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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철의 · [시각 문화 3.0 시대 ①] 미술이라는 예술의 탄생 ·
김인철의 시각 문화 3.0 시대 ① 미술이라는 예술의 탄생 |
| ▲ 아담의 창조(The Creation of Adam, 1511~1512). 미켈란젤로 作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 성당 벽화의 한 부분으로 그려진 것인데 교황의 주문에 의하여 그려진, 즉 주문자의 입맛에 맞게 그려진 그림이다. 이를 미술로 볼 수 없다. | |
① 미술이라는 예술의 탄생 -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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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라는 예술의 탄생
산업혁명(産業革命)은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영국에서 시작된 기술의 혁신과 이로 인해 일어난 사회, 경제 등의 큰 변혁을 일컫는다. 산업혁명은 후에 전세계로 확산되어 세계를 크게 바꾸어 놓게 된다. 산업혁명이란 용어는 아놀드 토인비가 <영국 산업혁명 강의> (Lectures on the Industrial Revolution of the Eighteenth Century in England)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19세기를 열면서 유럽문명의 중심은 영국으로 넘어간다. 영국에서는 다른 국가보다 일찍 여러 혁명(17세기 명예혁명)이 일어났고 봉건제가 해체되어 정치적인 성숙과 안정이 이루어지면서 유럽의 다른 지역과 달리 자유로운 농민층이 나타났다. 당시 영국에서는 이들 농민을 주축으로 하여 직물공업이 많이 발달하게 되고, 풍부한 지하자원 (기계와 동력에 필요한 석탄, 철)과 제2차 인클로저운동의 결과로 많은 노동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식민지 지배 등을 통해 자본도 많이 확보하고 있는 상태였으며 18세기 들어서 영국 내외에서의 면직물의 수요가 급증하자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개량해 대량 생산이 시작되었다.
이를 산업 혁명의 출발점으로 본다. 이리하여 많은 기계들의 발명이 이어지는데 이제 기계는 생산을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산업혁명은 경제구조의 혁명적 변화는 물론 정치구조도 크게 바꾸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왕족과 귀족 지배체제가 무너지고,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선거법 개정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공업화로 농촌인구의 대부분은 도시로 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도시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무차별적 석탄 사용으로 도시 공기는 크게 나빠졌고, 비위생과 더불어 악취가 심하게 되었다. 노동자에 대한 인권유린도 산업혁명 때부터 대두됐다.
공장주들은 노동자들에게 반인권적인 장시간 노동을 강요했고, ‘어린이 노동’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량생산으로 인한 제품생산 혁명은 수천년 이어 내려온 미술품 제작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기계에 의해 변하게 된 미술품 생산은 제조업자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져 결과물이 질적으로 조잡해졌다. 이익만 좇는 생산 방식 탓에 제품의 질은 자꾸만 저하되었다.
반면에 산업혁명을 이룩한 신흥 부르주아들의 눈은 전혀 달랐다. 그들에게 미술품은 갈수록 투자, 투기의 대상으로 변모되었다. 그러면서 미술 생산품에 대한 불만은 귀족 및 지식인 계층에게도 큰 불만을 사게 되었다.
| ▲ 베리 공작의 귀한 시절 그림(Tre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 1413~1416). 림부르그 형제 作 | |
영국에서는 존 러스킨과 윌리엄 모리스 등이 이러한 상황에 최초로 문제를 제기했고, 급기야 미술과 공예운동(Art & Crafts movement)이라는 디자인 혁신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흐름은 프랑스를 비롯한 대륙 여러 나라에서의 ‘신 미술(Art Nouveau, 아르누보)’로 이어지게 되었다. 아르누보의 미술 및 기술적 혁신은 오늘날 유럽인들의 세련된 취향의 기초를 이루게 되는데 매우 막강한 영향력으로 번져간 이 운동은 1차 세계대전이라는 복병을 맞아 갑자기 정지하게 되지만 이후 아르데코(Art Deco)기를 지나 현재에 이른다.
여기서 우리는 사진의 발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831년 프랑스인 루이 자끄 다게르(1789~1851)는 옥화은판을 노출시킨 뒤 수은 증기에 쬠으로써 사진술의 기초원리를 발명하였다. 1837년에는 촬영, 현상, 정착의 프로세스를 완성하고 화상을 영구적으로 고정시켜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이라 불렀다. 같은 무렵 영국에서는 윌리엄 폭스 탤벗(1800~1877)가 다게르 방식과 별개로 자연의 영상을 종이의 섬유 중에서 염화은을 만들어 레이스, 깃털 등을 밀착 현상했다. 명암이 반대로 이루어져 음화(陰畵)로 만들고 이것을 원판으로 하여 몇 장이고 양화(陽畵)를 만들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러한 실험들을 거쳐 1840년 6월 탈보트는 현대 사진의 근본이 되는 기술을 발표하게 된다.
감광유제가 입혀진 종이를 이미지가 형성될 정도로만 노출을 한 다음 화학적 현상과정을 거치는 기술이었다.
1880년대 들어 새로운 젤라틴 유제가 개발되었고, 이를 이용해 롤필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조지 이스트먼은 이러한 기술을 이용해 ‘이스트먼 아메리카 필름’을 생산해 냈다. 롤필름을 통하여 새로운 종류의 카메라를 만들 수 있었다. 조지 이스트만은 1888년, 100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필름이 들어있는 코닥(Kodak) 카메라를 내놓았다. 이렇게 이루어진 사진술은 유럽 및 미국에 급격히 전파되었다. 이제 화가들을 동원하여 근사한 자신의 모습 또는 사물, 사건을 기록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화가들은 점차 절망에 빠지거나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 ▲ 구성(Composition II in Red, Blue, and Yellow, 1930), 피에트 몬드리안 作 몬드리안의 회화. 이는 스폰서나 주문자 없이 작가의 의도를 그대로 나타낸 시각적 조형이다. 이것이야말로 미술이다. 한국의 고인돌, 영국의 스톤헨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고대 그리스 조각상과 한국의 장승 ,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조각상 등은 모두 어떤 알림의 구실을 하고 있다. 이것들은 무엇을 알리고 있을까? | |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시각이미지 2.0시대가 마무리 되면서 시각적 결과물의 개성을 요구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진의 발명으로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사물의 이미지를 재현할 필요도 없어졌다. 자의반 타의반 독립된 주체가 된 미술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작품에 책임을 져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히 예술적 정신을 담아야만 했다. 이들은 고민했고 인정받기 위하여 고생스런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인상주의부터 진정한 예술로 불릴 수 있는 시각물이 제작되어졌다.
