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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19일
화산 등산
새벽 5시 경에 잠이 깼다. 먼저 샤워하고 세수를 하였다. 그리고 다시 코를 골며 새벽잠에 들었다가 일어나 식당으로 내려갔다. 오늘 아침도 윤현중 선생님의 지도를 따라 태껸을 배우고, 한국여행사 이광식 가이드로부터는 쿵후 기본 동작으로 몸을 풀었다.
아침 8시에 호텔에 짐을 맡겨두고 걸어서 화산으로 갔다. 원형 로타리의 가운데에는 연꽃 봉오리를 올리고 용들을 새긴 엄청난 크기의 높은 돌기둥이 있다. 화산의 입구에 가니 아침 운동 나온 노인이 손자들을 데리고 나왔다. 한쪽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태극권으로 몸을 풀고 있다. 돌을 깎아 만든 벤치들에는 4자의 말을 새겨 놓았다. ‘洞壑煙霞’이라는 글자 옆에는 ‘道法自然’이라고 하는 <<노자>>의 한 구절도 눈에 띈다.
관리사무소에서 유리판 아래의 화산 모형도를 보며 오늘 등산할 봉우리들을 살펴보았다. 사무실에서 관광객들에게 나누어주는 화산 지도와 환경 보호 생활 요령을 정리한 접이식 수첩을 주었다. <綠色生活10條理念, Ten concepts of Green Life)>와 <低碳旅遊理念50條, Fifty concepts of Green Tour>이다. 표를 검사받고 기다리고 있는 셔틀버스를 타고 케이블카가 있는 곳으로 갔다. 산 입구부터 버스 창밖으로 엄청난 크기의 백색 암봉들이 사람들을 압도한다.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악산이다.
화산은 본래 이름이 연화산(蓮華山)인데, 중화민국 시대에 화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중국의 오악 중에서 서악이다. 케이블카를 타러 가는 길목에 ‘智取華山八勇士(지략으로 화산을 얻은 8용사)’ 석상이 세워져 있다. 1949년 한자패(韓子佩) 휘하 300명의 국민당군이 화산으로 쫓겨와 화산의 험악한 봉우리에 주둔하였다. 1949년 6월 14일 유길요(劉吉堯) 등 8명의 인민해방군 정찰대가 화산에 와서 화산 북봉으로 올라왔다. 새벽 1시의 심야에 북봉 운대궁(雲臺宮)에 주둔하는 국민당군을 급습하여 점령하였고, 그 뒤에 국민당군이 항복하여 화산을 장악하였다.
8용사 석상 옆으로 화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지취화산로(智取華山路), 좁은 계단길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케이블카에 6명씩 타고 암봉 위의 허공으로 올랐다. 발밑으로 까마득한 허공이다. 마치 새가 된 듯한 기분이다. 산이 굉장하니 케이블카도 굉장하다. 발 밑으로 백색 암봉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얼어서 허옇다. 석회암 백색 바위봉우리에 겨울이라 암갈색의 나무들이 붙어 있고, 백설이 곳곳에 쌓여 있다.
발밑으로 바위벽에 새기고 녹색을 칠한 좌종당(左宗棠, 1812 ~ 1885)의 대련(對聯) 글씨가 보인다.
信知君家有摩詰 그대의 집에 유마힐 거사가 있는 줄을 확실히 알겠고
自覺前身隱華山 전생에 나는 화산에 숨어 살았음을 절로 깨닫는다.
상구는 북송 황정견(黄庭堅)의 시, <<답왕도제사승관허도영산수도(答王道濟寺丞觀許道寧山水圖)>> 시구이고,하구는 남송 육유(陸游)의 시, <동리(東籬)>의 시구이다.
황정견(黄庭堅, 1045-1105)자는 노직(魯直),자호(自號)는 산곡도인(山谷道人),만년에는 호를 부옹(涪翁)이라 하였다. 홍주 분녕(洪州 分寧, 강서성江西성 수수修水) 사람。영종(英宗) 치세의 진사였다. 일찍이 지방관과 국사편수관을 역임했는데, 당쟁 중에 <<신종실록(神宗實錄)>> 편찬이 부실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고, 서남(西南)쪽 유배지에서 죽었다. 소식(蘇軾)에게 시문으로 알려져 ‘소문(蘇門) 4학사’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시는 두보를 본받았는데, ‘환골탈태(換骨奪胎)’, ‘돌을 다듬어 금을 만든다(點石成金)’, ‘한 글자도 그 출처가 없는 것이 없다(無一字無來處)’는 평을 받았다. 시의 풍격(風格)은 기이하고, 단단하고, 비틀어지고, 껄끄럽다(奇硬拗澀). 강서시파(江西詩派)를 열었으며, 북송, 남송 시대의 시단에 영향을 크게 주었다. 사(詞)는 진관제(秦觀齊)와 이름을 나란히 하고 젊었을 때는 탐미적인 시에 치중하였지만 만년에는 사풍이 소식과 닮았다. <<산곡집(山谷集)>>은 스스로 선별한 시문으로 이름이 <<산곡정화록(山谷精華錄)>>이다. 사집은 <<산곡금취와편(山谷琴趣外篇)>>(<<산곡사(山谷詞)>>)가 있다. 행서, 초서를 잘 써서 송 4대가의 한 사람인데, 서예로 <<화엄소(華嚴疎)>>, <<송풍각시(松風閣詩)>>, <<염파인상여전(廉頗藺相如傳)>>이 있다.
육유(陸游, 1125-1210)의 자는 무관(務觀),호는 방옹(放翁), 월주 산음(越州山陰, 浙江省 紹興) 사람이다. 어릴 때 가정에서 애국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고종 때 소흥에서 예부 시험에 합격하였지만 진회(秦檜)에게 추방당하였다. 뒤에 효종(后孝宗)이 즉위하여 진사를 하사받았고, 중년에는 사천 지방으로 가서 군대 생활을 하였다. 진강(鎭江)、융흥(隆興)의 통판(通判)이 되었고 관직이 보장각대제(寶章閣待制)에 이르렀다. 만년에는 고향에서 살았다. 일생 시 짓기를 그치지 않아서 9천여 수의 시가 있다. 시의 내용은 대단히 풍부하다. 왕안석, 소식, 황정견과 더불어 송대 4대 시인으로 불려진다. 또 양만리(楊萬里)、범성대(范成大)、우무(尤袤)와 합하여 ‘중흥4대시인’이라 한다. 저서는 <<劍南詩稿>>, <<放翁詞>>, <<위남문집(渭南文集)>>、<<남당서(南唐書)>>、<<노학암필기(老學庵筆記>> 등이 있다.
허도령(許道寧)
北宋画家북송화가。생몰연대미상, 북송중기(970-1052)에 활약. 장안 사람. 숲, 들, 추강, 설경, 겨울숲, 어부 등의 인물을 붓의 터치는 간결하고 명쾌한데, 봉우리 치솟았고, 숲이 굳세다. <<추강어정도(秋江漁艇圖>>, <<관산밀설도(關山密雪圖)>>, <<추산소사도(秋山蕭寺圖)>>가 전해온다.
젊었을 때는 변경에 살며 약을 팔아서 살았고 그림으로 고객들을 끌어들였는데, 약과 함께 그림을 보내어 점차로 이름이 났다. 공경 사대부가 다투어 그림 그려주기를 청하였다. 숲, 평원, 강의 3가지 풍경을 잘 그렸다. 만년에는 필법이 간결하고 명쾌하여 봉우리, 수목이 깎아지를 듯하고 굳세었다. 송의 정국공(鄭國公) 장사손(張士遜)이 시를 지어 허씨에게 주었다.
