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추억
최 화 웅
나는 비로소 섬이고 싶다. 섬은 망망대해(茫茫大海)에 하나의 점으로 홀로 떠 있다. 섬은 삶의 거리만큼 당기고 밀면서 나타났다 사라진다. 어느 날 폭풍우가 몰아쳐 섬으로 가는 길이 모두 끊겼다. 하늘이 내린 형벌, 그게 바로 단절이다. 단절은 아득하고 막막한 곳에 가두어 고립된 나를 타인으로 만들어놓는다. 때로는 외부세계와 단절된 고립이 새로운 시대와 체제를 꿈꾼다. 빛을 향해 몸부림친다. 이럴 때 시인은 “그 섬에 가고 싶다”고 절규하지 않을까? 가까워졌다 멀어지고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는 삶에서 폭풍우가 인다. 권태는 너와 나의 일탈을 유혹한다. 섬이 주는 충동은 사람마다 다르다. 사람은 저마다 나름의 생각을 품기 때문이다. 너에 대한 나의 사랑과 연민, 그리고 후회와 울분까지도 함께 쓸어간다. 여객선은 왜 승객을 늘 정해진 선착장에서만 내려놓을까? 누군가 섬에 올라야 바다가 보이고 섬을 떠나서야 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 너와 나는 세상 끝 섬 밖으로 나가야 한다.
무더위가 절정이던 지난 8월 세 번째 주, 글벗과 함께 통영에서 소매물도로 가는 배를 탔다.
섬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오래 전부터 ‘소매물도, 그 섬에 가고 싶다’고 뇌어왔다. 마침내 말이 씨가 되어 나는 그 섬에 가고 있는 것이다. 나를 태운 배는 외딴 섬, 소매물도를 향해 쉼 없이 달렸다. 우리나라 섬 중에는 이름 앞에 큰 ‘大’ 자와 작을 ‘小’자, 위 ‘上’ 자와 아래 ‘下’ 자, 그것도 모자라서 가운데 '中‘ 자를 붙여서 이름을 짓는 경우가 있다. 대청도와 소청도, 대연평도와 소연평도, 대이작도와 소이작도, 대흑산도와 소흑산도, 대마도와 소마도, 대구을비도와 소구을비도가 그렇고 목포 앞바다에 있는 태도를 상태도, 중태도, 하태도라고 이름 지었다. 섬도 전통적인 장자상속권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작은 섬은 큰 섬에 가려 맥을 추지 못한다. 그러나 대매물도의 동생뻘인 소매물도는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지명도와 인기에서 형보다 낫다. 나는 후텁지근한 선실에 드러누워 장 그르니에의 ‘섬’에 집중했다. 한 시간이 넘게 계속된 멀미를 버티기는 고역이었다. 거친 파도는 연신 배를 삼킬 듯 작은 선창에 매달려 배가 기울 때마다 으르렁거렸다.
소매물도는 에메랄드빛 카펫 위에 자태를 뽐내며 서 있다. 여객선은 남해의 오륙도라고 부르는 돌섬, 등가도를 지나 1시간 20분을 넘기고서야 소매물도에 닿았다. 갯내음 넘실대는 선착장에서 직접 따온 해산물을 파는 할머니들이 구리빛 얼굴로 우리를 맞는다. 매물도는 대매물도와 5분 거리의 소매물도와 등대섬까지를 아우르는 대표지명으로 쓰인다. 통영시 한산면 매죽리에 자리 잡은 매물도는 그 옛날 메밀을 많이 심었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선장군이 군마 안장을 푼 뒤 쉬고 있는 모양에서 지명이 유래했다. 한때는 말 ‘마(馬)’자와 꼬리 ‘미(尾)’자를 써서 ‘마미도’라고 부르다가 ‘매미도’를 거쳐 매물도로 부르게 되었다. 2007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보령 외연도와 신안 홍도, 완도 청산도와 함께 통영 소매물도를 ‘가보고 싶은 섬’으로 선정했다. 이에 앞서 문화재청은 2006년 소매물도를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 제18호로 지정한 바 있다. 소매물도는 3,350여 개에 달하는 우리나라 섬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섬으로 ‘죽기 전에 꼭 가 봐야할 섬’으로 뽑혔다. 그래서 여름 한철이면 피서객이 북새통을 이룬다. 소매물도에서 가장 높은 해발 152m의 망태봉에서 내려다볼 때 한 폭 그림 같은 등대섬을 두고 한려해상국립공원의 보석이라고 한다. 꼭 그랬다.
