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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
<고린도전서 9장>
"1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찌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3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4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7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찌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6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17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찌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사도의 직분 안에서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행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1. 직분을 맡았음(고전9:17)
나는 직분을 맡았다고 말했는데,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찌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 말했다.
이는 내가 임의로(일부러) 행했으면 내가 상(몫)을 취하겠지만 이라는 뜻이고,
내가 임의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분이라는 뜻인데, 번역이 어려워서 알아듣기가 어렵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하려고 해서 한 것 같으면 그 이득을 취할 것인데,
내가 하려고 해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득을 취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임의로 행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내 뜻으로 사도가 된 것이 아니고
내 뜻으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직분이라는 말은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집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옛날에 우리나라에서는 집사라고 했다. 집안의 모든 일을 총괄하는 총무격인 사람을 집사라고 했다.
교회에서 교회직무를 맡은 사람에게 집사라고 이름을 지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오이코노미아(Oikonomia), 오이코는 집이라는 말이고,
노미아는 법률이라는 뜻으로 집을 관리한다는 뜻이다. 집 관리자다.
이것은 주인으로부터 위임을 받아서 집에 관한 모든 것을 총괄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은 자기 임의대로 할 것이 아니고, 주인의 뜻대로 해야 되는 사람이다.
직무라는 것은 다 그렇다. 직장에 가서도 그렇고 어디 가서든지
직무는 내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맡은 것이므로 맡긴 사람의 뜻대로 해야 되는 것이 직무다.
내 뜻대로 하는 것은 직무가 아니다.
내 뜻대로 하는 것은 사업이고, 내가 맡아서 하는 일은 직무다.
우리는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고, 직무를 맡은 것이다.
직무를 맡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주인의 일을 하는 것이니까 주인의 생각과 주인의 뜻을 알아서 주인에게 필요한 대로 하는 것이 직무다.
내 생각과 내 뜻과 내 필요 때문에 하면 주인과는 상관이 없어지게 되어 있다.
그것은 사업이다. 그래서 사업자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차이가 많다.
사업자는 9시에 출근하고 싶으면 9시에 가도 되고 10시에 출근하고 싶으면 10시에 출근해도 된다. 자기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직무를 맡은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9시에 출근했다가 10시에 출근했다가 하면 쫓겨난다. 꼭 시간 맞추어 출근해야 되고 시간 맞추어 퇴근해야 되고 맡은 일을 다 해야 된다. 이것이 직무를 맡은 사람의 일이다.
우리는 직무를 맡은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이 우주 안에서 사업을 하는 분은 한분이다. 우주의 사장님은 한분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 직무를 맡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우주 회사의 직원들이다.
1.1. 인생의 직분
인생의 직분이라고 할 때 직분은 우리 사업이 아니고,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창1:26-27)인데 이것은 우리의 직분이다. 우리의 의무다.
우리가 그것을 그대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다.
사장은 내 일이니까 내가 하다가 하지 않아도 된다. 쉬고 싶으면 쉬고 하지 않고 싶으면 하지 않고 돈도 많이 벌고 싶으면 많이 벌고 적게 벌고 싶으면 적게 벌면 된다. 자유업이다. 그런데 직무를 맡은 사람은 하고 싶으면 하고 안하고 싶으면 하지 않아서는 직무를 맡을 수가 없다.
인생의 직무는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인데,
이것은 내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되는 직무다.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신 말씀은
자기 자신을 사람을 통해 형상화하자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말은 형상화되었다는 말이다.
본체의 형상이시오 영광의 광채시라고 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을 형상화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한 사람이다.
자고로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는 말이 형상화했다는 말이다.
우리 인생의 직무는 한 마디로 하면 '형상화'다.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얼굴도 제대로 인상을 써야지 잘못 쓰면 안되는 것이다. 형상화해야 되기 때문이다.
내 사업 같으면 내 마음대로 하고 찡그리고 싶으면 찡그리고 성내고 싶으면 성내고 이를 갈고 싶으면 갈면 되는데 내 사업이 아니니까 나는 그분을 형상화해야 되기 때문에 내 표정관리를 잘해야 된다. 험상궂은 얼굴을 해버리면 내가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에 그렇게 돼버리고 만다. 자고로 하나님을 본 사람을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이 나타내셨다고 했기 때문에 자고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지금도 없다. 형상화한 사람을 보고 하나님을 알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우리의 표정관리도 중요한 문제다. 물론 표정관리가 곧 행동이 된다. 웃으면서 남을 때릴 수는 없고, 성낸 얼굴을 가지고 남을 사랑할 수는 없다. 내 표정과 행동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이것이 우리 인생의 기본적인 직분이다.
이 직분을 상실한 것이 비극이다. 하나님을 형상화하도록 지어진 인생이
이것을 상실했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한다. 직원이 되어야 하는데 사장이 되었다.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엔 정녕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는 말은 네가 하나님이 된다는 말이다.
이 사장은 자기 마음대로이니까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붉히지 않기도 한다. 사장 마음대로다.
우리는 그렇게 할 사람이 못되고 하나님을 형상화할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속이 상해도 속상한 것을 밖으로 표현하면 안된다. 속상한 것을 표현하는 것을 진실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기 쉽다. 속에는 속은 나쁘면서 겉으로는 웃음을 취하면 그것은 가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교회도 초창기에 그런 일이 많이 있었다. 진실하게 살자고 했더니 있는 대로 성질을 다 내었다. 왜 그러냐고 하면 진실하게 살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 아니고, 우리의 원래의 진실은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원래의 내 진실이 아니다.