“李成謝世范寬死,唯有長安許道寧
이성이 세상을 떠나고 범관이 죽으니 장안에는 오직 허도녕만 있구나.”
그는 이성, 범관의 뒤에 산수화의 제일자가 되었다. 미불, 황정견 등의 대가들이 모두 그의 그림을 극력 칭찬하였다. 허도령의 성격은 호방하고 술을 목숨처럼 좋아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취허(醉許)’라고 불렀다.
答 王道济 寺丞 观 许道宁 山水图
왕도제 시승이 허도령의 산수도를 본 것에 답하다.
황정견(黄庭堅)
往逢醉许在长安,蛮溪大砚磨松烟。
장안에 있을 때 ‘취허’(화가 허도령의 호)를 만났는데,
만계의 큰 벼루에 송연묵을 갈았다.
忽呼绢素翻砚水,久不下笔或经年。
홀연히 흰 깁을 가져오게 하여 벼루 먹물을 들이붓고서,
오래도록 붓을 대지 않고 혹은 해를 넘겼다.
异时踏门闯白首,巾冠攲斜更索酒。
다른 때 그 집을 가니 백수를 내밀고,
두건을 삐딱하게 쓰고는 다시 술을 찾았다.
举杯意气欲翻盆,倒卧虚樽将八九。
호기롭게 술을 마시고 대야를 뒤집으려 하고,
드러누워 술동이를 비우는데 8, 9 동이가 되었다.
醉拈枯笔墨淋浪,势若山崩不停手。
취하여 붓을 들고서 먹을 낭자하게 적시고,
붓의 기세는 산이 무너지는 같은데 손놀림은 멈추지 않는다.
数尺江山万里遥,满堂风物冷萧萧。
몇 자의 그림에 강산이 만 리 펼쳐져 있는데,
집안 가득한 풍물이 차갑고 쓸쓸하다.
山僧归寺童子後,渔伯欲渡行人招。
산승은 절로 돌아가고 동자는 뒤따르며,
어부는 물을 건너려 행인을 부른다.
先君笑指溪上宅,鸬鹚白鹭如相识。
선군이 웃으며 계곡가의 집을 가리키는데,
가마우지와 백로가 서로 알아본다.
许生再拜谢不能,原是天机非笔力。
허생은 재배하며 사양하기를 마다 않고,
원래부터 천재는 필력이 아니다고 한다.
自言年少眼明时,手挥八幅锦江丝。
스스로 어릴 적 눈이 밝았다고 말하고,
손을 휘둘러 그린 여덟 폭 그림에 비단 강이 실처럼 흐른다.
赠行卷送张京兆,心知李成是我师。
두루말이 그림을 장경조에게 선물 보내고,
이성은 나의 스승이다고 한다.
张公身逐铭旌去,流落不知今主谁。
장창(張敞) 공의 몸은 돌아가고 명정도 가버렸는데,
흘러가 떨어지는 곳 알지 못하고 오늘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张敞画眉: 한나라 선제 때 京兆尹을 지낸 장창(경조)은 매일 아침 아내의 눈썹을 그렸다. 아내는 어린 날 눈썹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창은 아내의 눈썹화장에 능숙하였다. ‘장창화미’는 부부간의 은애를 나타내는 고사성어이다.
大梁画肆阅水墨, 我君盘曹忘揖客。
대량의 그림 가게에서 수묵화를 열람하고,
나와 그대 바둑을 두다가 손님맞이도 잊었다.
蛛丝煤尾意昏昏,几年风动人家壁。
거미줄 친 부엌에 그을음 가득하고 생각은 어둡고 어두우며,
몇 년 바람에 인가의 벽은 흔들린다.
雨雪涔涔满寺庭,四图冷落让丹青。
눈비가 절 마당에 가득 괴었고,
사계절 그림은 낡았고 색은 바랬다.
笑酬肆翁十万钱,卷付骑奴市尽倾。
웃으며 가게 노인에게 십만 전을 지불하고,
말아서 말안장에 달고 말타고 시가지를 다 돌았다.
王丞来观皆失席,指点如见初画日。
왕시승이 와서 보고 자리를 모두 잃었는데,
처음 그리는 날에 본 것처럼 지적한다.
四时风物入句图,信知君家有摩诘。
사계절 풍물이 그림 속에 들어 있으니,
진실로 그대의 집에 유마힐이 있음을 알겠다.
我持此图二十年,眼前绿发皆华颠。
나는 이 두 그림을 지닌 지 이십 년인데,
눈앞의 푸른 머리카락이 온통 희끗희끗하다.
许生缩手入黄泉,众史弄笔摩青天。
허생은 손을 움츠리고 황천으로 갔고,
뭇 역사는 붓을 놀려 푸른 하늘에 닿았다.
君家枯松出老翟,风烟枯枝倚崩石。
그대의 집에 마른 솔에서 늙은 꿩이 날고,
바람과 안개 낀 메마른 가지는 무너진 돌에 기댄다.
蠹穿风物皆爱惜,不诬方将有人识。
좀이 갊아 먹은 풍경 그림이 너무나도 안타깝지만,
거짓되게 말하려 말아라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리라.
东篱
동쪽 울타리
陸游
육유
其一
东篱深僻嬾衣裳,동쪽 울타리 깊은 뒤안에 게으르게 치마저고리 입었고,
书卷纵横杂药囊。책들이 어지럽고 약 주머니 뒤섞여 있다.
无吏徵租终日睡,세금 징수하는 아전이 없고 종일 낮잠 자다가,
得钱沽酒一春狂。돈이 생기면 술을 사서 한 봄 미치광이 된다.
新营茅舍轩窗静,새로 지은 띠집 추녀 창은 고요하고,
旋煮山蔬匕箸香。산나물 볶으니 숟가락 젓가락이 향기롭다.
戏集句图书素壁,연극집의 문구와 그림 흰 벽에 쓰고,
本来无事却成忙。본래 일 없더니 몰록 바빠졌구나.
其二
漫道深居昼掩关,깊숙한 거처로 느릿하게 가서 낮에도 문 닫고서,
东篱栽接不曾闲。동쪽 울타리에서 채소를 가꾸니 한가롭지 않다네.
每因清梦游敷水,맑은 꿈속에 물을 헤치며 헤엄을 치고,
自觉前身隐华山。전생에 화산에 숨어 살았음을 알겠다.
花发时时携绿酒,꽃이 피어나는 때때로 푸른 술을 차고서,
客来往往羡朱颜。손님이 왕왕 와서 붉은 얼굴을 부러워하네.
药炉安著犹无地,약 화로 놓을 땅도 없는 같고,
拟展茅茨一两间。띠집은 한두 칸이 되어 보인다.
其三
东偏隙地作疏篱,동쪽에 떨어진 땅에다 울타리 치고 채소를 가꾸고,
遇兴无非一笑时。흥이 나면 한 번 웃지 않을 때가 없다.
陪客投壼新罚酒,손을 모시고 투호놀이를 하며 새로 벌주를 마시고,
与儿门草又输诗。아이에게 문의 풀을 주고 또 시를 보낸다.
山桃溪杏栽俱活,산 복숭아 냇가 살구 함께 재배하고,
药鑱渔竿动自随。약 보습 낚싯대 저절로 들고 간다.
家事犹令罢关白,가사는 그만두게 하고,
固应黜陟不曾知。진실로 출척을 당할 줄을 일찍이 몰랐다.
