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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이야기 스크랩 순천(順天)
공존공생 추천 0 조회 954 11.04.28 09: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사진/죽도봉 상공에서 바라 본 순천시 전경-2006. 4 항공촬영]

 

순천의 옛 이름은 문헌에 여러 가지로 전한다. 백제 시대에는 감평, 사평, 무평, 모평이며, 통일 신라 시대에는 승평이고, 고려 태조 23년에 승주가 되고, 현종 3년에 비로소 순천이 된다. 이들을 깊이 고찰해 보면 크게 두 계열로 나눌 수가 있다. 그 하나는 우리말 지명을 단순히 한자를 차용하여 기록한 지명과 또 다른 하나는 우리말 지명과는 상관없이 중국식 지명 곧 한자어 지명으로 나누어진다.

백제 때 지명인 감평, 사평, 무  평, 모평은 전자에 해당하고 승평, 승주, 순천은 후자에 해당한다.

 

 

[사진/순천 고지도] 

 

순천대 최병운은

세종실록 지리지에 삽평, 무평, 여지도서에서는 감평, 사평, 무평, 고려사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및 동국여지지에는 감평, 무평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와 전 이서 ‘삽’, ‘사’, ‘감’은 ‘삽’의 이형 속자들인 바, 고려사의 감평은 잘못이 분명하다. 필자의 관견으로는 마실 삽, 꽂을 삽의 오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고지들’이야 말로 순천의 지세에도 부합되는 그럴듯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라고 기술하였다.

 

순천의 고지명을 이해하는 데 많은 가르침을 준 기술이다. 그러나 사평, 무(武)평, 무(畝)평과는 상관관계가 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평과 무평도 사평의 다른 표기이지 전혀 다른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부르고 있는 이사천, 상사, 하사들의 강 이름과 면이름이, 다사평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도사초등학교 주위에 금성, 통천, 무평, 사평 - 일명 평촌 사평이라 불렀다.- 들의 마을이 있다. 무평은 사라호 태풍 때 마을이 일부가 유실되어 이사천 제방을 개축하면서 폐촌 되었다고 한다. 마을, 홍두, 내동-홍내마을 뒤에 후백제의 견훤이라 구전하는 토성 터가 있다. 순천여상고 앞에서 바라보면 한눈에 토성임을 알 수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다리 건너가 대대이다. 대대란 지명 속에서 역사의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큰터’, ‘한터’란 뜻이다. 곧 백제 때의 읍터란 뜻이 담겨져 있다.

 

문헌을 살펴보자 조현범의 강남악부에

“검석교 는 하사 와 별량면 과 통하는 다리다.”

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를 현지 주민들은 검석교를 ‘검식기’ 라 부른다. 그리고 이사천은 승주읍에서 발원해 상사를 거쳐 용두포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지만, 이사천이라고 하면 상사쪽 물과 낙안 불재 쪽 물이 만나는 지점부터 이르는 이름이다.

 

이상의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사평 이란 이름은 이사천과 유연성이 깊다. 사실 사람이 삶의 터를 잡은 곳은 물이 있고 식량이 풍부하며 다니기 좋은 곳일 터이니 이사천 하구에 사람들이 모이어 살았을 것이 자명하다. 하나 첨가 해 둘 것은 도사초등학교 주위를 파면 2~3m만 들어가도 모래가 겹겹으로 쌓이어 있다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강 하구에 모래벌판이 형성되는 것은 어디에나 있는 것이며 그 모래 때문에 사람들이 ‘모샛들’. '모랫들'이었을 것이고 이것이 줄어들어 ‘못들’이 되었을 것인데 이를 한자로 기록하면서 무(武)평, 무(畝)평으로 표기하였을 것이다.

 

필자는 그래서 사평을 기본 표기라고 생각하고, ‘사평’을 읽다 보면 ‘삽평’으로 들리기 쉬우며 이를 옮겨 쓰는 과정에서 삽평으로 표기하고 다시 감평으로 잘못 적을 수가 있다. 어떤 분은 ‘사평’이 ‘삽평’으로 소리가 변하는 것을 음운 강화 현상 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삽평, 감평은 모두 사평의 오기이고 무(武)평, 무(畝)평은 사평의 이형 표기인 것이다.