원래 우리의 진실은 직분을 맡은 자다. 그러니까 우리는 표정을 잘 관리해야 된다. 교회 안에서도 표정 관리를 잘해야 된다. 세상에 나가면 물론 더 잘해야 된다. 직장에 나가면 처음 보는 것이 그 사람 표정일 것이다. 그 사람 표정이 항상 어두운데 그리스도를 증거한다고 하면 그만두라고 할 것이다. 직장에 가서도 표정 관리를 잘해야 된다. 직장 다니는 분이 많으니까 앞으로 우리가 직장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되는데, 여기가 복음을 전할 자리고 하나님을 형상화해야 자리라고 생각해야 된다. 교회에서 교회생활만 잘하고 직장에서는 아무렇게나 하거나 직장사람들은 이방인이고 지옥에 갈 사람들이라고 마음대로 해버리는 기독교인들이 많다. 그래서 욕을 많이 얻어먹는다. 교회는 오면 충성스럽고 아주 잘하는데 사회에 나가면 자기 멋대로 하니까 욕을 먹는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면 거기가 하나님을 형상화해야 할 자리고,
교회에 오면 교회가 그분을 형상화해야 될 자리다.
그러니까 우리가 얼굴을 내 마음대로 하면 안된다.
물론 우리 교회 형제자매들은 표정이 좋아서
바깥에서 오면 표정이 좋다는 것이 첫 번째 인상이다.
뭘 몰라도 사람들 얼굴이 밝다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이 공통적인 견해다.
이것만 하더라도 우리는 많이 형상화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1.2. 사도의 직분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형상화할 필요가 있다.
거기서 사도의 직분이라는 것이 생겼다.
인생의 직분을 모든 사람이 원천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으면
사도가 필요 없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도 없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대로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갖고
각자가 다 사장이 돼버렸기 때문에 이 세계 속에 사도의 직분이 생겼다.
무엇을 위해서?
인생은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인생은 사장이 아니고, 직장인임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사장이 아니고, 직분을 맡은 자다. 우리는 창조자가 아니고, 피조물이다. 우리가 시작한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시작한 사람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선포하려고 우리가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다. 열두 사도 외에도 의미상으로는 다 사도인데, 왜 그런가? 우리가 이 사실을 선포하기 위해서 전파하기 위해서 나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파송된 사람이기 때문에 사도다. 사도의 직분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1) 복음(예수 그리스도)을 전하는 것(하나님의 형상이신 분을 전하는 것)
이것을 구체화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인가?
하나님을 형상화한 것을 전하는 것이니까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임을 전하는 것인데 이 구체적인 인물이 누구인가? 그
것이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 인생은 이 사람이 바로 우리의 표준이다. 하나님을 형상화한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
이 사람을 보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만 전하면 저절로 하나님을 형상화하도록 말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분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본체의 형상이시고 영광의 광채이시다.
2) 비밀을 맡은 자(4:1)
여기서 비밀을 맡은 자라고 했다. 왜 이 비밀을 맡은 자인가?
모두가 다 원래는 직장인이었는데 사장이 돼버렸다.
사장들만 있는 세계에 가서 우리는 사장이 아니고
직분을 맡은 자라고 말하려면 그 세계에 대해서는 비밀이다.
이 비밀을 맡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지 비밀이 아니면 어려울 필요가 없다.
다 아는 것 같으면 어려움이 없다. 사장에게 가서 너는 사장이 아니고
직분을 맡은 자라고 하면 사장이 알아듣겠는가? 못 알아듣는다.
내가 사장인데 왜 나에게 집사라고 하느냐고 할 것이다. 이 사람을 설득시켜서 내가 사장이 아니고 집사임을 알게 하려면 이 사람은 어떤 비밀을 갖고 있는 자다. 우리는 비밀을 맡은 자다.
그것뿐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도 비밀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복음은 죽음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흙이나 마찬가지다. 숨이 코에 붙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았던 저 사람도 십자가에 달리니까 저렇게 된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 알고 보면 모은 인생 앞에 절망을 전하는 것이다. 다 사장이 된다고 부풀어있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모습을 드러내놓으면 완전히 절망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희망을 전하면 사람들이 받아들일 텐데 절망을 전하니까 외면할 것이다.
결국 기독교는 여기서 종교화되게 된다.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미끼로 주자는 것이다. 십자가를 주니까 다 달아나고 죽음을 주니까 다 도망치니까 달콤한 것을 주다보니까 점점 세속화되었다. 예수 믿으면 사업도 잘되고 하나님이 도와줄 것이라고 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잘 믿으면 죽어서 천당 간다고 약속을 했다. 이렇게 하니까 사람들이 솔깃해진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만 말하면 다 달아날 것인데 솔깃한 것이 보이니까 따라 온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니 미끼를 준다는 것이 통째 다 주게 되어 고기 낚으러 갔다가 고기를 미끼로 주고 온 것과 똑같이 되었다. 조금씩 썰어서 미끼로 써야할 것인데 통째로 준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서 이것이 비밀이다.
어떻게 죽음을 전하는데 축복이 오는 것인가? 이것이 비밀이다.
죽음까지 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것은 2000년 전의 예수라는 사람이 죽었느냐,
죽지 않았느냐는 말이 아니라 한 인생의 죽음 앞에서 누구도 그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것까지는 되는데 그 다음이 비밀이다.
그 다음에 성경은 말하기를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다.
이것이 비밀이다. 죽었는데 어떻게 다시 살아나는가?
여기는 이론적인 세계가 아니고, 경험적인 세계다. 경험 없이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세계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기사를 써놓은 것을 보면 그 기사가 역사적인 기사가 아니다.
세 사람이 길을 갔는데 그 중 한사람이 예수였는데도 몰랐다는 이야기는 역사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방문을 잠그고 있는데 나타났다거나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는 이야기는 역사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니까 알쏭달쏭하고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믿느냐 안믿느냐고 싸우고 있다.
어떻게 믿겠느냐, 이것은 신화라고 해서 자유와 보수로 갈라져 싸우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아리송해서 모르는 것이다. 죽음까지는 다 알 수 있다.
내가 체험할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으니까 알 수 있지만 그 다음 세계는 다른 세계다. 비밀이다.
