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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의 그 후에 라는 말씀은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 주시고 난 다음에 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만나고자 하는 예수그리스도의 걸음은 참 많이 바쁘셨습니다.
지금도 바쁘실까요?
우리는 돈 버는 일에 바쁘지만 오늘도 예수님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바쁘십니다.
성령의 음성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통하여서 오늘도 분주하게 바쁜 걸음으로 활동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여기 저기서 많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 주신 구주께서는 이제 나인이란 성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나인은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 주신 가버나움에서 남쪽으로 약 40킬로 메타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라는 말씀으로만 보아서 바로 이웃 마을로 가시는 정도로만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봉사활동이 가까운 곳을 이동 하실 때도 있었지만 먼 거리를 이동하실 때도 많았습니다.
차로 가면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걸어서 가면 얼마나 걸릴까요?
하루 종일 걸으면 40키로 걸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옛날에는 4키로 장에 걸어서 가보기도 하였습니다만 40킬로는 군대에서 말고는 걸어본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길을 걸어서 나인 성으로 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되는 거 아닙니까?
예루살렘에만도 하실 일이 많으실 것이고 가버나움 갈릴리에도 하실 일이 많으실텐데 40킬로를 걸으셔서 가시어서 말씀을 전하시는 일을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제가 안식일과 일요일에 칼을 갈아 드리고 봉침을 놓아 드리고 하면서 여기 저기 시도를 하니까 안식일과 일요일이 넘 바쁜 것 같았습니다,
한번은 일요일에는 초상이 나서 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번은 아들들이 와서 가지를 못하였고요.
대동아파트 할머니 한분이 손가락에 관절이 있어 한번 놓아 드렸는데 넘 좋다고 하시면서 좀 더 자주 맞았으면 하는 이야기를 하드랍니다.
안식일 마다 일요일 마다 봉침을 맞으실 분이 기다리고 계실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 바빠서 두 주에 한 번이나 한 달에 한 번 정도 맞도록 하고 더 맞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이곳에 오시도록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는 보는 눈이 없지만 예수께서 세상을 보실 때는 원래 가지고 계신 신성의 눈으로 보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어디서나 당신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아시면 그곳을 신성의 능력으로 가시지 않으시고 인성으로 그 길을 걸어서 가셨습니다.
그럴 이유가 있습니까?
신성을 다 비우신 구주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하여서는 신성을 사용하시면 안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땀을 많이 흘리셨을까요?
저는 40킬로를 가시면서 아주 빠른 걸음으로 바쁘게 가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인성에서 장례 행렬를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발인을 보통 아침에 많이 합니다.
이스라엘 나라도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40키로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 가셨다 하여도 당일에 다 갈 수 있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느 곳에나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쫓았습니다.
1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눅 7: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누가 동행하더니 라고 합니까?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개역 성경은 많은 을 허다 한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많은 무리와 많은 사람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나 많은 무리나 그 말씀이 그 말씀인 것처럼 보입니까?
꼭 정리를 하자면 많은 사람은 그냥 많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많은 무리는 삼삼오오로 지어 있는 많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됩니까?
장날에 한번씩 칼 갈러 갑니다. 장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붐빕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고요.
지난번에 부산 지역 장로회에서 등산이 있다고 해서 갔더니 그곳에도 정말 많은 분들이 모였습디다. 근데 보니까 삼삼오오로 다 모여 있었습니다.
교회별로 모였다 보니까 교회 별로 끼리 끼리 모였드라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나인성에 오신다는 소문을 내지 않았어도 그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예수님을 보고 싶었던 사람들이 가족이랑 친구들이랑 또 이웃들이랑 그렇게 모여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을까요?
많은 사람들과 많은 무리들을 저는 그렇게 이해를 합니다.
이제 그렇게 많은 무리와 함께 나인 성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예수님과 함께한 사람들은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 상여 행렬을 보게 됩니다.
누가는 그 죽은 자를 이렇게 소개 합니다.
눅 7: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죽은 자가 누구라고 합니까? 한 어머니의 독자요라고 하죠?
그리고 그 어머니는 누구라고 합니까? 과부라고 합니다.
그러면 무슨 말인지 여러분들도 아시겠습니까?
혼자된 여인에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어떻게 되었다고요? 죽었다.
