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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문화,체육,탐방,시와 수필등) 스크랩 고궁 탐방 - 창덕궁
내가권 추천 0 조회 56 15.08.07 20: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언제 : 2015. 5. 28 (화)

어디로 : 창덕궁

날씨 : 흐림

 

 

창덕궁과 후원의 배치도

 

창덕궁은 한양의 동쪽인 응봉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왕조의 법궁 경복궁에 이어 이궁(離宮)으로 지은 두 번째 궁궐이다.

이궁은 나라에 전쟁이나 큰 재난이 일어나

공식 궁궐을 사용하지 못할 때를 대비하여 지은 궁궐을 말한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이웃한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조선의 왕들 중에는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좋아한 왕이 많았다.

 

창덕궁은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난 뒤 고종 때 중건하기까지 270여 년 동안 폐허로 남아

실제로 사용 기간은 조선 전기와 말기를 합쳐 250여 년에 불과하다.

반면에 창덕궁은 건립 이후 임진왜란 당시 소각되었던 시기를 제외하면

520여 년 동안 조선 왕조의 궁궐 기능을 지속적으로 수행했던 의미 있는 곳이다.

창덕궁은 자연스럽게 조선 왕조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창덕궁은 조선 왕조의 3대 태종 때에 창건되었다.

왕자의 난으로 왕위에 오른 2대 정종은 수도를 한양에서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옮겼고,

왕위에 욕심이 없던 정종은 즉위 2년만에 동생 이방원(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불안한 정치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태종은 한양으로 환도를 추진하였으나,

형제의 난이 일어났던 경복궁으로 돌아가는 게 께름칙했을 것이다.

그래서 경복궁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세우도록 했고 그로 생겨난 게 창덕궁이다.

 

창덕궁은 가장 한국적인 모습을 갖고 있는 궁궐이다.

조선 궁궐 건축은 기본적인 구성 원리를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였다.

중국의 궁궐들은 일반적으로 평지에 반듯한 사각형의 구성을 취한다.

매우 정형적이며 권위적이다.

조선 왕조의 법궁인 경복궁도 평지에 주요 건물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그에 반해 창덕궁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 공간 배치를 하고 있다.

 

창덕궁은 일부러 터를 만들어 건설한 궁궐이 아니라 자연 지형의 연장선상에서 지어졌다.

건물들이 일직선 상으로 배치되지 않고, 자연 지형과 공간의 크기에 따라

제각기 다른 형태로 저마다의 위치에 세워졌다.

창덕궁은 산자락을 따라 건물들을 골짜기에 안기도록 배치하여

한국 궁궐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하고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중국의 조경은 궁궐의 뒤편이나 옆에 산과 바다를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는다.

일본은 작고 오밀조밀하게 인공으로 꾸며서 자연을 흉내낸다.

그러나 한국의 조경은 인공이 자연 속으로 들어가고 자연을 인공 속으로 끌어들인다.

자연에 기대면서 자연을 다치지 않고, 자연에 안기면서 자연에 짓눌리지 않는다.

특히 북쪽에 있는 창덕궁 후원(비원)은 인공 시설물과 건물들이 전혀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자연과 건축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모두 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돈화문()은 창덕궁 서남쪽 모서리에 있는 창덕궁의 정문이다.

서울의 궁궐 정문 중 가장 당당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는 돈화문은 나이 또한 가장 많다.

 

창경궁의 정문 홍화문이 반듯하고 아담하여 여성적 아름다움으로 비유되고 있다면, 

큰 규모와 단순한 구조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돈화문은 중후한 남성적 품격이 느껴지는 문이다.

 

돈화문에 서면 경복궁이나 창경궁과 달리 정문에서 정전을 볼 수 없다.

건물들이 일직선 상으로 배치되지 않고, 자연 지형과 공간의 크기에 따라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창덕궁 출입문인 돈화문에서 인정전으로 들어오다 보면 금천교 북쪽으로 궐내각사라는 관청 지역을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 관청은 궁궐 밖에 있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궐내각사는 왕의 일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곳이어서 궁궐 안에 있었다.

 

궐내각사에는 왕과 왕족의 의료를 담당했던 약방(내의원)을 비롯하여

왕의 칙령과 문서, 경서, 사적을 관리했던 옥당(홍문관), 오늘날 국립 도서관에 해당하는 규장각 등이 있었다.

