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4년 白翎僉使 鄭秀鉉 愛民善政碑 >
○ 마지막 관직으로 백령첨사 재직기간 : 1872년 9월 10일 ~ 1874년 5월 13일(이임일은 6, 7월)
○ 애민선정비 건립일 : 1874년 7월
< 백령진장(白翎鎭將 - 僉使) 선정비(善政碑) : 옹진군청 내고장옹진 역사/인물 >
백령진(白翎鎭)은 고려시대에 설진하여 조선조 말인 갑오개혁에 의하여 폐진된 오랜 역사를 지닌 수군진(水軍鎭)이다. 백령진에서는 진장(鎭將)인 첨사들 중에 유달리 공이 있는 첨사(水軍僉節制使)에게는 이곳 주민들의 정성된 마음으로 선정비를 세웠으며 이 많은 선정비들이 백령진의 역사를 대변이나 하듯이 6.25 전쟁 전 까지는 현 천주교성당(白翎鎭址) 앞에서 백령 길병원 앞쪽 성곽 밖의 용기원(龍機院) 나가는 도로변에 질서정연하게 잘 보존되었었다.
그래서 이 곳을 비석거리라고 하였으며, 이제도 이곳 주민들 중 노인층은 비석거리라고 부르고 있다. 비석거리는 이 곳 뿐 아니라 진촌 서쪽 두룡산 잿등길(월내도촌)도 첨사선정비가 줄지어 서있던 곳으로 역시 6.25 전쟁 전 까지 잘 보존되었었다. 이러한 비석거리가 두 곳이나 있었다는 것은 그만치 첨사 선정비가 많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백령진의 역사를 말해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6.25 전쟁과 1.4후퇴 시의 군주둔(軍駐屯)으로 인한 작전도로(作戰道路)와 기타 군시설을 비롯 당시 미 극동부사령부 소속의 유격부대(遊擊部隊) 거점기지가 된 진촌은 수많은 피난민들의 집결 등으로 대혼란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특히 유격부대들의 막사는 비석거리 주변에 까지 점거하게 되었고 여러 가지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선정비는 모두 뽑혀지고 쓰러져 여기 저기 뒹굴게 된 대수난(大受難)을 겪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막사건축이나 참호(塹壕) 축석용(築石用)으로 쓰여 지는가 하면 진퍼리의 징검다리 등 여러 용도로 쓰였다. 이 같은 상황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뜻있는 이곳 주민들에 의하여 여기저기서 보이는 대로 주워 모아 두룡산(頭龍山) 남쪽 마을 앞에 있는 반공유격전적비(反共遊擊戰跡碑) 경내에 옮겨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인 몇 점만 찾아 세웠을 뿐 향토문화의 귀중한 자료가 6.25전쟁으로 인하여 십여 점은 행방을 모르는 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어디엔가 땅속 깊숙이 묻혀있던가 아니면 어느 비탈에 묻혀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이곳에는 첨사선정비와 함께 황해도 장연읍에 살면서 백령도 주민을 위하여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여 주었을 뿐 아니라 행정적으로 많은 지도를 하여준 임원석(林元錫) 명예백령도장(名譽白翎島長)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와 1946년 10월부터 1953년 까지 7년간을 고향인 백령면장(白翎面長) 직에 있으면서 6.25전쟁과 그 외 많은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서도 수만 명의 피난민 구호에 전력하였으며 면장 사임 후에도 간척지사업, 교육사업 등에 헌신하다 고인이 된 최공경림(崔公景林)의 공적비(功績碑)도 함께 서있다. 진촌(鎭村) 앞동산에 세워진 선정비(善政碑)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행첨절제사 권공 홍준 애민선정비(行僉節制使 權公 興俊 愛民善政碑) 옹정(擁正) 11년 9월에 건립(조선조 영조 9년 서기 1733년 9월)
2. 제조 조공 만영 영세불망비(提調 趙公 萬永 永世不忘碑) 도광(道光) 7년 1월, 조선조 순조 27년 서기 1827년 1월에 건립, 비문 양편(兩便)에 “세전거혼결도민 지수지장비정민(世專紶痕蘇抉島民 之誰之腸比貞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3. 행수군첨절제사 이공 명석 애민선정비(行水軍僉節制使 李公 明錫 愛民善政碑) 도광(道光) 28년 무신(戊申) 11월에 건립(조선조 헌종 14년 서기 1848년 11월)
4. 행첨사 이공 보헌 청백선정비(行僉使 李公 普憲 淸白善政碑) 동치(同治) 11년 임신(壬申) 9월에 건립(조선조 고종 9년 서기 1872년 9월)
5. 행첨사 정공 수현 애민선정비(行僉使 鄭公 秀鉉 愛民善政碑) 동치(同治) 13년 갑술(甲戌) 7월에 건립(조선조 고종 11년 서기 1874년 7월)
6. 수군첨절제사 박공 래명 영세불망비(水軍僉節制使 朴公 來命 永世不忘碑) 백령첨사선생안(白翎僉使先生案 : 백령첨사 인사기록)에는 박래명 첨사 경신십일배(庚申十一拜: 경신 11년에 발령)라고 되었을 뿐 건립연월은 알 수 없다
◾ 행도장 임공원석 양세불망비(行島長 林公 元錫 永世不忘碑) 광무(光武) 11년 3월에 건립(조선조 순종 3년 서기 1907년 3월)
◾ 영암 최공 경림 공적비(靈岩 崔公 景林 功跡碑) 1972년 9월 19일 건립위원 윤량숙(尹良淑), 이형곤(李亨坤), 곽영(郭映)
6.25 때 총탄 자국이 여기 저기에 나있다
1872년 정수현 壬申 九月 白翎僉使 蒙點(몽점) 소식
- 政(人事) : 9.10일, 44.3cm*20.7cm
첨절제사(僉節制使)
절도사(節度使)의 아래 벼슬로, 병영(兵營)의 병마첨절제사, 수영(水營)의 수군첨절제사로 구분되는데, 병마첨절제사는 1409년(태종 9), 수군첨절제사는 1466년(세조 12)에 도만호(都萬戶)를 개칭하여 각각 설치하였다.