혼자된 여인에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그 여인에게 무엇이었습니까?
오늘날은 덜 그런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 눈에는 모자 간에도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라는 개인플래이가 가족에 까지 그 영향이 미치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우리 나라도 그렇지 않았죠.
부모 특히 엄마의 생명은 자녀의 생명과 하나로 묶여 있는 듯한 그런 모습을 예전에 많이 보지 않았습니까?
2000년 전에는 더 했을까요? 아마도 엄마의 생명이 자녀의 생명이고 자녀의 생명이 엄마의 생명인 것처럼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혼자된 여인에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더 그렇습니까?
이제 40키로를 걸어서 바쁘게 오신 이유가 보이는 것 같습니까?
이들을 만나기 위하여 예수께서 그렇게 바쁘게 오신 것입니다.
가버나움에서 나인까지의 약 40키로와 하늘에서 베들레헴까지 어느 곳이 더 멀까요?
하늘에서 베들레헴까지 보다 하나님께서 사람 되어 여인의 자궁에 사람의 씨로 태어나시는 것이 더 멀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까지도 하나님께서는 멀다 하지 않으셨다.
지금은 어떨까요? 지금도 그런 일이 가능할까 하는 말입니다.
가버나움에 계시면서 나인성의 과부의 슬픔을 보신 주님께서는 지금 하늘에서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의 슬픔으로 울고 있는 사람들을 보실 수 있을까요?
시대의 소망에는 나인성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이런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소 319 “나인 성문에서 슬퍼하는 어머니 곁에 서 계시던 예수께서는 관 곁에서 슬퍼하는 모든 애곡하는 자를 주목하신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슬픔에 동정을 느끼신다. 지난날에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던 예수의 마음은 변함이 없으신 온유하신 마음이다”
2000년전 나인 성문에서 슬퍼하는 어머니 곁에 서 계시던 예수께서는 지금도 어떤 사람들을 주목하신다고 합니까?
슬퍼하는 모든 애곡하는 자를 주목하신다.
우리의 슬픔에 무엇을 느끼신다고요? 동정을 느끼신다?
나인 성문에서 슬퍼하는 어머니 곁에 서 계시던 예수께서는 사망으로 슬퍼하는 자들 뿐 아니라 영혼의 죽음을 위해 슬퍼하는 모든 어머니의 눈물도 보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눈물 같지만 사랑하는 자녀를 구원하기 위하여 흘려진 눈물을 우리를 위하여 지금도 하늘 지성소에서 탄원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다 보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더 간절한 탄원과 소원을 올려서 우리 모두의 기도가 사랑하는 가족들의 회심으로 응답받는 은혜까 우리 모두와 함께하길 축복합니다.
자녀들의 회심과 영혼의 구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흘려지는 눈물은 복이 있는 눈물들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그래 하나님께서 그 사람은 보시고 도와 주시고, 세월호와 같은 사건은 하나님께서 보시고도 모른체 하셨는가 합니다.
예천에서 일어났던 폭우로 인한 피해도 그렇습니다.
어떤 집사님은 토사가 잠자던 가슴까지 밀려와도 살았는데 어떤 집사님 부부는 두분이 같이 변을 당하시고요.
왜 하나님께서는 어떨 때는 살아 움직이시는 것처럼 보이고 어떨 때는 잠잠한 것처럼 보일까요?
여러분들은 그런 질문에 어떤 답을 드리겠습니까?
그 당시도 이스라엘 나라에 젊은 나이로 죽은 사람이 그 청년 뿐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말씀이 답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눅 4:25-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느니라”
어려운 시기에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 중에 이방 사람들이 도움을 받았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방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죠? 이방사람들이라 할찌라도 믿음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도움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도 있습니다.
계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해석은 여러분들 마음에 하나님께서 해 주시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일어나는 이런 일들을 보면서 집사람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세상 끝이 정말 이러렀는 모양이다 그러기에 준비된 사람들을 주님께서 잠 재우시는 것 같다고요.
우리가 좀 일찍 가고 좀 늦게 가고 하는 것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영원한 세월에 비하면 한 점도 안되는 시간들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준비되었느냐 준비되지 않았느냐가 문제가 아닙니까?
