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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29권
45. 초품 중 회향(廻向)의 뜻을 풀이함
【經】 보살마하살이 조그마한 보시[少施]와 조그마한 계율[少戒]과 조그마한 인욕[少忍]과 조그마한 정진[少進]과 조그마한 선정[少禪]과 조그마한 지혜[少智]를 행하면서도 방편의 힘으로써 회향하여 한량없고 끝없는 공덕을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앞에서 이미 6바라밀을 설명했는데 여기에서 무엇 때문에 또 설명하는가?
【답】 앞에서는 전체의 모양[總相]에서 설명한 것이요 여기서는 개별적인 모양[別相]에서 설명하려 하며, 앞에서는 인연(因緣)을 말한 것이요 여기서는 과보(果報)를 말하는 것이다.
【문】 그렇지 않다. 그 안에서는 6바라밀을 설명하면서 자세하고도 완전히 갖춘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조그마한 보시, 조그마한 지혜”라고 말씀하고 계시니, 위의 6바라밀의 이치와는 동일하지 않은 듯하다.
【답】 그렇지 않다. 곧 이것이 바로 6바라밀이다. 왜냐하면 6바라밀의 이치는 마음에 있는 것이요 일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보살의 행에서는 많건 적건 간에 모두가 바라밀이다.
마치 『현겁경(現劫經)』4)에서는 8만 4천의 모든 바라밀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경에서도 역시 그렇게 설명한다. 세간의 단(壇)바라밀이 있고 출세간(出世間)의 단바라밀이 있으며 반야(般若)바라밀에서도 역시 세간과 출세간이 있다.
【문】 보살에게 무엇 때문에 조그마한 보시라 하는가?
【답】 갖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조그마한 보시를 하는 것이다. 어떤 보살은 처음에 뜻을 일으켜 복덕이 아직 쌓이지 못하고 가난하기 때문에 조그마한 보시를 하기도 하며, 어떤 보살은 “보시에는 많고 적음에는 있지 않고 그 공덕은 마음에 있다” 함을 듣고 있기 때문에 많은 물건의 보시를 하려 하지 않고 다만 좋아하는 마음만을 구하기도 한다.
어떤 보살은 생각하기를 “만일 내가 재물을 많이 쌓으려 하면 계율을 깨뜨리고 착한 마음을 잃게 되며 마음이 산란하면서 중생을 많이 괴롭히리라. 만일 중생을 괴롭히면서 부처님께 공양한다면 부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리라”한다. 곧 법을 깨뜨리면서 재물을 구하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에게 보시하되 그 사람의 것을 빼앗아 이 사람에게 준다면 평등한 법이 아니다. 보살의 법은 평등한 마음으로 일체를 모두 마치 자기의 아들처럼 여기기 때문에 조그마한 보시를 하기도 한다.
또 보살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패괴(敗壞)된 보살이고, 둘째는 성취(成就)한 보살이다.
패괴된 보살이라 함은 본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었으나 좋은 인연을 만나지 못하여 5개(蓋)에 마음이 가리어져서 행이 뒤섞이고 행이 바뀐지라 크게 부귀한 몸을 받아 혹은 국왕이 되기도 하고 혹은 큰 귀신의 왕이나 용왕 등이 되기도 한다. 본래부터 몸과 입과 뜻의 악업을 지어 청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앞이나 천상과 인간 가운데 죄 없는 곳에는 살 수가 없나니, 이런 이를 패괴된 보살이라 한다.
이러한 사람은 비록 보살의 마음은 잃었다 하더라도 전생에 지은 인연 때문에 보시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중생들을 많이 괴롭히면서 강제로 빼앗고 정의롭지 못하게 재물을 취하여 그것으로써 복을 짓는 것이다.
성취한 보살이라 함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잃지 않고 중생들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며 혹 집에 있으면서 5계(戒)를 받는 이도 있고 출가하여 계율을 받는 이도 있다.
집에 있는[在家] 보살은 비록 행한 업을 성취한다 하더라도 전생에 지은 인연이 있으므로 가난하며 “부처님의 법에는 재무의 보시(財施)와 법의 보시(法施) 두 가지 보시가 있어서 출가한 사람은 법의 보시를 많이 해야 하고 집에 있는 사람은 보시를 많이 해야 한다” 함을 듣고는 “나는 이제 전생의 인연 때문에 부잣집에 태어나지 못했구나”고 하면서, 패괴(敗壞)한 보살들이 죄를 지으면서 보시하는 것을 보고 마음으로 기뻐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많은 재물을 보시하는 것을 칭찬하지 않으신다” 함을 듣고 다만 마음이 청정한 보시만을 찬미하나니, 이 때문에 가지고 있는 물건에 따라 보시한다.
또 출가한 보살은 계율을 수호하는 까닭에 재물을 축적하지 않으며 또 스스로 계율의 공덕이 재물의 보시보다 수승함을 생각하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가진 것에 따라 보시한다.
또 보살은 부처님 법 가운데 본생(本生)의 인연을 듣고 조그마한 보시로써도 과보를 얻는 일이 많다. 마치 박구라(薄拘羅)5) 아라한 같은 이는 한 개의 하리륵 열매[訶梨勒果]6) 약을 보시하고서 91겁(劫) 동안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고 천상과 인간의 복락을 누렸으며, 몸에는 항상 병이 없었고 맨 마지막의 몸은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또 사문 이십억이(二十億耳)7) 같은 이는 비바시부처님의 법 가운데서 하나의 방사(房舍)를 만들어서 비구승에게 주고 하나의 양가죽을 펴서 스님들로 하여금 그 위를 밟게 했었다. 그 인연 때문에 91겁 동안을 발로는 땅을 밟지 않았고 인간과 천상의 한량없는 복락을 누렸으며, 맨 마지막 몸은 큰 장자(長者)의 집에 태어나서 단정하게 생긴 몸을 받았고 발바닥에는 푸른 유리(琉璃) 빛과 같은 길이 두 치[寸]가 되는 터럭이 나서 오른 쪽으로 감겼었다. 처음 태어날 적에 그의 아버지가 20억 냥의 금을 주었는데, 뒤에 세상의 5욕(欲)을 싫어하고 출가하여 도(道)를 얻었나니, 부처님은 그를 “정진하는 비구 중에서 으뜸이다”고 하셨다.
또 수만이(須蔓耳)8) 비구 같은 이는 전생에 비바시부처님의 탑을 친견하면서 귀 위에 꽂은 수만(須蔓)을 보시한 인연 때문에 91겁 동안을 항상 악도에 떨어지지 않았고 천상과 인간의 복락을 누렸으며, 마지막의 몸으로 태어날 때는 수만이 귀에 꽂혀 있으면서 그 향기가 온 방에 가득히 찼으므로 이름을 수만이(須蔓耳)라 지었다. 뒤에는 세상을 싫어하고 출가하여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보살에게는 이러한 등의 본생 인연이 있으며 적게 보시하면서도 큰 과보를 얻으므로 곧 그가 가진 것의 많고 적음에 따라 보시하는 것이다.
또 보살은 역시 일정하게 항상 적은 물건만을 보시하지 않나니, 가진 물건에 따라 많으면 많이 보시하고 적으면 적게 보시한다.
또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의 공덕이 크다 함을 찬탄하려고 “조그마한 보시로 큰 과보를 얻으며 그 공덕이 한량없다”고 말씀하신다.
【문】 박구라 아라한과 같은 이들도 역시 조그마한 보시로써도 큰 과보를 얻었는데 반야바라밀이 왜 필요한가?
