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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하고 해뜰날(1579.2013.12.8)
마20:1-16
할렐루야!
12월이 모든 것을 결산하는 달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신앙의 결산, 믿음의 결산, 헌금의 결산, 봉사의 결산, 행함의 결산’을 해야 합니다. 금년 한 해 동안 내 신앙이 얼마나 성장을 하였는지 아니면 성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병들어 활동하지 못하는 상태는 아닌지 결산을 해야 하며 또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하였는지를 결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마 25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달란트의 비유가 있습니다. 주인이 먼 곳으로 갈 때 종들에게 그들의 재능에 따라 달란트를 맡겼다가 돌아와서 회계를 하자고 하였습니다. 이때 열심히 충성스럽게 일하여 많은 이익을 남긴 종들은 칭찬과 이울러 상을 받았지만 게으르고 불평이나 원망을 하던 사람은 결국 책망을 받고 가진 것도 빼앗기고 어두움에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들은 항상 주님 앞에서 결산하는 자세로 믿음생활을 해야 할 줄 믿습니다.
또한 12월은 모든 것을 정리하는 달이기도 합니다. 금년 년 초에 작정하였던 것을 다하지 못한 것은 빨리 마쳐야 합니다. 하나님께 작정을 한 것이거나 의무감당 하지 못한 것도 갚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신23:21절‘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또 누구에게 채무진 것이 있으면 빨리 갚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을 정리하는 달이 바로 12월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 틀렸다고 체념해 버릴 것이 아니라 금년이 아직도 며칠이 남아 있으니 이 남은 기간에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마치 오늘 본문 말씀에 있는 대로 마지막 오후 5시에 포도원에 들어가 1시간만 일을 한 사람이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한 결과로 하루 종일 일한 사람과 똑같은 품삯을 받은 것처럼 남은 기간에 열심히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기 전에 마지막 전도 길 베뢰아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가르치신 목적이 바로 천국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라고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려고 하신 천국의 비밀을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2월이 되면 사람들은 공연히 마음들이 들뜨고 있습니다. 거리와 상가에는 벌서 크리스마스의 상품들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고 성탄절 노래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성탄절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 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막차를 타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일에 치이고 생활에 시달리고 시간에 쫓기다 마지막 차에 겨우 올라 탄 사람들의 심정을 알고 계십니까? 막차를 탄다는 일이 결코 기분이 좋거나 달가운 것만은 아닙니다.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은 늘 막차를 놓칠 새라 마음 졸이며 안타깝게 기다려야 합니다. 행여나 미리 떠나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과 초조가 있게 마련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도 보면 발을 동동 구르며 막차를 기다리는 한 사람의 초라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된 셈인지 앞서 지나간 차들을 다 놓쳐버리고 마지막 남은 차에 모든 기대를 걸고 하릴없이 시장터에서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그는 아침 일찍부터 노동시장에 나아와 자기를 불러 줄 사람을 애타게 찾고 있으나 정작 자신을 고용해 주는 이가 없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써줄 사람이 없는 것으로 봐서 오늘은 더 이상 기다려 봐야 소용이 없음을 잘 알고는 있지만 지금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 너무 다급하고 어려운 지라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나 저제나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려도 오지 않을 때 그 때처럼 안타깝고 괴롭고 실망스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제 하루를 접고 노동시간을 마감해야 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데도 아직 일자리를 찾지 못해서, 자기를 써 줄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며 초조히 기다리고 있는 이 사람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이제 한 시간만 지나면 일할 수 없는 밤이 찾아옴과 동시에 그가 걸고 있는 모든 기대와 희망은 수포로 돌아가 버릴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런데 보세요. 생각지도 않았던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옛말에 죽으란 법은 없다고 기다린 보람이 있었던지 마음씨 좋은 주인을 만나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을 하는 특혜를 누리게 됩니다.