 

사평을 뜻옮김으로 보면 ‘사’는 ‘모래’, ‘모새’이며, ‘평’은 ‘들’이니 곧 ‘모랫들’, ‘모샛들’이 된다. 또 ‘모샛들’이 줄어들면 ‘못들’이 되며 이를 한자로 표기해 무(武)평이 되었다 무(武)는 ‘못의’ 소리 옮김이고 평은 들의 뜻옮김이다. 무(畝)평도 무(武)평과 같다. 다만 기록한 사람이 생각나는 대로 알맞은 한자를 가려 표기했다고 보아야 한다.

 

신라가 삼국을 당과 연합하여 통일하고, 당나라 문물이 밀려오면서 신라의 문물제도를 당나라 제도로 개혁하였는데 경덕왕 16년(757)에 승평 이라고 고쳤다. 이 승평은 태평과 같은 뜻이므로 완전한 한자어 지명이 되었다. 세상이 평화롭고 살기 좋다는 뜻이 있으니 한자로 된, 하나의 단어요 중국식 지명이다. 순천도 하늘의 뜻에 순응한다는 뜻을 가진 한자어 지명이다. 승주에서 고유 지명은 ‘승’이고 ‘주’는 오늘날의 도, 군, 읍, 면처럼 행정 구역을 나타내는 말이므로 승주는 승평주 의 악칭으로 보아야 하며 승화, 평양들의 이름은 시호를 내릴 때 변형 시켜 붙었던 지명으로 보아야 한다. 이 땅에 토착 주민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기 위해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된 토착 성씨를 보니, 장, 박, 김, 이 이다 이들 가운데에 순천 김씨, 순천장씨, 순천박씨 의 선조 들이 들어 있을 것이다. 이들 토착 세력이 중앙 정계로 진출함에 따라, 고려 때 본관을 가지게 되는데 순천 지명의 변동은 이들 토착 세력의 힘이 크게 작용 했다고 보아야 한다.

 

삼국유사 의 후백제 조에

견훤(甄萱)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이다.

 

라고 하였는데 상주는 옛 이름이 사불성이다. 사불 의 사는 뜻 옮김해 모래(모새)이며 불 은 벌(들)의 소리 옮김이니 곧 모랫들, 모샛들 의 이두식 지명이다.

 

경북 문경군 농암면 농암리에 ‘농바우’가 있다. 이 바위 때문에 마을 이름이 생기고 면이름이 생겼다. 노인들은 마을을 지금도 ‘농바우’라 부른다. 그리고 농암면 소재지가 있는 곳을 신농바우라 부른다. 본래 농바우가 있는 곳을 구농바우 이라 부른다. 구농바우 마을 논 가운데 있다. 자그마한 농짝 크기만 하다. 청화산과 조항산 사이에 있어서 농암면을 청조향람 이라 불리는 면이다. 농바우의 크기는 가로 2m 50cm, 세로 1m 50cm, 높이 1m 10cm 정도인데 논 가운데 볼품없이 서 있는, 아니 놓인 바위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936)이 태어난 곳이 가은읍 갈전리 아차 서남쪽에 있는 금하굴 이며 지금도 그 굴이 어느 민가 안에 조금 남아 있다고 한다. 신라 말 아차의 큰부자 아자개에게 딸이 있었는데 어느 날 밤에 이목이 준수한 청년이 ‘하늘에서 왔다’고 하며 그녀와 동침을 하고 돌아갔다. 그 뒤로 밤마다 처녀를 찾아오고 처녀는 임신을 하여 배가 불러오는지라, 청년의 정체를 알기 위하여 그 옷에 명주실을 꿴 바늘을 꽂아 놓았다. 이튿날 날이 밝아 그 실을 따라 가 보니 이 굴로 들어가 있었고 바늘은 기둥만한 지렁이에게 꽂혀 있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처녀가 넣은 자식이 견훤이다. 본래의 성은 이 씨이고 견훤은 황간 견 씨의 시조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견은 견이 아니라 진이며 인구 조사에서 진 씨가 전북 만경에 살고 있으며 견훤은 진훤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견훤이 궁궐을 지었다는 궁기리가 있고 중궁 마을에는 의상대가 있으며 상궁 마을에는 원효대가 있어 신라 때부터 어떤 의미로든 큰 뜻이 있는 마을이다. 종곡리 북짓골 마을은 견훤이 북을 울리며 군사를 조련했던 곳이고 연천리의 말바우는 견훤이 이곳을 떠나 전라도로 갈 수밖에 없었던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견훤이 말바우에서 용마를 타고 이 십리쯤 떨어진 아차까지 활을 쏘아 용마와 화살 중 어느 것이 더 빠른지를 시험하게 되었다. 도착해보니 화살이 없는지라 용마가 늦게 도착한 것으로 잘못 안 견훤은 말을 목 베어 버렸다. 그러나 말을 죽인 후에야 화살이 도착했다. 그래서 견훤은 운이 다한 것으로 믿고 “아차, 내가 실수했구나! 내 운은 여기서 다했다.”하여 이곳이 ‘아차’가 되었고 용마를 갈동리 삼밭골 위에 묻어 주고 전라도로 떠났다고 한다. 농바우에 견훤 탄생 설화가 전한다. 천상의 구호라는 청년이 옥황상제의 무남독녀와 사랑을 나누다가 발각되어 벌을 받고 지상으로 쫓겨났는데 마침 호랑이에게 아버지를 잃은 아비라는 처녀를 만나 그 원수를 갚아 주고 같이 살며 잉태를 시킨다. 하지만 형기가 끝나 아비를 데리고 하늘로 오르니 상제와 공주가 크게 노하여 구호와 아비를 떨어뜨리니 아비는 가음현 민지 2리의 바윗돌이 되고 구호는 농바우가 되었다. 그 바위에, 갈지리면에서 칼 든 장수가 나왔으니 그가 견훤이라는 것이다.