좌종당은 자는 계고(季高)이고,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후난성[湖南省] 상인현[湘陰縣] 출생이다. 1851년 태평천국이 세워지며, 군이 후난으로 진출하자 후난 순무[湖南巡撫]의 막료(幕僚)가 되어 그의 방위전에서 공을 세우고, 후난 각 지방의 농민폭동 진압에 나섰다. 얼마 후 증국번(曾國藩)의 상군(湘軍)에 가담하여 공을 세우고 저장 순무[浙江巡撫]로 발탁되어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원조를 얻어 저장을 수복(收復)하였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해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프랑스로부터 기술원조를 받아 푸저우[福州]의 마미(馬尾)에 조선소(造船所:馬尾船政局)를 설립하고 이른바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 후 서북지방의 염군(捻軍:청나라 말기 안후이성 ·산둥성 ·장쑤성을 중심으로 일어난 反淸的 무장폭력집단)과 이슬람교도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다시 신장[新疆] 지방의 위구르족(Uighur 族)의 난을 평정하였다. 당시 러시아가 이리(伊犁/利犁) 지방을 점령하고 청나라의 철병 요구를 거절하자 그는 무력으로 해결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정부에 의해 거부당하고 베이징으로 소환되었다. 그 후 청 ·프랑스전쟁이 일어나 프랑스군이 푸저우를 공격하여 그가 건설한 해군이 패하자 실의 속에서 다음해 병사하였다. 문집에 《좌문양공전집(左文襄公全集)》(131권)이 있다.(네이버백과)
동삭도(東索道)에서 내리니 북봉(1614.7미터) 남쪽이다. 천길, 만길 바위 벼랑 위에까지 올라온 것이다. 중봉(2037.8)까지 다녀올 시간으로 2시간이 주어졌다. 일행 중 체력이 약한 사람은 남고, 남쪽으로 난 바위능선 길을 따라 중봉으로 향하였다. 조그마한 석문에 찰이애(擦耳崖)라고 새겨 놓았다. 찰이애는 말 그대로 통행하는 사람들이 벼랑 절벽에 귀가 스칠 정도로 좁은 벼랑길이다. 암벽에는 이 산을 오른 사람들이 남긴 많은 각자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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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의 글씨가 곳곳에 새겨져 있고 녹색으로 칠해 놓았다.
주로 청나라 말기에서 중화민국 시대에 새긴 것들이다. 벼랑에 난 길을 따라 가니 바위벼랑을 깎아서 만든 계단을 줄을 잡고 수직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천제(天梯)이다.
천제를 오르고 나니 높이 솟은 바위가 있는데 일월암(日月岩)이라고 새겨놓았다. 글씨 아래에 굴이 뚫려있는데, 그 안에 천, 지, 인 삼관(三官)을 모시고 있어서 굴 이름이 삼원동(三元洞)이다. 일월암의 남면에는 ‘雲天孤光’이라고 새기고 33년 8월 1일에 고광이 출현하였다고 새겨 놓았다.
그 옆에 서왕모를 모신, 도관(道觀)인 왕모궁(王母宮)이 있다. 왕모궁을 지나서 다시 벼랑길을 따라가자 내리막길이 나오고 길이 다시 넓어진다. 그곳에 우람한 청송들이 서 있다. 온통 바위뿐인 산 능선에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있는 것이 신비할 뿐이다. 솔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암벽에 “松風破夢”이라고 星槎 道人이 새겨놓았다. 그곳에 바위를 뚫은 문을 지나자 도룡묘(都龍廟)라는 도교사원이 있다. 화산은 도교문화가 발달한 도교의 성지로 보인다.
이 산의 도교의 맥을 잇는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찾아온 여자라고 한다. 도교사상에서는 여성에 대한 차별은 없어 보인다. <<노자>>에도 여성성을 생명의 근원으로 여긴다.
도교사원 뒤쪽으로 거대한 공룡의 등처럼 좁고 칼날처럼 위태로운 바위 능선에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계단 길을 깎아 놓았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등줄기에 땀이 나고 숨이 가쁘도록 앞만 보고 오르고 또 올랐다. 중간에 겨우 몇 사람만이 쉴 수 있을만한 공간이 암벽 밑에 있다.
암벽에는 초서 대자로 “雲海”, “圖我河山”라고 새겼다. 길가에 작은 돌비석이 있는데, 이 길목이 “蒼龍嶺”이라고 한다. 여기에도 성사도인이 쓴 “飛虹”이라는 각서가 있다. 그리고 바닥에는 “晉武鄕趙文備先生百歲笑韓處”라고 새겨 놓았고, 동편 벽에는 “韓退之投書處”라고 새겨 놓았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당나라 문장가 한유가 여기 창룡령에 이르러 좌우로 천길만길 낭떠러지인지라 문득 돌아갈 일이 꿈같고, 무서워서 가족에게 유서를 써서 벼랑 아래로 던지고서 대성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뒤에 여기에 와서 이 이야기를 들은 백세의 조문비 선생이 한퇴지의 나약함을 크게 웃었다고 한다.
청나라 때 미현(眉縣)에 은거해 살던 선비 이백(李柏)이 여기에 와서 “화산의 험악함, 창룡령이 요해처 되는데, 한퇴지는 대성통곡하였고 조문비 선생은 한바탕 웃었다. 한 번 울고, 한 번 웃는 것이 두 가지 오묘한 감정을 전하지만 나, 이백은 웃지도 울지도 않는다. 창룡령 이 고개에 홀로 서서 길게 휘파람 불며 읊조린다.(華之險,嶺爲要,韓老哭,趙老笑,一哭一笑傳二妙。李柏不笑亦不哭,獨立嶺上但長嘯)”라고 하였다.
여기서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보니 까마득한 저 아래에 내가 왔던 길이 한 눈에 들어오고, 좌우의 벼랑은 바닥이 어디인지도 알 수가 없다. 도룡사 지붕에 백설이 쌓였고 대여섯 그루의 청솔이 솟아 있다. 동서편의 건너편 암봉은 거대하여 숭엄한 아름다움과 기운을 창공으로 뿜어내고 있다.
다시 걸음을 재촉하여 올라가니 머리 위의 암벽에 새긴 글자가 무척 인상적이다.
“ 奇險
靈秀
民國念五年秋奉令測量華嶽形圖
富平 邵文玄,
盩厔 趙僊舟,
興平 苗福堂 同題
看看我們的河山”
“기이하고,
험준하고,
신령하고,
수려하다.
중화민국 25년(1936) 가을에
명을 받들어서 화산의 지형도를 측량하러 옴.
부평 소문현,
주질 조천주,
흥평 묘복당 같이 적음.
우리의 산하를 보고 본다.”
염(念)자는 20의 뜻도 있다. 측량이 전공인 김사유 선생님이 나의 각자 해석을 듣고 제일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오운봉(五雲峰)이라고 하는 글자가 새겨진 작은 석문이 있고 식당이 있다. 그곳에서 박문동, 김사유 샘과 같이 프랭카드를 들고 화산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오운봉 식당을 지나 다시 돌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잎이 모두 떨어진 활엽수 나무에 진주알처럼 윤기나는 샛노란 열매가 가득 열려 있다. 겨우살이의 열매들이다. 겨우살이마저도 잎은 모두 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지만, 열매들이 수백 알 맺혔다. 겨울에는 새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 하늘은 우리나라 가을하늘처럼 파랗게 개었다. 중국에 와서 미세먼지로 지금까지 푸른 하늘을 볼 수가 없었지만 해발 2,000미터 높이의 산정에는 바람도 맑고 하늘도 푸르니 살 것 같았다.