반면에, 시각적 디자인의 시작도 이때부터 이루어졌다. 물론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이루어진 시각물들은 모두 디자인이었다. 그것들 모두 제작 의뢰자들이 있었고 이들의 의도대로 만들어져 어떤 역할을 한 목적물들이었다. 그러나 이게 19세기를 지나면서 작가 자신의 철학을 담는 시각예술로 정립되고 지금까지 있어왔던 기존의 시각적 결과물들은 영국에서 이루어지는 ‘미술과 공예운동’ 이후에 본격적인 시각 디자인이라는 어쩌면 산업혁명의 결과물로 새롭게 나타나게 된다.
이들의 차이점 구분이 바로 시각 문화 3.0의 시작이며, 시각문화에 있어서 진정한 예술이 시작됐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 ▲ 네 명의 모나리자(Four Mona Lisa, 1953), 앤디 워홀 作 |
이해를 돕기 위하여 동문 수학을 하다 요절한 평론가 박이소가 번역한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라는 책에 언급한 내용들을 소개한다.
이 책은 미국 렌셀래어 폴리테크닉(Rensselaer Polytechnic; RPI대학의 메리 앤 스타니즈웨스키(Mary Staniszewski) 교수는 믿는 것이 보는 것(Believing is seeing)’이란 책을 썼다. ‘미술 문화로의 창조(Creating the culture of art)’라는 부제의 이 책은 아서 아사 버거 (Arthur Asa Berger)에 의한 ‘보는 것이 믿는 것(Seeing is believing)’이란 제목의 책과 역설적으로 반대되는 책이다. 후자인 아서 버거의 책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시각적 문화의 흐름을 일종의 미술이라는 관점으로 썼다면 메리 스타니스제브스키의 책은 그렇게 살펴본 역사에 중대한 반발을 하고 있다.
이 책은 동문수학하며 장래가 촉망되던 학자였으나 일찍이 세상을 뜬 박이소에 의하여 번역되었다. 번역서의 제목은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Believing is Seeing)를 번역한 것이다.
그녀는 이 책을 통해서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에서 발견된 비너스 조각상, 베르사이유 궁전, 기자의 피라미드, 그리스 나이키 조각상, 와또(J-A. Wateau)의 바로크 그림 ‘시테라 섬으로의 순례’, 인도의 시바 조각상, 림부르그 형제의 ‘드 베리 공작의 귀한 시절 그림’, 아프리카 가봉 토착민의 제식 가면, 중국에서의 황제 봉헌도 그리고 다빈치의 ‘모나리자’ 등을 미술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다. …결론은 이들 모두 미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미술인가? 그녀가 미술로 규정한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마르셀 뒤샹의 모나리자 그림을 고친 ‘L.H.O.O.Q’,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자들’, 듀샹의 ‘샘’, 피에트 몬드리안의 ‘회화 1’, 존 하트필드의 ‘만세, 버터가 모두 사라졌군!’이란 풍자적 포스터,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제3세계 인터내셔널 기념비 모형’, 로버트 스미스슨의 ‘나선형 둑’, 아드리안 파이퍼의 설치미술 ‘구석에 몰려’, 신디 셔먼의 자전적 영화 패러디 사진인 ‘무제필름 스틸’ 시리즈, 에바 헤세의 ‘우연’, 잭슨 폴락의 ‘넘버 회화’ 시리즈, 들라크르와의 ‘사다나팔루스 왕의 죽음’, 조셉 코수스의 ‘제목’, 앤디 워홀의 ‘네 명의 모나리자’ 등을 들면서 이것들이 바로 미술이라는 것이다.
그녀에 의하면 우리가 설정한 미술이란 것은 근대(modern era)에 해당되는 최근 200여 년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시작은 1970년대 영국에서 비평가, 시인, 화가, 소설가로 유명했던, 즉 모더니스트로 불려 마땅한 존 버거(John Berger)의 이론이 주목할 만하다. 그는 그의 명저 ‘보는 방법(Ways of seeing)’에서 과거의 모든 시각적 결과물들이 이데올로기의 틀에서 어떻게 보여져야함을 규정한 것이라고 언급한다. 이리하여 18세기 전만해도 시각문화를 다루는 제도들은 오늘날과 매우 달랐고 어찌 보면 전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그때까지 우리가 소위 미술이라 불렀던 것들 모두 일상생활의 맥락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타니스제브스키가 규정한 일상 속의 시각문화를 어찌 해석해야 하는가?
이해가 어렵다면 우리의 전통으로 돌아가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자. 우리나라는 기나긴 불교 신앙으로 인하여 적지 않은 이미지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절집들에는 시각적 이미지와 장치들이 무척 많다. 경계를 나타내며 지금부터 경건한 공간에 진입하고 있다는 장치인 일주문, 해탈문을 비롯하여 부처의 분신이랄 수 있는 탑이 있다. 절집은 여러 용도에 의하여 건축되어 가지가지 모습이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를 모시게 되는데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미륵불, 약사여래, 지장불 등 모두 나름대로의 모습들을 보인다. 어떤 규칙이 있다. 그런 규칙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존엄한 신분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어떤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외경심을 가진 신자를 비롯한 일반인들은 그렇게 규정된 대로 이들 이미지를 단순히 해석하면 된다.
이러한 방식의 이미지와 장치 해석은 서양미술(18세기 이전의 것으로 미술이 아니라고 하는) 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상 숭배를 철저히 금한 초기 기독교는 점차 변질되어 많은 이미지들을 남겼다. 이것은 문자해독을 독차지 하며 특권을 지속하고자 한 귀족층의 의도와 맞아 떨어진다. 기독교 세계의 강화와 더불어 문맹 기도가 맞아 떨어지며 수많은 종교회화가 나타났던 것이다. 이들 그림은 그려진 대로 믿어야지 다른 해석이나 이유 또는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이렇게 의도한 고객(client)의 주문에 의해 화가나 조각가, 건축가가 그대로 그려진 작품들의 방식은 귀족이나 성직자의 초상들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이른바 지배자에 대한 존엄한 모습은 권위 유지의 또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타고난 자질을 가진 화가들은 이들 지배자들의 소유물과 다름이 없었고, 삶의 유지 보장, 나아가 생명의 담보는 그들 입맛에 맞는 이미지를 충실하게 만들면서 가능했다.
| ▲ 아프리카 가면과 중국 귀부인도. 이들 모두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제작된 것들이므로 미술이 아니다 |
이렇게 이루어진 시각이미지들을 현재 예술의 한 부분인 미술로 여길 수 없다.