우리 성도님들 언제 우리의 생명이 이 세상을 떠난다 하여도 주님 오시는 날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가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이제 나인 성문 앞에서 장례 행렬을 만난 예수께서 하나뿐인 자식을 잃은 가눌 수 없는 슬픔으로 통곡하며 상여를 따르는 어머니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십니다. 13절의 말씀입니다.
눅 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어떻게 보셨다고요? 불쌍히 여시셨다. 다른 말로는 불쌍히 보셨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 30: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이곳에 말씀 중에 긍휼이라는 말씀이 불쌍히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말씀이 긴 말씀같지만 저는 이 말씀을 하나님께로 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이해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고요?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는 사람.
우리 성도님들 다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으시길 축복합니다.
사람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으려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사람은 우리에게 아무런 희망을 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으신 분이심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가 있을까요?
헌금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실까요?
안식일을 잘 지키면 불쌍히 여기실까요?
제가 예배 참여에 대하여 호소를 많이 드리지요.
성도라는 이름을 가진 백성들은 예수님을 믿기로 선택했을 때 화요일 금요일 안식일예배에 참여하겠다고 예수님과 약속한 사이입니다.
그런데 교회 직원으로 부르심을 받은 분들의 예배 참여는 기본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보기가 싫으면 참여하는 것이 꺼려집니다.
제가 하니 말라고 하는 집사람 이야기를 합니다. 다른 교회에 있을 때 목사님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설교 시간에 세상사람들이 보는 그런 내용의 책자를 들고 나와서 소개하고 인용하는 것이 너무 싫었는데 그것 때문에 목사님 자체가 부담이 되더라고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교회일을 등한히 하면 신앙에 손해가 될 것 같아서 교회를 더 열심히 다녔다고 합니다. 화요일 금요일 안식일 구도자들을 데리고 열심히 나가고 목사님 방문이 있을 때 요청하면 대부분 거절하지 않고 함께 하였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게 정상이 아닙니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볼일 있으면 나오지 않고 다른 날 갈 수 있는 일도 안식일 맞추어서 가는 일들 이제 다음에 어떤 분이 오실지 모르지만 다른 분이 오시면 그렇게 하심으로 여러분들의 신앙이 손해되는 일들을 멈추게 되길 다시 호소드립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성도님들 마음에 듣든지 아니 듣든지 교회 참여를 말씀드립니다.
그렇게 화요일 금요일 저녁마다 교회 잘 나오시면 불쌍히 여기실까요?
그런 일들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그렇습니까?
아무도 나오지 않는 교회 내가 나가지 않으면 교회가 텅빌 것 같은 마음으로 성전을 찾으시는 여러분들의 발걸음을 하나님께서는 기쁨의 제사로 받으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럼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은 어떤 사람이 받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잠 28: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어떤 자가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합니까?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우리 사랑하는 귀하신 성도님들이시여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들이 되어서 하나님께로부터 불쌍히 여기심을 받으시는 귀한 은혜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길 소원합니다.
그렇게 불쌍히 여김을 받으시고요, 여러분들이 드려지는 간절한 기도들이 응답되어서 하늘이 갈라지고 바다가 갈라지는 듯한 그런 응답을 다 경험하길 축복합니다.
누가복음 그 다음 말씀을 읽겠습니다.
눅 7: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가까이 가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장례 행렬은 예수님을 보자 아마도 멈추어 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통곡하는 어머니를 향하여 울지 말라 하시고요 상여를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관에다가 손을 대셨습니다.
관에다가 댄 손이 어떤 손입니까?
창세기 2장에는 사람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손이 나옵니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무엇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까? 흙으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입으로 하셨을까요? 발로 하셨을까요?
손으로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손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런 말씀도 보셨습니까?
시 8: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무엇으로 만드셨다고 합니까? 주의 손으로
그 주의 손이 누구의 손입니까?
요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 복음 1장을 쭉 읽어보면 이곳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하는 말씀은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지은 것이 하나도 누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합니까?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
그러니 사람을 만든 손길도 누구의 손이라는 말씀입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손이다.
지금 그 손이 무엇을 만지고 있습니까?
죽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관을 만지고 있다.
전능자에게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이 쉽겠습니까? 흙을 가지고 사람을 만드시는 것이 쉽겠습니까? 둘 다 쉽습니까?
