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22:1-4, 어려움 당한 이웃을 외면하지 말라.
20.8.26, 박홍섭 목사
신명기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당부하는 모세의 유언적 설교입니다. 신명기 강해 첫 시간에 모세의 설교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기억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첫 번째인 1:1-4:43까지는 1세대의 광야 생활을 회고하면서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를 일깨우는 언약의 소개입니다. 두 번째는 4:44-26:29절까지로 2세대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율례와 법도들을 강조하는 언약의 해설입니다. 신명기의 본론이라 할 수 있죠. 27:1절부터 마지막 34:12까지 세 번째 설교는 언약과 맹세에 근거해서 이스라엘에게 주는 경고와 축복으로 구성된 언약의 확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우리가 보는 22장부터 25장까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일상에서 이웃과의 관계를 어떻게 살아내어야 하는지를 다룹니다. 서로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다양한 주제들이 언급되지만 모두 이웃과 연관된 내용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먼저, 형제의 잃어버린 소유를 발견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합니다. 1-4절이죠. “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그것들을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또는 네가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려줄지니 나귀라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형제가 잃어버린 어떤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 본 체하지 말 것이며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 그것들을 일으킬지니라”
형제가 잃어버린 소나 양, 나귀나 의복을 발견했을 때 외면하지 말고 그것들을 끌어다가 형제에게 돌려주라고 하십니다. “찾은 사람이 임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형제의 잃어버린 짐승만 아니라 주인을 모르는 짐승이나 물건을 발견했을 때도 반드시 주인을 찾아 돌려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형제의 나귀나 소가 구덩이에 빠지거나 넘어진 것을 볼 때도 못 본 체하지 말고 일으켜서 도와주라고 합니다.
사실 이런 규례들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제8계명에 해당되는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남의 것을 훔치는 것만 도둑질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물건을 주었을 때 주인을 찾아주지 않는 것도 도둑질에 해당됩니다. 주인을 알면서도 찾아주지 않으면 당연히 그렇고 우리의 양심이 작동하고 있다면 주인을 모를 때도 수소문해서 찾아주는 것이 정상입니다.
사는 것이 바쁘고 힘들고 버거울 때는 누군가가 잃어버린 것을 발견했을 때 그 주인을 수소문해서 찾아주는 일이 귀찮아서 외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쁘고 귀찮다는 핑계로 내가 마땅히 도울 수 있는 형제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지금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상황은 알아도 도와줄 수 없는 경우가 아닙니다. 내가 조금만 신경 쓰고 마음을 내면 얼마든지 도울 수 있는 경우이고, 그런 나의 조그만 마음 씀이 형제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경우입니다.
모두가 더불어 잘 사는 사회, 함께 행복한 사회를 꿈꾸지만 왜 그런 사회가 구현되지 않을까요?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내용들이 인간들의 이기적인 욕구 때문에 지켜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주의 백성들에게 무슨 대단한 일을 명령하지 않습니다. 거창한 신앙의 목표를 말씀하시기 전에 인간의 기본도리를 지키고 상식이 통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웃의 형제가 소나 양이나 나귀를 잃어버려 힘들어하고 있을 때 내가 그것을 발견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돌려주고 형제가 잃어버린 소유를 찾은 것으로 함께 기뻐하는 것이 사람의 기본도리이며 상식입니다. 그 도리를 지키고 그 상식을 외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백성들이 만드는 공동체와 사회는 대단히 어렵고 복잡한 사회가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 통하고 이웃의 어려움을 내가 도울 수 있는 입장이라면 기꺼이 돕는 그런 사회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을 할 수만 있으면 내 가족, 내 형제, 내 동생, 형, 누나로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소나 양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형의 양이고 동생의 소라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보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보았다면 당연히 챙겨서 돌보지 않겠습니까?
짧은 본문에 ‘반드시’라는 말이 1절과 4절에 두 번 반복됩니다. ‘못 본 체하지 말라’는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내가 얼마든지 도울 수 있는 형제의 어려움을 못 본 체하지 말고 반드시 도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가난한 자를 내가 다 도우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보고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을 외면하는 것은 주의 백성들이 이웃을 대하는 마땅한 태도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문제를 다 책임지거나 간섭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오지랖을 부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 못하는 일을 하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있고, 또 형제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외면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주께 받은 생명과 은혜를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싸움과 이익과 손해의 관점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형제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 겸손과 긍휼과 자비를 나타내는 사람들로 부름 받고 있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는 점심시간이 되면 도시락을 다 꺼내어놓고 함께 먹었습니다. 그때 간혹 이런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도시락 뚜껑을 덮고 손으로 가리면서 “나는 너희들 반찬 안 먹을 테니 너희들도 내 반찬 먹지 마!”하면서 자기만 먹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어떻게 됩니까? 인간성 더럽고 재수 없는 놈으로 매장당하죠.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뻔히 보이고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을 다 귀찮아서 안 합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도 자기 일이 아니고 이익이나 돈이 되지 않으면 외면합니다. 자기 밥그릇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챙기면서 다른 사람의 밥그릇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즘 뜨거운 부동산 이슈를 보십시오. 의사들 진료 거부 사태를 보십시오. 그렇게 다 자기 반찬만 챙기는 재수 없는 사람들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이런 시대 속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누군가에게 나의 존재가 도움이 되고 필요가 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다면 헛산 것이라고 하십니다. 나이도 헛먹었다고 하십니다.
사실, 어떤 때는 자기 자신 하나 챙기는 것도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어려움이 보이지 않고 보여도 마음을 쓰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연해지면 안 됩니다. 내 삶이 퍽퍽하고 버겁고 힘겨울수록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지고 나갈 때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허락됩니다. 다 버거운 인생을 살기 때문에 더욱 서로 눈에 보이는 어려움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짓지 않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못 본 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있으므로 누군가가 도움을 받고 나 때문에 세상 살만하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상식이 통하고 배려가 있는 사람, 긍휼과 자비와 복과 고마움의 통로가 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