아무튼 그러한 시기가 영원히 유지될 수는 없었다. 공교롭게도 19세기 사진술의 발명과 본격적 예술로서 미술의 탄생이 함께 이뤄졌던 것이다. 사진이 발명되면서 이제 지배자의 입맛에 맞게 똑같이 그려대는 화가의 입장은 흔들렸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지배자들은 더 이상 그 위치를 유지할 수 없는 시기가 되었다. 근대 시민사회의 대두와 함께 신흥자본가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제 미술가들은 자본가들의 입맛에 맞는 작업을 갖거나 아직 남아 있는 귀족(sponsor)을 위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시기였다. 냉정하게 말해, 개성 있고 투자가치가 있는 작품이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 시기 귀족을 만족시키지도 못하면서 신흥브르주아를 함께 아우르는 작품을 만든, 어쩌면 지나치게 혁신적인 작업을 한 화가들이 고통을 겪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잘 알고 있는 인상파 화가들이 그들이다. 고객 취향에 어느 정도 부합하며 귀족 반열에서 잠깐 호사를 누린 신고전주의 화가들과 달리 그 이후의 작가들은 무척 고통을 당했다.
결론은, 18세기 이전까지의 미술은 후원자와 고객에 해당되는 종교적, 정치적 귀족의 취향에 맞게 이루어진 용도로의 미술이었으니 오늘날의 디자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대 이래로 이루어진 시각문화의 1.0 시대는 이렇게 수 천 년을 이어온 후 19세기와 함께 막을 내렸다.
■ 김인철 : 전주비전대 교수, 캐나다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 연구교수, 홍익대 미대 대학원 졸업(시각영상디자인)
- The ASIA_N | 글, 김인철 | December 23, 2015 |
김인철의 시각문화 2.0 시대 下 산업화 앞세운 인간상실 시대, ‘인상주의’ 전성기 열었다 |
| ▲ 사실주의 회화 ‘돌 깨는 사람들’(Stone-Breakers, Gustave Courbet, 1849). 귀스타브 쿠르베 作 | |
산업화 앞세운 인간상실 시대, ‘인상주의’ 전성기 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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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앞세운 인간상실 시대, ‘인상주의’ 전성기 열었다
| ▲ 르네상스 후기, 매너리즘 시기의 회화 ‘긴 목의 성모’, 1534 (Parmigianino’s Madonna with the Long Neck, 1534-40). 파르미자니노 作 | |
근대의 시작은 바로 모더니즘과 함께였고, 이는 당연히 시각문화와 중요한 연결고리를 갖는다. 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은 종교적 신념을 배제하는 동시에, 계몽주의적 사고 역시 거부한 근대적 사고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시기는 대체적으로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의 시기이다. 한편 시각문화에서 모더니즘의 시기는 대략 1860년대 이후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1860년대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1860년대의 전세계는 정치사회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크게 요동친 시기였다. 미국에서 노예제도 폐지로 인한 대서양 노예무역의 위기는 이윽고 남북전쟁이라는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이후 전쟁은 끝나지만 흑인노예해방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종차별이라는 새로운 장벽이 만들어졌다. 멕시코에서는 프랑스의 침공 이후 황제 체제로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또한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연합국의 파라과이 침략전쟁이 일어나 거의 60%에 달하는 파라과이 인구가 살해되었다. 북아메리카에선 영국에 의한 캐나다 지배가 이루어졌다.
유럽에선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러시아 왕국이 덴마크를 침공하였고, 이는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프러시아는 독일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프러시아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수행하게 된다. 한편 크고 작은 전쟁 속에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러시아 제국에선 봉기가 일어났고, 중국에서는 제2차 아편전쟁이 일어나는 한편, 태평천국의 난이 기승을 부려 난징이 함락되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이 이루어지면서, 무사 계급은 생존을 위한 정치세력으로 변모하여 왕권에 순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오리족과 뉴질랜드 식민정부와의 전쟁이 있었다.
정치적으로 부침을 겪었으나, 기술적으로는 획기적인 진보들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미대륙 횡단 철도가 완성되었으며 이집트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었다. 최초의 잠수함이 진수되었고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전신망이 구축되어 유럽과 미국 간의 즉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게 되었다. 알프레드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고 맥스웰이 전기와 자기장 이론을 확립했다. 조셉 리스터가 수술 과정에서 석탄산 소독을 도입해 수술 중 감염으로 사망하는 환자의 수를 대폭 줄였다. 멘델도 유전 법칙을 발표했지만, 이는 1900년대까지 크게 인정받진 못하였다. 첫번째와 두번째 세계박람회(EXPO)가 런던과 파리에서 개최되며, 새로운 과학기술들이 전세계인에 선보여졌다.
‘19세기 식민지 경영’ 시각문화 질적 변화 이끌어
| ▲ 바로크 회화 ‘진주 귀걸이의 소녀’ (A Girl with a Pearl Earring, Johannes Vermeer, 1665). 요하네스 베르메르 作 | |
문학을 비롯한 예술계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을 썼고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쥘 베른의 ‘해저 2만리’가 출간되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이때 세상의 빛을 봤다.
같은 시기, 시각문화에서 이루어진 가장 획기적인 변혁은 ‘인상주의(印象主義·Impressionism)’의 대두라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각문화 2.0 시대의 끝자락은 필자가 전회에 언급한 르네상스 이후로부터 1860년대까지의 기간을 지칭한다.