바람에 수직으로 선 노송의 윗부분이 부러져 있다. 추사가 제주 유배시절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세한도에 나오는 노송을 꼭 닮았다. 이 산중에 있는 도교사원은 세한도에 나오는 둥근 창문의 집과 닮았다. 눈 내린 화산의 백색 암봉을 오르며 내 마음 속에서 세한도가 떠올랐다.
한참을 오르니 앞서 간 사람들은 자취도 보이지 않고 더러는 시간이 없다며 하산하고 있었다. 그래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금쇄관(金鎖關)까지는 가보고 싶었다. 신선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에 자물쇠를 채운 듯 한 위치에 있는 관문이다. 이 관문 안으로 들어서면 그곳은 신선경이고 연화장세계이다.
세속의 모든 번뇌가 이 관문을 지나면서는 청풍에 모두 씻겨갈 것이 분명하였다. 그곳에서 사방으로 굽어보니 바위 봉우리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남쪽의 서봉(2082.9), 동봉(2090.9)의 바깥은 정말 깎아지른 바위 절벽이다. 중봉(2037.8), 남봉(2154.9)과 더불어 네 봉우리가 연결되어 있어서 화산의 한 가운데에 거대한 백련꽃 한 송이가 창공에 치솟아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산 이름도 본래는 연화산이었다.
금쇄관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4봉우리가 모아져 있는 거대한 연꽃 봉우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천하의 절경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지만 시간이 없어서 아쉽게도 금쇄관에서 되돌아 내려와야 하였다.
서봉의 수직 북벽 아래로 폭포수가 떨어지는데, 겨울이라 폭포가 얼어 있었다. 이태백이 <망여산폭포>에서 “비류직하삼천척”이라는 표현한 것이 현실의 내 눈 앞에 펼쳐져 있다. 청풍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내가 올라온 공룡 등줄기 같은 바위 능선길이 웅장한 백색 암봉에 가늘게 나 있다. 사방을 돌아보아도 온통 바위산의 숭엄한 장관이 가이없이 햇빛 아래 펼쳐진다. 비행기가 없었던 옛 사람들에게 이러한 풍경은 얼마나 큰 감동을 주었을까. 인간 세상의 온갖 번뇌 망상의 티끌들이 가슴에서 남김없이 씻겨 나간다.
금쇄관 앞으로 난 돌계단의 좌우 난간에는 붉은 천과 수많은 자물쇠들이 채워져 있다. 유명준, 김우현, 차재환 선생님과 함께 그곳에서 되돌아 내려왔다. 차재환 선생님은 그곳에서 초코파이 하나를 나에게 건넸다. 천금같이 귀하고 맛있는 음식을 챙겼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는 차 선생님의 마음씨가 따뜻하게 전해온다. 하산하는 길에 힘이 들다고 울면서 더 이상의 등산을 거부하는 아이를 달래고 있는 젊은 중국인 부부에게 아이를 달래는데 쓰라며 그 초코파이를 건넸다.
하산 길에 고양이 두 마리가 바위틈에서 졸고 있는 것이 보이고 마른 열매를 따는 한 쌍의 새가 나뭇가지 사이로 날아다니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화산은 1~1.5억년 동안의 화강암이 침식 작용으로 형성되었고, 봉우리의 상부는 180만 년 이전부터 형성된 제4지질시대 토층이 있어서 식물이 자라고 있다. 그 옆에는 화산에서 발견된 중화석을 바위에 박아 놓았다. 신기하게도 현재 중국의 영토와 비슷한 모양의 백색 돌이 화강암 표면에 돌출되어 있다. 변성암으로 지질시대의 晩太古代早期(23~27억년)의 돌인데, 2002년5월 20일 화산 仙峪에서 발견되어 <江山永固中華石>이라고 명명되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하였다. 앞자리에 앉은 선생님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온 사람의 환희에 찬 얼굴이다. 평소에 등산 모임에서 자주 산을 올랐기에 작심을 하고 정상까지 다녀오셨단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건물 밖으로 나오니 춘절을 맞이하는 기쁨을 작은 게시판의 칠판에 분필로 써 놓았다.
“元旦快樂(즐거운 설날 되세요!)”
버스를 타고 돌아 나와 우리가 이용하는 버스를 타고 화산 아래의 호텔, 화산객잔(華山客棧) 식당에 들어갔다.
“只有天在上(다만 위로는 하늘이 있을 뿐이고),
更無山與齊(다시 화산과 나란히 할 산이 없다.)”
라고 송의 寇准이 지은 시, <詠華山>의 한 구절을 인용한 화산 일출 사진을 담은 관광 홍보 포스트(www.huashan16.com)에는 “奇險天下第一山, 俯瞰萬千, 最天下 ․ 志有成"이라는 글귀들이 들어있다. 화산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돌아서는 나의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달래준다.
화산 아래로 隴海鐵路의 기차가 다니고 있다. 우리가 낙양에서 올 때 이용한 鄭西高速鐵路도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인다.
식당 벽에 걸린 서예작품은 당나라 시호(詩豪) 유우석(劉禹錫, 772-842의 <누실명(陋室銘)>이다. 글씨가 추사체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괴벽스럽기까지 하다.
山不在高,有仙則名。산은 높다고 좋은 것이 아니고 신선이 있어야 이름나고,
水不在深,有龍則靈。물은 깊다고 좋은 것이 아니고 미르가 살아야 신령하다.
斯是陋室,惟吾德馨。이 집이 누추하다 하여도 나의 덕의 향기가 있다.
苔痕上階綠,草色入簾青。
이끼 흔적이 섬돌을 따라 파랗게 올라오고,
풀빛이 발속으로 푸르게 비쳐온다.
談笑有鴻儒,往來無白丁。큰 선비가 있어서 담소하지만, 왕래하는 일꾼은 없다.
可以調素琴,閱金經。소박한 거문고를 타고 경전을 펼쳐볼 수 있다.
無絲竹之亂耳,無案牘之勞形。
관현악이 귀를 어지럽게 하지 않고, 공문서가 몸을 수고롭게 하지도 않는다.
南陽諸葛廬,西蜀子雲亭。남양 땅 제갈량의 초가도 서촉 揚雄의 정자일지라도.
孔子云:何陋之有? 공자님은 말씀하셨다. 어찌 누추함이 있으랴?
그 옆의 액자는 대단히 기세가 넘치고 정신이 활달한 행초서의 붓글씨이다. 두보가 이백을 그리워하며 읊은 시, <천말회이백(天末懷李白):하늘가에서 이백을 그리워하며>의 첫 절구(絶句)이다.
凉風起天末,君子意如何。
서늘한 바람 하늘가에서 일어나는데, 그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鴻雁几時到,江湖秋水多。
기러기 떼 어느 때 날아오고, 강호의 가을물 넘치오.
文章憎命達,魑魅喜人過。
문장은 운명이 창달하는 것을 미워하고, 귀신은 남의 허물을 기뻐한다.
應共冤魂語,投詩贈汨羅
그대 응당 굴원의 원통한 말 함께하여, 멱라수에 시를 지어 던지겠지.
중국 여행을 하며 곳곳에서 당나라 시인들의 시를 서예 작품으로 만나고,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다른 나라에서는 누리지 못할 뜻밖의 행복이다.
기름투성이의 중국 음식이 푸짐하여도 나의 입에는 여기서도 전혀 맞지 않다. 뜨거운 물을 달라고 하여 몇 숟가락의 밥을 말아서 겨우 먹었다. 점심을 먹고 식당과 붙어 있는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니 여기도 옥을 쪼고 갈아서 만든 것들이 아주 많다. 천지자연의 밝은 기운이 응결되어 있는 황옥으로 조각한 관세음보살상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거금을 지불하고 사 오지는 못하여도 불자인 나의 물욕을 자극하였다.
