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들이 이스터 섬에 처음 상륙했을 때
붕괴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되었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1722년 로헤벤은 이스터 섬의 한 지역에 상륙해서 그곳만을 둘러보았을 뿐이다.
또한 1770년 곤잘레스가 지휘한 에스파냐의 탐험대도 항해일지에만 이스터 섬에 상륙했다는 기롯을 남겼을 뿐이다.
그런대로 읽을 만한 최초의 기록은 쿡 선장이 남겼다.
1774년 이 섬에 상륙한 쿡 선장은 3일을 머물면서 파견대를 보내 내륙을 정찰했다.
그때 데려간 타히티인은 이스터 섬 사람들과 무리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폴리네시아어가 이스터 섬 사람들의 언어와 무척 흡사햤기 때문이다.
쿡 선장은 석상들에 대한 기록도 남겼다.
쓰러진 석상뿐만 아니라 여전히 똑바로 서 있는 석상도 목격했다는 기록이엇다.
그런데 똑바로 서 잇는 석상에 대한 유럽인의 기록은 1838년에서 끝난다.
1868년의 기록에는 서 잇는 석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구전에서도 파로가 1840년경에 마지막으로 쓰러졌다고 전해진다.
한 여인이 남편을 기리면서 세웠다는 파로를 그녀 가족의 적들이 허리를 두동강 내려고 쓰러뜨렸다는 것이다.
아후도 신성함을 상실했다.
사람들은 공들여 깎은 돌판들을 빼내 아후 근처에 미련한 밭은 보호하는 담('마나바이')을 쌓았고,
시신을 안치하는석관묘를 만들기도 했다.
그 결과로 오늘날까지 복원되지 않은 채 버려진 아후는
그저 큰 돌을 쌓아 놓은 것처럼 보일 뿐이다. (대부분이 복원되지 않았다)
조 앤 반 필버그, 클라우디오 크리스티노, 소니아 아오아, 배리 롤렛, 그리고 내게도
아후는 파괴된 석상에서 떨어진 돌조각들과 뒤섞인 돌더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후를 쌓고, 석상을 조각해서 운반하고 세우기 위해서 수세기 동안 쏟아부은 엄청난 노력을 생각할 때,
그리고 조상의 그 기념비적인 작품을 파괴한 장본인이 바로 섬사람들 자신이었다는시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서글픈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스터 섬 사람들이 모아이를 쓰러뜨렸다!
공산정권이 붕괴하자 러시아 사람들과 루마니아 사람들이
스탈린 동상과 차우셰스쿠 동상을 쓰러뜨렸던 상황과 비슷하지 않앗을까?
러시아인들과 루마니아인들이 그랬듯이, 섬사람들도 지도자에 대한 울분을 오랫동안 억눌렀을 것이다.
파로의 전설이 말해주듯이, 석상의 주인에게 앙심을 품은 사람들이 간헐적으로 석상을 하나씩 쓰러뜨렸을 것이다.
그리고 공산주의가 물락했을 때처럼 분노와 환멸이 전염병처럼 순식간에 번지면서 무수한 석상들이 쓰러졌을 것이다.
내게는 또 하나 기억나는사건이 있다.
뉴기니의 고원에 있는 보마이(Bomai)라는 마을에서 1965년에 있었던 종교적 편견에 따른 문화적 비극이다.
보마이에 파견된 기독교 선교사가 내게 자랑스레 해준 이야기였다.
어느 날 그는 회심자들을 불러 '이교도의 인공물(즉 그들의 문화유산과 예술품)'을 \
가설 활주로에 쌓아두고 불태우라고 명령햇다. 그들은 선교사의 말에 고분고분 따랏다.
이스터 섬의 '마타토아'도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비슷한 명령을 내리지 않알을까,
그렇다고 1680년 이후 이스터 사회를 완전히 부정적이고 파괴적이엇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새러운 환경과 종교에 적응해나갔다.
데이비드 스티드먼, 파틔시아 바르가스, 클라우디오 크리스티노가
아나케나에서 발굴한 가장 오래된 패총에서는
동물의 뻐 중 닭뼈가 0.1퍼센트밖에 차지 하지 않는다는사실에서
1650년 이후에 카니발리즘뿐만 아니라 닭장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여겨진다.
마타토아는 과거에 이스터 사회의 수많은 신들 중 하나에 불가하던
마케마케(Makemake)를 창조주로 섬기는 새러운 종교를 내세우면서
그들의 쿠데타를 합리화시켰다.
바닷새들이 둥지를 튼 앞바다의 커다란 세 섬이 굽어 보이는
라노카우 분화구 언저리에 있는 오롱고 마을이 제식의 중심지엿다.
새로운 종교하에서 새로운 예술양식이 발달했다.
특히 암면(巖面) 조각이 성행하면서 여성의 성기, 조인(鳥人), 새 등이
오롱고의 기념물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에 뜨러진 아오이와 푸카오에 조각되었다.
매년 오롱고에서 제식이 거행될 때마다
남자들은 이스터 섬에서 약 1.5틸로미터 떨어진 앞바다의 작은 섬들까지 상어들과 싸우면서 건너가,
검은 제비갈매기가 그 해에 낳은 첫 알을 구해서 고스란히 이스터섬까지 가져오는 경기를 벌였다.
그리고 승리자에게는 '올해의 조인'이란 명예가 주어졌고 그는 다음 한 해 동안 그 명예를 누릴 수 었었다.
오롱고에서 마지막 제식은 1867년이에 있었다.
가톨릭 선교사들의 눈에 띄었던 탓일까?
섬사람들의 손에 파괴되지 않은 이스터 섬의 고유한 전통들은
외부 세계의 압력으로 인해 파괴되는 운명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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