르네상스 이후 이탈리아의 발전은 답보 상태였다. 기법적으로 정체된 시각적 양상, 이른바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져 있었다. 이 시기 유럽의 정치사회는 기독교의 기준을 따르던 ‘구태’를 말끔하게 벗어버리고 산업화에 매진했다. 나라 밖으로 눈을 돌려 세계를 상대로 상업자본에 집착하면서 시각문화도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새롭게 자리매김한 유럽의 강대국들은 그들이 후원한 중산층 세력을 등에 업고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이루어 갔다. 그 결과 세계를 대상으로 한 ‘식민지 경영’이라는 경쟁에 치열한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으로 이어지는 대서양의 패권은 시각문화의 질적 변화와도 관련이 깊었다.
이탈리아를 기준으로 북유럽 지역인 플랑드르에서 이루어진 바로크(Baroque)와 프랑스로 연결된 로코코(Rococo) 양식은 이 지역의 경제적 부흥과 무관하지 않다. 귀족도 아니고 종교적 지도자도 아닌 단순 경제적 계급이었던 제3계급인 부르주아들의 눈은 매서웠다. 그들은 시각적으로 개성 있는 작품들을 선호했으며, 한편으로는 이 시대의 작품들을 투자의 개념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리하여 작가들은 잔인한 세계에 내몰리기 시작했다. 바로크, 로코코라는 양식의 개념 모두 부르주아 출신 비평가들의 혹평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 ▲ 고전주의 회화 ‘나폴레옹 대관식’ 자크 루이 다비드 David, Jacques-Louis 作 (Coronation of Napoleon and Josephine, Jacques-Louis David, 1805-1807) | |
시각문화 2.0시대 종말 단초된 물질문명 중심 사회
그들에게 만족이라는 것은 없었다. 그리하여 작가들은 공부하고 노력하여 그들의 눈에 들어야 생존하는 시기가 시작되었다. 작가들은 체계적으로 그리스-로마 미술을 다시 공부하여 고전주의를 새롭게 정립했으니, 이를 신고전주의(Neo-classism)라 부른다. 어떤 이들은 고전주의의 몰개성에 반발하여 매우 흥미로운 주제를 담은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는 낭만주의(Romanticism)의 시초다.
이미지의 형식(形式, Form)을 중시한 고전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내용(內容·Contents)을 중시한 낭만주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서유럽의 급격한 도시화, 산업화는 물질문명 중심으로 이어져 인간의 실종을 가져오게 되었다. 사실주의(Realism)는 이런 사회 문제를 고발하는데 충실한 역할을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드디어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의 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는데 그게 인상주의이다.
시각문화에 있어서 인상주의는 2.0 시대의 종말이자 3.0시대의 서막이 되는 셈이다.
■ 김인철 : 전주비전대 교수, 캐나다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 연구교수, 홍익대 미대 대학원 졸업(시각영상디자인)
- The ASIA_N | 글, 김인철 | November 14, 2015 |
김인철의 시각문화 2.0 시대 中 르네상스 미술, 인류사에 천지개벽 몰고오다 |
| ▲ 라파엘로(Raphael), 아테네 학당(The School of Athens), 1509~1510, 바티칸(Vatica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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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미술, 인류사에 천지개벽 몰고오다
| ▲ 다 빈치(Da Vinci), 모나리자 또는 라 지오콘다, 루브르 박물관 (Mona Lisa or La Gioconda), 1503~1505, (Louvre, Paris, France) | |
정치적인 이유로 서유럽에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거의 천 년에 가까운 시간이 ‘암흑시대(dark age)’로 변하게 되었다. 즉 종교적 권위라는 어마어마한 힘에 눌려 제작자들은 숨쉬기조차 어렵던 때였다. 작가들의 생사여탈이 그들의 손에 달려 있었으니 개성을 내세운다거나 하는 시도는 감히 꿈도 꾸기 어려웠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새롭게 이루어지는 법이다. 기독교로 인하여 닫혔던 사회가 바로 그 기독교로 인하여 문이 열리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기독교의 발원지 중동 지역은 서유럽과 비교하여 꽤 발전된 사회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게 십자군 전쟁으로 인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십자군 전쟁은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로마 가톨릭 국가들이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 대항하여 성지(聖地)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행해진 대규모의 군사 원정이었지만, 실제로는 이슬람 세계의 여러 나라들뿐만 아니라 같은 기독교 문화권이었던 동방정교회의 나라들까지 공격해 들어간 무차별 침략 전쟁이었다.
십자군 전쟁은 처음의 순수한 열정과는 달리 점차 정치적·경제적 이권에 따라 움직이면서 순수함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교황은 교황권 강화를, 봉건 영주들은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하는 등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성향이 반영된 전쟁이었고 그 절정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켜 같은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 제국을 몰아내고 라틴 제국을 세운 제4차 십자군 원정이었다. 거듭된 원정으로부터 약탈되어 온 유물, 서적들은 무식하고 가난하기만 하던 서유럽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쳐 르네상스가 이루어진다.
르네상스(renaissance)는 재생, 부활이라는 의미로 당연히 고대 그리스, 로마라는 서유럽 문화의 원형에 해당하는 가치관의 재탄생을 말한다. 지역적으로 동방에 가장 가까운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에서 시작되어 전유럽에 퍼지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당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사회적 변화들을 주목해 봐야 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국가 간 경쟁 체제는 이미 종교적 권위 같은 것은 안중에 없는 상태로 진전되었다.
이들 국가의 귀족들은 권위의 과시, 탐욕적인 수집열 등의 세속적 동기로 작가들을 일시적이든 영구적이든, 공적이거나 사적으로 후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공건물과 개인 저택의 건축, 조각 및 회화 활동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피렌체를 지배한 데 메디치(de Medici) 가문을 들 수 있다.
| ▲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비너스의 탄생. (The Birth of Venus), 1486.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Uffizi, Florence) | |
피렌체, 베니스를 비롯한 도시 국가들에서는 여러 변화를 수용하면서 합리주의가 심화되었으며, 시민들의 중요성이 아울러 존중되어 시각이미지의 성격도 변화되어 갔다. 이 때부터 시각 이미지 제작자 후원과 더불어 상업화 등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중동 지역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해외 경영은 부유한 상인들이 부동산에 투자하고 귀족화 하는 현상으로 진행되었다.