1.파격적인 은혜를 받으라
우리들은 주님의 품꾼입니다. 품꾼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만 열심히 하면 정한 품삯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성실하지 못한 일꾼은 절대로 다시 쓰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 어느 때이든지 간에 항상 일꾼을 불러서 쓰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주인의 행동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히 파격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상식을 넘어선 예외적인 행동을 서슴없이 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한마디로 함축해서 표현한다면 ‘파격적’이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복이 얼마나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인가, 얼마나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또 다시 본문을 보면 자기를 써 줄 고용주를 기다리는 이 가련한 노동자의 모습과 함께,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노동자를 불러들이기 위해서 시장터로 나오고 있는 포도원 주인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드러납니다. 한 사람은 자기를 써 줄 사람을 기다리며 초조하게 시장터를 서성거리고 있고 또 한 사람은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할 사람이 혹 있을까 해서 찾아 나오고 있는 모습입니다. 주인이 일꾼을 구하러 나오는 일이 없이는 그들의 기다림은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인의 은혜가 있어 일꾼의 기다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주인은 사람 구하는 일을 단 한 번으로 그만두지를 않고 시간 시간마다 나아와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할 노동자를 찾고 있습니다. 마감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일꾼을 찾는 그의 노력은 멈추지를 않습니다. 시간에 관계없이 계속해서 찾으시는 주인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복되고 다행스러운 일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그의 고용방식이 세상적인 방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방식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노동자에게 좀 더 많은 시간 동안 일을 시키기 위해 아침 일찍 노동자들을 한번 고용하는 것으로 더 이상 뽑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이 주인은 시간 시간마다 장터로 나와서 아직도 일을 못하고 남아있는 사람들이 없는가를 살핀 다음 눈에 띄는 대로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할 것을 분부합니다. 이 주인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의 행동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는 단어가 ‘또’ 라는 말과‘다시’ 라는 말입니다. 이 주인은 또 그리고 다시 계속적으로 노동자들을 자기 포도원으로 들여보내는 일을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 두번 정도로 돌아서거나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일구월심 또 나가서 찾고 그래도 안되면 다시 나가서 찾는 등, 오로지 포도원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는데 온갖 정열을 다 기울이고 있을 따름입니다.
선택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이 주인이 아침 일찍 나가서 그때 나와 있는 사람들만 불러들여서 일을 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이후에 나온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보나마나 주인의 포도원에 들어가 일할 기회를 다 놓쳐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가 만약 처음 선택된 사람들만 불러들이고 두번 다시 다른 일꾼들을 구하려 들지 않았다면 그 뒤에 나온 사람들은 다 제외되고 말았을 거예요. 주인의 무조건적인 선택의 은혜로 말미암아 처음 온 자나 나중 온 자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주인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주인의 선택이 마냥 너그럽지 못하거나 자비롭지 못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의 선택 기준이 엄격하고 한정적이었더라면 처음 몇 사람 외에는 아무도 거기에 들어가서 일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감사하고 감사해야할 일은 이 주인의 마음씨가 한정없이 넓고 아량이 크다는데 있어요. 그는 계속적으로 장터에 나가 노동자를 찾는 대로 무조건 자기의 포도원으로 들여보내고 있을 뿐이에요. 이 은혜가 있어 이 노동자는 막차를 타고 주인의 포도원에 들어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주인의 행동이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주인이 나갈 때마다 보는 족족 사람들을 선택하여 자기 포도원으로 들여보냈다는데 있습니다. 한번 선택한 것으로 그만두지 않고 하루의 일과를 마감하는 한 시간 전까지 줄기차게 장터로 나가서 사람들을 불러 들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만약 우리를 그 때 그 시간에 불러주시기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도 여전히 장터 한 구석을 맴돌며 쓸쓸히 허송세월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주인의 포도원은커녕 그 문안에도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장터 주위를 빙빙 돌며 무위도식하며 살고 있었겠지요.
우리가 죄 가운데서 멸망의 자식으로 살아가고 있을 때 주께서 찾아오셔서 내 포도원으로 들어가서 일하라고 불러주시지 않았다면 어느 누가 주님의 포도원에 들어가기나 할 수 있었겠으며 감히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가 있었을까요? 어느 누가 이 자리에 나와서 주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릴 수가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자비로운 선택에 의한 것이었음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가대원으로 교사로 직분자로 또 선교회 임원으로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된 것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에 의한 것임을 깨달아 감사함으로 주님의 일을 감당해 나가야할 것입니다.
2.주인은 자격여부를 묻지 않았습니다.
부름 받은 사람은 그 시기가 언제이든지 간에 불러주신 주인의 뜻대로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주인의 행동이 파격적이라 말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필요한 일꾼들을 계속적으로 불러들이면서 한번도 자격여부를 묻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하기나 한 것입니까?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노동자를 택할 때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하찮은 일을 시킬 때라도 어떤 자격조건을 갖추고 있는지를 물어 봅니다. 일정한 자격이 나 요구하는 수준이 충족되어야 사람을 불러서 쓰는 것입니다.