왜 비밀인가?
내가 죽음을 살아보아야 부활이 나오지 죽음을 살지 않고 부활이 나오지 않는다.
부활의 삶은 역사적 세계 안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다.
어떻게 내가 죽음을 살아내었는데 부활이 오는가? 죽음을 살아내었는데 어떻게 승리가 오는가?
이것은 우리가 해보아야 안다.
내일 당장 직장에 가서 실험을 해보라. 죽은 자로 직장생활을 해보라.
일부러 죽은 체하지 말고 죽은 체하면 사람들이 다 안다.
십자가를 보니까 나는 죽은 자고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출근을 해보길 바란다.
저녁에 돌아올 때 내가 다른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보니 이상하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상하네, 지난주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번 주에 보니 이상하다는 말이다. 이것은 비밀의 세계다.
제 8요일의 세계고 제 8일의 세계다. 일주일을 주기로 맞추어져 있는데 창조의 1주가 첫째 날부터 일곱 째 날까지는 창조의 세계다. 일차적 세계다. 7일이 지나면 일월화수목금토가 돌아오고 주를 단위로 돌아온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은 무엇이라고 했는가? 주의 첫째 날이라고 했다. 이 첫날은 제 8일에 속한 날이다. 제 8일이 사실은 역사 안에는 없는 날이다. 그러나 역사 안에는 없는데 실재하는 날이다. 그 이후부터는 7일을 주기로 돌아가면서 제 8일이라는 것이 산다는 것이다. 부활은 교리나 이론적으로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죽음을 산 사람만 알 수 있는 문제다. 그래야만 우리가 이렇게 다시 사람이 사는구나. 내가 한번 죽었는데 다시 사는구나. 아침에 출근할 때 죽었는데 저녁에 올 때는 다시 사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비밀이다.
이 비밀을 맡은 자로서의 충성이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 4장에서 청지기 직분에 대해 말씀 드렸는데 그것을 다시 여기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 이것은 진실함이라는 뜻이다. 충성은 진실함이라는 말과 같다. 죽고 다시 산 것은 거짓말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억지로 꾸며댈 수 없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
판단을 주께 맡긴다. “판단하실 이는 주시라”(4:4)는 말이 4장에 나온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세상 앞에 나가서 무엇을 하면 분명히 내가 진실을 전해도 거기에 대해 많은 오해도 생기게 되고 반대도 생기게 되고 핍박도 생기게 된다. 왜냐하면 모르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기분 나쁘다고 욕하고 갈 것이고 내가 적어도 사장인데 종업원이라니 나를 무시해도 분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좋게 보겠는가.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복음 전하는 사람은 판단을 해서는 안된다. 판단하시는 이는 주이시다. 우리는 오직 복음을 전할 뿐이고 결과까지 우리가 다 거둘 수 없다. 항상 무슨 일을 할 때 내가 시작하고 내가 거두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긴다. 모든 일이 내 계획이 사람에게 있을지라도 그것을 이루시는 이는 여호와시다. 내가 시작을 할지라도 그것을 거두시는 이는 여호와시다. 이것을 알면 우리가 일을 시작하든지 시작하지 않든지 간에 편안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끝까지 자기가 다 알려고 하면 문제가 생긴다.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는 곳이다. 내가 씨도 뿌리고 거두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뿌리는 자 다르고, 거두는 자가 다르다. 그러므로 뿌리는 자는 거두는 자가 있어야 되고, 거두는 자는 뿌리는 자가 있어야 된다. 이 둘이 서로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다. 그렇다면 내가 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완성한다고 해서 기분 나쁘게 생각하거나 나는 시작만 하고 저 사람이 거두네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두는 것이나 뿌리는 것이나 다 직분이다. 사업 같으면 뿌리지 않고 남이 뿌려놓은 것을 거두기만 하는 것은 수지맞는 일이다. 지금 가을밭에 가서 거두어가라고 하면 거두어갈 것이 너무 많다. 농사지어놓고 거두어가라고 하면 공짜다. 내 사업이라면 누구든지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직분이다. 주인이 어떤 사람에게는 봄에 씨를 뿌리라고 하여 배고픈 상태에서 씨를 뿌렸다. 요즘은 잘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보릿고개라는 것이 있었다. 지금 당장 끼니를 굶게 되었는데 이것을 먹어버리면 씨를 뿌리지 못한다. 벼 한 되가 있어 이것을 까면 한끼를 먹는데 이것을 먹어버리면 농사를 짓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굶고 씨를 뿌려야 한다. 눈물로 씨를 뿌린다는 것이 그런 뜻이다. 자기는 배가 고픈데 씨를 뿌리라고 명령을 하니까 할 수 없이 뿌려야 한다. 가을에 추수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추수를 하라고 하니까 정말 수지맞은 사람이다. 그러나 이 둘 다 자기 사업이 아니라 직분이다. 누가 더 상을 받을지는 모른다. 내가 눈물로 씨를 뿌렸지만 하나님께서 판단하고 계시고, 내가 공짜로 거두었지만 그것도 하나님이 판단하고 계신 것이니까 공짜로 얻었다고 해서 좋아할 일만 아니고 눈물로 뿌린다고 해서 슬퍼할 일만도 아니다. 판단하시는 이는 오직 주님이시다. 이것을 직장의 일이다. 직장에 가면 노력은 다른 사람이 하고 자기가 공을 받으려고 하니까 어렵다. 내가 일했으니까 공을 받으려고 하니까 어렵다. 회사가 잘되게 하는 것이 직분이다. 내가 공을 받는 것이 직분이 아니라 그 회사가 어찌하든지 잘되도록 하는 것이 직분이다. 축구를 하는데 여러 사람이 공을 몰아서 한 골을 넣는다. 누구든지 마지막 골만 넣고 싶다. 박수는 항상 그때 나오기 때문이다. 항상 골대 옆에 있다가 마지막에 통쾌하게 들어가는 것, 한방에 들어가는 것만 하고 싶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죽을힘을 다해서 뺏고 몰고 다쳐가면서 공을 뺏어서 골대 앞까지 갖다 준다. 그런데 공은 누가 받는가? 그 한방 찬 사람이 받는다. 그러면 참 억울할 것 같은데 억울하다고 생각하면 축구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전체의 승리를 보고 해야 되는 것이다. 우리가 경주하는 것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청지기니까 하나님 나라가 잘되느냐 못되느냐에 있는 것이지 내가 공을 얼마를 받느냐 안받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판단을 주께 맡긴다.