초창기 시민들은 교회나 수도원에 헌납하기 위한 예술품을 주문했으나 15세기 중엽부터 주택 장식 등 세속적 성격을 띤 공예품 주문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따라서 예술품수집가와 화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급진적 사회의 변혁으로 말미암아 시각 이미지 제작 역시 혁명적으로 발전했다. 초상화와 인체 조각 및 풍경화의 중요성은 인간에 대한 자각과 자연에 대한 관심을 함께 반영했다.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는 뛰어난 과학적 정신으로 많은 실험과 발명을 하였으며 인체의 구조를 탐구하여 그의 미술 작업에 반영했다.
또한 메디치 가문과 교황의 후원을 받은 미켈란젤로(Michelangelo)가 있었다. 그의 정렬과 투쟁적인 예술성은 그가 남긴 여러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작가들로 인하여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비롯된 예술적 기법과 정신세계를 받아들이면서 작가들의 표현이 상대적으로 급진전되었다. 기교와 정신의 합일이라는 시대적 특징이 처음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작품 주제의 80% 정도는 여전히 기독교에 머물렀다.
15세기 초에서 16세기 말에 걸쳐 일어난 문화 및 사회적 변천, 즉 인문 · 인본주의적 이념과 양식의 확산, 인쇄술의 발전과 시장의 형성, 새로운 이념에 동조하는 대중의 성장, 지역 격차의 해소, 문학과 예술에서의 개인주의의 강화, 점진적이지만 꾸준한 예술의 세속화 및 미적 심화는 시각 문화 2.0 시대 말기의 중요한 요소들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상급문화와 하급문화 사이의 구분이 확실해지고 지역적 문화 차이가 계급적 문화 차이로 변모해갔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런 천지개벽에 가까운 혁신이 근대에 다시 한 번 거의 동일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 김인철 : 전주비전대 교수, 캐나다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 연구교수, 홍익대 미대 대학원 졸업(시각영상디자인)
- The ASIA_N | 글, 김인철 | October 28, 2015 |
김인철의 시각문화 2.0 시대 上 종교절대자 담은 중세, 거기에 예술은 없었다 |
| ▲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된 아담의 창조와 원죄. 12세기에 벽화를 캔버스에 옮겨 그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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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절대자 담은 중세, 거기에 예술은 없었다
| ▲ 두치오의 성모자상. 금색 목판위의 템페라화. 13세기 작 | |
서유럽에서 4세기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전 지역이 이 신흥종교 세력에 편입됐다. 이윽고 세상은 정교가 일치되는 강력한 유일신의 세상으로 변화된다. 다양한 존재의 철학을 비롯한 가치 관념, 여러 신들이 나타났고 이들이 다분히 인간적 면모를 보였던 다양성은 모두 기독교라는 한 곳, 한 사고 방식, 믿음으로 모아진다. 이런 사회적 흐름 속에서 시각적 조형물들 역시 모습이 달라진다.
역사상 이렇게 정교가 막강하게 일치된 시절은 없었다. 기독교가 정치적 일치라는 목적으로 자리잡아야만 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과거 유산을 지워버리는 일이었다. 이는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불교 석불들을 무참히 파괴한 탈레반 세력과 중동 지역에 남아 있는 기독교 유적지를 파괴하고 있는 IS 세력의 만행과 다름 없다. 자신들의 종교만을 위하여 과거의 종교 유산을 철저히 없애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찬란하면서도 인간적이었던 그리스 문명의 자취들이 거의 파괴됐다.
인간의 시각은 절대적 위치의 존재가 의도한 목적에 따라가게 마련이다. 현재 북한에서 이루어지는 시각문화를 보면 이해가 쉽다.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시각적 결과물들은 거의 정치적 목적, 구체적으로 말하면 절대적 지도자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집단의 목적 달성을 선동하는 역할만을 한다
중세 기독교 시대의 시작과 더불어 비롯된 시각문화는 이른바 ‘우상파괴’라는 명목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권위주의적인 일정한 규범을 확립하게 된다. 그렇게 하여 현재의 이탈리아 여러 도시들에서는 이런 그림들이 경쟁적으로 제작됐다. 더욱이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이전의 불명확한 신의 존재(기독교의 유일신이 아닌)를 숭배한 자취를 배격해야만 했다. 이런 분위기는 건축물에서 더욱 두드러졌는데 지하에서 비롯된 종교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는 듯 바질리카의 모습은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이라는 한층 웅장한 양식으로 점차 발전해갔다.
| ▲ 이탈리아 시칠리아 몬레알레 대성당의 그리스도. 12세기 작. | |
그렇게 이뤄진 교회의 부속 조각 역시 눈부시게 제작됐다. 그림이라는 2차원 시각문화는 그리스 시대의 독립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을 잃어버리는 대신 초월자의 존재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치열한 경쟁의식은 종교적 권위에 충성하려는 시각적 데모(demonstration)로 치달았다.
여기서 우리는 시각문화의 목적지향적 기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철저히 종교적 절대자의 명령에 따라 선택된 작가들에 의해 제작되고, 이런 결과물에서는 작가의 의도는 거의 반영되지 않는다. 오로지 교황이나 대주교와 같은 이들의 만족을 위하여 제작돼 그것이 충족되면 작가들은 최소한의 생활은 물론 때로는 풍족한 보상이 보장됐다. 작가들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예술가라고 불릴 수 없는 존재로, 그저 단순한 생활인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시각문화 2.0 시대의 전반기 모습이다.
정리하면, 시각문화 1.0 시대는 원시사회에서 종교적 권위가 확립되기 이전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시각적 결과물은 인간의 생활을 외부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거나, 무형의 신들에게 경외심을 보여 생존을 보장받으려는 애절한 바램으로 이뤄졌다. 동굴벽화부터 시작된 시각물의 범위와 규모는 점차 많은 기능이 더해져 기호를 이루고, 이것은 문자라는 모습의 단계로 비약적인 발전을 한다. 역사의 기록은 시각문화 1.0 시대를 규정하는 큰 사건이다.
시각문화 2.0 시대의 시작은 기독교의 정립에 따른 초월적이고 권위적인 제정일치 시대로 치닫는 시기이다. 따라서 권위주의, 절대자의 뜻에 맞는 작품이었을 뿐 작가의 의도나 개성은 흔적이 없던 때다. 당시의 그림을 보면 양식이나 규범, 아름다움, 구조적 만족감이나 색채의 적정성 등 일련의 미술기법과는 거리가 먼, 서툴게 제작된 모습들이 주류를 이룬다.
