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으로 읽는 충무공 이순신 제독 4편
백의 종군과 복직,조선 수군 재건 행로
아들아,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행적을 손자병법으로 들여다 보고 따라가 보는 시간..
이제 1597년 7월 16일, 칠천량 해전..조선 수군이 한 싸움에서 전멸하여 흩어져버린
사상 초유의 사건이자 최악의 패전까지 다루었다.
7년 조일전쟁 동안 승전을 거듭하며 조선을 떠받치던 최고의 전력을 한번의 싸움에
모두 잃었고, 그 소식이 전해진 것은 1597년 7월 22일이었지.
선조가 조정 대신들에게 대책을 묻고 모두 답을 하지 못하니..
"대신들은 어찌하여 대답하지 않는가? 이대로 방치한 채 아무런 방책도 세우지 않을 셈인가?
대답을 않는다고 왜적이 물러나고 군사가 무사하게 될 것인가."하고 질책하고,
화(禍)는 자기가 자초해 놓고..대신들을 탓하고 있구나.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한산(閑山)을 고수하여 호표(虎豹)가 버티고 있는 듯한 형세를 만들었어야 했는데도
출병을 독촉하여 이와 같은 패배를 초래하게 하였으니 이는 사람이 한 일이
아니고 실로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고 선조가 말했지.
신하 탓도 모자라 이제는 하늘 탓을 하고 있구나.
"대체로 모든 일은 사세를 살펴보고 시행하되 요해처는 고수해야 옳은 것이다.
이번 일은 도원수가 원균을 독촉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패배가 있게 된 것이다."
독촉은 자기가 했고, 그리고 도원수 권율 장군이 자기가 한 독촉을 전했을 뿐인데..
이젠 또 그 책임을 도원수 권율에게 미루는 이 한심한 임금, 선조의 모습..
보는 사람이 다 참담하다.
어쩌면 사람이 저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이 위기 상황에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한가하게 남 탓하고 있으니..
결론은..결국 새로운 장수를 뽑아 내려 보내는 것.
충무공 이순신 제독을 전라좌수사 겸 경상,전라,충청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키고,
그의 심복인 안창군 권준 제독을 새로 충청수사에 보임하였다.
이 충무공 백의종군로와 수군재건로
이 때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무엇을 하고 있었냐면..백의종군.
당시 합천 초계의 도원수부에 있었고, 그가 칠천량 해전의 일을 안 것은 7월 18일의
일이었지. 그날 난중일기에는 통곡을 이길 수 없었다고 그 참담한 마음을 적었다.
그러나..그러고 있을 수 만은 없었지.
바로 도원수 권율 장군과 만나 대책을 숙의하고, 해안으로 가서 상황을 확인 후
수습책을 찾겠다 하여 바로 길을 떠났어.
합천 초계에서 합천 삼가로. 산청 단성. 진주 굴동마을. 사천 곤양과 하동 노량.
선조와 달리 그는 현장에서 전방의 상황을 살피고, 패잔병을 수습하고 발로 뛰었지.
위기상황 수습을 위해 그는 최선을 다해서 기민하게 움직였단다..
진주시 수곡면 원계리 손경례 가옥 (충무공 이순신 장군 삼도수군통제사 재수임지)
1597년 8월 3일 새벽에 진주 수곡 원계마을의 손경례의 집에서..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복직을 명하는 교서를 받는단다.
진주 수곡 손경례 가옥은 아들아, 너도 아빠와 함께 여러번 찾았던 곳이지.
너도 기억할 것이다.
왕은 이르노라.
어허, 나라가 의지할 바는 오직 수군(水軍)뿐인데...
흉(凶)한 칼날이 다시 번뜩여 마침내 삼도(三道)의 군사를 한 싸움에 모두 잃었으니
누가 바다 가까운 여러 고을을 지켜주리오.
한산(閑山)을 이미 잃었으니 적들이 무엇을 꺼리리오...
지난번 그대의 벼슬을 빼앗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케 한 것은,
역시 나의 모책(謀策)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거니와
이로 인해 오늘 이 같은 패전(敗戰)의 욕(辱)됨을 만나게 된 것이니
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尙何言哉)......
이제 그대를 상복(喪服)을 입은 채로 다시 기용하여 옛날같이 전라좌수사 겸
충청, 전라, 경상의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노니..
(기복수직교서 起復授職敎書)
기복수직교서
선조도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야.
이런 표현까지 써가면서 교서를 쓴 것을 보면 말이야.
그런데 이 교서를 읽다보면..선조의 진심이라기 보다는 뭔가 상황을 모면하려는 정도의
뻔뻔함이 같이 느껴져서..참 씁쓸하기도 해.
선조가 이 상황에서도, 아직도 정신 못차렸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되지.
왜냐? 원래 삼도수군통제사는 일반 수군절도사보다 한 품계 위인 종2품인데..
선조는 정3품 전라좌수사에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거든.
