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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정조 41권, 18년(1794 갑인 / 청 건륭(乾隆) 59년) 12월 8일(신유) 2번째기사영남 위유사 이익운이 장계하다 |
영남 위유사 이익운(李益運)이 장계로 아뢰기를,
“칠곡 부사(柒谷府使) 유진혁(柳鎭爀)은 상을 바라는 의도에서 관사를 수리한 것으로 사찰이나 민가를 모두 공해(公廨)라 칭하고 농철기에 백성들을 부려 한 장정당 사흘씩 일하게 했습니다. 또 남창전(南倉錢) 8백 냥을 억지로 부자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나서 4개월 만에 5할의 이식을 거둔 뒤 경영(京營)에서 작전(作錢)하는 것이라고 속여 보고하여 이익을 취했습니다.
김해 부사 정동신(鄭東愼)은 작년 상진곡의 가모분(加耗分)에 대해 작전(作錢)한 8백여 냥을 모두 사사로운 용도로 써버렸고, 관모(官耗) 보리 40석을 민간에게 내주고는 진맥(眞麥)으로 바꾸어 받아서 창고 관리에게 억지로 높은 값을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전 부사가 진휼하고 남은 돈 1천 7백 냥은 바로 공공의 재화인데 제멋대로 갖다 썼습니다. 본부의 무사들에게 활쏘기를 시험보여 상으로 줄 돈 1백 90냥을 내려보낸 군기를 수리한다는 핑계로 모두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통영(統營)에 이전하는 곡식을 바칠 때에도 축난 것을 보충한다고 칭하고는 민호(民戶)에서 거둔 조미(租米)가 4백 석이나 됩니다. 심지어는 총애받는 기생이 원망을 불러일으키고 호를 뽑으라는 윤음을 덮어두고 반포하지 않기까지 하였으니, 모두 극도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울러 파출하고, 그 죄상을 유사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합천 군수(陜川郡守) 황운조(黃運祚)는 가는 곳마다 혼모하고 일처리가 분명하지 못하여 아전들의 포흠을 살피지 못하고 진휼 정사도 허술한 점이 많습니다. 부득이 한결같이 파출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해조로 하여금 대임자를 각별히 골라 임명하여 말을 주어서 내려보내게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6책 530면
【분류】 *행정(行政) / *인사(人事)
22.정조 42권, 19년(1795 을묘 / 청 건륭(乾隆) 60년) 5월 8일(무오) 1번째기사영남에서의 진휼을 끝마치다 |
영남에서 진휼(賑恤)을 행하였는데 1월부터 시작해서 이때에 이르러 끝마쳤다.【우병영(右兵營)·좌수영(左水營)·좌수우후영(左水虞候營)· ☞이하중략함. 초계군(草溪郡)·영천군(永川郡)·흥해군(興海郡)·양산군(梁山郡)·곤양군(昆陽郡)·합천군(陜川郡)·금산군(金山郡)·개령현(開寧縣)·의령현(宜寧縣)· 삼가현(三嘉縣) · 예천군(醴泉郡) · 비안현(比安縣) · 진보현(眞寶縣) 등 고을과 송라(松羅) · 자여(自如) · 장수(長水) · 김천(金泉) · 성현(省峴) · 황산(黃山) · 소촌(召村) 등 역(驛)과 부산(釜山) · 다대(多大) · 가덕(加德) · 미조(彌助) · 귀산(龜山) · 포이(包伊) · 두모포(豆毛浦) · 관운(關雲) · 서평(西平) · 지세(知世) · 제포(薺浦) · 옥포(玉浦) · 평산(平山) · 영등(永登) · 당포(唐浦) · 사량(蛇梁) · 안골(安骨) · 조라(助羅) · 천성(天城) · 가배(加背) · 율포(栗浦) · 삼천리(三千里) · 신문(新門) · 남촌(南村) · 구소비(舊所非) · 청천(晴川) · 장목(長木) · 포항(浦項) · 적량(赤梁) · 금오(金烏) · 독용(禿用) 등 진(鎭)과 진주(晋州) 감목관(監牧官) 등을 대상으로 기민(飢民) 1백 42만 4천 8명에게 각종 곡식 10만 5천 4백 7석(石)을 나누어 진휼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67장 A면
【영인본】 46책 574면
【분류】 *구휼(救恤)
23.정조 44권, 20년(1796 병진 / 청 순치(順治) 1년) 5월 8일(임자) 2번째기사장재곤이 경상도 13개 읍의 농지화 가능성을 말했으나, 거짓말이 드러나다 |
간민(姦民) 장재곤(張載坤)이란 자가 용동궁(龍洞宮)에 고하기를, “영남과 호남의 경계에 있는 지리산에서 샘물이 솟아나와 긴 강을 만들고, 그 강이 곧장 진주(晉州)로 흘러가 다시 김해(金海)에 이릅니다. 그런데 한번 장마가 지면 함안(咸安)·창원(昌原)·초계(草溪)·영산(靈山)·양산(梁山)·현풍(玄風)·김해(金海)·칠원(漆原)·의령(宜寧)·창령(昌寧)·밀양(密陽)·진주(晉州)·성주(星州) 등 13개 고을의 강에 인접한 토지가 모두 침수되어 한 포기도 수확할 것이 없게 됩니다.