■ 김인철 : 전주비전대 교수, 캐나다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 연구교수, 홍익대 미대 대학원 졸업(시각영상디자인)
- The ASIA_N | 글, 김인철 | August 24, 2015 |
김인철의 시각 문화 3.0 시대 ㆍ 미술은 무엇인가? |
| ▲ 라스코 동굴 벽화에 그려진 소. 이러한 그림들 역시 어떤 기원을 나타낸 주술적 소통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또한 현대에 까지 남아 있는 부적은 대표적인 주술적 결과물이다. 이것은 신과의 소통을 위하여 무속인이 제작한 시각적 커뮤니케이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 |
[시각문화 3.0] 미술, 그 용도에 대한 의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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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그 용도에 대한 의문
미술은 무엇인가? 미술은 자신의 사상, 주장을 색과 형으로 나타낸 예술의 한 분야라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인가? 예술에 대한 언급을 시작하면 조금 복잡하다. 멀게는 고대 그리스에서 이루어진 예술론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이어 중세, 근대, 현대의 예술론 등을 들 수 있다. 아무튼 예술은 철학자가 삶의 방식을 여러 방법으로 제안하고 논의하듯이 작가의 사상적 가치를 어떤 결과물에 부여한 완성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술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남겨진 결과물로 그 자체가 용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술 작품은 그 용도를 굳이 한정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과 작품을 제작한 작자의 어떤 사상을 더듬어 파악하게 되는 것이 예술의 과정이다.
미술은 색과 형으로 나타낸 예술이므로 시각적 이해가 우선이지만 그렇지도 않다. 필자는 어떤 전시장에서 시각장애인이 한 조각상을 만지면서 느끼는 장면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미술은 시각적으로만 국한하여 한정할 수 없지만 어쨌든 시각적 예술 행위이자 완성 작업을 말한다.
| | | ▲ 약 3만4000년 전 크로마뇽인들이 매머드 상아를 깎아 만들었다는 조각상. 이것의 용도는 무엇일까? 아무튼 예술작품은 아니다. | | 그러면 약 3만4000년 전 크로마뇽인이 남겨놓은 조각 작품은 예술일까? 그들이 어떤 철학이나 사상적 주장을 위하여 이 작품을 만들었을까? 그렇지 않다. 이들은 어떤 목적을 위하여 조각상을 만들었을 것이다. 즉 용도, 쓰임새를 위하여 만들었다는 얘기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인류의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작품들은 거의 쓰임새를 위한 것들이었다. 그 쓰임새들은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주술적 (呪術的) 용도이다. 위대한 자연에 비해 한없이 나약한 인류는 범신적 기원을 했고 그러한 바람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용도로 만들어진 것들은 여기저기 많이 보인다. 보이지 않는 신과의 소통으로 어떤 소망의 달성을 기원한 용도로 제작된 것들이다. 고대의 여러 동굴 벽화, 암각화 등에 나타난 상징은 꽤 주술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크로마뇽인들이 남긴 조각상 역시 주술적 용도로 만들어졌을 수 있다.
그 다음의 용도는 바로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것들이다. 이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개념이다. 고대인들이 남겨놓은 그림과 글자 등이다.
| ▲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들. 이렇게 시작한 그림글자들은 점차 구체화되어 나중에 기호글자로 변해갔다. | |
문자는 정착문명의 결과물이다. 4대 문명의 발상지에서는 공통적으로 글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대단위 의사소통이 있었고 그것을 기록하여 남겨두는 일이 중요했다. 의사소통의 중요성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글자를 해독하고 그것을 운용하는 일이 일종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통 행위는 사회의 발달과 더불어 확대되었고 중요하게 여겨졌다.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의 능력은 글을 읽고 쓰는 일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 ▲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조선 사대부의 시각적 의사소통을 위하여 남겨 놓은 전형적인 결과물이다. | |
세 번째로는 입체 조형물들을 들 수 있다. 앞서 크로마뇽인들이 남겨 놓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인류는 적지 않은 입체 조형물들을 남겨 놓았다.
| ▲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한국의 고인돌, 영국의 스톤헨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고대 그리스 조각상과 한국의 장승,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조각상 등은 모두 어떤 알림의 구실을 하고 있다. 이것들은 무엇을 알리고 있을까? | |
인류가 입체적 제작물을 남겨 놓은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벽에 그림을 그리는 일보다 입체물을 만드는 것이 어려울 것으로 지레 짐작하여 입체물의 역사가 짧았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입체물은 사람들에게 아주 구체적인 암시를 한다. 공간을 점유하며 서 있는 조형물은 어떤 외경을 자아내게 한다. 고인돌과 스톤헨지 등은 묘지로 조성됐지만 그 자체로 일종의 경고를 담고 있다. 이러한 용도로 가장 권위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이집트의 피라미드이다. 절대적 지배자의 묘소에 대한 주의, 경고는 스핑크스 조각상까지 덧붙여 아주 강력한 장치를 보여주고 있다.
환태평양 문화권에서 흔한 토템폴(Totem pole) 문화는 한국에서 장승으로 나타난다. 장승은 집단의 결속을 비롯한 여러 복합 상징을 담고 있는 입체물이다. 한편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입체물도 있었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이 대표적인데 이러한 용도를 가진 조각상의 역사는 이후 그리스, 로마 조각들에서도 보이며 심지어 신라 토우(土偶)에서도 발견된다. 그리고 인류가 점차 구체화한 종교에 대한 조각상이 만들어졌는데 이것 역시 그리스, 로마 조각상들로 나타났다.
이렇게 살펴 본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놓은 결과물들이 모두 확실한 용도를 가진 제작품들이었다. 과연 이것들을 미술로, 예술 작품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 김인철 : 전주비전대 교수, 캐나다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 연구교수, 홍익대 미대 대학원 졸업(시각영상디자인)
- The ASIA_N | 글, 김인철 | May 28, 2012 |
김인철의 시각 문화 3.0 시대 ㆍ 의사소통 기술의 역사 |
| ▲ 인류가 글자로 소통하는 시대를 가져온 '고대 수메르 설형문자'(왼쪽), 책은 눈(시야)의 확장이라고 얘기한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는 마사지다'(가운데), 전화의 발명은 인류의 소통과 함께 정보의 혁명적이면서도 걷잡을 수 없는 팽창을 가져왔다(오른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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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기술의 역사
에버렛 로저스(Everett Rogers)와 윌버 슈람(Wilbur Schramm)과 같은 사람들은 의사소통의 역사와 그 기술적 전개를 얘기했다. 여기에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은 인간 본능이 확장된 소통(communication)에 대해 언급했다. 즉 청각의 확장으로 라디오, 시각의 확장으로 책 같은 매체를 규정하면서 미디어는 인간감각을 대신한다는 의미로 ‘미디어는 마사지다(Medium is the massage)’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인간이 소통하고자 하는 본능(감각)이 역사와 더불어 확장되고 있는, 어쩌면 무서울지도 모를 미래의 소통을 규정한 것이다. 이러한 이론들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속속들이 공감한다.