4장 6절 7절에는 본을 보인다고 했다. 이 말은 받았음에 대해서 본을 보이라는 것이다. 다른 것에 대해서도 물론 본이 되겠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 아무리 고귀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니고 받은 것임에 대하여 본을 보이라는 것이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처럼 자랑하느냐”는 말이다. 우리가 받은 복음은 내 잘함으로 받은 것이 아니고, 내 힘으로 받은 것이 아니다. 내가 죽은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것이지 내가 죽은 것이 아니다. 그분이 죽으신 것을 내가 전하면서 마치 내가 죽은 것처럼 전하면 안된다. 나는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면 안되고, 그분이 죽은 것이다. 모든 것을 내가 받은 사람으로서 본을 보이라는 것이다. 특별히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실패하는 것이 누구에게 이야기하면서 자기 자랑을 해버리면 실패한다. 오직 주만 자랑해야 되는데 자기 자랑을 해버리면 우선은 되는 것 같은데 다음에 가면 실패가 된다. 무슨 본을 보여야 될 것인가? 우리는 받은 사람이라는 본을 보여야 된다. 청지기라는 본을 보여야 된다. 사장 노릇을 하면 안된다. 사장인 체하면 그 사람도 사장이 되려고 할 것이다. 거기서 받은 사람이 또 사장이 되면 회사가 되겠는가? 그것은 우주적 회사, 하나님 회사가 되지 않고 세상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내가 사장 행세를 하면 다 사장이 되려고 한다. 여기서 청지기로서의 본을 보여야 한다. 내가 받은 사람으로서 본을 보여야 한다.
3) 그리스도의 연고로 삶(4:9-13)
그리스도의 연고로 산다. 왜 사는가? 왜 그렇게 사는가?
나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이렇게 산다.
가난하게 살아도 내가 그리스도의 연고로 가난하게 산다.
부하게 살아도 나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부하게 산다.
어리석어도 내가 그리스도의 연고 때문에 어리석어진 것이다.
비천해도 내가 그리스도의 연고로 비천해진 것이다.
욕을 먹어도 내가 그리스도의 연고로 욕먹는 것이다.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어 자기는 참 지혜로운 사람이지만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을 지혜롭게 하려고 하니까 자기가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다.
내가 지혜로우면 남이 어리석게 된다. 내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면 상대방은 상대적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
상대방을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하려면 내가 상대적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그 사람이 지혜로워진다. 내가 귀한 사람이 돼버리면 남이 비천한 사람이 돼버린다. 그 사람이 귀한 사람이 되게 하려면 내가 비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그렇게 살았다. 만물의 찌꺼기처럼 살았다. 후욕을 당하면 오히려 축복하고 살았다. 왜 그랬는가? 모두 그리스도의 연고로 그랬다. 자기 이유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연고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려고 하다보니까 자기가 어리석어지더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나타내려고 하다보니까 자기가 비천해지더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을 존귀하게 하려다 보니까 자기가 비천해지더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저 사람은 참 어리석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형편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기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그렇게 했다. 비방을 받았을 때도 오히려 권면했다. 이것이 사도의 생활이다.
4) 본이 됨(4:14-21)
4장 14절에서 21절에 보면 스승으로서가 아니라 아비로서 본을 보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했다. 가르치는 사람은 많다.
사람들이 학교에 갈 때는 배우러 간다. 배울 자세를 갖고 가는데 그냥 인간 세계 속에서는 남에게 배우지 않으려고 생각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가르치려고 하는 기운이 보이면 반발한다. 네가 나를 가르치려고 하느냐고 한다. 알고 보면 다 학교다.
우리 사는 세상이 알고 보면 다 학교다. 문교부 인가는 받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허가한 학교다. 학교에 가서는 지식은 배우면서도 사람됨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으려고 한다. 왜 네가 나를 가르치려고 하느냐가 돼버린다. 아이들도 어렸을 때는 말을 잘 듣다가 조금 크면 부모에게도 당신이 뭔데 나를 가르치려고 하느냐고 한다. 요즘 아이들은 조금만 커버려도 가르치지 못한다. 어려서부터 잘 잡아야 된다. 미국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지독하게 한다. 아주 규율을 엄하게 하여 조금도 잘못하면 안된다. 잘못하면 벌을 주고 방에 가두어놓는다. 그런데 큰 다음에는 내버려둔다. 왜냐하면 큰 다음에는 말을 듣지 않는다. 18세 이전에는 부모가 아주 엄격하게 다루는데 18세가 넘으면 자유롭게 한다. 그래서 다 집을 나간다. 어려서 그렇게 해놓았기 때문에 규율, 법률에 대한 것이 몸에 베여있다. 미국사회가 혼란스러운 것 같아도 유지가 되고 있다. 경찰관이 손들라고 하면 다 손든다.