진시황릉 병마용
점심을 먹고 차가 고속철도철로 옆의 길을 달렸다. 길가에 화력발전소도 보였다. 우리가 간 곳은 역산(酈山) 아래의 진시황병마용박물관(秦始皇兵馬俑博物館)이다. 오래전부터 중국에 오면 만리장성과 함께 꼭 오고 싶었던 곳이 여기이다. 입구부터 주변 풍경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사진을 촬영하였다.
그런데, 입장권을 촬영하고부터 갑자기 사진기가 작동하지 않았다. 밧데리도 방전되지 않고 충분하였다. 전자식 카메라서 바깥의 추운 날씨에 작동하지 않은 건지 원인을 알 수가 없다. 사진기를 잘 아는 유명준 선생님께 보여도 원인을 알지 못하고 고치지 못하였다. 가장 중요한 역사의 현장을 내 의지대로 사진을 촬영할 수가 없어서 아쉬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다음 코스인 여산 아래 화청궁과 양귀비 유적을 볼 때도 사진기는 작동되지 않았다. 진시황과 양귀비의 원혼에서 사진기가 풀려난 것은 저녁을 먹고서 회족거리에 갔을 때였다.
사진은 유명준 선생님께 부탁하고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병마용들을 보았다. 얼마 전에 박근혜 대통령도 이곳에 다녀갔다. 넓은 체육관처럼 돔 아래에 발굴된 병마용 수천 개를 파편들을 복원하여 그 자리에 원래 모습대로 세워 놓았다.
장양왕(莊襄王)이 인질로서 조(趙)나라에 있을 때 여불위(呂不韋)의 첩을 보고 반하여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시황을 낳았다. 시황은 진소왕(秦昭王) 48년 정월 한단에서 태어났는데, 출생하자 이름을 정(政), 성을 조(趙)라고 하였다. 13세 때 장양왕이 죽자 정이 왕위를 계승하여 진왕이 되었다.(......)
진 시황이 평원진(平原津)에 이르러서 병이 생겼다. 진 시황은 죽는다는 말을 싫어했기 때문에 군신들도 감히 죽는 일에 대해서 말하지 못했다. 황제는 병이 날로 심해지자 공자 부소에게 보내는 새서(璽書)를 써서 말하기를, “돌아와서 상사에 참여하고, 함양에 안장하라”라고 한 뒤 봉인하여 성지를 집행하는 중거부령(中車府令) 조고(趙高)의 관부(官府)에 놓아둔 채, 사자에게 주지는 않았다.
7월 병인일, 진 시황이 사구평대(沙丘平臺)에서 서거하였다. 승상 이사는 황제가 외지에서 서거했기 때문에 모든 공자와 천하에 변란이 발생할까 두려워서 그 사실을 비밀로 하고 발상하지 않았다. 관을 온량거(溫凉車)에 싣고 예전에 총애 받던 환관으로 하여금 함께 타게 하여, 이르는 곳마다 황제에게 음식을 올렸으며, 신하들이 예전과 다름없이 국사를 상주하면 환관이 수레 안에서 상주된 일을 허가하였다. 오직 호해와 조고 및 총애 받던 환관 오륙 명 정도만 황제가 죽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여름철이어서 황제의 온량거에서 시신이 썩는 악취가 나자, 수행관원에게 소금에 절여서 말린 고기 1석을 수레에 싣게 하여 시신의 악취와 어물의 냄새를 구분하지 못하게 하였다.
결국 직도(直道)를 따라서 함양에 도착한 후에야 발상하였다. 태자 호해가 제위를 계승하여 이세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해 9월에 역산(酈山)에 진 시황을 안장하였다.
옛날 진 시황이 처음 즉위하여 역사에 치산 공사를 벌였는데, 천하를 통일한 후에는 전국에서 이송되어온 죄인 70만여 명을 시켜서 깊이 파게하고 구리물을 부어 틈새를 메워서 외관을 설치했으며, 모형으로 만든 궁관(宮觀), 백관(百官), 기기(奇器), 진괴(珍怪)들을 운반 해다가 그 안에 가득 보관하였다.
장인에게 명령하여 자동으로 발사되는 궁전을 만들어놓고 그곳을 파내어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쏘게 하였으며, 수은으로 백천(百川), 강하(江河), 대해(大海)를 만들고, 기계로 수은을 주입하여 흘러가도록 하였다. 위에는 천문의 도형을 장식하고 아래에는 지리의 모형을 설치했으며, 도롱뇽의 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오랫동안 꺼지지 않도록 하였다. 이세황제가 말하기를 “선제의 후궁들 가운데 자식이 없는 자를 궁궐 밖으로 내쫓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며 명령을 내려서 모두 순장시켜버리니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매장이 끝나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장인이 이 기계를 만들었고, 그 일에 참여한 노예들도 모두 그것을 알고 있는데, 그들의 숫자가 많아서 누설될 것이라고 하였다. 장중한 상례가 끝나고 보물들도 이미 다 매장되지 묘도의 가운데 문을 폐쇄하고, 또 묘도의 바깥문을 내려서 장인과 노예들이 모두 나오지 못하게 폐쇄하니 다시는 빠져나오는 자가 없었다. 묘지 바깥에 풀과 나무를 심어서 묘지가 마치 산과 같았다.
-<<사기>> <진시황본기>
육국통일, 분서갱유의 이미지로 우리에게 익숙한 포악한 황제, 진시황의 저승을 지키는 수천의 군사들은 실제 군인들을 모델로 하였다고 한다. 천하를 정복한 황제도 죽음 앞에서는 한낱 가련한 남자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나 죽음이 무서우면 서시가 불로초를 구하러 동해 바다의 삼신산을 찾아가는 일을 후원하였을까. 얼마나 권력에 집착을 하였으면 왕이 되고부터 무덤을 만들기 시작하고, 황제가 되어서는 전쟁 포로 70만여 명을 동원하여 현실세계를 지하에다 이렇게 재현하여 놓았을까.
병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2,000여 년의 시간을 뚫고 우리들 눈앞에 나타난 것이 정말 놀랍기만 하다. 우물을 파던 마을 사람들의 신고로 병마용갱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제1호 갱은 보병들이고 제2호 갱은 지휘부의 진용을 보여준다. 제3호갱에는 심지어 손금까지도 표현되어 있는 궁수의 실물 도용을 볼 수 있다. 진시황이 타고 다니던 4마리의 말이 끌던 청동마차, 온량거의 축소 모형도 전시되어 있다.
병사들은 대부분 상투를 오른쪽으로 치우쳐서 틀고 상의는 갑옷을 입고 하의는 치마를 입었다. 치마 안에 바지를 입고 있다. 뒤쪽의 사람들 중에는 머리에 간단한 관을 쓰고 있다. 장교들일 것이다. 병사들 사이에는 말들이 또한 세워져 있다. 아직 채 발굴되지 않은 곳도 있고, 발굴되었지만 파편 상태의 유물들도 보인다. 중국 정부에서 발굴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상투 모양이며, 광대뼈, 입술, 콧날, 가죽끈으로 엮은 비늘형 갑옷, 신발의 밑창까지 실물 그대로 빚어내고 구워 만든 병마 도용들을 수천 개를 만들어 놓았는데,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나 복장이 다르고 채색까지 하였다. 미술사적으로 생각하여도 불가사의하다. 5백여 년 동안이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던 진시황의 군대가 어떠했는가를 정말 생생하게 보여준다. 서둘러서 진시황병마용을 보고 나올 때 한쪽 구석에는 병마용을 우물을 파다가 처음 발견한 분이 병마용 도록에다 사인을 하여 팔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도 도록에다 발견자 노인의 사인을 받았다고 한다.