아무튼 이렇게 이뤄진 기술적 소통의 시작을 우리는 역사라고 한다. 물론 역사의 기준은 문자의 발명이다. 이전의 역사와 이후의 역사는 180도 다른 양상을 보인다. 문자와 함께 살아온 인류는 기록을 시작하게 됐다. 구체적 문자가 없던 이전의 시기는 그저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추측만 하고 있으니 얼마나 불확실한 소통인가? 성질 급한 사람들은 불확실하거나, 늦거나, 아예 무시되어 이뤄지는 소통을 견디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해 화풀이까지 한다. 의사소통의 메커니즘은 이렇게 무섭기까지 하다.
인류 최초의 글자는 지금의 이라크 땅, 메소포타미아 하류의 델타지역에 일찌감치 자리잡은 수메르(Sumer)인들에 의해 B.C. 3000년경 시작됐다. 이른바 쐐기문자다. 설형문자(楔形文字)라고도 부르는데 글자 하나하나의 모습이 그렇게 보여 생긴 이름이다. 풍부한 찰흙을 네모반듯하게 다듬어 하나의 빨래판처럼 만들어(그것을 태블릿, tablet 이라 불렀다) 그 위에 나무 대롱과 같은 끝이 날카로운 꼬챙이(이것을 스타일러스, stylus 로 불렀다)로 눌러 글자를 새겼다. 태블릿이나 스타일러스 모두 컴퓨터가 만들어지면서 새롭게 나타난 명칭같지만 이미 있던 말들이었다. 아이콘(icon)도 마찬가지다. 글자는 세계 4대 문명 발상지를 중심으로 만들어졌으니 역사는 4대 문명으로부터 비롯된 것과 다름없다.
이렇게 시작한 글자에 의한 소통의 역사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필기, 메모, 낙서 등이 이러한 소통행위다. 글자로 인한 의사소통은 정보의 급작스런 확장을 가져왔다. 그러다가 하나하나 써가면서 소통하는 일이 정말 성가신 일로 치부됐다.
다음에 이뤄진 의사소통의 혁신이 활자인쇄술이다. 인쇄술의 역사에서 활자, 구체적으로 금속활자의 역사는 우리 민족이 시작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활자의 일반화에는 종이의 역할이 중요했다. 중국인 채륜이 발명한 종이는 이슬람 세력과 당나라가 마주친 전쟁으로 인해 유럽에 전파됐는데 그때 당나라군을 이끌던 장군이 고구려 유민 고선지였다. 우리 민족이 세계 활자문화에 끼친 또 하나의 대단함이다. 이렇게 활자인쇄술에 의한 인류의 소통생활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는 아직도 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다음으로 나타난 것은 원거리 의사소통이다. 글자나 활자매체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송신자, sender)과 전달받는 사람(수신자, receiver)의 구분이 약간 애매하다. 천자문(千字文)을 배우는 학당에서 교본(천자문)과 교사(작자)가 있는 상황처럼 직접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는 경우도 있지만 책(천자문)을 보면서 혼자 공부할 때는 간접 커뮤니케이션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매체(media, medium)와 사용도구(interface)의 개념을 살펴보자. 필자는 지난 회에 의사소통과 사용도구를 언급했다. 매체는 또 다른 사용도구에 해당된다. 어떤 사람이 방 안에 있다가 밖으로 나가려면 문을 열고 나가야 한다. 그리고 문에는 손잡이가 있어서 그것을 작동시켜야 한다. 손잡이를 열쇠로 열고 나간다면, 열쇠, 손잡이, 문이 사용도구가 된다. 만일 전원을 끄고 방을 나가야 한다면 켜고 끄도록 하는 스위치 역시 사용도구이다. 의사소통에 있어서 글자와 활자도 도구이다. 글을 기록할 파피루스, 양피지, 종이 등이 소통의 도구로 등장했는데 도구라기 보다는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소통하고자 하는 인간에게 내용(정보)을 담아 보내거나 지닐 수 있는 매개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사용도구 없이 인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정보를 다루기 힘들었을 것이다.
정보의 양만큼 인간은 이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소통하고자 했다. 완벽한 간접 커뮤니케이션을 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르코니에 의해 전신이 발명됐고 이윽고 전화가 발명되었다.
전화의 발명으로 인류의 의사소통은 비약적으로 전환됐다. 전화는 우리의 삶에서 혁명이자 혁신 이상이다.
전화는 소통, 즉 커뮤니케이션하고자 하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가장 인간적인 도구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전화없이 설명이 힘들다. 전화를 발명한 그라함 벨(Alexander Graham Bell)은 엄청난 부를 후속 연구에 투자했는데 벨연구소에서 오늘날 컴퓨터를 가능하게 한 트랜지스터를 만든 것이다. 이제 원거리 의사소통은 별 무리 없는, 어쩌면 평범한 일이 됐다. 원거리 의사소통을 위한 매체들로는 라디오, TV 등을 추가할 수 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라디오는 이미 오래 전에 한물 간 매체이다. TV는 어떤가?
인간의 소통 욕구와 확장은 원거리 커뮤니케이션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이제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의 시대를 이룩한 것이다.
■ 김인철 : 전주비전대 교수, 캐나다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 연구교수, 홍익대 미대 대학원 졸업(시각영상디자인)
- The ASIA_N | 글, 김인철 | February 20, 2012 |
김인철의 시각 문화 3.0 시대 ㆍ 제대로 소통하고 싶다면 디자인! |
| ▲ 고대 이집트의 건물 벽에 새겨진 상형문자(왼쪽), 건물은 인간의 거주를 위한 도구이며, 문자는 인간 본능인 의사소통의 역할을 한다. | |
[시각문화 3.0] 제대로 소통하고 싶다면 디자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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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소통하고 싶다면 디자인!
