세월동안 교수님도 나에게 많은 신뢰로 힘을 주셨다. 회고해 보면 교수님은 어느 날 다른 제자에게 숙제를 내셨다. 오래 기다려도 답이 없자 나에게 다시 부탁하셨다. 나는 늘 바쁜 사람이라 미를 수 없어 밤낮없이 준비에 한주 만에 완성해 교수님께 드렸다. 교수님은 반가운 마음에 “박지연회장은 남자라면 대통령 감이야”라고 과한 말씀을 하셨다. 얼마를 지나 어떤 때는 외부 청탁의 글을 보시고 나를 부르시며 “박지연 회장은 총리의 짝이어야 하는데 아깝다” 하셨다. “교수님은 정말 농담도 잘 하세요”라며 쑥스러워 웃어 넘겼지만 이글을 쓰려니 먼저 기억에 떠오른다. 교수님은 허튼 이야기나 실없는 말씀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교수님은 부족한 나를 언제나 신뢰하시고 ‘한국문인 아카데미 연수원장’의 이름으로 신인 교육과 지방에 흩어진 교수님의 수많은 제자들을 불러 세미나를 열게 하셨다. 늘 일정이 바쁘신 교수님은 미국을 가실 때 4층의 신인반 교육을 부탁하셨다. 나도 오키나와에 있는 막내 네를 가기 위해 예약을 했지만 미루고 교수님 말씀을 따랐다. 교수님 유고시에는 강남 신세계 문화센터에서 대강을 가기도 해서 최선을 다 했다.
1994년부터 2010년까지 경방필 백화점이 타임 스퀘어로 바뀔 때까지 문화센타의 강의를 하실 때 남자 회원 한분이 나에게 무슨 큰 부탁이라도 하듯 커피 대접을 하시며 “박지연회장은 교수님과 딱 닮았다”고 하신다. 어떤 불만이 있는가싶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교수님의 열정과 말솜씨가 닮았다“ 고 했다. 나는 극구 부인하며 절대 그런 얘기하면 안 된다고 핀잔을 주었지만 신인들은 그런 말을 자주 해 교수님께 폐가 되지 않으려 무척 조심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는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친다(士爲知己者死)’ 라는 말이 있듯 나로서는 스승을 잘 모시며 의도를 빨리 알아차려야 하는 것은 의당 할 일이었다. 부족한 사람을 배려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 선비와 다를 바 없는 마음이지만 내 힘이 미약해 보답할 길이 없다.
교수님이 젊으실 때는 한의원에 환자들이 가득 기다리고 있었고 그 바쁜 중에도 방송국 MC에 방속극을 쓰셔 인기가 대단하셨다. 서울특별시 의회 상임위원장으로 서초구민의 제반 교통문제까지 타결하시려고 몸이 열이라도 못 다할 바쁘신 중에 시간을 내어 무료진료에 환자들을 보시며 명의로 이름을 날리셨다. 그뿐이랴. 『허준과 동의보감』 『풍운의 태양인 이재마』 한의학 전문서와 의창에 비친 소설과 수필집 시집 평론집 칼럼집 등 70여권에 달하는 작품집을 내셨다. 철인이 아니고야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천재적 업적을 남기시어 문학상을 물론 좋은 상을 모두 휩쓸어 받으신 분이다.
교수님의 그러한 화려한 경력의 뒤에는 남다른 노력과 땀으로 일궈낸 고난의 세월이 숨어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교수님 스스로도 뒤돌아보시며 문단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업적과 그 많은 것을 그만 묻어 두기에는 너무 아까워하시며 피 같은 40여억 원을 들여 몇 년 동안 고생 끝에 「소월 · 경암 문학예술 기념관」을 건립하신 것이다. 교수님이 평생의 꿈으로 사랑해 오신 문학에 모든 것을 헌납하셨다 여겨진다.
지난여름 월간문학에서 오랜만에 청탁이 왔다. 나는 ‘이 때다’ 싶어 1만 3천여 명의 문인들에게 교수님을 자랑하고 싶었다. 송고 후 편집실에서 개작의 주문이 왔다. ‘랜드 마크 (Land mark)'라는 제목으로 다시 보냈다. 지난겨울 미국 플로리다 주 키웨스트에서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문학과 경제의 중심이 된 이야기와 봉평의 이효석의 메밀이 농촌경제를 살리는 강원도의 랜드 마크이듯 교수님의 증평문학관도 문학의 랜드 마크가 되길 염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그게 월간문학 2019년 8월호에 계제되었다.
제주도의 세미나와 시상식 행사 때도 고 황금찬 원로시인을 언제나 돌아가실 때까지 따뜻하게 꼭 모셨다. 진해 해군기지 행사 때는 남해 바다에 정박해 있는 해군 함정을 타보는 멋진 경험과 왜적을 물리친 거북선도 타 보는 이런 귀한 경험을 어디서 맛보겠는가. 1592년 왜란 때 이 거북선으로 왜적을 물리쳤다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파란 바다가 바라보이는 동산에는 바다를 지키는 해군 장병들이 오가며 늘 나라사랑에 불타기를 염원하는 애국시가 새긴 교수님의 시비도 세워져 있다.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시절에는 일본의 미와자키에 도착하자 벚꽃이 절정을 이룬 나무 아래서 일본 소녀들이 환영 꽃다발을 교수님에게 드렸다. 일본 작가들과 만나 즐거운 민속춤과 음악을 감상할 기회도 가졌다. 호텔에서 검은 모래찜을 하며 남국의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헤아리던 추억도 새롭다. 후쿠오카에서는 백제유민들의 마을을 찾아보며 디아스포라의 슬픈 흔적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던 규슈 기행도 잊을 수 없다.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세미나에서는 우리 회원도 많이 참석했지만 동부의 워싱톤 뉴욕에서 작가들이 많이 와 세미나를 화려하게 마치고 사막의 네바다 주를 달려 24시간 잠들지 않는다는 라스베이거스에 도착, 호텔마다 있는 카지노에서 20달러를 잃어도 재미있는 체험은 난생 처음이었다. 화려한 그곳의 몇 밤도 즐거웠고 코로라도 강가에서 물 반 고기 반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야자수 아래서 노래 부르며 깊어가는 밤을 아쉬워했던 일, 그랜드 캐년에서 헬리콥터를 타보는 재미도 좋았다. 모든 것이 교수님의 광폭 구상과 세밀하신 아이디어 덕분이다. 어느 문인도 가져보지 못한 많은 체험을 쌓았다.
교수님을 뵈 온 오랜 문단 생활은 늘 활기찼고 새로웠으며 많은 다른 문학회의 부러움을 샀다. 내가 신문 월간지에 칼럼과 연재 ‘박지연의 시사파워’ 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는 것도 교수님으로부터 받은 자신감 덕분이다.
요즘도 새로운 구상을 하나씩 지켜나가시는 그 열정은 청청한 소나무처럼 꿈 많은 젊은 날의 모습과 변함이 없다. 외롭고 괴로운 날을 일을 낙(樂)으로 버티시고 견뎌 오신 교수님이시다. 우리가 해내지 못한 많은 일을 늦게나마 유금남 관장님이 힘이 되어 주시어 고맙기 그지없는 마음이다. 두 분, 긴 호흡으로 나날이 강건하시고 행복하시길 비는 마음도 간절하다.
교수님은 내가 이 나이에도 여전히 조심스러운 존경하는 스승님이시다.
‘하루를 배웠어도 평생의 사부(師父)님이시다’ 라는 중국의 존사중도(尊師重道)의 정신을 나는 끝날 까지 가슴에 간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