우리나라는 파출소에 가보면 술 먹고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파출소 옆집은 시끄러워서 못산다. 11시 넘으면 밤새도록 떠든다. 우리사회에서는 이상한 관용이 있는데 술먹은 사람에게 관용을 베푼다. 술먹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술먹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술먹은 것이 본심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사람들은 술먹어서 봐주어야 된다고 한다. 한국사람들은 그렇기 때문에 술먹고 떼를 쓰고 평소에 못하던 것을 해버린다. 다음에 술먹어서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하면 다 묵인해 준다. 술먹고 무슨 짓을 하는 사람을 절대 묵인하면 안된다. 그것이 본심이다. 사람을 알아보려면 술을 먹여보라고 한다. 본심을 알려면 술을 먹여 보면 안다. 미국사회가 저렇게 혼란스러운 것 같으면서 유지되는 이유는 어려서부터 탄탄하게 법을 지키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어놓았다. 그래서 자유가 있으면서도 유지가 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엉망이다. 어렸을 때는 풀어놓았다가 큰 다음에 하려고 하니까 말을 듣지 않는다. 지금 아이들은 크면 말리지 못한다. 지금 교육을 거꾸로 하고 있다. 옛날에는 사회가 안정된 사회였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되었지만 지금은 사회가 완전히 서구화되었다. 미국과 똑같은데 방식이 틀리다보니까 통제 불가능한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 이 사람들이 전부 경찰들에게 대들 사람들이다. 옛날에 내가 서울에 갔을 때 맨 처음 서울 아이들과 시골 아이들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시골 아이들은 멀리서 어른들이 뭐라고 해도 예하고 도망치지만 서울 아이들은 절대 꼼짝도 하지 않는다. 멀리서 아무리 큰 소리로 말해보았자 꼼짝도 하지 않고 직접 가서 말을 해야 듣는다. 지금 전국이 다 그렇게 되었다. 서울이 그렇게 했다는 말은 서울 사람이 선구적이다. 무엇이든지 앞서 있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
가르친다는 것! 이것을 정말 사람들이 싫어한다.
배우면 이익인데 좋은 사람들이 해주는 말을 들으면 이익이 될 텐데 죽으라고 듣지 않는다.
내가 복음으로서 너희를 낳았다고 한다. 우리는 가르치려고 가는 것이 아니고 낳으려고 가는 것이다.
낳으려면 내가 임신을 해야 된다.
그래야 낳아지지 임신을 하지 않고서는 낳을 수가 없다.
열 달동안 배 속에 넣고 있다가 낳는 것이니까 그 사람을 임신했다가 낳아야 된다.
이것이 사도의 일이다. 우리는 교리를 가르치려고 가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가르치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품었다가 내놓는 사람이다.
5) 교회에 의해 인 쳐짐
그리고 사도는 교회에 의해 인 쳐진 사람이다.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9:2)는 말이 나왔는데,
오늘날 중요한 문제 같다.
요즘 목사가 되거나 장로가 되는 것을 총회에서 안수를 주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것이 제도적 문제로 상당히 문제가 많이 생긴다. 교회에 의해서 인 쳐져야 된다.
목사는 교회 목사이지 세상 목사가 아니다. 여러분이 나에게 목사라고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목사라고 할 이유가 없다. 내가 자기들의 목사가 아니다. 목사는 교회에서 인 쳐져야 된다.
사도는 교회에서 인 쳐져야 된다.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사도인 것을 너희가 인치지 않았는가.
너희가 인정하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교회가 인정하지 않으면 사도가 될 수 없다.
아무리 내가 하늘에서 무엇을 받았거나 주왕산에 가서 무엇을 받았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교회가 인 쳐야 된다. 요즘 자기가 어디서 사명을 받아왔다는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킨다. 주왕산에서 받아왔는지 팔봉산에서 받아왔는지 받아왔다고 한다. 이러면서 자기 혼자 사도라고 하니까 딱하다. 강대상 하나 만들어놓고 소리 치고 있으면서 사도 직분을 받아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딱한 일이 없다.
교회에 의해 인 쳐지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모든 것이 교회에서 인정되어야 된다. 네가 주 예수를 보지 못했느냐, 주 안에서 행한 일이 네가 아니냐고 바울은 말했는데 이것은 모두 교회가 모두 나를 봤다는 뜻이다.
2. 복음에 참예함
복음에 참예한다.
2.1. 복음
복음은 무엇인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됐다는 말이다. 죄인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는 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 복음이다. 사람들이 복음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셔서 죄를 용서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서양에서 죄의식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죄를 용서받아야만 천당에 간다, 구원을 받는다는 개념이 들어있다. 그래서 한동안 죄용서함 복음, 죄사함의 복음 플랭카드를 많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진짜 복음은 그것이 아니고 사람이 하나님의 화신이 되었다. 하나님이 성육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최고의 뉴스다. 전 세계적으로 이것은 매일 같이 방송해야 하는 문제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인데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 세상에 나타났다는 뉴스보다 더 큰 뉴스가 없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좋은 뉴스다.
1)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온 인류의 성육신의 근거, 근원)
온 인류의 성육신의 근거가 된다. 어떤 그런 사람이 왔다는 것은 Top 뉴스는 되겠지만 복음은 아니다. Top 뉴스이지 Good 뉴스는 아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Top 뉴스이기도 하지만 Good 뉴스다. 왜? 온 인류의 성육신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한 사람이 기인으로 세상에 태어났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Top 뉴스다. 그분이 오신 것은 우리를 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이 Good 뉴스다.
