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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릉상상박잔비(후한) 穿이 보인다. ![]() 북해상경비(후한 143년) 穿이 보이고 머릿모양이 뾰족한 圭首形이다. 이와같은 穿이 발견된 비 중에서 최고오래된 비이다 선우황비(후한 165년) 穿이 보이고 圭首形의 뾰족한 형이다. ![]() 공주비(후한 164년) 穿이 보이고 각이 진 형식이다. 한인명(후한 175년) 穿이 보이고 둥그런 형태의 圓首形이다. 한쪽방향으로 일정한 주름이 보이는데 이것은 滑車의 暈이다. ![]() 윤주비(후한 177년) 穿은 보이나 윗부분이 없어서 형식을 알 수가 없다. 표호우각석(기원전 26년) 그저 민밋한 돌기둥이다. 천(穿)이 보이지 않는다. 시대가 이르기 때문이다.
좌측-공겸비(후한 154년), 우측-랑중정고비(후한 158년) 좌측은 상부가 圓首로 되어 있고, 밧줄에 닳은 흔적이 있다. 이것을 暈이라고 한다. 우측은圭首형이다. 서악화산비(후한 말기 165년) 穿이 보이지 않는다 성황묘비(晉 291년) 穿이 보이지 않고 머릿부분에 장식이 보이고 있다. 당 구성궁예천명 (구양순, 632년) 시대가 아주 늦은 시기라 穿이 있을리 없다.
<三代時代>三皇(복희,신농,황제), 殷,周 천자가 있는 궁중어전(宮中御殿)앞에 세워놓은 돌기둥을 말한다.
(용도) 첫째 : 석주(石柱)를 이용하여 시각을 측정했다 해시계처럼 그림자의 이동을 보고 시간을 알수 있었다. 그리고, 동서남북의 방위(方位)도 알 수가 있었다. 그림자가 아침에는 西쪽, 저녁에는 東쪽, 한낮이면 北쪽으로 비친다.
둘째 : 종묘제사에 관련된 용도로 쓰임 祭를 지낼 때, 희생물을 바치는데 신분에 따라 天子는 소(牛), 諸候등은 양(羊)등을 제물로 삼았다. 이런 끌려온 희생물들을 붙들어 맬 기둥으로 쓰임.
셋째 : 장례(葬禮)시의 용도로 사용됨. 관(棺)을 땅 속에 묻기 전에 내릴 때 棺이 무겁기 때문에 묘혈(墓穴)의 네모퉁이에 세우고 윗쪽에 구멍을 뚫어서 거기에 굵은 밧줄을 넣어 이 밧줄을 이용하여 엄청난 무게의 관을 땅 속에 내릴 수 있었다. 이 때에는 나무기둥도 사용 되었고, 석기둥도 사용되었다.
<秦始皇의 秦時代>
天下를 통일하고 巡示하면서 돌기둥에다 공적을 새긴 것 (태산각석,낭아대각석,역산각석, 지부각석등... 七石) 사기(史記)의 시황본기(始皇本紀)에는 "서 있는 돌에 刻을 하다"라고 했듯이 碑에 刻을 하다라고 하지 않고 있기에 이것은 碑라고 할 수가 없고 立石이므로 갈( 碣)이라 할 수 있다.
<後漢이후> 왕이나 아버지가 죽었을 때 (君父) 신하나 제후의 아들들이 군부의 유덕을 흠모하여 그 공적이나 기념 될 사실들을 돌에 새겨서 도로의 한 모서리나 잘 보이는 곳에 세웠다. 이처럼, 지금의 용도로 쓰이게 된 것은 후한이후 부터 이다.
2. 비(碑)에 왜 구멍(穿)이 있을까?
위에서 열거 했듯이 "종묘에서 희생이 될 짐승을 매어두거나 또는 관을 묻을 때 돌에 구멍을 뚫어서 굵은 밧줄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첫째 : 殷,周를 거쳐 秦과 前漢(기원전 206 - 기원후 8년 ) 까지는 석고문, 진시황 七刻石, 조군신상수각석(趙群臣上酬刻石), 곽거병묘전각석(곽去病墓前刻石), 노효왕각석(魯孝王刻石), 표효우각석(표孝禹刻石), 내자후각석(萊子候刻石)처럼 碑가 아닌 碣이나 刻石이 있었을 뿐이다.
