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49. 파미르고원으로
구도승들 목숨걸고 넘었던 파미르고원
스와트평원 취재를 마무리하고 힌두쿠시산맥을 넘었다. 그 때가 2002년 5월1일. 인도대륙에 도착한 것이 2002년 3월5일이니, 한국을 떠난 지 약2개월 만에 파미르고원(총령)을 보기위해 힌두쿠시산맥 등정을 시작한 셈이다. 깊은 계곡과 높은 산, 울창한 수림을 지나 베샴에 도착했다. 짧은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달렸다. 가는 길 오른쪽은 천길 낭떠러지. 낭떠러지 밑엔 인도문명의 젖줄인 인더스강이 흐르고…. 설산(雪山)에서 내려온 흐린 물이 넘실거리며 끝 모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차창(車窓)을 통해 인더스강을 바라보며 인도대륙의 문명과 삶을 생각했다. 무수한 존재들이 인더스강에 의지해 목숨을 이어가고 문명을 일궜으리라. 불교도 이 강을 거슬러, 파미르고원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전파됐으리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강물에 애환을 띄웠을까.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 지 강물은 묵묵히 흘러가고 있었다. 생각하는 사이 다리를 건넜다. 왼쪽에서 강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강물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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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미르고원의 중국병사> |
사진설명: 중국 동진의 고승 법현스님이 인도로 갈 때 넘어갔던 해발 4934m의 파미르고원. 파미르고원엔 중국 파키스탄 국경이 있고 검문소가 있다. 취재팀이 등정한 때가 5월4일인데도 무릎깊이까지 오는 눈이 고원에 가득했다. 파미르고원을 지키고 있는 중국병사들. |
그때 “칠라스에 거의 다 왔다”고 안내인이 깨웠다. 그리고 차가 섰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안내인을 보니 내리라고 손짓했다. 안내인을 따라가니 ‘선각(線刻)마애불’이 있었다. “누가 언제 그렸는지에 대해선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고 안내인이 말했다. 그 옛날 이 길을 따라가던 구도자가 그렸는지, 이 지역에 살던 신심(信心)깊은 불자가 남겼는지 아무도 모른다. 유적 앞에 서있는 안내판에는 “4~8세기 작품”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어찌됐던 그림은 일품(逸品)이었다. 정좌한 부처님, 옆에 있는 정교한 스투파, 주변 풍경 등 모든 것이 분위기에 맞았다. 한 바위 표면에만 있는 게 아니고 여러 바위에 새겨졌는데, 보고 있노라니 이 길을 갔을 법한 구도자들이 생각났다. 아마도 그 분들이 조성했으리라.
5m높이 카르가마애불 한국 부처님과 닮아
선각마애불에 합장 배례한 뒤 다시 차를 타고 달렸다. 30분 정도 가니 큰 마을이 나왔다. 칠라스에 도착한 것이다. 곧바로 예약된 상그릴라 호텔로 갔다. 짐을 풀고, 호텔 옆을 흐르는 인더스강으로 달려 내려갔다. 가까이서 본 강물은 멀리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러웠다. 흙탕물 그 자체였다. 흐르는 강물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 모래밭에 앉았다. 강 옆에 있는 뽕나무엔 오디들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었다. 오디를 따먹고 있는데 동내 아이들이 무더기로 몰려왔다. 서로 서로 쳐다만 보았다. 어느 정도 낯이 익었다고 판단했는지 아이들이 가까이 몰려와 이것저것 뭐라고 물었다.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음날(지난해 5월2일). 다시 인더스강변을 따라 달렸다. 칠라스를 벗어나자마자 선각마애불이 여럿 있는 바위가 나타났다. 도로 양편 바위 면에 그림들이 빽빽하게 그려져 있었다. 설법하는 부처님, 선정에 든 부처님 등 각양각색이었다. 합장배례하고 다시금 카라코람하이웨이를 달렸다.
카라코람하이웨이. 1978년 6월 개통된, 파키스탄 ‘타고트’에서 중국 ‘카쉬가르’에 이르는 신(新) 실크로드다. 사실 카라코람하이웨이는 파키스탄을 대표하는 도로공사였다. 중국과 파키스탄을 단숨에 연결하는 대동맥이며, 밀월시대에 있던 중·파 양국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북쪽으로 200km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이 타고트. 타고트 마을 앞으로 흐르는 인더스강 위로 타고트교라는 긴 철교가 건립됐고, 마을 사람들은 이 다리를 ‘차이나 브리지’로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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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기트 카르가마애불. 높이 5m.> |
바로 이 타고트 마을에서 시작되는 카라코람하이웨이 공사는 주지하다시피 난공사였다. 타고트 북쪽은 80% 이상이 단애절벽(斷崖絶壁). 인더스강에 면한 협곡은 깊고 가팔라서 50도 60도, 때로는 수직에 가까운 경사로 돼 있다. 건설대원들이 다이나마이트로 암반을 깨 발판을 만들고, 다시 기계의 힘을 총동원해 노반(路盤)을 쌓아올리며 만든 고속도로가 바로 카라코람하이웨이다.
중국은 우호국인 파키스탄의 도로 건설에 인원, 자재, 기계 등 전면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완성까지 10여 년이 걸렸고, 그 사이 희생된 사람은 3000명에 달했다 한다. 하이웨이를 가다보면 여기 저기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카라코람하이웨이는 그만큼 힘든 공사였던 것이다.