병마용박물관에서 서둘러 돌아 나와 지금은 출입이 금지된 진시황릉을 차창 너머로 보았다. 하나의 거대한 언덕이 되어 있다.
화청궁의 장한가
일행은 양귀비와 당 현종의 호화롭고 방탕하고 슬픈 로맨스로 유명한 화청궁으로 갔다. 복원해 놓은 궁문 앞에는 뇌쇄적인 몸매로 관현악 반주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 양귀비와 악사들의 청동상들이 사람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우리는 궁문 앞에 기다리면서 장재숙 샘의 개다리 춤에 모두가 즐거웠다.
안으로 들어가니 지금도 역산 아래 화청궁에는 온천물이 솟아나고 있다. 사진에서 보았던 하얀색의 양귀비 나신상은 연못 가운데에서 온천물이 솟아나는 곳으로 옮겨 놓았다. 복원해 놓은 전각 건물 안에는 황제와 양귀비 두 사람을 위한 탕부터 대형의 탕까지 목욕시설이 다양하다. 양귀비상 뒤에 있는 샘에서 따뜻한 온천물로 손을 씻어보았다. 복원한 화청궁에 세워둔 목욕하고 나온 양귀비상은 너무 서구적인 몸매로 표현하였다. 여산 아래 화청궁에는 지금도 따뜻한 온천물이 솟아나건만, 양귀비는 벽돌무덤 속 한 줌 흙이 되고, 바람이 되고, 후세인들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주질(盩厔-西安市周至縣)현위(縣尉)로 근무하던 백거이는 친구 진홍(陳鴻)、왕질부(王質夫)와 함께 당 헌종 원화 원년(806)에 장안성 서문에서 100여 리 떨어진 마외역(馬嵬驛) 부근의 선유사(仙遊寺)로 유람을 갔다. 그들은 당 현종, 이융기(李隆基)와 양귀비(楊貴妃, 719~756.6.15), 양옥환(楊玉環)의 비극적인 사랑을 이야기하였다. 당 현종은 안사의 난으로 촉 땅으로 피난가다가 마외역에서 호위병들이 나라를 망하게 한 양귀비 일당을 죽이지 않고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다는 요구에 양귀비를 내놓았고, 환관 고력사의 손에 끌려간 38세의 양귀비는 마외의 절에서 비단으로 목을 매어 자결을 강요당하였다. 이후 현종은 아들 숙종에게 양위하고 6년 동안 양귀비만을 그리워하고 회한에 젖어 살다가 78세에 죽었다.
왕질부가 백거이에게 “낙천은 시에 깊고, 감정이 풍부한 사람인데, 두 사람의 사랑을 노래로 지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라고 제안하였다. 그래서 백거이가 먼저 이 장편 서사시를 짓고, 진홍은 소설, <<장한가전>>을 썼다.
경국지색(傾國之色), 양귀비의 미모와 유혹이 얼마나 사람의 애간장을 녹였으면, 마약에다 양귀비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양귀비는 팔등신 미인이 아니라, 당나라인들이 좋아한 몸매를 가졌다. 모란꽃이나 연꽃처럼, ‘자질풍염(資質豊艶)’하였다고 한다. 복스러운 얼굴에 희고 농염한 피부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사천성의 관리였던 숙부 양립이 키웠다. 양귀비는 17세에 당 현종의 18째 아들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가 되었다.
황후가 죽은 뒤에 현종은 아들의 부인 양옥환을 자신의 부인으로 삼는 과정에서 양옥환을 화산(華山)의 도교 사원에 보내어 태진(太眞)이라는 여자 도사를 만들어 아들의 부인이라고 하는 이력을 세탁시켰다. 그리고 궁중의 태진궁에서 둘은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고 한다.
27세에 귀비로 책봉된 양귀비가 권세를 누리자 그 일족도 줄줄이 권세를 잡았다. 양귀비의 6촌 오빠 양소는 건달이었지만, 국충(國忠)이라는 이름까지 하사받았고 간신배가 되었다. 20대의 양귀비는 돌궐족 출신의 40대의 안록산을 수양아들로 삼았지만, 양국충과 안록산의 알력은 결국 안사의 난을 촉발시켰다. 양국충의 화려한 금은 장신구들을 낙양박물관에서 본 것이 생각난다.
해마다 여름에는 장한가라는 대형 뮤지컬을 이곳 화청궁에서 상연하여 관광객들이 몰린다고 한다. 백거이의 이 장한가에 비익조(比翼鳥), 연리지(連理枝), 3천 궁녀라는 말이 등장한다. 후세의 누군가가 백제 의자왕을 당 현종에 비유하며 3천 궁녀라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 당 현종은 양귀비를 말을 알아듣는 꽃, 해어화(解語花)라고 불렀다. 후세의 여인들이 양귀비 무덤의 흙을 먹으면 미인이 된다는 속설을 믿고 무덤을 파헤치자 지금은 양귀비 무덤을 벽돌로 덮어 놓았다.
長恨歌 길게 한하는 노래
漢皇重色思傾國 한 황제 사랑 그리워함에 나라는 기울어가네
御宇多年求不得 오랜 세월 세상을 살펴도 구할 수 없구려.
楊家有女初長成 양씨 가문에 갓 장성한 딸이 있었으나
養在深閨人未識 깊숙한 규방에서 자라니 누구도 알지 못하나
天生麗質難自棄 타고난 아름다움 그대로 묻힐 리 없어
一朝選在君王側 하루아침 뽑혀 군왕 곁에 있도다.
回眸一笑百媚生 눈웃음 한 번에 모든 애교가 나오니
六宮粉黛無顔色 육궁에 단장한 미녀들의 안색을 가렸다오.
春寒賜浴華淸池 봄추위에 화청지에서 목욕함을 허락하여
溫泉水滑洗凝脂 매끄러운 온천물에 기름진 때를 씻으니
侍兒扶起嬌無力 시녀들 부축하여 일어나니 아름다움에 당할 힘이 없도다.
始是新承恩澤時 그 때부터 황제 사랑 받기 시작하였네.
雲鬢花顔金步搖 구름 같은 귀밑머리, 꽃 같은 얼굴, 흔들거리는 금장식
芙蓉帳暖度春宵 부용휘장 안은 따뜻하여 봄날의 깊은 밤을 헤아리니
春宵苦短日高起 짧은 밤을 한탄하며 해가 높이 뜨고서 일어나니
從此君王不早朝 이를 좇는 군왕은 이른 조회를 보지 않았고
承歡侍宴無閑暇 총애로 연회에 매이니 한가할 틈 없어
春從春游夜專夜 봄을 좇는 춘정을 즐겨 온밤을 지새우니
後宮佳麗三千人 빼어난 후궁에 미녀 삼천 있었지만
三千寵愛在一身 삼천의 총애가 그녀에 있으니
金屋粧成嬌侍夜 금 같은 방 단장하고 교태로 밤 시중들어
玉樓宴罷醉和春 옥루 잔치 끝나면 춘정을 이루니
姉妹弟兄皆列士 자매와 형제 모두가 열사라.
可憐光彩生門戶 예쁘게 여기 가문에 광채가 나니
遂令天下父母心 이로 하여금 세상 모든 부모들의 마음이
不重生男重生女 아들보다 딸 낳기를 중히 여기도다.