그러니까 선조는 어쩔 수 없이 몰려서 충무공 이순신 제독을 복직 시켰지..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다른 수사들과 같은 품계에 두어 다른 수사들이 그를 견제하기를 바랬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역시..정신 못차렸던게 분명해.
아들아, 어쨌든. 복직한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누구와는 달리 조선 수군 재건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단다.
어쨌든 수군을 재건하여 다시 일본과 싸워야 하니까..나라는 그래도 살려야 하니까.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이후 행로를 한번 따라가 보자.
구례 석주관성의 성벽
교서를 받들어 다시 복직한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1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진주를 출발해서 하동 두치, 화개를 지나 저녁 늦게 구례 석주관성에 도착하여
구례현감 이원춘 장군과 전략을 숙의했다.
8월 5일 곡성 옥과에서 군관 이기남, 정사준, 정사립과 합류하였고
8월 6일, 옥과에서 머물다 정찰 후 돌아온 송대립(宋大立,송희립의 형)을 만나
정세를 파악하고 곧바로 행로를 남으로 돌려 순천으로 향했다.
8월 9일 보성 조양창에 도착하고 10일 실종되었던 백기 배흥립이 합류한다.
11일 보성 양산항의 집에서 송희립(宋希立)과 최대성(崔大晟)을 만났고,
12일 거제현령 안위(安衛, 1563 ~ 1644)와 발포만호 소계남을 만나
그간의 사정을 보고받고 경상우수사 배설(裵楔,1551~1599)의 비겁한 행위에
분노했다.
13일 진주목의 정개산성과 벽견산성이 무너진 것을 보고받았다.
8월 17일, 장흥의 군영구미에 도착하였고 18일 장흥 회령포에 도착하였으나
경상우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로 군선을 보내지 않아 그대로 머물렀고
전라우수사 김억추(金億秋)로 하여금 군선을 모아오게 하여 인수하였다.
해남군 어란진
8월 20일 해남 이진으로 진을 이동시켰고 24일 해남 어란진에 도착하였으며
26일 군관 임준영을 만났고 왜가 해남 이진에 들어왔음을 보고받았다.
8월 27일 어란포에서 왜선 8척과 교전하여 적을 몰아내었고,
8월 29일 진도의 벽파진(碧波鎭)으로 진을 이동시켰다.
진도군 벽파진 전첩비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조선 수군 재건행로는 일본군이 추격해 오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일본군의 움직임을 기민하게 파악해 가며, 천천히 느린 속도로 전라도로
향하는 여러 고을을 샅샅이 훝어가며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조금이라도 더 군량(軍糧)과 무기를 확보하고, 새로운 군사를 충원하고,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려는 필사적 움직임이었던 것이란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승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준비는 다하고
있었던 것이지.
손자병법 군형편(軍形篇)
孫子曰 昔之善戰者, 先爲不可勝, 以待敵之可勝. 不可勝在己, 可勝在敵
(손자왈, 석지선전자, 선위불가승, 이대적지가승. 불가승재기, 가승재적)
손자가 말하기를 옛날 전쟁을 잘하는 자는 먼저 적이 나를 이길 수 없도록 만들어놓고
적을 이길 수 있을 때를 기다렸다.
적이 나를 이길 수 없도록 하는 것은 나에게 달려있고,
내가 적을 이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적에게 달려있다.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먼저 아군의 내실을 기하고 준비하며 때를 기다렸다가,
적이 느슨해지고 허점이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뜻이다.
善用兵者, 修道而保法, 故能爲勝敗之政 (선용병자, 수도이보법, 고능위승패지정)
군사를 잘부리는 자는 도의를 바르게 하고 법을 세운다. 그리하여 승패의 결정권을
가진다.
먼저 법령을 세워 군기강을 바로 하라는 의미이다.
故勝兵若以鎰稱銖, 敗兵若以銖稱鎰.(고승병약이일칭수, 패병약이수칭일)
승리하는 군사는 무거운 추로 가벼운 추를 무게 재는 것과 같고,
패배하는 군사는 가벼운 추로 무거운 추를 무게 재는 것과 같다.
勝者之戰民也, 若決積水於千仞之溪者, 形也.(승자지전민야,약결적수어천인지계자, 형야.)
승리는 백성을 하나로 결집시키는데 달려있다.
마치 천길 높은 계곡 위에 가두어둔 물이 한꺼번에 터뜨려 쏟아져 내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백성과 군사는 하나이므로,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라는 뜻이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복직하여 묵묵히 조선 수군 재건을 위한 행보를 한 것은..
바로, 우리 내부의 힘을 모으고, 적의 허점이 나타날 때를 기다린 것이며,
패배의식에 물든 군사들을 일깨우고 다잡고자 법령을 엄히하여 기강을 바로 잡고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민심을 안정시키면서 군사들의 마음까지 하나로
모으는 그런 시간이었던 것이란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약 3주의 시간을 이렇게 쓰며, 빠르게 군과 민심을 장악하고,
곧 다가올 기적의 승리를 준비했던 것이지.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