이 강 상류에는 진주의 광탄(廣灘)과 지소두(紙所頭)라는 곳이 있는데, 양쪽 강안이 가파른 절벽이고 지세가 좁고 낮으며 중앙에 우묵한 곳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부터 물길을 뚫어 강물의 방향을 돌려 사천(泗川)의 바다로 흘러가게 한다면, 그 형세가 마치 병을 거꾸로 세워 쏟아붓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곳은 바다와의 거리가 25리에 불과하고 뚫고 소통시킬 곳도 한 마장(馬場)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길을 뚫은 뒤에 지소두 아래에 제방을 쌓아 물이 범람하지 못하게 한다면 13개 읍의 허다하게 침수되던 곳이 장차 훌륭한 농지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비변사가 본도에 공문을 하달하여 물으니, 경상도 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이 장계하기를,
“보좌관을 보내 특별히 사정을 탐색하고 고을원들을 엄하게 경계하여 착실히 살펴보게 한 결과, 지역의 형세와 백성들의 뜻이 건의한 자의 말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지금 광탄에 제방을 축조한다 하더라도 낙동강의 하류는 그대로 있고, 지소두의 목에 물길을 뚫는다 하더라도 조곡(助曲)의 지맥(地脈)이 점점 높아지게 되면, 예전의 포구는 침수지의 가감이 없어 새로이 튼 물길은 유리하게 유도하기 어렵게 됩니다. 더구나 두류산(頭流山) 남쪽에서 발원한 물이 멀리 광탄에까지 흘러오는 과정에 절벽과 산록이 서로 뒤엉키면서 물살이 매우 빨라지니, 지금에 장정들의 힘을 빌어 하류를 막고 우묵하게 들어간 곳으로 선회하는 물살을 유도한다 하더라도, 한번 여름의 호우를 당하여 상류의 물이 급하게 불어나게 되면, 그 형세가 틀림없이 제방이 터지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이 제방을 쌓기 전보다 더 극심할 것입니다. 그리고 해읍의 성지(城池)가 강변의 아래에 위치하기 때문에 범람하는 사태는 본래 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다시 지소두에서 물길을 뚫을 만하다는 곳에 대하여 말하면, 그곳은 바다에서 30리의 거리에 있으며 땅의 형세가 점점 높아져서 물길이 왕왕 막히고 있는데, 실로 13개 고을의 백성으로 그 땅을 깎아 평평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가 13개 고을이 혜택을 입는다고 한 것은, 함안 등 9개 고을은 남강(南江)의 하류에 위치하고 있으니 혹 그럴 수 있겠다고 하겠으나, 성주 등 네 고을은 낙동강 상류에 있어 애당초 논의할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장재곤의 성명은 호적에 실려 있지 않으며 행동이 거의 허황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수본(手本)을 보고서 일의 형세로 유추하건대 지극히 허황하다는 것을 어찌 몰랐겠는가. 해궁(該宮)의 사체는 다른 궁방(宮房)과는 특별하다. 해도에 물어보지도 않고 지레 먼저 결정한다는 것은 소중한 일을 소중하게 여기는 뜻이 없는 것이다. 비록 글을 만들어 판하(判下)하였더라도 해도의 장계를 받아 본 뒤에 처치하려 하였다. 그런데 지금 조사하여 올린 장계를 보니 요량했던 것에 벗어나지 않는다.