인력시장의 풍경입니다. 제가 서울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이 어떠한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남대문에 있는 인력시장을 찾아가 본 적이 있습니다. 노동자 차림새를 하고 새벽 일찍부터 나가 과연 인력시장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팔려 나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동이 트기도 전인데 어디선가 하나 둘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일꾼을 구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우르르 다가가 그들이 내거는 조건에 귀를 기울입니다. 혹시나 누가 나를 써 주지 않을까 하여 조바심을 내며 자기 순서를 기다립니다. 제일 처음에 불려나가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지 아세요? 대부분 기술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미장이 기술, 전기 기술, 벽돌 쌓는 기술, 철 구조물을 엮는 기술 등 각분야의 기술자들을 불러서는 어디론가 데리고 가 버립니다. 사소한 기술이라도 기술이 있어야 대우를 받습니다.
두 번째로 많이 고용되는 자들이 힘센 사람들입니다. 막노동 일을 할 수 있는 건강하고 체격이 건장한 사람들을 불러 모읍니다. 세 번째로 선택되는 대상들이 누군지 아세요? 눈치가 빠른 사람들입니다. 고용주의 순간적인 판단을 읽고 상황에 따라 눈치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기회를 많이 얻게 됩니다. 기술이 없으면 눈치라도 있어야 됩니다. 그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들은 군불이나 쬐고 세상 잡담하다가 시름에 찬 얼굴을 하고 내일을 기약하며 하나 둘씩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주인에 의해 마지막으로 불리움을 받은 사람은 아마도 기술도 힘도 삶의 요령도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가진 것 배운것 아무 것도 없었기에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도 고용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세상에서 사람을 쓸 때 반드시 묻는 것이 있습니다. 기술이 있는가? 경험이 있는가? 뭐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심지어 학력, 배경, 심지어 누구를 아느냐 하는 것까지도 물어봅니다. 이들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연결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써 주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은 본문에 등장하는 이 주인이 사람을 불러 일을 시키면서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포도따는 기술이 있느냐, 힘이 있느냐 정도의 질문은 할 법도 한데 아무 말이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을 만나자마자 무조건 자기 포도원으로 들여보내고 있을 따름입니다.
자격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아십니까? 있는 사람에겐 아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다마는 어떤 자격도 갖추지 못한 모자란 사람들에게는 자격증 여부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일단 세상에서 일하려면 자격증이 있어야 합니다. 그 때문에 하나라도 더 배우고 기술을 익히고 자격증을 따려고 아우성들 아닙니까. 이 세상은 자격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일터가 보장이 되고 안되고가 결정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자격여부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백성 삼으실 때, 주님의 일꾼으로 세울 때 일일이 자격여부를 엄격히 따진다고 해보세요. 아무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실 때에 자격을 묻지 않으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주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기에 절대 부족한 나를 부르셔서 주님의 일을 맡겨주시고,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들어 주님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주님의 은혜에 대하여 얼마나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까? 원래 우리는 모두 다 형편없는 죄인에 불과했던 자들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능력이나 지혜나 자격이 있었던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가 주님의 부름을 받고 일꾼으로 선택함을 받은 것은 우리의 지나간 과거를 일체 묻지 않으시고, 어떤 자격이나 조건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무조건 써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파격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나를 써 주신 주님, 아무 자격없는 나를 불러주신 주님을 위해서 남은 시간을 충성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성도들은 우리 주님이 요구하시면 언제든지 열매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철이 아닙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내년에 열매를 맺겠습니다 라고 핑계를 할 수가 없습니다. 항상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다가 주님이 원하시고 요구하시면, 주님이 쓰시겠다면 언제든지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부르실 때 내일 하겠습니다. 내년에 하겠습니다 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당장 해야 합니다.
3.쨍하고 해뜰 날이 돌아옵니다.
송대관의 쨍하고 해뜯날 노래가 있습니다. 여러분 쨍하고 해뜰날이 돌아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쨍하고 해뜰날이 있습니다. 주님의 파격적인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다 어렵다고 하지만 주님의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쨍하고 해뜰 날이 올 것입니다. 주님의 파격적인 행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상식을 뛰어넘는 예외적인 행동은 드디어 하루 해가 저물고 임금을 계산하는 순간 극적으로 나타납니다. 8-9절까지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데나리온씩 받거늘‘이 주인이 나중 온 자부터 불러서 임금을 계산하기 시작합니다.