무슨 말씀을 드리는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종이를 가지고 종이 학을 접는 것이 더 쉬울까요? 만들어진 종이학에 바람만 넣는 것이 더 쉬울까요?
예수님께 죽은 자는 흙으로 다 만들어진 사람에게 입으로 호홉을 불어 넣으시는 것 보다 더 쉬운 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그 분이 관을 붙들고 있다. 그분이 소망 없이 절망적인 사람을 잡고 있다.
그분이 인간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의 소원을 붙잡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어떤 희망이 보일까요?
어떤 희망을 보여주는지 누가복음에서 그 다음 말씀 보겠습니다.
눅 7: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말씀하신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눅 7:15-16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창세기에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어 사람되게 하셨는데 죽음 사람 살리는 일은 뭐만 하셨습니까? 말씀만 하셨다.
이것을 누가 믿었습니까? 지난번에 함께 나눈 백부장이 믿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 예수님 믿으십니까?
저는 믿음이 가질 않습니다. 그러나 저도 믿고 싶습니다.
여러분들도 믿기지 않지요? 믿어집니까? 믿기지 않습니까?
그분이 우리의 삶에 나의 생활에 손만 대시면 말씀만 하시면 변활 수 있을텐데 라는 것이 믿어 집니까? 믿어지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신 예수님 앞에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게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시103: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흙이나 먼지나 그게 그거죠?
그래도 가치를 따지자면 흙이 낫습니까 먼지가 낫습니까?
흙은 필요하지만 먼지는 없는 것이 더 나은 거 아닙니까?
누가 그렇다는 말씀입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그렇다.
그런데 그런 먼지를 누가 사랑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예수께서 사랑하셨다.
그리고 그런 먼지를 사랑하시어서 그를 사람 만들어 주시셔고 당신께서 창조주가 전증자가 사람이 되시어서 우리가 죽어야 할 그 죄로 인한 심판의 죽음을 죽으셨다?
가당찮은 말씀아닙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실 수가 있으셨는가?
그런데 사실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 주시려 하십니다.
나인 성에서 자식을 위해 통곡하였던 엄마를 불쌍히 여긴 예수께서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40키로를 땀을 흘리시며 걸어서 가셨던 예수께서 지금은 성령으로 온 천지에 충만한 몸으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도움을 받지 못하는 거 말이 되지 않지 않습니까?
예수님 시대에도 그 도움을 간절히 바랐지만 도움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막 9: 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어떤 사람입니까?
마가복음 9장 1절부터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 되시어서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말씀하시는 내용이 8절까지 기록되어 있고요.
그리고 예수님의 일행이 산에서 내려 오시니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은 제자들이 큰 무리에 에워 쌓여 곤란을 격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무리중 한 명이 예수께 달려와서 이런 말을 합니다.
막 9:17,18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난 다음 그 아버지는 이런 말을 합니다.
막 9:22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그 말을 들으신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막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제자들에게 왔지만 고침을 받지 못한 이유가 제자들의 연약함 때문이라는 것입니까? 그 아버지의 믿음이 없어서 였다는 것입니까? 아버지의 믿음의 연약함 때문이다
제자들이 어떻게 고칠 수 있겠는가 라는 사람에게 그곳에 눈에 보이게 함께하시지 않지만 함께하신 예수께서는 아무것도 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갈바리 동산에 세워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지상에 거하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약속의 징표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을 사망의 잠에서 불러 깨우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망의 잠을 자고 있는 수 많은 당신의 백성들을 깨우기 위해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목소리는 잠자는 자들의 귀에 들리게 되고 아담 이후 믿음 안에서 잠들었던 수 많은 사람들이 다시는 죽지 않을 영광의 몸으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곳에 참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하여 죽은 우리가 먼저 깨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엡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깨어 일어나라고 하는 말씀을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믿으시는 분들은 죽은 영혼가운데서 일어나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죽은 자들이 아닌 죽은 생명이 아닌 산 자들로 새로운 생명으로 예수안에서 주어진 다시 얻은 생명으로 교회를 섬기고 영혼을 섬기는 은혜가 있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우리 장유교회가 더 크게 부흥하고 성장하는 은혜가 하나님께서 정말로 사랑하시는 우리 모두와 함께하길 축복합니다.
눅 7 : 11-16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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