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임장+인감증명서=대리권'은 철칙이 아니다.
부동산 매매나 임대차 계약할 때 소유자 대신 대리인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 때 대리인은 소유자로부터 받은 위임장을 가지고 나와야 한다. 그리고 위임장에는 인감증명서가 붙는다. 위임장에 찍힌 도장이 소유자의 인감이라는 증명서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위임장+인감증명서=대리권' 이라는 공식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위임장(과 인감증명서)가 있으면 대리권이 있으니 안심할 수 있고, 위임장이 없으면 대리권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바로 함정이 있다. 위임장이 있어도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위임장이 없어도 대리권을 확인하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위임장만 믿고 계약했다가 문제가 된 사례를 통해 위임장도 확인이 필요한 이유를 알아본다. 그리고 대리인이 위임장 없이 나왔지만 다른 방법으로 대리권을 확인하고 계약을 체결하는 요령도 알아본다.
한편 사람들은 인감증명서를 마치 대리권을 나타내는 표시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보니 이를 악용하는 사고도 자주 발생한다. 따라서 인감증명서를 건네줄 때는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없도록 주의가 필요하다.
위임장만 믿어서는 안 된다.
대리로 나온 사람이 소유자의 위임장과 인감증명서를 제시한다면 대체로 안심이 된다. 그러나 간혹 문제가 되는 수도 있기 때문에 한번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아니 인감증명서와 위임장을 못 믿는다면 도대체 무얼 받아야 되요?"
"나라에서 발행한 서류인데 문제가 생기더라도 내게는 책임이 없지 않나요?"
당연한 질문이다. 인감증명서와 위임장을 믿고 거래하는 데는 그만한 법적 근거가 있다.
민법 제125조 (대리권 수여의 표시에 의한 표현대리)제삼자에 대하여 타인에게 대리권을 수여함을 표시한 자는 그 대리권의 범위 내에서 행한 그 타인과 그 제삼자간의 법률행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그러나 제삼자가 대리권 없음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대리권을 수여하는 표시, 즉 위임장과 인감증명서를 제시했다면, 실제로는 대리권이 없는 경우라고 해도, 이를 믿고 거래한 상대방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를 표현대리(表見代理)라고 한다.
그런데 표현대리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붙는다. 위 125조의 단서 조항을 보자. 거래 상대방이 가짜 위임장이라는 사실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때에는' 보호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학자들은 '선의(善意) 무과실(無過失)요건' 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위임장이 가짜라는 것을 어떻게 확인하라는 말인가? 바로 이 부분이 거래 현장에서 자주 문제가 되고 있다. 다음 사례를 보자.
사례) 위임장만 보고 계약한 사람에게 과실을 인정
A가 소유한 부동산을 B가 대리인으로서 매매계약을 체결하였다. 매수인 C는 B가 가지고 나온 A 명의로 된 위임장과 인감증명서를 확인하고 매매대금을 지급하였다. 그런데 B는 대금을 받은 후 잠적해버렸다. 사실관계를 알아보니 A는 B에게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위임했는데, B가 이를 매매 위임장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C는 A에게, 인감도장을 B에게 맡긴 책임을 지라고 요구했고, A는 거부했다. 결국 C는 A를 상대로 소유권이전 청구소송을 제기한다.
이 사건에서 법원은 C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B가 과연 위임을 받았는지 위임장만 봐서는 안 되고 A에게 확인하는 절차를 취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청주지방법원 2003.4.9 선고 2002가단7596) 유사한 사건에서 대법원도 다음과 같이 판시한 바 있다. 소유자의 인감도장과 인감증명서를 가지고 있어도 '소유자에게 위임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대리권이 있다고 믿은 사람에게 과실이 있다고 본 것이다.(대법원 1995.2.17. 선고 94다34425)
(해법) 위임한 사실이 있는지 소유자에게 확인해야 한다.
그러면 위임여부를 어떻게 확인하는가? 보통 다음 2가지 안전조치를 많이 이용한다.
① 소유자에게 전화로 위임한 사실을 확인한다.
② 계약금 등을 소유자의 은행계좌에 송금한다.
그런데 문제는 매도인 또는 임대인 측이다.
"그렇게 사람을 믿지 못하면 어떻게 거래를 하겠어요? 그만 없던 일로 합시다."
특히 소유자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경우에, 매수인이나 임차인이 이렇게 따지고 들다가는 계약의 기회를 놓치기 십상이다. 이럴수록 노련한 공인중개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예컨대,
"큰 계약을 하면서 소유자 분에게 전화로 인사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터넷송금 하실 거죠? 금융실명제라 소유자 계좌로 이체하시는 게 좋습니다."
소유자와 전화가 연결되면 소유자의 주민등록번호, 매매하려는 물건의 주소, 송금할 계좌번호 등을 물어보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위임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위임장이 없어도 대리권을 확인하고 계약할 수 있다.
이제 반대의 경우를 보자. 대리인이 소유자의 위임장과 인감증명서 없이 그냥 나온 것이다. 실제로 위임장의 서식을 일반인들은 잘 모르기 때문에 미리 준비해가지고 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대리인이 소유자와 가족 관계인 경우 이러한 서류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 경우 매수인(또는 임차인)은 대리인이 위임관련 서류를 가져올 때까지 계약을 미루어야 한다. 그런데 물건이 귀할 때에는 서둘러 계약할 필요가 있다. 과연 위임장이 없으면 계약을 할 수 없는가?