섬은 원래의 모습 그대로 두어야 한다. 소매물도가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와 과자 ‘쿠스다스’의 CF촬영지일 때만 해도 옛 모습 그대로 좋았다. 그러나 소매물도가 ‘가 보고 싶은 섬’에 선정된 이후 정비가 이뤄지고 곳곳에 표지판과 조형물에 철제 계단이 설치되면서 개발을 빙자한 투기꾼도 설쳤다. 투기꾼의 꾐에 빠진 섬주민들은 대대로 가꾸던 텃밭과 집터를 팔고 나가 지금은 고작 20여 명의 원주민이 남았다. 그동안 몇 채의 팬션이 산비탈에 들어섰을 뿐 주황색 지붕이 드리운 언덕길이 가팔라 숨이 차고 힘에 부친다. 소매물도와 등대섬은 하루 두 차례 물이 나면 70m쯤 되는 몽돌길로 이어져 그 길을 모세의 기적이라고 일컫는다. 옛 진(秦)시황의 신하들이 불노초를 찾으러 왔다가 소매물도의 절경에 반해 해식동 암벽에 ‘서불과차(徐市過此)’라는 글씨를 남겼다는 글씽이굴도 있다. 소매물도를 오가는 뱃길은 거제 저구항에서 배를 타면 통영보다 30분쯤 가깝다.
섬은 뱃길이 열려야 오갈 수 있다. 섬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누가 살고 있는지, 어떻게 갈 수 있는지 괜히 궁금하다.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싯귀는 시집과 소설, 영화와 방송프로그램, 개인사진전 제목에 널리 쓰이고 심지어 여행 홍보문구와 횟집 상호로 내다걸었다. 그 만큼 시가 생활 깊숙이 들어서 있나 보다. 요즘은 TV의 일기예보에서 기상케스트들이 옷차림과 몸매를 드러내며 브라운관에서 설친다. 그러나 내가 어릴 적 깊은 밤 KBS라디오에서는 마감뉴스에 이어 일기예보와 어황통보시간 때에 통보관이 전해주던 섬이름은 지금도 내 어릴 적 추억으로 남아있다. 대청도, 연평도, 극렬비열도, 어청도, 덕적도, 장자도, 흑산도, 홍도, 완도, 진도, 거문도, 나로도, 보길도, 장사도, 비진도, 사량도, 욕지도, 울릉도, 독도까지 하나같이 예쁘고 아름다운 섬이름들은 지금도 눈을 감으면 들릴 것 같다.
비가 잦은 여름철에는 해무가 다도해를 점령한다. 갈매기를 앞세운 어선들이 짙은 해무를 뚫고 나타나는 광경은 근사하다. 등대가 파수(把守)하는 외로운 섬, 눈앞에 펼쳐지는 소매물도의 모습이 장관이다. 기억의 부표는 바다 깊은 곳에 단단히 묶어야 한다. 외딴 섬의 존재, 그 실체를 인식하는 아픔이 거센 물살을 버틴다. 섬이 간직한 숱한 사연이 파도를 타고 달려와 부서진다. 사랑과 추억이 포말로 머무는 소매물도에서 너를 만날 수 있으리라. 다시 찾아가고 싶은 섬, 소매물도는 엄마가 기다리는 고향집 같이 오늘도 그립다. 섬이 드러내는 앙가슴은 깊고 넉넉하다. 그 섬에는 결코 나를 가둘 수 없는 그리움이 넘친다. 섬은 마침내 지루하던 열대야를 걷어내고 너와 나를 품으며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최면을 건다.
첫댓글 소매물도가 그렇게 아름다운 섬이군요. 감사합니다.
명금당님! 우리 다음에 함께 가요.
배을타고 겉모습만 바라본 소매물도는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저도 한번 가보고 싶은 섬입니다
아가다님! 소매물도의 속마음은 차마 말로 다 하지 못할 만큼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사랑과 추억을 간직하고 있답니다. 볼라벤이 몰고온 파고가 얼마나 높았을까요! "그 섬에 가고 싶다."
부산에 계시는 분들 몇분과 함께 같으면 좋겠습니다
이름만 듣고 한 번도 못가본 그 곳, 나도 살아생전에 그곳에 한 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정말 섬은 그대로 두야하는데..조금만 이름이 알려지면 훼손이 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인터넷 네이버에서 조금 전에 사진 찾아 보았는데요 얼마나 할까? 생각했었는데요
정말 섬 전체가 장관 아닌 곳이 없었읍니다.
이국적인 모습의 정경도 보이고요 그 등대와 바다의 절묘한 조화와 등대섬을 잇는 그 둥근 돌들의 신기함과
등대산 오르는 신기한 지그제그의 길 파랗고 초록의 청량해 보이는 바다
마치 유명한 명산들인듯이 보이는 깎아지른 산모양의 돌산들 절벽들
등대를 배경으로 보이는 넗고 확트인 대망의 바다
손들어 맞이해 주는 쇠로만든 앉아 있는 인형
아름다운 포구의 모습
나지막하지만 뒷산같은 친근한 소풍길
전혀 알지도 몰랐던 섬을 형제님의 글을 통해서 만나 보았읍니다.
형제님도 좋은 추억 많이
갖으셨겠읍니다. 혹시 떠나 올때가 더욱 그리웠겠읍니다.
좋은 사진 동영상 많이 담으셨지요?
참 한가지 더요 섬이 이토록 아기자기 하기도 합니다.
비록 바다바람소리와 소금바다냄새도 바다갈매기도 못 보았지만 직접가 보지는 않았지만 좋은 추억으로 다가옵니다.
좋은 글과 여행 감사합니다.
누구나 마음 속에 가고싶고 그리운 곳이 있다는 것은 살아가는데 활력소가 되고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저도 소매물도를 지금부터 마음에 담아 두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