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내 기억속의 물
여섯 살 무렵 우리 집 바로 옆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었다. 이 연못 바닥에 샘이 있어 물이 늘 맑았다. 어른들에게는 앙증맞을 만큼 작았지만 여섯 살 나에게는 큰 호수였다. 맑은 물에 유영하는 잉어를 바라보던 즐거움이 컸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연못에서 내겐 잊지 못할 사건이 일어났다. 동갑내기 친구가 여름날 이 연못에서 수영하다 물귀신이 된 것이다. 연못의 한쪽은 어른 키 한 길 정도로 깊었는데 실수로 이곳에 들어가 나오지 못한 것이다. 어른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나 나가보니 그 친구의 익사한 시체를 둘러싸고 다들 탄식을 내뱉고 있었다. 그 친구의 부모님은 넋이 나가 있었다. 며칠 뒤 그 연못에서 굿판이 벌어졌고 생전 처음 칼을 들고 펄펄 뛰는 무당의 모습을 보았다. 잡색이 내는 낯선 소리, 울긋불긋한 옷을 치렁치렁하게 걸친 무당의 모습, 그녀가 외우던 알 수 없는 주문, 생닭을 물에 집어넣고 다시 건져내는 모습(아마 그 아이의 혼령을 건져내는 의미였을 것이다)이 무서웠다. 그날 이후로 이 연못은 친구를 잡아먹은 귀신 나오는 물구덩이가 되었다. 그 전에는 밤늦은 시간에도 지날 때 겁나지 않았던 이곳이 이 일 이후로 귀신이 나올까 무서운 곳이 되었다(얼마 안 있어 주인이 연못을 메워 버렸다).
인생
창세기에는 신이 진흙으로 인간의 형상을 만든 후 코에 입김(루아흐)을 불어 넣는 장면이 나온다. 이 숨이 생령(生靈)인데 살아 있는 동안 머물다 육신의 수명이 다 하면 거둬진다. 거둔다는 것은 누군가 챙겨간다는 뜻인바 하늘 또는 생명을 주는 어떤 초자연적 존재가 그리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다시 잘 생각해보면 인간은 수정 후 물(양수)에서 살다 몸에서 물이 빠져 죽음을 맞는다. 몸을 흙으로 돌아가게 하는 풍화작용도 그 바탕에 물이 있다. 아버지의 정자도 엄마의 난자도 주 성분이 물이다. 몸의 70%도 물이니 살아서도 물을 몸에 담고 산다. 매일 물을 들이 마시고 내 보내고…. 진화생물학자는 인간의 기원이 염분의 바다라고 추론한다. 물을 몸에 가둬두고 염분을 조절해주지 많으면 생령이 빠져나가는 것이 그 증거란다. 며칠 전 처가의 친척이 간암으로 생을 마쳤는데 이 양반은 숨을 거두기 전 복수가 심하게 찼더랬다. 오장육부가 물에 녹아 버렸던 것이다. 이 물은 인위적으로 뽑아내지 않으면 어디든 열린 구멍으로 빠져나온다. 그렇게 물은 그동안 생령을 담고 있던 육신을 녹여 흙으로 아니면 본래 고향인 바다로 돌아가게 한다. 물로 시작해 물로 끝나는 것이 인생이자 모든 생물의 운명이니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 한 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생명
물에서 시작한 생명이니 물 없이 살 수 없다. 그러나 어디서든 흔하게 볼 수 있어 중요하고 또 그래서 가치를 모르게 되는 것이 물이다. 어느 땅에는 물이 넘치지만 어느 땅에는 없다. 이런 물의 불균등한 분포가 인간 생태계의 모습을 좌우한다.
지구상 인구의 10억은 물을 얻기 위해 하루에 두 시간 이상 걷는다. 어느 곳에서는 여자들이 하루 종일 수십 리를 걸어 강이나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것이 일이다. 삼년 전 캄보디아에서 만난 거대한 호수 ‘톤 레삽’과 그 호수에 깃들어 사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배설물을 그대로 호수에 흘려보내고 다시 그 물을 마시는 모습은 충격이었다. 경상도 만한 크기에 물을 가득 담아두고 있으면서도 물 구실 못하는 호수, 이곳에서 깨끗한 물을 얻는 것은 투쟁이다. 겉으로 맑아 보이는 물도 치명적일 수 있다. 방사능으로 오염된 물은 아무리 많아도 독일 뿐이다. 살처분 된 동물의 피와 기름이 땅을 오염시키면 땅속에서 길어 올린 물도 독이다. 지구상의 삼분의 이가 물이어도 소금 섞인 물은 마실 수 없다. 많아도 부족해도 생명을 살릴 수 없는 것이 물이다.