얼마를 주고 있습니까?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그가 아무리 열심히 일했다한들 일한 시간은 겨우 한 시간도 채 되지를 않습니다. 이 돈은 주인이 제일 처음 온 사람과 노동계약을 맺을 때 주겠다고한 임금과 같은 것입니다. 2절’저가 하루 한 데라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그러니 먼저 온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한 시간 전에 온 사람에게 저렇게 넉넉하게 주는 것을 보니 제일 먼저 와서 수고한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 많이 주겠는가 라는 기대감이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주인이 나중 온 자나 처음 온 자나 할 것 없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임금으로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처음 온 자가 가만히 있었을까요? 아니나 다를까 한 데나리온을 받아들고는 그 자리에서 불평을 털어놉니다. 우리는 처음 와서 남들보다 수고를 해도 더 수고하고 땀을 흘려도 더 많이 흘리고 애썼는데 나중 온 자들과 똑같이 주는 것은 무슨 경우냐며 따지고 드는 겁니다. 11절‘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받은 후’라고 했습니다. 매우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받기 전에 그랬다가는 주인으로부터 무슨 꼬투리를 잡힐 지 알 수가 없는 거 아닙니까. 괜히 잘못 말해 주인의 신경을 긁어 놓았다가는 국물도 없을테니까요. 그는 자기 몫을 확실히 챙겨넣은 다음 주인의 처사를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원망한다’는 말은 미완료형입니다. 계속해서 원망했다는 뜻입니다.
한번 냉정하게 따져 봅시다. 만약 나중 온 사람에게 자기보다 훨씬 적은 임금을 주었다면 그것으로 족하게 생각하고 조용히 돌아갔을 겁니다. 그들이 불평하는 이유는 단 하나 주인의 행동이 너무 은혜롭다는데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내가 더 수고하였는데, 더 공로가 많은데, 내가 일찍 왔는데, 내가 먼저 장로 되었는데, 내가 먼저 직분을 얻었는데, 내가 얼마나 많은 노동을 했는데, 내가 이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데, 얼마나 많은 헌금을 했는데 라는 공로의식이 이 사람의 머리 속에 꽉 차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써 주신 주인의 은혜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합니다. 오직 자기가 수고한 것만을 철저히 계산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가 열심히 일한 것은 단지 돈이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불러주신 주인의 은혜는 털끝만큼도 생각지 않습니다.
이 때 주인은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애초에 너와 약속할 때 한 데나리온만 주기로 하지 않았느냐’라고 크게 나무랍니다. 이 주인의 행동은 매우 파격적인 데가 있습니다. 그는 공로나 능력에 따른 차등지급의 원칙을 완전히 무시해버립니다. 자본주의적인 시장경제 원리에도 맞지가 않습니다. 그는 계약에 의하지 않는 은혜를 따라 행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은혜가 있어 나중 온 사람이 과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인은 처음 온 사람보다 나중 온 사람, 즉 아무 능력도 힘도 없어 뒤로 밀려나 있는 소외되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더 깊은 애정과 연민을 느끼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나중 오신 분 안계십니까? 막차를 집어타고 마지막에 들어오신 분은 안계십니까? 낙심하지 마세요. 결코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마세요. 우리 주님께서는 나중에 왔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자에게 더 많은 것으로 축복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처음 온 사람들이 주인으로부터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이 어떤 처지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는가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됐다, 먼저 왔다, 먼저 일했다는 자긍심과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을 뿐 주님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선한 청지기로, 복된 일꾼으로 쓰임을 받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나를 부르시고 써주시는 주님께 깊이 감사하세요. 남을 쳐다보며 내가 더 수고 했는데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있었을 때 주님이 나를 불러 주셨는가를 먼저 생각하세요. 자기를 써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가장 먼저 왔다 하더라도 제일 나중으로 밀려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처음 왔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누구보다 앞서서 선택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은혜로운 일입니까? 다른 사람 다 제쳐놓고 먼저 예수 믿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먼저 믿었다는 것이 자기 공로가 되고 주장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그 사람은 나중 된 자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축복하고 칭찬하시는가? 먼저 왔다고 큰소리 치고 자랑이나 하고 교만을 떨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몇 시에 들어왔느냐를 묻지 않습니다. 아침에 왔느냐 저녁에 왔느냐 묻지 않습니다. 얼마동안 섬겼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신앙의 경륜이나 경험이 얼마나 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언제 직분받았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주님은 주님에게 헌신한 시간부터 묻는다. 비록 종료 한 시간 전에 왔어도 자기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황송하게 생각하고 나 같은 사람에게도 이런 일을 주시다니, 나 같은 사람에게도 이런 일을 맡기시다니, 나 같이 부족하고 죄 많은 나에게도 이런 은혜를 주시다니 라는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부르심에 응답할 때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주님의 포도원에 들어와 일하게 되었든지 불러주신 것 감사하고, 일을 하면서도 감사하고, 일이 끝나고 나서도 감사하고, 날마다 기대 이상의 보상으로 채워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갈 때 주님의 더 크고 위대하신 은혜와 복이 우리와 함께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말씀 속에서 지금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할 일은 많은데 일꾼이 없어서 우리를 천국의 추수 꾼으로 품꾼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 어느 때이든지 간에 항상 일꾼을 불러서 쓰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주님이 일꾼을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일꾼을 찾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름 받은 사람은 그 시기가 언제이든지 간에 불러주신 주인의 뜻대로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이 요구하시면, 주님이 쓰시겠다면, 언제든지 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이 부르실 때 내일 하겠습니다. 