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에는 전쟁의 기본 원칙을 단 한 문장으로 압축한 구절이 있다.
以正合 以奇勝.
정공(正攻)으로 맞서되, 승리는 기(奇)에서 얻는다는 뜻이다.
이 문장은 전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의 순서를 말한다.
수출을 준비하는 중소기업에게 이 문장은 낯설지 않다.
정공이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인증, 규격, 기본 요건. 해당 국가의 법과 제도를 충족하지 못하면 시장의 문턱조차 넘을 수 없다. 그래서 기업은 먼저 CE, FDA, KC, 각종 테스트와 문서 작업에 매달린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전제다. 정공은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많은 기업이 정공을 통과한 순간, 이미 승부가 시작됐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정공은 싸움의 시작일 뿐, 승부를 결정하지 않는다. 손자가 말한 승리는 언제나 ‘기’에서 나온다.
수출에서의 기(奇)란 무엇인가.
값을 더 깎는 일이 아니다. 스펙을 조금 더 올리는 것도 아니다. 기는 용도를 바꾸는 일에서 시작된다.
많은 중소기업이 실패하는 이유는 제품이 나빠서가 아니다.
“이 제품의 시장은 여기다”라는 고정관념에 스스로를 가두기 때문이다. 바이어의 질문에조차 “원래 이런 용도입니다”라고 답하는 순간, 기업은 기를 포기한다. 기는 설명에서 나오지 않는다. 재정의에서 나온다.
실패 사례는 의외로 단순하다.
국내에서 산업용 장비로 안정적인 매출을 올리던 한 중소기업이 해외 전시회에 나섰다. 바이어는 물었다. “이 장비를 소규모 사업자나 개인도 쓸 수 있겠느냐.” 그러나 기업은 곧바로 선을 그었다. “아닙니다. 이 제품은 산업 현장 전용입니다.”
기술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답변과 함께 대화는 끝났다. 바이어가 찾고 있던 것은 장비의 성능이 아니라, 새로운 쓰임새였기 때문이다. 기업은 정공은 지켰지만, 기를 포기했고, 그 시장은 다른 경쟁자에게 넘어갔다.
반면 성공 사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나왔다.
같은 종류의 제품을 가진 또 다른 기업은 같은 질문을 받았다. 이 기업은 이렇게 답했다. “원래는 산업용이지만, 유지보수가 간단해 소규모 현장이나 이동 작업에도 적합합니다.” 그리고 제품을 그대로 두고, 설명과 패키지만 바꿨다. 사용 시나리오를 ‘공장 설비’가 아니라 ‘현장 문제 해결 도구’로 재정의한 것이다.
결과는 달랐다. 가격 경쟁에 휘말리지 않았고, 유통 채널도 바뀌었으며, 바이어는 협상자가 아니라 파트너로 남았다. 기술은 같았지만, 용도가 바뀌자 시장이 달라졌다.
손자병법은 싸움을 길게 끌지 말라고 경고한다.
정공만으로 버티는 전쟁은 비용이 커지고, 결국 지친 쪽이 무너진다. 수출도 마찬가지다. 인증과 규격만으로 경쟁하는 시장은 결국 대기업과 다국적 기업의 영역이 된다. 중소기업이 그 판에서 오래 버티기는 어렵다.
그래서 수출은 제품을 파는 일이 아니라, 용도를 바꾸는 일이다.
같은 물건을 다른 문제의 해법으로 제시할 수 있을 때, 기업은 가격 경쟁에서 벗어나고 협상의 주도권을 갖는다. 이것이 손자가 말한 ‘기승(奇勝)’이다.
2026.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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