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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23권
5. 변업품⑥
5.7. 아비달마(本論)에서 설해진 온갖 업
1) ‘마땅히 지어야 할 업’ 등의 3업
온갖 업을 분별함에 있어서 마땅히 다시 물어보아야 할 것이니,
본론(本論)에서는 이를테면 ‘마땅히 지어야 할 업[應作業]’과 ‘마땅히 지어서는 안 되는 업[不應作業]’, 그리고 ‘마땅히 지어서도 안 되고 짓지 않아서도 안 되는 업[非應作非不應作業]’과 같은 세 가지 업을 설하고 있는데,36)
그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염오의 업이 ‘마땅히 지어서는 안 되는 업’이지만
어떤 이는 역시 궤칙을 깨트리는 업이라고도 설하며
‘마땅히 지어야 할 업’은 이와 반대되는 것이며
두 가지 모두와 상위하는 것이 세 번째 업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어떤 이는 설하기를,
“염오한 신(身)ㆍ의업(意業)을 일컬어 ‘마땅히 지어서는 안 되는 업’이라고 하니, 비리(非理)의 작의(作意)로부터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온갖 궤칙(軌則)을 깨트리는 온갖 신ㆍ어ㆍ의업은 설혹 염오하지 않은 것이라 하더라도 역시 ‘마땅히 지어서는 안 되는 업’이라고 이름하니, 그것들은 세간의 궤칙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온갖 무부무기의 신업으로서 혹은 머물고, 혹은 가며, 혹은 먹고 마시는 등에 있어 모든 유정이 지켜야 할 세속의 예의(禮儀)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면, 이를 모두 ‘궤칙을 깨트리는 신업’이라 이름하고, 형태[形]ㆍ언어[言]ㆍ시제[時], 그리고 작자(作者) 등을 파괴하는 온갖 유정의 무부무기의 어업으로서 다만 세속의 예의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모두 ‘궤칙을 깨트리는 어업’이라고 이름하며, 앞의 두 가지 업을 등기(等起)시키는 사(思)를 설하여 ‘궤칙을 깨트리는 의업’이라고 이름하니, 이러한 업과 아울러 염오한 업을 ‘마땅히 지어서는 안 되는 업’이라고 한다.”37)
‘마땅히 지어야 할 업’은 이것(‘마땅히 지어서는 안 되는 업’)과 서로 반대되는 것이며,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와 모두 상위하는 것을 세 번째 업(즉 ‘마땅히 지어서도 안 되고 짓지 않아서도 안 되는 업’)이라고 한다.38)
그런데 만약 세속(世俗)에 근거할 경우, 뒤(유여사)의 설도 역시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승의(勝義)로서 말하자면 전자가 선설(善說)이다. 즉 오로지 선업만을 ‘마땅히 지어야 할 업’이라 이름하고, 오로지 염오한 온갖 업만을 ‘마땅히 지어서는 안 되는 업’이라고 이름하며, 무부무기의 신ㆍ어ㆍ의업을 ‘마땅히 지어서도 안 되고 짓지 않아서도 안 되는 업’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체의 ‘마땅히 지어서는 안 되는 업’이 모두 악행에 포섭되는 것은 아니며, 오로지 불선만이 바로 악의 성질이기 때문에 악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참으로 애호할 만한 과보를 초래하는 것을 일컬어 ‘묘행’이라 하고, 참으로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닌 과보를 초래하는 것을 일컬어 ‘악행’이라 하는 것으로, 유부무기가 비록 ‘마땅히 지어서는 안 되는 업’이라 할지라도 악행에 포섭되는 것은 아니니, 이것에 의해서는 결정코 참으로 애호할 만한 과보나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닌 과보를 능히 초래하지 않기 때문이다.
