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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37권
4. 변업품 ⑤
2.7. 근사(近事)와 근사율의(5계)
1) 삼귀의(三歸依)와 근사
어찌 삼보에 귀의하면 바로 근사를 성취한다고 하지 않겠는가? 예컨대 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대명(大名, Mahānāma, 摩訶男)에게 고하기를, 집에 머무는 백의(白衣)의 남자이면서 남근을 성취한 온갖 유정이 불(佛)ㆍ법(法)ㆍ승(僧)에 귀의하고, 간절하고 청정한 마음을 일으켜 진실된 말로 ‘나는 바로 오파색가(鄔波索迦, 우바새 즉 근사)입니다. 원하건대 존자께서 기억하시어 자비로써 호념(護念)하소서’라고 스스로 일컬으면, 이들을 모두 오파색가라고 이름한다.”33)
이는 ‘삼귀의를 수지하는 단계에서는 아직 근사를 성취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요컨대 율의를 낳아야 근사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2) 근사율의가 일어나는 시기
그렇다면 언제 근사율의를 일으키게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근사라고 일컬을 때 계를 낳게 되니
말하자면 필추 등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간절하고 청정한 마음을 일으켜 진실된 말로 ‘나는 바로 오파색가입니다. 원하건대 존자께서 기억하시어 자비로써 호념하소서’라고 스스로 일컬으면, 이때 바로 근사율의를 낳게 되니, ‘근사’ 등의 말을 일컬을 때 바로 율의를 낳기 때문이다.
또한 경에서는 다시 “나는 지금부터…… 내지는 목숨을 마칠 때까지 살아있는 것을 구호[護生]하리라”고 하는 말을 설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말을 하지 않고 단지 삼귀의만을 수지하고서 근사를 성취한다면, 스스로 ‘나는 바로 근사입니다’는 등의 말을 일컬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34)
어떠한 뜻에 근거하여 ‘살아있는 것을 구호하리라’고 하는 말을 설하게 된 것인가?
별해탈율의는 살아있는 것의 구호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와는 달리 ‘생을 버릴 것[捨生]이다’고 하는 말로 외워 [전하고] 있는데, 이 말의 뜻은 ‘살생 등을 버리겠다’는 것으로 ‘살(殺)’ 등의 글자를 생략하여 다만 ‘생을 버릴 것이다’고 설한 것이라고 하였다.35) 즉 그가 비록 근사율의를 이미 획득하였을지라도 이에 상응하는 학처(學處)를 알게 하기 위하여 다시 ‘살생을 떠나는 것[離殺生]’ 등의 다섯 종류의 계상(戒相)을 설하여 견고하게 지니는 법을 알도록 한 것이니, 이는 마치 필추가 구족계를 획득하고 나서 다시 학처를 설하여 견고하게 지니는 법을 알게 하는 것과 같다.36) 근책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며, 이것(즉 근사)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근사는 반드시 율의를 갖추어야 하는 것으로, 삼귀의를 수지하는 것만으로 바로 근사가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1) 경부(經部)의 5계 분수설(分受說) 비판
게송으로 말하겠다.
‘만약 율의를 모두 갖추어야 한다면
어째서 일부분 등을 말씀한 것인가?’하면
능히 지니는 것에 근거하여 그렇게 설한 것이다.
37)
논하여 말하겠다.
경부(經部)는 앞에서 설한 의리(義理)에 대해 마음에 기뻐하는 빛이 없이 다시 이같이 힐난하였다.
“만약 모든 근사는 율의를 모두 갖추어야 하는 것이라면, 세존께서는 어떠한 연유에서 ‘[근사에는] 네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능히 일부분[一分, 한가지의 계]만을 배우는 자이며, 둘째는 능히 적은 부분[少分, 두 가지의 계] 만을 배우는 자이며, 셋째는 능히 많은 부분[多分, 서너 가지의 계]을 배우는 자이며, 넷째는 능히 모든 부분[滿分, 5계]을 배우는 자이다’고 말씀하였겠는가?”38)
어찌 이러한 경문에 의해 ‘오로지 삼보에 귀의하는 것만으로 바로 근사를 성취하는 것은 아니다’는 사실이 이미 입증되었다고 하지 않겠는가? 만약 [이러한 네 종류의 근사와는] 별도로 단지 삼보에 귀의하는 것만으로 바로 근사를 성취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이와 같은 근사는 앞에서 설한 네 종류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다섯 번째의 근사로 설해야 할 것이니, 학처에 대해 전혀 배운 바가 없는 이러한 이들도 역시 일종의 근사라고 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부처님께서는, 근사는 율의를 떠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관찰하였기 때문에 계경 중에서 오로지 네 종류만을 설한 것이다.
그리고 비록 모든 근사는 율의를 모두 갖추어야 할지라도 능히 ‘지니는 것[持]’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네 종류가 있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비록 [모든 근사는] 다섯 갈래의 율의(즉 5계)를 모두 갖추어 받았을지라도 그 후에 어떤 인연을 만나 그것을 허물고 결여하여 혹 어느 때에는 온갖 학처 가운데 능히 일부분만을 지니며, 나아가 혹 어느 때에는 다섯 갈래 모두를 갖추어 지니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설한 것이다.
그리고 [계경에서는] 일찍이 받은 것을 능히 지니기 때문에 ‘능히 배우는 자’라는 말로 설한 것으로,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마땅히 ‘일부분 등을 받는 자’라고 말했어야 한다.39) 따라서 이러한 네 종류의 근사는 다만 능히 ‘지니는 것’에 근거한 것일 뿐이다.
경주(經主)는 이에 대해 다시 이와 같이 말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은 계경에 위배된다.”
어떻게 경에 위배된다는 것인가?
“이를테면 경에서는 ‘나는 바로 근사입니다’는 등의 말을 스스로 일컬으면 바로 5계를 낳게 된다고 설한 일이 없으며, 또한 이 경에서는 ‘나는 지금부터……내지는 목숨을 마칠 때까지 [살]생을 버릴 것[捨生]이다’는 말도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경에서는 어떻게 설하고 있는 것인가?
“이를테면 『대명경(大名經)』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40) 이 경 중에서는 오로지 근사의 상(相)에 대해서만 설하고 있을 뿐이고, 그 밖의 다른 경에서도 그렇게 설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경에 위배된다고 한 것이다. 즉 그 밖의 다른 경에서 설하기를, ‘나는 지금부터……내지는 목숨이 다하고 생을 버릴[捨生] 때까지 청정에 귀의하리라’고 하였다.41) 이는 바로 삼보에 귀의하여 진실된 믿음[誠信]의 말을 발한 것으로, 여기서는 이미 진리[諦]를 본 자가 증정(證淨)을 획득함에 따라,42) 요컨대 스스로 목숨을 걸고 정법에 대해 깊은 애호(愛護)와 존중을 나타낸 것, 나아가 그것이 자신의 생과 목숨을 구하기 위한 방편[緣]이 될지라도 끝내 여래의 정법을 버리지 않겠다는 마음을 나타낸 것일 뿐이다. 곧 그 경에서는 근사의 상(相)을 설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살]생을 버릴 것이다[捨生]’는 등의 말을 설한 것이 아니다.”43)
자세히 알지 못하겠으니, 여기서 경주가 설한 뜻은 우리나라(카슈미르)의 모든 논사들에게 권장하고자 하기 위해 외방(外方)의 경부(經部)에서 외워 [전승한] 바를 수지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를 수지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만 [그 같은 사실을 전하는] 여러 경이 있으며, 정리(正理)에도 위배되지 않음에도 외방의 경부에서는 이를 수지하지 않았을 뿐이다. 총송(總頌)을 능가하는 『아급마(阿笈摩)』가 있음에도 그들은 [정]의(情意)에 따라 [총송을] 짓고는 다시 스스로 수지하였던 것인데, 경주는 어찌 성교를 참으로 잘 살피는 우리나라의 여러 대 논사들로 하여금 그들과 함께 진실 된 교법을 등지고 거짓된 교법을 수지하게 하는 것인가?
바야흐로 경에서 설한 “나는 지금부터……내지는 목숨이 다하고 생을 버릴[捨生] 때까지 [청정에 귀의하리라.]”는 말을 어떠한 이치에서 ‘이는 오로지 증정(證淨)을 획득한 이들이 세운 서원으로, 온갖 이생(異生)도 역시 이러한 서원을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설하는 것인가? 온갖 이생의 종류들도 장차 율의를 받고자 할 때 역시 이와 같은 견고한 의요(意樂)를 갖으며, 나아가 자신의 생과 목숨을 구하기 위한 방편이 될지라도 수지한 학처를 끝내 어기지 않는다. 이와 같은 서원의 수지는 세간에서도 바로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 문구(‘나는 지금부터……’)는 『대명경』 중에서도 바로 수지할 수 있으며, 정리에도 위배되지 않는다. 따라서 [앞서] 외운 올바른 경문을 버려서는 안 된다. 설혹 『대명경』에 이러한 문구가 없다고 할지라도 이는 우리의 종의에 역시 위배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종의에서는 이러한 문구가 궁극적으로 근사율의를 일으키는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으니, ‘나는 바로 근사입니다. 청하건대 [존자께서] 기억하시어 호념하소서’라고 스스로 일컬으면, 이때 바로 근사율의를 낳는다고 설하기 때문으로, 스스로 말을 발하여 제자가 되는 것은 대가섭(大迦葉)이 구족계를 획득할 때와 같기 때문이다.44)
세존께서 이미 “오파색가(근사)는 마땅히 다섯 종류의 학처를 모두 함께 수지해야 한다”고 설하였고, 그(근사)가 “나는 바로 오파색가입니다”고 말하였다면, [그는] 필시 율의를 [모두] 갖추었다고 해야 하거늘 어찌 굳이 힘써 미혹에 이르려는 것인가? 이는 “나는 바로 나라의 대군사(大軍師)이다”고 말하면, 그는 필시 병장(兵將)의 사업을 모두 익힌 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비유에 근거하여 지자(智者)라면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이와 마찬가지로 [‘근사는 반드시 다섯 종류의 율의를 수지한 이’라는 사실은] 분명 어떠한 이치와 교법에도 벗어나지 않는다고. 만약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여 [5계를] 받지 않는다면 어찌 이를 알 수 있을 것인가?
또한 경주(經主)는 [이같이] 말하였다.
“계를 지니거나 범하는 것에 근거하여 ‘일부분 등을 배우는 이’라고 설한 것이라면, 응당 마땅히 [이에 대해] 묻지도 말아야 하거늘 하물며 그것에 대해 대답하였을 것인가?45) 또한 근사율의는 반드시 5지(支)를 모두 갖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 배워야 할 학처(學處) 중에서 한 가지만 수지하고 그 밖의 나머지는 모두 수지하지 않는 이를 ‘일부분만을 배우는 자’ 등이라고 이름하며, 나아가 모두를 수지하는 이를 ‘모든 부분을 배우는 자’라고 이름한다는 사실을 능히 알지 못하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즉 그(수계자)는 얼마정도의 근사율의를 받아야 하는지 그 수량의 적고 많음을 아직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무릇 몇 종류의 오파색가가 있어 능히 학처를 배우는 것입니까?’라고 청하여 물은 것이며,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여 말하기를 ‘네 종류의 오파색가가 있으니, 이를테면 일부분만을 능히 배우는 자 등이 그들이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능히 잘 알지 못하여 ‘무엇을 일컬어 능히 일부분만을 배우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까?’……(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다시 물은 것이다.”46)
이는 어떠한 이치도 없는 말이니, 오로지 대법종(對法宗)에서 설한 이치 중에서만 묻고 답하는 것이 부합하기 때문이다. 근사는 율의를 반드시 모두 갖추어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라도 그 중의 한 가지를 범하면 일체의 계를 어기게 되는지, 한 가지만 어기고 다른 것은 어기지 않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하니, 이러한 의문으로 말미암아 청하여 묻게 되었고,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네 종류의 오파색가가 있다’고 답하였던 것이다].
모든 부파에서는 이러한 [대법의] 문구를 보지 못하였기에 이러한 뜻에 대해 지금까지도 여전히 다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부처님께서는 경에서 자주 ‘오파색가는 다섯 학처를 갖춘 자이다’고 말하였으니, 이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인데, 다시 의심하여 얼마정도의 [근사율의를] 받아야 하는지 그 수량의 많고 적음을 묻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설혹 그러한 자가 있다고 인정할지라도 [경에서의 답은] 의문과 서로 모순된다. 즉 그는 본래 얼마정도의 [근사율의를] 받아야 하는지 그 수량의 많고 적음에 대해 의심하였음에도 ‘몇 종류의 [오파색가가] 있어 능히 학처를 배우는 것입니까?’라고 물었고, ‘일부분 등을 배우는 자들이다’고 대답하였으니, 어찌 본래의 의심이 해소되었을 것인가?
따라서 그러한 [경주가 논설한] 뜻 중에서는 묻고 답하는 것이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경주는 이 같이 올바르지 않은 생각에서, [5계 정구(定具)의] 이치에 대해 쟁론하는 중에 자기 패거리[朋黨,즉 경부]들의 주장을 마음에 품고 대법(對法)에서 설한 뜻과 반대로 말하였으니, 물음도 [본래의 의심에] 부합하지 않거늘 하물며 답이 부합할 것인가?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율의를 떠나서도(다시 말해 율의를 갖추어 받지 않더라도) 역시 근사가 성취된다는 사실은 또 다른 계경에 의해서도 입증되니, 계경에서 ‘무엇을 일컬어 우파색가의 시라가 원만하게 된 것이라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근사로서 능히 살생을 끊고[斷], 능히 살생 내지 음주를 떠난 경우가 그러하다’고 설한 바와 같다.47) 따라서 근사로서 율의를 결여한 자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는 이 경에서 설한 뜻에 심히 미혹하였다. 즉 이 경의 뜻은 무루의 시라를 설한 것이니, 여기에는 ‘목숨을 다할 때까지’라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경에서 “무엇을 일컬어 우파색가의 신근(信根)이 원만하게 된 것이라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근사로서 여래의 처소에 대해 신근을 갖고 머무는 경우가 그러하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한 바와 같다.48) 즉 어떤 오파색가에게 이러한 신(信)이 성취되지 않았을 경우라도 [그에게] 전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 ‘신근이 원만하게 된 것’이라고 하는 경설의 말은 다만 무루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앞서 설한 ‘계(즉 시라)가 원만하게 된 것’이라는 [경설의] 말은 유루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무루에 근거하여 이와 같은 말을 설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율의를 [모두] 갖추지 않은 근사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이러한 경설을 인용해서는 안 된다.