驪宮高處入靑雲 화청궁 높이 솟아 구름 속에 들어 있고
仙樂風飄處處聞 신선의 풍악은 바람 타고 어디서나 들려오네.
緩歌慢舞凝絲竹 느린 노래 오만한 춤이 비단결과 피리에 맺히니
盡日君王看不足 군왕은 종일 넋 잃고 보아도 부족하도다.
漁陽瞽鼓動地來 돌연 어양 쪽 땅을 울리는 악관의 북소리 들려오니
驚破霓裳羽衣曲 예상우의곡에 깜짝 놀라도다.
九重城闕煙塵生 구중궁궐에 연기 먼지 솟아오르고
千乘萬騎西南行 수천수만 관군들은 서남으로 가고
翠華搖搖行復止 천자의 기 흔들리며 가다가 서곤 하며
西出都門百餘里 도성문 서쪽 백여 리 마외역에는
六軍不發無奈何 육군을 보내지 못해 어찌 할 수 없어
宛轉蛾眉馬前死 미인의 긴 눈썹이 구부러지며 굴러 군마 앞에 죽었네.
花鈿委地無人收 땅에 떨 군 꽃 비녀 거두는 사람 없고
翠翹金雀玉搔頭 비취 깃털, 공작 비녀, 옥비녀 땅에 흩어졌네.
君王掩面救不得 군왕은 얼굴 가린 채 구하지 못하고
回看血淚相和流 차마 돌린 두 눈에 피눈물이 흐르네.
黃埃散漫風蕭索 누런 흙먼지 일고 바람 쓸쓸히 부는데
雲棧縈紆登劍閣 구름 걸린 굽은 잔도 검각산을 오르네.
峨嵋山下少人行 아미산 아래에는 오가는 이도 드물어
旌旗無光日色薄 천자 깃발 빛을 잃고 햇빛도 희미하네.
蜀江水碧蜀山靑 촉강 맑게 흐르고 촉산은 푸르건만
聖主朝朝暮暮情 황제는 아침저녁 양귀비 생각에 잠겨
行宮見月傷心色 행궁에서 보는 달에 마음 절로 상하고
夜雨聞鈴腸斷聲 밤비에 들리는 방울소리는 애간장 끊어지는 소리요
天旋地轉回龍馭 천하 정세 변하여 황제 돌아오는 길에
到此躊躇不能去 마외역에 이르러는 걸음 뗄 수 없었네.
馬嵬坡下泥土中 마외파 아래 진흙더미 속에는
不見玉顔空死處 고운 얼굴 어디 가고 죽은 자리만 남아
君臣相顧盡沾衣 임금 신하 서로 보며 눈물 옷깃 적시네.
東望都門信馬歸 동쪽 도성문 향해 말에 길을 맡겨 가니
歸來池苑皆依舊 돌아와 본 황궁의 정원은 변함없어.
太液芙蓉未央柳 태액지의 부용도 미앙궁의 버들도
芙蓉如面柳如眉 부용은 양귀비 얼굴 버들은 눈썹
對此如何不淚垂 이들을 대하고 어찌 아니 눈물 드리우리.
春風桃李花開日 봄바람에 복사꽃, 오얏꽃 만발하고
秋雨梧桐葉落時 가을비에 젖어 오동잎이 떨어져도
西宮南內多秋草 서궁과 남원에 가을 풀 우거지고
落葉滿階紅不掃 낙엽이 섬돌을 덮어도 쓸지 않으니
梨園子弟白發新 이원의 자제들은 백발이 성성하고
椒房阿監靑娥老 양귀비 시중들던 시녀들도 늙었네.
夕殿螢飛思悄然 반딧불 나는 저녁 궁궐 더욱 처량하여
孤燈挑盡未成眠 등불 심지 다 타도록 외로이 잠 못 드니
遲遲鍾鼓初長夜 더딘 종과 북소리에 밤이 길다는 것을 알았네.
耿耿星河欲曙天 은하수 반짝이며 새벽은 다가오고
鴛鴦瓦冷霜華重 원앙같이 금슬 좋은 기와는 차고 서리꽃이 심해지나
翡翠衾寒誰與共 함께 덮을 이 없는 싸늘한 비취금침
悠悠生死別經年 생사를 달리한 지 아득하니 몇 년인가
魂魄不曾來入夢 꿈속에 혼백마저 만나볼 수 없네.
臨邛道士鴻都客 임공의 도인이 도성에서 머무는데
能以精誠致魂魄 정성으로 혼백을 불러올 수 있다하니
爲感君王輾轉思 양귀비 그려 잠 못 드는 군왕을 위해
遂敎方士殷勤覓 방사시켜 양귀비 혼백 찾게 하였네.
排空馭氣奔如電 허공을 가르고 번개처럼 내달아
升天入地求之遍 하늘 끝에서 땅 속까지 두루 찾아
上窮碧落下黃泉 위로는 벽락 아래로는 황천까지
兩處茫茫皆不見 두 곳 모두 망망할 뿐 찾을 길이 없는데
忽聞海上有仙山 홀연 들리는 소문 "바다 위에 신선의 산 있어
山在虛無縹緲間 그 산은 아득한 허공 먼 곳에 있고,
樓閣玲瓏五雲起 누각은 영롱하고 오색구름이 일어
其中綽約多仙子 그 곳에 아름다운 선녀들이 사는데,
中有一人字玉眞 그 중 옥진이라 하는 선녀 하나 있으니
雪膚花貌參差是 눈 같은 피부와 꽃다운 얼굴 그인 것 같다"하네.
金闕西廂叩玉扃 황금 대궐 서쪽 방의 옥문을 두드리고
轉敎小玉報雙成 소옥을 시켜 쌍성에게 알리도록 말 전하니
聞道漢家天子使 한황제의 사자가 왔다는 말 전해 듣고
九華帳里夢魂驚 꿈에 깨어 놀라는 화려한 장막 안의 혼백
攬衣推枕起徘徊 옷을 들고 베개 밀고 일어나 서성이더니
珠箔銀屛迤邐開 길게 이어진 구슬발과 은병풍 열리니
雲髻半偏新睡覺 구름 같은 머리 한쪽으로 드리우고 막 잠에 깬 듯
花冠不整下堂來 머리장식 안 고친 채 마루에서 내려오네.
風吹仙袂飄飄擧 바람 부는 대로 소맷자락 나부끼니
猶似霓裳羽衣舞 예상우의무를 추던 그 모습인 듯
玉容寂寞淚欄干 옥 같은 얼굴 수심 젖어 눈물이 난간에 흐르니
梨花一枝春帶雨 활짝 핀 배꽃 한 가지 봄비에 젖은 듯하구나.
含情凝睇謝君王 정어린 눈길 돌려 군왕에게 사뢰니
一別音容兩渺茫 "헤어진 뒤 옥음, 용안 듣고 뵙지 못하여
昭陽殿里恩愛絶 소양전에서 받던 은총도 끊어지고
蓬萊宮中日月長 봉래궁에서 보낸 세월이 오래건만
回頭下望人寰處 머리 돌려 저 아래 인간세상 보아도
不見長安見塵霧 장안은 보이지 않고 짙은 안개와 먼지 뿐
唯將舊物表深情 장차 오래 지닐 물건으로 깊은 정을 표하려니
鈿合金釵寄將去 자개 상자와 금비녀를 가지고 가라하네.