 

전 서울대 교수 최창조씨는 ‘민지 마을은 그 중에 ’섬안‘이란 마을 이름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물에 둘러싸인 곳이라 특히 그 서북쪽 방향이 매우 허결하다. 한편 농암리는 북쪽과 서쪽은 조항산, 도장산 연봉에 의하여 가려지고 동쪽과 북동쪽은 성재산, 천마산 줄기에 의하여 병풍을 둘러친 듯 하지만 오직 함창으로 나가는 동남쪽이 허결하기 짝이 없다. 당연히 우리 자생 풍수의 특성상, 그것을 고쳐 줄 비보가 없을 수 없으며 그게 바로 농바우 아니겠는가? 농바우 바로 근처에 1200년 전에 견훤이 심었다는 높이 30m의 느티나무가 한 그루가 들판을 압도하고 서 있다. 이 또한 동수로서 비보의 개념이다. 농바우와 느티나무는 견훤이 아니더라도 마을의 보호역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더욱 기막힌 비보 개념은 산수골쪽 두 말(천마산이 길을 사이에 두고)이 말 밥통을 가운데 두고 서로 먹이를 먹으며 농암 동구를 막아 주고 있는 형세이다.’ 라고 풍수지리로 농바우를 풀이하였다.

 

그런 측면을 떠나 지명의 언어학적 측면을 살펴보면 농바우는 옷을 넣는 농의 뜻이 아니고 ‘놓은 바우’의 뜻 같다. ‘놓은 바우’는 지석묘일 것이다. ‘놓은 바우’가 줄어들어 논바우가 되고 다시 농바우로 소리가 변한 것이다. 풍수 지리적으로 허결한 데를 비보하려 가져다 놓았건, 지석묘의 개석으로 가져다 놓았건, 사람이 놓은 바위임은 틀림없다. 일부 학자들은 견훤의 태생지를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경북 상주가 아니라 순천 곧 사평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삼국유사에 견훤이 광주(전남)의 북촌에서 처녀가 밤마다 미남자와 교혼하고 아버지의 말대로 바늘에 실을 꿰어 새벽녘에 나가는 미남자의 옷자락에 꽂아 두었던 바, 아침에 실을 따라 가 보니 뒤안 장독대 바위 밑으로 들어 가 있음을 보고 그 돌을 떠들어 보니, 큰 지렁이 허리에 바늘이 꽂혀 있었으며 지렁이는 죽어 있었다. 이런 뒤로 그 처녀는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견훤이라고 하였으며 견훤이 실지로 무진에서 세력을 얻어 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그러므로 왕건의 편을 든 나주 세력을 제외한 해변의 세력이 견훤 편이었으며 순천 박 씨 시조 인 박영규 가 견훤의 사위인 점으로 보아 순천과 후백제와는 절대적인 관련이 있다.