무루계(無漏戒) 중에 ‘음주에서 떠나는 것’은 없으니, 따라서 여기서 설한 해석은 이치상 필시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한다.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이 경에서는 ‘무루계 자체에는 수승한 공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타내어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부처님께서는, 무루 계의 힘에 의해서도 수지한 근사율의 내지 차계(遮戒, 즉 이음주계)를 역시 결정코 범하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이 경은 무루의 시라에 근거하여 ‘음주에서 떠나는 것’에 대해 설한 것이라 하더라도 역시 어떠한 과실도 없으며, 그래서 계경에서는 “‘견(見)이 원만하게 된 것’이란 끝내 고의적인 의지[故思]로 온갖 학처를 범하지 않는 것이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혹은 이 경에서 ‘시라가 원만하게 된 것’에 대해 설한 것은 ‘시라가 두루 청정하게 된 것’이라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즉 5계가 전혀 훼손되거나 결여되지 않았을 때 비로소 ‘시라가 두루 청정하게 된 것’이라 말할 수 있으니, 두루 청정하게 된 것에 근거하여 ‘원만하게 된 것’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만약 결정코 계를 떠난(다시 말해 계를 결여한) 근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는 곧 경에서 설한 “혹 어떤 종류의 오파색가는 신근(信根)을 갖추었지 계를 갖춘 것이 아니다.”는 사실에 위배될 것이다.
이는 서로 모순되지 않으니, 여기서는 근사가 능히 [5계를] 구족할 수 없다(모두 지닐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설한 것이니, 5계를 모두 지닌 자를 일컬어 ‘시라를 갖춘 자’라고 하지 않고 ‘신근을 갖춘 자’라고 한 것이다.49) 혹은 여기서 ‘갖추었다[具]’는 말은 ‘찬탄할만하다[可讚]’는 뜻을 나타내니, ‘이 칼은 잘 벼려져 빛을 갖추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것이 벼려지지 않았을 때라도 빛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계(戒)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여 그것이 찬탄할만한 것이면 이를 ‘갖추었다’고 말하였으니, 온갖 덕을 갖춘 계를 ‘찬탄할만한 것’이라고 말하였으며, 이와 반대되는 것을 ‘계를 갖추지 않았다’고 말한 것일 뿐이다.
만약 율의를 결여하였더라도 역시 근사라고 이름할 수 있다면, 필추와 근책의 율의를 결여하였더라도 역시 마땅히 [필추와 근책을] 성취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경주(經主)는 [이같이] 말하고 있다.
“어떠한 이유에서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 부처님의 교법의 힘[敎力]에 따라 [그것들을] 동일하게 시설하지 않았으니,50) 비록 율의를 결여할지라도 근사는 성취하지만 필추나 근책은 반드시 율의를 갖추어야 한다.”51)
그러나 이는 자신의 정의(情意)에 따른 것일 뿐이니, 경에서 설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경주)는 앞에서 오로지 『대명경』에서는 근사의 상(相)에 대해서만 설하였을 뿐이고, 그 밖의 다른 경에서는 그렇게 설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였는데, 여기서 마땅히 말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세존께서는 어디서 ‘율의를 떠나서도 역시 근사를 성취할 수 있다’고 설하였던 것인가? 일찍이 경부의 어떤 이가 “계를 갖지 않는 근책이나 필추도 역시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는 사실을 들은 적이 있지만, 그러한 주장은 마땅히 포랄나(布剌拏) 등의 온갖 외도들의 견해와 동일한 것으로,52) 불법(佛法)의 종의가 아닌 것이다.
3) 율의의 상ㆍ중ㆍ하품의 근거
일체의 율의의 품류는 동등한 것인가, 동등하지 않은 것인가?
[율의의] 품류는 동등하지 않으니, 세 가지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ㆍ중ㆍ상품의 차별은 무엇에 따라 성취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하ㆍ중ㆍ상품은 마음에 따른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8중(衆)이 수지하는 별해탈율의는 그것을 받는 마음에 따라 상ㆍ중ㆍ하품을 성취하니, 이와 같은 이치에 의해 온갖 아라한이라 하더라도 혹 어떤 경우 하품의 율의를 성취하기도 하며, 이생이라 하더라도 혹 어떤 경우 상품의 율의를 성취하기도 하는 것이다.
(1) 율의의 품류에 대한 상좌의 비평 비판
이에 대해 상좌(上座)는 이같이 부정하여 말하였다.
“이와 같은 종의는 정리와 성교에 위배되니, 만약 필시 그러하다고 한다면, 마땅히 용맹 정근하여 금계(禁戒)를 닦고 지니는 자도 없어야 할 것이다. 세존께서도 역시 ‘규범[軌]으로서 행해야 할 바는 모두 원만한 것으로, 아주 미세한 죄에 대해서도 크게 두렵게 생각하라’고 설하였으니, 이는 다만 이전에 획득할 때처럼 지녀 이를 훼손하거나 허물지(범하지) 않게 하기 위한 말이다. 따라서 마땅히 [금계에 대해] 용맹 정근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53)
닦고 지니는 것[修持]에 의해 하ㆍ중품[의 율의]가 중ㆍ상품으로 바뀌어 성취되지 않으며, 역시 또한 용맹 정진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하ㆍ중품을 버리고 중ㆍ상품의 계를 획득하는 것도 아니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인용한 계경을 해석하더라도 역시 다만 이전에 획득할 때처럼 지니더라도 능히 훼손하고 허문 미세한 죄에 대해 크게 두렵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이같이 설하였던 것으로, 이에 따라 [용맹 정근을 일으킴으로써] 계가 점차 증성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그가 말한 “모든 유위법은 찰나로서 머물지 않기 때문에(다시 상속 전변하기 때문에) 수지한 계는 중연(衆緣)의 힘이나 아세야(阿世耶)에 의해 하품으로부터 중품을 낳을 수 있고, 중품으로부터 상품을 낳을 수 있다.”고 하는 주장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수지할 율의는 수승한 인연에 근거할 때 비로소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수지한 계는 필시 수계의 인연[受緣]에 근거한 것으로, 이미 획득하였다면 자꾸자꾸 거듭하여 받을 수 없다. 만약 이전에 받았지만 이후 그러한 수계의 인연을 떠났다가 무릇 또 다른 인연을 만나 다시 획득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일찍이 수지하지 않았던 계도 무릇 또 다른 인연을 만나 역시 마땅히 획득할 수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니, [양자 사이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54) 비록 모든 유위법이 다 연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계(戒)는 반드시 수승한 연에 근거하여 생겨나기 때문에,55) 그의 말은 결정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4) 근사의 어의(語義)
어떠한 뜻에 근거하여 오파색가(鄔波塞迦)라고 말한 것인가?
그는 먼저 불ㆍ법ㆍ승 [3]보에 귀의하고, 존중해야 할 스승을 가까이하고[親近] 받들어 섬기며[承事] 시라를 호지(護持)하기 때문에 ‘근사(近事)’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능히 참답게 해야 할 바를 익혀 가까이[習近]하며 악한 사업(事業)을 괴멸하기 때문에 ‘근사’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능히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아 가까이하며 섬기기 때문에 ‘근사’라고 이름한 것이니, 모든 부처님이 청정한 시라의 선한 의요(意樂)를 획득하는 것과 부분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으로,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멀리 있으면서도 부처님과 가까이하여
부지런히 용맹 정근하여 귀의 예배하며
자비의 마음에서 악한 생각을 떠났으니
그래서 ‘근사’라고 이름한 것이라네.
(1) ‘근사는 천신(天神)에게도 예배해야 한다’는 주장 비판
지금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지혜가 없는 세간에서는 여러 종류의 천신을 섬기고 있는데, 모든 근사도 마땅히 그러한 천신에 대해 예배해야 할 것인가, 세존께 예배한 것처럼 마땅히 예배해서는 안 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어떠한 이유에서 갑자기 이에 대해 의심하게 된 것인가?
세간을 현견하건대, 삿된 천신[邪天]을 섬겨 그 마음을 애탐으로 물들이고 익히며, 자신의 정의(情意)에 따라 온갖 사업을 즐거이 짓는 어떤 종류의 무리들은 정리와 성교에도 근거하지 않은 채 이같이 거짓되게 말하고 있다.
“오파색가는 마땅히 천신에게 예배해야 할 것이니, 부처님께서 허락하였기 때문이다. 즉 부처님께서는 천신에게 공양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그런 까닭에 계경에서 ‘하늘에 공양하는 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드는 자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또한 [천을] 수념(隨念, 따라 기억)하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즉 세존께서는 ‘불ㆍ법ㆍ승 [3]보에 대해 수념하라’고 설한 것처럼 ‘마땅히 하늘에 대해 수념하라’고 설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천신에게 예배해야 할 것이다.56) 또한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경에서는 오파색가가 온갖 천신을 예배하는 것에 대해 부정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은혜가 있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그 같은 온갖 천신을 받들되 위의(威儀)에 부합하면 능히 은혜와 복을 주는 것이다. 또한 능히 손해를 끼치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그 같은 온갖 천신을 받들되 위의를 잃으면 능히 크나큰 손해를 보게 된다. 따라서 모든 근사는 마땅히 천신에게 예배해야 하는 것이다.”
저들의 종(宗)에서 설한 바를 간략히 서술하면 이와 같지만, 이러한 주장은 모두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먼저 저들은 ‘부처님께서 허락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천신에게 예배해야 한다’고 말하였지만, 부처님의 뜻은 그러한 것이 아니니, [부처님께서는] 간택 분별[簡別]하여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 경에서는 “모든 청정한 시주(施主)는 마땅히 제사[祠祀]를 받아야 할 온갖 천신에 대해 시시때때로 마땅히 [다음의] 세 가지 사실로써 전도됨이 없이 공양하고 예(禮)로써 받들어야 하며, 그(천신)는 시주에 대해 반드시 선심을 일으켜 그를 불쌍히 여기고 손해와 괴로움[損惱]이 없도록 호념(護念)해야 하니, 첫째는 시시 때때로 마땅히 단엄하고 청정하게 베풀어야 하며, 둘째는 시시때때로 마땅히 공양구를 베풀어야 하며, 셋째로 시시때때로 마땅히 찬송의 기원[頌願]을 베풀어야 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즉 [저들은] 세 가지 사실을 드러내어 이를 [천신께 예배해야 하는] 결정적 근거[決定因]로 삼았지만, 세존께서는 세 가지 사실을 제외한 그 밖의 무릇 시여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모두 허락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57)
“가지 수(數)를 드러내어 말하는 것은 결정적인 뜻을 나타낸 것이 아니니, ‘땅을 진동하게 하는 것’이나 ‘범하지 않는 것’ 등에 대해 설한 경우와 같다. 이를테면 경에서는 ‘네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대지가 진동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네 가지 인연 이외 더 이상 대지를 진동시키는 인연이 없는 것은 아닌 것과 같으며, 또한 경에서는 ‘모든 아라한은 능히 5처(處)를 필경 범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범하지 않는 곳이 더 이상 달리 없는 것은 아닌 것과 같으며, 또한 경에서는 ‘재가자든 출가자든 5처에 대해 마땅히 자주 관찰해야 한다’고 설하고 있지만, 그밖에 달리 관찰해야 할 곳이 없는 것은 아닌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은 따위의 말은 그 종류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 역시 바로 그러한 경우로서, [이것이 천신께 예배해야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해명은 옳지 않으니, 대지를 진동시키는 인연 등의 경우처럼 다른 경에서 설하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세 가지 사실’은] 결정적인 수를 나타내는 것으로, 대지를 진동시키는 등의 경우처럼 다른 경에서 결정적인 수가 아니라고 할 만한 말을 설한 적이 없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 경 중에서 드러내어 열거한 가지 수는 결정적인 이치를 나타낸 것임을 알아야 하니, 이를 제외한 다른 이론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혹 [그렇지가 않다고 한다면, 부처님께서] 설한 온ㆍ처ㆍ계 등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로 그것의 가지 수가 다 결정적이지 않다고 해야 한다.58) 혹은 [반대로 부처님께서] 설한 온ㆍ처ㆍ계 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지를 진동시키는 인연 등의 수도 역시 마땅히 결정적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드러내어 열거한 어떤 종류의 가지 수가 드러내어야 할 뜻에 대해 혹 어떤 것은 결정적이고 [혹 어떤 것은] 결정적이지 않은 것인가?”59)
다른 경에서는 이 경에서 밝힌 바를 제외하였기 때문에 [가지 수가 결정적이지 않은 것으로], 혹 어떤 경우 다른 경[에서 설한 바]를 관찰하지 않고 [밝히기도 하였지만], 혹 어떤 경우 다른 경[에서 설한 바]를 관찰하여 [밝히기도 하였기] 때문이다.60) 따라서 만약 일체의 경에서 설한 말을 [형식이] 같기 때문에 모두 동일한 사실[事]이라고 주장한다면, 크나큰 과실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또한] 만약 “경에서 ‘공양하라’는 등의 말을 설하였으니, 이는 바로 이미 ‘마땅히 예배하라’는 뜻을 드러내어 성취한 셈이다”고 한다면, 부처님께서는 마땅히 모든 천신의 무리들을 능히 제사지내는 시주에게 보내 그들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예배하게 하였다고 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그 경에서는 “모든 천신의 무리들은 이미 공양과 받들어 섬김을 받았으니 마땅히 반대로 시주에 대해 공양 등을 행함으로써 그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만 그들이 즐겨 행하고자 하는 일에 따라 다 같이 바로 공경하여 받드는 것을 일컬어 ‘공양’ 등이라고 말한 것일 뿐으로, 그것이 바로 예경(禮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 온갖 천신들은 근사(近事)의 주변에서 감히 예경 받기를 희구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군주(君主)로서 온갖 필추들로부터 결정코 예경받기를 희구하는 자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니, 공덕과 수명이 손상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비사문천(毘沙門天)이 대목련(大目連)과 사리자(舍利子) 등의 5백 성중(聖衆)을 청하여 자신의 궁중에 이르자 공양을 설(設)하고 나서 [찬]송의 기원[頌願]을 베풀어줄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다시 청하기를 ‘지금부터 모든 출가자와 근사 등이 나의 사원[寺]에 이르러 그들 모두가 마땅히 나에게 [찬]송의 기원을 베풀어주면, 우리의 권속들도 역시 지금부터 매양 정성을 다하여 정법을 호지(護持)하고 불제자인 출가자와 재가자들로 하여금 언제나 항상 손해와 괴로움이 없도록 하리라’고 하였다. 그 때 두 명의 대 성자가 그의 청을 허락하여 일체의 출가ㆍ재가자와 부처님의 금계를 수지한 모든 이들에게 두루 말하기를 ‘지금부터 이후 천중의 사원에 이르러 모두는 마땅히 여법하게 [비사문]천에게 [찬]송의 기원을 베풀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일찍이 합장하여 공경 예배하게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등등의 증거로 볼 때 세존께서는 결정코 이 경에서 예배 공경을 허락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이상 첫 번째 ‘부처님께서 허락하였기 때문이다’는 논거 비판)
또한 [저들은] ‘수념(隨念,따라 기억)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천신에게 예배해야 한다’고 말하였지만,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경의 뜻에 미혹하였기 때문이다. 경의 뜻은 마땅히 “그러한 온갖 유정은 신(信) 등을 성취하였으며, 이로부터 목숨을 버리고 나서 상생(上生)을 획득하여 사대왕중천이나 그 밖의 다른 천중이 되었으니, 나도 역시 ‘신’ 등의 선법을 성취하면 역시 마땅히 그와 마찬가지로 당래 생천(生天)을 획득하게 되리라”는 말을 억념[念]하라는 것이었다.