히말라야 정상부의 빙하가 녹아 주변 국가들을 휘돌아 인도양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수많은 생물들에게 생명을 선사하는 물. 그 물길(갠지스와 인더스 강)을 따라 위대한 종교와 문화들이 탄생했다. 또 그 물길 옆으로는 기름진 농토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먹을 것을 내고 생명의 찬란한 경이를 뿜어내는 것도 물이다. 그래서 물길을 신의 젖줄이라 부르는 것이리라.
상선약수(上善若水)
물이 더워지면 김이 되고 김은 하늘에 올라 구름이 되며 또 어느 순간에 여러 모양으로 땅에 내려온다. 추우면 단단히 얼어 수천수만 년, 인간의 더위를 식히기 위해 고체로 살아간다. 바깥의 요구에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남이 요구하는 대로 형체를 바꾼다. 모든 이에게 자신을 먹을 것으로 내주고자 했던 예수의 삶이 이와 같을 것이다.
물은 높은 데서 아래로 흐른다. 바위가 있으면 돌아가고 제 힘이 세면 아무리 힘센 바위도 밀어내며 제 갈 길을 간다. 이렇게 단순한 진리를 바탕으로 산위에서 출발한 물은 시내를 이루고 강을 이뤄 마침내 바다에 이른다. 분수, 온천 같이 가끔 밑에서 위로 치솟는 물도 있지만 그래도 물은 중력의 법칙을 어기지 않는다. 노자는 이렇게 누구와도 척을 짓지 않으면서 모든 이에게 넓은 품이 되어주자는 뜻으로 이 말을 하였을 터이다.
정화와 부활
모든 종교에는 물과 관련된 의식이 있다. 바닥을 훤히 드러내주는 티 없는 맑음, 때를 씻어 내 본래의 아름다움을 드러나게 해주는 정화 능력, 물에 섞여 있는 무기물이 유생물들에게 주는 생명력, 육지에 사는 동물들을 자칫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익사) 어둠의 권능까지 물에는 정화, 죽음, 그리고 부활의 요소가 모두 담겨 있다. 이처럼 종교의 가르침을 골고루 담아낼 수 있는 지상의 물질 가운데 물 만한 것이 없다.
예수는 세례운동을 하는 요한에게 침수례를 받았고 그 영향으로 침수례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과거의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아로 탄생하는 것을 상징하는 입문예식으로 자리 잡았다. 매일 바쳐지는 미사 안에서는 포도주에 섞여 예수의 살아 있는 몸으로 구현된다. 석탄일 날 부처님에게 차를 드리는 의식에서도, 천도교의 청수예절에서도 물은 빠지지 않는다. 정한수도 물이다. 일본의 어떤 학자는 인간의 마음이 물의 결정(結晶)을 변형시킨다고 주장하였다. 물이 살아 있을 뿐더러 마음까지 있다는 그의 주장은 사실 여하를 떠나 종교가 물을 귀하게 여기는 맥락과 닿아 있다.
파괴의 힘
물은 대부분 인간에게 이롭지만 때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쓰나미가 그렇고 홍수가 그렇다. 히브리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도 파괴의 상징이다. 신이 자신의 창조를 벌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어서다. 정화 혹은 생명(창조)의 능력이 반대 방향을 향하면 이렇듯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파괴(죽음)의 힘이 되는 것이다. 또한 가벼이 여길 때는 인간에게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한다. 정화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과도하게 오염을 시키면 물은 여지없이 독이 되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한다. 흐르는 것을 인위적으로 막아도 독이 된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 것이 그 뜻이다. 강을 막아 흐름을 방해하고, 바다를 막아 들고남을 방해하면 물은 어김없이 재앙으로 보답한다. 모든 유기체는 움직여야 사는 것이다.
유희
마지막으로 물은 유희이다. 더운 여름이면 계곡, 바다, 수영장으로 향하는 우리에게 시원한 안락함을 선사한다. 온천과 목욕탕의 따뜻한 물은 피로를 씻어 준다. 얼음장 같이 차가운 물에서부터 온천의 뜨거운 물에 이르기까지 물은 인간의 새로운 창조를 위해 자신을 내어준다. 이 때 물은 휴식이자 충전이며 새로운 창조를 도와준다.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물은 우리에게 이로운 것을 준다. 이제 더위를 피해 물로 향하게 되는 여름이다. 이 여름 물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해보고자 주제로 정해보았다.
박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