 

고려사 절요를 보면

병신(丙申) 19년(936) 봄 2월에 견훤의 사위 박영규 장군이 처음 항복을 청하면서 그 아내에게 은밀히 말하였다. ‘대왕께서 40년 동안 고생하여 왕업을 이룩하였는데 하루아침에 집안사람의 화로 땅을 잃고 고려에 투항하였사옵니다. 정절이 돋은 여인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아니하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사옵니다. 만약 우리가 임금을 버리고 아들을 섬긴다면 무슨 얼굴로 천하의 의로운 선비를 보겠습니까? 하물며 고려의 왕공은 인자하고 독실하고 부지런하며 검소하여 민심을 얻어 거의 하늘의 계시를 받았으니, 반드시 삼한의 주인이 되리라고 알고 있습니다. 글을 써 보내 우리 임금님을 위안하고 겸하여 수고로움을 위로해, 왕공에게 장래의 복을 도모할까 하옵나이다.’

 

하니 그 아내가 말하기를

‘당신의 말씀이 곧 제 뜻이옵니다.’ 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사람을 보내 뜻을 알리니

‘만약 의로운 병사를 일으킬 것 같으면 내응하여 왕사로 맞이하겠나이다.’ 라고 말하였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그 사신을 후사했다. 사신이 돌아와 영규에게 보고하기를

‘만약 그대의 은혜를 입어 길이 막히지 않는다면 먼저 장군을 뵙고 당에 올라 가 부인께 절하고 형으로 섬기고 누이로 존경하며 반드시 두텁게 보답하는 끝이 있을 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귀신이 이말을 다 알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였고 박영규는 좌승이 되었으며 두 아들도 벼슬을 하고 죽어서 해룡산신이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김총 은 견훤에게 벼슬하여 인가별감(引駕別監)에 이르렀고 죽어서 성환신(城隍神)이 되었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분이 순천 김 씨의 시조로 그 후손이 세종대왕 때 명장 김종서로 연결되며 시조의 묘역이 주암면 주암리에 있다. 박영규의 묘는 대전시 유성구 박장골에서 찾았는데 지석이 발견되었다. 그지석에

‘건덕(乾德) 8년 유월에 영규 죽다. 배견씨(配)甄氏’

 

라고 적혀 있는 탁본을 본 적이 있다. 그 후손으로 고려 때 박난봉, 박천상, 조선조에 박원종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토착 세력과 중앙 정치 세력이 연결됨으로써 순천은 자주와 똑 같이 고려 때 목으로 승격되었는데, 추측컨대 박영규가 민심의 흐름을 눈치 채고 고려로 머리를 숙인 것이 역천이 아닌 순천 곧 하늘의 뜻을 따랐다는 뜻이므로 순천으로 개명하였을 것 같다. 지금 통산 봉화산이라고 부르는 산이 성황당산이니까 순천 김 씨의 시조인 김총을 제사지낸 사당이 봉화산 기슭에 있었을 것 같으며 홍내동 뒤의 해룡산에 박영규를 제사 지내던 사당 해룡사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큰 산에 제사를 지내는 일은 고조선부터 삼국, 고려, 조선으로 이어였는데 유림들이 지내는 제사는 향교의 춘추 제전, 사직제, 여제, 성황제가 있다. 김총 설화는 순천의 성황신이 누구인가를 알 수 있게 하는 설화이다.

 

이 지방의 유명한 인물이 죽어 성황신이 되고 뒷사람들은 그분의 공덕을 추모하며 제를 지내 온 것이다. 일제가 이 땅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우리의 토속 신앙을 미신이라고 매도하고 그들이 신봉하는 신사 참배만 강요한 까닭이 바로 우리의 정신적 지주를 뽑아 버리려 미신 타파란 명분으로 조상의 유풍을 없애 버리려 하였던 것이다.

 

고종 기해년에 중수한 동원재 중수기에

“갑인년에 안관사(安官祠)에서 김총의 영정을 이 동원재에 봉안하였다. <중략> 변방의 왜구가 감히 국경을 범하지 못하므로 국민이 흠모하고 존경하는 데에 사표가 되니 공의 상(像)을 그려 추모하였고 공이 죽게 되자 향인들이 진례산 안관사에 존봉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각 지방의 성황신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에서 순천 박 씨와 순천 김 씨의 시조가 성황신이 되었으니 그분들이 어떤 사람인가도 알 수 있다.