즉 자신도 그와 동일한 덕을 일으키게 하고자 ‘천(天)에 대해 수념하라’고 한 것이지 ‘예배 공경하라’는 뜻에서 ‘천에 대해 수념하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경설을 인용하더라도 그러한 [‘마땅히 천신에게 예배해야 한다’는]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이상 두 번째 ‘천신에 대해 수념하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는 논거 비판)
또한 [저들은] ‘[부처님께서도]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땅히 천신에게 예배해야 한다’고 말하였지만,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의미상으로는 이미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즉 경에서는 오로지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사실로써 천신에게 공양하는 것만을 인정하였을 뿐이다. 그러니 어찌 이것이 결정코 이미 예배하여 공경하는 것을 부정한 말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또한 『약설비나야(略說毘奈耶)』에 준하여 보건대, 여기서도 역시 의미상으로는 이미 천신에게 예배하는 것을 부정하였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간략한 비나야를 설하고서 여러 필추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문구(文句)에 따라 막고 제지[遮制]한 것은 어떠한 것도 행해서는 안 되며, 열어 허락[開許]한 것에 대해서는 그대들은 마땅히 행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하지 말도록] 막은 것도 아니고 [하도록] 열어 허락한 것도 아닌 경우, 더러운 것을 쫓고 청정한 것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어떠한 것도 행해서는 안 될 것이며, 청정한 것을 쫓고 더러운 것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그대들은 마땅히 행해야 한다.”
즉 [그대들은] ‘여래는 근사가 온갖 천중에 대해 예배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역시 또한 ‘근사가 온갖 천신에게 예배하는 것을 열어 허락하였다’는 말도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으니, 어찌 이것이 제3의 범주[聚] (다시 말해 하지 말도록 막은 것도 아니고 하도록 열어 허락한 것도 아닌 경우)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모든 근사가 천신에게 예배하는 이와 같은 행위는 더러운 것을 쫓고 청정한 것에 어긋나는 일로서, 이치상으로 볼 때 바로 부처님께서 허락하지 않은 행과 상응하며, 그런 즉 이 또한 부처님께서 이미 막고 제지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따라서]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라고 하는 논거는 지극히 잘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천신에게 예배하는 행위가 더러운 것을 쫓고 청정한 것에 어긋난다는 것인가?
만약 근사가 천신에 대해 예배하는 것을 즐겁게 여긴다면, 외도 등과 어떠한 차별도 없을 것이니, 그것은 삿된 무리들이 짓는 업을 애호하고 즐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근사가 천신을 예배 공경한다면, 그는 마땅히 천신을 찬탄하는 사론(邪論)을 애호하여 소중히 여기게 될 것이고, 그럴 경우 천신을 애호하여 즐겨 공경하는 삿된 무리와 함께 시라(尸羅)를 품수하여 그들과 힘써 도반이 될 것이며, 이러한 방편으로 말미암아 자주 삿된 스승[邪師]을 가까이함에 악취에 떨어지는 원인이 점차 견고해지고 더욱 치성하게 될 것이니, 이로부터 나아가 점차 다수의 생을 거치면서도 역시 이와 같은 삿된 행을 즐거이 많이 행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만약 온갖 삿된 천신을 예배 공경한다면, 그는 이로 인해 여래의 성교(聖敎)를 미워하게 될 것이니, 차라리 처중(處中)의 마음에는 미워함도 애호함도 없을지언정 삿된 천신을 공경하는 자로서 부처님의 공덕을 듣고서 분에심(憤恚心)을 낳지 않은 자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61) 또한 과실(過失)에 대해 예배 공경하는 자는 반드시 공덕(功德)을 공경하는 이에 대해 마음으로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크나큰 힘을 지닌 천신을 믿고 받드는 이를 ‘과실에 대해 공경하는 자’라고 말하는 것인가?
그러한 이에 대해 예배 공경하는 이는 항상 다른 이를 억누르고 굴복시키는 것을 즐거워하며, 배은(背恩)과 해코지와 아첨과 속임수 등 과실을 갖는 경계를 뛰어난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62)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오로지 아무 것도 들은 것이 없는 어리석은 이[無聞愚夫]들만이 그러한 천신에 대해 깊은 공경과 애호의 마음을 낳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온갖 현자와 성자의 경우라면, 오로지 단멸(斷滅)과 원리(遠離)와 적정(寂靜)과 대지(大智)와 대비(大悲) 등 온갖 공덕이 집성된 제불 세존에 대해서만 깊은 공경과 애호의 마음을 낳는 것이다.
이와 같은 뜻에 따라 어떤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빈천(貧賤)한 이는 희구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있기에
어리석은 이들은 천신(天神)을 공경하는 것이지만
부귀한 이는 두려워하거나 희구하는 바가 없기에
지혜로운 이들은 오로지 부처님을 공경하는 것이라네.
또한 만약 근사가 천신을 공경하고 예배한다면, 수많은 유정을 크나큰 쇠퇴와 손상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니, 이를테면 천신을 섬기는 자들은 다 같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파색가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등한시하고서 지금 바로 와서 내가 섬기는 천신에게 예배 공경하라. 그러면 반드시 천신에 대한 공경과 믿음의 마음을 품게 될 것이니, 선재(善哉)라. 우리는 전도됨이 없이 귀의한 것이로다.”
[그러면] 또한 온갖 세간이 즐겁다고 관찰하는 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추측하여 생각함에 그것의 진실을 구명하지도 않은 채 이에 대해 문득 이와 같은 편벽된 주장을 낳게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응당 세간의 서전(書傳)과 유사한 것이어서 [그것으로는] 결정코 참된 의리(義理)를 분별할 수 없을 것이리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와 같이 이해하는 이는 온갖 천신들의 무리로 돌아가 귀의하게 되니, 이와 같은 등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유정을 인도하여 삿된 주장을 증가시키기에 ‘크나큰 쇠퇴와 손상[으로 인도하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
근사가 이와 같이 천신에게 예배 공경하는 행위는 청정한 것에 어긋나고 더러운 것을 쫓는 일로서, 이는 부처님에 의해 [마땅히 행해서는 안 될 것으로] 부정[遮止]된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근사는 천신에 대해 예배해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부정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의 근거가 되는 것도 아니다.63) 이는 ‘부처님께서는 필추가 계를 버리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고 하는 말과 동일하니, 일찍이 부처님께서 “필추는 마땅히 배워야 할 계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설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부처님께서 계를 버리는 것에 대해 일찍이 부정하지 않았다고 하여 바로 ‘모든 필추들은 법으로서 마땅히 계를 버려야 한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파색가는 마땅히 천신에게 예배해야 할 것이니, 부처님께서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이상 세 번째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는 논거 비판)
또한 [저들은] ‘은혜가 있기 때문에 마땅히 천신에게 예배해야 한다’고 말하였지만,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천신이 유정을] 미워하는 일도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전하여 듣건대, “열병이나 늙음과 죽음 등의 괴로움도 역시 바로 그들 천신이 지은 바이다”고 하였으니, 결정코 세간에 대해 은혜가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바라문이나 장자(長者) 거사(居士)도 필추 중(衆)에 대해 은혜가 있다”고 부처님께서 설하였으니, 목숨의 조건[命緣, 예컨대 음식이나 의복]을 공급하여 고달픔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필추 중도 마땅히 시주에 대해 예배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듯] 은혜가 있다하여 그들 모두에게 예배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가 설정한 논거는 진위부정의 오류[不定失]를 범한 것이다.
또한 모든 함식(含識, 유정을 말함)은 모두 다 자신의 업에 의해 초래되는 온갖 이숙과를 수용한다.(다시 말해 유정이 향수하는 모든 일은 자업자득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설한 ‘섬겨야 하는 천신은 세간에 대해 은혜가 있다’고 하는 주장은 역시 또한 미확정의 오류[不成失]을 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상 네 번째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는 논거 비판)
이에 따라 ‘능히 손해가 되기 때문에 [마땅히 천신에게 예배해야 한다]’는 논거 역시 이미 논파한 셈이니, 일체의 유정은 다 자신의 업에 의지하는 것인데, 누가 어떤 힘을 지녔기에 능히 누구에게 손해를 끼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이미 그(천신)는 다른 이에 대해 능히 손해를 끼치는 이라고 하였는데, 어떤 지혜로운 자가 자신의 원수를 애호하고 공경할 것인가?
세간에서는 착한 이가 능히 다른 이를 이롭게 하면, 이익을 입은 자는 마땅히 그 사람을 공경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온갖 천신은 대개 그 성질이 분에(憤恚) 즉 분노하고 미워하는 것이어서 항상 다른 온갖 유정을 손상시키고 괴롭히는 것을 즐거워하니, 마땅히 [세간에서는] 자신의 원수를 미워하는 것처럼 공경하고 예배하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그가 설한 바는 [세간의 사실과] 서로 모순되는 이유[相違因]인 것이다.
또한 세간을 관찰하건대, 천신에 귀의하여 공경하는 자라도 천신은 어느 때 그를 쇠퇴하게 하며, 역시 또한 어떤 유정이 천신을 공경하지 않을지라도 천신은 그에 대해 능히 해코지할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설한 바는 천신을 공경해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왕의 경우와 같다’고 한다면,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세간이 의지하고 계속(繫屬)되는 존재[法]라면 응당 마땅히 그러해야 하기 때문이다.64) 그러나 모든 근사는 천신에 계속되지 않으며, 스스로는 바로 [천신에 예배하는] 삿된 무리들을 이끌어 [부처님에게로] 귀의하고 부촉[歸附]하는 자이다. 세간의 군주는 [세간의] 뭇 대중들에게는 의지처가 되지만, 출가인은 모두가 공경 [예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이상 다섯 번째 ‘손해를 끼치기 때문이다’는 논거 비판)
그렇기 때문에 ‘근사는 마땅히 일체의 천신에 대해 공경 예배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이치 는 지극히 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아비달마순정리론 제38권
4. 변업품 ⑥
5) 삼귀의의 본질과 목적
5-1) 귀의불(歸依佛)
온갖 유정으로서 불(佛)ㆍ법(法)ㆍ승(僧)에 귀의하는 자는 무엇에 귀의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부처와 승가를 성취하는
무학(無學)과 두 가지 법과
아울러 열반택멸에 귀의하면
이를 설하여 삼귀의를 갖추었다고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예컨대 본론(本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귀의불(歸依佛) 즉 ’불타에게 귀의한다’고 함은 어떠한 법에 귀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만약 제법이 묘유(妙有)로서 지금 바로 존재한다[現有]는 사실을 상(想)과 등상(等想)에 의해 시설(施設)하고 언설(言說)하는 이를 일컬어 ‘불타’라고 한다면, 능히 불타를 성취하는 이러한 무학법에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1)
여기서 ‘이를테면 만약’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마땅히 논설해야 할 뜻을 전체적으로 나타내며, ‘제법’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무아(無我)를 드러내는 증언(增言)이다.2) ‘묘유’라고 하는 말은 [제법이] 미묘한 실유의 성질과 부합함을 나타내며, ‘지금 바로 존재한다’고 함은 지금 바로 획득될 수 있다는 뜻을 밝힌 말이다. 혹은 미묘한 공덕(妙德)과 부합하기 때문에 ‘묘유’라고 말한 것이며, ‘지금 바로 존재한다’고 하는 말은 바로 ‘알려지는 것[所知性]’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또한 ‘상(想)’은 명칭이나 언설[名言]을 말하며, ‘등상(等想)’이란 바로 능히 그 의미를 드러내는 표시[能詮標擧]들을 [‘상’과] 함께 건립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에 근거하여] 능히 그 의미를 드러내었기 때문에 ‘시설’이라고 말한 것이다.3)
어떠한 까닭에서 [불타에 대해] 표시[標擧]하고 난 다음에 [물음에] 답하여 말한 것인가?
이렇게 함으로써 능히 전도됨이 없는 언설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체법과 일체종(種)의 상(相)을 깨달은 분으로서 다른 이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불타’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이러한 원성지(圓成智) 등의 온갖 공덕을 자연적으로 열어 깨달았기 때문에 ‘불타’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불타’라는 명칭은 바로 그 같은 ‘깨달음을 갖는 이[有覺]’를 나타내니, 마치 질애(質礙)의 사물을 ‘질애를 갖는 것[有質礙]’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 혹은 ‘불타’라는 명칭은 능히 자신이 증득하고 깨달은 바를 설함으로써 다른 이로 하여금 열어 깨닫게 하는 분임을 나타내니, [이상의 사실들은] 바라문이 부처의 처소에 와 미묘한 찬송(讚頌)으로써 세존께 물어 말한 바와 같다.
최상각자(最上覺者)라고 일컬어지는
세간의 도사(導師)께 머리를 조아리니
어떠한 이유에서 [우리의] 부모들은
존자를 불러 ‘불타’라고 말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세존께서는 그 바라문을 불쌍하게 여겨 역시 [다음과 같은] 가타(伽他)로써 그에게 말하였다.
바라문이여, 마땅히 알라.
나는 과거와 미래의 부처님처럼
각자(覺者)의 상을 성취하였으니
그래서 나를 ‘불타’라고 말하는 것이로다.
바라문이여, 마땅히 알라.
나는 삼세의 행(行)이 모두
생멸을 갖는 법임을 관찰하였으니
그래서 나를 ‘불타’라고 말하는 것이로다.
바라문이여, 마땅히 알라.
