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효숙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세 번째 이야기 <50년 간의 고독> 아고타 크리스토프.
3편을 읽으면서 너무 많은 혼란이 왔다. 누가 루카스고 누가 클라우스인지. 2편을 읽고는 둘 중 하나는 상상의 인물이라 여겼는데, 쌍둥이가 맞았다. 다 읽고도 글의 전개가 어떻게 된 건지 갈피를 못 잡았다. 3편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1편과 2편의 주인공이 각각 루카스와 클라우스였음을 깨달았다. 서로를 애타게 찾았고 결국 만났지만 만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전쟁 탓이려니 했다. 하지만 전쟁때문에 모든 부모가 그런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지만 불륜을 택한 아버지나 아이 앞에서 상대를 죽이고 자기 자식까지 불구로 만든 어머니 모두 용서 받을 수 없다.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리나>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둘 중 한 사람만이라도 다른 선택을 했다면 이런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까. 이야기가 끝나고 만약이라는 말은 말도 안되지만 첫 번째 이야기에서처럼 쌍둥이가 함께 였다면 그래도 불행을 함께 극복해가면서 더 나은 삶을 살지 않았을까. 아니면 둘 중 하나라도 어린 시절의 아픔이 치유가 되었더라면 함께 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여자 작가다. 남녀 성별을 따지려는 게 아니라 보통의 작가들은 주인공을 선택할 때 자신과 다른 ‘성’을 잘 선택하지 않는다. 선택해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더라도 어색함이 묻어 난다. 은연 중에 드러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주인공 남자들의 생각과 마음, 행동을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섬세하지만 여성작가의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훌륭한 작가를 이제라도 만나서 반갑고 행복하다.
* 최명심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아고타 크리스토프/까치
3부 50년간의 고독
1~2부와는 다르게 1인칭 시점으로 쓰여져 있다.
하나인 듯 둘 같은, 둘 인 듯 하나같은 클라우스와 루카스.
그 사건.
가족이 해체되고 루카스와 클라우스가 헤어지게 된 사건.
엄마가 아빠를 권총으로 죽이고, 루카스는 다치고, 엄마는 정신병원에, 아빠는 묘지에, 클라우스가 고아원으로 가게 된 사건.
42년 만에 병든 몸으로 고향에 돌아온 클라우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도시는 변했는데, 중앙광장 근처의 서점만은 그대로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굉장한 상징성이다. 존재의 증거로 글을 써야한다고 말하는 저자의 말을 생각하면 서점이 사라진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일 것이기에.
클라우스는 그 사건의 원인 제공자였던 안토니아가 데려가서 돌보고 있었다. 안토니아에게 사라가 태어나고 클라우스는 사라를 끔찍이 사랑하면서 잘 돌봐준다.
엄마를 다시 찾게 되면서, 클라우스는 루카스만을 기다리는 엄마를 돌보며 시를 쓰고 있다.
루카스는 클라우스라는 거짓 이름으로 고향에 돌아와서 클라우스를 찾게 된다.
하지만, 왜 클라우스는 루카스를 부인했을까? 루카스는 그런 클라우스를 알면서도 왜 그냥 돌아갔을까? 그리고 결국 기차에 몸을 던져서 자살하고 만 것일까?
루카스와 클라우스와의 만남 장면은 굉장히 이상하면서도 인상적이고 복잡 미묘한 감정을 담고 있다.
하나처럼 똑같던 둘의 외양의 묘사는 살아온 날들만큼 다른 모습으로 변해갔던 것일까?
만약 비슷한 환경에서 삶을 살았다면, 안토니아의 삼촌네 집 창문가에서 광장에서 다리를 절뚝거리고, 술집에서 하모니카를 불며 돈을 벌고 있다는 루카스를 못 알아 볼 리는 없었을텐데.....
클라우스도 루카스도 둘 다 고독하고 외롭게 살긴 마찬가지였나 보다.
자신들의 존재의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 글을 쓰고 있다.
클라우스는 잠들기 전에 머릿속으로 루카스에게 늘 하던 말이 있었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하다는 것, 그는 운이 좋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의 처지가 되고 싶다는 것을. 나는 그가 더 좋은 처지에 있고, 나는 너무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인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무의미하고, 착오이고, 무한한 고통이며, 비-신(非-神)의 악의가 만들어낸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명품이라고 그에게 말했다.”(~본문 545쪽)
클라우스와 루카스.
전쟁을 겪으며 둘의 상황이 달라졌지만, 결국엔 다시 돌아와 서로를 생각하면서 살아온 시간만큼, 둘의 삶의 마지막 모습도 비슷하게 그리고 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첫째, 국경을 함께 넘은 남자는 아버지가 아니고, 둘째, 이 소년은 열여덟 살이 아니고, 열다섯 살이다. 셋째, 이름은 클라우스(Claus)가 아니다.
그러면 그 세 가지의 거짓말을 종합해 보면, 국경을 넘은 것은 15살의 루카스가 되는데, 2부의 타인의 증거에서 루카스의 입장으로 쓰여 진 이야기는 결국 3부와 연결 지어 본다면 루카스가 바로 클라우스가 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결국 한 인간의 의식 속에 내재하고 있는 다양한 생각을 나누어서 쓴 것일까?
쌍둥이처럼 하나였던 둘이, 전쟁을 겪으며 가정이 파괴되고 살던 곳에서 떠나와 할머니 집에서 살면서 전쟁 중인 국경 지대에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간지대의 심리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3부에서 정신병원에서 돌아 온 엄마가 눈앞에 클라우스가 있는데도 루카스만을 기다리는 것은, 엄마의 정신병력이 나아지지 않았고 눈앞에 있는 아들 루카스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2부 루카스의 삶은, 3부에서 엄마가 기다리던 루카스 이고, 엄마 옆에 있는 클라우스고,
그래서 클라우스가 루카스처럼 생의 마지막을 정리할 것 같은 심리를 루카스의 자살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