근래에 이러한 간교한 일의 폐단에 대하여 얼마나 엄중히 경계했던가. 이른바 ‘고발하는 자에 대하여는 네 번 고발하면 한 차례 상을 내린다.’는 법을 시행하지 말게 했다면 감히 상언(上言)하거나 정소(呈訴)할 수 있었겠는가. 백성들의 습속이 가증스러우나 간사한 백성들을 어찌 다 논하겠는가. 당해 차지(次知) 중사(中使)는 내시부로 하여금 각별히 엄중 조사하게 하고 앞으로 다시 이런 허황된 일에 대한 수본(手本)을 올릴 경우에는 해당 중사에게 등급을 올려 엄중 처치하는 법을 시행하라. 이러한 뜻을 해도에 지시하여 즉시 13개 고을의 수령에게 통지하게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6책 650면
【분류】 *과학(科學) / *농업(農業) / *정론(政論) / *행정(行政)
24.정조 48권, 22년(1798 무오 / 청 가경(嘉慶) 3년) 5월 7일(경오) 1번째기사영남에서 기민을 제휼하는 일을 마치다 |
영남에서 기민을 진휼하였는데, 정월부터 시작하여 이때에 이르러 그 일을 마쳤다.【공진(公賑)으로는 창원(昌原)·상주(尙州)·대구(大邱)·선산(善山)·인동(仁同)·칠곡(漆谷)·초계(草溪)·함안(咸安)·하양(河陽)·용궁(龍宮)·청하(淸河)·함창(咸昌)·현풍(玄風)·영산(靈山)·창녕(昌寧)·경산(慶山)·기장(機張)·비안(比安)·웅천(熊川)·자인(慈仁) 등의 읍(邑)과 제포(薺浦)·서평(西平)·안골(安骨)·천성(天城)·신문(新門)·남촌(南村)·청천(晴川)·금오(金烏) 등의 진(鎭)과 송라역(松蘿驛) 등을 진휼했는데, 기민(飢民)이 총 36만 4백 78명에 진곡(賑穀)은 2만 6천 1백 90석 남짓 들었다. 그리고 사진(私賑)으로는 진주(晋州)·김해(金海)·밀양(密陽)·동래(東萊)·흥해(興海)·고성(固城)·진보(眞寶)·연일(延日)·장기(長鬐)·사천(泗川)·칠원(漆原) 등의 읍과 부산(釜山)·다대포(多大浦)·적량(赤梁)·귀산(龜山)·포이(包伊)·포항(浦項) 등의 진과 자여역(自如驛) 등을 진휼했는데, 기민이 총 8만 2천 1백 53명에 진곡은 5천 3백 61석 남짓 들었다. 그리고 좌병영(左兵營)·우병영(右兵營)·좌수영(左水營)·우수영(右水營)·경주(慶州)·안동(安東)·성주(星州)·울산(蔚山)·영해(寧海)·청송(靑松)·순흥(順興)·청도(淸道)·영천(永川)·예천(醴泉)·영천(榮川)·양산(梁山)·곤양(昆陽)·합천(陜川)·금산(金山)·영덕(盈德)·의성(義城)·남해(南海)·개령(開寧)·의령(宜寧)·언양(彦陽)·진해(鎭海)·지례(知禮)·고령(高靈)·군위(軍威)·의흥(義興)·신녕(新寧)·예안(禮安)·삼가(三嘉)·영양(英陽) 등의 읍과 가덕(加德)·서생(西生)·미조항(彌助項)·두모포(豆毛浦)·개운(開雲)·지세(知世)·옥포(玉浦)·평산(平山)·당포(唐浦)·사량(蛇梁)·조라(助羅)·삼천리(三千里)·구소비(舊所非)·독용(禿用) 등의 진과 유곡(幽谷)·김천(金泉)·성현(省峴)·황산(黃山)·소촌(召村) 등의 역과 울산(蔚山)·진주(晋州) 등의 목장(牧場)을 구급(救急)하였는데, 기민이 총 12만 2천 2백 2명에 진곡은 8천 7백 60석 남짓 들었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7책 86면
【분류】 *구휼(救恤)
25.정조 50권, 22년(1798 무오 / 청 가경(嘉慶) 3년) 11월 30일(기축) 1번째기사농사를 권장하고 농서를 구하는 구언 전지에 대한 배의 등 27명의 상소문 |
농사를 권장하고 농서(農書)를 구하는 윤음을 내렸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내년 기미년은 바로 선왕께서 적전(籍田)에서 친히 밭을 간 해이다. 50년 간을 임금 자리에 계시면서 온 나라를 덕으로 함육하셨는데, 대개 백성들을 위해 부지런하고 농사를 중히 여기는 것으로 정사와 교화의 근본을 삼았으며, 오래 사는 공효의 바탕으로 삼았다. 크고도 높은 공으로 크게 무궁한 터전을 닦으셨는데, 태세성(泰歲星)6938) 한 바퀴 돌아서 예전의 그 기미년이 눈앞에 다가왔으니, 나 소자가 어찌 감히 선왕께서 남기신 뜻을 공경히 이어받아 그 빛나는 위업을 만분의 일이나마 드날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농사를 지어 살아간다. 그러니 농사가 잘 되지 못하면 백성들에게 곡식이 없게 되니, 백성들이 곡식이 없으면 나라가 어찌 다스려지겠는가. 나 자신이 먹는 것은 줄일 수 있지만 백성들이 끼니를 거르게 할 수는 없으니, 백성들이 끼니를 거르는 것은 그 책임이 농사를 잘못 짓는 데 달려 있다. 농사를 부지런히 짓지 않으면 어찌 가을걷이할 것이 있겠는가.