나는 마땅히 알고 끊고
닦고 증득해야 할 법을 이미 다 이루었으니4)
그래서 나를 ‘불타’라고 말하는 것이로다.
바라문이여, 마땅히 알라.
나는 일체의 경계에 대해
일체의 지견(知見)을 갖추었으니
그래서 나를 ‘불타’라고 말하는 것이로다.
바라문이여, 마땅히 알라.
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겁(劫)동안
온갖 순정(純淨)의 행을 닦았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생을 거쳐
지금 최후신(最後身)에 이르러
더러운 번뇌[塵垢]와 독화살[毒箭]을 떠나
무상(無上)의 깨달음을 증득하였으니
그래서 나를 ‘불타’라고 말하는 것이로다.
나아가 ‘능히 불타를 성취한다’는 말은, 그러한 제법은 불타를 시설하는데 건립인(建立因)이 되는 것임을 나타낸다.
어떻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량의 법을 전체적으로 건립하여 ‘한 분의 불타’라는 이름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인가?
예컨대 다수의 사람들이 화합한 것에 근거하여 하나의 승보(僧寶), 하나의 뛰어난 귀의처로 설정한 것과 같다. 또한 다수의 무루도에 근거하여 하나의 도온(道蘊)을 설정하더라도 여기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 혹은 앞에서 이미 논설하지 않았던가?
앞에서 어떻게 논설하였던 것인가?
이를테면 “[그러한 미묘한 제법을] 상(想)과 등상(等想)에 의해 시설(施設)하고 언설(言說)하는 [이를 일컬어 ‘불타’라 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부처님께서 상속한 [온갖] 무학법에 대해 ‘한 분의 불타’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이러한 ‘한 분의 불타’와는 별도로 능히 불타를 성취하는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5)
그렇다면 이러한 [능히 불타를 성취하는] 법이란 어떠한 법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진지(盡智) 등과 그 권속(진지에 隨行하는 무루5온)을 말하니,6) 그러한 법을 획득함으로 말미암아 능히 일체를 깨닫게 된다. 즉 그러한 법은 수승하기 때문에 그러한 [법]신(法身)은 ‘불타’라는 명칭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색 등의 소의신을 [불타라고 말하지] 않으니, 전후가 동등하기 때문이다.7)
그렇다면 한 분의 불타[一佛]에게 귀의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일체의 불타[一切佛]에게 귀의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이치상으로 볼 때 실로 마땅히 일체의 불타에게 귀의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니, 모든 불타가 깨달은 성도(즉 무루도)의 상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
(1) 색신(色身)도 불타의 체성(體性)이라는 경주 설 비판
그런데 경주(經主)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본론(本論, 아비달마론)을 살펴보면 ‘오로지 무학법 만을 일컬어 불타라고 한다’고 말한 것은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무학법은 능히 불타를 성취한다’고 말하고 있을 뿐 소의신(즉 색신)도 역시 불타의 체성(體性, 즉 본질)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해 힐난하여 말할 수 없다. 만약 오로지 무학법 만이 바로 불타라고 한다면, 불타의 소의신[佛所]에 악심으로 피를 내게 하였을 경우 그것은 다만 생신(生身)이 손상된 것일 뿐인데, 어떻게 무간죄(無間罪)를 성취하게 되는 것인가?”8)
지금 자세히 살펴보건대, 경주는 본론의 뜻에 대해 깊이 탐구하여 헤아려보지 않았으니, ‘능히 불타를 성취한다’는 말은 이미 ‘불타 자체에 소의신이 포섭된다’는 사실을 부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불타’라는 말은 깨달음[佛]이라는 뜻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으로, 오로지 이에 근거한 것만이 참된 불타의 체성이다. 만약 ‘불타’라는 말을 소의신에 근거하여 설정한 것이라고 한다면, 아직 무학법을 증득하지 않았을 때에도 이미 [동일한] 소의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역시 마땅히 ‘불타’라고 이름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타’라는 호칭은 소의신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소의신에 의해 능히 불타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론에서 설한 ‘능히 불타를 성취한다’는 말은 이미 ‘소의신도 역시 불타의 체성이다’는 사실을 부정한 것이며, 이미 ‘불타의 체성은 오로지 무학법 뿐이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야 한다.
설혹 그렇다고 인정하더라도 (다시 말해 소의신도 불타의 체성이라고 인정하더라도), 역시 힐난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불타의 체성에는 간략히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세속(世俗)이며, 둘째는 승의(勝義)이다. 그리고 [여기서] ‘[색신의] 부처님에게 귀의한다[歸依佛]’고 함은 세속[의 불타]에 대해 [귀의한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으로, 승의의 불타의 경우에는 계념(繫念, 한 마음으로 집중하여 憶念하는 것)이 바로 귀의하는 것이다. 즉 소의신에 의탁함으로써 그에게 귀의하였지만, 그것(세속의 불타에 대한 귀의)을 획득함으로 말미암아 [무학]법이라고 이름하는 [승의의] 불타[에 대한 귀의]를 획득하기 때문에 오로지 무학법 만이 바로 승의의 불타인 것이다.9)
나아가 무간죄를 성취하는 것은 승의[의 불타]를 손상시키는 것에 의해서이다. 그렇지만 승의의 불타는 필시 손상될 수 없으니, 이와 같은 이치에 근거하여 이 같이 힐난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불타의 소의신에 악심으로 피를 내게 하였을 경우 그것은 다만 생신(生身)이 손상된 것일 뿐인데, 어떻게 무간죄를 성취하게 되는 것인가?”
[이에 대해] 비바사자(毘婆沙者)는 “그러한 [무학법의] 소의신을 파괴할 때 그 법도 따라서 파괴되기 때문이다.”고 해석하였으니,10) 힐난에 대해 이와 같이 해석한 것은 심히 이치에 맞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저 경주는 이와 같이 힐난하였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소의신이 불타의 체성에 포섭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불타와 승가가 세속심(즉 유루심)으로 머물 때 마땅히 승가도 아니고 불타도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그와 같다는 것인가?
그 때에는 학(學)ㆍ무학의 법이 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11)
그러나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그 같은 사실은]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학ㆍ무학의 법이 오로지 현전하는 상태에서만 비로소 불타와 승가를 성취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로지 그러한 [학ㆍ무학의] 법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불타와 승가를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할 뿐이다.12) 일찍이 [욕계 내지 무색계의 유정천에 이르는] 모든 단계에서 무간단(無間斷)을 획득하였는데, 어찌 세속심에 머문다고 하여 바로 불타도 아니고 승가도 아니라고 할 것인가?
그리고 설혹 현재(다시 말해 학ㆍ무학의 법이 오로지 현전하는 상태에서) 비로소 불타와 승가를 성취한다고 하더라도 역시 어떠한 과실도 없으니, 그들이 그 때 획득하는 체성 역시 학ㆍ무학의 법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모든 때에 걸쳐 항상 현전하기 때문이다.
경주는 다시 말하기를, “[그럴 경우] 마땅히 오로지 필추를 성취하는 [구족]계 만이 바로 필추라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13)
이는 바로 우리가 종의로 삼는 바로서, 어찌 여기에 과실이 있다고 하겠는가? [구족]계를 획득하였기 때문에 그의 소의신도 역시 가설(假說)하여 필추라고 이름한 것이니, 앞에서 뜻도 동일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주는 대법종(對法宗)에서 설한 [아비달마] 문구의 뜻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보특가라가 불타의 체성이라는 독자부(犢子部) 설 비판
바자자부(婆雌子部)에서는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14) “보특가라(補特伽羅)가 바로 귀의해야 할 불타이다.”
그러나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그것은 무차별적인 것이어서 [특정한 이에 대한] 귀의를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이계(離繫)의 보특가라에 귀의하는 것과 세존[의 보특가라]에게 귀의하는 것에 무슨 차별이 있을 것인가? [예컨대] 선 [불선] 등의 차별은 동일한 말로 표기되지 않기 때문이다.15)
만약 “마치 불이 그 근거에 따라 차별되는 것과 같으니, 이를테면 겨에 근거한 것을 ‘겨의 불[糠火]’이라고 이름하듯이,16) 이와 마찬가지로 불법(佛法,즉 무학법)에 근거한 그것(보특가라)을 ‘불타’라고 이름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해명은 옳지 않으니, [뭔가에 근거한 것은] 마땅히 무상한 것이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며, 헛되이 해명하여 주장한 것이어서 아무 것도 성취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가 주장한 보특가라는 이미 소의(所依)에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마땅히 무상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또한 겨에 근거한 불을 바로 ‘겨의 보특가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닐 뿐더러, 만약 불법에 근거한 보특가라를 다만 마땅히 ‘불타의 보특가라’라고 이름한 것이라고 한다면, 보특가라를 바로 불타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와 같이 해명하여 주장하였을지라도 결국 무엇을 성취할 것인가?
보특가라는 법에 따라 차별을 성취한다고 이미 주장하였으니, 마땅히 능히 차별 짓는 [무루의] 법이 바로 불타이며, 그 밖의 것은 불타가 아니라고 인정해야 한다. 곧 [‘귀의불’에서] ‘귀의한다’는 말은 의지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로 말미암아 능히 [3계에] 존재하는 생사의 재환(災患)을 소멸한다. 이와 같은 작용을 갖는 것만이 오로지 이러한 [무학]법의 상(相)이기 때문에 이러한 [생사의 재환을 소멸하는] 법이 바로 귀의해야 할 바이며, 그 밖의 다른 법은 그렇지 않다(귀의해야 할 바가 아니다)고 말해야 하니, 이것이야말로 선설(善說)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마땅히 불타의 보특가라는 세간법(즉 유루법)도 성취한다고 인정해야 하니, 그래서 계경에서는 “지금 세존을 보건대, 제근(諸根)이 변이하였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대들은 이미 ‘보특가라는 소의에 따르기 때문에 차별을 성취한다’고 주장하였으면서 어떠한 이유에서 불법(佛法)에 근거한 그는 ‘불타’라는 명칭을 획득하지만, 불법이 아닌 것(즉 유루 세간법)을 근거로 하는 이에 대해서는 ‘불타가 아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인가?17) 여기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차별될만한 이치가 없기 때문에 [유루의 세간법을 성취한 불타에 대해서는 ‘불타가 아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비록 머리카락 등이 검을지라도 그 같은 사실에 따르지 않고 [피부색에 따라] 백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그럴 경우 마땅히 앞서 해명한 주장을 버려야 한다. 즉 저들은 앞에서 ‘보특가라 [자체로서는 동일하지만] 소의에 따르기 때문에 차별을 성취한다’고 해명하여 주장하였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특가라는 그 소의에 따라 차별을 성취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 불 또한 차별의 명칭을 획득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불의] 일부는 소의에 따르지만 일부는 따르지 않는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유루(즉 세간법)와 무루(즉 무학법)에 근거하여 성취된 보특가라는 마땅히 두 가지 실체를 성취해야 할 것이며,18)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마땅히 앞서 해명한 주장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또한 세존께서는 “나는 세간에 태어났다”고 설하였지만, 보특가라가 아닌 것도 역시 태어나는 이치가 있는 것이다.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세존께서는 마땅히 “나는 세간에 나타났다”고 설했어야 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설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결정코 [보특가라가 아니라 무학의] 법을 귀의해야 할 바라고 해야 할 것이니, 세존께서는 다만 “마땅히 법에 의지해야 하는 것으로, 그러한 보특가라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과 같다.19) 또한 세존께서는 “만약 법을 보는 자라면 바로 나를 보는 자이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불타가 비록 전변(轉變)할지라도 마음에는 어떠한 변이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대들의 주장에 의하면 보특가라는 전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대들은 보특가라가 무상한 것이라고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귀의’라는] 뜻에 편승하여 바야흐로 다른 이치로써 그대들이 귀의해야 할 바라고 주장한 보특가라에 대해 논파하였지만, 그 자체 실유가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널리 분별하게 될 것이다.
(3) 유루와 무루가 모두 불타의 체성이라는 구마라다(矩摩邏多) 설 비판
존자 구마라다(矩摩邏多)는 이와 같이 말하였다.20)
“부처님의 유루법과 무루법이 모두 다 불타의 체성이기 때문에 계경에서는 ‘이제 불신(佛身)이 늙고 쇠퇴하였다’고 설하고 있으며, 또한 세존께서는 설하기를, ‘나는 이제 중병이 들어 죽음이 임박하였다는 느낌[隣死受]이 든다’고 하면서 아난타(阿難陀)에게 ‘그대는 마땅히 불타를 위해 여기에 올달라승(嗢怛羅僧)을 펼쳐라’고 말하였던 것이다.21) 또한 계경에서 말하기를, ‘그대들은 마땅히 음식을 부처님을 상수(上首)로 하는 승가에 여법하게 공양하라’고 하였으며, 또한 계경에서 말하기를, ‘모든 필추 중(衆)들은 부처님의 말씀[佛語]를 수지하라’고 하였다.
또한 계경에서 말하기를, ‘여래의 소의신[如來所]에 악심으로 피를 내게 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경에서 ‘부처님께서 발로 옷을 밟았다’고 설하고 있으며, 또한 계경에서 말하기를, ‘나는 지금 부처님의 위력과 광명이 치성하여 마치 미묘한 금대(金臺)와 같음을 관찰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이를테면 세존께서는 ‘나는 이제 사다산(娑多山)으로 가 약차(藥叉)의 은혜를 갚고자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계경에서 말하기를, ‘그대 상인[商主]들이여, 만약 부처를 만난다면 무상(無上)의 이익을 얻게 되리라’고 하였다.
또한 다른 이를 요익(饒益)되게 함으로써 비로소 ‘불타’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다른 이를 요익되게 하는 것은 대개 세속지(世俗智)인 것이다. 또한 모든 부처님은 대비(大悲)를 체성(體性)으로 삼았는데, 이는 바로 유루법이니, 유정의 상(相)을 보고서 일으키기 때문이다.22)
이와 같은 따위의 교증(敎證)과 이증(理證)은 매우 많지만, 무루법의 경우에는 이같이 [많은 종류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오로지 무루의 불법만이 불타의 체성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무학법의 힘으로 말미암아 소의신 등의 법에 대해 일시 ‘불타’라는 명칭을 설정하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러함을 알게 된 것인가?