내년에 하겠습니다, 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하여야 합니다.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는 그것 자체가 축복인 것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집사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권사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지금 내가 예수의 부름을 받아서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내 영혼이 구원받은 그 사실이 귀중하고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부름 받은 시간이 문제가 아니고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하였느냐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교회에서 언제 부름을 받고 언제 무슨 직분을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직분에서 얼마나 열심히 충성하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 12월이 되면 모든 교인들이 당회와 구역회에 관심이 집중됩니다. 금년에도 다음주일 예배후에 당회와 구역회를 할 예정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자신의 믿음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아서 한 줌 부끄러움이 없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계2:10절‘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런데 바꿔서 ‘주님! 면류관을 주십시오 그러면 충성을 하겠습니다’ 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충성을 하는 것이 성도의 도리입니다. 그러면 그 충성도에 따라서 상급으로 주님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난 1년 동안 얼마나 죽도록 충성을 하였습니까?
이제 2013년이 12월로 접어들어서 마지막 고비를 지나고 있습니다. 마치 한해를 하루에 비교한다면 해지기 1시간 전과 같습니다. 해지기 한 시간 전에 들어갔어도 아침 일찍 포도원에 들어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품삯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금년 한 해가 저물기 전에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충성을 한다면 주님은 반드시 처음 부름 받은 사람과 동일한 상급을 주실 줄로 믿고 지금 막차를 타고 신앙생활 하신다면 더욱더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현재는 항상 한 번밖에 기회가 없습니다. 내일이면 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바로 지금, 일하라고 주님은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내일 아니면 내년으로 미루지 말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면 반드시 하나님은 상급을 예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들은 많은 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언제부터 예수를 믿었느냐를 중요시한 것이 아니고 지금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느냐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고 또 아무리 충성을 많이 하였다고 하여도 지금 나의 신앙이 어떤 상태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의 믿음 상태가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믿음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지금 당장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면 주님 앞에 갈 수 있을는지, 아니면 지금까지 입술로만 주여! 주여! (마 15:8)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있다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외식하는 자가 되어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후 다섯 시에 포도원에 들어가서 1시간만 일을 한 사람들은 아침 6시에 들어와서 일한 사람들과 비교하여 볼 때 그 일한 양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1시간 동은 저들은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하였기 때문에 똑같은 품삯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끝까지 충성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충성이나 헌신의 개념은 1회성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마24:13절‘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우리들이 즐기는 모든 운동경기는 마지막 1초가 지나고 끝나는 종이 울릴 때까지 열심히 하여야 합니다. 아무리 이기고 있다고 하여도 방심을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역전되는 경우를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농구에서는 마지막 1초를 남겨두고 3점 슛을 날려 역전되는 경우가 있고 또 축구도 마지막 1분을 넘기지 못하고 역전골을 당하는 수도 있습니다. 야구는 9회 말에 역전 홈런을 맞아서 다 이긴 경기를 패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또 이솝의 우화 중에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토끼는 앞서가면서 거북이가 쫓아오려면 아직도 멀었으니까 나무그늘에서 한숨자고 가자고 한 것이 그만 거북이에게 지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1초라도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이제 12월을 맞이하여 금년이 다가도록 결코 방심하거나 게으름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금년이 다가도록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 앞에 부름을 받는 그 순간까지 절대로 나태하거나 게으름을 부려서도 안 되고, 방심해서도 안 되고, 또한 뒤를 돌아보아서도 안 됩니다. 좌우로 치우쳐지 말고 앞만 보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2013년이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이 순간에 우리는 바로 오늘의 소중함을 깨닫고, 열심히 충성하는 성도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풍성히 받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불레셋 나라에서 벧세메스로 수레를 끌고 가는 소들처럼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앞만 보고 달려가는 성도가 되어서 마지막까지 참고 견디어 승리하여 우리 주님이 예비하신 면류관의 상급을 받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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