釵留一股合一扇 비녀는 반 쪽 씩 상자는 한 쪽 씩
釵擘黃金合分鈿 황금 비녀 토막 내고 자개 상자 나눴으니
但敎心似金鈿堅 두 마음 이처럼 굳고 변치 않는다면
天上人間會相見 천상에든 세상에든 다시 보게 되리라네
臨別殷勤重寄詞 헤어질 즈음 간곡히 다시 하는 말이
詞中有誓兩心知 두 마음 만이 아는 맹세의 말 있었으니
七月七日長生殿 칠월 칠일 장생전에
夜半無人私語時 인적 없는 깊은 밤 속삭이던 말
在天願作比翼鳥 하늘을 나는 새가 되면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 땅에 나무로 나면 연리지가 되자고
天長地久有時盡 천지 영원하다 해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此恨綿綿無絶期 이 슬픈 사랑의 한 끊일 때가 없으리.
여기에 온천 휴양을 왔던 장개석이 2차 국공합작을 주장한 군벌 장학량이 섬서 17로군 사령관 양호성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서안사변으로 장개석은 1936년 12월 12일 새벽 6시에 잠옷 차림으로 슬리퍼를 신고 담장을 넘어서 궁궐 뒤의 역산으로 도피하여 바위 밑에서 떨다가 장학량의 장교에게 끌려와 오간청에 감금되었다. 국공합작과 항일 전쟁의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은 기사회생하고 농민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다.
화청지 앞의 가로등에는 당삼채의 당나라 미인과 서양미인의 얼굴이 나란히 걸려 있다. 당나라 미인은 요즈음의 미인 기준으로 보면 완벽히 비만형이다. 그곳에 “古今皆盛世, 萬國又來朝”라고 써 놓았다. 중국인의 중화의식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회족거리
화청지에서 돌아 나와 저녁밥 먹으로 갔다. 동포 가족이 운영하는 고려불고기(高麗燒烤)식당에서 상추삼과 쌈장과 삼겹살로 오랜만에 입맛에 맞게 저녁밥을 잘 먹었다. 우리말을 들으며 우리 음식을 먹으니 마음이 저절로 편안해졌다. 다음에 서안으로 오면 반드시 이 집에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식당의 명함을 하나 챙겨왔다. 식당에서 나와 밤거리에서 바람을 쐬다가 다시 버스가 한참 달려 찾아간 곳은 회족거리이다.
날씨는 그렇게 춥지 않았다. 이슬람문자의 간판이 보이고, 눈이 둥글고 허연 수염을 한 위그르족 외모의 할아버지가 지나간다. 길거리 양쪽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늘어선 수십 곳의 가게들은 대부분 음식점들이다. 말린 과일을 파는 집에는 굵고 품질이 좋은 말린 대추, 호두, 곶감 대바구니에 가득 담겨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김이 올라오는 손수레에는 여러 가지 양념을 바른 양고기 꼬치를 팔고 있다. 하얗고 둥근 모자를 쓴 회족 청년들이 센 불길에 뭔가를 데치고 있다.
그 옆에는 보자기를 쓴 회족 여인이 마스크를 끼고 여러 가지 채소를 썰어서 속에 넣고 기름에 튀긴 둥그런 빵을 만들고 있다. 또 그 옆에는 나무 곰배를 들고 판을 내리치며 넓적하게 펴진 떡을 만들고 있다. 양의 뿔과 머리뼈를 걸어놓고 양고기를 파는 집 앞에서는 양두구육(羊頭狗肉)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슬람교인들은 돼지족발 대신에 초에 절인 양족발을 팔고 있다. 우리의 국화빵처럼 생긴 것도 있고, 둥글 넓적한 밀가루 호떡을 기름에 굽는 집, 만두집들이 있다.
길거리 끝에는 아름다운 조명이 비추는 삼층 지붕의 성문이 보인다. 한 가게에 들어가서 아까부터 내 눈에 띄던 피영(皮影) 매조도 액자와 말린 살구 한 봉지를 샀다. 피영은 그림자 연극 놀이로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된 섬서성의 2,000년 된 민속예술이다. 그 옆에는 또 항주의 비단 가게도 있다.
회족 거리를 한 바퀴 돌아 나오는데, 석류를 통째로 으깨어 주스를 팔고 있다. 어릴 적 뒤안에 있던 늙은 석류나무에 봄이면 새붉은 꽃이 피어나고 가을이면 굵직한 석류가 입을 쩍 벌리면 루비알 같은 새빨간 석류알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 석류를 쩍 갈라서 속알들을 한 입 베어물면 새콤달콤한 즙이 입안에 가득 퍼져왔다. 이란이 원산지인 석류가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와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에까지 전해왔다. 살구와 석류, 포도, 호두, 수박, 대추 같은 과일이 달고 풍요로운 실크로드의 맛을 보고 싶었다. 석류주스 한 잔을 사 마시는데, 달콤하고 시원하여 정말 맛있었다.
일행을 기다리며 이은영 샘에게 어떤 선물을 샀는지 물어보니, 청화백자가 들어간 스테인레스 책 갈피, 북마크였다. 이샘과 함께 그 작은 문방구를 다시 찾아가서 종류별로 북마크를 하나씩 샀다. 그 중에는 공자님의 초상이 상감되어 있는 것도 있고, 청화가 아니라 붉고 푸른 색의 안료로 그림을 넣은 것도 있다. 청화백자의 코발트 물감의 원산지 바로 여기 이들 회족이 사는 지역이다. 그래서 조선에서 청화를 비싸게 수입하여 썼다. 그래서 청화를 회청이라고도 하였다. 청화의 원산지에서 더 없이 의미 있는 선물을 살 수가 있어서 더욱 즐거운 여행길이다. 회족의 음식이 길거리에 넘치는 회족거리 야시장은 여행의 기쁨을 더해 준다.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회족거리 입구에는 중국공산당서안시연호구위원회(中國共産黨西安市蓮湖區委員會), 인민정부, 기율검사위원회, 상무위원회 등의 간판들이 걸린 문이 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서안 시내를 지나는데, 황색의 조명을 받아 아름다운 성문이 보인다. 그 편액에는 “文武盛地”라고 쓰였고 삼층 지붕을 하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중국식 전통 기와 지붕 아래에 성벽 같은 석조 건물이 보이는데, 녹색의 네온사인 글자로 “PARKSON 百盛”이라고 쓴 등이 켜져 있다. 백화점으로 보인다. 옛날 당나라 시대의 번성했던 장안성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우리가 묵을 동방대주점에 들어서니 정면에 黃河壺口瀑布를 그린 대형 그림이 걸려 있다. 호텔 로비의 기념품 가게에는 역시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璧이 있고, 재미있게도 옥돌로 만든 장기알과 윤기 나는 붉은색 장기판을 팔고 있다. 장기알은 초(楚), 한(漢) 대신 수(帥), 상(象) 대신 상(相) , 사(士) 대신 사(仕) , 포(包) 대신 포(炮) 자가 들어 있다. 장기판에는 초의 항우가 사면초가에 몰리는 마지막 장면을 표현한 전투장면을 그린 중국지도가 그려져 있다. 신선이 옥돌로 장기 놀이를 하는 중국 귀족들의 생활 모습이 재현될 정도로 오늘 중국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세계의 강대국이 되어 있다.
첫댓글 아이고 김희준 선생님! 학문의 깊이가 너뭄 깊어 빠지면 우리같은 사람은 헤어나오지 못하겠습니다.
읽기에 불편하더라도 만화책 보신다고 생각하시고 일독해주시고 잘못된 점은 바로 잡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시간을 두고 놀며 즐겁게 읽어주시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