부처님의 안근 등은 [깨닫기] 전의 안근 등과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소의신 등의 법을 불타라고 말한 것은] 유루를 무학의 명(明)이라 말한 것과 같으니, 경에서 설한 3명(明)은 바로 무학[의 경계]이기 때문이다.23) 즉 사생지(死生智)는 무학의 법이라고 할 수 없으니, 이는 형색과 현색을 반연하는 지혜이기 때문이며, 유정의 상(相)은 전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학의 소의신도 무학이라는 명칭을 획득하는 경우가 있으며, 다른 법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즉 [부처님의 소의신 등은] 온갖 불법(佛法)과 함께 동일한 상속에 포함[墮]되기 때문에 역시 ‘불타’라는 명칭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부처님의 소의신[佛身] 등을 바로 ‘불타’라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니, 마땅히 끊어야 할 것[應斷]이기 때문으로, 대저 ‘불타’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어떠한 과실도 없을뿐더러 끊어야 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경에서 “몸은 무명의 집성(集成)이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니, 어찌 불타를 역시 무명의 집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모든 부처님의 몸도 부정(不淨)의 경계라고 해야 할 것이니, 일체의 모든 욕계의 색은 바로 부정관(不淨觀)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타는 마땅히 부정관의 경계가 된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니, 경에서 “불타를 반연하면 선근을 증장하고 흔(欣,기쁨)의 작의를 낳게 된다”고 설하고 있지만, 모든 부정관은 한결같이 염(厭,싫어함)의 작의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소의신은 바로 진실의 불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또한 [계경에서] “업(業)과 식(食)은 몸의 원인이 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부처님의 소의신[佛身]은 온갖 처소(즉 백 겁의 전생)에서 지은 업의 이숙과에 포섭될뿐더러 바로 단식(段食) 등에 의해 자조되고 장양되는 것인데, 어찌 이에 대해 진실의 ‘불타’라는 명칭을 설정하겠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불타도 업을 원인으로 하여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지혜 있는 자로서 그 누가 이를 꾸짖지 않겠는가? 지혜 있는 자가 잘못하여 이러한 말을 내뱉을 경우, 어찌 그 후에 스스로 성찰하여 뉘우치거나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만약 ‘부처님의 자량(이를테면 6바라밀)에 근거하고 섭익(이를테면 18불공덕) 등에 의지하여 [그의 소의신을] 일시 불타라고 설하였다’고 한다면, 이치에 막힘이 없을 것이니, 일찍이 다른 곳에서도 역시 이러한 예(例)를 본 적이 있기 때문으로, “식(食)은 바로 목숨[命]이며, 낙(酪)은 바로 열병 등이다”고 말한 것과 같다.24)
또한 부처님의 소의신 중에 일어난 대비(大悲)와 세속지(世俗智)는 일찍이 보살의 계위에 있을 적에도 그 체성이 이미 존재하였으니,25) 만약 이것이 바로 ‘불타’라고 한다면, 불타는 마땅히 [깨닫기] 이전에 성취하였어야 한다. 만약 별도의 원인이 있어 이러한 두 종류로 하여금 [깨달은] 이후에도 일어나게 하였기에 이를 ‘불타’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같이 능히 차별하는 법(즉 별도의 원인)이 바로 불타이며, 그 밖의 것은 불타가 아니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구마라다의 주장에 대한] 논파 역시 앞서 정리에도 어긋나고 성교에도 위배되는 것임에도 스스로 분별하여 집착한 어떤 부류(즉 독자부)의 주장[에 대해 논파한 것]과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4) 여래의 소의신은 무루라는 대중부(大衆部) 설 비판
그런데 대중부(大衆部)는 다시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여래의 소의신 중에 존재하는 제법은 다 무루로서, 바로 귀의해야 할 바이니, 경에서 소의신에 대해서도 이미 닦았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는 ‘몸과 마음을 이미 닦았다’고 설하고 있는데, 이미 마음을 닦았다고 설하였으므로 ‘마음은 바로 진실이며 청정한 것이다’고 인정하였듯이, 몸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그렇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 [몸을] 닦았다고 설하였는데 어찌 진실의 무루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은 경증은 그 종류가 실로 많다.”26)
이러한 어떤 부류의 종의에 대해서는 「변본사품」에서 이미 널리 비판 부정하였으니,27) 수고스럽게 여기서 거듭 논파할 것이 없다.
그런데 계경에서 “이미 몸을 닦았다”고 설하고 있지만, 이는 대치의 닦음[對治修]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즉 여기서 ‘이미 수습(修習)하였다(닦았다)’고 함은 능히 색염(色染)을 떠나는 무간도[를 닦았다는] 뜻이다.
또한 계경에서 “그는 이미 네 종류의 염주(念住)를 수습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며,28) 다시 “4념주는 일체법을 전체적으로 포섭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럴 경우(다시 말해 색신을 무루라고 할 경우) 일체법을 마땅히 무루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는 그 자체의 성상(性相)에 근거한 것으로, 두 가지 염주를 배제하고 설한 것이다”고 한다면,29) 나머지 [두 가지]도 역시 마땅히 동일하다고(다시 말해 무루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이미 몸을 닦았다”고 말하였던 것인데, 어떠한 까닭에서 [4념주 중에서] 신념주(身念住)를 닦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또한 [부처님께서는] 유루의 선(善)도 역시 닦았기 때문에, “[이미 몸을] 닦았다”는 말을 인용하여 [그것이] 무루임을 입증하는 이러한 논증이 어찌 이치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그는 말하기를, “만약 부처님의 안근 등은 바로 번뇌의 경계이며, 따라서 유루라고 한다면, 역시 또한 이염(離染)의 소연도 된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어떠한 이치에서 이것이 바로 무루성임을 부정하는 것인가?”라고 하였지만, 이러한 예(例)는 동등한 경우가 아니니, 앞에서 이미 분별하였던 것처럼 유루와 무루는 그 상이 차별되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는 “번뇌의 소연이 되는 것으로서 성도(聖道)에 의해 염[사](厭捨)되는 것을 ‘유루’라고 이름한다”고 설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함께 심구(尋求,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경의 뜻이나 [그것을 설한] 선서(善逝,불타)의 뜻은 지극히 알기 어렵지만, 여기서 이 경에서 설한 뜻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만약 소연의 경계로서 번뇌가 미착(味着)하여 자신의 소유라고 집착하는 것이면서 또한 역시 성도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厭惡], 이것을 바로 유루라고 이름하니, 이치상 마땅히 안근 등은 번뇌[漏]에 의해 미착되어 자신의 소유라고 집착하기에 ‘유루’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안근 등의 제법은 무루(즉 성도)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역시 무루가 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기뻐하고[欣] 싫어함[厭]이 이미 다르니, [서로의] 예가 되기에는 동등하지 않은 것이다. 즉 부처님의 안근 등도 기뻐하며 즐거이 무루의 제법을 소연의 경계로 삼아 도(道) 등의 행상(行相)을 짓는 것이 아니기에,30) “부처님의 안근 등의 법은 무루(즉 성도)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무루가 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탐ㆍ진이 온갖 번뇌[漏]에서 일어나듯이, 안근 등에서 그러한 [탐ㆍ진의] 상(相)을 일으키는 경우에도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안근 등의 제법은 온갖 번뇌의 법과 마찬가지로 역시 유루가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가 성도에서 일어나듯이 안근 등에서 그러한 [성도의] 상을 일으키는 경우에는 역시 그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안근 등의 제법은 성도의 법과 마찬가지로 역시 무루가 된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저들(대중부)은 힘써 노력하였지만, 성취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비록 자신의 정의(情意)에 따라 온갖 종류의 그릇된 주장을 펼쳤을지라도 우리의 종의나 경에서 설한 바를 훼손시키지 못하였으니, 오로지 대성(大聖)이신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께서 설한 것만이 귀의해야 할 불타의 체성으로서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31)
5-2) 귀의승(歸依僧)
승가(僧伽)의 차별에는 간략히 다섯 종류가 있으니, 첫째로는 무치승(無恥僧)이며, 둘째로는 아양승(啞羊僧)이며, 셋째로는 붕당승(朋黨僧)이며, 넷째로는 세속승(世俗僧)이며, 다섯째로는 승의승(勝義僧)이다.
여기서 무치승이란, 이를테면 금계(禁戒)를 훼손하면서도 법복을 입은 보특가라를 말한다. 아양승이란, 이를테면 삼장(三藏)에 대해 이해[了達]한 바가 없는 보특가라로서, 비유하자면 벙어리 양처럼 변설(辯說)의 공용이 없는 자를 말한다. 혹은 ‘아(啞)’라고 하는 말은 법을 설할만한 능력이 없음을 나타내며, 다시 ‘양(羊)’이라고 하는 말을 설한 것은 법을 들을만한 공용이 없음을 나타내니, 이러한 유형의 보특가라는 바로 삼장에 대해 듣거나 설할 만한 공능이 없음을 의미한다. 붕당승이란, 이를테면 유행하고 돌아다니며 업무를 경영하고 다투고 쟁론함에 있어 뛰어난 방편으로 붕당을 결성하는 보특가라를 말하는데, 이상의 세 가지 승은 대개 비법(非法)의 업을 짓는 자들이다.
그리고 세속승이란, 이를테면 선한 이생(異生)을 말하는데, 이들은 작법(作法)과 비작법의 업에 능통한 이들이다. 승의승이란, 이를테면 학ㆍ무학의 법과 아울러 그것의 소의로서의 그릇이 될 만한 보특가라를 말하는데,32) 이들은 결정코 비법의 업을 짓는 일이 없어 다섯 종류 가운데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바로 귀의해야 할 이들이니, 귀의를 찬탄하는 가타(伽他) 중에서 설한 바와 같다.
이들에 대한 귀의야말로 가장 뛰어나며
이들에 대한 귀의야말로 가장 존귀하니
필시 이러한 귀의에 의해
능히 온갖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리라.
이와 같은 [학ㆍ무학의] 법과 보특가라라는 두 가지 승의승(勝義僧) 중에서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의 뜻은 다만 [학ㆍ무학의] 법을 귀의해야 할 승가[所歸僧]로 삼는다는 것이니, 그래서 본론(本論) 중에서 이와 같이 설하였던 것이다. “[‘귀의승’ 즉 ‘승가에 귀의한다’고 함은] 능히 승가를 성취하는 학ㆍ무학법에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33)
어찌 이러한 논설이 경에 위배된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를테면 계경 중에서 세존은 “4쌍(雙) 8척(隻)의 보특가라는 바로 복전승(福田僧)으로, 모두에 마땅히 공양하여야 한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경에는 별도의 다른 뜻의 있으니, 이를테면 그 경에서는 ‘복전승에 대해 마땅히 공양하여야 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 경의 뜻은 ‘능히 보시를 받을 수 있는 승가’에 대해 나타낸 것으로, 두 가지 승의승(勝義僧) 중에서 능히 다른 이의 보시를 받는 자는 학ㆍ무학법이 아니라 오로지 [그것을 성취한] 보특가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본론(本論) 중에서는 “귀의의 뜻이란, 진실로 능히 구호(救護)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야흐로 귀의해야 할 바이다”고 하였으니,34) 진실로 구호하는 공능은 오로지 성법(聖法)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경에서도 말하기를, “다만 마땅히 법에 의지하지 그러한 보특가라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던 것으로,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논(論)과 경(經)는 서로 상위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는 마땅히 불요의경(不了義經)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이치에 위배되지 않는 별도의 뜻에 근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별도의 이치에 근거할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이러한 종류의 경을 일컬어 ‘불요의경’이라고 한다. 즉 이 경 중에서 설정한 바는 4[쌍] 8[척]의 과(果)ㆍ향(向)으로 차별되는 보특가라라는 존재[法]이지만,35) [이러한] 보특가라는 결정코 무엇에 근거하여 건립한 것인가? 직언(直言, 직접적인 설명)과 의리(義理, 이치)에 의거할 때 그것(4쌍 8척)들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학ㆍ무학의] 법에 근거하여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면, [여덟 가지가 아니라] 오로지 다섯 가지로 설정해야 할 것이니, 아라한과(阿羅漢果)와 네 종류의 향(向)이 바로 그것으로, [이는 바로] 무루법과 화합하여 성취되는 승가이다.
만약 보특가라에 근거하여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면, 역시 결정코 여덟 가지가 되는 것은 아니니, ‘여덟’이라는 수를 성취하는 결정적인 근거를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귀의승’의 ‘승’을 보특가라에 근거하여 건립할 경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량의 품류로 차별하여 시설해야 할 것이니, 승가는 한 명 내지 무량의 보특가라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즉 혹 어떤 경우 한 명의 보특가라에 근거하여 승가를 시설해야 할 것이니, 예컨대 [계경에서] “만약 능히 그 순서대로 온갖 음식을 한 명의 스님[僧]에게 공양함으로써 일체 모든 스님에게 공양하는 복을 획득한다”고 설한 바와 같다. 혹 어떤 경우 네 명의 보특가라에 근거하여 승가를 시설해야 할 것이니, 예컨대 중승(衆僧)이나 계(戒)를 설하는 갈마(羯磨) 등에 공양하는 것과 같다.36) 혹 어떤 경우 다섯 명의 보특가라에 근거하여 승가를 시설해야 할 것이니, 예컨대 자거(恣擧) 등의 경우와 같다.37)
혹 어떤 경우 여덟 명의 보특가라에 근거하여 승가를 시설해야 할 것이니, 예컨대 [4쌍 8척을 설하고 있는] 이 경에서 설한 바와 같다. 혹 어떤 경우 열 명의 보특가라에 근거하여 승가를 시설해야 할 것이니, 예컨대 중국(中國)에서 계를 수구(受具)하는 경우 등이 그러하다.38) 혹 어떤 경우 이십 명의 보특가라에 근거하여 승가를 시설해야 할 것이니, 예컨대 출중(出衆)이나 그밖에 갈마를 행하는 경우가 그러하다.39)
이 중에 뒤의 것일수록 앞의 것을 능히 포섭하며, 앞의 것일수록 뒤의 것을 능히 포섭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20인 승가]로부터 그 이후는 [보특가라의] 수가 결정되어 있지 않으며, 나아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량의 보특가라에 근거하여서도 역시 승가를 시설해야 할 것이니, 예컨대 그 밖의 다른 곳에서 필추승가ㆍ필추니승가, 혹은 2부(部)의 승가, 혹은 현성(賢聖) 승가, 혹은 성문승가 등이 있다고 설한 바와 같다.
