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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성왕씨중앙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정산 왕의선
현재 생존하고 있는 개성왕씨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동양군파 파조인 효은태자 왕원(王垣)은 고려 태조의 15번째 아들로 왕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시중공파의 파조인 시중공 왕제(王濟)도 고려 태조로부터 16세손인 충정왕의 맏아들로 역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인물이다. 안경공파의 안경공 왕창(王滄)도 10세손 고려 고종의 둘째아들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양양공파의 왕서(王恕)도 8세 고려 신종의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평양공파 평양공 왕기(王基)는 3세손인 고려 현종의 넷째 아들로 역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익히 알려진 대로 고려 태조는 결혼정책으로 지방 호족들과 연대감을 유지하며 중앙집권적 권력 기반을 다졌다. 부인이 29명이었고, 성원록에 이름이 오른 아들이 모두 20명에 이른다. 이 20명의 아들들로부터 고려 왕조 476년 동안 왕씨 후손이 생산됐다면 그 인구가 얼마나 불어났을 지 짐작할만하다. 무신정권이 들어서는 과정에서의 격변과 원나라의 내정간섭 과정에서 권력의 부침이 있었다 해도 전체 개성왕씨는 모르긴 해도 고려말엽에 이르러 대성받이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 태조 1년(1392) 7월 20일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민개(閔開) 등이 고려 왕조의 왕씨(王氏)를 밖에 두기를 청하니, 조선 태조가 순흥군(順興君) 왕승(王昇)과 그 아들 강(康),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와 그의 아들 조(珇)·관(琯)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강화(江華)와 거제(巨濟)에 나누어 두게 하였다. 8월 20일에는 고려 왕씨들의 노비의 수를 줄였다.
2년 5월 26일에는 왕명에 따라 도평의사사에서 경상도 안렴사와 거제 병마사에게 이문(移文)하여 거제로 보내졌던 왕씨 일족을 모두 육지로 나오게 해서, 완산(完山)·상주(尙州)·영해(寧海)에 나누어 거처하게 하였다.
3년 1월 17일에는 김가행(金可行)과 박중질(朴仲質)이 점쟁이에게 공양왕과 왕씨의 명운을 물은 역모를 하자, 다시 일부 왕씨들을 거제도(巨濟島)로 옮겼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1월 21일 대간(臺諫)과 형조에서 왕씨를 제거하자고 청하였고, 2월 21일 대간(臺諫)과 형조에서 왕강(王康), 왕격(王鬲), 왕승보(王承寶), 왕승귀(王承貴)의 가족들을 모두 해도로 보낼 것을 청하였고, 2월 22일, 2월 23일에도 왕씨 일족의 죄를 청하였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5일에는 대간과 형조에서 박위(朴葳)도 모의에 가담했다고 주장하였다. 26일에 다시 공양(恭讓) 삼부자(三父子)를 법에 처하고, 왕강, 왕격, 왕승보, 왕승귀의 일가를 모두 해도(海島)로 내쫓고, 강화(江華)에 보내졌던 왕씨도 해도로 귀양보내라는 상소가 올려지자 조선 태조는 역시 거절하였다. 이에, 대간과 형조에서 정사(政事)를 보지 않는 시위를 하자, 왕강은 공주(公州)로, 왕격은 안변(安邊)으로, 왕승보는 영흥(永興)으로, 왕승귀는 합포(合浦)로 귀양보내졌다. 2월 27일에 조선 태조는 사헌부에 명령하여 강화에 살고 있는 왕씨 중 늙은이와 약한 자를 보살피라 명령했다. 4월 1일, 10일에 또 다시 왕씨를 죽이라는 상소가 올라왔고, 4월 14일에 다시 상소가 올라오자 마침내 받아들여졌다.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정남진(鄭南晉)과 형조 의랑(刑曹議郞) 함부림(咸傅霖)이 삼척(三陟)으로, 형조 전서(刑曹典書) 윤방경(尹邦慶)과 대장군 오몽을(吳蒙乙)이 강화(江華)으로, 형조 전서(刑曹典書) 손흥종(孫興宗)과 첨절제사(僉節制使) 심효생(沈孝生)이 거제도(巨濟島)로 왕씨를 제거하려 보내졌다. 4월 15일에 윤방경 등이 강화에 있던 왕씨 일족을 강화 나루에 빠뜨려 죽였다. 4월 17일에는 공양왕 일가가 살해되었으며, 4월 20일에 손흥종 등이 거제도에 있던 왕씨 일족을 바다에 빠뜨려 죽였고, 같은 날에 왕씨(王氏)의 남은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이들을 모두 목 베었다.