2) 인업(引業)과 만업(滿業)
① 인업과 만업
여기서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한 가지 업[一業]에 의해서는 단지 한 번의 생[一生]만이 인기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여러 번의 생[多生]이 인기된다고 해야 할 것인가? 또한 한 번의 생은 다만 한 가지 업에 의해 인기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다수의 업[多業]에 의해 인기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한 가지 업이 한 번의 생을 인기하며
다수의 업은 능히 그것을 원만하게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정리(正理)에 의거할 것 같으면, 결정코 마땅히 “단지 한 가지 업에 의해서는 오로지 한 번의 생만이 인기될 뿐이다”라고 설해야 한다. 여기서 ‘한 번의 생’이란 말은 [하나의] 중동분(衆同分)을 나타내는 것으로, 동분을 획득하여야 비로소 그것을 ‘생(生)’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39)
만약 한번의 생이 다수의 업에 의해 인기된다고 설하거나, 혹은 한가지의 업은 능히 다수의 생을 인기한다고 설할 것 같으면, 이러한 두 말에는 이치 상 어떠한 과실이 있는 것인가?
먼저 앞의 설에는 [다음과 같은] 과실이 있다. 즉 [한번의 생이 다수의 업에 의해 인기되는 것이라면,] 한번의 생 중에서 앞의 업의 과보가 종식되면 뒤의 업의 과보가 일어날 것이며, [그럴 경우] 업의 과보가 다르기 때문에 마땅히 [한 번의 생 중에] 죽고 태어나는 일이 있어야 한다. 혹은 마땅히 여러 생에 걸쳐 죽고 태어나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니, 이치 상으로 볼 때 [앞의] 업의 과보가 종식되고 [뒤의 업의 과보가] 일어날지라도 그것은 예컨대 한 번의 생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허물이 있으니, [전자의 경우] 하나의 본유(本有) 중에 마땅히 다수의 사유(死有)와 생유(生有)가 존재한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며, 혹은 [후자의 경우] 마땅히 무여열반에 이르는 중간에 죽고 태어나는 일이 영원히 없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동일한 취(趣)ㆍ처(處) 중에서 다른 업[異業]의 과보가 생겨나면 바로 태어나고 죽는 일이 있다고 하면서, [또] 다른 업의 과보가 일어났음에도 죽거나 태어나는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인가?40)
한 가지 업의 과보가 종식되고 다른 업의 과보가 일어나면, 이치상 결정코 마땅히 죽고 태어난다고 해야 한다. 또한 [그대들은] 한 번의 생은 결정코 여러 종류의 조작업(造作業)과 증장업(增長業)에 의해 인기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한 가지 업의 과보가 종식되고 다른 업의 과보가 일어나더라도] 결정코 중간에 요절하는 자가 없다고 해야 하든지, 혹은 마땅히 과보를 받지 않은 채 그 같은 업을 영원히 버려야 하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다.
앞에서 무엇을 논설하였다는 것인가?
이를테면 이치상 필시 과보를 받는 시기가 결정된 업, 즉 정업(定業)에 의해 초래된 이숙과를 다른 시기에 받는 일은 없으며, 또한 이치상 과보를 받는 시기가 결정된 정업으로서 조작 증장되지 않은 것도 필시 이숙과를 받을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생은 정(定)ㆍ부정(不定)의 여러 종류의 업에 의해 인기되었기 때문에, 혹은 다시 어떤 생은 오로지 여러 종류의 정업에 의해 인기되었기 때문에 중간에 요절하는 경우가 있으며, 아울러 목숨을 다하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이 역시 그렇지가 않으니, 어떤 시기에 어떤 과보를 받을지가 결정되고 결정되지 않은 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정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41)
만약 어떤 유정류에 있어 중년ㆍ노년의 시기에 마땅히 과보를 받을 업은 결정적이지만, 아기ㆍ동자ㆍ소년의 시기에 과보를 받을 업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 경우는 다시 어떠한가?