디자인의 시작
역사 이전 시대부터 우리 인류가 세상에 남겨놓은 것들은 매우 많다. 우리는 그것들 중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을 문화유산이라고 부르며 소중하게 취급한다. 이들 문화유산의 범위는 매우 많고 다양하지만 자세히 보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의사소통을 위한 것, 또 하나는 쓰임새를 위한 것이다.
우선 의사소통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인간의 여러 본능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의사소통의 본능이다. 우리의 본능들, 즉 배가 고파서 뭔가 음식으로 배를 채운 다음, 얼마 지난 후 배설을 하고 잠을 자야하는 것과 같은 일들을 들 수 있다. 이런 행위들은 인간본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동물의 본능에 속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에게는 이런 동물적 본능들보다 중요하면서도 다른 동물들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본능이 있다. 바로 의사소통이다. 의사소통은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들에게도 있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소통은 본능보다 우선하면서 매우 복잡한 메카니즘을 지니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소통 때문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누가 되었든 동료들과 의견을 나누면서 살아간다. 가족, 친척, 친구의 소식이 궁금하다. 이것은 태초 이래로 다져온 생존 방식의 또 다른 모습이 남겨놓은 유산이다. 날씨변화, 자연환경 변화, 맹수의 접근, 농사와 사육에 대한 정보, 적들의 침입, 질병의 유행 등 무수한 정보(情報, information)들과 더불어 살다보니 그리 되었을 것이다. 동물처럼 우수한 털을 갖추지 못하여 늘 옷이 필요했고, 그들처럼 막강한 발톱과 이빨로 무엇이든 먹지 못하여 음식에 굶주리다 농사와 목축을 고안하여 살아온 인류였다. 이렇게 한없이 나약한 사람들에게 정보는 매우 중요한, 필수불가결의 무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인류에게 정보의 향유는 매우 중요한 본능이 된다. 우리의 유전자 속에 확실히 새겨져 내려오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이루어진 유전자로 인하여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의 여러 관계를 설정하며 살고 있다.
‘정보를 공유하는’ 소통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은 그로 인하여 벌어지고 있는 적지 않은 문제들을 통하여 알게 된다. 이른바 ‘왕따’와 같은 따돌림 문화가 그것이다. 따돌림은 대단한 형벌이 된다. 바로 소통에서 제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친구가 없어서 대화를 할 수 없는 처지처럼 참담한 지경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의사소통은 매우 중요하다.
다음으로 도구라는 쓰임새를 들 수 있다. 도구는 인간만이 만들었고,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인류는 도구를 만들면서 삶을 새롭게 이룩했다. 돌을 다듬어 도끼 등을 만들어 농사를 짓거나 동물을 사육했고 싸움을 벌였다. 도구는 전형적으로 남성적인 특성을 지닌다.
멀리 거슬러 볼 필요 없이 100년 전까지만 되돌려 남성들의 역할을 돌아보자. 남자들은 물리적 힘을 발휘해야만 했다. 농경이나 목축을 하는 사회에서 여자는 노동력을 생산해야만 했다. 즉 아이를 낳아 키워야 했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노동력은 생산성과 비례했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집에서 열 명이 넘는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남자들은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고, 집을 짓고, 도로를 만들고, 성을 쌓고 전쟁을 해야만 했다. 농사, 목축, 건축, 토목, 전쟁에는 도구가 필수적이다. 성공의 열쇠는 도구가 쥐고 있었던 것이다. 힘과 조직을 아우르며 세계를 구축하거나 넓히고, 안전을 도모하는 남성들에게 도구는 정말 중요한 것이었고 도구가 역사를 바꾸어 버렸다.
휴대전화 여성들 사이에 더 빨리 전파
이렇게 의사소통과 도구가 보여주는 예는 지금 우리의 삶 속에 그대로 남아 이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 의사소통은 여성적 특성이 두드러진 본능이라고 감히 단정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기까지 재미있는 경험들을 했기 때문이다.
휴대전화가 보급되면서 그것이 학생들에게도 보편화될 때 남학생들보다는 여학생들에게 더 빨리 전파되었다. 그리고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오전 무렵 집에 전화할 일이 있어서 어렵게 전화를 하면 집 전화는 늘 통화중이었다. 우리의 어머니들께서는 대부분 가족들을 직장, 학교로 보낸 후 오전 시간에 전화를 하면서 보내셨던 것이다. 의사소통은 집이라는 공간에 한정되어 줄곧 아이를 기르고 키우면서 고립되어 있던 여자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며 일탈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유교적인 분위기에서 사회적 활동을 근본적으로 통제하던 분위기 속에서 의사소통은 어쩌면 유일한 답답증 해소방법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의사소통은 여성 우선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수다를 떤다는 것은 여성들의 행위이면서 의사소통을 위한 일이었던 셈이다. 그것이 통신수단의 발달로 인하여 변화되고 확대된 것이다.
반면에 남성들에게 도구는 본능이다. 작거나 크거나를 막론하고 기계와 같은 물건들에 정통하다. 사내아이들에게 쏘나타, SM7, 그랜저 등 자동차 모델을 가르쳐 주는 일은 없다. 그래도 그들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자동차의 모델과 연식까지 바로 알아차린다. 불과 1초도 안 걸린다. 왜 그럴까? 남자들은 인류와 더불어 도구, 기구에 대한 인식과 갈망이 유전인자에 타고 나기 때문이다. 지금도 적지 않은 남성들이 이른바 도구에 몰입되어 있다. 남성의 세계에서는 정도의 차이만 다를 뿐 기구, 도구, 물건에 대한 관심은 당연한 것이다. 같은 휴대폰이라도, 자동차라도 외양을 견주어 비교하고 장단점을 파악하며 무리하게 모델 변경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거의 남자이다.
신(新) 시각문화의 이해는 이렇게 의사소통과 도구라는 쓰임새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된다. 디자인의 시작이다.
■ 김인철 : 전주비전대 교수, 캐나다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 연구교수, 홍익대 미대 대학원 졸업(시각영상디자인)
- The ASIA_N | 글, 김인철 | February 6, 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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