이 같이 다수의 품류로 차별되는 보특가라에 근거하여 여러 종류의 승가를 시설하고 있음에도 [앞서 인용한 계경에서는] 오로지 이러한 여덟 보특가라에만 근거하여 복전승(福田僧)이라 이름하고, 그 밖의 품류에 근거하여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니, 이와 같은 차별에는 어떤 결정적인 근거가 있는 것인가? 이러한 사실로 볼 때 [4쌍 8척의 보특가라가 법에 근거하여 건립된 것이라고 하든 보특가라에 근거하여 건립된 것이라고 하든] 두 가지 갈래는 모두 다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4쌍 8척의 보특가라가 복전승이다’고 설한 경은] 바로 불요의경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오로지 이러한 [4쌍 8척의] 보특가라는 무루공덕에 의해 성취되는 온갖 성문의 여러 다양한 종류를 전체적으로 포섭한 것으로, 혹은 두 명의 보특가라, 혹은 세 명의 보특가라는 상속의 차별이기 때문에,40) 오로지 이(4쌍 8척의 보특가라)에 근거하여 복전을 현시한 것이다.”고 한다면,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바야흐로 보특가라로서의 승가를 시설하는 것을 인정할지라도 [그것들은] 요컨대 법에 근거한 승가이기 때문에 오로지 법을 승의승(勝義僧)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앞에서 설하였던 것처럼 보특가라 [자체로서는] 전자(4쌍 8척의 보특가라)이건 후자(여러 다양한 보특가라)이건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여덟 가지 보특가라에 근거하더라도 역시 일체 성문[이 성취하는] 무루법의 공덕의 종류를 모두 다 획득할 수 없으니, 오로지 한 명의 예류과의 향(向)이 능히 일체의 이러한 [예류과] 향의 공덕을 획득하는 것도, 나아가 [한 명의 아라한과(阿羅漢果)가 능히 일체의] 아라한과를 획득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41)
만약 “향(向)ㆍ과(果) [자체로서는]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에 오로지 이것(4쌍 8척)만 [설하면] 일체[의 성문이 성취하는 무루법의 공덕]을 모두 다 설한 것이다”고 한다면, 어째서 다섯 가지 보특가라를 설하지 않고 여덟 가지 보특가라를 설한 것인가? 이러한 [다섯 가지 보특가라] 중에서도 나머지 세 가지(예류ㆍ일래ㆍ불환과)를 차례로 획득할 수 있으니, 이러한 세 가지(예류ㆍ일래ㆍ불환향) 중에 포섭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용한 계경에서는 학ㆍ무학의] 법에 근거하여 보특가라를 설정한 것으로, 오로지 4쌍의 도(道)에 근거하여 여덟 가지 보특가라를 설하였기 때문이며, 수승한 공덕의 소의에 근거하여(다시 말해 수승한 공덕을 담을만한 그릇에 근거하여) 유정에는 여덟 가지 종류의 차별이 있다고 현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은 ‘[여덟 가지] 보특가라는 오로지 법에 의해서만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의 차별적인 이치가 성립되니, 어찌 그렇다고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사실을 말한 것으로, 법의 경우에는 전체[總]라거나 혹은 개별적[別]이라고 하는 이치가 모두 다 성립될 수 있지만, 보특가라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42) 그렇기 때문에 여기(4쌍 8척의 보특가라를 설한 경)서는 오로지 [학ㆍ무학의] 법에 근거하여 승가를 시설한 것임을 분명하게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오로지 다섯 가지만을 설하지 않은 것인가?
법의 품류를 전체적으로 모두 다 포섭하기 위해서였다. 즉 일체의 일래과 향(向)이 일체의 예류과를 전체적으로 모두 다 포섭하는 것도, 나아가 아라한향이 일체의 불환과를 모두 포섭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차별을 나타내기 위해 마땅히 이러한 여덟 가지 보특가라를 설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계경은 불요의경이라 할 수 있으니, 오로지 법에 근거하여 승가를 건립하기 때문으로, 우리의 궤범사(軌範師)이신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야말로 귀의해야 할 승가에 대해 잘 성립시켰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부처님의] 온갖 뛰어난 시설(施設, 즉 계경) 중에서는 [귀의해야 할 승가로서] 유정(보특가라)을 설하였기 때문에 결정코 오로지 법에 [근거하여 승가를 건립한 것이] 아니다”고 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그들 [유정들]은 법의 힘으로 말미암아 차별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교화시킬 중생들로 하여금 불타 등의 수승한 공덕을 능히 바로 알게 할 방편이 달리 없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방편으로 [4쌍 8척이라는] 유정의 갈래에 근거한 뛰어난 시설을 건립하여 그것을 알게 하였던 것으로, 여기에는 어떠한 허물도 없는 것이다.
(1) 불타와 승가의 관계에 관한 제설 비판
이러한 뜻에 근거하여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부처님은 승가에 포섭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승가에 포섭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43) 만약 승가에 포섭된다고 한다면, 뛰어난 시설(施設)인 [4]증정(證淨)ㆍ[3]보(寶)ㆍ[3]귀의는 다 그 수가 감소해야 할 것이다.44) 또한 지교(至敎)에서 설한 바와 상위하게 될 것이니, 예컨대 계경에서는 [이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장자에게 고하였다. ‘무엇을 승보(僧寶)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당래 이 세계 중에 어떤 선남자가 있어 찰제리(刹帝利, 크샤트리야)나 바라문 집안에 태어나거나 혹은 폐사(吠舍, 바이샤)나 술달라(戌達羅, 수드라) 집안에 태어나 여래응정등각(如來應正等覺)에 귀의하여 출가 수증(修證)한 이, 이들을 승보라고 이름한다.”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부처님께서 승(僧)들 앞에 있다”고 하였으며, 또한 계경에서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모처에서 약간명의 필추 승과 함께 하였다.”고 하였던 것이다.45)
그러나 만약 승가에 포섭되지 않는다면, 계경에서는 어떠한 까닭에서 이와 같이 말하였을 것인가? “그대들이 만약 조그마한 시물(施物)로써 능히 차례대로 부처님을 상수로 하는 승가에 공양하면, 승전(僧田)에서 두루 청정한 시복(施福)을 획득하게 되리라.”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그대 교답미(喬答彌)가 만약 승가에 받들어 보시하면 그것은 역시 나에게 공양하는 것이다.”고 하였다.46) 또한 경에서는 “4쌍 8배의 보특가라를 복전승(福田僧)이라 이름한다”고 설하고 있으니, 부처님이 8배를 떠나 [별도로] 존재한다고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47)
즉 ‘승(僧)’에는 다수의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유정인(有情人)으로서의 승ㆍ성문승(聲聞僧)ㆍ복전승(福田僧), 그리고 성승(聖僧) 등이 바로 그들이다. 부처님은 이 중의 성문승이 아닐 뿐 그 밖의 다른 승이라고는 말할 수 있으니, 스스로 깨달은 분[自然覺]이기 때문이며, 또한 성문의 법을 성취하지 않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학처(學處)는 성문을 위해 제정 건립한 것으로, [학처에서] “마땅히 부처님의 의복과 동등한 치수[量]의 의복을 수납 비축하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으니, 만약 불세존이 성문에 포섭된다면 역시 마땅히 이와 같은 학처를 수지하여 배워야 하는 것이다. 또한 [학처에서는] 말하기를, “성문이 소유한 의복에 대해 세존께서는 필추중과 나누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하였는데, 만약 불세존이 성문승에 포섭된다고 한다면, 세존의 의복도 역시 마땅히 나누는 것을 허락해야 하지만, 이미 나누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그 밖의 다른 승(僧)에만 포섭될 뿐 성문승(僧)에는 포섭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부처님이 비록 승가에 포섭된다고 할지라도] 부처님과 승가는 뒤섞이는 일이 없다는 사실은 지극히 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계경에서 “그대들이 만약 조그마한 시물로써 능히 차례대로 부처님을 상수로 하는 승가에 공양하면, 두루 [청정한] 시복(施福)을 획득하게 되리라”고 말한 것은, 복전[승]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어떠한 허물도 없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교답미경(喬答彌經)』에 대해서는 이미 해석한 셈이다. 즉 그 경에서는 ‘역시 나에게 공양하는 것이다’고 설하고 있는데, 여기서 ‘역시’라고 하는 말의 뜻은 [부처님과 승가를] 구별하여 부처님이 바로 승가가 아님을 나타낸 것이다. 만약 부처님이 바로 승가라면 ‘역시’라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그리고 부처님께서 설한 여덟 가지 보특가라는 성문승(聲聞僧)의 계위의 차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에 ‘승가 중에는 여덟 계위가 있어 동일하지 않다’고 말해야 하지 이 같이 ‘여덟 가지 보특가라는 다 승가 중에 포섭된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48) 혹은 [부처님께서] 설한 여덟 가지 보특가라는 다 복전승(福田僧)으로, 부처님도 역시 복전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승가에 포섭된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허물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승가에 보시하는 것과 부처님에게 보시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대과(大果)를 획득하는 것인가?
어떤 이는 이같이 말하였다.
“승가에 보시하는 과보가 크니, 일체 모든 종류의 무루 성법을 다 승가 중에서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며, 또한 [계경에서] 승가는 바로 최상의 복전이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어떤 시주자가 부처님에게 보시하고자 하면, 세존께서는 이를 승가에 보시하도록 권유하였기 때문이다.”49)
그렇지만 우리가 종의로 삼는 바는 부처님에게 보시하는 과보가 크니, 계경에서 “제불 세존은 일체의 증상의 자재와 수승한 공덕을 증득하여 ‘가장 존귀한 분[最尊]’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불세존께서는 한결같이 어떠한 과실도 없으니, 어떠한 번뇌의 습기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한 승가가 닦는 범행의 공덕은 일체가 다 부처님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부처님께서는 자리이타의 공덕이 모두 원만하며 구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며, 경에서 이러한 공덕을 설하여 ‘가장 수승한 것[最勝]’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며, 능히 신속하게 다른 이의 마음을 이끌기 때문이며, 이를 반연하여 광대한 원사(願思)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승가에 보시하는 과보가 크다고 주장하는 이)는 ‘일체 모든 종류의 무루 성법을 다 승가 중에서 획득할 수 있다’고 말하였지만, 이 같은 사실로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수 없으니, 세존의 소의신 안에도 이루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불공(不共)의 공덕이 갖추어져 있어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모든 세계 중에 존재하는 일체의 유정이 다 아라한이나 혹은 독승각(獨勝覺, 독각)으로서의 공덕을 소유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세존의 그것에 비교한다면 그 일부에도 미칠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그가 말한 ‘승가는 바로 최상의 복전이다’고 한 것도 역시 [‘승가에 보시하는 과보가 크다’는 사실의] 논거가 되지 않으니, 별도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즉 이는 승중(僧衆)에 근거한 것으로, [승중은] 그 수가 매우 많아 시여된 많은 재물을 능히 수용할 수 있으며, 시주자가 수용한 복덕을 능히 증장하게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승가를 복전 중의 최상이라 말한 것이다. 혹은 승중은 오랜 시간 동안, 모든 지역에 두루 머문다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하여 이같이 설한 것이다. 혹은 승가가 비록 최상의 복전이라 할지라도 부처님의 복전은 최상 중에의 극(極)이니, 앞서 논설한 온갖 인연 때문이다.
또한 그가 말한 “어떤 시주자가 부처님에게 보시하고자 하면, 세존께서는 이를 승가에 보시하도록 권유하였기 때문이다”고 한 논증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여기에는 별도의 원인이 관찰되기 때문이다. 즉 부처님은 승가로 하여금 무상(無上)의 정법을 주지(住持)하여 오랫동안 머물게 하고자 하기 위해 시물을 승중에게 보시하도록 권유하였던 것이다.
[이에 관해]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이와 같이 설하였다.
“시주자로 하여금 성(聖) 자존(慈尊, 즉 부처님)의 금색상(金色相)의 몸을 반연하여 뛰어난 인연을 심게 하기 위해 [승가에 보시하도록 권유한 것이다].”
5-3) 귀의법(歸依法)
‘귀의법’ 즉 ‘법에 귀의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애(愛)의 다함[盡]과 떠남[離]과 소멸[滅]과 열반에 귀의함을 말하는 것으로, 이와 같은 말은 모두 바로 ‘번뇌가 끊어진 것[斷]’을 차별한 명칭일 따름이다.
[이에 대해] 혹 어떤 이는 말하기를, “애(愛)는 미착(味著)의 갈래에서 일어난 것으로 마땅히 버려서는 안될 것이라 여기기 때문에(다시 말해 버리기가 지극히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애’라고 하는 명칭에 근거하여 일체 번뇌가 영원히 다하였음[永盡]을 전체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애’와 그 밖의 다른 번뇌는 그 대치가 동일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여기서 ‘애의 다함’이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견소단의 온갖 ‘애’가 영원히 끊어진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예류과(預流果)는 이러한 ‘애’가 다하였을 때, 바로 스스로 온갖 악취가 다하였음을 기별(記別)하여 ‘나는 이미 나락가(那落迦,지옥) 등을 다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앞에서] 말한 ‘떠남’이란 욕계 중에 존재하는 온갖 탐(貪)을 대부분 이미 끊어버린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바로 이미 욕계의 탐이 희박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소멸’이란 이를테면 욕계의 모든 ‘애’가 완전히 끊어진 것을 말하니, 그 때 이러한 지(地,즉 욕계)의 번뇌는 결정코 능히 더 이상 계박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반’이란 이를테면 색ㆍ무색계의 모든 ‘애’가 영원히 끊어진 것을 말하니, 이러한 [모든 ‘애’가] 멸진할 때 존재하는 모든 괴로움도 모두 다 영원히 적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바로 네 가지 사문과를 나타낸다.50) 혹은 이 네 종류의 법은 순서대로 3계의 ‘애’의 끊어짐[愛斷]과 영원한 반열반(般涅槃, 완전한 열반)을 나타낸다. 혹은 ‘애의 다함’은 3계의 ‘애’의 끊어짐을, [앞에서] 말한 ‘떠남’은 ‘애’를 제외한 그 밖의 온갖 번뇌의 끊어짐을, [앞에서] 말한 ‘소멸’은 유여의반열반(有餘依般涅槃)의 경계를 나타내며, ‘열반’이라고 말한 것은 무여의반열반(無餘依般涅槃)의 경계를 나타낸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법에 귀의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제불세존이 설한 잡염(雜染)과 청정(淸淨)의 법에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지만, 그의 설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부처님께서는 열반을 설하여 최상의 법이라고 말하였으며, 또한 어떤 경에서도 ‘멸(滅)’을 최상이라고 설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이러한 [최상의] 법에 귀의해야 하는 것이다.
5-4) 귀의의 본질과 목적
[그렇다면] 이 중의 어떠한 법이 바로 귀의해야 할 바이며, 능히 귀의한다고 함은 무엇[을 본질로 하는 것]인가? 또한 귀의의 목적[義]은 무엇인가?