 

1923년에 승평속지에 실린 조덕호의 순천설을 소개해 순천의 지명에 대한 뜻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전략) 순천이라는 이름에는 반드시 뜻이 있을 것인데 군인들은 그것을 아는가? 그 뜻을 안다면 다행이지만 모른다면 순천에 살면서도 그 이름의 뜻을 모른다니 옳은 일인가 옳지 못한 일인가? 이 덕호가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의 역대 연혁은 상고 시대에는 상고할 수 없지만 중고 이후로는 신라와 고려 때, 본군은 승주군과 승평군이었다가 우리 조선에 이르러 순천이 되었다. 승은(승일-해가 솟아오름)이니 계림에서 순천을 볼 작시면 본군이 동쪽에 있다. 그래서 승주라 하였고 거기에는 문명의 뜻을 본떴다. 승평이라고 고친 것은 문명이 오래 되면 반드시 편안한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그래서 승평이라고 하였다. 거기에는 기대하는 뜻이 있다. 이름을 순천이라고 고친 것은 오래 되면 게으르고 난폭하고 불순하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한 것이다. 그래서 순천이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경계하는 뜻이 있다. 이것이 이름의 뜻을 알지 않을 수 없는 첫째 이유이다. 서울로부터 볼 것 같으면 여기가 동남쪽이 되니 손이며 손은 순이다. 하늘의 동남쪽을 순이라고 하니 여기에도 경계하는 뜻이 있다. 이것이 이름의 뜻을 일지 않을 수 없는 둘째 이유이다. 지난날 이른 바 사람들이 천연적으로 된 것이라 한 것은 그릇 된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 이름의 뜻만 알고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과 어찌 다르리! 반드시 행해야 한다. (이하 생략)

 

조덕호씨는 유학자답게 지명의 뜻을 주역에 근거하여 풀이하고 이름의 뜻을 도덕적으로 아름답게 파악하였다. 역사성을 고려하지 아니하고 성리학의 입장에서 효제충신이 곧 순천(順天)이요 순리(順理)라는 것이다. 시대가 바뀌면 토착 세력이 교체된다. 일제가 이 땅을 침략하자 사림 세력이 친일파에게 밀려나듯 후백제 세력은 고려로 귀화하므로 기층민(基層民)의 세력 교체가 되지 않았을지라도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킬 때는 토착 세력이 바뀌고 치소도 옮겼을 것이다.

 

이수광 순천 부사가 지은 승평지를 보면

이인실(李仁實) 이란 순천부에 사는 80 늙은이가 내게 말하기를 ‘고로 들이 상전하기를 승주란 이름을 쓸 때에는 읍거(邑居) 가 도호부 북쪽 10 리의 강철리에 있었다. 터와 돌과 기초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 읍거는 곧 승평군 때 치소다’ 라고 말하였다.

도선(道詵) 의 답산기(踏山記) 에 ‘승주(昇州)’라 하고 ‘승평(昇平)’이라 한 것이 있는데 인실의 말과 비슷하여 망령되지 않다.

는 기록이 있다.

 

백제 때에는 사평이 읍치 이고 통일 신라 때에는 강청에 치소가 있었을 것이며 순천이란 이름을 쓸 때에는 영옥동 남내동 옥천동 일대의 순천도호부 성안에 치소가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평군 때에는 이사천 하류의 사평 마을에, 승평군 때에는 서면의 강청리에, 후백제 때에는 홍내동 뒷산 토성 터에, 수천 도호부 때에는 성안이 치소이었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충선왕 2년(1310)에 순천부으로 개칭되었고 이씨 조선 태종 13년(1413)에 순천 도호부가 되었으며 세조 때 진을 설치하여 낙안군, 보성군, 광양현, 흥양현, 능성현, 동복현, 화순현을 관장하였다. 그리고 선조 35년(1602)에 전영을 설치 하여 순천, 낙안, 보성, 흥양, 광양, 동복, 구례를 관장하였다. 또 1908년에 낙안군이 폐지되고 순천군이 되면서 해촌, 소안, 장평, 도리, 상사, 하사, 황전, 쌍암, 월등, 별량, 용두, 소라포, 삼일포, 여수, 율촌, 서면, 주암, 송광면으로 모두 18개 면이었는데 1908년에 여수군이 처음 설치되면서 율촌면 이하로 여수군이 되었고 낙안군이 폐군되면서 외서, 읍내, 동면, 초천면들이 순천군에 편입되었다. 1949년에 순천이 시로 승격되면서 시지역 이외의 시골은 승주군이 되었다. 이때에 도사면 전지역과 해룡면 지역 일부가 시로 편입되었다. 이보다 앞서 일제가 우리나라를 병탄하고 1914년에 행정 구역을 통폐합하면서 도리면과 하사면을 통합하여 도사면을 만들었으며 소안면, 장평면를 통폐합하여 순천면을 설치하였다.

