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산책] 염처경(念處經) ①
‘알아차림’의 길은 이해가 아니라 실천
“여기에 하나의 길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킨다. 이것은 우울과 한탄을 이겨내고, 깊은 슬픔과 불편한 느낌을 소멸시킨다. 이것은 진리의 길을 걷게 하고, 궁극의 해탈을 실현하게 한다. 이것은 바로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위의 경전은 『대염처경』에서 인용한 것이다. 부처님이 ‘비구들이여’ 라고 부르자, 대중은 ‘세존이시여’ 라고 큰소리로 응답을 한다. 그러자 부처님은 ‘여기에 하나의 길이 있다’고 선언한다. 성경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하나의 길이,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어두운 숲길에서 햇살을 발견하는 것처럼, 길은 늘 지금 여기에 있다. 이 현재의 ‘길’은 무엇보다도 걸어야 한다. 그것은 실천되어야 한다. 손가락에 의해서 창공의 달은 가리킬 수는 있지만, 내 앞에 놓여진 길은 걸음으로써 완성이 된다.
하나의 길(ekayana)은 하나(eka)와 길(ayana)이 결합된 낱말로 한역으론 ‘一道’나 ‘一乘’이 된다. 길이란 비유로서 이 장소에서 저쪽 장소에 이르게 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킨다. 이쪽은 우울과 한탄이며, 슬픔과 불편함이며, 저쪽은 진리이고 궁극의 해탈이다.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이끄는 수레가 바로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알아차림의 확립을 통해서, 우리의 고통은 정화가 된다.
그런데 왜 ‘하나’의 길(Ekayana)이라 하는가? 남방 상좌부의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알아차림의 확립은 두 갈래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며, 혼자서 걸어야할 길이기 때문이요, 하나의 열반에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요, 한 사람, 부처님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유일한 길(the only path)’이라고도 번역하기도 한다. 이는 교설의 독자성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배타성이 내포된 해석이다.
북방의 대승불교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해석할까? 이것은 대승불교에서 쟁점이 된, 삼승(三乘)과 일승(一乘)의 논쟁을 생각나게 한다.
삼승이란, 말씀을 듣고 걷는 성문의 길, 연기법을 관찰하는 연각의 길, 사회적인 실천을 중시하는 보살의 길, 근기에 따른 고유한 가르침의 세 가지이다. 반면에 일승은 이 모두가 귀결되는, 혹은 별도의 궁극적인 ‘하나’를 의미한다.
초창기 화엄은 삼승과 일승의 동질성을 강조할 때는 ‘동교(同敎)’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신라의 의상과 동문인 법장 이후에는 자신의 교설의 독자성을 강조할 목적으로 삼승을 벗어난 일승이란 의미로 ‘별교(別敎)’라는 용어를 더 자주 사용하였다. 이런 표현은 역시 다른 방식의 가르침, 길에 대해서 자신들의 교설이 가지는 우월성을 강조하는 배타적 성격을 반영한다.
유일한 길, 별도의 가르침, 그렇다면 선종은 어떨까? 그들도 마찬가지로 전해오는 가르침 이외에 별도의 길(敎外別傳)을 강조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면, 이 궁극의 하나는 어디로 귀결되는가? 그것은 뜰 앞의 잣나무다. 내 발밑에 분명하게 가로 놓인 가로수 길이며, 우울과 한탄을 잘라내는, 지금여기다. 하지만 그것은 길이 없는 길이기에, 정해진 하나의 길도 없는 까닭에, 모든 길로 통한다.
『무문관(無門關)』은 이렇게 말한다.
큰 길은 문이 없으니,
어떤 길도 모두 통한다.
이 관문을 뚫는다면,
하늘과 땅 사이를 활보하리라.
(大道無門 千差有路
透得此關 乾坤獨步)
인경스님은 송광사에서 출가해 전통강원을 마쳤다. 이후 동국대 선학과에서 간화선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선(명상)상담연구원 원장을 맡고있다.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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