귀의해야 할 바는 멸제(滅諦)의 전부와 도제(道諦)의 일부로서, 독각승과 유학위(有學位)의 보살이 갖는 무루의 공덕은 제외된다.
어떠한 이유에서 그러한 법은 귀의해야 할 바가 아닌 것인가?
그러한 법은 생사의 공포를 능히 구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모든 독각은 능히 온갖 유정들에게 설법하거나 교계(敎誡)하여 그들로 하여금 생사의 공포를 떠나게 할 수 없으며, 유학위의 보살은 기심(期心, 성도를 기약하는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역시 능히 타인을 교계하는 일이 없다. 즉 그들의 소의신 중의 학ㆍ무학법은 능히 [다른 이를] 구호할 수 없기에 귀의해야 할 바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말하기를 “화합하지 않기 때문에, 분명히 드러나 알려지지 않기 때문에 순서대로 독각과 보살은 귀의해야 할 바가 아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을 반연하여서도 역시 무루의 의정(意淨)이 생겨나기 때문에 그들도 역시 증정(證淨)의 경계에는 포섭된다.51)
여기서 ‘능히 귀의한다’고 함은 어표업을 본질로 하니, 스스로 세운 맹서를 자성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권속은 5온을 본질로 하니, ‘능히 귀의한다’는 현상에 존재하는 언설은 마음 등에 의해 일어나며, 마음을 떠나서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52)
그리고 이와 같은 귀의는 바로 구제(救濟)를 목적으로 한다.
다른 이의 소의신에 존재하는 성법(聖法)이나 선, 무위가 어떻게 능히 자신을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것에 귀의함으로써 끝없이 윤회하는 생사 괴로움의 크나큰 공포를 능히 종식할 수 있기 때문으로, 이는 목동[牧竪]이 모든 소를 방호하고, 제바달다(提婆達多)가 다른 사람들을 지켜주는 것과는 같은 것이 아니다. 귀의해야 하는 목적이 다만 [소 등을]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아니니, 그것만으로는 능히 생사의 두려움을 종식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어떤 이가 불ㆍ법ㆍ승에 귀의하였을지라도 역시 바로 구제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은 그가 부처님의 성교와 정리를 어겼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어떤 이가 왕에게 의지하면서도 왕의 칙령을 어길 경우 왕은 구제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는 [이 같이] 말하였다. “그것(성교와 정리를 어겼지만 삼보에 귀의하는 것)도 역시 후변(後邊)의 선근에 대해 종자가 된다. 따라서 귀의는 다만 정행(正行)의 종자가 되는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 바로 이것에 의해 능히 괴로움의 윤회를 종식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귀의하였을지라도 구제 받지 못하는 자가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유여사는 설하기를, “그가 비록 귀의하였을지라도 능히 귀의하여 행해야 할 바를 아직 받들어 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구제 받지 못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귀의하여 행해야 할 바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4제(諦)를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타(伽他)에서도 [이와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에게 귀의하고
아울러 법과 승가에 귀의한 모든 이는
4성제(聖諦)에 대해
항상 지혜로써 관찰해야 할 것이니,
고(苦)를 알고 고의 집(集)을 알며
온갖 고에서 영원히 벗어난 것을 알고
8지(支)의 성도(聖道)를 알면
안온한 열반으로 나아가게 되리라.
이러한 귀의야말로 가장 수승하고
이러한 귀의야말로 가장 존귀하며
반드시 이러한 귀의에 의해
모든 괴로움에서 능히 해탈할 것이다.53)
나아가 귀의해야 할 세 종류를 차별하여 [말하면 이와 같다]. 즉 불타[佛]는 오로지 무학이며, 법(法)은 두 가지(유학과 무학) 모두가 아니며, 승가[僧]의 체성은 유학과 무학 모두와 통한다.
또한 불타의 본질은 바로 10근(根)의 일부이며,54) 승가는 12근과 통하며,55) 법의 본질은 근이 아니니, 택멸무위는 근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귀의불(歸依佛)이란 단지 한 가지 유위의 사문과(沙門果, 즉 아라한과)에 귀의함을 말하며, 귀의법(歸依法)이란 네 가지 무위의 사문과(즉 택멸)에 두루 귀의함을 말하며, 귀의승(歸依僧)이란 네 가지 유위의 사문과와 아울러 네 가지 사문과로 나아가는 이[向]에 귀의함을 말한다.
또한 불타는 비유하자면 능히 길을 지시해 주는 자와 같고, 법은 나아가야 할 안온한 방역(지역, 즉 목적지)과 같으며, 승가는 함께 올바른 길을 건너가는 반려자와 같으니, 마땅히 이러한 세 가지 차별의 근거에 대해 탐구하고,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6) 근사와 욕사행(欲邪行, 사음)
[세존께서는] 어떠한 이유에서 다른 율의처에서는 ‘비범행(非梵行)에서 떠나는 계’를 설정하여 그것을 학처(學處)로 삼았으면서, 오로지 근사율의 한 가지에서만은 단지 이욕사행계(離欲邪行戒)를 제정하여 그것에서 떠나도록 한 것인가?56)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사행(欲邪行)은 [세간에서] 가장 꾸짖는 것이기 때문에
떠나기가 쉽고, [성자도] 그 부작(不作)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을 능히 관찰하는 자가 다같이 가장 꾸짖고 힐책하는 바는 오로지 욕사행 뿐이니, 능히 다른 이의 처(妻) 등을 침해하여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악취의 과보를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범행은 그렇지가 않다.
또한 욕사행에서 멀리 떠나는 것은 쉽지만, 모든 재가자는 음욕에 탐착하기 때문에 비범행에서 떠나는 계[離非梵行戒]를 수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즉 [세존께서는] 그들(재가자들)이 능히 장시간 동안 닦고 배울 수 없다는 것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비범행에서 떠나야 하는 계는 제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를테면 무시이래 자주 익힌 힘으로 말미암아 음욕의 번뇌가 자주 일어나 현행하니, 모든 재가자들은 이러한 음욕의 경계를 쫓아 자주 화합하기는 쉽지만 억제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그것(즉 離욕사행)을 제정하여 음욕으로부터 완전히 멀리 떠나게 하지는 않은 것이다.
또한 모든 성자는 일체의 욕사행에 대해서는 결정코 부작율의(不作律儀, 즉 욕사행을 짓지 않는 율의)를 획득하였고, 경생(經生)의 성자도 역시 그것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며, 비범행에서 떠나는 계의 경우 이와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사가 받는 율의에는 단지 욕사행을 떠나는 계만을 제정한 것으로,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경생의 유학도 능히 마땅히 근사의 성계(性戒)를 수지할 수 없어야 하는 것이다.57)
만약 여러 근사가 그 뒤 다시 스승으로부터 일정한 기한을 정하여 비범행에서 떠나는 계를 받게 되면, 일찍이 획득하지 않았던 이러한 율의를 획득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획득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58)
[이에 대해] 유여사는 [이같이] 말하였다. “이러한 율의를 획득한다. 그렇지만 이것에 의해 비로소 근사를 성취하게 되는 것은 아니며, 역시 또한 이것에 의해 근사라고 하는 명칭을 상실하는 것도 아니다. 역시 또한 [이로 말미암아] 이전에 받았던 [근사]계가 원만하게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와 같이] 설하였다.
“일찍이 획득하지 않았던 율의를 획득하지는 않지만, 가장 뛰어난 두다(杜多,dhūta, 頭陀로도 음사됨, 고행 혹은 遠離行)의 공덕을 획득하였으므로 가장 뛰어난 원리법(遠離法)을 획득한 자라고 말할 수 있으니, 이를테면 음욕의 법으로부터 능히 멀리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이로 인해 능히 처와의 침실을 멀리하고 범행을 청정하게 닦는다면, 그 공덕은 헛되지 않는다.”
만약 이전에 처첩을 취하지 않았던 자가 널리 유정류에 대해 근사[가 지켜야 할] 율의를 받았을 경우, 그 후 처첩을 취할 때 어찌 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겠는가?59)
지금은 다른 이에게 포섭(소속)되지 않기 때문에 [계를 범한 것이 아니니], 이는 예컨대 자신에게 속한 재물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이를테면 지금 주술의 힘으로써, 혹은 재리(財理) 등의 여러 방편으로 그를 포섭하여 자신에게 소속시켰을 경우, 그는 다른 이에게 메이지 않았거늘 어찌 그에 대해 계를 범하였다고 힐난할 것인가?
또한 별도의 이치가 있어 지금 처첩을 취하더라도 앞서 받은 율의를 어기거나 범한 것이 아니니, 게송으로 말하겠다.
맹서한대로 율의를 획득하는 것으로
모든 상속에 대해 맹서한 것은 아니다.
논하여 말하겠다.
음욕을 향수하는 모든 이도 근사계를 수지함에 있어 본래의 맹서대로 율의를 획득한다.
본래의 맹서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를테면 ‘욕사행에서 떠나겠다’는 것이다. 즉 다른 이에게 포섭(소속)되는 온갖 여인들의 처소에 대해 ‘다른 이에게 포섭(소속)된다’는 생각을 일으켰으면서도 비법(非法)을 행할 때, 이와 같은 것을 일러 욕사행을 범한 것이라고 한다. 즉 [그는] 일찍이 일체의 유정의 상속에 대해 ‘나는 마땅히 그들에 대한 비범행에서 떠날 것이다’고 맹서하고서 근사율의를 획득하였던 것이 아니거늘 어찌 지금 계를 범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 본래 맹서한 대로 율의를 획득하였고, 지금 그것에 따라 올바로 행하였거늘 어찌 [계를] 범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일찍이 처첩을 취한 후에 율의를 받았을 경우, 자신의 처 등에 대해서도 역시 이러한 계를 일으켜야 할 것이니, 근사 등의 별해탈율의는 일체의 유정과 그들의 처소를 대상으로 하여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자신의 처첩만을 대상으로 하거나 [모든] 처소에 대해 [수지하지] 않은 경우에도, [모든] 시간에 걸쳐 [수지한 것도] 아니고, [무표의 모든] 갈래[支]를 [수지한 것도] 아니며, [모든] 조건에서 [수지한 것도] 아닌 경우에도 역시 마땅히 욕사행의 계를 범하지 않았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60)
[처첩을 취할 때] 옛날(즉 처첩을 취하기 전)에 받은 계를 이미 범한 것이라고 한다면, [처첩을 취한 후] 새로 받은 계의 경우도 마땅히 범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마땅히 앞서 힐난한 바와 같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61)
7) 근사와 허광어(虛誑語, 거짓말)
어떠한 이유에서 네 가지 어업도(語業道) 중에서 거짓말하는 것[虛誑語]에서 떠나는 것만을 근사의 학처(學處)로 삼고, 그 밖의 이간어(離間語) 등에서 떠나는 것은 [근사율의로] 설정하지 않은 것인가?62)
역시 앞에서 설한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니, 이를테면 거짓말은 가장 꾸짖을 만한 것이기 때문이며, 모든 재가자들도 멀리 떠나기가 용이한 것이기 때문이며, 모든 성자는 그것의 부작(不作)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다시 별도의 이유가 있으니, 게송으로 말하겠다.
거짓말하는 것을 허락할 경우
바로 온갖 학처를 어기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거짓말하는 것을 허락[開]할 경우, 온갖 학처를 어겼는지에 대해 검문(檢問)당할 때 바로 ‘나는 그것(즉 파계)을 행하지 않았습니다’고 말할 것이며, 이로 인해 계를 어기게 되는 일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것(계)을 견고히 지니도록 하기 위해 일체의 율의 중에서 모두 허광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자주 익힌] 힘으로 말미암아 계를 범하였을 때,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살펴 부끄러움[慚]을 낳게 하고 스스로 참답게 그것을 드러내게 할 수 있을 것인가?
8) 근사와 음주(飮酒)
다시 어떠한 이유에서 성죄(性罪)에서 떠나야 하는 일체의 율의 중에서는 네 종류를 설정하여 근사의 학처로 삼았으면서 차죄(遮罪)에서 떠나는 일체의 율의 중에서는 오로지 술을 마시는 것에서 떠나는 것만을 근사율의로 설정한 것인가?63)
게송으로 말하겠다.
차죄 중에서 음주만을 떠나게 한 것은
그 밖의 다른 율의를 수호하기 위해서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술을 마시는 모든 이의 마음은 대개 방종하여 그 밖의 다른 온갖 율의를 능히 수호할 수 없다. 그래서 그 밖의 다른 율의를 수호하게 하기 위해 음주에서 떠나게 한 것이다. 이를테면 술을 마시고 나면 악작(惡作)에서 설한 것과는 별도로 여타의 수승한 5부(部)의 죄 중에 추락하여 [그것을] 능히 지키기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된다. 혹은 바로 이러한 이치[處]에서 술을 마심으로 말미암아 온갖 학처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그것을 어기게 된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세존께서는, 온갖 술을 마시는 것이야말로 바로 일체의 성죄(性罪)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64) 능히 정념(正念)과 정지(正智)를 손상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능히 파계(破戒)와 파견(破見)의 어리석음을 인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차죄(遮罪)에서 떠나야 하는 일체 모든 종류의 율의 중에서 오로지 이것만을 근사의 학처로 삼았던 것이며, 그래서 음주에서 떠나는 것은 비록 차계(遮戒)에 포섭되는 것일지라도 일체의 학처를 설정하면서 [살생 등의] 성죄에서 떠나야 하는 계와 더불어 함께 제정하게 된 것이다.
(1) 음주가 성죄(性罪)라는 지율자(持律者) 설 비판
그런데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음주는 바로 성죄에 포섭되는 상(相)이니, 『아급마(阿笈摩)』와 정리(正理)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급마』에 [근거하였다고] 함은, 이를테면 경에서 ‘신(身)에 네 가지 악행이 있으니, 살생 내지 음주가 바로 그것이다’고 말하고 있는데, [음주가] 차죄라면 악행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상좌(上座) 오파리(鄔波離, Upāli)가 ‘저는 응당 무엇을 병자들에게 공급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말하자, 세존께서 고하여 말하기를, ‘오로지 성죄[와 관련된 것]을 제외한 그 밖의 것은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모두 공급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느 때] 질병[染疾]에 걸린 석가종족이 술을 요구한 일이 있었지만 세존께서는 술을 공급하는 것을 허락[開]하지 않았다. 그러나 질병에 걸린 저들 필추들에 대해 스스로 ‘스승으로서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고 말하였던 것은 아니다.65)
정리에 근거하였다고 함은, 이를테면 성자는 생을 바꿀지라도 역시 살생 등과 마찬가지로 [불음주계를] 범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세존께서는 술을 마시는 것에서 떠나는 것을 살생 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근사의 율의로 설하였기 때문이다.”66)
[이에 대해] 정리론자(正理論者, 유부의 논사)는 이와 같이 말하였다.