【답】 박구라 등은 비록 과보를 얻었다 하더라도 겁(劫)의 수(數)와 한량이 있으므로 작은 도[小道]를 얻어서 열반에 든 것이나 보살은 반야바라밀의 방편으로 회향하기 때문에 조그마한 보시의 복덕은 한량없고 끝이 없는 아승기이다.
【문】 어떤 것이 방편으로 회향하는 것이기에 조그마한 보시로써도 한량없고 끝이 없는 공덕을 얻는 것인가?
【답】 비록 조그마한 보시라 하더라도 모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회향하면서 보살은 생각하기를 “나는 이 복덕의 인연으로써 인간과 천상의 왕이나 세간의 즐거움을 구하지 않고 다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만을 구하리라”고 하나니, 마치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한량없고 끝이 없는 것처럼 이 복덕도 역시 한량없고 끝이 없다.
또 이 복덕은 큰 자비[大慈悲]에 작용하나니, 큰 자비가 한량없고 끝이 없기 때문에 이 복덕도 역시 한량없고 끝이 없다.
또 보살의 복덕은 모든 법의 실상(實相)과 화합하기 때문에 세 갈래가 청정하다. 곧 받는 이와 주는 이와 재물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반야바라밀에 대하여 처음에 사리불에게 “보살은 보시를 할 때 주는 이와 받는 이와 재물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두루 갖춘다”고 말한 것과 같나니, 이 실상의 지혜로서 보시하기 때문에 한량없고 끝이 없는 복덕을 얻는 것이다.
또 보살은 모두가 “존재하는 모든 복덕은 여여의 모양[如相]이요 법성의 모양[法性相]이며 실제의 모양[實際相]이다”라고 염(念)하기 때문이니, 여와 법성과 실제가 한량없고 끝이 없기 때문에 이 복덕도 역시 한량없고 끝이 없다.
【문】 만일 보살마하살이 모든 법의 실상을 관찰하면서 여이고 법성이며 실제인 줄 알면 그것은 무위(無爲)의 소멸된 모양인데 어떻게 다시 마음을 내어서 복덕을 짓는다는 것인가?
【답】 보살은 오래전부터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익혔다. 그 때문에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그때마다 일으켜서 “중생은 이 모든 법의 실상을 모르므로 마땅히 이 실상을 얻게 해야 한다”고 하며, 정진바라밀의 힘으로써 복덕의 업의 인연을 도로 행하고 정진바라밀로써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돕는다. 비유하건대 마치 불이 꺼지려 할 때 바람과 섶을 만나면 불이 더욱 훨훨 타는 것과 같다.
또 본래의 서원을 생각하기 때문에 역시 시방의 부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시되 “너는 처음 발심한 때를 생각하라. 또 너는 비로소 이 하나의 법문을 얻었지만 그러한 한량없는 법문이 있는데도 너는 아직 모두 얻지 못했으니, 도로 모든 공덕을 쌓아야 하느니라”고 하나니, 마치 『참비경(慚備經)』9)의 7지(地) 가운데 설명하는 것과 같다.
【문】 보시의 많고 적음은 그렇다 할 수 있겠다. 계율 가운데도 5계(戒)와 일일계(日日戒)와 10계 등의 적고 많음이 있으므로 역시 알 수 있나니, 색법(色法)으로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나머지 네 가지 바라밀은 어떻게 그 많고 적음을 알 수 있겠는가?
【답】 그것도 다 알 수 있다. 마치 인욕에도 두 가지가 있는 것과 같다. 첫째는 몸의 인욕(身忍)이고, 둘째는 마음의 인욕(心忍)인데, 몸의 인욕이라 함은 비록 몸과 입은 동요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없는 조그마한 인욕이기 때문에 마음은 제어할 수가 없다. 마음의 인욕이라 함은 몸과 마음이 다 함께 인욕하는 것이니, 마치 말라 죽은 나무와 같다.
또 조그마한 인욕[少忍]이라 함은 설령 사람이 때리고 욕을 해도 보복하지 않는 것이요 큰 인욕[大忍]이라 함은 욕한 이나 인욕하는 이나 인욕하는 법조차 분별하지 않는 것이다.
또 중생 안에서의 인욕은 바로 조그마한 인욕이요 법(法)에서의 인욕은 바로 큰 인욕이니, 이러한 등으로 조그마한 인욕을 분별하는 것이다.
조그마한 정진[少進]에도 두 가지가 있나니, 몸의 정진[身進]과 마음의 정진[心進]이다. 몸의 정진은 조그만 것이 되고 마음의 정진은 큰 것이 되며, 바깥의 정진은 조그만 것이 되고 안의 정진은 큰 것이 되며, 몸과 입의 정진은 조그만 것이 되고 뜻의 정진은 큰 것이 된다. 부처님께서 “의업(意業)의 큰 힘 때문에 마치 큰 선인(仙人)이 성을 내면서 큰 나라를 없어지게 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 몸과 입으로 5역죄(逆罪)를 지으면 그 큰 과보로 1겁 동안 아비지옥[阿鼻泥犁] 속에 있게 되며, 의업의 힘은 크므로 비유상비무상천(非有想非無想天)에 태어나서 8만 대겁(大劫)을 살게 된다. 또한 시방의 부처님 국토에 있으면서 수명이 한량없나니, 그러므로 몸과 입의 정진은 조그만 것이 되고 뜻의 정진은 큰 것이 되는 줄 알 수 있다.
또 경의 말씀과 같아서, 만일 신업ㆍ구업ㆍ의업이 고요히 사라져서 동요하지 않으면 이것은 큰 정진이요 동요하면 조그마한 정진이다. 이와 같은 것들을 조그마한 정진이라 한다.
조그만 선정[少禪]이라 함은 욕계의 정[欲界定]과 미도지(未到地)이니, 욕망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에 조그마하다고 한다. 또한 2선(禪)에서 보면 초선(初禪)은 곧 조그만 하고 이렇게 하여 멸진정(滅盡定)까지에 이른다. 유루(有漏)는 조그만 것이 되고 무루(無漏)는 큰 것이 되며, 아직 아비발치(阿鞞跋致)를 얻지 못하고 아직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지 못한 선정이면 조그만 것이 되고 아비발치를 얻었으며 무생법인을 얻은 선정이면 큰 것이 되나니, 이렇게 하여 도량에 앉는 데까지 이른다. 그리고 16해탈과 상응하는 선정이면 조그만 것이 되고 17금강삼매(金剛三昧)이면 큰 것이 된다.
또 만일 보살이 온갖 법을 관찰하여 항상 안정하면서 산란함이 없으면 의지하는 데도 없고 분별도 없나니, 이것은 큰 것이 되고 그 나머지 모든 것은 다 조그만 것이 된다.
지혜[慧]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세간(世間)이고 둘째는 출세간(出世間)이다. 세간의 지혜는 조그만 것이 되고, 출세간의 지혜는 큰 것이 된다.
그리고 청정한 지혜(淨慧)와 뒤섞인 지혜[雜慧], 모양 있는 지혜[相慧]와 모양 없는 지혜[無相慧], 분별하는 지혜[分別慧]와 분별하지 않는 지혜[不分別慧], 법을 수순하는 지혜[隨法慧]와 법을 파괴하는 지혜[破法慧], 생사를 위하는 지혜[爲生死慧]와 열반을 위하는 지혜[爲涅槃慧], 자기 이익을 위하는 지혜[爲自益慧]와 온갖 중생을 위하는 지혜[爲一切衆生慧] 등도 역시 그와 같다.