도로변에 있는 희생자 추모비에 헌화한 뒤 카라코람하이웨이를 쉼없이 달렸다. 칠라스에서 출발해 3시간 정도 달리자, 힌두쿠시산맥·카라코람산맥·히말라야산맥 등 세계 3대 산맥이 만나는 지점이자, 길기트강과 인더스강이 합류하는 곳이 나왔다. 산맥이 만나는 것을 기념해 세운 기념탑에 올라 아프가니스탄 방면으로 뻗어간 힌두쿠시산맥, 파키스탄 방면으로 달리는 카라코람산맥, 인도와 중국 사이로 지나가는 히말라야산맥의 연봉(連峰)을 동시에 쳐다보았다. 옛날 구도자들이 다녔을 법한 구(舊) 실크로드가 산맥 중턱 곳곳에 그대로 있었다. “저렇게 험한 길을 어떻게 다녔단 말인가”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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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각마애불> |
사진설명: 칠라스에서 길기트로 가는 도로변 바위표면에 새겨진 부처님과 스투파. |
다시금 카라코람하이웨이를 달려 길기트에 도착하니 오후2시. 중식을 간단하게 처리하고, 유명한 ‘카르가(kargha) 마애불’을 친견하러 나섰다.
길기트 시내에서 벗어나 한적한 촌길을 달리다, 마침내 좁은 길에 들어섰다. 결국 차에서 내려 걸어야만 했다. 한참을 올라가니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높이 5m의 부처님이 보였다. 스와트에 있는 자하나바드 마애불에 뒤지지 않는 웅자였다. 균형 잡힌 몸매, 한국의 부처님과 비슷한 상호(相好) 등 모든 것이 좋았다. 높은 암벽에 새겨져 올라갈 순 없었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6세기경 조성됐다고 안내인이 설명했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책에 그렇게 나와 있다”는 답이 들려왔다.
길기트에서 1박한 뒤 훈자로 출발했다. 길기트강을 건너자 카라코람하이웨이 공사 중 숨진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탑이 보였다. 간단하게 예를 표하고 훈자로 내쳐 달렸다. 훈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수마을. 살구나무와 백양나무가 멋들어지게 어울린 곳이었다. 이곳에 살면 장수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해발 5000m…5월초부터 통과 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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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미르고원으로 가다 본 히말라야 연봉들> |
다음날인 5월4일. 파미르고원(쿤제랍 고개)에 올라가기 위해 새벽 7시 호텔을 나섰다. 파미르고원. 중국 동진의 고승 법현스님(317~419. 399~412 인도순례)이 중국에서 출발해 천축에 들어갈 때 지나갔던 길.
당시 파미르고원을 지나며 법현스님은〈불국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북 천축을 향해 떠난 지 1개월 만에 총령(파미르고원)산맥을 넘을 수 있었다. 겨울은 물론 여름에도 눈이 덮여있고, 또한 독룡(毒龍)이 있어 만약 그가 한번 노하면 독풍(毒風)과 눈·비를 토하며 모래와 자갈을 날리므로, 이를 만나는 자는 한 사람도 온전할 수가 없다. 그곳 사람들을 설산인(雪山人)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시쉬켓(shishket)다리와 파수(pasu)계곡을 지나갔다. 해빙기라 그런지 - 파미르고원 통과는 5월 초부터 허락된다. - 절벽에서 흘러내린 바위와 자갈들이 곳곳에서 길을 막고 있었다. 가까스로 길을 뚫고, 파키스탄 세관이 있는 소스트(sost)를 지나 마침내 금역(禁域)의 땅 파미르고원을 오르기 시작했다. 법현스님이 지나갔던 길을 우리는 거꾸로 갔다.
중국에서 인도로 가는 세 갈래 길 가운데 하나이자, 간다라에서 중앙아시아로 넘어가는 길인 쿤제랍고개. 고산병(高山病)이 걱정스러웠지만 한편으로 흥분도 됐다. 구도자들이 목숨 걸고 넘어갔던, 꿈에 그리던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에 온 몸이 떨렸다. 흥분 때문인지 머리도 아프지 않고, 숨도 차지 않았다. 쿤제랍고개의 해발은 4934m. 5000m에 육박하는데 전혀 고산병 증세가 느껴지지 않았다.
고원 정상에 올라서자 저 멀리 중국과 파키스탄 국경선이 보였고, 중국 측 초소도 있었다. 차에서 내려 걸어갔다. 국경에 가니 중국 군인들이 말을 걸어왔다. 짧은 중국어 실력으로 대답하고 “한국에서 왔다. 중국으로 넘어가지 않고 다시 파키스탄으로 돌아간다”고 대답하자, 초소로 들어가 버렸다. 파키스탄에서 국경을 넘어 중국측에 갔다가 다시 파키스탄으로 돌아왔다. 군인들이 가만히 보고 있다.
얼마나 오고 싶었던 곳이던가. 달마대사가 한 쪽 신발을 들고 넘어갔다는 총령(파미르고원). 법현스님이 독룡의 독풍(毒風)을 조심하라고 했던 곳. 막상 와보니 그 분들은 어디에도 없고, 5월 초순인데도 사방엔 무릎깊이까지 오는 흰 눈만 가득했다. 한국불교와 기나긴 인연을 맺어온 파미르고원은 그렇게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취재팀에게 속살을 보여주었다.
파키스탄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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