“비록 이에 대해 참답게 분별할 경우 필시 어떤 어리석은 부류들의 비방을 만나게 될지라도 저들의 마음은 올바른 법상 밖을 헤매고 있으니 이치를 그르치거나 저들의 삿된 말에 꺼려할 일이 없다. 따라서 나는 필시 마땅히 올바른 법상으로 분별할 것이다. 온갖 술을 마시는 것은 바로 성죄에 포섭되지 않으니, 여기에는 성죄의 상(相)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죄(性罪)와 차죄(遮罪)는 그 상이 어떻게 [다른가]?
아직 계를 제정하지 않았을 때라도 모든 이욕자(離欲者)가 결정코 일으키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성죄의 상이며, 만약 그들도 여전히 행하는 것이었다면 이것을 일컬어 차죄라고 한다. 또한 만약 오로지 염오심에 의탁하여 행하는 것이 성죄의 상이라면, 염오심에 의탁하지 않고서도 역시 행할 수 있는 것, 이것을 일컬어 차죄라고 하니, 그 밖의 다른 과실을 방지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막고 제지한 것[遮止]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 마땅히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떤 이가 비록 술을 매우 증오하고 싫어하였을지라도 양의(良醫)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마시게 하였을 경우 정지(正知)에서 억지로 마셨다면, 염오심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와 같은 염오심을 일으켰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일으키지 않았다고 한다면, [음주가] 어떻게 성죄인 악행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만약 일으켰다고 한다면, 어떻게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억지로 마신 것인데 염오심이 존재한다고 하겠는가?
앞서 일찍이 술을 마시는 것이 바로 죄임을 알고 있었다면, 어찌 이를 무참(無慚, 부끄러움이 없음, 自性不善의 하나)으로 인해 마신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혹은 음주의 죄에 대해 어리석어 [술을 마시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라고 한다면, 어찌 이를 바로 염오심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해명은 옳지 않으니, 온갖 술을 마시는 것 자체가 바로 죄라고 하는 것은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땅히 살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떠한 이유에서 이것(염오심에서 마시는 것과 불염오심에서 마시는 것)이 다 성죄라는 것인가? 어떤 이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염오심을 갖지 않은 채 [자신의 주]량을 알고서 마신다면 능히 취하거나 어지러워하지 않으니, 이는 마치 병을 제거하기 위해 양을 알고서 독을 마실 경우 능히 손상시키는 일이 없는 것과 같은데, 어찌 죄라고 하겠는가? 따라서 술을 마시는 것이 모두 다 악행에 포섭되는 것은 아니다.67)
그러나 만약 [술을 마시고서] 교만 방일(放逸)하거나 혹은 환락과 오락에 빠지거나, 혹은 [자신의 주량을] 알고도 취하여 어지러워하면서도 탐(貪)으로 인해 [계속] 마실 경우, 이 같은 일들은 다 염오심에 근거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즉 경에서는 바로 이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음주를] 신악행(身惡行)이라고 설하였던 것으로, 이는 바로 성죄에 포섭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설혹 부처님께서 [계를 제정하여] 막지 않았다 할지라도 역시 죄이기 때문이다.
혹은 온갖 술을 마시는 것은 방일의 근거[放逸處]가 되기 때문에 악행이라 말한 것이지 성죄이기 때문에 악행이라 말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서만 유독 ‘방일의 근거’라는 말을 설하고, 살생 등에 대해서는 이 같은 말을 설하지 않았으니, 그것들은 바로 성죄이기 때문이다.
즉 병자를 위해 차계(遮戒)를 모두 열어두었지만(허락하였지만), [그럼에도] 다시 다른 때에 술 마시는 것을 막은 것은 이로 인해 성죄를 범하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를테면 술 마시는 것이 바로 차죄임을 알기 때문에 다수의 과실은 없을지라도, 문득 방종하여 탐심[貪情]에서 점차로 많이 마셔 마침내 취하고 어지러운 상태에 이르게 되면 이로 인해 방일하여 다수의 성죄를 짓게 되니,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성죄를 짓는 것을 심히 방지하기 위해 풀끝에 묻은 만큼의 양을 마시는 것도 역시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취하게 하고 어지럽게 하는 양에는 결정적인 한계가 없기 때문에 풀끝을 적실만큼의 양을 마시는 것도 막았든 것이다. 그렇지만 결정코 막았기 때문에 음주가 바로 성죄에 포섭된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는 노름[博戱]의 경우와 같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세존께서] “필추들이여, 그대들은 결정코 노름을 해서는 안 된다”고 설한 것과 같으니, 온갖 노름을 결정코 막았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성죄인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노름하는 자에게는 과실과 우환이 많기 때문에, 세상에서 지극히 꾸짖는 바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결정코 그것을 막았던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역시 또한 성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저들은 “성자는 생을 바꿀지라도 역시 살생 등과 마찬가지로 [불음주계를] 범하지 않기 때문에 이는 바로 성죄이다”고 말하였으면서도, 어떠한 까닭에서 ‘[음주는] 아라한에게도 역시 비시식(非時食) 등의 경우처럼 현행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이는 마땅히 차죄에 포섭된다’고 말하지 않는 것인가?68) 만약 경생(經生)의 성자가 부작(不作)율의를 획득하여 결정코 마땅히 온갖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모든 아라한도 역시 살생 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결정코 불음주의 율의를 획득하여야 하는 것이다.
만약 “대사(大師,부처님)께서 [그 때] 아직 [불음주의] 계를 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술을 마시는 자가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율의를 받지 않은 재가의 여러 성자들은 어떠한 이유에서 마시지 않는 것인가? 음주에서 떠나는 것을 무루율의라고는 할 수 없으니, 그 자성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한 바와 같다.
또한 만약 성자들이 결정코 행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음주가] 바로 성죄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일체의 모든 성자가 행하는 바는 모두 다 성죄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비범행도 마땅히 성죄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같은 사실은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음주가 성죄라는 주장의] 논거가 되지 않으며, 이에 따라 역시 차[죄]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 어떤 이는 이와 같이 말하였다. “계경에서 살생 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주 익힐 경우 능히 악취에 떨어진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온갖 술을 마시는 것은 바로 성죄에 포섭된다.”
그러나 비범행은 비록 성죄일지라도 자주 행한다고 하여 악취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설하였기 때문에 그가 말한 바는 결정적인 논거가 되지 않는다. 즉 [경에서] ‘자주 익힐 경우 악취에 떨어진다’고 설한 것은, 술을 자주 마실 경우 소의신 중에 온갖 불선법이 능히 상속하여 일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으며, 또한 능히 악취를 인기할 만한 업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혹은 능히 그것(악취를 인기할 만한 업)으로 하여금 더욱 증성하여 일어나게 하기 때문이며, 역시 또한 “살아있는 풀 등을 꺾으면 악취에 떨어지게 된다”고 설한 경우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69) 따라서 여기(앞서 인용한 경증)에는 ‘온갖 술을 마시는 것은 바로 성죄에 포섭된다’고 하는 주장을 입증할만한 공능이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는 [이같이] 해석하였다.
“‘자비[慈]의 마음을 닦으라’고 설하였던 것처럼 밀의문(密意門)에 근거하여 ‘악취에 떨어진다’고 설한 것이다. 즉 계경에서는 ‘능히 자비의 마음을 닦으면 여덟 가지의 뛰어난 이익을 획득한다’고 설하고 있지만, 자비의 마음을 닦았기 때문에 능히 불환과를 획득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비의 마음을 먼저 닦았기에 [불환의] 과위를 획득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은밀히 이같이 설한 것이니, 음주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이를테면 술은 능히 대종과 제근(諸根)을 손상시키고, 정념(正念)을 상실하게 하며, 방일을 낳아 마침내 악업을 짓는 원인이 되어 악취에 떨어지게 하니, 이와 같은 뜻에 근거하여 그같이 설하게 된 것이다.”
또한 저들은 “세존께서는 온갖 술을 마시는 것에서 떠나는 것을 [살생 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근사의 율의로 설하였기 때문에 이는 결정코 성죄이다.”고 말하였지만,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결정적인 [논거가] 되지 않기 때문으로, [그럴 경우] 마땅히 근주(近住)가 받는 율의도 이와 같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8계 중에 이(離)살생 등의 네 가지와 마찬가지로 비시식(非時食) 등을 근주율의의 갈래로 설정하였지만, 그것들이 결정코 성죄에 포섭되는 것은 아니다.70) 이 역시 마땅히 그러하기 때문에 그것(‘세존께서 근사의 율의로 설하였기 때문에’라는 논거)은 [음주가 성죄라는 주장을 입증할만한] 논거가 되지 않는 것이다.
비록 저들이 비방조로 “탐으로 인해 술을 마시고 교만하게 되므로 음주가 바로 차죄에 포섭된다는 것인가?”라고 말하였을지라도 지금 마땅히 따져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대들은 비시식 등도 바로 성죄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인가? 저들은 ‘[성죄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다’고 대답하였으니, 그렇다면 그대들 역시 “탐으로 인해 때 아닌 때에 먹고, 노름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땅을 파고, 살아있는 풀을 꺾는 등에 탐착할 경우에도 교만하게 되므로 이것들도 바로 차죄에 포섭된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그렇지 않으니, [그 자체의] 법상(法相)이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고 한다면, 그대들이 설한 비방의 말도 아무런 이익이 없으며, 좋지 않은 업도만 증가시킬 뿐이다.
예컨대 계경에서는 “솔라(窣羅, surā)ㆍ미려야(迷麗耶, maireya)ㆍ말타(末陀, madya)는 방일의 근거[處, sthāna]이다”고 설하고 있는데, 무슨 뜻에 근거하여 이같이 설한 것인가?
‘솔라’라고 함은, 쌀과 보리 등을 알맞게 찌고 삶아 누룩의 즙과 섞고 온갖 약물을 넣어 빚은 술로서, 빛깔과 향기와 맛이 완전하게 성취될 때 그것을 마시고 나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취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미려야’라고 함은, 이를테면 온갖 종류의 뿌리ㆍ줄기ㆍ잎사귀ㆍ꽃ㆍ열매의 즙을 앞에서의 방법대로 행하되 누룩을 섞지 않고 빚는 술로서, 빛깔과 향기와 맛이 완전하게 성취될 때 그것을 마시고 나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취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71)
그리고 이 가운데 한 종류로서 감자(甘蔗)로 만든 것을 시도(施途)라고 이름하며, 포도의 즙으로 양조한 술을 일컬어 말도(末途)라고 한다. 즉 이러한 말도는 다른 술 보다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탐닉하게 만들고 취하게 하기 때문에 ‘말타(末陀)’라고 이름한다. 혹은 솔라와 미려야주도 마시고 나서 취하게 되면, 이를 모두 ‘말타’라고 이름한다.
만약 포도의 즙으로 양조한 술의 맛은, 마시고 난 다음 [사람을] 몽롱[悶]하게 하여 자재(自在)를 획득하지 못하게 하니(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니), 마치 독약을 마시고서 귀신에게 홀려 정신을 잃고 미쳐 날뛰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미 초(酢)가 된 것이 아니라면 마시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니, 아직 익지 않은 술도 역시 마땅히 마셔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감자의 즙[으로 만든 술]도 마찬가지여서 마시는 양이 혹은 적다거나 혹은 많다고 관찰해서는 안 되며, 다만 진실로 술이라고 이름할만한 것은 모두 다 마셔서는 안 되니, 많든 적든 그것들은 모두 방일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즉 어떤 종류의 어리석음[愚闇]이 더욱 강성해져 맛을 즐기고 마음을 구속[纏]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와 같이 [“솔라 등의 술은 방일의 근거이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술을 마시는 것 [자체가] 과실(즉 죄악)은 아니다. 다만 지나친 양을 [마시는 것을] 막은 것으로, 능히 정신이 혼미해지거나 취하지 않았다면 마시더라도 역시 죄는 없다. 그래서 온갖 술을 설하여 방일의 근거[放逸處]라고 하였던 것으로, 말하자면 비록 취하지 않았을지라도 취하게 하는 공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를 심히 방지하기 위해 어떠한 술이라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계경에서 설하기를, “만약 필추로서 온갖 술을 마신 자라면 모두 범[계]하여 타락한다.”고 하였으며, 또한 계경에서는 “만약 온갖 술을 마신다면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고 설하였으니, 이러한 유형의 계경은 실로 많다.
혹은 여기(앞서 ‘솔라 등의 술은 방일의 근거이다’고 설한 경)서는 이음주(離飮酒)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 온갖 술에 대해 설명하고 나서 다시 거듭하여 ‘이는 방일의 근거이다’는 말을 설한 것이니, 이는 ‘술이 부정(不淨)의 성죄가 아니라 바로 방일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마땅히 마셔서는 안 된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리고 방일이라고 말한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돌아보지 않고 마땅히 해서는 안될 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에 ‘방일’이라고 말하였으며, 이러한 방일의 원인이 되는 것을 ‘방일의 근거’ 즉 방일처(放逸處)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같이 말하였다.
“밥을 빚어 만든 술을 일컬어 ‘솔라’라고 하며, 그 밖의 것으로 빚어 만든 술을 ‘미려야’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앞의 두 술로서 이미 삭았으나 아직 익지 않아 능히 취하게 하지 않는 것은 ‘말타’라고 이름하지 않지만, 만약 취하게 하는 때이면 그것을 ‘말타주’라고 이름하니, [취하는] 작용이 없는 상태와 차별하여 [솔라주 등을] 거듭 이 같은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빈낭(檳榔, 나무이름) 씨앗이나 패자(稗子, 피, 구역에서는 俱陀婆穀) 등[으로 만든 술]도 역시 능히 취하게 하므로 이것과 구별하기 위해 바야흐로 ‘졸라주’나 ‘미려야주’라고 설하게 된 것이다.
즉 [이러한 술을 마시는 것은 그것이] 비록 차죄일지라도 방일하게 하며 온갖 악을 널리 지어 온갖 악취에 떨어지게 한다. 이는 바로 성자들이 원리(遠離)해야 할 악행으로, 마땅히 끊어야 하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 ‘방일의 근거’라고 말한 것이다. 만약 술을 마시고 나서 토하지 않았거나 소화시키지 못하였을 경우, 그는 필시 율의 등을 수지할 수 없을 것이니, 술은 방일의 소의처이기 때문이다.”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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