이치상 필시 앞의 시기를 떠나 뒤의 시기가 존재할 수 없다. 혹은 마땅히 앞의 단계에 존재하는 과보의 업도 필시 정수업(定受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결정코 그 과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그러한 결정적인 이치가 없다. 즉 앞의 단계의 업에 대해 어떤 과보를 받을지 결정된 것이라고 해야 하며, 뒤의 단계의 업에 대해 어떤 과보를 받을지 결정되지 않은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생도 다수의 업에 의해 인기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
뒤의 설에도 역시 [다음과 같은] 과실이 있다. 즉 한 가지의 업이 다수의 생을 인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과보를 초래하는 시기가 결정된 업은 마땅히 잡란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一業引一生說’)에는 그 같은 잡란이 없으니, 앞에서 이미 분별한 바와 같다.42) 따라서 한 가지 업이 능히 다수의 생을 인기하는 일은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존자 무멸(無滅, Anirudha, 즉 阿那律)은 다음과 같이 스스로 말하였겠는가?
“내가 기억하건대, 옛날 어느 때 수승한 복전(福田)에게 한 번 먹을 것을 베푼 이숙업으로 말미암아 삼십삼천을 일곱 번 되풀이하여 태어났고, 일곱 번 인간으로 태어나 전륜성제(轉輪聖帝)가 되었으며, 마침내 최후로 위대한 석가의 가문에 태어나 진귀한 재물을 풍족히 소유하고 많은 쾌락을 향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43)
이 말에 대해서는 이미 『비바사론(毘婆沙論)』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44)
“먹을 것을 한 번 베푼 것을 근거로 하여 다수의 뛰어난 사원(思願,의지적 발로에 의한 서원)을 일으켰고, 이것이 능히 상태[位]를 달리하는 다수의 이숙생을 인기하였기 때문에45) ‘한 번의 먹을 것을 베푼 이숙업으로 말미암아’라고 말한 것이다. 즉 이숙[과]가 다시 또 다른 생을 초래할 수는 없는 것으로, 다만 한 번의 먹을 것을 베푼 인연[境]에 근거하여 다수의 사원을 일으켰고, 이것에 의해 초래되는 이숙과의 분위(分位) 차별을 나타내기 위해 이같이 말하게 되었던 것이다.
혹은 최초의 원인[基]을 나타내기 위해 이같이 설하였다.
즉 그는 한 가지 업[一業]에 의해 한 번의 생[一生] 중의 크나큰 부귀와 많은 재물 그리고 숙생지(宿生智)를 초래하게 되었고, 이에 편승하여 또 다른 생을 초래할 만한 복을 지었으며, 이렇게 전전(展轉)하여 마침내 최후신(最後身)에 이르러 부귀한 가문에 태어나 구경(究竟)의 과보(즉 아라한과)를 획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마치 1가율사발나(迦栗沙鉢拏)를 밑천으로 하여 여러 방편으로 부지런히 이익을 추구하여 그것의 천 배를 성취한 자가 ‘나는 일찍이 1가율사발나로 말미암아 마침내 지금의 대부귀를 성취하였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46)
그렇기 때문에 한 가지 업은 오직 한 번의 생만을 인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한 번의 생이 한 가지 업에 의해 인기된다고 말하였을지라도 그것의 원만(圓滿)은 다수의 업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라고 인정하니, 비유하자면 화가가 먼저 한 가지 색으로써 그림의 형상(즉 밑그림)을 그리고 난 후에 여러 가지 채색을 그려 넣는 것과 같다.47)
지금 여기서 한 가지 색에 의해 비유된 것은 한 종류[類]의 업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한 찰나의 업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한 종류의 업에 비유된 것이라면, 이는 이러한 [유부] 종의의 이치에 위배될 것이니, ‘한 가지 업이 한 번의 생을 인기한다’고 하는 말은 한 종류에 근거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종류’란 반드시 다수이기 때문으로,48) 다수의 업이 한 번의 생을 인기한다는 것은 [유부의]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한 가지의 색이 일 찰나의 업에 비유된 것이라고 말한다면, 일 찰나에 능히 형상을 도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설정된 비유는 [‘한 가지 업에 의해 한 번의 생이 인기된다’는 사실을] 능히 논증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한 종류의 업을 [한 가지 색에] 비유한 것이라고 관찰하였다면, 어떻게 인업(引業, 한 번의 생을 인기하는 업)을 종류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나의 취(趣)를 인기하는 업에는 다수가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말의 뜻은 한 종류의 업 중에서 오로지 일 찰나의 업이 중동분(즉 일생)을 인기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동류와 이류로 [이루어진] 다 찰나의 업은 능히 한 번의 생을 원만하게 하기 때문에 ‘다수’라고 말하였으며, 그래서 ‘먼저 한 가지 색으로써 그림의 형상을 그리고 난 후에 여러 가지 채색을 그려 넣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 같은 말은 이치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다 같이 사람의 몸을 받았다 할지라도,49) 그 중에는 사지의 몸과 온갖 감관과 크기[形量]와 미모와 힘의 장엄을 갖춘 자도 있고, 혹은 이 같은 온갖 장엄에 많은 결함을 지닌 자도 있는 것이다.