 

인정전과 궐내각사 사이에는 선원전이 있다. 선원전은 역대 왕들의 초상화를 모셔 두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유교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왕조에서는 조상을 모시는 선원전을 신성하게 여겼다.

 

 

 

돈화문을 들어서서 북쪽으로 조금 오르면 서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던 명당수 금천()이 있고 그 위에 금천교()가 놓였다.

금천교는 창덕궁에서 가장 오래된 건조물로서 600년이라는 긴 시간이 묵직하게 쌓여 있는 다리이다.

 

금천교를 건너면 바로 진선문()이다.

진선문을 들어서면 왼쪽(북)에 인정전의 정문인 인정문()과,  정면(북동쪽)으로 숙장문()이 보인다.

 

 

 

 

인정문에서는 특이하게도 왕의 즉위식이 열렸다. 물론 대부분의 왕들은 정전인 인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효종, 현종, 영조 등은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인정문의 앞마당을 유심히 살펴보면 사각형이 아니라 사다리꼴 모양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인정문 앞마당이 이런 모습을 갖게 된 것도 자연환경을 그대로 활용하여 건축했기 때문이다.

 

 

 

 

인정문을 들어서면 창덕궁의 법전인 인정전(殿)이 있다.

이곳은 왕이 신하들로부터 조하를 받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등 공식적인 국가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같은 곳이다.

인정전은 겉으로 보기에는 2층이지만 실내는 하나로 트여 있다.

 

 

 

 

조선의 왕들은 신하들과 수시로 만나 나랏일을 논의했는데, 나랏일을 논의하던 장소를 편전이라고 한다.

선정전이 바로 편전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선정전은 창덕궁에서 유일하게 지붕이 청색 기와로 되어 있다.

훗날 희정당으로 편전을 옮긴 이후에 선정전은 죽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선정전 동쪽에는 희정당이 있다.

희정당은 초기에는 왕이 잠을 자던 개인적인 공간으로 사용되다가 조선 후기에 편전으로 사용한 건물이다.

 

마지막 복원할 때 일본인들이 경복궁의 강녕전을 옮겨 와 건축했다.

희정당은 양탄자와 유리 창문, 서양식 의자 등 조선 말기에 들어온 서양 문물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희정당 뒤편에는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되었던 공간인 대조전이 있다.
대조전은 왕과 왕비의 침실이자 왕자와 공주의 탄생지였고, 어린 왕자와 공주를 교육시키던 곳이기도 했다.

 

'크게 만든다'는 뜻의 대조전이란 이름은 국가의 기틀을 이어 가는 세자를 큰 그릇으로 만들어야

국가와 백성이 복을 누릴 수 있다는 의미에서 지었다고 한다.


대조전에는 처음에 왕비가 머물다가 훗날 왕과 왕비가 이곳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중앙 마루를 중심으로 왕은 왼쪽 방을, 왕비는 오른쪽 방을 사용했다.

 

대조전은 1910년 마지막 어전 회의가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이 어전 회의에서 우리나라의 주권을 일본에 빼앗긴 '한일병합'이 결정되었고,

 

519년이란 긴 역사를 자랑했던 조선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대조전은 우리 민족에게는 참으로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왕세자가 머물던 성정각은 아름다운 2층 누각으로, 원래 1층 건물이었는데 훗날 동쪽 부분만 2층으로 늘려 지었다고 한다.

성정각은 일제 강점기에는 내의원으로 사용되었다.

 

누각의 동쪽으로는 '樓'(희우루), 남쪽에는 '亭'(보춘정)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성정각 뒤편의 '熙'(집희)란 편액을 단 건물은 왕이 신하들과 만나고 경연을 열던 곳이다.

 

 

 

 

 

 

궁궐 동쪽 끝에는 낙선재라는 소박한 건물이 있다.

낙선재는 헌종이 후궁을 위하여 마련한 공간이다. 

 

실용주의자로 검소했던 헌종은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자신의 서재와 사랑채로 사용할 건물에 단청을 생략하였고, 대신 창살과 벽을 아름다운 문양으로 장식했다.

낙선재에는 비운의 마지막 황태자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던 영친왕이 머물기도 했다.

고종의 7번째 아들이었던 영친왕은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일본식 교육을 받았고

 

일본 왕족인 이방자 여사와 결혼했다.

이방자 여사는 독립 후 1963년 귀국하여 이곳에서 살다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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