또 들어서 얻는 지혜[聞慧]는 조그만 것이 되고 생각하여 얻는 지혜[思慧]는 큰 것이 되며, 생각하여 얻는 지혜는 조그만 것이 되고 수행하여 얻는 지혜[修慧]는 큰 것이 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는 지혜는 조그만 것이 되고 6바라밀[六度]을 수행하는 지혜는 큰 것이 되며, 수행하여 얻는 지혜[修慧]는 조그만 것이 되고 방편의 지혜[方便慧]는 큰 것이 된다. 그리고 모든 지위[地]의 방편에는 차츰차츰 크고 작은 것이 있으니, 이렇게 하여 10지(地)까지 이른다. 이와 같은 등으로 많고 적음을 분별한다.
부처님은 보살이 기특하게도 작은 일들 가운데서 얻는 한량없고 끝이 없는 공덕조차도 찬탄하셨는데 하물며 큰 일이겠는가. 그 밖의 사람들은 재산을 많이 버리고 몸과 입과 뜻으로 애쓰고 고생하면서도 얻는 복은 적나니, 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 등에서도 역시 그와 같다.
적으면서도 과보는 크게 얻는 보살에게는 미칠 수 없다 함은 먼저 설명한 것과 같나니, 비유하건대 마치 입의 기운으로 내는 소리는 그 소리가 멀리 들리지 못하지만 소리를 뿔피리 속에 넣어서 불면 그 소리가 멀리 들리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보시 등의 인(因)이 적을 때 다른 사람들이 행하여 얻는 복의 과보는 적지만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으로 회향하기 때문에 한량없고 그지없는 복을 얻는다. 이 때문에 “조그마한 보시와 조그마한 계율과 조그마한 인욕과 조그마한 정진과 조그마한 선정과 조그마한 지혜를 행하면서도 한량없고 끝이 없는 공덕을 얻고자 하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經】 보살마하살이 단(檀)바라밀ㆍ시라(尸羅)바라밀ㆍ찬제(羼提)바라밀ㆍ비리야(毘梨耶)바라밀ㆍ선(禪)바라밀을 행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모든 바라밀에 대한 뜻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문】 다섯 가지 바라밀의 모양 그것이 곧 반야바라밀의 모양인가? 만일 그것이 반야바라밀의 모양이라면 다섯 가지 이름으로 서로 다르게 말하지 않아야 하며, 만일 다르다면 무엇 때문에 “단바라밀을 행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는가?
【답】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다르다 함은 반야바라밀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관찰하기 때문에 온갖 법을 받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단(檀)은 안팎의 온갖 가진 물건들을 버리되 반야바라밀의 마음으로써 보시를 행한다는 것이니, 이때에 단은 바라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또 다섯 가지의 바라밀은 모든 공덕을 심고 반야바라밀은 그 집착하는 마음과 삿된 소견을 없애는 것이니, 마치 한 사람은 곡식을 심고 다른 한 사람은 김을 매어 열매를 더욱 자랄 수 있게 하는 것과 같다. 그 밖의 네 가지 바라밀을 성취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문】 지금 어찌하여 “단바라밀을 행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는가?
【답】 단(檀)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청정한 것[淨]이고, 둘째는 정정하지 않은 것[不淨]이다.
정정하지 않은 보시라 함은, 교만 때문에 보시하면서 생각하기를 “못난이들조차도 오히려 보시하고 있는데 내가 어찌 하지 않겠는가”라며 하는 것이고, 질투 때문에 보시하면서 생각하기를 “나의 원수가 보시 때문에 이름을 얻어서 나보다 더 훌륭하게 되었으니, 이제 널리 보시해서 반드시 그보다 더 훌륭하게 되어야겠다”고 하는 것이다.
또 과보를 탐내며 보시하면서 생각하기를 “내가 적은 물건을 보시해도 그 천만 배의 과보를 받게 되니 보시해야겠다”고 하는 것이고, 명예 때문에 보시하면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보시하기를 좋아하면 사람들의 신임을 받을 것이다”고 하는 것이며, 좋은 사람들 속에서 그 사람들을 포섭하기 위하여 보시하면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보시하게 되면 그 사람들은 반드시 나에게 돌아올 것이다”고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갖가지 뒤섞인 번뇌로 보시를 행하면 이것을 청정하지 않은 보시라 한다.
청정한 보시라 함은 이런 여러 가지의 일들이 없고 다만 청정한 마음으로써 인연과 과보를 믿고 받는 이를 공경하고 가엾이 여기며 지금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면서 다만 뒷세상의 공덕만을 위할 뿐이다.
다시 청정한 보시가 있나니, 뒷세상의 이익도 구하지 않고 다만 마음만을 닦음으로써 열반을 돕고 구할 뿐이다.
다시 청정한 보시가 있나니,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어서 중생들을 위하는 까닭에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열반을 얻지 않으며 다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만을 위할 뿐이니, 이것을 청정한 보시라 한다.
반야바라밀의 마음으로써 이와 같이 청정한 보시를 하나니, 이 때문에 “단바라밀을 행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반야바라밀의 힘 때문에 모든 법에 대하여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는데 하물며 나라는 마음이 있으면서 버리지 않겠는가. 나라는 마음을 버리기 때문에 자기의 몸과 처자 보기를 마치 풀과 흙처럼 하면서 그리워하거나 아낌이 없이 모조리 보시하나니, 이 때문에 단바라밀을 행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밖의 다른 바라밀도 그와 같나니, 반야바라밀의 마음으로써 돕고 이루게 하기 때문이다.
또 그 밖의 다른 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을 얻지 못하면 바라밀이라는 이름조차도 얻지 못하고 또한 견고하지도 않나니, 마치 후품(後品) 중에서 “다섯 가지의 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을 얻지 못하면 바라밀이라는 이름조차도 없다”고 설명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전륜성왕에게 윤보(輪寶)가 없으면 전륜성왕이라고 이름하지 못하는 것과 같나니, 그 밖의 다른 보배로써는 그런 이름을 붙이지 못한다. 또 마치 소경들의 무리에 길잡이가 없으면 목적지에 이를 수도 없는 것처럼 반야바라밀도 역시 그와 같아서 다섯 가지 바라밀을 인도하면서 살바야(薩婆若)10)에 이르게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큰 군대에 용감한 장수가 없으면 그 일을 성취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또 사람의 몸에 다른 감관이 비록 모두 완전하다 하더라도 만일 눈이 없으면 목적한 곳에 이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사람이 생명[生根]이 없으면 다른 감관이 모두 다 소멸되지만 생명이 있기 때문에 다른 감관이 작용하는 것처럼 반야바라밀도 역시 그와 같아서 다섯 가지 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을 얻지 못하면 더욱 자랄 수 없고 반야바라밀을 얻기 때문에 그 밖의 바라밀도 자라서 구족하게 된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단바라밀을 행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經】 보살마하살이 세상마다 몸이 부처님과 같고자 하거나 32상(相)과 80수형호(隋刑好)11)를 구족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성문의 가르침[聲聞經]에서는 말하기를 “보살은 3아승기겁을 지나고 그 뒤 백 겁 동안에 32상의 인연을 심는다”고 했는데 이제 어찌하여 “세상마다 부처님의 몸과 같고 32상과 80수형호가 있다”고 말씀하는가?
【답】 가전연자(迦栴延子)의 아비담비바사(阿毘曇鞞婆娑)12)에서 이러한 설명이 있으나 3장(藏) 속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다. 왜냐하면 32상은 그 밖의 다른 사람에게도 또한 있으니 어찌 족히 귀하다 하겠는가?