목(牧) ·부(府)에 있는 진영의 첨절제사는 문관인 수령(守令)이 이를 겸직하고, 나머지 진영은 무관이 맡아보도록 하였다. 품계는 종3품으로 정해져 있었으나, 경상도(부산) 다대포(多大浦)와 평안도 만포진(滿浦鎭)의 첨절제사는 정3품 당상관(堂上官)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수군의 경우, 중요한 해안지방의 독진(獨鎭)과 그 진관(鎭管), 육군의 경우 평안 ·함경도 지방의 독진과 그 진관은 모두 수령이 겸하지 않고 전문적인 무관이 맡아, 이를 첨사(僉使)라 약칭해서 다른 지역의 첨절제사와 구별하였다.
백령도 역사
백령도에서도 선사시대부터 농경과 어로를 하며 사람이 살았다. 한사군의 일부였다가 고구려에 편입된 이후 곡도(鵠島, 따오기 섬)라 불리었고(고려사), 고구려 멸망 후에는 신라의 영토인 한주 장구진이 되었다가 고려 태조 때 백령진이 되어 '백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유금필 이 잠시 유배되기도 하였다.
현종 9년(1018년)에는 진을 설치하고 진장을 두었으나, 고려 말기 왜구의 침략이 심해지자 폐쇄되어 주민들은 육지로 이주되어야 했다. 고려 고종 때 백령진장 이세화에 의해 최초로 유교 가 들어와 향교가 세워지고 과거 응시자를 배출했다고 한다. 최충헌이 박진재를 유배보냈고, 또 김경손이 유배지인데 나오지 못하고 죽었다고 하니 백령도는 당시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었던 최악의 귀양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개국 후에는 세종대왕 때 잠시 수군진(영강진과 통합하여 강령진, 이후 강령현으로 해주목사 관할)이 생겼으나 이후 다시 폐지, 광해군 때야 본격적으로 백령진이 제 구실을 하기 시작했다(지금의 진촌리 소재).
조선 중후기 백령도는 황해우도 옹진의 병마절도사 휘하로 있었으며, 백령진에 파견된 백령 진장(첨사 )은 수군첨절제사(정3품, 당상관)를 겸하며 수령이자 군사령관으로서 즉결 심판권 까지 있었다. 첨사는 부장까지 두고 항상 군관 5인의 호위를 받았으니 백령진장은 가히 백령도의 군주였던 셈이다.
고종 때 갑오개혁으로 진제가 폐지되고, 23부제에서 해주부에 속했으며, 이때 귀양온 반정부 인사들이 개신교를 전파한 게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중화동 교회의 시작이다(1898년 건립, 한국의 두번째 장로교회).
광복 이전까지 황해도 장연군 백령면이었다가, 광복 직후 38선 으로 분단될 때 장연군 본토가 북한 관할이 되면서 경기도 옹진군으로 편입되었고, 한국전쟁 이후 옹진반도마저 빼앗기면서 경기도에 소속한 이름 뿐인 옹진군의 소속이 되었다. 남쪽의 대청도와 소청도가 같은 면에 속하였으나 1974년 대청면으로 분리되었다. 1995년 3월 1일 부로 인천광역시 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즉 황해도에 소속된 섬이었는데 경기도에 소속되었다가 현재는 인천광역시에 소속인 섬이다.
* 백령진첨사는 신도진첨사(압록강 하구), 훈융진첨사(두만강변) 등과 더불어 국방의 최전방 변장으로서
방어사, 수사, 병사 승진의 가점이 주어지던 무관의 요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