백성들이 농사지음에 있어서는, 비록 천시(天時)를 따라야 하나 마땅히 지리(地利)를 다하여야 하며, 비록 지리에 의지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다하여야 하는 법이다. 오행(五行)이 교대로 운행하는 것을 따르고 사계절에 붙어 왕성하는 토(土)의 성질을 체득하여 흙에 의지해 농사짓는 것이 백성들의 사명(司命)인바, 밭에서 일하는 수고로움이 또한 많다. 거름을 져내는 수고와, 물을 대는 수고, 호미질하여 풀뽑는 수고, 밭갈이하는 수고, 씨뿌리는 수고, 김매고 북돋아 주는 수고, 들밥 나르는 수고, 짐승 기르는 수고가 바로 그것이다. 겨울부터 봄까지 1백 일은 족히 수고하는데다가 가을이 되어 곡식이 익으면 또 이를 베어 거두어들이는 수고와 타작을 하는 수고가 있다. 그러나 수고를 많이 하느냐 적게 하느냐에 따라 풍년이 드느냐 흉년이 드느냐가 결정되니 아, 우리 농민들이 어찌 감히 수고로움을 말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주부자(朱夫子)가 천주(泉州)와 장주(漳州)에서 관리가 되었을 때 산골에서 농민들을 위로하면서 새로 빚은 술을 마주하고 ‘곡식을 적기에 수확할 것에 대한 시[銍艾中熟之詩]’를 지었는데, 그것은 대개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고하는 자는 백성들이고 그들을 위로하는 것은 아전들이다. 백성들이 수고하고 있는데 관리들이 어찌 감히 편안히 지내겠는가.
돌아보건대 우리 나라는 산으로 덮이고 바다로 둘러쌓여 있으며 기름진 들판이 많아 본디부터 입을 것과 먹을 것이 풍족한 지역이라고 칭하여 왔다. 그런데도 농사짓는 방법에 어둡고 게으른 습속이 있으며, 권농관(勸農官)은 제 직책을 다하지 못하고 시기를 놓치고 있다. 그리하여 한번 수재나 가뭄을 만나기만 하면 입을 것이나 먹을 것이 모두 떨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어째서인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람이 제 할 일을 다하지 못하고 지리를 다 이용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농사짓는 근본은 부지런함과 수고함에 달려 있는데, 그 요체는 역시 수리(水利) 사업을 일으키고 농작물을 토질에 맞게 심으며 농기구를 잘 마련하는 것뿐이다. 이 세 가지가 그 요체인데, 그 가운데서도 수리 사업을 일으키는 것이 첫번째를 차지한다. 《주역(周易)》에서 수(水)와 지(地)가 합쳐진 것이 비괘(比卦)이고 지와 수가 합쳐진 것이 사괘(師卦)가 되는데, 이것이 정전법(正田法)의 기본 원리이다. 토질에 잘 맞게 하고자 한다면 물을 놔두고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공류(公劉)6939) 가 황무지에 살다가 황간(皇澗)을 끼고 있는 곳으로 옮겼고, 태왕(太王)6940) 이 서호(西滸) 가에 집을 지은 것이다. 그리고 농삿일에 밝은 원성(元聖)6941) 도 먼저 장인(匠人)을 두어 크고 작은 수로를 만들었으며, 이를 《주관(周官)》에 기록하였다. 위(魏)나라에는 이회(李悝)가 만든 하천이 있었고, 진(秦)나라에는 정국(鄭國)의 도랑6942) 이 있었으며, 한(漢)나라에는 문옹(文翁)의 못이 있었고 당(唐)나라에는 위단(韋丹)의 못이 있어서 물을 끌어 저축해 놓았다가 이것으로 밭에 물을 대었다. 그리하여 비록 비가 제때에 내리지 않더라도 6, 7월에 곡식들이 무럭무럭 자랐다.