마치 난타(難陀) 같은 이는 전생에 한 번 대중 스님네들을 목욕시키고 그로 인해 서원하기를 “저로 하여금 세상마다 단정하게 생기고 정결하게 하소서”라고 했으며, 다시 다른 세상에 벽지불의 탑을 만나서 채화(彩畵)로써 장식하고 벽지불의 상(像)을 장엄하고서 서원을 세우기를 “저로 하여금 세상마다 빛과 몸매(色相)로 몸을 장엄하게 하옵소서”라고 했다. 이런 인연 때문에 세상마다 몸매의 장엄함을 얻었고 맨 나중의 몸은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는데, 대중 스님들은 멀리서 그를 보면 그가 부처님인 줄 오인하여 모두 다 일어나서 맞이하곤 했다.
난타는 소승(小乘)이면서 조그마한 공덕을 심었었는데도 오히려 이런 과보를 얻었는데 하물며 보살은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에 공덕을 닦고 세웠으니 세상마다 그 형체가 부처님과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또 마치 미륵보살 같은 이는 속인으로 있을 때 발바리(跋婆犁)13)라는 스승을 섬겼는데 그도 첫째, 눈썹 사이의 흰 터럭 몸매[眉間白毛相]와 둘째, 혀로 얼굴을 덮는 몸매[舌覆面相]와 셋째, 성기가 감추어진 몸매[陰藏相]의 세 가지 몸매가 있었나니, 이와 같이 그는 보살이 아닌데도 역시 모든 몸매가 있었는데 보살이 어찌 3아승기겁 후에야 상호(相好)를 심어야 하겠는가.
또 이 마하연(摩訶衍) 중에서는 어떤 보살은 처음 발심해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 처음부터 나쁜 마음을 내지 않고 세상마다 과보로 5신통을 얻었으며 몸은 부처님과 비슷했다.
【문】 보살은 아직 부처님의 도를 얻지 못했는데 어찌하여 몸의 상호가 부처님과 같을 수 있겠는가?
【답】 보살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혹은 전륜성왕의 몸이 되기도 하고 혹은 제석(帝釋)의 몸이 되기도 하며 혹은 범왕(梵王)의 몸이 되기도 하고 혹은 성문의 몸, 벽지불의 몸, 보살의 몸, 부처님의 몸이 되기도 한다.
마치 『수릉엄경(首㘄嚴經)』에서처럼 문수사리(文殊師利)는 스스로 말하기를 “72억 번을 하나의 연각(緣覺)이 되어서 열반에 들었으며, 또 명호가 용종존(龍種尊)이라는 부처님이 되어 나타냈을 때에는 세상에 아직 부처님이 계시지 않았으므로 중생들은 부처님의 몸을 보고 기뻐하면서 교화를 받았다”고 했다.
【문】 보살이 만일 부처님의 몸이 되어서 설법하며 중생을 제도한다면 부처님과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보살에게는 큰 신력(神力)이 있고 10주(住)의 지위에 머무르며 부처님의 법을 두루 갖추면서 세간에 머무르고 널리 중생들을 제도하기 때문에 열반을 취하지도 않으며 마치 환술사와 같이 스스로 몸을 변화하여 사람들에게 설법을 하나 참 부처님의 몸은 아니다. 비록 그렇게 중생들을 제도하고 해탈시킬지라도 수량이 있고 한계가 있지만 부처님께서 제도하신 이들은 수량이 없고 한계가 없다.
보살은 비록 부처님의 몸이 되었다 하더라도 시방세계에 두루 찰 수는 없지만 부처님의 몸은 한량없는 세계에 두루 가득 차며, 제도해야 할 이가 있으면 남김없이 부처님의 몸을 나타내고 또한 14일 밤의 달이 비록 광명이 있다 하더라도 보름달보다 못한 것과 같나니, 이러한 차별이 있다.
혹 어떤 보살은 무생법인(無生法忍)과 법성생신(法性生身)을 얻고 7주지(住地)에 있으면서 5신통에 머물러 몸을 부처님처럼 변화하여 중생을 교화하기도 하며, 혹은 처음에 뜻을 낸 어떤 보살은 6바라밀을 행한 행업(行業)의 인연으로 몸의 상호를 부처님처럼 얻어서 중생을 교화하기도 한다.
【문】 32상은 보시 등의 과보이지만 반야바라밀은 아무것도 없어서 마치 허공과 같은데 어떻게 “상호를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는가?
【답】 32상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완전히 갖추어져서 부처님과 같은 것이고, 둘째는 완전히 갖추지 못한 전륜성왕과 난타(難陀) 같은 것이다. 반야바라밀은 보시와 화합하기 때문에 상호를 완전히 갖출 수 있어서 부처님과 같게 되지만 그 밖에 단지 보시만을 행하는 사람은 상호가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는다.
【문】 어떻게 보시 등으로 32상을 얻게 되는가?
【답】 마치 단월(檀越)이 보시할 때에 받는 이는 빛깔과 힘 등의 다섯 가지 일을 얻어서 몸을 이익되게 하며, 그 때문에 보시한 이는 손발에 수레바퀴 몸매[輪相]을 얻는 것과 같나니, 단바라밀(檀波羅蜜) 중에서의 자세한 설명과 같다. 지계(持戒)와 인욕 등도 역시 그와 같아서 각각 32상을 갖추게 된다.
어떤 것이 32상이냐 하면, 첫째는 발바닥이 평평한 몸매[足下安立相]이며, 그 밖의 나머지는 찬보살품(讚菩薩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문】 어떠한 인연으로 발바닥이 평평한 몸매를 얻게 되는가?
【답】 부처님은 세상마다 한마음으로 견고하게 계율을 지녔고 또한 다른 이로 하여금 계율을 깨뜨리지 않게 한 이런 업의 인연[業因緣] 때문에 이러한 첫 번째의 몸매를 얻으신 것이니, 첫 번째 몸매의 것은 스스로 법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이가 없다.
만일 전륜성왕이라면 자신의 국토에 침략할 수 있는 이가 없으며, 백성과 출가한 사문 등을 법대로 기르고 보호하는 이러한 업의 인연 때문에 천의 수레바퀴살의 몸매[千輻輪相]를 얻는다. 이것은 법륜을 굴리는[轉法輪] 첫 번째의 몸매이니, 전륜성왕이라면 윤보(輪寶)를 굴리게 된다.
살생(殺生)을 여의는 업의 인연 때문에 손가락이 긴 몸매[長指相]를 얻고, 도둑질[不與取]을 여의는 업의 인연 때문에 발꿈치가 원만한 몸매[足跟滿相)를 얻으며, 4섭(攝)의 법으로써 중생을 거두어 주는 업의 인연 때문에 손발에 무늬 없는 그물의 몸매[牛縵足網相]를 얻는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의복과 음식과 침구를 어른에게 공양한 업의 인연 때문에 손발이 매우 보드라운 몸매[手足柔軟相]를 얻고, 복을 닦으면서 점차로 더하는 업의 인연 때문에 발등이 높은 몸매[足趺高相]ㆍ낱낱의 구멍마다 하나의 털이 나오는 몸매[一一孔一毛生]ㆍ털이 위로 쏠려 나는 몸매[毛上向相]를 얻으며, 법답게 복을 위해 화합하는 인연과 빠르게 사람들을 가르쳐 주기 때문에 묘하고 예쁜 장딴지의 몸매[妙腨相]를 얻나니, 마치 이니연(伊泥衍) 사슴의 장딴지와 같다.