 

순천이란 넓게는 동부 전남을 통칭하는 이름이고 좁게 보아도 현재의 순천시를 비롯한 여수 반도와 그 도서를 통칭하는 이름이다. 하사면은 하이사면(下伊沙面)의 준말로 이사(伊沙)를 기준으로 하여 강하류에 있는 면이란 뜻이 담겨져 있다. 인덕(仁德), 조례(照醴), 월평(月平), 수동(水洞), 덕흥(德興), 안지(安之), 간동(間洞), 신풍(新豊), 대대(大垈), 내동(內洞), 연야(連也), 무평(武坪), 신대(新垈), 오룡(五龍), 대동(大洞), 야동(也洞), 복흥(復興)들의 17개 마을이다.

 

홍두와 내동을 합하여 통상 홍내라고 부른다. 내동은 ‘안 동네’의 뜻이고 홍두는 한자로 이렇게 쓸지라도 그 뒤에는 우리말 이름이 숨어 있다. 크다. 많다 의 뜻의 한이 혼으로 변하여 두 와 결합하면서 홍두가 되었고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기러기 홍자를 쓴 것이다. 다시 풍수지리설과 결합하여 인제산의 산줄기가 뻗어 내림이 기러기 형국이라는 말로 한자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도리면의 뜻은 알 수 없다. 오산, 오림, 홍두, 내동, 금성, 교항, 통천, 덕흥, 선암, 월곡, 양율, 교곡, 지정들의 14개 마을이다. 장평면은 장천과 장행에 상평과 하평의 마을 이름을 결합하여 명명한 이름이 분명하다. 인제, 남정, 하평, 상평, 풍덕, 신기, 장행, 장천, 장명, 저전, 경내, 지막들의 14개 마을이다.

 

저전(楮田)은 원래 마을 이름이 아니다. 조선 시대에 순천부에서 관장하던 밭이 몇 가지 있었는데 주암의 죽전(竹田), 해촌의 염전(鹽田), 저전동 일대에 있던 칠전(漆田) (옻 나무밭)저전이 그것이다. 저전은 한지를 만드는 원료인 닥나무를 기르던 밭이다. 그러므로 저전은 딱밭이 마을 이름이 된 것이다. 닥밭에서 수확한 닥으로 종이를 만들던 곳에 막이 있었다. 종이를 마드는 막이기에 지막이라하였고 지막(紙幕)은 없어졌을지라도 이름만은 남아서 마을 이름이 되었는데 지금은 도시화의 물결에 이름마저 묻혀 버리었다. 교항은 우리말 이름 다리목을 뜻옮김한 표기이며 통천은 우리 말 이름 통샘이를 역시 한자로 뜻옮김한 것이다. 양율은 역의 이름이 역은 폐지되었지만 이름이 남아 마을 이름으로 쓰인다. 오림(五林)은 원래 정자 이름이다. 목사 신윤보(申潤輔)가 낙남(落南)여 해룡산 기슭에 정자를 지어 이름을 오림정이라 했다. 이 정자 이름이 마을 이름이 된 것이다. 기재에서 산굽이를 돌아서면 오림사가 있다. 목사 신윤보를 모신 사당이다.