그런데 지금은 제언(堤堰)에 관한 정사를 오랫동안 버려두어 제언에다 불법적으로 경작하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호남 지방의 벽골제(碧骨堤)와 호서 지방의 합덕지(合德池), 영남 지방의 공검지(恭儉池), 관북 지방의 칠리(七里), 관동 지방의 순지(蓴池), 해서 지방의 남지(南池), 관서 지방의 황지(潢池)와 같은 제언은 나라 안에서 큰 제언이라고 칭해지는데 터놓을 곳을 터놓지 않고 막을 때 막지 않아서 장마가 지나간 뒤 즉시 말라붙어 해마다 흉년이 들고 있다. 오늘날의 커다란 계책으로서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큰 제언들을 먼저 손보는 것보다 더 앞서는 일이 없으며, 이를 미루어 나가서 모든 일을 골고루 베풀어야 한다. 그리하여 여러 도로 하여금 각자 자기 관할 구역 안에서 자신들의 능력을 다 바치게 한다면 정성과 노력이 이르는 바에 따라 그 효과가 금방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수리의 효과는 토질의 적절함과 서로 잘 맞은 뒤에야 나타나는 법이다. 평평한 땅과 습한 땅, 밭두둑과 밭고랑은 각각 등급이 다르고, 늦벼와 올벼, 기장과 조는 성질이 다르며, 습한 땅에는 벼가 잘 자라고 마른 땅에는 오이를 심는 법이다. 빈(豳) 땅 사람들은 밭을 새로 일구어서 보리를 심었고, 기(岐) 땅 사람들은 잡초를 베고 밭을 갈았으며, 온(溫) 땅 사람들은 보리를 중하게 여기고 낙(雒) 땅 사람들은 벼를 중하게 여겼으니, 이는 바로 《시경(詩經)》에서 읊고 있는 것이다. 벼는 높고 건조한 땅에 심고 기장은 평평하고 비옥한 땅에 뿌리는가 하면 기름진 땅은 모두 다 담배와 차를 심는 밭이 되고 말아서 농사가 형편없게 되었고, 명산(名山)은 대부분 화전(火田)으로 일궈졌으나 곡식은 흔해지지 않고 있다. 남쪽 지방에서 잘 자라는 것이 북쪽 지방에는 적당치 않으며, 산골짜기에 잘 자라는 것이 들판에서는 잘 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남쪽 지방이나 북쪽 지방이나 농사짓는 방법이 똑같고 언덕과 습지를 구별하지 않고서 이앙법(移秧法)만을 위주로 하고 씨를 심는 자가 드무니, 세상에서는 이 두 가지 방법의 이해가 엇비슷하다고 하지만 필경에는 해로운 점이 둘일 경우 이로운 점은 한 가지가 될 뿐이다. 이에 제때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흉년이 드는데, 이는 어느 곳이나 다 그러하다.
농기구를 편리하게 이용하는 방법에 이르러서는, 우리 나라 사람들은 더더욱 어두워서 복희씨(伏羲氏)나 신농씨(神農氏) 시대 이전과 다름이 없으니 이에 대해서는 《시경》에 나오는 창고나 풀 베는 기구가 진실로 지금보다 나았을 것이다. 단지 그 가운데서 긴요한 것만 말한다면, 수차(水車)는 가뭄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고, 수레는 두 사람 몫의 일을 하기 위한 것이며, 대바구니는 곡식을 저장하기 위한 것이고, 방아는 곡식을 찧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를 사용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돌아보건대, 그 일을 제대로 해서 그 이익을 다하지 못하면서도 오히려 농사가 잘 되지 않는다느니 농사지어 보아야 굶기만 할 뿐이라느니 한다면, 이는 나무를 거꾸로 심어놓고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라는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 구공(九功)6943) 려하고 구가(九歌)로 권장하여 도롱이를 입고 논밭에서 일하는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다 각자의 힘을 다하게 하고 지혜를 다 쓰게 하여서, 밭은 개간되지 않은 곳이 없고 개간된 밭에는 씨뿌리지 않은 곳이 없으며, 씨뿌린 곳은 먹지 못하는 곳이 없게 한다면, 《관자(管子)》에 이른바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부지런한 데 달렸으니 부지런하면 굶주리지 않는다.’고 한 것과, 《위지(魏志)》에서 이른바 ‘사람들이 모두 부지런히 일하면 풍년드는 해가 자주 있을 것이다.’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 될 것이다.