법대로 청정한 물건을 보시하면서 받는 이를 괴롭히지 않기 때문에 팔을 펴면 손이 무릎까지 내려가는 몸매[平立牛過膝相]와 방정한 몸의 몸매[方身相]를 얻나니, 마치 니구로다나무[尼拘盧陀樹]와 같다. 부끄러워함[慚愧]을 많이 닦고 삿된 음행을 끓으며 방사와 의복과 덮개 등의 물건을 보시하기 때문에 성기가 드러나지 않는 몸매[陰藏相]를 얻나니, 마치 말의 근과 같다.
자삼매(慈三昧)를 닦아서 믿음과 청정한 마음이 많으면서 좋은 빛깔의 음식과 의복과 침구를 보시하기 때문에 황금빛의 몸매[金色相]와 큰 광명이 솟는 몸매[大光相]를 얻고, 항상 좋게 이치를 묻고 높은 이와 착한 이에게 물건을 공급하기 때문에 살결이 부드럽고 매끄러운 몸매[肌皮細軟相]를 얻는다.
법답게 일을 결단하고 자기만이 고집하지 않으며 남에게 위임하여 정사를 다스리기 때문에 윗몸이 사자와 같은 몸매[上身如師子相]ㆍ겨드랑이 아래가 원만한 몸매[腋下滿相]ㆍ어깨가 둥글면서 두둑한 몸매[肩圓相]를 얻고, 어른을 공경하여 영접하고 시봉하고 전송하기 때문에 몸이 곧고 넓은 몸매[身體直廣相]를 얻으며, 보시가 구족하고 충만하기 때문에 일곱 군데가 원만한 몸매[七處滿相]를 얻는다.
온갖 것을 보시하면서 인색함이 없기 때문에 네모진 뺨의 몸매[方顂車相]를 얻고, 이간질하는 말을 여의기 때문에 이가 마흔 개가 되는 몸매[四十齒相]ㆍ이가 가지런한 몸매[齒齊相]ㆍ이가 촘촘한 몸매[齒密相]를 얻으며, 항상 자비를 수행하고 잘 생각하기 때문에 흰 어금니가 비유할 데 없는 흰 몸매[白牙無喩相]를 얻고, 거짓말을 여의기 때문에 혀가 넓고 얇은 몸매[舌廣薄相]를 얻으며, 맛있는 음식을 보시하면서 받는 이를 괴롭히지 않기 때문에 맛 중에서도 가장 으뜸가는 미감을 가진 몸매[味中最上味相]를 얻는다.
나쁜 말을 여의기 때문에 맑은 목소리의 몸매[梵音相)를 얻고, 착한 마음과 좋은 눈으로 중생을 보기 때문에 눈동자가 검푸른 몸매[眼睫紺靑相]ㆍ속눈썹이 소의 것과 같은 몸매[眼睫如牛王相]를 얻으며, 높은 이를 예배 공경하고 스스로 계율을 지니면서 계율로써 남을 가르치기 때문에 살이 상투 모양으로 된 몸매[肉髻相]를 얻고, 찬탄해야 할 이를 찬탄하기 때문에 눈썹 사이에 흰 털이 나는 몸매[眉間白毫相]를 얻게 되나니, 이것이 성문의 법에서 쓰는 32상의 업의 인연이다.
마하연(摩訶衍) 가운데 32상의 업의 인연이란,
【문】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3세(世)의 모든 법은 모두가 모양이 없는[無相] 것인데 이제 무엇 때문에 32상을 말씀하는가? 하나의 모양[相]조차도 오히려 진실하지 않은데 하물며 서른두 가지이겠는가?
【답】 부처님의 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세제(世諦)이고, 둘째는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다. 세제 때문에 32상을 말하고 제일의제 때문에 모양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두 가지의 도가 있다. 첫째는 중생으로 하여금 복을 닦게 하는 도[福道]이고, 둘째는 지혜를 닦는 도[慧道]이다. 복을 닦는 도 때문에 32상을 말하고 지혜를 닦는 도 때문에 모양이 없음을 말하며 육신(肉身)을 위하여 32상을 말하고 법신(法身)을 위하여 모양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몸은 32상과 80수형호(隨形好)로써 스스로 법신을 장엄하고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4무애지(無礙智)와 18불공법(不共法)의 모든 공덕으로써 중생을 장엄한다.
또 두 가지의 인연이 있다. 첫째는 복덕의 인연 [福德因緣]이고, 둘째는 지혜의 인연[智慧因緣]이다. 복덕의 인연으로써 중생을 인도하려 하기 때문에 32상의 몸을 이용하고, 지혜의 인연으로써 중생을 인도하려 하기 때문에 법신을 이용한다.
또 두 가지의 중생이 있다. 첫째는 모든 법에 붙인 이름[假名]을 아는 자이고, 둘째는 이름에 집착하는 자이다. 이름에 집착하는 중생을 위하여 모양이 없다 함을 말하고, 모든 법에 붙인 이름을 아는 중생을 위하여 32상을 말하는 것이다.
【문】 이 10력과 4 무소외의 공덕도 역시 각각 개별적인 모양[別相]이 있는데 어찌하여 법신은 모양이 없다고 말하는가?
【답】 온갖 무루의 법[無漏法]은 16행(行)과 3삼매(三昧)와 상응하기 때문에 모든 모양이 없다고 한다. 부처님은 중생들로 하여금 이해하게 하려고 갖가지로 분별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법은 공하고 모양이 없고 지음 없는[無作] 도장[印]이기 때문에 모두가 여(如)와 법성(法性)과 실제(實際)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시면서도 빛깔을 보고 기뻐하면서 도의 마음[道心]을 내는 이를 위하여 32상으로 장엄한 몸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또 온갖 중생 가운데서 가장 뛰어남을 드러내기 위하여 32상의 몸을 나타내시며 그러면서도 모양이 없는 법을 파괴하지 않으신다.
마치 보살이 처음 태어나신 지 7일째 되던 날, 흰 모전으로 싸서 여러 관상가에게 보이자 관상가들은 옛 성인의 상서(相書)로써 점을 치며 왕에게 대답하기를 “우리의 참기법(讖記法)에 만일 사람으로서 32상이 있는 이가 집에 있으면 당연히 전륜성왕이 되고 출가하면 당연히 부처님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오직 이 두 가지의 길뿐으로, 세 가지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고 했다.
모든 관상가들이 나간 뒤에 보살은 잠이 드셨는데 다시 아사타(阿私陀)라는 선인(仙人)이 정반왕(淨飯王)에게로 와서 아뢰기를 “나는 천이(天耳)로써 모든 하늘과 귀신들이 ‘정반왕께서 낳으신 아들은 부처님 몸이 될 상(相)을 지녔다’고 하는 말을 듣고 일부러 왔으니, 좀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왕은 몹시 기뻐하면서 “이 사람은 선성(仙聖)이신데 일부러 멀리서 와서 나의 아들을 보고자 하는구나”고 하고, 모든 시중들에게 “태자를 데리고 나오라”고 명했다. 그러자 시중드는 사람이 왕에게 대답하기를 “태자께서는 잠시 잠이 드셨습니다”고 했다.
이때 아사타가 말하기를 “성왕(聖王)께서는 항상 온갖 중생을 청하여 감로(甘露)를 베푸시므로 잠을 주무시지 않습니다”고 하면서 곧 자리에서 일어나서 태자에게로 가서 팔로 안고는 위아래의 상을 보았다. 상을 다 보고 나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어찌 할 바를 몰라했으므로 왕은 썩 기뻐하지 않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어서 그렇게 우십니까?”
그러자 선인이 대답했다.
