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떠서 먹여준들 어찌 맛을 알겠는가”
<44> 부추밀에게 보내는 대혜선사의 답장 ①-1
[본문] 보낸 편지에 말하기를, “어린 나이에 선도(禪道)를 믿고 공부할 줄을 알았으나 만년에 알음아리에 장애가 되어서 아직 깨달아 들어가는 곳을 구하지 못하고 밤낮으로 도를 깨달을 방편을 알고자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미 지극한 정성을 보였습니다.
감히 스스로 외면하지 못하겠습니다. 조목조목에 의거하여 안건을 만들어 서로 다른 견해에 대해서 잔소리(刈�)를 조금 하겠습니다. 다만 이 깨달아 들어갈 곳을 구하는 것이 곧 도를 장애하는 알음아리입니다. 달리 무슨 알음아리가 따로 있어서 그대에게 장애가 되겠습니까?
깨달았다? 미혹하다? 분별심
자기 위에 ‘가건물’ 만드는 셈
[강설] 이 답장을 받는 주인(狀主)이 보낸 편지의 내용은 알음아리가 문제가 되어 공부에 장애가 되며, 또한 깨닫기를 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혜선사에게 알음아리의 문제와 깨닫는 길을 해결하여 주기를 바라는데 그 말 한마디에 선불교적 견해로 볼 때 큰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여 하나하나 조목을 들어가며 분석하여 주겠다는 내용이다.
먼저 깨달아 들어가기를 구하는 것이 곧 도를 장애하는 알음아리라고 하였다. 이 지적에는 선불교에서 참선납자들이 갖고 있는 불가피한 모순을 거론한 것인데,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최상의 목표로 생각한다.
이오위칙(以悟爲則)이라는 말이 있다. 즉 선불교는 깨달음으로서 법칙을 삼는다는 뜻이다. 깨달음을 목표로 하지 않고는 참선을 떠올릴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깨달음을 생각하고 기대하고 목표로 여기는 이 점이 곧 깨달음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가 된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깨달음에 대한 관념 때문에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 점 외에 달리 무슨 알음아리가 있어서 그대의 깨달음을 장애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세상에 이런 모순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궁극적 불교는 사변으로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문] 필경에 무엇이 알음아리가 되며, 알음아리는 어디로부터 오며, 장애를 입는 사람은 또 누구입니까? 다만 이 한 구절에 전도(顚倒)된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스스로 알음아리가 장애가 된다고 여기는 것이 그 하나요, 스스로 아직 깨닫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미혹한 사람을 달게 짓는 것이 그 하나요, 다시 미혹한 가운데 있으면서 마음으로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다만 이 세 가지 전도가 곧 생사의 근본입니다. 곧바로 모름지기 한 생각도 생기지 아니하여 전도의 마음이 끊어져야 비로소 가히 깨트릴 미혹이 없으며, 깨달음을 기다릴 것이 없으며, 장애하는 알음아리가 없음을 알 것입니다. 오래오래 하면 자연히 이러한 견해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강설]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이 알음아리는 무엇인가? 자기 자신이다. 알음아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역시 자기 자신에게서 온 것이다. 장애를 입은 사람도 역시 자기 자신이다. 모든 문제가 오직 자기 자신 하나뿐인데 그것을 나누어 놓고 분별을 하다 보니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깨달았느니, 미혹하다느니”라고 분별하는 것도 하나인 자기 자신위에 건립한 가건물 일뿐이다. 깨닫기를 기다릴게 무엇인가? 지금 바로 그 자리인 것을. 자기 자신 위에는 미혹도 깨달음도 장애가 되는 알음아리도 아무 것도 없는데 대혜선사는 이러한 입장을 두고 보내온 편지를 읽으니 모순이 그렇게 많이 보이는 것이다.
밥을 떠서 먹여준들 어찌 그 맛을 알겠는가. 스스로 고민하고 스스로 사유하고 스스로 바로 보는 수행을 통해서 납득이 될 뿐이다. 이어서 대혜선사는 “오래오래 하면 자연히 이러한 견해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간화선의 창시자인 대혜선사는 분명히 점수(漸修)를 주장하는 선사임을 엿볼 수 있다. 돈오돈수(頓悟頓修)만을 집착하여 고집할 것이 아니다.
[출처 : 불교신문 201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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