② 유루법과, 생의 인기와 원만
그렇다면 생은 단지 업에 의해서만 능히 인기되고 원만하게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일체의 업과 동일한 과보를 초래하는 법은 세력이 강성하기 때문에 역시 생을 인기하고 원만하게 하지만, 이와는 반대되는 법은 생을 능히 원만하게는 하여도 인기하지는 않는다.50)
이와 같은 두 종류는 그 본질이 무엇인가?51)
게송으로 말하겠다.
두 가지 무심정(無心定)과 득(得)은
능히 인기하지 않지만, 그 밖의 것은 모두에 통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두 가지의 무심정(무상정과 멸진정)은 비록 이숙과를 갖지만 중동분을 인기할 만한 세력이 없으니, 온갖 업과 구유(俱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일체의 불선과 선인 유루의 득(得)에도 역시 중동분을 인기할 만한 세력이 없으니, 온갖 업과 동일한 과보를 초래하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밖의 온갖 불선과 선한 유루법은 두 가지 모두와 통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그것들은 생을 능히] 인기하고 아울러 원만하게 하는 것이다.
3) 업ㆍ번뇌ㆍ이숙의 3장(障)
① 3장의 본질과 작용
계경에서는 설하기를,
“무거운 장애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업장(業障)과 번뇌장(煩惱障)과 이숙장(異熟障)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하였다.52)
이와 같은 세 가지 장애의 본질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세 가지 장애란 무간업과
자주 일어나는 번뇌와,
아울러 일체의 악취와
북구로주와 무상천을 말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업장(業障)은 이를테면 5무간업을 말하니,
첫째는 어머니를 살해하는 것이며,
둘째는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이며,
셋째는 아라한을 살해하는 것이며,
넷째는 화합된 승가를 파괴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악심으로써 부처님의 몸에서 피가 나게 하는 것이다.
번뇌장(煩惱障)은 이를테면 자주 일어나는 번뇌를 말하니, 하품(下品)의 번뇌로서 만약 자주 일어나는 것이면 비록 그것을 억제하고 끊으려고 할지라도 그러한 방편을 획득하기가 어렵다.53) 즉 그것은 전전하며 상품의 번뇌를 낳음으로 말미암아 억제하고 끊기[伏除]가 어렵기 때문에 역시 ‘장애’라고 이름하는 것이다.54) 그러나 상품(上品)의 번뇌는 자주 일어나는 것이 아닐뿐더러 대치도가 생겨나면 쉽게 억제하고 끊을 수 있어 비록 지극히 맹리(猛利)하다고 할지라도 ‘장애’에 포함되지 않는다. 즉 욕계에 머무는 구박(具縛)의 유정은 다 같이 일체의 번뇌를 평등하게 성취하고 있다 할지라도 현행하는 것이 다를뿐더러 장애가 되는 것도 동일하지 않다. 그래서 상ㆍ하품에 따른 번뇌 중에서 다만 자주 일어나는 것만을 번뇌장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숙장(異熟障)은 이를테면 3악취(지옥ㆍ아귀ㆍ방생)의 전부와, 선취의 일부 즉 북구로주와 무상천을 말한다.55)
어떠한 이유에서 이를 ‘장애’라고 일컬은 것인가?