내가 일찍부터 근본을 돈독히 하고 실제적인 데 힘쓰는 정사에 뜻을 두고 농서(農書)를 편찬하여 여러 주와 군에 반포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옛날과 지금은 사정이 서로 다르고 풍토(風土)가 똑같지 않으며, 가난하고 부유함을 고르게 하기 어렵고 일과 힘이 미치지 못하여서, 획일적으로 정하여 놓고 그것만을 지키게 할 수가 없었다. 대궐은 만리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사람마다 각자 좋은 방책을 진달하라. 그러면 나는 그것을 받아들여 절충해 쓸 것이니 그런즉 농가(農家)의 대전(大典)이라고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무릇 농삿일이란 위로 중성(中星)에 속하고 겉으로는 기운(氣運)과 잘 맞아야만 하는 법이다. 축월(丑月)6944) 의 중간은 대한(大寒)의 절기로서 토(土)의 기운이 처음으로 생겨나고, 미월(未月)6945) 의 중간은 대서(大署)의 절기로서 토를 습하게 하는 태음(泰陰)의 기운이 비로소 생겨나니, 축월이 미월과 더불어 상대되어서 토가 비로소 용사(用事)하는 것이다. 그런즉 이미 지나간 일은 뒤쫓기 어려움을 개탄하고 앞으로의 도움이 있기를 기대함으로써 다가오는 새해를 일으키고 농부들을 격려하는 바이다. 중요한 것은 일찍 서두르는 것이니, 어찌 새봄이 오기를 기다려 교서를 내리겠는가. 오늘은 축일(丑日)이고 내일이면 축월(丑月)이 된다. 미시(未時) 정각에는 절기가 교대로 이르니 토우(土牛)를 빚어놓고 풍년들기를 기원하기에는 지금이 바로 적기이다. 더구나 전의 공적을 일으키기를 도모하고 그때의 날과 달을 따르는 것이 실로 내가 선왕의 뜻을 우러러 이어받는 한 가지 일이 되는 데이겠는가.
아, 경외(京外)의 대소 관료와 백성들은 모두 다 모름지기 잘 듣고 알도록 하라. 농삿일에 도움이 될 만한 자신의 견해가 있으면, 상소를 올리거나 책으로 엮거나 하여, 서울은 묘당에 바치고 지방에서는 감사에게 바치라. 그리고 이속(異俗)에 빠지거나 예전 방법에 구애되지 말고, 바닷가와 산골, 기름진 땅과 메마른 땅에 맞추어서 각자 마땅한 방법을 진달하라.
사람들의 계책이 진실로 훌륭하면 능히 하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이 풍년을 내려 곡식을 많게 하여 우리 백성들이 쌀밥을 먹고 태평 세월을 누리게 된다면, 이것은 우러러 우리 선왕께서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 농정에 힘쓴 훌륭한 덕과 지극한 사랑에 부응하는 것이 될 것이며, 또 나 소자(小子)의 씨뿌리고 수확하는 데 대한 지극한 정성과 애달픈 마음을 돕는 것이 될 것이다. 내가 농정(農政)을 일으키고 농서(農書)를 한 곳으로 모으려고 하는 것은 농부들이 가을 수확을 고대하는 것보다도 더 간절하다.
내가 즉위한 지 22년 째 되는 해 축월(丑月)이 되기 하루 전날인 기축일(己丑日) 미시 정각에 교서를 내린다.”
하였다.