 

강남 악부의 오림사 조항에 

부주신목사윤보자비경고령인고령군성용후예순음공은린오세손성종좀등문과관지

附註申牧使潤輔字枇卿高靈人高靈君成用後裔醇陰公隱隣五世孫成宗朝登文科官至

목사천성활광불락사진재수주퇴거도리면홍안동작자우동천상임포구조송매비유죽편

牧使天性活曠不樂仕進宰數州退居道里面鴻雁洞作字于東川上臨浦口?松梅枇柚竹扁

이오림잉자호교자손유방인칭유덕군자능득이소지풍운운

以五林仍自號敎子孫有方人稱有德君子能得二疏之風云云

 

주해를 붙인다. 신윤보 목사는 자가 비경이요, 고령인 고령군 성용의 후예 순은공 덕린의 오세손이다. 성종 조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목사에 이르렀다. 천성이 활강해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몇 고을의 원님을 지낸 뒤에 도리면 홍안동에 살며 동천가 포구에 임하여 정자를 짓고 솔, 매화, 비자, 유자, 대를 심고 오림이라 정자 이름을 걸고 그대로 자신의 호로 삼았다. 자손을 가르침에 규방이 있어 유덕 군자라고 칭찬하고 이소의 풍을 얻었다고 했다.

 

이처럼 기술하였다.

이 마을처럼 정자 이름이 마을 이름 된 경우는 흔하다. 북정이 북정지로, 남정이 남정지로, 상사의 동백정이 동백으로, 마을 이름이 된 것이다.

 

오산은 우리 말 이름이 기재, 게재다. 재는 넘어가는 고개이므로 산기슭에 있는 마을에 붙는 지명소이다. 그러면 기는 무슨 뜻일가 우리 지방은 해를 기(게)라고 한다. 민물의 참기, 바닷기 이렇게 부른다. 둑을 막기 전에는 풍덕동의 들이 뻘밭인지라 게가 넘나들던 산기슭이었다. 그래서 ‘게가 넘나드는 재’ 또는 ‘게가 드나드는 마을이란 뜻으로 ’기재‘, ’게재‘라 불었다. 그런데 하나로 표기하면서 게를 개로 인식하여 개獒(오)로 썼다. 1912년 일제가 이 마을을 한자로 적으면서 五(獒) 자로 써 버렸다. 그러니까 오산(獒山) 에서 오산(五山)으로로 바뀐 것이다.

 

소안면은 소 안에 있는 면이란 뜻 같다. 1700년대에 수천도호부성의 지도를 보면 죽두봉 아래 동천을 광탄이라 부르는 곳에 소가 그려져 있다. 전신전화국, 세무서, 진보예식장, 구교육청 일대가 소다. 그 소에서 옛날 멋을 즐기던 시인 묵객들이 화선을 띄워 풍류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 장대다리 아래를 굽어보면서 이런 물에서 어떻게 배를 띄우고 놀았을까 하는 의아심을 누구나 갖는다. 그러나 그 옛 날에는 거기가 넓은 호수이기 때문에 선유를 즐겼던 것이다. 그래서 호수 안에 있는 면이란 뜻으로 소안면이라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안(沼安)이라 적을 것이지 왜 소안(蘇安)이라 적었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지명은 한자로 표기할 때 처음 기록자가 기록하는 대로 따라 가기 마련이다. 지명은 이두 표기이므로 소리가 비슷한 글자를 빌려 쓰면 되므로 소안(沼安)으로 적건 소안(蘇安)으로 적건 상관이 없다. 굳이 한자에 매이어 소안(蘇安)을 ‘산듯하고 편안한’ 의 뜻으로 풀이할 수 있겠는가? 안 은 내의 뜻이고 소 는 광탄을 두고 이르는 말이므로 소의 안쪽에 있는 면이란 뜻으로 이해하면 무방하리라. 관할 마을이 29개이다.

 

삼거(三巨), 송학(松鶴), 와룡(臥龍), 범죽(帆竹), 장내(墻內), 청수(淸水), 매곡(梅谷), 우명(牛鳴), 북정(北亭), 석현(石峴), 조비(鳥飛), 신기(新基), 고지(古旨), 가곡(佳谷), 용당(龍堂), 죽림(竹林), 망북(望北), 업동(業洞), 조곡(稠谷), 율전(栗田), 생목(生木), 신화(新化), 덕암(德岩), 구암(九岩), 동외(東外) 동내(東內), 북내(北內), 남내(南內), 서내(西內) 등이다.

이상에 제시한 마을 이름은 1912년에 조선 총독 부령으로 발표한 행정구역 명칭 일람에서 따온 것이다.

 

출처/진인호 선생의 '지명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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