“가령 하늘에서 금강산(金剛山)같은 큰 산이 쏟아져 내려도 그 한 터럭조차도 움직이지 못할 것인데 어찌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겠습니까. 태자는 반드시 부처님이 되시겠습니다. 나는 이제 나이가 이미 늙어서 장차 무색계(無色界)의 천상에 태어날 것이므로 부처님을 뵈올 수도 없게 되었고 그 법을 못 듣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스스로 슬퍼할 뿐입니다.”
왕은 말했다.
“관상가들은 한 가지 일을 일정하지 않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집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요 집을 떠나면 부처님이 될 것이라고 하니 말씀입니다.”
그러자 아사타는 말했다.
“여러 관상가들은 세속의 것으로써 견주어서 아는 것이요 천안(天眼)이 아닙니다. 모든 성인들의 상서(相書)를 아는 것도 두루 다 알지 못하므로 상을 보면서도 건성으로 보며 분명하게 살피지는 못합니다. 이 때문에 혹은 ‘집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요 집을 떠나면 부처님이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태자의 32상은 바르고 원만하고 밝고 사무쳐서 심히 깊고 정결함이 온전하시므로 반드시 부처님이 되실 것이요 전륜성왕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32상은 온갖 중생들 가운데서 가장 빼어나신 줄 알 것이다.
모양이 없는 법[無相法]을 말하는 것은 항상하고[常], 깨끗하고[淨], 즐겁고[樂], 나[我]이고, 남자[男]이고, 여자[女]이고, 나고 죽음[生死]이라는 등의 모양을 깨뜨리기 위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의 법에서 비록 모양이 없는 모양을 말한다 하더라도 32상을 나타내는 것은 중생을 인도하면서 부처님이 제일임을 알게 하고 깨끗한 마음을 내게 하기 위한 때문이다. 32상을 말한다 해도 허물이 없다.
【문】 무엇 때문에 32상만을 말할 뿐 더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는가?
【답】 만일 더 많게 말하거나 더 적게 말하게 되면 다 같이 힐난이 있게 될 것이다.
또 부처님의 키는 한 길 여섯 자[丈六]인데 만일 더 적은 몸매로 말하게 되면 두루하지도 않고 장엄을 갖추지도 못할 것이요 만일 32상을 더 넘게 된다면 다시 어지럽게 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몸을 장엄하는 꾸미개는 비록 풍부하게 구슬들이 있다 하더라도 영락(瓔珞)에다 겹쳐서 달 수는 없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32상은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으며 마침 그 중간을 얻은 것이다.
또 만일 적어서 단정 엄숙하지 못하다 한다면 80수형호가 있다. 이보다 더 지나치다면 어지럽기만 하다.
【문】 만일 80수형호가 꼭 필요한 것이라면 어찌하여 상(相)이라고 이름붙이지 않고 따로 호(好)라고 하는가?
【답】 상은 크게 몸을 장엄하는 것이므로 만일 큰 것을 말하게 되면 벌써 작은 것은 포섭되어 있다.
또 상은 거친 것이고 호는 세밀한 것이므로 중생이 부처님을 뵙게 되면 그 상은 볼 수 있지만 호는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 상은 그 밖의 사람들도 공통하게 얻는 것이지만 호는 혹 공통하게 얻기도 하고 혹 공통하게 얻지 못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상(相)과 호(好)를 따로 따로 설명하게 된다.
【문】 부처님은 마침내 중생이라는 모양[衆生相]과 나라는 모양[吾我相]을 끊고 공한 법의 모양[空法相]을 두루 갖추셨는데 무엇 때문에 몸매[相]로써 장엄하는 것인가? 마치 모양을 취하는 이의 법과 같다.
【답】 만일 부처님께서 다만 묘한 법으로써만 장엄하고 상호가 없으시다면 혹 어떤 제도되어야 할 중생이 경솔하고 오만한 마음을 내면서 “부처님은 몸매도 갖추지 못하셨으므로 부처님 법을 일심으로 즐거이 들을 수조차 없구나”라고 할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깨끗하지 못한 그릇에 맛있는 음식이 담겨 있으면 그것을 먹는 사람이 기뻐하지 않는 것과 같고 또 마치 악취가 나는 가죽 주머니에 모든 보물을 담아 놓으면 그것을 취하는 이가 좋아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32상으로써 그 몸을 장엄하신 것이다.
또 부처님은 항상 대중 가운데서 사자처럼 외치시면서 “나는 중생들 가운데서 온갖 공덕이 가장 으뜸이다”라고 하신다. 만일 부처님의 육신에 상호로써 장엄하지 않았다면 혹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몸의 형상도 누추한데 무엇을 알겠는가”고 하기도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32상과 80수형호로써 그 몸을 장엄하고 계신데도 중생은 오히려 믿지 않는 이가 있는데 하물며 상호로써 장엄하지 않는 몸이겠는가.
또 부처님 법은 심히 깊어서 항상 고요히 사라진 모양[寂滅相]이기 때문에 미치고 어리석은 중생들은 믿지도 않고 받지도 않으면서 “몸이 사라져 다했으므로 하나도 취할 것이 없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넓고 긴 혀[廣長舌]와 맑은 음성[梵音聲]과 몸에서 솟아나는 큰 광명으로써 갖가지 인연과 비유를 들면서 으뜸가는 묘한 법을 말씀하신 것이니, 중생들은 부처님의 몸매와 거룩한 덕을 보고 또 그 음성을 듣고는 모두가 기뻐하면서 믿고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또 장엄하는 물건에는 안과 바깥이 있다. 선정과 지혜와 모든 공덕 등은 바로 안의 장엄이고, 몸의 몸매와 거룩한 덕과 계율을 구족하게 지니는 것 등은 바로 바깥의 장엄이니, 부처님은 안팎으로 다 두루 갖추셨다.
또 부처님은 온갖 중생들을 가엾이 여겨 세간에 출현하시어 지혜 등의 모든 공덕으로써는 근기가 영리한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몸매의 장엄으로써는 근기가 둔한 중생을 이익되게 하며, 마음의 장엄으로써는 열반의 문을 열고 몸의 장엄으로써는 인간ㆍ천상의 복락의 문을 연다.
몸의 장엄 때문에 중생을 3복(福)의 처소에 놓아두고, 마음의 장엄 때문에 중생을 3해탈(解脫)의 문에 들게 하며, 몸의 장엄 때문에 중생을 3악도(惡道)에서 건지고 마음의 장엄 때문에 중생을 삼계(三界)의 감옥에서 구제하나니, 이와 같은 등의 한량없는 이익의 인연 때문에 상호로써 육신을 장엄하신다.
【經】 보살의 집에 태어나려 하고 구마라가지(鳩摩羅伽地)14)를 얻고자 하며,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보살의 집[菩薩家]이라 함은 만일 중생들에 대하여 심히 깊은 대비(大悲)의 마음을 일으키면 이것이 바로 보살의 집에 태어난 것이다. 마치 왕가(王家)에 태어나면 감히 업신여기는 이가 없고 또한 배고프고 목마르고 춥고 덥고 하는 일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살이 도(道)에 들어가 보살의 집에 태어나는 것도 역시 그와 같아서 부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모든 하늘과 용과 귀신과 모든 성인들이 감히 업신여기는 이가 없고 더욱더 공경하게 되며, 또한 악도와 인간ㆍ천상의 천한 곳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성문이나 벽지불이나 외도의 논사(論師)가 와서 그의 마음을 꺾으려 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 보살은 처음에 뜻을 일으키면서 일심으로 원을 세우기를 “오늘부터 다시는 모든 나쁜 마음을 따르지 않고 다만 온갖 중생만을 제도하겠으며,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리라”고 한다.