신구약을 통틀어서 하나님의 복음 가운데 가장 큰 복음이 이 복음이다. 왜냐하면 율법을 준 것이나 모든 것이 하나님과 하나되자,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라, 하나님과 같이 살자는 이야기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안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니까 안되는 것이다. 무슨 방법을 써도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최후의 방법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것이다. 딸을 시집을 보내려고 하는데 시원찮아서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대신 시집가는 것과 똑같다. 빨래는 어떻게 해라, 설거지는 어떻게 해라, 김치는 어떻게 담그라고 아무리 가르쳐도 안되니까 자기가 대신 가서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친정어머니가 대신 시집살이를 해야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유일한 대책을 하나 세웠는데 그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게 하신 것이다.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리라, 이날 후로는 어린아이로부터 어른까지 하나님을 알려 하지 아니할 것은 저들이 다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율법이라는 매개를 통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화는 완전하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 소원이 성취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다. 이 소원을 자기 스스로 성취하실 뿐만 아니라 이 소원을 모든 인류에게 보편화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왔다. 다른 사람들은 비슷한 것이 많지만 방법이 틀리다. 왜냐하면 자기가 도를 통하거나 하나님과 같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람이 많은데 문제는 보편화가 안되는 것이다. 석가모니의 보편화는 불가능하다. 공자의 보편화도 불가능하다. 다 훌륭한 분들인데 보편화가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Top 뉴스는 될지 모르지만 Good 뉴스는 안되는 것이다. 만일 그분들처럼 되려면 우리는 그분들과 똑같은 과정을 또 가야 된다.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고 만다. 왜 저주가 되는가? 그분과 똑같은 사람이 되면 축복이 될 수 있다. 올라가다 보면 그분과 똑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분과 같은 자질을 타고 나지 못했기 때문에 탈락될 것이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니까 저주가 된다. 천재적인 사람은 있다. 그 사람이 태어난 것은 Top 뉴스다. 어떤 사람은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자기도 그렇게 해서 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탈락하고 만다.
예수는 무엇에서 차이가 있는가? 이 복음을 보편화했다. 성육신을 보편화했다. 성육신이 다른 것이 아니다. 죽고 다시 사는 것이 성육신이다. 이 죽고 다시 사는 것을 보편화했다. 부처님에게도 가도 마찬가지다. 네가 죽으라는 말이다. 3000배하라는 말이 다른 말이 아니고 부처를 존경하라는 말이 아니고 3000배하는 동안에 너는 죽으라는 말이다.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라는 뜻이다. 그래서 3000배를 한다. 제주에도 어떤 자매 조카가 왔는데 해인사에 가서 3000배를 하고 왔다고 한다. 그래도 안되서 왔는데 3000배하면서 많이 깨달았다고 한다. 정 안되는 사람은 3000배라도 해서 뭔가를 깨달을 필요가 있다. 참 훌륭한 분들이 많지만 다른 사람이 그렇게 될 수는 없다.
예수는 죽고 다시 사는 이것을 보편화했다. 그 안에 누구나 다 예수님 죽음 안에 다 죽게 되어있고, 그분의 부활안에 모든 사람이 부활하도록 되어있다. 예수님 이후에 부활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교회는 부활한 것이다.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다. 복음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다.
2)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온 인류와 그리스도의 상호거처)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다. 이 말은 아까 말한 대로 보편화되었다는 말이다. 몸의 보편화, 그리스도의 보편화, 성육신의 보편화! 이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사람이 거하고 하나님과 사람의 상호거처가 회복된 것이다.
창세기 2장에서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사람의 상호거처였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성막은 하나님과 사람의 상호거처다. 전체적이지 못하고 부분적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역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거처다. 그렇지만 역시 부분적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화를 통해서 모든 인류가 다 한 자리에 오고,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는 하나님과 인류의 상호거처다. 이것이 교회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바로 복음이다.
2.2. 참여 - 그의 몸의 요소, 부분으로서 건축의 부분이 됨(성육신의 원칙으로)
이 복음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다. 어떻게 참여하는가? 우리는 그 몸의 한 부분으로 요소로 참여하는 것이다. 건축의 부분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부분으로 참여한다. 성육신의 원칙 안에서 죽고 다시 산 사람으로서 한(큰) 몸의 부분이 되어서 그 안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다. 영관이가 참여에 대해 강하게 인상을 받고 왔다. 참여라고 자꾸 쓴다. 김밥을 다 흩어놓고는 분열이라고 하고, 다 모아놓고는 연합이라고 한다.
사도의 직분, 청지기의 직분은 결국은 복음 안으로 참예하는 것이다. 성육신과 교회 안으로 참예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로서의 직무는 복된 직무가 되는 것이다. 지식이라는 것은 나는 가르쳤어도 나는 아니다. 내가 참예가 안된다. 그런데 복음은 내가 전했는데 내가 나타내었는데 내가 그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니까 참예니까 복음이다.
3. 복음에 장애가 없도록 함
그래서 어찌하든지 나는 복음에 장애가 없도록 했다고 한다.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고 있다. 내가 아내된 자매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는가? 누가 자기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는가? 자비량하고는 누가 자기 밥 먹고 군대를 가겠느냐는 말이다. 누가 일하고 실과를 따먹지 않겠는가? 농사를 짓고 누가 수확을 하지 않으려고 하겠는가? 이런 여러 가지 말을 했는데 이 말은 내가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는 말이다.
우리가 대가를 바랄 일이 아니다. 사업 같으면 대가를 바라지만 이것은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내가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직무수행이다. 어느 회사에 취직하여 직무수행을 해놓고 대가를 받으면 안된다. 그러면 배임행위가 되고 뇌물수수 혐의가 된다. 자기는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니까 어떤 일을 했다고 하더러도 회사 일로 한 것이다. 회사 일로 한 것으로 대가를 받았으면 배임행위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대가를 바랄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에 장애가 없도록 해야 된다.
권을 사용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먹고 마시는 권이니 여러 가지 권이 있는데 이런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에 장애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모든 일에 있어서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생각할 때 복음에 장애가 없도록 해야 되겠다. 더 나아가서 교회에 장애가 없도록 해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하다. 하나님에게 그런 일로 물어볼 필요도 없다. 기도할 필요도 없다. 답이 딱 나와 있다. 그런 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답을 내놓았는데 와서는 답을 달라고 하면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에 장애가 있는지 없는지, 교회에 장애가 있는지 없는지를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간단하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고 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라는 뜻이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기 때문에 한 것이지 무슨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이 아니고 내 권리를 사용하기 위해서 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전하지 아니하면 도리어 내가 화를 당할까 한다. 인간 본연의 직무를 생각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내가 화가 되는 것이다. 내게 화가 돌아오는 일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된다. 하나님을 형상화해야 하는 사람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탄을 형상화하게 된다.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않으면 사탄을 형상화하게 되거나 아니면 짐승을 형상화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화가 된다. 우리가 또 구체적으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 주변 사람이 전부 나에게 적이 된다. 평소에는 괜찮은데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적이 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이웃이 친구가 된다. 우리 영역이 넓어지게 된다. 평소에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고 어떤 일이 생겨 가보았더니 다 내 편이 아니고 다른 편인 것이다. 그러면 나는 화를 당하게 된다.