민법 제680조 (위임의 의의)위임은 당사자 일방이 상대방에 대하여 사무의 처리를 위탁하고 상대방이 이를 승낙함으로써 그 효력이 생긴다.
위 조항의 의미를 살펴보자. 위임에는 어떤 형식이나 절차를 따로 두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소유자는 일을 맡기고 대리인은 승낙하면 되는 것이다. 서면으로 위임할 수도 있고 구두로 위임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학자들은 이를 계약방식의 자유라고 부른다. 우리 민법의 계약에 관한 규정들은 모두 이 원칙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해법) 소유자와 통화하고 계약금은 소유자 계좌로 송금한다.
그렇다면 위임장 대신에 구두로 위임받는 방식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 경우 다음과 같이 계약을 진행한다.
① 소유자와 통화하여 대리인에게 위임한 사실을 확인한다.
② 계약금은 소유자의 은행계좌로 송금한다.
③ 계약서의 특약사항 란에 다음과 같이 기재한다.
1) 소유자에게 전화하여 대리인에게 위임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2) 소유자는 중도금(또는 잔금)일에 위임장과 인감증명서를 제출한다.
만일 전화 확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점이 있으면 계약을 중지해야 한다. 그리고 구두 위임에는 입증책임 이라는 부담이 따른다. 즉 한 쪽이 위임사실을 부인하게 되면 상대방은 이를 입증해야 한다. 이런 입증의 부담을 없애기 위해 잔금일 전에 위임장을 받아두어야 한다. 그래서 위의 특약사항 2번을 기재하는 것이다.
위임장이 없다 해서 계약을 철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위임장을 받기 전에는 계약을 취소할 수 있죠?"
계약을 하면서 위임장을 나중에 받기로 한 경우 많이 받는 질문이다. 사례를 통해 질문의 배경을 살펴보자.
임차인 P씨는 마음에 드는 아파트를 찾았다. 소유자와 통화하니 마침 해외출장 중이라 중개사에게 계약을 위임하겠다고 했다. 잔금일에 위임장과 인감증명서를 받는 조건으로 계약을 하고 계약금은 소유자 계좌로 송금했다. 그런데 며칠 후 다른 중개사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는데 더 좋은 조건의 전세물건이 나왔다는 것이다. P씨는 먼저 한 계약을 취소하고 싶다. 그러나 문제는 임대인이 계약금을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대리로 계약하면서 아직 위임장을 받지 않았다. 이걸 문제 삼을 수 없을까? 법에도 이런 조항이 있다고 들은 것 같다.
P씨는 아마 민법의 다음 조항을 잘 못 이해한 경우로 보인다.
민법 제134조 (상대방의 철회권)대리권 없는 자가 한 계약은 본인의 추인이 있을 때까지 상대방은 본인이나 그 대리인에 대하여 이를 철회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조항은 '대리권 없는 자'일 경우만 해당된다. 다시 말해, 대리로 나온 사람이 위임장도 없고 구두로 위임을 받은 사실도 없다면, 소유자가 이 계약을 인정하기 전에 매수인이나 임차인은 계약을 철회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위 질문에 대한 답은 '철회할 수 없다'이다. 비록 위임장은 없지만 대리권이 있다는 사실을 소유자로부터 전화로 확인받았으므로 대리권이 있기 때문이다.
인감증명서 자체는 대리권과 무관하다.
인감증명서는 '위임장이나 계약서 등 서류에 찍힌 도장이 신고된 인감' 이라는 증명서에 불과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감증명서를 확대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소유자의 인감증명서만 가지고 나와도 소유자의 대리인으로 쉽게 받아드리는 것이다.
인감증명서 관련 판례를 보자.
대법원 1978.10.10. 선고 78다75 판결인감증명서만의 교부는 일반적으로 어떤 대리권을 부여하기 위한 행위라고 볼 수 없다.
법의 해석은 이렇듯 명백하지만, 문제는 거래 현장에서 여전히 인감증명서를 과신(過信)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발행한 인감증명서가 잘못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
(해법) 사용용도를 반드시 기재하여 악용을 예방하자
인감증명서 서식을 보면 끝 부분에 '사용용도' 난이 있다. 예를 들어
"00아파트 00동00호 월세 계약 위임용"
이라고 기재해 두면 이 외의 목적으로는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이 난을 비워 두었다면 대리인이 나쁜 마음을 먹고 매매계약 또는 전세계약으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감증명서 서식>
중요한 것은 대리권의 진정성이다.
이제 대리계약에 대한 정리를 해보자. 사람들은 위임장을 너무 믿고 있다. 위임장이 있으면 안심할 수 있고, 없으면 대리권을 확인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임장도 확인을 거쳐야 하고, 위임장이 없어도 대리권을 확인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대리권의 진정성이다. 진정성의 확인 과정이 형식적인 위임장보다 오히려 중요하다.
< 대리권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방법>
① 소유자에게 위임사실을 전화로 확인하기
② 소유자 계좌로 송금하기
글 이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