또 보살은 만일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음을 알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으므로 이로부터 이후에는 항상 보살의 도에 머무르게 된다. 마치 앞에서 설명한 『지심경(持心經)』의 말씀과 같나니, “나는 정광부처님[錠光佛]을 뵈었을 때에 모든 법의 무생인을 얻고 처음에 6바라밀을 두루 갖추었나니, 그 이전에는 도무지 보시나 지계 등이 없었다”고 하셨다.
또 가령 보살들이 생각하기를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겁(劫)을 하루 낮과 하룻밤으로 치고 이 낮과 밤의 30일을 한 달로 치고 이 열 두 달을 1년으로 쳐서 이와 같은 연수(年數)가 백천만억 겁을 지내야 비로소 한 부처님이 계시는데, 이 부처님 처소에서 공양하고 계율을 지니고 모든 공덕을 쌓되 이렇게 하기를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을 모신 연후에야 수기(授記)를 받고 부처가 되리라”고 한다면, 보살의 마음은 게을러지지도 않고 침몰하지도 않고 싫증내지도 않으면서 모두 다 즐거이 수행하게 된다.
또 보살은 모든 사정취(邪定聚)와 5역(逆)의 중생과 선근(善根)을 끊은 사람들에 대하여 자비심을 내어 바른 도에 들게 하되 그 은혜의 보답을 구하지도 않는다.
또 보살은 처음 발심해서부터 모든 번뇌에 가리어지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는다.
또 보살은 비록 모든 법의 실상을 관한다 하더라도 모든 관하는 마음에 대하여 역시 집착을 내지 않는다.
또 보살은 저절로 입에서는 언제나 진실한 말을 하며 꿈속에서조차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또 보살은 보게 되는 빛이 있으면 모두 그것은 부처님의 빛이며, 염불삼매(念佛三昧)의 힘 때문에 빛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또 보살은 온갖 중생들이 나고 죽는 괴로움 속에서 헤매는 것을 보고 온갖 즐거움 속에서도 역시 마음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다만 원을 세우기를 “저와 중생들은 언젠가는 마땅히 제도되리라”고 할 뿐이다.
또 보살은 온갖 진기한 보배에 대해서는 마음에 집착을 내지 않고 오직 3보(寶)만을 좋아할 뿐이다.
또 보살은 항상 음욕을 끊고 생각조차 내지 않는데 하물며 실제로 행하는 일이 있겠는가.
또 중생이 눈으로 보살을 보면 이내 자삼매(慈三昧)를 얻게 된다.
또 보살은 온갖 법이 모두 다 부처님 법이 되게 하면서 성문이나 벽지불의 법과 범부의 법이라는 차별이 없게 한다.
또 보살은 온갖 법을 분별하면서도 온갖 법에 대하여 역시 법이라는 모양도 내지 않고 법이 아니라는 모양도 내지 않나니, 이와 같은 등의 한량없는 인연을 일컬어 바로 보살의 집에 태어났다고 한다.
【문】 발심해서부터 이미 보살의 집에 태어났다면서 이제 어찌하여 “보살의 집에 태어나려고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는가?
【답】 두 종류의 보살의 집이 있다. 곧 물러나는 집[退轉家]과 물러나지 않는 집[不退轉家], 이름만이 있는 집[名字家]과 실속이 있는 집[實家], 청정한 집[淨家]과 잡된[雜家]이 있으며, 믿음이 견고한 집[信堅固家]과 믿음이 견고하지 않은 집[不堅固家]이 있다. 물러나지 않는 집 내지는 믿음이 견고한 집을 얻고자 하는 까닭에 “보살의 집에 태어나려고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구마라가 지위[鳩摩羅伽地]를 얻으려고 한다 함은, 혹은 어떤 보살은 처음 발심하면서부터 음욕을 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 항상 보살의 도를 행하나니, 이것을 구마라가의 지위라 한다.
또 어떤 보살은 원을 세우기를 “세상마다 동남(童男)으로 출가하여 도를 수행하면서 세간의 애욕을 받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하기도 하나니, 이것을 바로 구마라가의 지위라고 한다.
또 마치 왕자를 구마라가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법왕(法王)이므로 보살법의 바른 지위에 들어가서 10지(地)까지 이르게 되나니, 그 때문에 모두 왕자라 하며 모두가 부처님이 될 적임자이다. 마치 문수사리(文殊師利)가 스스로 말하기를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 등은 모두 부처님 일[佛事]을 갖추었기 때문에 구마라가의 지위에 머물러서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 것과 같다.
또 동자(童子)로서 4세 이상에서 20세 미만까지를 구마라가라 하는 것과 같다. 만일 보살로서 처음에 보살의 집에 태어난 이면 마치 젖먹이와 같고 무생법인 내지는 10주(住)의 지위를 얻어서 모든 일을 여의면 구마라가의 지위라 하나니, 이러한 지위를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항상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으려 한다 함은, 보살이 세상마다 태어날 때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난다는 것이다.
【문】 보살은 마땅히 중생을 교화해야 되는데 무엇 때문에 항상 부처님을 만나려고 하는가?
【답】 어떤 보살은 아직 보살의 지위에 들지 못하고 아직 아비발치(阿鞞拔致)도 얻지 못한 채 기별(記別)도 얻지 못했으므로 만일 모든 부처님을 멀리 여의게 되면 곧 모든 선근(善根)이 무너지면서 번뇌에 빠져 들게 되나니, 자기 자신도 제도할 수 없는데 어찌 남을 제도하겠는가.
마치 사람이 배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 배가 부서지면 다른 사람을 건너게 하려다 자신이 도리어 물에 빠지는 것과 같고 또 마치 소량의 끓인 물을 얼음이 언 큰 못에다 부으면 비록 물을 부은 곳이 순간적으로 녹는다 하더라도 도로 다시 얼음으로 되는 것과 같다.
보살이 아직 법위(法位)에 들지 못했으면서 만일 모든 부처님을 멀리 여의면 공덕도 적고 방편의 힘이 없는지라 중생을 교화하려 한다 해도 조그마한 이익은 있을 수 있으나 도로 다시 떨어지게 되나니, 이 때문에 새로 배우는 보살은 모든 부처님을 멀리 여의면 안 되는 것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째서 성문이나 벽지불을 여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는가? 성문이나 벽지불도 역시 보살을 이익되게 한다.
【답】 보살은 큰 마음[大心]을 지닌 자이다. 성문이나 벽지불은 비록 열반의 이익은 있다 하더라도 일체종지(一切種智)가 없기 때문에 보살을 가르치거나 인도할 수는 없다. 마치 코끼리가 진창에 빠졌을 때에 코끼리가 아니면 나오게 할 수 없듯이 보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만일 도(道)가 아닌 가운데에 들면 오직 부처님만이 구제할 수 있다. 이는 큰 도[大道]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이 항상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고자 하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보살은 생각하기를 “나는 아직 불안(佛眼)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소경과 다름이 없다. 만일 부처님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면 나아감도 없고 잘못 다른 길로 들게 되리라”고 하나니, 설령 부처님의 법을 듣는다 해도 다른 곳으로 가는 이는 그 교화하는 시절(時節)과 수행하는 법의 많고 적음을 아직 모르게 된다.