임의대로 행한 일이라면 보상을 취하겠지만 임의대로 행한 것이 아니라며 직분을 받은 것이다. 복음에 장애가 되는 일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복음에 장애가 되는 일은 하지 않아야 된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지금 살고 있는데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방해가 되면 되겠는가! 또 다른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내가 거기에 가서 방해를 하면 안된다. 다른 사람들은 교회를 영화롭게 하려고 하고 있는데 내가 거기에 찬물을 끼얹으면 안된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 물어볼 일 자체가 아니다. 우리가 그 정도는 다 알고 있다. 이것을 모를 때 우리가 물어보았다. 물어보았자 대답이 시원하게 나오는가? 나오지 않는다. 다 자기 생각을 대답으로 생각하고 사는 것이지 사실 하나님이 확실하게 대답해주지 않는다. 하나님처럼 대답 잘 안하는 분이 없다. 그러니까 대답을 들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다. 뜻을 알면 물어볼 필요가 없어진다.
4. 썩지 아니할 상을 얻고자 함
썩지 아니할 상을 얻고자 한다.
4.1.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됨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내가 썩지 아니할 상을 얻고자 한다. 세상에서는 썩을 상을 향해 달려간다. 썩을 면류관을 향해서 달려가는데 썩을 왕관을 향해 달려가는데 나는 썩지 아니할 것을 향해 달려간다. 이것은 왕국에 대한 보상이라고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자신의 자유를 보류했다. 왜냐하면 내가 상을 얻으려면 내 자유를 보유해야 한다. 공부에서 1등을 하려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아야 1등을 하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하고 1등을 할 수는 없다. 아이들에게 말하면 이것 조금만 하고 게임 좀 하고 공부하겠다고 한다. 그러면 1등을 못한다. 게임 좀 하고 공부하겠다고 하는 아이는 1등을 못하고, 게임을 하지 않고 공부하는 아이가 1등 할 수 있다. 어린아이 중 게임하지 않으려는 아이가 없겠지만 그것을 접어놓고 공부를 해야 1등을 한다. 자신의 자유를 보류를 해야 내가 면류관을 얻을 수 있다.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내가 그들과 같이 되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아래 있는 자들 같이, 율법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들 같이,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가 된 것은 어찌하든지 내가 여러 사람을 얻고자 함이다. 어찌하든지 내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그 사람들을 원 위치로 돌려서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자기는 이렇게 되어도 좋고 저렇게 되어도 좋다는 말이다.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다. 이것은 자기가 비워져야 되는 것이다. 절에서도 궁극적으로는 자기를 비우는 것을 원한다. 완전히 해탈하게 되면 내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절에 가면 달마대사 상이 있는데 험하게 생겼다. 왜 그렇게 험하게 생겼는가? 달마대사가 9년 동안 면벽을 했다. 9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벽만 보고 수도를 하고 나오는 길에 호수에서 사람이 목욕(수영)을 하고 있는데 그 뒤에서 악어가 쫓아가는데 그 사람은 그것을 모르고 목욕을 하고 있어 그 사람을 구제하려고 자기 몸을 잠시 벗어놓고 구제를 하고 왔더니 어떤 놈이 와서 그 험상궂은 얼굴을 놓고 가버렸다는 것이다. 해탈의 경지가 이런 것이라는 뜻이다. 몸은 마음대로 바꾸어진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몸과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신비한 이야기다. 그 말 속에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결국 내가 이런 모양이 되든지 저런 모양이 되는지 나는 중생을 구제하려고 한다는 뜻과 마찬가지다. 자기가 없어야 자기 몸을 놔두고 가지 자기가 있는데 어떻게 자기 몸을 놔두고 가겠는가? 자기가 없으니까 남이 바꾸어가도 그대로 입고 온 것이다. 자기가 있으면 자기 몸 찾으러 다니느라고 구천을 헤매고 다닐 것이다.
그 말은 이런 사람에게는 이런 모양이 되고, 저런 사람에게는 저런 모양이 됐다는 바울의 말과 비슷하다.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많은 사람을 내가 얻고자 한 것이다. 이것도 정도가 지나치면 안된다. 자기가 오히려 그 사람이 돼버리면 안된다. 율법 없는 자를 얻고자 해서 율법 없는 자가 돼버리면 안된다. 잠시 옷만 빌려주어야 한다. 자신의 외모는 달마처럼 되어도 상관없다는 말이다.
4.2. 자신을 복음을 위해 절제함
자신을 복음을 위해서 절제했다. 왜냐하면 향방 없이 달음질하지 않고 향방 없이 서두르지 않았다는 말이다. 목표를 행해서 싸웠다. 그러기 위해서 몸을 쳐 복종케 했다는 말을 했다. 향방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다. 우리의 유일한 향방은 그리스도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하다 보면 엉뚱한 것을 보고 달려가는 수가 있다.