능히 성도(聖道)와 성도의 자량(資糧,즉 성도의 가행인 선근)과 아울러 염오에서 떠나는 것을 장애하기 때문이다.
비록 [5무간업 이외의] 다른 업도 능히 견도(見道)를 장애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강력한 인연만 만나면 진리를 통찰하는 방편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에 5역죄와는 같지 않은 것이다.56)
[이에 대해] 『비바사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것(즉 5무간업)은 다섯 가지 인연으로 쉽게 관찰되고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업장이라고 한 것으로, [여기서 다섯 가지 인연이란] 처소[處]와 나아가는 곳[趣]과 생(生)과 과보와 보특가라를 말한다.”57)
나아가 [업장 이외] 그 밖의 다른 장애의 경우에도 그것을 장애로 설정하고 설정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이치에 맞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장애 가운데 번뇌장이 가장 무거운데, [이는] 능히 업을 낳으며, 업은 과보(즉 이숙장)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여사(有餘師)는 말하기를,
“번뇌장과 업장의 두 가지가 가장 무거우니, 이러한 장애를 가진 자는 두 번째 생 중에서도 역시 그것을 대치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58)
[무간업의] ‘무간’이란 무슨 뜻인가?
이러한 무간업은 무간생(바로 다음 생)에 반드시 그 과보를 받기 때문으로, 다른 생의 과보나 업이 능히 능히 장애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59)
그러나 어떤 이는
“역죄(逆罪,즉 무간업)를 지은 보특가라가 이 세상에서 목숨을 마치면 [시간적] 간격이 없이 결정코 지옥 중에 바로 떨어지기 때문에 ‘무간’이라 이름하였다”고 설하였다.
② 3장이 일어나는 처소
마땅히 알아보아야 할 것이니, 세 가지 장애는 어떠한 취(趣) 중에 존재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간업은 세 주(洲)에만 존재하지만
여타의 선체 등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은혜가 적고 수치심이 적기 때문이다.
그 밖의 장애는 5취 모두에 존재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일체의 장애가 모든 취(趣)에 다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바야흐로 무간업은 오로지 인취(人趣)의 세 주(洲)에만 존재하며, 북구로주와 그 밖의 다른 취와 다른 계(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 주 안에서도 오로지 여자와 남자에게만 존재할 뿐 선체(扇搋) 등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이는 마치 그들에게 악계(惡戒)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60)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부모는 그들에 대해 은혜가 적으며, 그들은 부모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羞恥]이 적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즉 그들의 부모는 불구의 몸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愛念] 또한 미약하기 때문에 은혜가 적다고 말한 것이며, 그들도 부모에 대해 역시 참괴심(慚愧心)이 미약하기 때문이다.61) 요컨대 엄중한 참괴심을 품고 있어야 비로소 무간죄에 저촉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62)
그리고 만약 어떤 사람이 비인(非人)의 부모를 해쳤을 경우에도 역시 역죄를 성취하지 않으니,63) 은혜와 수치심이 적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식에 대해 인간에게 있는 것과 같은 은혜가 없으며, 자식도 그들에 대해 인간에게 있는 것과 같은 참괴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상 업장은 오로지 인취의 세 주에만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분별하였다.
그 밖의 장애는 5취에 모두 존재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번뇌장은 일체의 처소에 두루 존재하지만, 이숙장의 경우는 세 악취 모두와, 인취 중에서는 오로지 북구로주, 천취 중에서는 오로지 무상처(無想處)에만 존재한다.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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