둘째 : 後漢이후 부터는 刻石보다는 石碑가 발달을 하였다. 碑라는 것은 차츰 어떤 일정한 형식을 갖추었는데, 제액(題額)이나 귀부(龜趺)라고해서 거북모양의 대석(臺石)위에 서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을 취하였다. 예로, 낙랑점선평산군비(樂浪점蟬平山君碑: 85년), 돈황태수배잠기공비(敦煌太守裵岑紀功碑: 137년), 북해상경군비(北海相景君碑: 143년), 사삼공산비(祀三公山碑), 을영비(乙瑛碑: 153년), 예기비(禮器碑: 156년), 사신전,후비(史晨前後碑: 169년), 공주비(孔宙碑: 164년), 서악화산묘비(西嶽華山廟碑: 165년), 한인명(韓仁銘: 175년)등이 있다.
이와 같이 비에 구멍을 뚫은 이유중에 짐승을 매어두는 역활을 하기 위하여 뚫은 경우의 구멍을 천(穿)이라고 하고 , 특히 棺을 내릴때는 활차(滑車)를 붙여 관을 밑바닥으로 내리는데 쓰였던 경우에는 碑의 상부 모양을 둥그렇게 다듬어서 사용했기에 원수(圓首)로 되었고, 둘레에 한쪽으로 둥그런 형태의 패인 자국이 있은데 이것을 훈(暈)이라 하며 활차(滑車)의 흔적이라고 추측이 된다.
이때도 穿이 보이나 이것은 滑車의 축공(軸孔)에 해당된다. 상복대기(喪服大記)에는 天子는 6발5비(六상여줄발,五碑), 諸侯는 4발2비(四발二碑), 士는 2발(二발)로 碑는 없다.
비의 형태로는 뽀족한 형태가 있는데 이것을 규수형식(圭首形式)이라고 하고, 둥그런 형태를 원수(圓首)라 하는데 圭首는 정확한 근거는 없지만 우수(雨水)를 보내는 形式이라고 한다.
時代가 지나서 魏晉時代, 南北朝時代가 됨에 따라 형식이 圓首이고 穿이 없어지게 된다.
이처럼, 廟門의 碑. 墓의 碑가 石이 되어 文章이 새겨지는 石碑가 되었는데, 이것은 후한때부터이고, 오늘날 보는 최고의 것은 북해상경비(北海相景碑: 143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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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무심코 보아 넘겼는데 그런 의미가 있었군요. 감사합니다.
도움이 된다니 글 올린 보람을 느낌니다. 고맙습니다.
네. 그렇군요. 상세한 설명과 함께한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부족한 자료를 열심히 봐 주시는 분들에게 도리어 고맙지요!
글을 올려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항상 설명이 있어서 무식한 저에겐...아주 보탬이 되고 공부가 됩니다..
글을 올리는 저나, 보시는 회원분들이나 다 똑같은 입장입니다.저는 조금이라도 완벽하게 올리고 싶고 그러한 자료들을 성실히 봐 주시는 분들이 한편으로는 고맙거든요.
穿이 있는 비의 양식은, 담설헌님께서 설명하셨다시피 위의 북해상경군비가 지금까지 발견된 것들 가운데서는 가장 오래 되었습니다. 옛 석각들의 양식과 그에 따른 의미 대한 부분은 저도 자세히 몰랐는데, 담설헌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내용 외적으로 감히 지적드리자면, 설명하셨고, 저도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穿은 예서 시대인 한 이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서 게시판이 아닌 예서 게시판으로 옮겨 올려 주시면 합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수암님의 깊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그리 좋은 자료도 아닌데 이리 저리 옮기기가 쑥쓰럽습니다. 그냥 놔두는 게 아떨까 합니다. 어짜피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전서방에도 들어 오셔서 보시겠지요. 좋은 날 좋은 시간 되시길 빕니다.
담설헌 선생님 건안 하오신지요? 올려주시는 좋은 자료 많이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안복을 누렸습니다.더욱 평안 하시길 기원드립니다 꾸벅
소석선생님! 감사합니다. 저도 한글 자료 올리심에 감사드리오며 더욱 건강과 서실 발전을 기원합니다.
귀한 자료 올려 주시고 설명까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기님께 도리어 감사드려야지요. 좋은 장소를 제공해 주심에.......
많은 공부하고 갑니다..수고하셧습니다.
방문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담설헌 선생님 대단히 고맙습니다. 덧붙여 드릴 말씀은 비석에 새겨진 내용을 아시는 대로 설명해 주시면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여수 청제서각 연구소 박기돈 드림
좋게 봐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신 점(비문의 전체 내용)은 너무나 광대하여 그것을 해결하는데는 다소 어려움이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비문의 내용이 소손되지 않고 완전한 것이야 그리 어려운 점이 없겠지만, 대부분이 오랜 세월속에 망실된 부분이 많기에 해석자체도 어렵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되면 하나씩 해결해 보고도 싶습니다. 즐거운 한가위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귀한 자료와 설명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미비한 자료를 좋게 보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자주 들러 주시고 함께 동참하여 더 좋은 "서예세상"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가위 즐겁게 보내시길 빕니다!
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