우리의 향방은 그리스도다. 무엇을 하든지 항상 초점은 그리스도에게 있어야 된다. 달려갈 때는 항상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야 된다. 어떤 사람은 말을 하다 보면 시작은 동대구에 가려고 시작했는데 한참 말을 하다보면 곁가지로 나가 서대구로 가버리게 된다. 향방을 잃어버린 것이다.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동대구역을 바라보고 말해야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을 사는 것도 어떻게 하든지 간에 목표는 항상 그 목표를 두고 가야 된다. 거기를 이탈해버리면 달려도 헛일이다. 열심히 달려봤자 헛일이다. 세상에는 달음박질 하는 사람이 많다. 열심히 하는 사람도 많다. 노력하는 사람도 많다. 지혜로운 사람도 많다. 그러나 향방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왜 향방이 없는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기점이 없다. 기점이 없으니까 향방이 없다. 어디서부터 잴 것인가? 기점이 있어야 재는데 기점이 없는데 어디서부터 잴 것인가? 우리 교회를 측량하러 오려면 측량사들은 다 조사하여 기점을 찾아낸다. 기점을 잡아야 측량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알면서 우리 인생의 기점은 무시하고 측량만 하려고 한다. 측량 기술은 대단히 발달했는데 하지만 기점이 없다. 그러니까 인생이 측량되지 못한다. 훌륭한 분들이 많은데 노력하는 사람은 많은데 향방이 없이 달음질을 하니까 가서 보면 허망하고 내가 왜 여기를 왔던가가 되는 것이다. 자기는 거기를 오려고 한 것이 아니고 좋은 곳에 가려고 갔는데 막상 마지막에 가보니까 내가 왜 여기를 왔는가가 돼버린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늙어지고 자기 갈 곳은 뻔해지는데 막상 와보니까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를 모르겠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달려가는지를 모르겠는 것이다. 우리 어렸을 때는 설이 돌아온다고 잠자기 전에 손가락 하나 꼽아놓고 자고 하루 저녁 지나면 또 하나 꼽아놓고 잔 것이 엊그제 같다. 설이 빨리 돌아와야 새 옷을 입을 것이니까 손가락을 꼽아놓고 잤다.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는 빨리 스무 살이 되어 머리도 기르고 포마드도 바르고 올백도 하고 싶은데 왜 그렇게 스무 살이 빨리 안오는지 했던 것이 이렇게 벌써 시간이 지나가서 지금은 잡으려고 하면 벌써 가버렸네가 되었다. 아침 해가 떠오를 때는 천천히 떠오르고 중천에 떠 있을 때는 가는지 안가는지 모른다. 그런데 석양의 낙조가 될 때는 급하게 떨어져버린다. 사람의 인생도 그렇다. 그때 가서 내가 어디로 갔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열심히 살기는 살았는데 무엇을 했는지 모르는 것이다. 모아놓은 것도 많지만 어디에 써야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향방을 모르고 달렸기 때문이다.
바울은 향방을 보고 달렸다. 그리스도,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을 향해서 달렸다. 내 인생의 방향이 어디인가?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을 방향으로 해서 달렸다. 목표는 어디인가? 내가 사탄을 정복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그래서 싸움을 했다. 그러기 위해서 몸을 쳐 복종케 했다는 말을 했다. 왜냐하면 이기려니까 이 목표를 위해서 내가 절제하고 이 목표를 위해서 내가 싸우고 이 목표 때문에 나는 달려갔다.
썩지 아니할 면류관! 이것이 복음의 상이다. 의의 면류관이라고도 했고 썩지 아니할 면류관이라고도 했다. 이것을 얻기 위하여 내가 모든 것을 행했다. 이 귀한 것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고, 모든 것을 접어놓을 수도 있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다음에 할 수도 있다.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하고 싶은 것을 잠시 보류했다가 시험 끝나고 나면 하라는 것이다. 대학교 들어갈 때까지만 보류했다가 발표 나고 나면 하라고 부모들은 말하고 싶지만 그것이 안되는 것이다. 우선을 하고 공부를 해야 되니까 아이들이 공부가 안되는 것이다.
우리가 보류할 것은 보류해야 되고 버릴 것은 버려야 된다. 달음박질 하기 위해 장애되는 모든 것을 벗어야 된다. 마라톤 하는 사람이 오늘 나처럼 돕바까지 걸치겠는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벗고 체면 불구하고 달리는 것이다. 42킬로이면 100리를 달려야 하는데 나는 다 미친 사람이라고 한다. 미쳤다는 것이 나쁜 말이 아니고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달리는 것이다. 권투 시합하는 사람이 15회까지 가려면 그로기가 되어서 자기가 때렸는지 맞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달리는 것 같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면류관을 얻는다.
우리가 썩지 아니할 상을 위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보류해야 된다. 버리지 좋지만 버리지 못한다면 보류해야 된다. 다음에 천당에 가서 찾아먹기로 하고 보류하자. 늙어서 내가 젊었을 때 한번 해봤어야 하는데 못해봐서 억울하다고 생각할까봐 사람들은 뭐든지 다 해보려고 한다. 늙어지면 후회할 시간도 없고 억울하다고 생각할 시간도 없다. 그러니까 아예 목표만 향해서 향방만 보고 달려야 된다. 그래도 부족한데 이것저것 다 보고 달려가려고 하면 안된다. 향방 없이 달음질하지 아니하고 내가 향방 있게 달음질했으니까 이제 후로는 의의 면류관이 나를 위해 예비되어 있을 것이다.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위해서 자기는 모든 것을 행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행할 때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목표로 하고 우리가 모든 것을 해야 할 것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향방 없이 분주하던 저희들을 당신의 영원한 목표 안으로 인도하시고 당신의 회복 안으로 우리를 부르셔서 이제는 우리가 향방 있는 사람들이 되고 싸워야 할 대상이 있는 사람들이 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다 사장이 되어 창업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인데 우리를 당신의 영광스러운 직무를 주심으로써 우리가 이 직무로 만족하고 우리가 이 직무 안에서 충성을 다하도록 축복하시고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이 신성한 임무를 온전하게 수행하도록 주께서 우리를 축복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모든 일을 할 때 이 영광의 상을 위해서 모든 일을 할 때 이 신성한 목표를 향해서 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