이에 이 구언 전지에 응하여 글을 올린 자가 27인이었는데, 충의위 배의(裵宜), 홍주(洪州)의 유학 신재형(申在亨), 전 동지(同知) 김천숙(金天肅), 대구(大邱)의 유학 유동범(柳東範), 부호군 복태진(卜台鎭), 영암(靈巖)의 유학 정시원(鄭始元), 전 감찰 이우형(李宇炯), 수위관(守衛官) 윤보(尹溥), 전 영(令) 염덕우(廉德隅), 수위관 유종섭(劉宗燮), 전 찰방 강요신(康堯愼), 전 충의(忠義) 장지한(張志瀚), 전 순릉 참봉(純陵參奉) 이상희(李尙熙), 부사과 이인영(李仁榮), 전 군수 윤홍심(尹弘心), 신계(新溪) 유생 정석유(鄭錫猷), 순장(巡將) 정도성(鄭道星), 전라 도사 김하련(金夏璉), 영월 부사(寧越府使) 이경오(李敬五), 삼가(三嘉) 유학 정응참(鄭應參), 언양(彦陽) 유학 전만(全萬), 후릉 영(厚陵令) 김응린(金應麟), 전 동지 김양직(金養直)·최세택(崔世澤), 상주(尙州) 유학 이제화(李齊華), 순안(順安) 진사 김치대(金致大)였다. 전 지평 윤재양(尹在陽) 역시 시무 상소(時務上疏)를 올리면서 농정(農政)에 대해서도 덧붙여 진달하였다. 이하중략함.
전교하기를,
“그 가운데에서도 농사철에 대해 상세히 진달한 것은 모두 일리가 있는 것들이다. 거기에서 말한 ‘우수(雨水)에는 삼밭을 갈고, 경칩(驚蟄)에는 농기구를 정비하며, 춘분(春分)에는 올벼를 심고 청명(淸明)에는 올기장을 심으며, 곡우(穀雨)에는 호미질하러 나가고 입하(立夏)에는 들깨를 심으며, 망종(芒種)에는 모시와 삼을 거두고 하지(夏至)에는 가을보리를 거두며, 입추(立秋)에는 메밀을 심고 처서(處暑)에는 올벼를 수확한다. 반드시 절기에 앞서 갈고 심으며 절기에 앞서 물을 가두며, 또한 제때에 모를 내고 제때에 김을 매준다. 모를 낸 지 20일 뒤에 초벌김을 매며, 초벌김을 맨 지 13일이 지난 뒤에 두벌김을 매며, 두벌김을 맨 지 15일이 지난 뒤에 세벌김을 매면 곧바로 추수할 때가 된다. 만약 제때를 어긴다면 곡식이 잘 자라나게 하려 해도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은, 말한 바가 형식적인 것을 벗어던지고 실제적인 것이었으니 기쁘다. 또 김을 매는 과정도 일일이 조목조목 진술하였다. 그러니 해당 고을의 수령으로 하여금 그를 특별히 권농관의 직임에 차임하고 가을 추수 뒤에 부지런함과 태만함을 고과한 뒤 감영에 보고하게 하고, 그런 뒤에 감사가 장계를 올리라고 해당 도의 감사에게 분부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7책 138면
【분류】 *금융(金融) / *상업(商業) / *출판-서책(書冊) / *식생활(食生活) / *인물(人物) / *군사-부방(赴防) / *군사-군역(軍役) / *과학(科學) / *재정(財政) / *구휼(救恤) / *향촌(鄕村) / *왕실-사급(賜給) / *향촌(鄕村) / *교통-육운(陸運) / *인사-선발(選拔)
[註 6938]태세성(泰歲星) : 목성을 말함. ☞
[註 6939]공류(公劉) : 후직(后稷)의 증손. ☞
[註 6940]태왕(太王) : 고공단보(古公亶父). 주 문왕의 조부로 처음 주나라를 세웠음. ☞ [註 6941]원성(元聖) : 이윤(伊尹). ☞
[註 6942]진(秦)나라에는 정국(鄭國)의 도랑 : 전국(戰國) 시대에 한(韓)나라가 진나라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수공(水工) 정국(鄭國)을 시켜서 진(秦)나라에 가서 대대적인 수리(水利) 사업을 일으키게 하여 진나라를 피폐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결국 진은 이 관개사업으로 관중(關中)이 비옥해져서 막대한 국력을 양성할 수 있었다. 《사기(史記)》 권29 하거서(河渠書). ☞
[註 6943]구공(九功) : 구공은 육부(六府)와 삼사(三事)를 가리키는데, 육부는 수(水)·화(火)·금(金)·목(木)·토(土)·곡(穀)을 맡은 곳이며, 삼사는 정덕(正德)·이용(利用)·후생(厚生)을 말한다.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 ☞
[註 6944]축월(丑月) : 음력 12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