또 보살은 부처님을 뵙게 되면 갖가지 이익을 얻게 된다. 혹 눈으로 보면 마음이 청정해지기도 하고 또는 말씀을 들으면 마음은 곧 법을 좋아하면서 큰 지혜를 얻고 그 법에 따라 수행하면서 해탈을 얻게 된다. 이와 같이 부처님을 만나면 한량없이 이익이 되는데 어찌 일심으로 부처님을 뵈려고 하지 않겠는가.
비유하건대 마치 젖 먹는 아이는 어머니를 여의면 안 되는 것과 같고 또 길을 가는 이는 양식을 여의면 안 되는 것과 같으며, 아주 더울 때에는 서늘한 바람과 찬물을 여의면 안 되는 것과 같다. 아주 추울 때에는 불을 여의려 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깊은 물을 건널 때는 배를 여의면 안 되는 것과 같다.
마치 병든 사람이 용한 의사를 여의지 않는 것과 같아서 보살이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위의 일들보다 더하다. 왜냐하면 부모ㆍ친척ㆍ아는 이나 인간ㆍ천상의 왕들까지도 모두가 부처님만큼 이익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니, 부처님의 이익이야말로 모든 보살들을 모든 고통 되는 곳에서 떠나 세존(世尊)의 지위에 머무르게 한다. 이런 인연 때문에 보살은 언제나 부처님을 여의지 않아야 한다.
【문】 유위(有爲)의 법은 속임수요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모두가 믿을 수 없는데 어떻게 원하는 대로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답】 복덕과 지혜를 두루 갖추고서 부처님을 만나야 되는데 하물며 부처님을 여의지 않는 일이겠는가. 중생은 한량없는 겁 동안 지은 죄의 인연이 있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는 되지 않는다. 비록 복덕을 행한다 하더라도 지혜가 박하고 적으며 비록 지혜를 행한다 하더라도 복덕이 박하고 적기 때문에 소원이 성취되지 않는다.
보살은 부처님의 도를 구하기 때문에 반드시 두 가지의 인을 행해야 하나니, 생인(生忍)과 법인(法忍)이 그것이다. 생인을 행가기 때문에 온갖 중생 가운데서 자비심을 일으키고 한량없는 겁의 죄를 소멸시키며 한량없는 복덕을 얻는다. 법인을 행하기 때문에 모든 법의 무명을 깨뜨리고 한량없는 지혜를 얻는다. 두 가지 행이 화합하면 무슨 소원인들 얻지 못하겠는가. 이 때문에 보살은 세상마다 항상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는다.
또 보살은 통상 부처님을 염(念)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몸을 버리거나 몸을 받거나 간에 항상 부처님을 만나게 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중생으로서 음욕의 마음을 익힘이 중하면 이른바 공작이나 원앙새 등의 음탕한 새의 몸을 받고, 성냄을 많이 익혔으면 이른바 삿된 용이나 나찰이나 지네나 독사 등의 독충으로 나는 것과 같다. 이 보살은 마음으로 전륜성왕이나 인간ㆍ천상의 복락을 귀히 여기지 않고 다만 모든 부처님만을 염할 뿐이다. 이 때문에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에 따라 몸의 형상을 받게 된다.
또 보살은 항상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잘 닦는 인연 때문에 날 때마다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나게 된다. 마치 삼매에 들어가서 곧 아마타불(阿彌陀佛)을 뵈옵고 그 부처님께 묻되 “무슨 업의 인연 때문에 그 나라에 태어날 수 있나이까?”고 하자, 부처님은 곧 대답하시되 “선남자야, 항상 염불삼매를 닦으면서 염불을 그만두지 않으면 나의 나라에 태어날 수 있느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문】 어느 것이 바로 염불삼매이기에 그 나라에 태어날 수 있는가?
【답】 부처님을 염한다 함은 부처님의 32상(相)과 80수형호(隨形好)의 금빛 나는 몸을 염하는 것이다. 몸에서 광명이 나와 시방에 가득 차는 것이 마치 염부단금(閻浮檀金)을 녹이는 것 같아서 그 빛이 밝고 청정하다. 또 마치 수미산이 큰 바다 안에 있을 때에 햇빛이 비치면서 그 빛깔이 밝게 드러나는 것과 같다.
수행하는 이는 이때에 도무지 산이나 땅이나 수목 등의 다른 빛깔은 생각함이 없으면서 다만 허공 가운데서 모든 부처님의 몸매만을 볼 뿐이니, 마치 참 유리(琉璃) 속에서 적색의 금이 바깥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또한 비구가 부정관(不淨觀)에 들어가면 다만 신체가 탱탱하게 붓고 문드러지는 것만을 볼 뿐이며, 나아가 뼈로 된 사람[骨人]만을 볼 뿐이니, 이 뼈로 된 사람은 짓는 이도 없고 또한 오고 가는 것도 없으면서 생각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과 같다.
보살마하살도 염불삼매에 들어가서 모든 부처님을 뵈옵는 것도 역시 그와 같나니, 마음을 가다듬기 때문이요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그의 몸을 장엄하고서 깨끗한 물에나 거울에다 비추면 모든 보이지 않음이 없지만 이 물이나 거울 속에는 역시 형상이 없으며 단지 밝고 깨끗하기 때문에 그 몸의 형상이 보이는 것과 같다.
모든 법은 본래부터 항상 스스로 청정한 것이라 보살이 청정한 마음을 잘 닦기 때문에 뜻을 따라 모든 부처님이 모두 나타나며 그 의심되는 것을 물으면 부처님은 그 질문에 대답하시므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삼매로부터 일어나서 생각하기를 “부처님은 어디로부터 오셨을까. 나의 몸도 역시 가지 않았었다”고 하다가, 즉시 모든 부처님은 오신 데도 없고 나도 또한 간 데도 없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고는 다시 생각하기를 “삼계(三界)에 있는 것은 모두가 마음이 지은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으로 염하는 것에 따라 모두 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부처님을 뵙고 마음으로 부처님을 지었으니, 마음이 곧 부처님이요 마음이 곧 나의 몸이다”고 하면서도 마음은 스스로를 알지 못하고 또한 스스로 보지도 못한다.
만일 마음의 모양을 취하면 모두 지혜 없는 일이요 마음 또한 거짓이어서 모두가 무명(無明)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이 마음으로 인하여 곧 모든 법의 실상(實相)에 들어가게 되나니, 이른바 항상 공[常空]이다.
이와 같은 삼매와 지혜를 얻고 나면 두 가지 행의 힘 때문에 소원하는 뜻에 따라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나니, 마치 금시조(金翅鳥)의 두 날개가 완전하기 때문에 허공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것과 같다.
보살이 이 삼매와 지혜의 힘을 얻기 때문에 혹은 이 몸으로도 뜻에 따라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게 되기도 하며 목숨을 마치면 역시 모든 부처님을 만나게 되나니, 이 때문에 “보살이 항상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4)
범어로는 Bhadrakalpikasūtra.
5)
범어로는 Bakkula.
6)
하리륵(訶梨勒)은 범어 harītakī의 음역어. 황갈색 혹은 녹색의 열매이다.
7)
범어로는 Koṭīviṃśa. 태어날 때 그의 부친이 20억 냥을 주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8)
범어로는 Sumana.
9)
『십지경(十地經, Daśabhūmika-sūtra)』을 말한다.
10)
범어 sarvajña의 음역어.
11)
범어로는 aśityanuvyañjana. 80종호(種好)라고도 한다.
12)
범어로는 ābhidharma-vibhāṣa.
13)
범어로는 Bāvari.
14)
범어로는 kumārabhūmi. 보살지(菩薩地)의 총칭으로, 동자지(童子地) 또는 동상지(童相地)라고도 한다.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