4월 26일 고려 왕조에서 왕씨로 사성된 일족들은 모두 본성으로 환성하게 했으며, 왕씨를 가진 사람은 고려 왕실의 후예가 아니더라도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하였다.
6년 12월 1일에는 왕씨(王氏)의 서얼인 백안(伯顔)·연금(延金)·금만(金萬)이 성명을 달리 바꾸고 지내었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12월 8일에는 역시 고려 왕씨의 서얼인 약사노(藥師奴)가 교살(絞殺)되었다.
조선 태종 13년 11월 15일에는 왕휴(王庥)의 아들 왕거을오미(王巨乙吾未)가 붙잡혔다. 왕휴가 공주 사람 이밀충의 누이를 첩으로 맞아 아들을 낳았는데, 바로 거을오미이다. 태조 3년에 왕씨가 도륙당하였을 때에는 그 어미가 무지하였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여러 왕씨의 후손들이 중이 되어 산으로 도망갔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국 사찰을 조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13년(1413) 11월 26일에 왕거을오미를 석방하고, 조선 태종이 "금후로는 왕씨의 후손이 혹은 스스로 나타나거나, 혹은 남에게 고발을 당하는 자는 아울러 자원(自願)하여 거처(居處)하는 것을 들어주어서 그 삶을 평안하게 하라."라고 하교하였다. 하지만, 11월 29일, 12월 1일에 왕거을오미를 죽이라는 상소가 올라오기도 하였으나 기각되었다.
16년 11월 1일에는 왕상우(王上尤)가, 왕씨의 후예가 이수라는 자의 여종과 혼인하여 낳은 자식이라고 하여 그 주인 이수에 의해 고발되었다. 5일에 그 아우 왕화상(王和尙)과 함께 풀려났다.
조선 문종 1년 11월 1일과 6일에 왕씨의 후예를 찾아 제사를 받들 게 할 것을 명하였다. 얼마 뒤에, 제우지(齊牛知)라 변성하여 공주에 숨어살던 왕우지(王牛知)가 이웃 사람과 밭 경계를 가지고 다툼이 벌어지더니 이웃 사람이 관가에 왕씨라고 밀고하여 붙잡혀 오게 되었는데, 오히려 조정에서는 숭의전 부사(崇義殿副使)라는 관직을 내려주었다. 뒤에 왕순례(王循禮)라는 이름도 내려졌다.
멸족령을 피해 왕씨들이 王과 비슷한 글자인 田, 全, 玉, 車, 申 등으로 변성하였다는 설이 있다. 왕제구 개성왕씨중앙종친회 사무국장은 "그런 설이 있다. 하지만 다 그렇다는 확신은 없다"고 한다. 그러다 조선 5대조 문종 때 이르러 왕씨 멸족령은 해제됐다.
그런데 이렇게 왕씨 성을 사용하며 살아갈 수 있었음에도 왕씨멸족령이 내려질 당시 변성명하며 목숨을 부지한 대부분의 개성왕씨 후손들이 끝내 왕씨로 환성하지 않았다. 왕제구 사무국장은 1918년에 발행된 무오보에 옥(玉)씨 성을 쓰던 일파가 환성한 것이 유일하다고 했다. 그리고 본래 고려 왕실에서는 태자를 제외한 왕자들을 승려로 출가시키거나, 아니면 모친의 성을 따게 해서 왕권에 피해를 주지 못하게 했다. 그러므로 현재 고려 성원록을 보면, 유(柳)씨, 임(林)씨, 이(李)씨 등등 외가의 성을 따른 왕자들이 많다. 그래서 현재 이 성씨들 중 고려 왕실의 후손이 있다는 얘기도 있다. 대표적으로 고려 희종의 손자 '광평공 혜'의 아들이 모친의 성을 따서 류(柳)씨가 되었다는 말도 그 일례다. 참고로 현재 '문화류(柳)씨 곤산군파(곧, 본래는 약목유柳씨)'가 이 광평공의 후손이라는 말도 있다. 현재 약목유(柳)씨(참고로 약목유씨는 현재 주로 '문화유씨 곤산군파'란 이름으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본래 약목 류씨와 문화 류씨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가 이 광평공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2]
개성 왕씨의 인구수는 2000년 기준 6,148가구 19,808명이며 한국의 270여 성씨 중 82번째이다. 현재 개성왕씨가 가장 많은 지역은 서초구 서초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